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성왕릉과 정릉사 / 평양

2013. 5. 30. 12:36우리 역사 바로알기

 

 

 

동명성왕

 

  고구려의 시조(BC 37~19 재위)
 
  성은 고(高). 이름은 주몽(朱蒙)·추모(皺牟)·상해(象解)·추몽(皺蒙)·중모(中牟)·중모(仲牟)·도모(都牟) 등으로 기록되어 전한다.
 
〈삼국사기〉·〈삼국유사〉·〈제왕운기〉·〈동국이상국집〉·〈광개토왕릉비문〉 등의 관련기사에 의하면, 천제(天帝)의 아들 해모수(解慕漱)와 정을 통하고 버림받은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가 태백산(太白山) 우발수(優渤水)에서 북부여(北扶餘)의 왕 금와(金蛙)를 만나 그의 궁중에 유폐되어 있었다. 어느 날 해모수가 햇빛이 되어 나타나 유화에게 잉태시켜 알을 낳게 했는데, 여기서 태어난 것이 주몽(부여의 속어로 '활을 잘 쏜다'는 뜻)이라고 전해진다.
 
  총명하고 활을 잘 쏘아 촉망받던 중 대소(帶素) 등 금와왕의 7명의 왕자가 그 재주를 시기하여 죽이려 하자 어머니의 권고로 마리(摩離)·오이(烏伊)·협보(陝父) 등과 함께 화를 피해 남쪽으로 도망갔다. 압록강의 지류인 동가강(佟佳江) 유역의 홀본(忽本 : 懷仁·桓仁)에 이르러 땅이 비옥하고 산천이 험준한 것을 보고 도읍으로 정했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성을 고라 하니, 대략 BC 37년에 해당된다. 당시 동가강 유역에는 여러 성읍국가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우세한 것이 비류국(沸流國 : 일명 多勿國)이었다. 비류국의 지배층도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주몽집단보다 먼저 이동해 정착한 집단이었다.
  주몽은 BC 36년 비류국의 왕인 송양(松讓)을 굴복시켜 합병했으며, BC 34년에는 성곽과 궁실을 지었다. 이듬해에는 행인국(荇人國)을 정복하고, 다시 BC 28년에는 북옥저(北沃沮)를 멸망시키는 등 여러 성읍국가들 사이에 연맹국가(聯盟國家)로의 통합운동을 전개, 국가기틀을 마련해갔다.
 
  BC 19년 4월 부여로부터 도망쳐온 아들 유리(類利)를 태자로 삼았다. 그해 9월에 죽자 용산(龍山)에서 장사지내고, 시호를 동명성왕이라 했다

 

 

 

 

 

북한의 동명왕릉

 

 

    동명성왕릉 입구입니다. 이런 것들이 역사를 보존하기 위한 것들이라기 보다 체제유지를

 

위한 수단이라는 점이 계속 마음에 걸렸습니다.

 

 

 

 

 

 

 

 

 

 

 

 

 

 

 

 

 

 

 

 

 

 

오래전에 제주도에서 옮겨다 심은 소나무들이라는 데. 이 나무들이 다 동명성왕릉쪽으로 휘었답니다.

 

 

바보온달과 평강공주도 만나고....사실여부는 모릅니다.

 

 

 

미술대학 학생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판매도합니다.

옆에는 안내원.

 

 

 

다시 평양시내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두분 할머니인지 아주머니인지...지고 가는 베낭이 너무 무거워 보입니다.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도 궁금하고...일설에 의하면 지방에서 평양에 사는 친척집에 식량을 구하러

올라온 분들이 아닌가...실제로 이런 일들이 많답니다.

 

 

 

 

 

 

 

 

그 유명한 주체사상탑입니다. 황장엽씨가 만들고....그리고  버리고 온 사상인데

이것 때문에 여러명 다쳤지요. 보기는 했지만 기분은 아주 안좋았습니다.

 

 

 

 

 

 

 

시내에 이런 아주머니도 있고...

 

 

 

이런 멋장이도 있습니다.

 

 

 

음료수 파는 상점도 있고...

 

 

 

공사중인 타워도 보입니다.

 

 

 

야외학습하는 아이들....

 

 

 

극장도 있습니다.

 

 

 

그래도 아이들 표정은 천진난만 해 보입니다. 평양에 살 정도로 성분이 좋아서 그렇겠지만....

 

 

 

평양냉면의 본산지인 옥류관입니다.

 

 

 

기본세팅이고...

 

 

 

식당내부

 

 

 

평양냉면입니다.

제 입맛에는 서울에서 먹었던 것과 큰차이는 없었습니다.

 

 

 

 

 

 

 

 

 

동명왕릉의 위치 ㅡ 북경 인근 창평현

 

 

 

                                                                            http://blog.daum.net/sabul358/18321751

 

 

                                                  http://blog.daum.net/sabul358/13937663

                                                  고려사에 국내성 경계에서 장성을 쌓았다고 했는데 마침 창평동쪽 통 주위에 장성유적이 남아있다.

 

 

    《대청일통지》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동병산(東屛山)은 복주(復州)에서 동쪽으로 10리 되는 곳에 있다. 살펴보건대, 《대명일통지》를 보면, “명산(明山)이 복주위(復州衛)에서 동쪽으로 10리 되는 곳에 있다.” 하였으며, 《원사(元史)》 지리지를 보면, “명왕산이 요양에서 동쪽으로 30리 되는 곳에 있다. 고구려 왕의 아들을 동명(東明)이라고 하는데, 그 위에다가 장사 지냈다. 지역을 가지고 상고해 보면 아마도 바로 이 산인 듯하다.” 하였다. 지금 복주의 동쪽에 있는 여러 산들 가운데에는 명산이라는 이름의 산이 없다. 그리고 요양에서 동쪽으로 30리 되는 곳은 복주의 지역이 아니다. 현지(縣志)를 보면, 또 지금의 동병산이 바로 명산이라고 의심하여 드디어는 동명왕묘(東明王墓)를 능묘조(陵墓條)에 끼워 넣었는데, 이는 모두 잘못된 것이다. 《요사》 지리지에 이르기를, “요양부에 명왕산이 있다.” 하였는바, 반드시 요양과 서로 가까운 곳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금의 명칭이 달라서 상고할 수가 없다.

                                                                                              해동역사 속집 제15권 > 지리고(地理考) 15

 

    원사는 명나라가 정리한 것이고 요사는 원나라가 정리한 것이다. 즉 위의 지리를 보면 원말 명초의 당시 지리를 알수 있다. 먼저 요사 지리지에 요양부에 명왕산이 있다라고 한 것은 원나라때 승상 탈탈이 요나라 기록을 정리하면서 쓴 것이니 원말의 요양부가 바로 고주몽 동명성왕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당시 원나라는 자신들이 요양이라 부른 곳을 요나라도 요양이라고 불렀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 곳이 바로 국내성인 것이다. 유리태왕이 국내성에서 부친의 장례를 치른 것이다. 또한 원사 지리지의 명왕산이 요양 동쪽 30리라고 하고 대명일통지의 명산이 복주위 동쪽1 0리라고 한다면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요나라말기

 

요양부(고구려 부여성이자 발해 동경성 관할 일대를 말함) --- 원나라 요양성은 서쪽30리에 있음----------명나라 복주위는 서쪽10리에 있음

 

 

                                 현재  복주성과 요양성 유적을 비교하면 거리가 100km가 훨씬 넘는다. 즉 명나라와 원나라기록의 요양성과 복주성이 지금 요양성과 복주성이 아님을 알수 있다.

 

  

   複州衛本複州,洪武五年六月置於舊複州城。十四年九月置衛。二十八年四月,州廢。西濱海。西南有長生島。又南有沙河,合麻河,西注於海。東有得利嬴城,元季士人築,洪武四年二月置遼東衛於此,尋徙。又南有樂古關。西有鹽場。北有鐵場。

명사

    복주위는 본래 복주(복주성)인데 남쪽에 사하가 있다. 동쪽에 요동위성이 있다. 남쪽에 낙고관이 있고 서쪽에 염장 북쪽에 철장이 있다.(낙고관의 관은 관문즉 장성이 있거나 큰 산이 양옆에 있어 지나가기 힘든 곳이 있다는 것이다. 마침 통주의 장성유적이 남아있으니 낙고관이 통주의 장성출발점임을 알수 있다)

 

定遼後衛本遼東衛,

명사

정료후위는 본래 요동위이다.

 

   최영이 공격하려 한 성이 바로 요동 위성이다. 즉 그 말은 태조 이성계의 10만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바로 맞닥뜨리는 명나라 최전방의 최고 요새가 바로 요동위성이라는 것이다. 또한 명과 청의 기록에 정료위를 고려영이라 부른다는 기록이 있다.

                                     http://cafe.daum.net/manjumongolcorea/TwTx/200 태조 이성계가 점령한 요성은 순의현 고성

 

    태조 이성계는 요성을 점령한 후에 원나라 금주와 복주에 사신을 보내 항복하라고 했다. 즉 입조를 요구한 것이다.안그러면 각오하라는 최후통첩도 보냈다. 즉 요성바로 다음이 복주성이었던 것이다. 복주성일대를 나중에 최영이 이성계를 시켜서 점령하라고 보낸 것이다. 명나라의 지리지에는 복주 동쪽에 요동위성즉 정료후위이자 고려영 바로 옆의 군사기지가 있다고 했다. 즉 지금 고려영은 창평현에 있으니  이 모든 지명이 전부 창평현근처의 지명인 것이다.

 

   내가 서문에 두개의 고지도를 보인 것은 바로 명나라 복주의 명산혹은 명왕산 혹은 용왕산혹은 용산이 모두 같은 곳을 말하는 것이며 전부 동명왕이 묻힌 곳을 말하는 것을 가리킴을 보이려고 한 것이다.

 

 

                                                                              http://blog.daum.net/sabul358/18321858

                                                                                               명나라복주위성

 

    한자가 한개가 식별이 안되는데 (아는 사람 가르쳐주길) 아마도 위나암성의 유래가 남아서 위로 시작하는 산성이 아직도 명나라때 남아 있던 모양이다.복주위성바로 남쪽이 고구려의 국내성인 지금 베이징이었으니 당연히 위나암성이 근처에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지도에는 바다가 보이니 베이징근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는데 중국학계가 이미 고대의 발해가 지금 제남시앞까지 였음을 발표했고 베이징근처도 고대에는 황하의 영향으로 비만 오면 굉장히 넓은 바다처럼 되었다. 명나라때 황하의 물줄기를 남쪽으로 돌리면서 지금 하북일대가 뭍으로 드러난 곳이 많아지면서 자연히 베이징일대도 물이 걷힌 것이다. 그러나 지금 지도에도 바다 海라는 지명이 저곳에 많이 남아있다.

 

 

 

 

동명왕릉 ㅡ 진파리 고분?

     동명왕릉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553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6>고구려 2대 유리명왕(1)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554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7>고구려 2대 유리명왕(2)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555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8>고구려 2대 유리명왕(3)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556
     하나도 모르고 쓰는 역사 이야기<9>고구려 2대 유리명왕(4) - 광인  http://tadream.tistory.com/557


 

<동명왕릉>

 

    동명왕의 무덤은 지금 평양에 있는 것이 유력한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에서 진파리 고분군의 이 무덤을 동명왕의 능으로 추정하는 이유는 우선 왕릉급의 무덤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겉으로 보기에는 단순해보여도 사실 몹시 복잡하고 정교한 구조로 깎아만든 돌을 무덤 입구에 썼으며, 바닥은 몇 겹으로 숯과 자갈을 섞어 층층이 쌓았다), 금관 조각이 발견되었고(겨우 그것만으로?) 벽화가 왕의 옷과 같은 색인 자색(안악 3호분 주인공의 옷과 같은 색)이 주류를 이루며, 마지막으로 이 무덤을 지키기 위해 지은 원찰 '정릉사'가 발견되었다는 점이 바로 이 무덤을 동명왕의 능으로 보게 하는 근거가 되었다고 북한 학계는 밝혔다.

 


 

 

<동명왕릉 내부구조 실측도>

 

    사실 고구려의 역사를 살펴보면, 고구려는 두 번씩이나 무덤이 적들의 손에 훼손당한 뼈아픈 과거가 있었다. 《삼국사》에 기록된 바, 봉상왕 5년(296) 고구려를 침공했던 선비족 전연(前燕)의 모용외가 봉상왕의 부왕이었던 서천왕의 무덤을 파헤치게 했고, 다시 고국원왕 에 쳐들어와서 수도를 작살내고 퇴각하던 모용황의 군사들은 고국원왕의 아버지인 미천왕의 무덤을 파서 아예 시체까지 훔쳐가버리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전란이 터질 때마다 왕의 무덤이 위협받는 것은 기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임진왜란 때만 하더라도 조선 성종과 중종의 무덤이 왜군에게 파헤쳐진 일도 있었다.)

 

    고구려로서는 시조왕의 무덤을 어떻게 해서든 적들의 손에서 지켜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 택한 방법이 무덤을 수도 바로 옆으로 옮겨와서 보호하는 것이었다고 북한의 학계에서는 주장한다.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던 427년, 졸본에 있던 동명왕릉을 평양으로 함께 옮겨왔다는 것이다. 이 점은 조선조의 실학자 순암 안정복이 《동사강목》에서도 주장한 바가 있다.

 

    동명(東明) 때 평양은 낙랑(樂浪)의 군치(郡治)가 되었는데, 동명이 어찌 이에 이를 수 있었겠는가? 《응제시주(應製詩註)》에,
“주몽이 졸본(卒本)에 도읍하였는데 비록 그 소재는 알 수 없으나, 당(唐) 이적(李勣)이 아뢴 말에 ‘국내성(國內城)으로부터 평양까지 17역(驛)이다.’ 하였으니 상거가 몹시 멀다. 아마 일찍이 구제궁(九梯宮)을 짓고 와서 놀다가 죽어 이곳에 장사지낸 것이리라.”

하니, 이 말 역시 잘못이다. 대개 고구려가 관구(毌丘)ㆍ모용(慕容)의 난을 만나 도읍이 잔파(殘破)되고 선왕의 능묘가 헐려 나라를 옮길 지경에 이르렀으니, 선왕의 능침도 따라 남쪽으로 옮겨서 동명의 묘를 지금의 중화(中和) 용산(龍山)에 장사지냈기로 이르는 말일 것이다. 고려 고종이 몽고난을 만나 강화로 천도하고 태조 이하 모든 능묘를 죄다 이장하였으니 이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다시 상고하건대 《광여기(廣輿記)》에
“요동 복주(復州)에 명왕산(明王山)이 있는데 고구려의 왕자 동명을 이곳에 장례하였다.”

하였으니, 혹시 처음 이곳에 장례한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동사강목> 부록 상권 상(上) 고이(考異) '동명을 용산에 장사지내다'

 

    하긴, 나라가 망하는데 시조의 무덤을 그 자리에 그냥 둔다는 것도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지. 그런데 평양으로 무덤을 옮겨온 뒤에도 졸본으로 사행을 떠나는 기록이 《삼국사》에 나오는 것에 대해서 의문이 생긴다. 북한에선 추모왕의 시신이 있는 무덤[墓]는 평양으로 옮기되, 졸본은 추모왕이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역사적인 성소라는 점을 감안해서 그곳에다 추모왕을 모시는 사당[廟]을 남겨놓은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금관가락국 김수로왕의 시신을 묻은 무덤 역시 사당[廟]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을 대고 보면 신빙성이 떨어진다. 게다가 장군총 같은 경우를 봐도 무덤과 사당을 함께 두고, 무덤 위에 사당을 만들었던 것이 확인되는데(무덤 위에서 건물 흔적이 발견됨) 어떻게 무덤과 사당을 분리해서 모시는 것이 평양에서 갑자기 나타났겠나.

 

    그래서 그 의문을 설명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 '허묘론'인데, 일종의 '가묘'로서 상징적인 의미로 두는 기념물이 평양과 졸본 둘 중 한 곳에 있었을 거란다. 어쩌면 졸본에 있는 것이 진짜이고 평양에 있는 것이 허묘이며, 북한 학자들 주장대로 평양에 있는 것이 진짜 무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인가. 가묘든 아니든, 그곳에 왕의 영혼이 머무르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는데. 자고로 무덤이니 사당이니 하는 것은 산 사람이 아니라 '영혼'을 위해서 마련된 공간이고 그곳에 '영혼'이 존재한다고 믿음으로서 생명을 얻는 공간이다. '영혼'이 머무르고 있다면 그곳이 비록 시신이 없는 사당이라 해도, 실제 시신을 묻은 무덤보다도 더 큰 의미를 지니게 된다. 즉 동명왕의 무덤이냐 사당이냐를 가릴 것이 아니라 동명왕의 영혼이 어디에 거하셨는지, 좁게는 이곳에 동명왕의 영혼이 머무른다는 믿음부터 먼저 지니지 못하면 허묘설이나 왕릉설도 껍데기뿐인 공리공론에 불과하다.

 

 


 

 

<동명왕릉 내부에는 연꽃무늬가 잔뜩 수놓여 있었다.>

 

    1970년대 초엽에 북한 정부에서 동명왕릉 내부를 재조사하면서 벽면을 덮고 있넌 석회가 씻겨 내려갔는데, 그 과정에서 현실(玄室)의 안쪽 벽을 덮고 있던 연꽃무늬 벽그림이 발견되었다. 지름 12cm 되는 보라색 바탕의 붉은 자색 연꽃무늬를 4.2cm 간격으로, 사방연속 무려 6백여 개를 그린 화려하고 장대한 벽그림. 그것이 발견된 것이 1973년 1월 23일의 일로, 처음에 찾아낸 104개의 연꽃 그림을 트레이싱지에 옮겨서 모서리마다 연꽃을 복원해보니 꼭 641개가 되었다고.(동명왕릉 조사에 참가했던 북한 고고학자 리정남 선생의 술회한 내용으로 <나의 북한문화유산답사기>에 실려있다)

 



 

<동명왕릉 내부>

 

북한 정부에서 나서서 지금의 모습으로 '개건'하기 전에는 봉분 높이가 8.5m에 지름이 22m 정도였는데, '위대한 수령(?)'께서 그걸 보고 '교시(?)'를 하셨단다. 1,500년이라는 세월 동안에 비바람에 깎여서 이만한 크기가 되었으니 본래 크기는 대체 얼마나 컸겠느냐고, 그래 그걸 계산해내라고(그게 근데 계산이 되긴 되나?) 해서 과학적으루다(?) 계산을 해봤더니 원래 높이는 11.5m, 지름이 31m였다는 계산을 얻어낼 수 있었단다.(대체 무슨 근거로 이런 계산을 해낸건지 참.)



 

<동명왕릉 천장>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 무덤은 고구려의 대표적 봉분양식을 모두 갖춘 것이고, 축조 시기가 장수왕이 재위하던 5세기와 일치한다는 점이다. 평양 천도 이전의 옛 수도(환도성이나 홀승골성)에 있던 왕릉을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다시 만들었다는 주장의 근거인지는 모르지만 통구의 돌각담무덤, 즉 돌을 층층이 쌓아서 만드는 적석총(장군총 같은)의 형태와 평양의 돌간흙무덤(석실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쌓아서 만드는)이 혼합된 소위 '돌각담무덤'의 형식을 동명왕릉은 띠고 있는 것이다. 3단의 정방형 돌축대를 쌓고 그 위에 봉분을 만들어서, 안에는 벽그림까지 그려넣은 이런 형태의 무덤은 용강큰무덤 말고는 없다고 한다.

 

 



 

<동명왕릉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고도의 기술을 갖고 만들어졌다>

 

 

    동명왕릉의 봉분 밑에 쌓은 축대는 단순한 치장이 아니다. 돌 윗면에다 턱을 주어서 윗돌이 밀려나지 않게 하면서, 위쪽으로 각도를 조금씩 좁혀서 쌓았다. 울퉁불퉁한 주춧돌의 단면 그대로 기둥을 잘라 세우는 석축기법을 가리켜서 '그랭이공법'이라고 하는데, 동명왕릉에서도 그러한 공법이 적용됐다. 봉분 역시 직선으로 쭉 네모뿔 모양으로 올라가다가 정상 부분에서 둥글게 마무리했다. 무덤 주위로는 우리나라 다른 왕릉들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소나무들이 둘러싸고 있다.

 

    북한에서 이 무덤을 동명왕의 무덤이라 주장하는 또 하나의 근거는 이 무덤이 속한 진파리 다른 무덤들이 모두 동명왕릉을 향하고 있는 배치라는 점이었다. 동명왕릉을 평양으로 옮겨오면서, 동명왕릉 옆에 함께 묻혔던(혹시 순장?!) 동명왕의 개국공신들의 무덤이 바로 진파리 고분군의 무덤이라는 것이다.(실제로 진파리 고분군 중에는 동명왕의 개국공신 가운데 한 명인 오이와 부분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무덤도 있다) 여타의 근거들을 통해서, 북한은 이 무덤을 동명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1993년 5월 14일(북한에서 동명왕의 2,295번째 생일이라고 말한 그 날)에 개건했다.(동명왕의 생일이 음력 4월 1일이라는 건 대체 어디서 보고 말한 거지?)


 

 

[1부] 4. 동명왕릉(東明王陵)

1993년 5월에 개건(改建)된 동명왕릉의 기단(基檀)은 한변 길이가 32m, 분묘 높이는 11.5m다. 묘앞의 좌우 양편에 호랑이·문무관·말 등의 석조상이 나란히 서 있고 능 앞에는 돌제단이 놓여 있다. 동명왕릉 묘역에 들어서는 입구 오른쪽에 개건 기념비를 세워놓았다.

이번 북한 문화유산 답사길에 나는 최상의 안내자를 만났다. 우리를 초청한 조선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측은 중앙력사박물관 리정남 (李定男.48) 연구사를 문화유산 전문가로 전기간 동행하도록 주선해 주었다.
리선생은 외모부터 조용한 선비풍인데, 말수도 적고 몸가짐도 차분하며 성격도 꼼꼼했다. 한마디로 나와는 정반대 되는 성품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금방 친해지게 됐다.
본래 어려서는 성격이 비슷해야 친구가 되지만 나이들어 만날 때는 달라야 마찰도 없고 마음이 편한 법이다. 리선생은 학문태도 또한 치밀한 연구자의 면모가 있어 유물의 제작연도는 물론 날짜와 숫자 및 크기까지 다 외고 있었다.
더욱이 그는 50년만에 남한에서 찾아온 이방인 아닌 이방인을 위해 문화유산에 대한 남한측 학술용어를 모두 알아두고 있었다.

나또한 북한을 방문하기 앞서 북한의 고고미술사 용어를 많이 익혔다. 그리고 현지에서 말할 때면 되도록 그쪽 용어를 쓰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나와 리선생이 대화할 때면 나는 북한용어로 묻고 그는 남한용어로 대답하는 진기한 현상이 일어나곤 했다.

평양에 도착해 3일째 되는 날 우리의 답사일정은 동명왕릉과 진파리 (眞坡里) 고분떼, 그리고 동명왕릉을 위해 지은 절인 정릉사 (定陵寺) 로 잡혀 있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묵고 있는 초대소 별채 현관에 출발자들이 집결하는데, 여가를 틈타 답사자료를 확인하고자 리선생에게 물었다.

"리선생, 진파리 무덤들은 내부구조가 대개 돌칸흙무덤이죠?"
"네. 그렇습니다. 석실봉토분 (石室封土墳) 입니다."

평양시내를 벗어나 평양~원산간 고속도로를 올라타니 중화들판을 가로질러 곧게 뻗은 도로에는 눈앞에 거칠 것이 없다. 차창 밖으로는 들판너머 산자락 아래로 농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정겨운 마을을 이루고 있는 것이 50년대 활동사진 장면처럼 스쳐간다.

그렇게 10여분쯤 달렸을 때 도로 한쪽으로 '동명왕릉 3㎞' 라는 이정표가 나왔고 우리는 이내 동명왕릉에 도착했다. 동명왕릉은 평양시 외곽, 력포구역 룡산리 재령산 서쪽 가지줄기의 구릉 위에 있다. 옛날에는 여기가 평남 중화군 (中和郡) 진파리였기에 진파리 고분군으로 알려진 무덤 중 하나인 것이다.

동명왕릉은 내가 그동안 사진으로 보아온 것과는 엄청나게 달랐다. 대대적인 복원작업으로 능문 (陵門) , 석등, 문관.무관상, 제당 (祭堂) , 돌범 등이 거하게 배치돼 있다. 설명이 없어도 조선시대 왕릉을 고구려식으로 재해석한 20세기 유적인 것을 알겠다.
나는 리선생에게 물었다.

"언제 이렇게 복원했습니까?"
"1993년 5월14일에 개건 (改建) 했습니다."
"어떻게 날짜까지 다 기억하십니까?"
"아, 그날이 동명왕의 2천2백95회 생신날입니다. 왕의 생일이 음력 4월1일인 것을 톺아 (거슬러) 올라가서 양력으로 찾아낸 것이죠."

북한에서는 고구려의 건국연대를 '삼국사기' 에 나오는 기원전 37년보다 2백40년 앞선 기원전 277년으로 보고 있다. 잔디가 곱게 깔린 언덕 자락에 고즈넉이 자리잡고 있으리라고 상상했던 동명왕릉이 이처럼 거대한 영웅기념물로 바뀐 것을 보고 있자니 남쪽에서 아산 현충사라는 거창한 유적을 볼 때 일어난 감정과 똑같은 심사가 일어났다.

나는 시선을 건너 뛰어 동명왕릉을 살폈다. 동명왕릉은 역시 시조의 능다운 위용과 고구려 고분다운 힘이 있었다. 선입견이 아니더라도 부여 능산리의 아담한 고분, 경주 서악동의 화려한 고분과는 달리 굳세 보였다.

특히 동명왕릉은 고구려의 대표적인 세 가지 무덤 형식이 모두 갖춰져 있다. 본래 퉁거우 (通溝) 지안 (集安)에 있던 왕릉을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옮겨왔기 때문에 퉁거우의 돌각담무덤 (積石塚) 과 평양의 돌칸흙무덤 형식이 복합됐다. 그리고 내부엔 벽화까지 있는 벽화무덤이다.

그래서 동명왕릉의 외형을 보면 돌각담무덤식으로 3단의 정방형 돌축대를 쌓고 그 위에 봉분을 만들었다. 그런데 기단의 한변 길이가 31m이고 봉분의 높이는 11.5m이니 규모가 대단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단조로운 구성으로 별 치장이 있을 수 없는 무덤무지같지만 축대를 쌓은 것을 보면 돌 윗면에 턱을 주어 윗돌이 밀려나지 않게 했고, 위쪽으로 각도를 조금씩 좁혀 쌓아 튼튼하고 강인해 보인다. 거기에다 봉분이 그냥 둥근 게 아니라 네모뿔로 올라가는 직선의 맛이 있고, 그냥 직선이 아니라 정상에서 둥글게 마무리됐으며, 여기에다 왕릉다운 권위를 위함인지 무덤무지 사방으로 5m폭의 강자갈을 깔아 기품이 더욱 살아난다. 한마디로 고구려 맛이 나게 축조됐다.

1970년대 초 동명왕릉은 내부구조가 다시 조사됐다. 이때 벽면을 덮고 있던 석회를 씻어내리면서 벽화가 발견됐다. 벽화는 지름 12㎝의 연꽃무늬를 4.2㎝간격으로 해 사방연속무늬로 무려 6백여개를 덮은 것으로 발굴보고서는 전하고 있다. 무늬의 바탕은 보라색이고 연꽃은 붉은 자색이었다고 한다. 얼마나 고왔을까. 나는 리선생에게 물어보았다.

"동명왕릉 벽화가 언제 발견됐죠?"
"1974년 1월23일이지요. 제가 김일성 (金日成) 대학 졸업하고 맨 먼저 발굴에 참가한 것이 여기였습니다. 그때 우리가 연꽃 그림 1백4개를 찾아냈지요. 그래서 이것을 사도지 (트래싱지)에 옮겨 그리고 사귐점 (모서리) 마다 연꽃을 복원해 보니 6백41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보람 있었습니다."

나는 리선생의 발굴 얘기를 들으면서 왕릉의 모습을 꼼꼼히 살펴 보았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그동안 사진으로 보아온 봉분보다 많이 큰 것 같아 리선생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는데 대답은 예상 밖으로 간명했다.

"봉분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큽니다."
"네, 맞습니다.복원하기 전에는 높이가 8.5m밖에 안됐단 말입니다. 그런데 '위대한 수령님' 께서 1천5백년 동안 비바람에 깎여 이만한 크기로 된 것이니 본래 크기는 얼마만한 것이었나 계산하라고 교시하셨습니다. 그래서 학자분들이 과학적으로 계산해낸 결과 11.5m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에 동명왕릉에 기품과 권위를 부여해 준 것은 이곳 진파리 언덕의 솔밭이었다. 동명왕릉 주위로는 해묵은 노송이 숲을 이루고 있다. 안내원 설명으로는 모두 1천6백그루이고 수령은 4백~5백년이란다.

게다가 왕릉을 둘러싼 소나무들은 햇볕을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고 가지를 왕릉 쪽으로 시원스레 뻗치고는 줄기조차 기울이고 있으니 마치 군신이 왕에게 읍 (揖) 하는 형상이다.

답사를 다니면서 나는 아름다운 솔밭을 참 많이 보았다.
경주 남산의 삼릉계, 청도 운문사 계곡, 풍기 소수서원의 진입로, 밀양 낙동강변의 긴 늪숲, 평해 월송정의 해송밭, 봉화 반야계곡의 춘양목 자생지, 영월의 장릉 솔밭….

내 아직 백두산 홍송 천연림은 못 보았지만 진파리 솔밭은 그 어디에 뒤질 것 없는 연륜과 넓이와 품격을 갖추고 있다. 그것은 동명왕릉 못지 않은 거대한 유산이었다.

 

 

 

 

 

 


지난해 9월 북한을 방문환 북한문화유산조사단은 평양 역포구역 용산리에 있는 동명왕릉 앞의 정릉사터에서 고구려 옛 우물을 원형 그대로 볼 수 있었다. 8각 우물과 인접한 온돌 흔적이 단편적이나마 옛 사람의 지혜와 생활을 보여준다.

동명왕릉 주차장에 도착해 차에서 내려 관람객 진입로를 돌아서는데 길가에 작은 비석 하나가 곱상한 연꽃무늬 돌받침 위에 얹혀 있는 것이 보였다.
조선시대에 세운 하마비 (下馬碑) 였다. 유물에도 팔자가 있다는 것이 평소 내 생각이었는데 이 하마비는 오늘날까지 용케도 살아 남아 별 수 없이 하차비 (下車碑)가 됐다. 그렇다면 저기 쓰여있는 "대소인원 개하마 (大小人員 皆下馬)" 를 이제는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다 차에서 내려라" 로 번역해야 겠다.

동명왕릉 입구 오른편으로는 정릉사 (定陵寺) 라는 새 절이 있다. 옛날 동명왕릉의 능사 (陵寺) 로 세웠던 고구려시대 절간을 복원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 절이 정릉사라는 것을 알려준 것은 깨진 질그릇 파편 한 조각이었다. 그러니 유물에 팔자가 없다고 할 것인가.

정릉사 보광전에 모셔져 있는 불상은 우리네 사찰에서 보는 것들과 분위기가 조금은 달라 보였다.

정릉사는 동명왕의 명복을 빌고 동명왕릉을 지키기 위한 나라의 원찰 (願刹) 이었다. 그래서 정릉사는 여느 절과 격이 달랐다. 그러나 정릉사는 또다른 이유로 고구려의 멸망과 함께 퇴락의 길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통일국가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고구려의 이미지를 제거해야 했으니 정릉사가 무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정릉사는 일찍 폐사 (廢寺) 됐고 지금 우리는 정릉사에 대해 아무 기록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역사를 복원하는 것은 꼭 문자로 기록한 것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다 바스러진 기왓장 하나, 동강난 사금파리 하나로도 가늠할 때가 있다. 그것은 고고학과 미술사의 임무다.

정릉사의 존재가 확인되고 지금 그것을 복원할 수 있게 해 준 근거는 1974년 발굴 때 절 뒤편 우물에서 '능사' '정릉' 이라고 쓰여진 질그릇 파편이 나왔기 때문이다. 이 하잘 것 없는 것이 여기가 정릉사 자리고, 저 위쪽 커다란 봉분의 무덤이 동명왕릉이라는 사실을 입증해준 것이다. 깨진 질그릇 파편 하나가 이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고, 이 엄청난 대역사 (大役事) 를 일으켰던 것이다.

정릉사 수로.

정릉사는 전형적인 고구려식 가람배치를 하고 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정릉사는 한차례 창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여러번 증축과 개축이 있었던 모양인데, 결론적으로 처음에는 사당으로 출발해 능사로 승격되고 아울러 왕실의 별전 (別殿) 이 부속건물로 세워졌으며 나중엔 다시 사찰로 환원됐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래서 정릉사터 주춧돌의 배열상태는 매우 복잡하고 아주 넓다. 크게 5구역으로 나뉘며 확인된 건물만도 18채, 회랑 (回廊) 이 10개, 총면적 약 9천평이 된다. 경주 황룡사터와 비슷한 면적이다.

그러나 지금 복원해 놓은 정릉사는 그중 가장 핵심적인 공간, 그러니까 탑을 중심으로 한 기본 골격만 세운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전형적인 고구려식 가람배치다.

돌 다루는 솜씨 돋보여 절간 건축의 최소한 기본요소인 중문 (中門).탑.금당 (金堂).강당을 남북 일직선의 축선상에 두고 울타리는 회랑으로 두르는 것은 고구려.백제.신라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탑을 중심으로 해 금당을 동서로 두 채를 더 배치해 1탑 3금당으로 힘을 주었다. 탑을 끼고 디귿자로 돌았다고 해 회탑식 (回塔式) 이라고 한다. 이는 평양 청암리의 금강사 (金剛寺) 터와 기본을 같이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백제의 절간은 부여 정림사터가 말해주듯 남북 축선상에 건물을 배치하는 것 이외의 아무런 수식이 없다. 그래서 단순함을 멋으로 승화시키는 세련된 감각이 살아있다.
또 신라의 절은 경주 황룡사터가 보여주듯 1탑 3금당식인데 병렬식으로 늘어놓고는 나중엔 종루와 경루를 추가해 대단히 화려한 감각을 구사했다. 삼국의 미술은 이처럼 절간배치에도, 왕릉 무덤무지에도, 기왓장 무늬에도 달리 나타났으니 이런 것을 우리는 문화의 차이라고 한다.

나는 복원된 정릉사를 얼른 둘러보고는 바로 뒤편으로 나왔다. 복원된 정릉사는 비록 8각7층석탑이 목탑으로 세우지 않은 잘못을 범하고 있지만 기둥과 공포, 지붕과 단청 등을 고구려 고분벽화에 근거해 고구려 맛이 나게 하려는 노력이 읽혀지고 있으니 그 분위기를 맛본다는 것은 귀중한 경험이다. 더욱이 건축의 경우는 규모 (스케일)에 대한 감각을 익히는 것이 중요함을 잘 알고 있기에 조목조목 따져도 보았다.

그러나 나는 본래 유물의 복원이나 복원된 유물엔 큰 관심이 없다. 내 주장이라는 단서아래 하는 얘기지만 현대사회가 할 일은 창조이지 과거의 복원이 아니다.
유물과 유적은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며 복원은 일종의 파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우리는 모름지기 폐허의 주춧돌과 기왓장까지 사랑하는 마음으로 역사의 상처를 껴안고 살아야 한다.

정릉사 뒤편에는 그 '위대한' 질그릇 파편을 부둥켜 안고 1천년을 견뎌온 정말로 위대한 우물이 있다. 우물가에는 돌 잘 다루던 고구려사람들이 성 (城) 돌처럼 가지런히 쌓은 물도랑도 있고, 그 옆으로는 신기하게도 온돌자리가 굴뚝터와 함께 남아 있다.
잔디밭에는 동그랗고 네모나고 또 막돌로 야무지게 다져놓은 주춧돌이 한낮의 태양아래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중 가장 멋있는 것은 역시 우물이었다. 장방형의 넓적한 화강석으로 이를 꽉 맞춰 정8각형으로 세운 우물과 우물가에 넓게 깔아놓은 두툼한 고구려 전돌들은 고구려의 정서가 어떤 것인가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우물 안엔 상기도 샘이 솟고 있었다.

우물 뒤쪽 언덕으로는 키 작은 대추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나는 나무 그늘에 앉아 우물 한번 쳐다보고, 하늘 한번 쳐다보고, 온돌 한번 쳐다보고, 도랑 한번 쳐다보며 대구에 있는 나의 제자들과 서울에 있는 답사회 회원들을 생각했다.

돌이켜보건대 내가 그동안 답사다니며 나의 제자, 나의 회원들에게 안내한 곳은 조선시대.고려시대.통일신라시대.신라시대.백제시대.가야시대, 그리고 청동기시대 유적들이었을 뿐 고구려시대 답사는 아주 드물었다.
그런 생각이 있기에 충주 중원의 고구려비와 단양 영춘의 고구려산성인 온달산성을 곧잘 답사일정에 넣곤 해 온 것이다. 그런 것으로 고구려의 기상과 멋을 느끼려고 했고, 딴에는 그런 노력으로 뭔가 했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내 지금 이 정릉사의 뒤편 우물가에 앉아 저 힘있게 다듬은 고구려 석공의 손길을 생각하자니 그간 내가 맡아보려던 고구려 냄새는 정말로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나는 내 곁에 나의 제자와 나의 회원이 없는 것이 너무도 허전하게 느껴졌다.

말없이 절간 뒤편에 나와 이 외진 나뭇그늘에 마냥 앉아 있으려니 함께 간 통일문화연구소 김형수 (金炯洙) 차장이 나를 찾아 장난스럽게 재촉했다.
"교수선생, 여기서 뭐하고 계십니까. 모두들 점심 먹으러 가자고 기다리는데."
"'형수동무' 사진 취재는 잘 돼 갑니까?"
나 역시 장난기를 섞어 이렇게 묻자 金차장은 말없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우물에 각별히 신경 좀 써 주슈. 내 정릉사는 몰라도 우물 예찬은 꼭 한번 쓰고 싶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