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흥리 고분 外

2013. 5. 31. 07:47우리 역사 바로알기

 

 

 

 

 

 

 덕흥리 고분으로 본 고구려의 강역

 

 

 

 

북경지역의 표지판-고려영촌/고구려 공식국호는 \'고려\'다

 

지나사서 『진서』권124 「모용희재기」에는 흥미로운 기록이 보인다.

"그 때 고구려가 연군(燕郡)을 침구(侵寇)하여 100여 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삼았다."『진서』권124 「모용희재기」

고구려가 후연의 연군을 공격하기 시작한 시기는 광개토태왕 14년인 서기 404년이다. 고구려가 공격한 연군은 어딘가? 지배선 교수는 『중국역사지도집-동진16국 · 남북조시대』라는 역사부도집을 근거로, 연군은 오늘날 북경이라 한다.

우리측 기록인 『삼국사기』역시 고구려의 연군침공의 가능성을 전하는 기사를 전하고 있다.

"13년 11월에 (왕이) 군사를 내어 후연(後燕)을 침범하였다."[삼국사기]권18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13년 조


광개토태왕은
북경(연군)
에 고구려군을 주둔(고려영)시키고 지나중원을 차지하였다. 이 때 광개토태왕은 모든 나라들로부터 지나지역과 만주.한반도.일본열도를 지배하는 불리웠다.

 

烈 세찰 열/세차다. 불길이 세다. 거칠다. 맹렬함. 굳세다. 위엄(威嚴). 기상이 강하고 바르다. 엄하고 맹렬한 기운

帝 임금 제/임금. 천자(天子). 하느님. 조화(造化)의 신(神).

 

 

모용선비족 연나라의 고구려 침공과 광개토태왕의 응징

 

[사료]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제16대 고국원태왕 331~371 재위기간 40년/11월, 연나라 왕 모용황이 직접 강병 4만을 거느리고 남쪽 길로 진군하였다. 모용 한과 모용 패를 선봉으로 삼고, 별도로 장사 왕 우 등으로 하여금 군사 1만 5천을 거느리고 북쪽 길로 진군하게 하여, 우리 나라를 침범하였다. 왕은 아우 고무로 하여금 정예 부대 5만을 이끌고 북쪽 길을 방어하게 하고, 자신은 약한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 길을 방어하였다.

 

이 때 모용 한 등이 먼저 와서 전투를 벌였고, 연이어 황의 대군이 도착하였으므로, 우리 군사가 대패하였다.....중략

 

모용황이 모용 한의 말에 따라 미천태왕의 무덤을 파서 그 시체를 싣고, 대궐 창고에 있는 역대 보물을 탈취하고, 남녀 5만여 명을 사로잡고, 궁실을 불태우고, 환도성을 헐어 버리고 돌아 갔다.

재위13년 봄 2월, 왕이 아우를 연나라에 보내 자신을 신하로 칭하면서 예방케 하고, 1천 건에 달하는 진기한 물건을 바쳤다. 연나라 왕 모용황이 곧 왕의 아버지의 시체를 돌려 보내고, 왕모는 그대로 남아 있게 하여 볼모로 삼았다. [끝]

 

광개토태왕은 고구려를 침공하여 미천태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신을 강탈하고 고구려 5만여명을 포로로 잡아감으로 고구려사 최대의 굴욕을 안겨 준 연나라 개국시조 모용 황의 사당이 있는 북경지역(연군)에 고구려군이 주둔하는 고려영 설치,번조선 지역은 광개토태왕 당시 고구려에 귀화하여 '소대형'이란 벼슬을 받은 연나라 관리 유주자사 진을 총독으로 삼고 다스리게 하였다.

 

[광개토태왕비문]영락 17년 5만을 출병시켜 4방에서 포위하여 후연을 궤멸시켰다.고구려를 침공했던 위나라 관구검이 통치했던 유주지역의 통치을 고구려로 귀화한 연나라 관리 진에게 맡겼다.

廣開土태왕碑文「영락 17년 정미년에 보병과 기병 5만이 출병하여 000000000에서 우리의 군사가 4방에서 적을 공격하여 베어 죽이고 쓸어 버리고 개갑 1만여령을 로획하였으며, 군수물자와 기계의 획득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돌아 오면서 사구성, 루성, 00성, 00000000성을 격파하였다. 十七年 丁未 敎遣步騎五萬 000000000師 四方合戰 斬煞蕩盡所 穫鎧鉀一萬餘領軍資器械不可稱數 還破沙溝城.婁城.00城.00000000城

    고구려는 후연을 북으로는 거란 방면에서, 남으로는 발해(渤海) 방면에서, 서쪽으로는 연나라의 유주(幽州) 방면에서(이 무렵은 연나라 유주자사 진과 13군 태수들이 광개토태왕에게 귀화한 후이다), 동으로는 북진(北鎭) 방면에서 각 포위하고 있었으므로, 고구려는 이 때 연나라을 4방에서 포위,공격하였다.

    연나라는 이 공격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고 내분이 일어나 모용희가 죽고, 모용황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잡혀 갔던 고구려 왕족 고화(高和)의 손자 고운(高雲 : 모용보가 양자로 삼음)이 왕이 되었고, 왕의 성씨(姓氏)를 연나라의 모용씨가 아닌 고구려의 고씨(高氏)를 사용하였다.

    이를 보면 이 때 연나라는 고구려의 제후국으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년 뒤인 A.D 409년에 풍발이 북연(北燕)을 세우므로서 연나라는 고구려의 세력권에서 이탈하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모용희를 제거하고 고운을 왕으로 추대한 풍발(馮跋)의 고향이 유주자사(幽州刺史) 진(鎭)과 같은 장락군(長樂郡) 신도현(信都縣)이고, 유주자사 진(鎭)이 A.D 408년 12월에 죽자 다음해 A.D 409년에 북연(北燕)을 세우고 고구려의 세력권에서 떨어져 나간 점이다.

    이를 추정해 보면 광개토태왕의 연나라 정벌 때 유주자사 진과 같은 고향인 풍발이 유주자사 진의 영향력으로 모용희를 죽이고 고운을 왕으로 추대하였다가 유주자사 진이 죽자 다음해 북연을 세우고 고구려의 세력권에서 이탈한 것으로 추정된다.


▲ 유주자사 진의 모습(평안남도 덕흥리 고분)



[광개토태왕비]"영락8년, 정예기마부대를 출병시켜 토욕(감숙성).숙신을 정벌하여 300여명을 포로로 잡아 왔다..이 때부터 토욕과 숙신은 고구려에 조공하였다."

 

유주와 영주,회.대 지역(산동지역)은 본래 단군조선부터 단군조선의 영토였다.

 

본래 유주와 회대는 번조선 관할지역이였고, 황하이남지역은 순임금에게 맡겨 다스리게 했다.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확보는 오로지 지나세력으로부터 상실한 단군조선의 옛영토를 모두 회복해야 한다는 다물(多勿 담로) 국시에서 기인했음을 알아야 한다.

  고려말 행촌 이암이 편찬한 ‘단군세기’ 고려말 인물 이암은 오늘날 고시위원장, 대통령비서실장, 국무총리, 참모총장 역임하였다. [단군세기]집필장소는 강화도 해운당 병풍바위 확인 : (사) 행촌학술문화진흥원



사료[한단고기] 단군세기 단군왕검(BC 2267) 원문

甲戌六十七年 帝遣太子扶婁 與虞司空會于塗山 갑술육십칠년 제견태자부루 여우사공회우도산
太子傳五行治水之法 勘定國界 幽營二州屬我 태자전오행치수지법 감정국계 유영이주속아
定淮岱諸侯 置分朝以理之 使虞舜監其事 정회대제후 치분조이리지 사우순감기사

갑술 67년(BC 2267) 단제께서 태자 부루를 파견하여 도산(塗山)에서 우사공(虞司空, 후에 우임금)과 만나게 하였다.

    태자는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법(法)을 전하여 주었고 나라의 경계도 따져서 정했으니, 유주(幽州)와 영주(營州)의 두 곳 땅이 우리에게 속 하였다. 또 회대(淮岱)지방의 제후들을 평정하여 분조(分朝)를 두고 이를 다스렸는데 우순(虞舜단군조선의 신하 유수의 아들 순임금)에게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 북한 덕흥리 고분 (고구려 유주자사 진 묘비) >


1) 진 묘비란 (운영자 주) ?

1976년 평안남도 덕흥리에서 발굴된 고구려 고분을 말하며 무덤주인은 유주자사 진(幽州刺使 鎭) 입니다


2) 유주자사 란 ?
    북경 북쪽 인근을 통치하던 고구려 고위관리라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즉 함경도에서 고구려 땅이었던 북경인근에 발령을 받아 여러군의 태수들을 통제한 것으로 보임
지금으로 본다면 경기도지사 정도의 직위가 아닐까 합니다

3) 북경유역까지 고구려가 진출하였는가 ?
    모본왕 시절이미 태원까지 진출한 기록이 있으며,
호태왕 비문과 사서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광개토대왕 시절에 고구려가 양자강 유역까지 진출하였음.

이는 재야나 학계나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음.
단지 재야는 공개적으로 강단은 사석에서 개인의견으로만 말하고 있음.

4) 자세한 것은
    해설란 290번 "덕흥리고분과 고구려강역의 재조명"을 참고바라며
아래에 올리는 모본왕 시절 고구려 평정지를 참고 바랍니다.
북경인근은 고구려 중심지 였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 어양은 북경 우측

< 고구려 모본왕 2년(49년) 평정지 상곡, 북평, 태원 >
    삼국사기, 후한서에 기록되어 있는 고구려 모본왕 2년(49년) 평정지역인 북평, 어양, 상곡, 태원중
중국고지도와 현지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지명은 북평, 상곡, 태원입니다.

▒ 지도상 표시


▒ 이렇게 사서와 덕흥리 고분은 고구려 강역이 북경 서쪽까지 였음을 말하고 있음에도
이러한 사실을 숨기고 있습니다.
    그러니 광개토대왕의 양자강 유역 진출을 말해 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
언젠가 재조명 되어야 할 "덕흥리 고분"의 진실에 대해 자료로 남기고자
고구려 유물전 내용중 덕흥리 고분 부분을 올립니다.
    참고바랍니다.


< 고구려 유물전 방문기 (1) 덕흥리 고분 (유주자사 진) >


































(다음은 기존 게시자료입니다)

< 덕흥리고분과 고구려강역의 재조명 >

                                                        - 출처 : 한배달 1988년 12월


















덕흥리 고분 천장 세부사진

 

 

 

 

 

 

 

 

 

 

 

 

 

 

 

 

 

 

 

 

 

 

 

 

 

 

 

사실 전 벽화의 문자에 관심이 많은 관계로 조금 클로즈업을 해서 스캔한 사진입니다.

 

사진 상태가 좋지 않은 점... 제가 손이 두꺼워서 스캔을 잘 못합니다~ 양해바랍니다

 

 

 

덕흥리 고분 해설 / 명지대학교

《평양에서 서해안의 진남포로 평야지대를 가로질러 포장도로를 신바람 나게 달렸다. 서해갑문과 남포지역 공업단지를 트럭들이 오가는 산업도로였다. 한 시간 남짓 달려 북쪽 길로 접어드니 병풍처럼 이어진 산 능선을 배경으로 대안(大安)시 무학산(舞鶴山)이 우뚝 앞을 가로막는다. 학이 춤추는 형상이다. 먼 선사시대부터 이곳의 강변을 일구고 살았던 사람들도 신령스럽게 여겼을 터이다.》

 

무학산 주변에는 많은 고구려 벽화고분이 산재해 있다. 현재 90여기의 벽화고분 중 60여기가 평양 주변에 있는데 40기가량이 무학산 일대에 집중돼 있다. 덕흥리(德興里), 대안리, 약수리, 태성리 등의 벽화고분이 산언저리를 끼고 있고, 강서대묘와 중묘가 산의 서쪽 구릉지에 자리 잡고 있다.

 

강서를 지나 용강군에는 용강대총과 쌍영총이 유명하다. 대동강 건너 남쪽 황해남도 안악지방에서는 안악1·2·3호분과 복사리 벽화고분이 발견된 바 있다. 이들 가운데 무덤 주인의 이름과 조성시기가 밝혀진 안악3호분(357년)과 덕흥리 벽화고분이 주목을 끌었다.

 

덕흥리 고분 안칸에서 앞칸으로 나가는 통로 오른쪽 그림을 필자가 직접 찍은 사진. 묘의 주인공인 유주자사의 행차를 알리는 듯 두 기병이 호령하고 있다. -사진제공 이태호 교수

 

 

●광개토대왕, 중국 랴오둥 지방에 고구려 관리 파견 증명

 

덕흥리 고분은 1976년 8월에 발굴되었다. 유주자사(幽州刺史) 진(鎭)이 77세 때인 ‘영락 18년(408)’에 숨졌다는 내용을 포함해 벽화 장면마다 먹으로 글을 써 놓고 있어, 광복 후 우리 고고학의 큰 성과로 꼽힌다. 고분의 문자 기록은 고구려에서는 드문 예로 벽화에 대한 도상(圖上)해석을 가능케 해 준다.

 

‘영락(永樂)’은 광개토대왕 시절의 고구려 연호이다. ‘유주’는 랴오둥(遼東)지방이고, ‘자사’는 지방장관으로 지금의 도지사 격이다. 이미 5세기 초 고구려가 랴오둥을 지배해 지방관을 파견했음을 알려주는 고분이다.

 

덕흥리 벽화고분은 무학산 기슭의 남쪽 자락 솔밭 언덕에 오롯하게 썼다. 반지하에 조성한 묘실은 통로가 낮아 허리를 잔뜩 굽히고 들어서야 했다. 벽화의 상태는 양호했고, 앞칸과 안칸 두 개의 방에 고구려 사람들이 가득 차 있다. 1600년 동안 벽화 속에 갇혔던 고구려 사람들이 나를 향해 마구 뛰쳐나오는 것 같다.

 

무덤 주인인 ‘진’은 부채를 들고 마치 부처님이나 도사처럼 평상에 앉아 계신다. 그 앞에는 음식을 차릴 석상(石床)이 놓여 있다. 앞칸이 제사를 지낸 공간임을 말해 준다.

 

초상화의 서쪽 벽으로는 유주에 속한 13개 고을의 수령인 태수들이 자사를 향해 상하로 도열해 있다. 남벽에는 유주자사와 관리들의 회의 장면도 보인다. 동벽은 질서 정연한 행렬도이다. 이들 모두 유주자사의 공적인 관청(官廳) 생활 장면이다.

 

궁륭(穹륭,)식으로 좁힌 앞칸의 천장에도 벽화가 빼곡하다. 천장 밑부분에는 산악과 사냥하는 사람들이 보이고, 그 위로는 신선들과 동물들이 배열되어 있다. 고구려인의 내세관을 반영한 그림이다. 비천과 신선, 사람 얼굴을 한 네발동물이나 조류, 머리가 둘인 새, 날개 달린 잉어 등 장수와 부귀를 나타내는 영물(靈物)들은 해 달 별과 함께 고구려 사람들의 하늘신앙을 읽게 해 준다.

 

앞칸과 안칸의 통로 부분은 유리로 막지 못해 회벽의 벽화 상태를 그대로 드러냈다. 회벽은 단단했고 벽화 수법을 정밀히 살필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림은 묘 주인이 저택에서 관아로 이동하는 행차인 모양이다. 소가 끄는 두 대의 수레를 호위하는 기마병과 시녀들이 상하로 각각 그려져 있다. 특히 선도 기마병을 보면 “쉬이, 물렀거라, 자사 납신다” 하고 외치는 표정에 자못 해학미가 흐른다. 단숨에 그린 붉은색과 먹의 선묘는 빠른 붓질이 느껴진다.

 

●리얼리즘 화풍으로 드러나는 고구려만의 특성

 

시신을 모시는 안칸의 벽화는 무덤 주인의 사적인 가정 생활상으로 채워져 있다. 약 3×3m 넓이의 정방형 안칸에 들어서면 바로 맞은편으로 거대한 차일이 쳐진 안에 앞칸과 같은 자세의 유주자사 진의 초상화가 있다. 그런데 의아스럽게도 부인의 자리가 비어 있다.

 

이 오른편으로는 소가 끄는 수레 상하로 긴 저고리의 주름치마를 입은 양갈래머리의 소녀와 높은머리로 올려 묶은 여인들이 보인다. 또 말을 타고 활을 쏘아 과녁을 맞히는 마사희(馬射戱) 장면, 불교의 칠보행사, 연꽃이 활짝 핀 연못, 2층 누각의 창고가 사방에 빙 둘러 배치되어 있다.

 

안칸의 천장은 네 벽면 모서리에 기둥과 목조건물의 뼈대와 불꽃무늬 등을 그려 넣어 앞칸에 비해 단순한 구성을 보여준다. 마치 목조건물의 집안에 들어앉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벽화는 관 속의 죽은 자가 생전의 생활상을 편안히 관망하도록 꾸민 것 같다. 무덤은 혼백이 살아남아 안주하는 성스러운 거처인 셈이다.

 

이렇게 4∼6세기 고구려인은 자신들의 삶과 명예를 무덤 안에 재현해 놓았다. 더욱이 중국의 그 시절과는 완연히 다른 화풍(畵風)으로 고구려의 사회상을 보여준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벽화들이 누구도 왜곡할 수 없는 우리 고구려의 살아 있는 역사를 증언해 주고 있지 않은가. 당대의 현실과 이상을 담은 고구려 고분벽화는 진정 리얼리즘 예술의 승리이다.

 

이태호 명지대 미술사학과 교수

 

▼“덕흥리 벽화는 회벽화… 강서대묘-중묘는 석벽화”▼

 

덕흥리 고분 앞에 선 필자(왼쪽)와 북한 안내원. 고분 너머 봉긋하게 솟아 있는 것이 무학산이다. -사진제공 이태호 교수

 

 

고구려 고분벽화는 크게 회벽화(灰壁畵)와 석벽화(石壁畵) 두 가지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주로 많이 활용된 기법이 회면화법이다. 벽돌이나 잡석, 또는 다듬은 돌로 묘실을 쌓고 석회를 발라 편평한 화면을 만든 다음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다. 일종의 프레스코 기법으로 가장 보편적인 벽화법이다

 

덕흥리 벽화고분에서 확인한 대로 고구려는 석회 다루는 기술이 최고였다. 최근 고구려 회벽화의 분석에 따르면, 조선시대의 예보다 불순물이 적고 순도가 높은 석회 혼합기술을 가졌다고 한다. 그런 탓에 고구려의 회벽화는 회면이 떨어진 부분을 제외하면 변색이 적고 보존상태가 좋은 편이다.

 

석면화법은 강서대묘와 중묘의 벽화처럼 너른 판석이나 반듯하게 자른 돌로 묘실을 축조하고 돌 위에 직접 그리는 방식이다. 이는 기본적으로 양질의 화강암이 산출되는 지역이라야 가능한, 고구려의 독자적 방식이다.

 

석면에 안료가 적응함으로써 며칠 전에 그린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이고, 무덤 내부의 장엄 효과도 높다. 석벽화는 회면화법보다 후대에 유행한 기법으로 고구려 후기 경제력이나 문화적 진보의 결과일 것이다.

 

 

 

 

 

 

 

 



 

고구려의 기병 ㅡ 개마무사

 

 

1. 들어가는 말
   우리는 <알렉산더>와 같은 전쟁영화에서 지축을 흔들면서 한 무리가 되어 무서운 속도로 적진을 향해 돌진하는 기병대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통쾌함을, 다른 한편으로는 전율과 공포를 느낀다. 승마장이나 경마장에서 몇 마리의 말이 보조를 맞추어 걸어가는 모습만 보아도 “아, 대단하다”는 탄성이 절로 나오는데, 이러한말이 수백 마리(아니 수천 마리)가 일거에 쇄도해 온다고 생각해 보라. 상상만 해도 아찔하지 않은가.

 

    그렇다. 접전 시 이처럼 적 진영 돌파를 주 임무로 수행한 부대가 바로 기병(騎兵)이었다. 기병은 화석연료를 태우는 내연기관이 등장하기 이전의 고대전쟁에서 가장 유일하고 확실하게 기동력을 제공하였다. 무장한 인원을 빠르게 적군에게 접근시켜서 적 진영을 교란하거나 아니면 적보다 먼저 유리한 요충지를 점령하는 역할을 하였다. 인간의 평균 키가 그리 크지 않았던 옛날에 말 위에서 무기를 휘두르는 기마병이야 말로 일반 보병병사가 대적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상대임에 분명하였다. 더구나 기마병이 마상에서 양손으로 칼이나 창을 휘두르고 갑주로 자신을 방호하고 있을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물론 우수한 말의 획득과 사육, 그리고 기마병의 훈련 등에 소요되는 엄청난 비용으로 인해 그 병력 규모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보병을 상대해서는 가히 천하무적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고고학자들은 출토된 고대 유물들을 근거로 우리에게도 북방 기마민족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주장한다.경상도 김해 지역의 고대 가야 유적지에서 출토된 유물이나 최근에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갑옷 유물, 그리고 무엇보다도 북한지역에 남아 있는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고구려 기마병의 늠름한 모습 등에서 이러한 주장의 타당성을 엿볼 수가 있다. 그렇다. 우리나라 고대국가 시대에 기병중심의 기마전은 전투형태의 주류였으며, 이때 ‘동이족’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각궁을 이용한 기사(騎射)가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삼국 모두 기병 양성에 주력하였지만, 무엇보다도 대륙 북방민족과의 끊임없는 항쟁을 통해 성장한 고구려에서 기마전이 널리 성행하였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과거에 기병이 사용했던 무기와 장비, 그리고 갑주를 중심으로 우리나라의 전통기병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서 그 옛날 말 갈기를 휘날리며 만주벌판을 내달렸던 우리 조상들의상무정신을 잠시나마 느낄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고자 한다.

 

 

 

2. 고구려 요동정벌의 비밀병기 : ‘철갑기병’
    삼국시대 기마병의 모습은 출토된 유물을 통해서 유추해 볼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현존하는 고구려 시대고분벽화에서 보다 분명하게 알 수가 있다. 고구려인들이 남긴 고분벽화들 - 안악2&3호분, 덕흥리 고분 벽화, 약수리 고분 벽화, 쌍영총 및 무용총 벽화 - 에는 갑주를 착용하고 마상에서 무용(武勇)을 뽐내고 있는 고구려 기마병의 모습이 리얼하게 그려져 있다. 벽화를 상세히 살펴보면, 당시 고구려 기병의 무장 및 보호 장구에 대해 알 수가 있고, 무엇보다도 광개토대왕이 벌인 정복전쟁의 비밀병기가 바로 고구려 철갑기병이었음을 식별할 수가 있다. 물론 고구려 뿐만 아니라 백제나 신라도 기병을 적극적으로 육성하였지만, 그래도 가장 커다란 위력을 발휘하여 요동정벌이라는 과업을 달성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이 바로 고구려 기병 부대였다.


    이처럼 삼국이 기병대를 적극적으로 육성함에 따라 말을 부리기 위해 필요했던 기마용 부속장비, 즉 마구류가 발전하게 되었다. 삼국시대 기마병이 어떠한 마구류를 사용하였는가는 쌍영총의 기마 인물도 및 기마 인물형 토기 등 현존하는 유물을 통해서 유추해 볼 수가 있다. 제반 마구류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등에 타고 있는 기사가 안정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이었던 안장과 등자(鐙子)를 꼽을 수가 있다. 안장이 말 등에 탄 기사의 몸을 전후로 잡아준데 비해 등자는 그를 좌우로 고정시켜 주었다. 그 덕분에 바야흐로 기사가 말과 한 몸이 되어서 양 손을 사용하여 활을 쏘거나 창을 휘두르고 무엇보다도 기병대의 고유기능이랄 수 있는 돌격을 감행할 수가 있었다. 말과 일체화된 기병이 전 속력으로 달려왔을 때 발생되는 충격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였다.


    직접적인 살상무기가 아니면서 전쟁의 역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도구로 등자가 꼽히고 있다. 초기에 등자는 몸체는 나무로 만들고 발바닥이 닫는 표면에는 철판을 덧대어서 미끄럼과 마모를 방지하였다. 그래서 서양역사에서는 등자의 사용을 중세 천년에 걸친 기사시대를 연 원동력으로 보고 이를 무기발달사 상에 ‘혁명적 사건’으로 평가하고 있다. 등자는 말을 탈 때나 마상에서 다른 행동을 할 때 단순히 기사의 발을 거는 마구의 일종에 불과했음에도 말이다. 이외에 마구류에는 말방울, 말띠 드리개, 말띠 꾸미개, 그리고 재갈 등이 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등자였다.


    고구려의 무용총 벽화의 수렵도에 등장하는 기마병의 호쾌한 모습에서 고구려인의 상무적 기상을 엿볼 수가 있다. 비록 여기에서는 적군이 아니라 사슴과 호랑이를 향해 화살을 날리고 있지만, 이들의 무기와 장비를 통해 당시 고구려 기마병의 무장 상태를 엿볼 수 가 있다. 더욱더 구체적으로는 평남의 덕흥리에서 발견된 고분벽화에서 그 옛날 광개토대왕과 더불어 요동지역을 호령하였던 고구려 철갑기병의 모습을 살필 수가 있다. 그림에 보면, 기사들은 철편으로 제작된 갑옷으로 몸을 감싸고 머리에는 철제 투구를 쓰고 있으며, 심지어는 말에게도 철제 갑옷을 입히고 있다. 이렇게 무장한 대규모 기병대가 지축을 흔들면서 요동 벌판 요소요소에 고구려의 깃발을 꼽고 다녔음을 생각할 때, 어깨가 절로 들썩임을 자신도 모르게 느낄 수가 있다.


    그러면 고구려 철갑기병의 무장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1986년에 경남 합천 성산리의 가야 고분에서 출토된 여러 유물들 중에서 유독 눈길을 끄는 두 가지 유물이 있었다. 바로 철로 제작된 갑옷과 투구였다. 당시에 상당량의 철 생산을 자랑하던 가야인들이 남긴 유물로 짐작되기는 하였지만, 이것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그 해답의 열쇠를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찾아내게 되었다. 안악3호분과 덕흥리 고분의 벽화에 그려진 고구려 무사의 모습에서 철갑 및 철 투구로 온몸을 감싸고 장창과 칼로 무장하고 있는 고구려 기마병을 식별해 내었던 것이다. 그는 삼각형 또는 사각형 모양의 철판을 작은 쇠못이나 가죽 끈으로 연결하여 제작된 찰갑(札甲, 쇠비늘) 형태의 갑옷을 착용하고 있었다. 이는 착용자의 몸의 체형에 맞추어서 제작된 신체형 갑옷이고, 몸 전체를 감싸 보호할 수 있는 전신 찰갑이었다.

 

    물론 이 갑옷은 가야에서 유행한 판금갑옷에 비해 방호력 측면에서는 뒤졌지만, 착용자가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찰갑과 짝을 이루어 철 투구도 제작되었다. 갑옷을 입은 고구려 기마병은 머리와 목 부분을 투구로 보호하였다. 고구려 기병의 투구는 여러 형태가 있지만, 가장 일반적인 것이 상단부가 좁고 하단부가 약간 넓은 길쭉한 철편을 여러 개 이어서 몸통을 만들고 가운데 부분에 사발 모양의 철판을 올려놓아 완성한 이른바 ‘종장판주(從長板冑)’였다. 이러한 반원형의 투구 좌우 아래로 철편을 이용하여 ‘볼 가리개’와 ‘목 가리개’를 덧붙여서 얼굴 옆면과 머리 뒷부분을 보호하였다.


    이외에, 형태는 비슷하지만, 오각형이나 사각형의 작은 철판을 이어 붙여서 만든 소찰주를 쓰고 있는 기마병의 모습도 드물게 찾을 수가 있다. 이처럼 철편을 덧대어서 만든 고구려의 투구는 서양의 그리스시대나 중세 시대에 사용된 일체형 투구에 비해 방호력은 다소 떨어졌지만 전투 시의 활동성 면에서는 월등하였다. 더구나 고구려의 기마병은 자신만 무장한 것이 아니라 온 몸을 갑옷으로 감싼 개마(鎧馬)를 타고서 전장에 나아갔다. 이처럼 풍부한 철 생산을 바탕으로 정예의 철갑 기병대를 양성한 고구려는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대에 걸쳐서 요동벌판을 호령하였을 뿐만 아니라, 거의 반세기에 걸쳐서 진행된 수나라 및 당나라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 기병은 어떠한 훈련을 받았을까? 삼국시대에 전장의 승패를 결정짓는 데 기병대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평소에 마상 무예가 적극 권장되었다. 마상 무예의 핵심은 말타기와 활쏘기가 결합된 형태인 기사술(騎射術)이었다. 동이족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는 각궁으로 유명하였다. 그러다보니 주무기인 활을 중시하게 되었고, 그 기능을 극대화할 수 있는 활쏘기 훈련이 강조되었다. 을지문덕이 한 개의 화살로 날아가는 기러기 몇 마리를 한꺼번에 잡았다는 일화는 그만큼 활쏘기가 일반화되고 중시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냥 승마하기도 어려운데,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로 표적을 명중시켜야만 한다는 점이었다. 이는 평소에 기사술이 매우 중시되었으리란 점을 암시한다.


    다행스럽게도 삼국시대에 기병들이 어떻게 활을 쏘았는가를 짐작할 수 있는 단서가 남아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인 무용총의 ‘수렵도’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수명의 기마무사들이 활을 이용하여 노루와 호랑이 등을 사냥하는 그림인데, 이들의 사냥모습을 유심히 살펴보면 말을 타고 달리면서 각궁의 활시위를 당기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특이하게도 한 명의 기마무사는 안장에 앉은 채 상체만 뒤로 틀어서 화살을 쏘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이러한 활쏘기 방식이 고구려의 벽화는 물론이고 백제나 신라의 유물에서도 발견되는 바,이것이 삼국시대의 전형적인 활쏘기 기법으로 여겨진다. 평소에 상당한 훈련이 없이는 도저히 구사할 수 없는 고난도 무예로 평가할 수가 있다.


    기병의 또 다른 무기는 창(槍)이었다. 고구려의 고분 벽화를 보면, 갑주로 온 몸을 감싼 기마무사가 긴 창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이는 원거리에서는 활을 주무기로 했겠지만, 실제로 접전단계에서는 창으로 승부를 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평소에 말 위에서 창을 쓰는 훈련인 기창술(騎槍術)이 강조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마상에서 창을 어떻게 휘둘렀는지에 대해서 오늘날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고구려 삼실총의 공성도 벽화에 그려진 서로 쫓고 쫓기는 두 기병의 기마전에서 기창술의 단면을 엿볼 수가 있다. 한손에 장창을 든 기마병이 휙 돌아서면서 자신을 추격하는 기사가 찌르는 창을 손으로 잡고서 대결을 벌이는 장면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양손으로 창을 머리 높이까지 치켜든 자세로 말을 타고 달리면서 상대방을 찌르는 동작과 이를 한손으로 잡아서 빼앗는 고난도의 기창술이 과시되고 있다.

 

 

 

3. 삼국시대 이후 기병과 그 무기
    거의 반세기에 이르는 후삼국시대를 끝내고 서기 9***에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였다. 이후 거의 5백년에 달하는 긴 세월 동안에 고려인들은 거란족, 여진족, 몽고족 등 북방민족과 전쟁을 치루었고, 고려말에는 홍건적의 침입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물론 왜구는 끊임없이 고려를 괴롭힌 ‘골칫덩어리’였다. 이처럼 계속된 외침에 시달리면서 고려는 이에 대응하여 무기를 발전시키고 무예를 연마했다.


    고려의 무기와 무예는 기본적으로 삼국시대의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후삼국 통일전쟁 시에 왕건은 기병대를 이용하여 여러 번 후백제 군대를 무찔렀다. 이때 왕건의 기병대는 창, 칼, 그리고 각궁으로 무장하였는데, 각궁의 위력은, 지난 호에서 소개한 바대로, 사정거리가 약 250미터에 달할 정도로 대단하였다. 왕건의 군사력이 막강하였지만, 특히 그 중에서도 후삼국통일의 견인차는 효과적인 기병의 운용이었다. 그 덕분에 고려 초에는 자연스럽게 기병 중심의 무예가 주류를 이루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기병보다는 보병 위주로 군대조직이 변경되었다. 그러다보니 무기 및 무예도 보병 위주로 흐르게 되었다. 숙종 대에 이르러 여진족에 대응할 목적으로 일종의 특수부대인 별무반을 설치하면서 재차 기병이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별무반을 구성한 신기군(神騎軍), 신보군, 항마군 중에서 신기군이 바로 기병이었던 것이다. 기병 중심으로 전투를 전개하는 여진족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고려군도 기병을 강화해야만 했고 이에 따라 기병에 관한 무예가 발달하게 되었다. 하지만 부활의 불꽃은 곧 사그러졌다. 여진 정벌이 끝난 후에 별무반이 해체되면서 기병의 위상도 떨어지게 되었다.


    바야흐로 조선왕조에 들어와서 기병이 재차 주목을 받게 되었다. 특히 조선 전기에는 주 방어대상이 북방의 야인들이었기에 이들에 맞서기 위해서는 기병 중심의 군사조직을 유지해야만 했다. 이러한 연유로 최초 과거시험부터 무과에 기병 관련 내용이 포함되었다. 조선의 무과 시험과목은 무예와 강서(講書)로 대별되었다. 무예는 활쏘기와 창을 쓰는 보병무예 및 기사(騎射)와 격구로 이루어졌고, 강서는 병서와 유교경전을 테스트하는 것이었다. 조선시대에, 비록 유희적 성격을 갖고 있었지만, 평소에 기병 훈련방식으로 많이 애용된 것이 격구(擊毬)였다. 이는 서양의 폴로경기와 유사하게 말을 타고 숟가락 모양의 장시(杖匙)라는 긴막대기로 공을 치거나 퍼 담으면서 행하던 공놀이로 무과의 정식 과목이었다. 특히 격구 놀이가 갖고 있는 군사적 중요성을 간파한 세종대왕은 “격구를 잘하는 자라야 승마와 활쏘기를 잘할 수 있으며, 창과 검술도 능란하게 된다”고 말하였다. 실제로 격구 경기에 임하기 위해서는 기마술이 능란해야 하며 다양한 마상용 무기를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무예 실력을 구비하고 있어야 했다. 세종대에는 격구 이외에 털로 만든 공을 마상에서 활로 쏘아 맞히는 모구(毛球)도 유용한 마상무예 훈련방식으로 유행하였다.


    실전용으로 기병에게 강조된 무예는 궁술과 더불어 창술이었다. 마상에서 창을 사용한 것이었기에 흔히 기창술로 불렸고, 이는 각종 무예시험에 필수적으로 포함되었다. 왜냐하면 기마병이 무예를 익히는 데는 마상에서 창을 쓰는 것이 최선의 방법으로 여겨졌기때문이다. 실전(實戰)에서 말을 타고 접전을 벌일 때 가장 효과적인 무예가 바로 창술로서 주로 도주하는 적을 말을 타고 추격하여 찔러 죽이는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평소에 이러한 무예를 숙달시킬 목적으로 조선 초기에 실전용 마상무예의 하나로 고안된 것이 삼갑창(三甲槍)이었다. 이는 여섯 명의 기사들이 서로 편을 나누어 말을 타고 쫓고 쫓기는 상황에서 교전을 벌이는 훈련방식이었다.

 

    무기만 다를 뿐 방식은 유사하게 진행된 삼갑사(三甲射)도 실전용 마상 무예훈련방식으로 애용되었다. 이는 말을 타고 달리면서 말을 타고 달아나는 적을 향해 화살을 쏘아 죽이는 무예로서 평소에 상당한 훈련이 요구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로 가면서 화약무기의 발달과 더불어 상대적으로 전통무기와 무예 개발을 등한시 한 결과 창술과 격구 등을 연마하였던 기병의 무예는 쇠퇴하였다. 효종 대에 북벌을 준비하면서 요동에서의 전투를 염두에 두고 기병을 육성하였지만, 이러한 분위기 역시 효종 사망 이후에는 흐지부지되었다.


    조선 후기인 영조 대에 기존의 궁궐숙위 및 호종의 임무를 담당하던 부대를 개편하여 기병 중심의 독립 부대인 용호영(龍虎營)을 설치하였다. 특이하게도 용호영의 기마병들은 조총이나 창이 아니라 편곤(鞭棍)으로 무장하였다. 농기구인 도리깨 모양의 편곤은 장창에 비해 휴대하기도 쉽고 신속하게 휘두를 수 있는 이점을 갖고 있어서 기동력을 생명으로 하는 기병에게는 적합한 무기로 선호되었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 경기병 체제로 기병부대가 운용되었지만, 수석총과 같은 성능이 향상된 개인화기가 널리 사용되면서 기병의 위상은 더 이상 피어나지 못하였다.

 

 

(이건 신라기병이라네요. 나머지는 다 고구려 기병이고요. 신라기병은 고구려의 영향을 많이 받은듯 한데 조금 다른 점도 있는듯 하네요. ^^;)

 


4. 나오는 말
    우리나라 역사상 전쟁은 대부분 성곽이나 산성을 거점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먼 거리에서 적을 공격하는 활과 화살 위주의 무기체계가 발전하였다. 그러다보니 넓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기마전은 북방의 국경지대에서 야인을 상대로 한 소규모 접전만 있었을 뿐 매우 드물게 이루어졌다. 또한 기병은 보병에 비해 그 유지 비용이 많이 소요되었기에 당시 조선의 국력으로는 대규모 기병부대를 장기간 유지하고 운용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그렇다고 우리나라 역사에서 기병의 역할과 그 기여를 과소평가할 수가 없다. 삼국시대에 고구려의 철갑 기병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 우리 민족은 기마민족으로서 만주의 대평원을 말 타고 달리며 호령하였다. 비록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우리 민족의 활동범위가 한반도로 축소되면서 전쟁에서 기병의 역할이 줄어들기는 하였지만, 북방의 국경을 침탈한 야인들을 물리치면서 꾸준히 역량을 축적하고 관련 무예를 개발해 왔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기병의 무예가 왕조 초기부터 무과시험의 필수 과목으로 포함되면서 기병에 대한 관심은 꾸준히 유지되었다. 조선 중기에 이르러 화약무기가 발달하면서 기병의 위상이 다소 떨어지기는 하였지만, 조선시대에 무과에 응시하려는 자는 필히 마상 무예를 연마해야만 했다. 이순신 장군이 무과시험장에서 낙마하여 버드나무 껍질로 부러진 다리를 묶고서 마상무예를 계속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조선 후기에 다른 병종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욱 위축되면서 우리 전통 군대에서 기병의 존재 자체가 희미해진 느낌이 있다. 하지만 기병과 그 무예는 비록 등락은 있었을지언정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조선 후기에 작성된 전국의 말 사육장 분포 현황을 그린 지도를 보면 그 수가 놀랄 정도로 많은 것을 새삼 깨달을 수가 있다.

 

 

 

    고구려의 철갑기병에 버금가는 무기 개발이야 말로 우리 민족 국가의 생존을 담보할 중차대한 일입니다. 현재 쥐틀러의 예산삭감과 더불어 자행되는 똘추 짓거리에 치가 떨립니다. 평시에 군이 신경써야 할 것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주변국보다 상대적으로 우월한 무기체계를 연구, 개발, 적용하는 건데 우린 이를 다시 소홀히 하기 시작했읍니다. 그토록 많은 오욕의 역사를 이렇게 빨리 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개탄스럽습니다. 거기다 그런 몰이배들이 권력을 휘두른다니.. 우리 모두 두눈 부릅뜨고 저항해야 할 겁니다.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옵니다. 그게 민주주의이니까요. 저항합시다.

 

<<위글은 The ARMY에 개재된 것으로 이내주 육군대령님의 글입니다. 맨 처음 사진도 거기에서 가져 왔고요. 밑에 무기개발에 대한 그리고 민주 권력에 대한 주저리 주저리는 제 주장입니다. >>

 

 

 

 

 

  견우와 직녀


 

                         ■七夕의 이미지는 浪漫的인 熱愛

                    豊饒한 傳說, 牽牛 織女와 烏鵲橋

 

    아가씨, 所望을 織女星에게ㅡ.

   

   칠석(七夕)ㅡ. 음력 7월7일은 8.15 65돌 다음날 주초다. 이 날을 그린데이라고 한다든가. 아침저녁은 낮 기온과 사뭇 다르게 서늘하다. 밤잠을 설치게 했던 열대야 현상에 탈기 상태였던 엊그제ㅡ.

   그러나 七夕날을 앞두고 환절기는 기적 같은 생명력을 샘솟게 한다. 옛 시대에도 열대야는 있었던가? 그러기에 이를 마감하는 전통적인 별 제사(星祭)로 견우·직녀의 매혹적인 로맨틱한 전설을 구성한 것이다….

   견우·직녀 두 별은 그 감동적인 공동체 정신 때문에 동서에 격리된 폐쇄적 고독을 말끔히 허물지 않았는가.

   그 숱하게 많은 까막까치ㅡ. 七夕 날, 지구촌 곳곳에서 뽑혀 은하수에 도착한 그들은, 한 소 먹이는 멋스런 시골 총각과, 베틀에 앉아 예쁜 꿈을 짜 내리는 시골 처녀와의 환상적인 만남의 밤을 위해ㅡ 머리털이 쏙 빠지는 희생을 바친다….

   그들 까치 떼가 바리바리 싣고 온 배와 사과 포도…. 과수원 원예인들은 그런 까치의 순수성도 모른 채 과일을 쪼아 먹는다고 올가미를 쳐야 했다.

   예부터 이 날 성제(별 제사)를 올렸다. 아이들은 물가에서 수신제(水神祭)를ㅡ. 쳐녀(女高生)들은 소망을 적은 황홀한 오색 종이를 실에 꾀어 가는 대나무 잎 사이마다 꼭꼭 매달았다….

   이 현란한 대나무는 현관 앞에 꽂혀져 별들이 내려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저녁 바람 따라ㅡ 댓잎의 <소망>이 허공에 하늘하늘 날아오르고…, 이 무렵 어머니는 백중(百中 24일) 음식차려 밤하늘을 향해 조상의 명복을 빌기도ㅡ.


     中國의 걸교전(乞巧奠)서 전래ㅡ.


    동양의 七夕전설은 선녀의 깃옷과 칠석이 복합체다. 한국 중국 일본 말레이시아와 동남아 등 여러 나라에서 듣는다. 태국의 무용극 노라, 공작 춤 등은 선녀의 옷 전설을 주제로 했다.

    이 전설은 칠석(七夕) 형, 칠성(七星) 형, 두 얘기로 나뉜다. 베트남, 필리핀에도 이 같은 전설이 있다. 그런 산골짜기 깃옷전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선녀 얘기로 곧 별을 말한다.

   으레 사람의 사나이가 몰래 깃옷을  훔쳐가 하늘에 돌아가지 못한 채 아내가 돼버린다. 마무리에 이르러 선녀는 깃을 찾아 입고 하늘로 돌아간다. 뒤이어 사나이도 하늘에 올라가 마지막 칠월 칠일 서로 만난다. (칠석 형)

  또 다른 중국전설은, 선녀인 칠성(북두칠성) 중 별 하나가 땅 위에 내려와 깃옷을 잃는다는 얘기다. 이 선녀의 아들이 훗날 한 부족의 선조가 된다. 문화인류학, 민속학 분야에서 별꼴 우의전설이라고 한다. (칠성 형)  +8

  七夕 얘기는 중국의 궁중 대궐행사 걸교전(乞巧奠)에서 전래했다. 곧 천제의 딸 직녀(베가)와 견우(알타일) 별의 사랑얘기를 다룬 성제(星祭)다. 제단에 바느실을 올리고, 별을 우러러 솜씨 자랑을 뽐내도록 기원한다.

   중국 七夕 전설의 직녀성, 견우성이 문헌에 처음 등장하기는  춘추 시대 ‘시경(詩經)’의 사국풍(四國風) 가운데 1절이다. 그러나 여기엔 별로는 명성(명성)과 함께 해, 두 별은 글에서  항을 달리 별도로 적었다. 七夕에 관한 전설은 이 안에 기록돼 있지 않다.

  일본의 오절구(五節句)의 하나인 七夕행사는 百濟유민이 아스카(飛鳥 629-672)시대부터 지냈다고 전해진다.


   文選》안의 ‘古詩十九編‘ 의 詩ㅡ.


    동양 여러 나라에 비슷한 로맨스가 많다. 하늘에 올라간 연인들이 세월가는 줄 모를 만큼 신명나게 붙어 있다가, 전승(傳承)의 결론에서 큰물(홍수)를 만나 따로 떨어진다. 결국 한해 한 차례만 마나게 된다는 줄거리ㅡ.          대동소이한 유화(類話)로 七夕 얘기는 우리에게 너무 다정다감하다. 출전은 한(漢)나라(140BC 辛丑) 때, 편찬된《문선(文選)》안의 ‘고시 19편(古詩十九編)‘ 에서다. 여기에 오늘 전하는 견우·직녀의 설화(譚詩)가 있다.

 

   그러니까 이 얘기는 BC 1세기부터 전해진다. 중국의 별자리에서는  직녀가 ‘직녀’지만 견우는 ‘하고(河鼓)’라는 별자리로 별명이 견우다. 중국의 황도 28숙(宿)의 우숙(牛宿)도, 견우라고 불린다.

   우숙은 하고(알타일)의 이웃으로 염소자리 a별 부근에 있다. 우숙 곁에는 여숙(女宿)이 있다. 여숙과 직녀성은 매우 떨어져 있다. 이 직녀·견우와 여숙·우숙 관계는 어떤지 기록에 없지만 유력설이 없지 않다.

 곧 고대 농경의례의 하나로 국왕이 전제에게 비를 내려주도록 기원했고, 왕비는 하늘냇가에서 옷 천을 짰다. 이것이 직녀성이다. 은(殷)나라 때부터 소에 쇠 보습을 낀 쟁기를  끌며 밭을 갈았다.

   소는 농경사회 필수 생물로 이 중요한 견우가 황도 28숙의 하나로 됐으며 그것이 우숙이라고 말한다.

    七夕 전설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주제는 두 남녀가 신접살림을 꾸린 후 일은 하려하지 않고 빈둥거리기만 해 천제로부터 찍혀 은하수 양쪽으로 격리돼버린다는 아주 로맨틱한 이미지가 젊은이의 가슴을 울린다.


   牽牛와 織女의 또 다른 傳說ㅡ.


   우리나라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아주 옛날 어느 가난한 산골에 부자 집 머슴으로 일하는, ‘땅갑’이라는 젊은 총각이 있었다. 그는 일 잘하는 중머슴으로 주인이 입버릇처럼 예쁜 규수를 만나면 장가보내 주겠다며 해마다 조금씩 새경을 올려 주었다.

   그러나 땅갑이의 불만은 감정과 행동을 억제하면서 하나의 기다림을 꾹 참고 견디기 어려웠다. 벌어놓은 재물도 많아 어서 예쁜 색시를 맞아들이고 싶은 생각이 그의 당면 소망의 전부였다.

   장마도 물러가고 처서(處暑)가 가까운 석양 무렵, 무럭무럭 자란 벼논에서 이삭패기 전 피 뽑기를 하다 말고 팥죽 같은 땀을 닦으며 일어섰다. 찬물로 몸을 헹구려고 산기슭 옹달샘을 찾아 갔다.

    그런데 멀리서 샘 쪽을 보니 누가 벌써 목욕터를 차지하고 있었다. 인기척을 억누르고 좀 더 다가가  몰래 훔쳐본 땅갑이는 깜짝 놀랐다. 일찍이 환상과 정열과 불타는 야망의 과녁이 옹달샘 터에서 몸을 헹구고 있었다.

   그는 이리저리 눈을 굴리다가 아가씨의 옷에 시선이 멎었다. 그것은 선녀의 깃옷이었다. 깃옷을 챙겨 몸을 감추고 있는 사이 서녀는 샘에서 나와 깃옷을 입으려고 했는데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땅갑이는 옥황상제의 딸을 설복해 신접살림을 꾸렸고, 두 아이의 아빠가 됐다. 그런데 선녀는 감추어둔 깃옷을 찾아내 약속을 깨뜨리고 하늘로 가버린다. 아내를 잃은 그는 두 아이를 데리고 하늘에 가지만 못 만나고 만다.

   옥황상제 부인은 정상을 참작해 칠석날  딱 한 번 만나도록 허락한다….


    人家灑衣裳 蓋古俗也 뜻 알자ㅡ.


    동국세시기에ㅡ 칠석 날 집안에서는 옷을 꺼내 햇볕에 말리는데 이는 오랜 풍속이라고 했다.(人家灑衣裳 蓋古俗也)

    잘은 모르지만, 이제 서늘한 계절, 화려한 외출이 잦게 된다. 곰팡냄새 나는 나들이 옷을 그냥 장롱 안에 챙겨 둘 수만도 없다.관광철에 대한 여행 감각은 七夕날 동양의 모든 나라가 거의 같을 것이다.

   아름다운 남녀의 슬기를 七夕을 통해 일깨우는 전설…. 토속적으로 의인화한 서정미 흐르는 별들의 얘기, 견우·직녀의 오작교 사랑…! 까마귀 까치들은ㅡ 갸륵한 두 남녀의 만남을 위해 머리와 머리를 맞대어 은하수에 색깔 고운 꽃무늬 다리를 형성했다.

   견우와 직녀의 전설ㅡ! 마치 코스모스 길을 걷는 신선한 생명력의 맥박처럼 가냘프다. 오염된 생활문화 탓일까ㅡ 그 순수함이 그립다. 불륜(不倫)! 외출에서 돌아온 처용(處容)이 예쁜 아내가 잠든 이불자락 끝에서 무엇을 보았던가?

   신라시대가 아니라도ㅡ 산지기 올리버 멜러스에게 몸을 준 아내 코니 때문에 상심했던 클리포드 채털리…! 현대는 오욕의 시대다. 예외도 있다.

    F.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에서 젊은 필립의 감미로운 사랑에 취해 있던 중년여인 포라! 그녀는 안됐던지, 과거부터 알고 지낸 같은 연배의 로제와 결혼ㅡ 그러면서 남편의 상습적인 바람기를 이해한다.   T. 드라이저의 작품 <시스터 캐리> 의, 일류 레스토랑 중년 지배인 조지는ㅡ 젊은 쇼걸 때문에 가게 돈을 몽땅 훔쳐 함께 산다. 그러나 뒤늦게 후회하며 활기찬 쇼걸의 내일을 위해 행방을 감춘다….


   ■庭의 太陽은 곧 主簿, 自重自愛를ㅡ


   이혼율이 높은 불운의 시대…! 충격 속에서 어떻게 가정을 꾸릴까? 현대의 샐러리맨은 감추어진 번뇌로 곧잘 포장마차를 드나든다….

   그에게 핸드폰을 걸어오는 여고생! 바캉스 비용을 마련하겠다고 인터넷 채팅을 통해 사귄 그가 걸려든 것이다. 우리 둘레에는 불량소녀가 너무 설친다. 핵가족 사회에서 가정교육이 증발된 각박한 상황에 맞벌이 부부의 각성이 시급하다.

 

   견우별(牽牛星-河鼓)과 직녀별(織女星-天女)은 은하수 대안(對岸)에 있는 백색 발광체ㅡ. 동쪽 독수리좌 머리별 Altair와 서쪽 거문고좌 머리별 Vega에 따른 청순한 전설은 지금도 문화와 시대를 초월해 소년 소녀의 가슴을 따끈하게 데운다. 결코 진공지대에 멀어지지 않고 오늘의 사상과 이어져 빛난다.

   오작교(烏鵲橋)를 놓는 까마귀 까치들은 현실 사회의 곧 시민운동가들이다. 견우와 직녀는 성장하는 우리의 위대한 2세…, 이 아름다운 설화를 통한 교훈이 이번 칠석을 통해 얼마만큼 공감대 형성을 위한 진폭력을 발휘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아무리 성(性) 문화가 파괴된다 해도ㅡ 모럴은 건져야 된다. 미국 폐풍이라지만, 아니다. 미국의 가정은 우리 보다 훨씬 건실하다. 저, 오작교ㅡ 꿈과 욕망의 다리…! 우리네 까막까치는 지금 누구를 위해 다리를 놓는가ㅡ?   

   중국의 전설 아닌 걸교전(乞巧奠) 행사는 직녀성에게 수예, 미용, 서도 등 기예를 맵시 좋게 숙달하도록 기원했다. 이제 우리의 미혼녀나 알뜰 주부들은 이날 참 부도(婦道)의 길을  빌도록 희망한다. 가정의 태양은 곧 주부다.    

 

                  ※사진:고분벽화,<牽牛·織女圖>고구려 덕흥리고분                                                                  

 

                    


선인과 옥녀의 공간, 덕흥리고분벽화의 하늘세계

전호태(고대사분과)

 

  하늘이 무너질까 땅이 꺼질까 걱정한다는 고사에서 유래된 ‘기우’라는 말은 하늘도 무엇인가로 채워졌다는 생각을 전제로 한다. 실제 동서를 막론하고 고대사회에서는 하늘도 땅 위의 세계처럼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이런 까닭에 하늘과 땅 사이에는 별도의 통로가 있으며, 이곳으로는 아무나 지나다니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거대한 나무나 큰 기둥, 높은 사다리가 두 세계 사이를 잇는 통로 역할을 할 수도 있고, 허공으로 날아오를 수 있는 새나 말, 사슴 같은 짐승,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용이나 기린 같은 신비한 존재의 힘을 빌려 하늘세계의 입구에 다다를 수도 있었다.

  영국의 동화 ‘잭과 콩나무’의 콩나무, 한국의 동화 ‘해와 달이 된 오누이’의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은 우주나무나 하늘사다리, 하늘기둥에 해당하는 것이고, 고구려의 건국신화의 주인공 동명성왕 주몽이 하늘로 올라갈 때 그 머리 위에 올라섰다는 용이나 주몽의 아버지이자 천제인 해모수가 땅과 하늘을 오르내릴 때 탔다는 기린, 또는 다섯 용이 끄는 수레는 땅과 하늘의 소통을 돕는 신수(神獸) 및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두 세계 사이의 소통은 이와 같은 신수나 기둥 외에 옷과 같이 몸에 지닐 수 있는 간편한 물건으로도 가능하다는 인식이 동아시아의 동화나 전설 속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만 이런 간편한 물건의 착용이 아무에게나 허용되지는 않았다. ‘선녀와 나무꾼’이라는 널리 알려진 동화에서 하늘세계의 사람인 선녀는 하늘의 날개옷을 되찾아 입자 곧바로 날아올라 하늘세계로 되돌아간다. 그것도 두 팔에 아기까지 안고 날아오른다.

  후에 하늘에서 내려온 두레박을 타고 하늘세계로 올라간 나무꾼이 다시 어머니를 뵈러 잠시 땅위의 세계로 내려올 때에는 하늘사슴을 타고 온다. 땅위 세계 사람이었던 나무꾼에게는 선녀가 걸치던 것과 같은 하늘의 날개옷이 주어지지는 않았던 것이다.

 

  덕흥리벽화분 앞방 천장고임에는 5세기의 고구려 사람들 사이에 알려지고 믿어졌던 하늘세계의 모습이 묘사되었다. 해와 달 외에도 은하수와 60여개의 별자리가 천장고임 사방에 그려지고 하늘세계에 있다고 믿어지던 온갖 새와 짐승, 물고기, 반인반수(半人半獸)들이 별자리들 사이사이에 묘사되었다.

  이러한 존재들 사이로 선인과 옥녀들도 모습을 드러내는데, 무엇을 타거나 부리지 않은 상태로 허공을 날아다니는 모습이다.

 

 


                    (그림1) 덕흥리벽화분 벽화 : 선인과 옥녀

 

  사람의 모습을 한 채 날아다니지 않는 존재는 은하수를 건너 1년 하루의 약속된 만남을 마친 채 이별의 시간을 맞고 있는 견우와 직녀뿐이다.

  저고리와 치마, 혹은 저고리와 바지 차림의 옥녀와 선인들은 손에 번(幡)이나 당(幢)을 쥔 상태이기도 하나 연화반(蓮花盤)으로 보이는 그릇을 받쳐 들기도 한 상태로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다.

  벽화 속 옥녀와 선인들이 입고 있는 옷에서 특별한 점은 찾아보기 어렵다. 중국의 한대 화상석이나 화상전의 우인(羽人)처럼 등에 날개가 돋아 있지도 않다. 이들은 하늘세계 사람만의 특별한 능력으로, 혹은 걸치고 있는 하늘옷의 신비한 힘을 덧입어 허공을 날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덕흥리벽화분에 묵서묘지명이 쓰이던 408년은 북중국이 오호16국시대라는 분열기를 아직 벗어나지 못하던 때이다. 한쪽에서는 불교신앙과 문화의 확산이 계속되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노장철학과 신선신앙을 중심으로 한 도교의 정립과 전파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왕조의 명멸, 대량유민의 발생과 이동, 교류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장생불사, 무릉도원의 삶, 정토왕생을 꿈꾸고 이룬 자들에 대한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전해지고, 저곳에서 이곳으로 들려오던 시기이다.

  16국시대의 나라들과 전쟁과 화평을 거듭하며 인적, 물적 교류의 물길을 열어 놓을 수밖에 없던 고구려에도 이로 말미암은 영향이 미치지 않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덕흥리벽화분의 벽화 속 하늘세계도 이런 흐름과 떼어놓고 이해하려 한다면 이는 무리한 시도라고 해야겠다.

 

  중국에서 도교의 체계화는 위진시대에 본격화 되고 남조 동진의 갈홍에 의해 기본 틀이 마련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와중에 출현한 신선신앙 관련 서적 가운데 주목되는 것이『목천자전(穆天子傳)』,『한무내전(漢武內傳)』,『박물지(博物志)』등이다.

  『한무내전(漢武內傳)』은 한무제와 서왕모 사이의 사랑과 이별을 주된 내용으로 삼고 있는데, 이 세상의 서쪽 끝에 산다는 불사(不死)의 관리자 서왕모를 현세의 제왕과 사랑을 나누는 아름다운 여선(女仙)으로 묘사한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 서왕모가 살던 곳을 『산해경(山海經)』에서는 옥산(玉山)이라 하였고, 서왕모의 음식이 옥(玉)이라고 했으니, 서왕모는 옥녀(玉女)로 불려도 무방한 신이었다고 하겠다.

  신선가에서는 신선의 경지에 이른 남자를 선인, 여자를 옥녀라 부르는 경향이 있고, 체계화된 도교 안에서는 선계의 여인들을 옥녀로 칭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서왕모를 보좌하던 아름다운 시녀들도 그런 점에서는 옥녀로 불러야 할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이 세상의 서쪽 끝과 동쪽 끝에 있다는 불사의 선계가 하늘세계의 일부, 혹은 하늘세계 자체로 인식되고 그곳에 살던 이들이 하늘세계의 주민이 되면서 선인, 옥녀도 자연스레 하늘사람으로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는 존재로 인식된 것이 아닐까. 동해 한가운데 떠있던 오신산(五神山)의 선인들도 하늘을 날아 이웃 신산들에 나들이 갔다고 하지 않았던가.

  땅 위의 사람들이 이런 존재들과 만나고 이런 사람들처럼 되기를 소망할수록 이들의 능력은 더욱 신비화되고, 모습도 특별해져 무용총 벽화의 선인들처럼 목이 길어지고, 귀도 삐죽이 솟았다고 믿어졌던 것은 아닐까.

 

 


(그림2) 무용총 벽화: 선인

 

  덕흥리벽화분의 선인과 옥녀는 아직 사람의 모습에서 벗어나기 전의 상태로 하늘세계를 날아다니던 불사를 얻은 사람들의 마지막 형상인지도 모른다.

 

 

 

 

 

 

 

 5~6세기 고구려 고분벽화는

                        고구려인들의 생활을 묘사했다!~

 

 

"

고구려인들은 문자보다 더 생생한 기록을 남겼는데요,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고구려 고분벽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은 5~6세기 고구려의 가장 화려한 모습을 담고 있는 고분벽화를 만나보겠습니다.

고구려의 고분벽화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4기를 한곳에 모아봤습니다.

어떤 것이 있는지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와!~무덤이라기보다는 고대미술관에 들어온 기분입니다.

그런데 저기 모서리에 그린 기둥이며 보루가 마치 실제 집을 표현한 것 같지 않습니까?

 

고구려 고분벽화는 무덤 주인이 실제 살았던 집은 물론이고,

생전의 생활을 아주 자세하게 그려놓았습니다.

 

 

평남 강서 덕흥리고분.

 

저기 가운데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사람이 무덤 주인인데요

이름은 진이고 유주자사라는 고위직 공무원이었습니다.

 

저기를 보면 유주자사라는 분이 각지에서 모인 태수들에게 업무보고를 받고 있지요.

또 한쪽에서는 임명장을 주는 듯 하구요.

이 벽화를 통해서 여기가 무덤의 주인이 공적인 업무를 보는 사랑채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저쪽에 방이 또 하나 있는데요 들어가볼까요?

 

이쪽에 방은 안채, 즉 살림집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당에서는 말을 타고 과녘을 맞추는 놀이를 하고 있구요,

이런 놀이를 할 수 있었던 걸로 봐서 마당이 무척 넓었던가 봅니다.

 

그리고 저쪽에는 침실입니다.  

 

주인이 안쪽에 앉아 있는데

낮에는 휘장을 거둬 생활을 했고,

잠을 잘 때는 휘장을 내렸다고 합니다.

 

이번엔 거실을 한 번 구경해볼까요?

 

 

 

고구려 수도 집안에 있는 무용총 벽화입니다.

 

이 벽화에는 고구려 저택의 응접실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는데요,

평상이 여러 개 모여있고, 사람들이 그 평상에 신을 신고 올라갑니다.

 

당시만 해도 마루 전체에 구들을 깔지 않고

한쪽 구석에만 놓는 쪽구들을 했기 때문에 좌식과 입식을 겸했다고 합니다.

 

마침 손님이 와서 접대를 하고 있는 모습인데요, 어떤 음식을 대접했는지 볼까요?

 

 

 

여기 시종의 모습을 볼까요?

손에 칼을 들고 있는데요, 추운 지방이라 고구려인들은 육식을 즐겼다고 합니다.

아마도 고기음식을 내놓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시종은 손님 앞에 먹기좋게 고기를 잘라줬을테구요.

 

자, 이번에는 황해도에 있는 안악3호분으로 가보겠습니다. 

고구려 저택에는 안채 앞으로 이런 부속건물이 있었습니다.

 

 

 

다락처럼 보이는 이곳이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입니다.

곡식창고에서 곡식을 꺼내서 이 디딜방아로 곡식을 찧습니다.

 

다 찧은 곡식을 우물로 가져가서 씻습니다.

두레박을 내려서 두여인이 물을 길러 올리는 모습이 보이죠?

 

집안에 이렇게 푸주간도 있었죠.

방금 사냥이라도 한 것처럼 고기가 아주 가득합니다.

 

여기가 고구려의 부엌입니다.

 

아궁이에는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고,

시루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습니다.

 

시종들이 부지런히 식사준비를 하고 있는 모양인데요,

부엌 가득 놓여있는 단지나 항아리들에는 각종 장이나 술이 담겨있었다고 합니다. 

 

 

2. 고구려 고분벽화속 '고비(高鼻)'!

                    고구려에는 서역인들이 살고 있았다!~  

 

 

지금까지 벽화속에 담겨있는 고구려 저택의 모습을 보셨는데요,

이번에는 저택 밖깥에서는 어떤 일을 하였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고구려 수도 집안에서 발견된 장천1호분속에 그려진 벽화입니다.

 

100여 명의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 벽화속에는 다양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씨름을 하는 사람, 사냥을 하는 사람,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 춤추는 무희...

 

어떠세요?

한편으로는 무척 여유로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무척 역동적인 고구려의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고구려의 벽화속에는 아주 특이한 인물들이 있습니다.

 

이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벽화속에 다른 인물들과는 달리 코가 무척 높습니다.

우리와는 다른 모습의 서양인들 모습이 분명한 거 같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고구려에 외국인들이 살고 있었을까요?"

 

중국 길림성 집안시.

고구려 고분은 현재까지 모두 2만여 기가 발견되었다.

 

그 중에서도 벽화가 남아있는 고분은 총 100여 기.

대부분 4세기에서 6세기 사이에 조성되었다.

 

 

최근 벽화를 도굴 당해 충격을 안겨준 장천1호분.

다행히 도굴되기 전 촬영이 남아있어 실물을 만나볼 수 있다.

 

이것이 백희기악도다.

그러나 심한 훼손으로 내용을 알아보기 쉽지 않다.

 

백희기악도에는 어떤 그림들이 그려져 있을까?

 

장천1호분 발굴보고서를 찾아보았다.

이것은 1970년 발굴 당시를 그대로 옮겨놓은 묘사도다.

지금은 훼손되어 잘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 비교적 명확하게 묘사되어 나타나 있다.

 

 

 

또한 이 보고서에는 벽화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고비(高鼻)'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고비(高鼻)',

'코가 높고 크다'는 것이다.

 

백희기악도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40명,

그 중 코가 큰 사람은 모두 9명이다.

 

뭔가에 놀라 넘어진 이는 코가 크다.

도망가는 남자도 맨발에 코가 높다.

 

남자들 뿐만이 아니다.

수레를 끄는 여자들도 코가 높다.

 

마부로 보이는 두 남자들은 한눈에도 코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부로 보이는 두 사람도 코가 높고 큰 편이다.

 

 

 

벽화속에 등장하는 고구려 남자는 눈썹이 가늘고 코가 작은 편이다.

따라서 고비인들은 고구려인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여인도 코가 큰 여인과는 생김새가 다르다.

 

"장천1호분 백희기악도에 등장하는

코가 높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서역계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머리모양은 상투를 틀지 않고

머리를 늘어트린 상태에서 자기일들을 하고 있는데,

 

아마도 이들은 고구려의 활발한 대외교류 과정에서

북중국의 어떤 지역에서 흘러들었거나

아니면 내륙아시아의 유목 계통 사이에서 흘러들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 전호태 교수,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5세기 중엽 고구려에는 흥미로운 사건이 일어난다.

 

북연이 멸망하자 주민들이 대거 고구려로 망명하는데 

그 행렬이 무려 80리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연나라 임금이 주민들을 동쪽 고구려로 옮기고...

행렬의 길이가 80여 리에 이어졌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장수왕 24년(436년)

 

 

 

그 사건이 일어나기 100여 년전,

갈족이 중국 동북구에 후조를 세웠다.

 

후조는 이내 전연에게 멸망당하고,

갈족은 북연에 의해 통합된다.

 

이때 살아남은 갈족은 훗날 북연이 망하자

고구려로 향하는 망명대열에 합류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용성에 살았던 민족구성을 보면

고구려인들도 있고, 중국 한족도 있고,

북연을 세운 선비족의 모용씨도 있는데,

그외 잡족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물론 이 잡족에는

후조를 세우는데 활약한 갈족이라든가 여러 계통의 종족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북연 멸망 이후 흘러든 많은 종족 가운데

서역 계통의 사람들도 섞여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 전호태 교수,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그러나 학자들은 서역인이 들어온 가장 큰 이유로 문물교류에 두고 있다.

 

"불교 전래와 관계해서 얼굴이 거무튀튀한 서역 계통의 승려들이 고구려까지 오는거죠.

먼 지역과 교류하고 있었다는 것을 벽화가 보여주는 것이죠.

모델이 중국쪽의 미술을 보여주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주죠."

                                                                                          - 전호태 교수,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고구려 벽화속에 서역인은 또 있다.

 

씨름을 하고 있는 이 남자는 메부리코에 눈이 부리부리하다.

맨손으로 힘을 겨루고 있는 이 남자도 서역인이다.

이렇듯 당시 고구려에 많은 서역인들이 살고 있었다.

 

 

 

"고구려 고분벽화속에서 만날 수 있는 외국인들입니다.

한눈에도 외국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학자들은 벽화속에 이 외국인들이 서역에서 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서역이라는 말은 중국 한나라때 처음 등장했습니다.

중국 서쪽에 있는 타림분지 지역의 도시국가들을 일컬어 서역이라고 했는데요,

그후로는 점차 범위가 넓어져서 멀리 인도까지 서역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곳 사람들이 멀리 고구려까지 들어가 살고 있었던 것이죠.

 

고구려 벽화속에 서역인들은 불교와 관련해 들어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말몰이꾼처럼 허드레일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것은 이들이 고구려사회에 오래 정착해서 살고 있었고

고구려와 서역의 교류가 그만큼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3. 각종 곡예, 악기 요고, 빙빙 도는 춤!~

          고구려의 다양한 놀이문화는 서역으로부터 전해졌다!~ 

 

 

서역인외에도 고구려 고분벽화속에는

서역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단서가 또 있다.

 

장천1호분 백희기악도에는

고구려인들의 다양한 놀이문화가 소개되어 있다.

 

두사람이 힘과 기술을 겨루는 씨름, 춤과 음악, 서커스도 보인다.

이 사람은 하늘 높이 공을 던져올리고 있고,

한쪽에서는 바퀴를 이용해 묘기를 펼치고 있다. 

 

평안남도 강서군에 위치한 수산리 고분.

 

이 고분벽화에도 고구려인들이 즐겼던 곡예가 자세히 그려져 있다.

컴퓨터그래픽으로 원래 모습을 복원해봤다.

 

 

 

다양한 곡예가 등장한다.

 

바퀴던지기, 높은 장대위에서 걷기, 공과 막대기를 번갈아 위로 던져올리는 묘기도 보인다. 

이렇듯 곡예는 고구려인들이 즐겼던 대표적인 놀이문화의 하나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내몽고에서 발견된 고분벽화에도 고구려와 비슷한 곡예가 등장한다. 

  

중국 내몽고 허린거얼 고분 벽화.

 

"예를 들어서 여기 공놀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구요.

여기 특이하게는요 바퀴에 손잡이가 달려 있습니다.

아마도 이 손잡이를 이용해 바퀴곡예를 벌였을 거라 싶습니다.

일상생활에서 사용한 바퀴는 아닌 것 같아요."

                                                                             - 고승길 교수, 중앙대 연극학과 

 

이 벽화에는 후한시대 유행했던 곡예가 총망라되어 있었데 

방울받기(농환 弄丸), 수레바퀴쳐서올리기(무륜 舞輪),  

그리고 다섯 개의 탁자위에 올라가 물구나무서기를 하는 재주안식오안(安息五案)이라고 한다.

 

도립(倒立)물구나무서기를 해서 부리는 재주를 말하고 

곡예 중에는 칼로 위험한 묘기를 부리는 재주도 있다.

 

이 묘기들이 이후 고구려 벽화속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평안남도 대동군 팔청리 곡예도 벽화속엔 칼재주를 부리는 사람이 보인다.

내몽골 벽화속의 칼재주 장면과 거의 흡사하다.

 

쓰촨성 이빈 애묘 출토 연희 화상석.

 

그렇다면 고구려와 중국에서 유행한 곡예는 어디서 온 것일까?

 

중국의 역사서 <사기>는

현재 곡예가 페르시아, 즉 서역에서 온 것임을 밝히고 있다.

 

돌체 마임연구소.

 

과연 고구려의 곡예는 어떤 수준이었을까?

제작진은 현재 국내 단 하나의 공연단체를 찾았다.

제작진은 이 단체에게 수산리 고분벽화를 보여주었다.

벽화속의 인물처럼 여덟 개의 공과 막대기를 던지는 묘기가 가능할까?

 

"공이 하나 정도는 가능하겠죠.

그런데 운동에너지가 다른데 공과 막대기를 같이 쓴다는 건, 

그림에서처럼 다섯 개의 공과 세 개의 막대기를 같이 던지는 것은 불가능할거다 봅니다." 

                                                                                                               - 최규호 

 

공던지기는 공의 개수와 공을 던지는 방식에 따라 난이도가 다르다.

중국의 화상석에는 공을 원형으로 던지는 방식이 보인다. 

장천1호분 곡예꾼은 공 여섯 개를 던지고 있다.

그리고 이를 한층 발전시킨 것이 공과 막대기를 같이 던지는 수산리고분의 곡예다.

   

"고구려인들은 서역의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이는데 그치지 않고

더욱 발전시켜서 그들만의 독창적인 곡예를 만들어냈는데요,

 

1,500년이 지난 지금 고구려인들의 곡예를 그대로 재현해내기란 불가능할 정도로

고구려인들의 곡예는 무척 뛰어났습니다.

 

자, 여기를 보실까요!

그 유명한 안악3호분 대행렬도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이 행렬도에서 고구려 철갑기병에만 주목해왔습니다.

그러나 이 행렬도속에는 고구려 문화가 얼마나 국제적이었나 알려주는 단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악기들입니다."

 

황해도 안악군에 위치한 안악3호분.

지금도 학계에서는 이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한 논란이 계속 되고 있다.

 

거대한 무덤속엔 화려한 벽화가 남겨져 있다.

대행렬도엔 철갑기병과 함께 수십 명의 악대가 행진하고 있다.

 

고구려 사람들은 어떤 악기를 사용했을까?

 

 

"담고라고 하는 악기, 그 뒤에 소, 그리고 각이라고 하는 악기가 있구요..."

                                                               - 권오성 교수, 한양대 국악과

 

대행렬도의 악기는 타악기와 관악기로 구분된다.

 

메는 과 메는 종은 타악기다.

담고라고 불리는 타악기 뒤에는 관악기 이 있다.

 

이들은 어떤 음악을 연주했을까?

 

지난 6월 일본의 한 신사에서

고구려의 음악이 연주된다는 소식을 듣고 취재진은 그 신사를 찾았다.

 

일본 도쿄 오타마 이나리 신사.

고마가쿠 나소리 공연.

악단의 연주에 맞춰 암수용 한쌍이 즐겹게 노는 모습을 춤으로 표현하였다.

 

이것이 1,500년부터 일본 황실에서 전승되고 연주되어 왔다는 고마가쿠, 즉 고구려악이다.

고마가쿠에는 고구려에서 건너온 악기가 아직도 사용되고 있다.

 

산노쓰즈미(장구), 고마부에(고려적)

 

"일본의 아악에 속해있는 고마가쿠(고구려악)는

고대의 한반도에서 유입된 춤과 거기에 수반되는 음악으로

오랫동안 일본에서 전승되어 내려왔습니다.

 

안타깝게도 조선반도에서는 고대의 것이 사라졌습니다만

일본에서는 전승되어 내려온 음악과 춤의 종류입니다."

                                             - 미타 노리아키, 미즈호 가가루키아 주석악사

 

고마가쿠가 고구려 음악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한가지 주목할 것은 이 산노쓰즈미라는 악기다.

 

최근 경기도 성남시 이성산성 발굴지에서 출토된 한 유물이 학계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각축장이었던 이성산성의 저수지에서 출토된 이 유물은 마치 작은 장고를 연상시켰다.

 

양쪽은 둥근 북처럼 생기고,

가운데 허리가 잘록한 이 악기는 요고라고 불리는 악기다.

 

요고는 고구려에서 흔히 사용되던 악기로

본의 산노쓰즈미도 이 요고가 변형된 것이다.

 

"삼국시대 기록이나 그림으로 전하던 목재악기가 출토되었다는 것이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겠지요.

특히 이 요고의 경우에는 고구려 벽화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 악기가 남쪽까지 전파되었다는 대단히 중요한 자료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배기동 교수, 한양대 박물관

 

 

요고는 고구려 벽화에 자주 등장한다.

 

고구려 뿐만 아니라

당나라에서는 도자기로 요고를 만들어 사용을 했고,

 

투르판(중국 신강 위구르 자치구),

쿠처(중국 신강 위구르 자치구 쿠처 키질석굴 벽화)에 이르기까지

요고는 아시아 전역에 널리 사용된 악기였다.

 

중국의 <악서> 권 125에 따르면

 "요고는 남만의 천축(인도)에서 나왔다"고 한다.

 

인도의 요고가 고구려까지 들어간 것이다.

 

"이 악기는 인도의 다마루라는 악기입니다.

보다시피 이것은 우리나라 장구의 할아버지격인데

이 악기는 인도에서 오늘날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악기는 리듬악기로 아주 중요한 일을 하는데

이 악기가 진양악서에는 요고로 소개되어 있고

그것이 고려조에서 사용되었던 요고로 생각되고

바로 이 악기가 이성산성에서 출토된 그 요고와 같은 계통의 악기라 생각합니다."

                                                              - 전인평 교수, 중앙대 창작음악학과

 

요고를 복원하기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에 요고의 수종 분석을 의뢰했다.

발굴된 요고의 파편을 전자현미경으로 촬영한 결과 요고에 사용된 나무는 밤나무로 밝혀졌다.

 

"밤나무는 탄닌이라는 떫은 성분이 있어 내구성이 좋은 목재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건조가 좀 어렵구요, 단단해서 건축자재나 지구재, 실질적으로 다양하게 이용되고 있는데요,

강도가 필요한 부분에 많이 이용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 김수철,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 목제보존담당 

 

한국의 전통악기를 제작해온 장인 박성기(궁중악기 대표)가 요고 복원에 나섰다.

 

형태와 크기는 이성산성에서 발굴한 것에 맞추기로 했다.

먼저 밤나무를 요고 형태로 깍아나갔다.

워낙 단단한 터라 다른 나무의 두 배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너무의 변형을 막기 위해 칠을 하고 나무의 양옆을 쇠가죽으로 덮어씌웠다.

 

고구려인들은 요고로 어떤 음악을 연주했을까?

 

7세기 당나라 궁궐에서는 10부기라는 불리는 국제음악회가 열렸다.

 

* 10부기 - 연악, 청악, 서량, 고려, 천축, 구자, 소륵, 안국, 강국, 고창 - <구당서>

 

 

 

구당서에는 당시 10부기에 참가했던 각 악기들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고구려의 악기는 서량, 구자의 악기와 상당수 일치한다.

 

서량은 지금의 양저우지역, 구자는 중앙아시아의 구처다.

고구려는 소륵(카슈가르), 안국(부하라)과도 여러 악기를 공유하는데 둘다 먼 서역의 나라다.

 

"수나라, 당나라때의 장안으로 여러 지역의 음악이 들어왔는데

우리나라에는 고구려의 음악이라는 것, 

그리고 서역의 음악이라는 것이 장안의 궁중에서 교류가 된 거죠."

                                                                                               - 권오성 교수, 한양대 국악과

 

고구려와 서역 음악의 교류를 확인하기 위해 취재진은 서역의 쿠처로 향했다.

중국 신강위구르자치구에 위치한 쿠처.

 

한나라때 서역도호부가 설치된 이곳은 중국이 경영한 서역문화의 핵심지로

고구려 장군 고선지가 활약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쿠처 시내에서 자동차로 30분 가량 떨어진 곳에 오아시스가 있다.

오아시스 앞으로는 거대한 석굴이 서 있다.

 

키질 석굴은 인도에서 불교를 받아들이던 3~4세기부터 조성되기 시작했다.

절벽에 굴을 파고 그 내부에 석굴과 불상을 꾸미는데

키질 석굴의 벽화는 쿠처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다.

 

키질 38석굴천궁기악도에는  

쿠처에서 사용한 악기가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완함횡적이다.

 

완함은 손으로 줄을 타는 관악기,

횡적은 가로 부는 현악기다. 

 

비파.

키질 벽화에 등장하는 악기는 고구려 벽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삼실총엔 완함이, 5회분 4호묘에서는 횡적이 있다.

 

쿠처인들 남녀노소가 즐긴다는 무카무

1,500년 된 쿠처의 전통 노래춤과 음악이다.

 

중앙아시아의 쿠처와 고구려 음악의 공통점은 악기외에 또 있을까?

 

"쿠처음악에는 우리나라 도드리음악과 아주 흡사한 게 있습니다.

악사는 큰악기를 연주하는데 '덩~딱!~ 덩~딱!~' 이러한 장단입니다.

                                                                                     - 전인평 교수

 

도드리장단은 인도의 음악에도 나타난다.

그렇다면 서역과 고구려에서 이와 같은 장단이 공통적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나타난다.

 

이번에는 도드리장단으로 요고를 연주해봤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요고와 현악기가 함께 연주되었음을 말해준다.

5회분 5호묘에는 이처럼 거문고와 요고가 함께 연주되는 장면이 보인다.

 

"거문고의 저음과 이 요고악기가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이 요고악기가 고음보다는 거문고의 저음과 잘 어울리게 만들어졌다고 생각됩니다."

                                                                             - 길석근, 국립국악원 정악단

 

서역과 고구려음악은 악기에만 머물지 않는다.

안악3호분 후실 무악도에는 연주자 옆에 무희가 등장한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무희는 발을 꼬고 있다.

발을 꼬는 무용은 인도 전통춤 까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발을 꼬는 자세는 제일 먼저 무대에 올라가서 처음 시작할 때 하는 자세가 되겠습니다."

                                                                                               - 오인우, 까탁무용가 

 

그렇다면 인도의 춤이 고구려에 전해진 것일까?

 

까탁외에 인도춤과 고구려의 춤의 공통점은 또 있다.

빙빙 도는 동작이다.

 

고구려춤을 기록한 신당서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또 한 기록은 호선무춤이 사마르칸트에서 온 춤임을 기록하고 있다.

 

"고리춤호선무인데 바람처럼 빠르게 돈다." - 신당서 21 예악지 11.

 

"사마르칸트 춤은 바람처럼 빠르게 돌아서 호선무란 이름을 얻었다." - 구당서 지9 음악2.

 

"조그만한 원형의 양탄자 위에서 바람처럼 빨리 도는 동작을 위주로 하는 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말 그 당시 고구려 시대때 가장 대표적인 춤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박재희 교수, 청주대 무용학과

 

중국 돈황의 석굴에도 호선무를 추는 무희가 등장한다.

중앙아시아의 호선무가 인도, 중국, 고구려까지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적이라고 하는 것은 아시아 대륙적인 것도 가지고 있으면서

또 고구려 풍토가 만들어내는, 또 고구려 인간 만들어내는 그런 관점에서

고구려의 춤과 곡예는 정말 국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문화가 오늘날 세계화, 국제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만

1,500년전 고구려이지만 오늘날에 못지않는 세계화, 국제화를 추구하고 있었다고 봅니다." 

                                                                                   - 고승길 교수, 중앙대 연극학과

 

 

4.  가연, 당이 달린 바지, 점무늬옷!~

           고구려인들의 의상은 아시아 북방유목민족 계통!~ 

 

 

"지금 제가 연주한 것은 고구려의 대표적인 악기로 알려진 거문고입니다.

학자들은 이 거문고도 외국의 악기를 개량한 것이라 말합니다.

 

작고 귀엽게 생긴 이 악기는 고분벽화속에 등장하는 요고입니다.

고구려인들이 사용했던 악기와 고구려인들이 추었던 춤은

멀리 인도에서부터 고구려까지 동아시아 일대가 공유한 국제문화와 같은 것입니다.

 

영토를 확장하고 외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는 과정에서

고구려는 국제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데요,

 

제가 입고 있는 이 의상도 고분벽화속에 고구려의 귀부인이 입고 있었던 옷입니다.

여기서도 고구려의 국제성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숙명여대 채금석 교수와 함께 고구려벽화속에 나타난 의상들을 살펴보았다.

 

무용총 수렵도에서 활을 쏘는 이 남자는 소매가 좁은 저고리에 바지를 입고 있다.

무척 활동적인 모습이다.

 

"한국사람들이 속하고 뿌리를 내렸던 지역은 동북아시아 지역입니다.

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특징은 대체로 기마와 수렵생활을 주로 했습니다.

 

말을 타고 주로 생활을 했기 때문에 이러한 생활에 편리하도록

좁은 소매나 좁은 바지가 아주 적합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채금석 교수, 숙명여대 의류학 전공

 

고분벽화를 토대로 채금석 교수가 복원한 옷이다.

성별이나 신분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고구려 의상에는 공통점이 있다.

 

 

  

"고구려인들의 의상에 구조적 특징을 보면

전체적으로 직선적인 재단과 또 소매는 직선적인 소매가 붙어있고

길이는 엉덩이선을 지나는 둔부선입니다.

 

앞이 열려져 있고, 목둘레선에서 옷의 가장자리에는 선이 붙어 있습니다.  

 

또 허리에는 를 매도록 되어있는, 

또 양쪽으로 팔을 벌리면 T형을 이루는데 이러한 스타일을 카프탄스타일이라고 하고,

 

이러한 스타일의 옷은 우리 고구려 뿐만 아니라

북방계통의 민족이 공통적으로 입었던 저고리 스타일입니다."

                                                                                                  - 채금석 교수

 

소매나 도련에 다른 천을 대는 가연장식은

고대 수메르인에서부터 이슬람지역, 쿠처에서도 나타나는데

고구려의 겉옷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활동성을 고려한 북방민족의 의상은

고구려인들이 입고 있는 바지에서도 드러난다.

 

"각저총에 나타난 등장인물의 포즈를 보면 다리를 거의 90도 각도로 벌리고 앉아 있습니다.

해서 당이 달려있는 바지와 달려있지 않는 바지를 살펴볼 때

당이 달려있는 바지는 이렇게 90도 각도가 용이하고 활동성에 편리함을 줄 수 있는데요,

그러나 당이 달려있지 않는 경우를 보면

다리를 벌린다거나 말을 타거나 달릴 때 상당히 불편한 것으로 보입니다."

                                                                                                         - 채금석 교수  

 

당을 댄 바지

북방기마민족들이 공통적으로 입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고구려인들이 점무늬 옷입었던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이 점무늬 옷은 아시아에서 유행했던 무늬였다.

중국 여인들의 화려한 옷에도 점무늬가 들어가 있다.

신강 투르판 지역에서는 점무늬 옷이 실물로 발견되기도 했다.

 

신강 투르판 아스타나 39호묘 출토 옷감

 

그렇다면 고구려인들은 옷감 위의 점무늬를 어떻게 만들었을까? 

 

현재 학계에선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지만

양경애 교수는 가장 간단한 염색법인 홀치기기법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고분벽화를 살펴봤을 때 홀치기기법을 할 때 콩을 사용했을 것으로 본다.

 

"콩을 사용했다는 문헌적인 증거는 아직 찾지못했지만

보통 이런 작은 무늬들이 반복해서 나오기 위해서는

작은 곡물이나 아니면 돌맹이 같은 것을 사용을 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고구려의 경우에는 한반도나 중국에 자생했던 콩을 손쉽게 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콩을 사용했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 양경애 교수, 충청대학 패션산업디자인과

 

일정한 간격으로 묶인 옷감을 붉은 염액속에 넣었다.

옷감에 물이 들 때 실로 묶인 부분만 염색이 되지 않는데 이것이 홀치기기법이다.

 

염색이 끝난 후 실을 풀어봤다.

마름모 모양의 무늬가 생겼다.

 

실을 묶은 간격과 콩의 색깔에 따라  무늬와 색깔도 다양하게 연출할 수 있다.

고구려인의 점무늬 옷들도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고구려의 옷, 그 속엔 세계가 담겨있다.

 

 

5. 초원길을 통한 적극적 문물 교류!~글로벌 고구려!~

 

 

"고구려는 다양한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저는 지금 고구려 강서대묘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여기에는 고구려 고분벽화의 걸작이라고 꼽히는 사신도가 있는데요,

좌청룡우백호, 남주작북현무가 그것입니다.

 

중국 산서 태원 금승촌 7호 당묘.

여기 이것은 중국 산서성에서 발견된 것으로 사신도 중에서 백호를 그린 것입니다.

 

중국의 벽화들은 대체로 생활풍속도를 바탕으로 하여 사실적입니다.

사신도의 백호를 그대로 호랑이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두 그림을 한 번 비교해보겠습니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중국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소재나 기법면에서 더욱 세련되게 중국의 벽화를 뛰어넘는 완성도를 보입니다.

 

 

 

이 벽화는 일본 다카마스 총에서 발굴된 고분벽화인데 사신도 중에서 천무를 표현한 것입니다.  

학자들은 다카마스 총의 사신도가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고구려는 외국의 문화를 고구려 고유의 것으로 잘 소화를 시켜서

더욱 수준높은 문화로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것입니다.

 

고구려가 서역의 문물을 폭넓게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은

서역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길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서역으로 가는 길 하면 보통 이 비단길을 떠올리게 되는데요,

그러나  고구려는 서역으로 통하는 또 다른 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부터 그 길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서역으로 가는 대표적인 길은 실크로드다.

 

그 실크로드 위에 돈황석굴이 있다. 

천여 개의 석굴엔 불상과 다양한 벽화가 남겨져 이곳은 세계고대미술관이라 불린다.

  

 

 

이것은 돈황석굴 220호 내부에 그려진 벽화다.

벽화의 한쪽에는 각국의 사신들이 모여있는데, 그 중에 한사람이 특이한 모자를 쓰고 있다.

모자에 깃이 달려있는 이것은 고구려조우관이다.

 

 

 

당나라 시대 외국의 사절단을 그린 왕회도(629년)에도 고구려 조우관이 등장한다.

백제, 신라의 사신과 함께 당나라에 온 고구려 사신이 조우관을 쓰고 있다.

돈황벽화에서 조우관을 쓴 인물은 바로 고구려 사신인 것이다. 

 

"당나라의 주변에 있는 주요한 국가들을 대표해서 사절단을 쭉 보냈는데

그 중에 고구려 사신이 등장하는 것은 당나라에서 생각할 때

자기들 주변에 있는 나라들 중에서 고구려가 동쪽에 있는 나라 중에서는 가장 대표적이다

이렇게 생각해서 고구려 사절단을 그린 것 같습니다."

                                                                                  - 노태돈 교수, 서울대 국사학과

 

고구려가 실크로드를 따라 서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국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고구려가 동방의 패자로 떠오르면서 중국과의 관계는 급속히 냉각된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고구려와 중국의 긴장관계를 알려주는 사건이 있다.

 

"수나라 양제가 돌궐 추장 계민의 막부에 행차하였을 때,

우리 사신이 마침 계민에게 가 있었다.

계민이 감히 우리 사신을 숨길 수 없어 함께 수양제를 만났다."

                                                               -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영양왕 18년(607년)

 

고구려는 몽골초원을 장악하고 있었던 돌궐과 비밀리에 접촉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목민 국가의 수장의 장막에서

수제국의 황제와 고구려의 사신이 마주치는 극적인 장면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고구려와 주변 유목민 국가 사이 빈번한 왕래와

상호 정치적, 군사적 관계 모색의 한 상징적 사건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 노태돈 교수 

 

중국 요서지방에 위치한 조양

서쪽으로는 중국과, 북쪽으로는 유목민족과 통할 수 있는 교통의 요지다. 

 

기록에 의하면 조양의 옛 지명인 유성에 고구려 시장이 있었다고 한다.

6세기, 이곳은 고구려의 영토였다.

 

"유성(조양) 즉 고구려 시장" - 신당서

 

고구려인들은 북방 유목민족과 접촉하기 위해  어떤 길을 따라 갔을까?

 

조양에서 출발해 북쪽으로 올라가면 광활한 초원지대가 펼쳐진다.

초원의 길은 오로혼으로 이어진다.

오르혼 인근 호서 차이나 분지에 비석이 하나 서 있다.

 

몽골 오르혼 강 유역 퀼테긴 비.

 

퀼테긴이라고 불리는 이 비석엔 돌궐문자가 빼곡히 새겨져 있다.

비문엔 6세기 이곳을 다녀간 사절단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과연 고구려는 이곳에 왔을까?

 

비문에 사용된 돌궐문자는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고대 투르크어다.

비문을 해독하기 위해 취재팀은 발굴 당시 비석의 사진을 입수한 경상대 정재훈 교수를 만났다.

 

"동면 4행에 보면 초대칸의 장례식에 여러 나라 사람들이 참석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 중에서 해가 뜨는 동쪽 나라부터 서쪽까지 여러 사신들을 열거하고 있는데요,

저희가 보통 외클리, 무글리라고 부르는 명칭은 일반적으로 고구려를 일컫는 말이라 봅니다." 

                                                                                         - 정재훈 교수, 경상대 사학 전공

  

비문속의 외클리, 즉 고구려였다.

고구려 사신이 초원길을 따라 이곳 오르혼에 온 것이다.

 

조양에서 오르혼으로 이어지는 초원길은 멀리 사마르칸트(우즈베키스탄)까지 이어진다.

사마르칸트는 동서양이 만나는 교통의 요지다.

 

8세기 이 지역을 이슬람이 장악하기전 아프라시압 언덕엔 고대 왕궁이 있었다.

지난 1965년 이 왕궁 유적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궁전의 벽면을 장식한 한 장의 벽화가 세상에 드러났다. 

 

현재 벽화는  인물의 윤곽선만 겨우 구분되는 심하게 훼손된 상태다.

그런데 희미한 인물의 윤곽선에서 낯익은 형태의 모자가 눈에 뛴다.

조우관을 쓴 고구려 사신이다.

 

 

 

이번엔 발굴 당시의 벽화 사진을 찾아보았다.

12명의 사신을 그린 이 화려한 채색벽화엔 조우관을 쓴 두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허리에 환두대도를 차고 머리에 조우관을 쓴 이 사람은 고구려 사신인 것이다.

 

벽화의 한쪽엔 소그드어로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고구려 사신이 언제 이곳에 다녀갔는지 알 수가 있었다.

 

명문엔 와르후만 왕이 인근 차가니안의 국왕이 보낸 사절을 만나 나눈 대화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와르후만 국왕은 어느 시대 사람일까?

 

"와르후만 국왕을 접견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와르후만은 중국 당서에 보면

당 고종 영휘 연간(650~655)에 사마르칸트 도독으로 책봉된 인물이라고 나옵니다."

                                                                                                    - 정수일, 고려대 사학과 강사

 

아프라시압 궁전벽화는 고구려가 멀리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에 다녀갔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비단길은 고구려가 서역과 교류할 수 있는 편리한 교통로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비단길 이외에도 북방유목과 서역을 잇는 또 하나의 길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초원의 길이었다. 

 

 

 

초원의 길은 고구려와 서역을 잇는 고대 고속도로였다.

고구려는 이 길을 통해 세계와 교류했던 것이다.

 

"우리는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 1,500년전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았습니다.

5세기 광개토대왕 이후 고구려는 광활한 대제국으로 성장해나갔습니다.

영토를 확장하며 다양한 민족을 통합하고 아울렀을 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와 교류하며 문물을 주고 받았습니다.

 

고구려인들은 그들의 풍요롭고 화려했던 시절을 벽화에 옮겨놓았습니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5~6세기 고구려는 닫혀있는 고구려가 아니라

세계를 향해 열려있는 글로벌 고구려였다고 말입니다."

 

 

 

 

말 그리는 사람, 말 먹이는 사람, 덕흥리벽화분 벽화의 마굿간


전호태(울산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半人半馬의 켄타우로스는 기마민족인 스키타이인에 대한 이미지로부터 유래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말과 일체가 되어 달려와 사람과 짐승을 붙잡아 평원 너머로 사라지는 사람들이 그리스인에게는 상체는 사람이고 하체는 말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이 때문인지 신화 속에서 켄타우로스는 술 마시고 싸우기 좋아하며 약탈을 즐기는 존재로 그려진다.

소를 쟁기 끄는 짐승 정도로 여기며 일정한 공간에 머물며 살던 사람들에게 말과 수레를 끌고 초원의 이곳저곳을 떠도는 삶은 이해되기도 어려웠고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낯선 것이었다. 스키타이인처럼 몇날 며칠을 말 위에서 먹고 자며, 심지어 말의 정맥에 대롱을 꼽아 말의 피를 마시면서 전쟁에 나서는 사람들이 그리스인에게는 말 그대로 괴물로 보였을 것이다.

문명세계 전체를 하나의 제국으로 만들고자 했던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1세도 북방의 기마민족 스키타이인의 세계는 정복할 수 없었고, 항우와의 쟁패에 승리하여 통일중국의 새 황제로 등극했던 漢 高祖 유방도 흉노의 선우에게는 쩔쩔맬 수밖에 없었다. 전한 무제의 명을 받은 장건이 20여 년에 걸친 서역행에 나선 것도 천리 길을 달려도 지치지 않는다는 汗血馬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한의 병사들에게 흉노의 기병은 공포의 대상 그 자체였고 天高馬肥의 계절 가을은 북방 흉노의 남하 약탈의 때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그림1) 안악3호분 벽화: 마구간


 

안악3호분 동쪽 곁방 서벽에는 마구간에서 건초 먹기에 바쁜 말 세 마리가 묘사되었다. 누르고, 붉고, 흰 말들은 구유를 향해 머리를 수그린 채 건초를 씹는데 열중하고 있다. 안장은 벗겨졌고 붉은 색 고삐는 주둥이 옆으로 늘어뜨려진 상태이다. 풍성한 갈기가 목과 어깨 앞부분을 덮었고, 다리는 짧고 튼튼하다. 재미있는 것은 누렁이는 눈길이 구유 안의 건초에 가 있지만, 붉은둥이는 주둥이는 구유를 향했지만 눈길은 옆의 누렁이쪽을 향한 듯하다는 사실이다. 두 말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니면 붉은둥이의 눈길이 아무 뜻 없이 곁을 향했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흰둥이의 표정은 머리 부분이 지워져 알 수 없으나 옆의 두 마리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제 밥 챙기기에 바쁜지도 모른다.



(그림2) 덕흥리벽화분 벽화: 마구간


덕흥리벽화분 널방 남벽에 그려진 마구간에도 세 마리의 말이 등장하는데, 표정이나 자세에서 서로 구별되지 않는다. 구유 앞에 나란히 서서 건초 먹기에 열중하는 모습은 안악3호분의 그것과 다르지 않으나 구유가 말의 가슴팍 높이에 설치되어 있어 세 마리 말 모두 고개를 숙이지 않고도 구유에 주둥이가 닿는다. 말의 큼직한 눈에는 별다른 표정이 담기지 않았고, 목덜미를 덮은 갈기도 그리 풍성한 편이 아니다. 어깨와 엉덩이가 두툼한 데 비해 네 다리는 짧고 가늘다. 과일나무 밑을 지나갈 정도로 작았다는 고구려의 果下馬라면 다리는 짧으면서도 굵고 갈기는 어깨를 덮을 정도여야 하지만 벽화 속의 말 세 마리는 이런 특징을 지니고 있지 않다.

벽화의 마구간 장면에서 오히려 눈길을 끄는 것은 말을 돌보는 사람들의 부산한 모습이다. 말 몸을 손보아주려는 듯 말 뒤에 서 있는 사람, 건초를 모으고 다듬는 듯이 보이는 마구간 뒤의 두 사람이 그들이다. 통 좁은 바지와 짧은 소매 저고리를 입은 것으로 보아 모두 말 돌보기를 도맡아하는 이 집 하인들일 것이다. 화가는 이들을 등장시켜 마구간의 말들이 늘 잘 돌보아야 하는 이 집의 귀중한 재산임을 알게 하려는 듯하다. 실제 당시의 좋은 말 한 마리의 값은 건장한 남자노비 몇을 살 수 있는 비용과 맞먹었다. 말은 전쟁과 사냥, 농사, 물품운반 등에 두루 쓰였고, 특별한 털빛을 지닌 것은 제의의 희생으로도 쓰였던 까닭이다. 안악3호분 벽화의 화가는 말이 지닌 이러한 가치와 의미를 염두에 두면서 마구간의 말들을 건장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그려내는 데에 필력을 모았다면, 덕흥리벽화분 벽화의 화가는 말을 돌보는 사람들을 함께 표현하여 말과 사람의 관계를 나타내려 한 것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