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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전례
▦ 우리는 오늘 독서 말씀에서 주님의 자비로운 초대를 만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의 양식은 우리의 가장 깊은
갈증을 풀어 주며 세상 것들로 채워지지 않는 허기를 가시게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그 값을 치를 수도 없는
이러한 선물을 주님께서는 거저 주신다고 전합니다.
주님의 자애에 깊이 감사하며 사랑의 선물인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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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초대를 전해 준다.
목마른 이들을 물가로 부르시는 주님께서는 돈이 없는 이들도 술과 젖을
살 수 있으며, 당신께 다가오는 이들은 살게 되리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과 자애로이 영원한 계약을 맺으실 것이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사랑과 믿는 이들의 확신을 고백한다.
그 어떤 것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다(제2독서).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라온 군중을 보시고
가여운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그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모두 배불리 먹도록 사랑을 베푸셨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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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서 먹어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5,1-3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
와서 돈 없이 값 없이 술과 젖을 사라.
너희는 어찌하여 양식도 못 되는 것에 돈을 쓰고,
배불리지도 못하는 것에 수고를 들이느냐?
들어라, 내 말을 들어라.
너희가 좋은 것을 먹고 기름진 음식을 즐기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 오너라.
들어라. 너희가 살리라.
내가 너희와 영원한 계약을 맺으리니,
이는 다윗에게 베푼 나의 변치 않는 자애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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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피조물도 그리스도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8,35.37-39
형제 여러분,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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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3-21
그때에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셨다.
그러나 여러 고을에서 그 소문을 듣고 군중이 육로로 그분을 따라나섰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고는,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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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익숙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신 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복음을 오늘 다시 듣습니다.
평소에는 무심히 지나쳤던 구절에 오래 머물렀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이 말씀에 대한 묵상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길을 보여 주신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여기서 ‘남은 조각’이라는 말과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는 말은
퍽 대조적으로 보입니다. ‘가득 차다’에서 파생된 명사
‘충만’(pleroma)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이라는 사실을,
신학생 시절 은사 신부님이 자주 강조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은총의 충만, 곧 차고 넘치는 은총 속에서
우리는 구원을 이 세상에서 미리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선은 대개 ‘남은 조각’에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 조각은 우리의 고통과 분열된 자아를 상징합니다.
하느님을 알아 뵙지 못하는 불완전한 인식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조각이나 파편에서 시작하는 것,
이는 지상에서 지속되는 삶의 조건이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른 서간에서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1코린 13,12) 볼 뿐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만나는 이는 거울에 비친 세상에서,
조각과 파편으로 다가오는 사건들에서 그것이
‘가리키는’ 충만하고 완전한 구원을 예감합니다.
보잘것없는 남은 빵 조각이 주님께서 성부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사람들에 대한 자비를 담아 친히 축복하신 구원의 양식을 반영하듯이,
조각나고 상처 받은 우리 각자의 삶은 주님께서 선사하신
충만한 구원을 비추어 줍니다. 남은 빵 조각이 광주리에 모였을 때,
그 빵 조각은 충만함으로 드러났습니다.
이처럼 공동체 안에서도 부서진 각자의 삶이 만나고 모일 때
우리의 삶은 주님의 생명을 증언하게 됩니다.
우리의 삶은 주님의 구원 은총의 작지만 빛나는 표징임을
기억하고 확신하는 것, 바로 이것이 성체성사를 닮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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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매일 미사-
♬ 아낌없이 주는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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