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조선,대한제국의 마지막 현장 - 덕수궁,환구단,고종칭경기념비,만세문①

2014. 10. 12. 14:22여행 이야기






       

[탐방] 조선,대한제국의 마지막 현장 - 덕수궁,환구단,고종칭경기념비,만세문①
 양기용 기자 (발행일: 2014/07/04 11:45:50)

[탐방] 조선(朝鮮),대한제국(大漢帝國)의 마지막 현장 - 덕수궁(德壽宮),환구단(圜丘壇),고종즉위40년칭경기념비(稱慶紀念碑),만세문(萬歲門)①
-SPn 서울포스트, 양기용 기자


※ '환구단(圜丘壇)' 은 동일 제목 기사 '②'에 별도로 기록

▲ 대한제국 본궁으로 지어졌을 '덕수궁 석조전(石造殿)'. 서양식 화려한 건축술이 조선에 처음 상륙했고, 현존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일제 영향 때문인지, 그냥 '돌로 만들었다'는 뜻이 민망하다. 덕수전(德壽殿) 또는 광무전(光武殿) 이 어떨까. ⓒ20140701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1.

사관(史觀)에서 외세의 침탈에 의한 망함에 슬퍼하고 분노할 것인가, 그렇게 만들어져 왔던 나라에 분통을 터트릴 것인가, 그런 외세들을 칭송할 것인가,는 개인의 몫이다. 그렇다고해도 한일합방 이나 남북전쟁으로 인한 분단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자들 - 정신병동에 가야 할 사람이 총리실로 가겠다고 빠득빠득 우겼다면 변함없이 우리를 슬프게 하고 절망케 하는 사회임이 틀림없다. 단적인 예로, 구원파를 구원하는 방법은 오직 몽둥이 뿐! ... 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별로 즐겁지 않은 목적지로 발길을 옮겼다.

오늘 덕수궁 고궁길도 탐방목적이 아니 생업관련으로 들를 노정이기에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아주 관광을 하기로 했다.

7월 1일, 시청앞은 오전에 박원순 시장이 민선6기로 취임을 했다. 여전히 세월호 슬픔을 노란 리본 들이 대신하고 있다. 1973년 Tony Orlando&Dawn 이 부른 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d oak tree 는 : '3년동안 형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한 남자가 예전에 사랑했던 여인에게 편지를 써서, 아직도 자신을 사랑하고 맞을 준비가 되어 있으면 그 표시로 마을 오래된 참나무에 노란 리본을 묶어 두라고 한다. 그래서 그 남자는 고향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사람들에게 자기 사연을 들려 주었고 마을이 거의 다가오자 차마 자신이 확인할 수가 없어 버스 기사한테 부탁한다. 마을에 들어 선 버스 안은 환호로 가득차고 모퉁이 참나무에는 온통 노란 리본 이 흩날렸다' 는 이야기. 시기가 베트남 전에서 많은 미국병사가 희생됐느니, 그들의 심정과 무사 귀국을 바라는 가족들의 희망이 혼재했을 터,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던 가요다. 한국사회에서는 '군대가면 고무신 거꾸로 신기'가 유행하기도 했지.

지금 국가사회 발전을 위한 개혁과 개조는 세월호로 세월만 잘 흐르고 있다. 현재 사회 부조리 지수를 100으로 했을 때 집권 후반으로 접어든 박근혜 정부가 지수를 얼마만큼 끌어내릴까.

수문장교대식을 보고 덕수궁 돌담길로 접어들었다. 그 길로 가서 일을 보고 그 길로 나오며 정동 일대와 덕수궁, 환구단, 만세문까지를 그렸다. 시청을 가운데 두고 빙돌아 볼 이 곳들은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대한제국이 망해 일본에 합방된 현장이다. 조선은 경복궁이 본궁이라지만 외세침탈 등으로 이궁을 많이 했다.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대안문(大安門)이었던 덕수궁 동문이 대한문(大漢門)으로 바뀌고 큰 길(현 태평로)이 나면서 같은 방향의 환구단과 연계돼 정문 역할을 하게 된다.

한 때 궁 정문이 있던 돌담길을 돌아 서울시립미술관을 끼고 정동제일교회 사이에서 정동극장,이화여고쪽으로 갈려다 배제학당터를 지났다. 영국,캐나다,러시아대사관이 있는 정동(貞洞, 법정동)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貞陵)이 있었던 데에서 유래되었고 행정동은 소공동.

일을 마치고 다시 미술관 앞에 앉아 담배 한 대와 캔커피 를 하며 이것 저것 생각들을 정리하고 있던 차, 본듯한 사람이 거의 동시에 나를 보고 그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세상에나... 22년 전에 종로지점에서 같이 근무했고 16년 전 본사 타부서에서 자주 봤으니 당연하지, 게다가 밝고 건강하고 반듯한 칼라 의 직원이었으니... 시간 난 김에 차 한잔 마시자고하자 자기가 기어히 산다고 한다. 하긴 지점장까지 하고 퇴직했고 누구보다 내 사정 잘 안 동료였다.

▲ 수문장 교대식 재현. 위엄과 일체감을 갖는 '식(式)'이지만 대한문과 이들의 집체이동 '길'은 삐뚤어져 있다. ⓒ서울포스트

▲ 원래 '대안문(大安門)'은 대한제국 탄생으로 '대한문(大漢門)'으로 바뀌었다. ⓒ자료
▲ 준명당 앞 대한제국의 고종황제와 내신들 (眀=明) ⓒ서울포스트
▲ 황실 가족과 총독부 관료들 1918년 영친왕의 조선 방문 당시 황실 가족과 총독부 관료들이 연회 뒤 덕수궁 석조전에서 같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매일신보〉에도 실렸던 사진으로 가운데 앉은 양복 코트 차림의 노인이 고종이며 그의 왼쪽이 영친왕, 오른쪽이 순종이다. 영친왕 왼쪽에 있는 이가 당시 조선총독 하세가와다. 순종 오른쪽 첫번째 인물은 동생인 의친왕이며 두번째 인물은 총독부 실세였던 야마가타 정무총감이다. ⓒ자료


2.

덕수궁에서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는 2개(소). 광명문 안에는 창경궁 보루각에 있던 '자격루(自擊漏 물시계, 보물 제229호)'를 옮겨왔고, 중화전(중화문 포함, 보물 제819호).

덕수궁(경운궁) 정전은 중화전(中和殿)이다. 외세로 인한 난리가 많은 조선에 '화합'의 의지를 담은 정전이겠지만 한반도 유래로 중국,일본이 가장 큰 간섭관계였고 근대사에서는 미국, 국경만 조금 맞닿았지 지역적으로 뚝 떨어진 러시아 는 중립적이었거나 오히려 우호적이었다. 조선에서 열강들이 주도권싸움을 할 때, 정치적 실권을 잡은 명성황후도 친청,친일,친러 정책으로 수시로 바꿨고 그때마다 고종,대원군과도 마찰이 심각했다. 이미 풍양 조씨, 안동 김씨들에 의한 세도정치의 폐악을 겪은 고종도 여흥 민씨들에 의한 세도기로 보았을 것이다.

1895년 천인공노 한 을미사변 - 일본의 명성황후 시해사건. 고종,대원군의 미필적 고의도 엿보인 - 을 겪은 고종(1863~1907 재위)은 신변에 위협을 느껴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을 감행, 조선에 간섭이 덜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다. 이후 1997년(고종 35년, 광무 원년) 덕수궁으로 환어해 대한제국(대한大韓은 삼한三韓을 통합하였다는 뜻)을 선포, 연호를 광무(光武), 그해 10월 청나라 사신을 맞은 남별궁(南別宮)을 헐어 환구단(圜丘壇)을 세우고 그곳에서 황제즉위식과 함께 하늘에 제사했다.

고종 즉위 40년을 맞은 1902년(광무 6) 광화문 네거리(현 교보문고 옆) 에 '고종 즉위40년 칭경기념비(稱慶紀念碑)', 만세문(萬歲門)을 세웠으나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을 계기로 순종에게 양위하고 1919년 덕수궁 함녕전(咸寧殿 함령전,함영전)에서 승하(일본이 주도한 독살설)한다.

덕수궁은 300여년간 경운궁(慶運宮)이었으나 1907년 순종 즉위후 덕수궁(德壽宮)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여기서 주목할 건축물은 서양식으로 지어진 대한제국 정궁에 해당하는 석조전(石造殿). 화려한 양식의 건축술이 조선에 처음 상륙했고, 현존 가장 아름다운 양식 건축물이다. 다만 우리 전통에 낯설다는 것, 전 의 이름이 없다는 것, 그냥 '돌로 만들었다'는 뜻보다 덕수전(德壽殿) 또는 광무전(光武殿) 이 어떨까. 필자 주관으로 덕수궁 석조전을 본다면 대한제국의 본궁역할로 지어졌다고 본다. 그러나 고종폐위, 한일합방 등을 거치면서 일제가 의도적으로 궁을 매각,훼손했다는 생각이다.

고종이 서양식 석조건물을 짓게 된 계기는 1904년 경운궁에 불이나 목조가 위험하다는 인식 때문이었다고 한다. 석조전은 고종황제 재정고문이자 한성의 도로정비, 파고다공원(탑골공원) 조성에도 기여한 영국인 존 맥비리 브라운 경이 발의해 공사가 시작됐고, 영국인 하딩(J.R Harding)이 1899년께 설계, 1900년 착공. 일본의 오쿠라도보쿠구미라는 건설사가 외부 시공, 내부 시공사는 영국 크리스탈사와 메이플 사가 맡아 1910년 완공했다. 매일신보 1910년 11월 2일자 신문에는 당시 돈 300만원을 들여 석조전이 완성된 경위가 담겨 있다.

3층 석조건물로 1층에는 거실, 2층에는 접견실 및 홀, 3층에는 황제 황후의 침실·담화실·거실·욕실 등이 있다. 높은 기단 위에 장중한 도릭오더 의 기둥을 세우고 정면과 양 측면에 튀어나온 현관을 만들었다. 건물 앞의 정원과 함께 18세기 신고전주의 유럽 궁전의 건축을 모방했다. 1945년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장으로 사용되었으며 6·25전쟁 이후 1986년까지는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었다. 나중에 지어진 서관(별관, 석조전 별전)은 모조석재를 사용하였고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덕수궁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덕수궁 내 석조전 안내판 : 석조전은 고종이 침전 겸 편전으로 사용하려고, 영국인 하딩(J.R Harding)이 설계하여 1901년 완공하였다. 기단 위에 이오니아 식 기둥을 줄이어 세우고 중앙에 삼각형의 박공지붕을 얹은 19세기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었다. 건물의 전면과 동서 양면에 베란다 를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후에 미술관으로 사용했고, 1938년에 서관(西館)을 증축하면서 그 앞에 서양식 분수정원도 조성했다. 서관은 의석조(疑石造)로 지은 몸체 중앙에 코린트 식 기둥의 현관을 덧붙인 모습이다.]

▲ 오전 민선6기로 박원순 서울시장이 취임한 시청앞. 노란 리본 은 그냥 무심해 보인다. ⓒ서울포스트


▲ '유현문(惟賢門)' 은 오직 어진이가 출입하는 문이라는 뜻 ⓒ서울포스트


▲ 고종 즉위 40년 칭경기념비 와 만세문 ⓒ서울포스트

▲ 환구단(圜丘壇) 문으로 본 황궁우(皇穹宇) ⓒ서울포스트

▲ 청계천 첫번째 다리인 모전교(毛廛橋, 모전다리 모교)와 분수 ⓒ서울포스트

3.

지금 한국과 한반도는 주변정세가 급변할 조짐이 있다. 해방이후 지금까지 친일세력이 주도권을 잡고 있지만 보통의 국민에게 반일감정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미국 승인없이는 일본의 군사적 무장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일본은 연일 무장을 당연시하고 있다. 미국과 일본은 뗄래야 델 수 없는 관계인고로 태평양에서 주도권 행사와 대륙(중국) 견제를 위한 전략이라면, 한국(남한)의 효용가치는 북한의 1/10도 안돼 입지가 이제 급격히 하락할 가능성도 있다.

이 가운데 오바바 미국대통령이 얼마전에 우리나라를 방문했고 시진핑 중국주석 방한이나 일본과 북한의 밀월이 시작됨은 한반도가 스스로 제어 불가능한 상황이 올 수 있음도 나는 조심스럽게 예견한다.

그래서 필자는 나사가 반쯤 빠진 한국은 사회적으로 '규제강화', 민영화보다는 '국유화'로 강한 국가를 만들어 유사시 일사분란한 국론을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을 항상 해 왔다.

4.

구한말 상황을 다시 돌아보자.

고종,대원군,민비 가 서로 대립관계를 이룬 사이에서 개국이냐 쇄국이냐를 놓고 조선이 갈피를 못잡는 사이, 민비(명성황후가) 일가가 조정의 모든 실권을 장악한다. 이미 풍양 조씨, 안동 김씨에 이어 여흥 민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별기군(왜별기倭別技) 이라는 일본 군대에 호의를 베풀고 가난한 우리 군인은 홀대한 데서 임오군란(1882년)이 일어난다. 성난 군인들은 경복궁까지 침입해 황후를 살해할려고 하지만 민비는 충청도 장호원으로 피신. 황후가 다시 청나라를 끌어 들이자, 고종이 대원군에게 정권을 이양하지만, 진입한 청군은 임오군란 책임을 물어 대원군을 청국으로 유폐한다.

조선에서 청나라 세력이 강해지자 일본이 청일전쟁(1894~95)에서 승리해 다시 주도권을 잡은 사이, 청나라 호위속에 3년만에 대원군이 귀국한다. 이미 일본의 조선 간섭이 극에 달할 무렵, 민비가 다시 러시아를 끌어들이자 일본이 을미사변을 일으켜 황후를 시해하며, 1896년 위협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한다. 1897년 경운궁(덕수궁)으로 환어해 대한제국을 선포, 황제 지위를 가졌으나 러시아 의 입지가 강해지자, 일본이 러일전쟁1904~1905)을 일으켜 승리하여 조선내 모든 실권이 일본으로 기운다.

1905년 7월 미국은 일본과 가쓰라-태프트협약을 체결하여 미국은 필리핀, 일본의 조선지배를 승인, 영국도 동년 8월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하여 일본의 조선지배를 승인했다. 이런 가운데 1905년 9월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 주선으로 러일간에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중요한 내용은 일본이 조선에서 정치·군사·경제에 관한 특수이익을 가지며, 조선에 대하여 지도·보호·감리 등의 조처를 취할 수 있다는 것. 일본의 조선침략(식민지화)이 국제적으로 승인된 것이다.

일본은 이때부터 식민지화 작업을 예정대로 추진해 갔다. 1905년 11월 조선 정부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일본인 통감을 조선 황제 밑에 두는 을사조약(제2차 한일협약, 덕수궁 중명전에서)을 성립시켰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된다. 1907년 6월 고종황제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여 조선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했으나 아무 것도 변함없이 일본은 7월 그 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퇴위, 1910년 한일합방에 이른다.
(※ 민비=명성황후 를 호칭할 때 대부분 한국인이 매우 망설인 부분이다. 그러나 어떤 칭호를 하든, 옳다,그르다, 애국,비애국의 문제가 아니고 당 시대의 상황이다.)

▲ 대한제국 본궁으로 지어졌을 '덕수궁 석조전(石造殿)'. 서양식 화려한 건축술이 조선에 처음 상륙했고, 현존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일제 영향 때문인지, 그냥 '돌로 만들었다'는 뜻이 민망하다. 덕수전(德壽殿) 또는 광무전(光武殿) 이 어떨까. ⓒ20140701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수문장 교대식 재현. 위엄과 일체감을 갖는 '식(式)'이지만 대한문과 이들의 집체이동 '동선'은 삐뚤어져 있다. ⓒ서울포스트
▲ 원래 경운궁 동문 '대안문(大安門)'은 대한제국 탄생으로 '대한문(大漢門)'으로 바뀌었다. ⓒ자료
▲ 준명당 앞 대한제국의 고종황제와 내신들 ⓒ서울포스트
▲ 황실 가족과 총독부 관료들 1918년 영친왕의 조선 방문 당시 황실 가족과 총독부 관료들이 연회 뒤 덕수궁 석조전에서 같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매일신보〉에도 실렸던 사진으로 가운데 앉은 양복 코트 차림의 노인이 고종이며 그의 왼쪽이 영친왕, 오른쪽이 순종이다. 영친왕 왼쪽에 있는 이가 당시 조선총독 하세가와다. 순종 오른쪽 첫번째 인물은 동생인 의친왕이며 두번째 인물은 총독부 실세였던 야마가타 정무총감이다. ⓒ자료
▲ 오전 민선6기로 박원순 서울시장이 취임한 시청앞. 노란 리본 은 그냥 무심해 보인다. ⓒ서울포스트
▲ '유현문(惟賢門)' 은 오직 어진이가 출입하는 문이라는 뜻 ⓒ서울포스트
▲ 고종 즉위 40년 칭경기념비 와 만세문 ⓒ서울포스트
▲ 환구단(圜丘壇) 문으로 본 황궁우(皇穹宇) ⓒ서울포스트
▲ 청계천 첫번째 다리인 모전교(毛廛橋, 모전다리 모교)와 분수 ⓒ서울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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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덕수궁(德壽宮) - 위키백과 자료 참고

사적 제124호(1963년 1월 18일 지정),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

덕수궁(德壽宮)은 서울 중구 정동(貞洞)에 있는 조선 시대의 궁궐로서, 대한민국의 사적 제124호이며 면적은 63,069㎡이다. 원래의 면적은 현재보다 넓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축소되었다.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 조선 초기 세조가 남편을 잃고 궁궐을 떠나는 맏며느리 수빈 한씨(인수대비)를 가엽게 여겨 개인 사저로 마련해주었고, 이후 한씨의 차남 자산군이 보위에 오르게 되어 궁궐에 들어가자 장남인 월산대군이 물려받았다.

임진왜란 뒤 선조가 월산대군의 집을 임시로 왕의 거처로 쓰면서 궁이 되었다. 1608년 선조가 죽은 뒤 광해군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는데, 그해 완성된 창덕궁으로 떠나면서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붙여주었다.

1623년에는 인조가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또한, 고종이 황제로 즉위한 곳이기도 하다. 1897년(고종 34)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이 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비로소 궁궐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게 되었다.

1904년 큰 화재로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나, 1905년 즉조당(卽祚堂)·석어당(昔御堂)·경효전(景孝殿)·함녕전(咸寧殿) 등이 중건되었다. 1906년 대안문(大安門) 이 수리된 뒤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하고 정문으로 삼았다.

1907년(순종 1) 순종 즉위 후 고종은 궁호를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1] 1611년 ~ 1615년에는 조선의 정궁, 1897년 ~ 1907년에는 대한제국의 황궁이었다.

= 이름: 덕수궁이란 이름은 조선 시대 초부터 있었던 이름으로, 양위한 태조의 소어궁(所御宮)을 정종이 개성에 건립하여 덕수궁이라 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후 태종이 서울로 재환도하여 지금의 창경궁 부근에 태조의 궁을 현재의 덕수궁은 본래 세조의 큰아들인 의경세자 장(懿敬世子 暲)의 큰아들, 즉 세조의 큰손자인 월산대군의 개인 저택이었다. 의경세자는 20세에 죽었기 때문에 그의 부인인 수빈 한씨(인수대비)가 출궁하게 되자 나라에서 이 집을 지어 주고 두 아들과 함께 살게 하였다.

월산대군의 아우인 자을산군(者乙山君)이 성종으로 등극하면서 그의 어머니인 한씨도 입궐하게 되어 월산대군만이 거처하게 되었다.

= 행궁 시기:
월산대군이 사망한 지 104년이 지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생하였다. 의주로 난을 피하였던 선조가 1593년 음력 10월 한성으로 돌아와서 승하할 때까지 월산대군의 집을 임시 거처지로 사용하였다.

광해군 시대: 광해군은 1611년 11월 15일(광해군 3년 음력 10월 11일) 창덕궁으로 이거(移居) 하면서 이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이라 이름 지었다. 원래는 흥경궁(興慶宮)으로 하고자 하였으나, 광해군이 “이것은 전대의 궁호이니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합당한 궁호를 여러 개 써서 아뢰라.”라고 하였으므로, 경운궁이라고 이름 지었다.[2] 광해군은 창덕궁에 약 2개월간 거처하다가 그해 음력 12월 경운궁으로 다시 돌아왔는데, 이는 창덕궁에 거처하였던 노산군(魯山君)과 연산군(燕山君)이 그곳에서 폐위되어 불길한 궁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광해군이 다시 창덕궁으로 이거 하게 된 것은 1615년 음력 4월이었으며, 창덕궁·창경궁 등의 중건은 크게 진척시키면서도 경운궁은 영건공사에서 제외되어 그저 현상유지를 하는 정도에 그쳤다. 1618년에는 그의 계모(繼母)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경운궁에 유폐(幽閉)하고 대비의 칭호를 폐지하였으며, 경운궁은 서궁(西宮)이라 칭하게 되었다. 이는 경운궁이 서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1620년에는 건축되었던 궐내아문(闕內衙門) 등을 허물고 그 재목과 기와를 내사(內司)로 옮기니 이 궁은 더욱 퇴락하게 되었다. 1623년 음력 3월 서인(西人) 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 등이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陵陽君)을 추대하고 반정(反正)을 일으켜 인목대비의 명으로 광해군을 폐하고 능양군(仁祖)이 등극하게 되자 인조는 경운궁 별당에 행차하여 인목대비를 찾아뵙고 즉조당(卽祚堂)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이 궁에서 거처하지 않고 그로부터 8일 후 인목대비와 더불어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그해 음력 7월에는 30년간이나 궁역에 속해 있던 여러 가옥·대지를 본 주인에게 돌려줌으로써 경운궁은 한적한 별궁 정도로 축소되었다.

인조 이후: 그 후 영조는 1773년(영조 49), 즉 선조의 환도어거(還都御居) 3주갑(三週甲: 60년이 3번, 곧 180년 지남)을 맞이하는 해의 2월 21일(음력 2월 1일) 세손(후의 정조)과 함께 경운궁의 즉조당에서 선조의 고생을 회상하면서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고종도 1876년(고종 13) 즉조당에서 전배(展拜)하였다.

이후 1897년부터 1907년까지 대한제국 시기에 황제가 정무를 보던 법궁(法宮) 역할을 담당하였다. 1904년에 불이 나 궁궐의 상당 부분이 소실된 후 중건이 시도되었는데, 당시 국가의 정치 상황이나 재정 여건상 궁궐 권역과 건물 규모에 맞지 않은 축소가 있었다.

1907년 12월에 헤이그 밀사 사건의 여파로 고종이 일본의 강압으로 퇴위한 후 경운궁에 머물렀는데, 이때 고종의 궁호(宮號)를 “덕수”(德壽)라고 하였기 때문에 덕수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 순종은 창덕궁으로 이어하였다.

= 전각의 연혁:
고종 순종 시대: 1897년(건양 2) 2월 20일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이곳으로 옮겨오게 되자 이 궁은 다시 궁궐로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그해에도 공사는 계속되어 선원전(璿源殿)·함녕전(咸寧殿)·보문각(普文閣)·사성당(思成堂) 등이 축조되었다. 고종이 이곳을 궁궐로 정한 이면에는 주위에 러시아·영국·미국 등 강대국의 공사관이 있어 무슨 일이 생기면 즉시 보호를 요청하기 쉬운 곳이라는 고려도 있었을 것이다. 1981년 발굴조사에 의하여 러시아 공사관의 종탑 밑에는 밀실(密室)과 비밀통로가 마련되어 있었고, 이것은 덕수궁까지 연결되었다고 한다.

9월 17일에는 고종의 황제 즉위식이 있어 우선 소공동(小公洞)의 원구단(圓丘壇)에서 하늘에 고하는 제사를 지내고 이날부터 이 궁은 대한제국의 정궁(正宮)이 되었으며, 연호를 광무(光武)라 하였다.

1900년(광무 4)에는 담장 공사가 완성되었고 선원전에 불이 났으며, 봄에는 발전소의 설비가 끝나 궁내에 전기의 공급이 시작되었다. 또 이즈음에는 중화전(中和殿)과 관명전(觀明殿)·함녕전·선원전·경효전(景孝殿)·흥덕전(興德殿)·사성당·준명당(浚明堂)·경운당(景雲堂)·덕경당(德慶堂)·함유재(咸有齋)·청목재(淸穆齋)·보문각(普文閣)·문화각(文華閣)·수옥헌(漱玉軒)·정관헌(靜觀軒)·구성헌(九成軒)·인화문(仁化門 : 正門)·돈례문(敦禮門)·회극문(會極門)·영성문(永成門) 등의 전문(殿門)이 완성되었다.

1901년에는 경희궁(慶熙宮)으로 통하는 구름다리가 가설·개통되었고, 이듬해 2월에는 법전(法殿)의 공역을 시작하였다. 이 법전을 중화전이라 이름 지었다가 즉조당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 공사는 10월에 완공되고 중화문도 완공되었으며 관명전도 영건되었다. 이 당시의 중화전은 2층 건물로 규모가 장대하였으며 주위에 행각(行閣)이 있었다.

그러나 1904년 2월에 영선사(營繕司)에서 함녕전의 온돌을 수리하던 중 실수로 불이 나자 거센 바람을 타고 중화전·즉조당·석어당(昔御堂)의 중심곽 건물뿐만 아니라 신주(神主)를 모셨던 경효전과 어진(御眞)·예진(睿眞)을 봉안한 흠문각(欽文閣)도 불이 났으며, 화재를 면한 전각으로는 준명당·수옥헌·가정당(嘉靖堂)·돈덕전(惇德殿)·구성헌 등이 있었다. 고종은 그날로 피하고 전각에 대한 중건을 명하여 우선 즉조당·석어당·경효전·흠경각(欽敬閣)을 응급 복구하였다. 이 무렵 러일전쟁이 일어나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1905년 10월 21일 밤에는 일본의 압력으로 을사보호조약이 이곳에서 체결되는 등 혼란이 계속되어 공사가 활발하지 못하였다. 이런 와중에 중화전의 재건이 진행되었으므로 원래대로 2층으로 복구하지 못하고 단층으로 짓게 되었다.

중화전은 그해 1월부터 시작하여 경운궁의 정문인 대안문(大安門)을 수리하기로 하고 문의 명칭도 대한문(大漢門)으로 고쳤는데 이는 비서승(秘書丞)이며 풍수(風水)의 대가인 유시만(柳時滿)이 “국조연창(國祚延昌)하려면 ‘대안’을 ‘대한’으로 고쳐야 좋겠다.”라고 건의한 데서 비롯되었다. 대한문은 원래 높은 장대석의 기단이 있고 장엄한 돌계단이 있었으나 지금은 아스팔트 바닥에 묻혀 있다. 1907년 7월 일제의 횡포로 고종이 퇴위하고 태자인 순종(純宗)이 즉조당에서 즉위하였으며 연호를 융희(隆熙)라 개원(改元)하고 개원과 더불어 태황제궁(太皇帝宮)을 덕수궁이라 함으로써 경운궁은 덕수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순종은 그해 9월 17일 즉조당에 이어(移御) 하였다가 11월 13일 창덕궁으로 이어 하였다. 태황제는 양위 후 일시 수옥헌으로 옮겼으나 순종이 창덕궁으로 옮기자 다시 함녕전에 환어하여 1919년 1월 서거할 때까지 이곳에서 주로 거처하였다. 1910년(융희 4)에는 석조전(石造殿) 등 서양식 건물이 준공되었으나 태황제인 고종이 승하하게 되자 덕수궁도 궁궐로서의 수명이 끝나고 일제 강점기에는 빈 궁궐로 남아 있다가 이왕가미술관(李王家美術館)으로 되었다.

독립 이후: 한국전쟁 전에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석조전에서 개최된 바 있으며, 당시 석조전이 불타서 그 후 복구하여 국립박물관으로 사용하다가 왕궁유물전시관으로 사용되었다. 덕수궁은 그동안 담장들이 뒤로 밀려지고 또한 목책에서 사괴석(四塊石)담으로 바뀌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고, 정문인 대한문도 여러 차례 뒤쪽으로 밀려서 성기(盛期)에 즐비하던 전각들은 상당수 철거됐지만, 세종대왕의 동상 등 새로운 시설물이 들어서게 되었다.

= 건물 및 유적:
현재 덕수궁에는 정문인 대한문, 정전인 중화전과 중화문, 침전인 함녕전과 그 일곽(편전인 덕흥전과 동·서·남 행각 및 당시의 함녕전 정문이었던 광명문), 준명당·즉조당, 덕수궁 내에서는 유일한 2층 건물인 석어당, 그리고 정관헌·석조전 등의 건물이 남아 있는데, 덕수궁은 특히 서울에서 제일 먼저 근대 유럽의 고전주의파 건축 양식을 받아들인 진취적 궁궐로서 이채롭다.

- 대한문: 외부에서 바라본 대한문대한문(大漢門)의 덕수궁의 정문이다. 원래 경운궁의 정문은 덕수궁 남쪽 중화문 건너편에 있던 인화문(仁化門)이었다. 1904년 화재로 1906년 중화전 등을 재건하면서 동쪽의 대안문(大安門)을 대한문(大漢門)으로 이름을 고치고 궁의 정문으로 삼았다. 시청 앞 광장 쪽으로 동향하고 있는 현재의 대한문은 잦은 도로 확장 등으로 위치가 수차례 옮겨졌다. 원래 위치는 지금의 태평로 중앙선 부분이었다고 한다. 대한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평면에 다포식 우진각지붕으로 공포가 화려하다. 대한문은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과 함께 단층이다. 지금은 기단과 계단이 묻혀 있고, 소맷돌을 별도로 노출해 놓았다.

대한문 앞에서는 매일 세 번씩 왕궁수문장 교대의식이 치러지며, 한국어를 비롯해 일본어, 영어 등의 외국어로 교대의식에 대한 설명방송이 진행된다.

- 금천교: 정릉동천의 지류인 덕수궁 금천의 흐름을 약간 바꾸어 인공으로 명당수를 흐르게 하고, 놓은 돌다리이다. 2개의 나란한 홍예교로 되어 있다.

- 중화문: 중화전과 같은 양식으로 지어졌으며, 다포계 팔작지붕이다. 원래 회랑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헐려 현재 동부에 조금 남아 있다. 중화문 앞에는 원래 정문이었던 인화문(仁化門)이 있었다.

- 중화전: 덕수궁 중화전. 양편으로 품계석이 늘어서 있다.
중화전(中和殿)은 덕수궁의 정전(正殿)이다. 보물 819호로 지정되었고, 중화전이 세워진 월대는 상·하월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월대는 3단으로 되어 있다.

1902년에 처음 세워졌을 때는 본래 중층이었으나 1904년 화재로 1906년에 단층으로 다시 지었다.

투각곡병과 일월오악그림 병풍 앞에 어좌가 놓이고, 돌마당에는 문무백관의 지위와 위치를 나타낸 품계석이 세워져 있다. 원래 중화전 주변으로 회랑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철거되었으며 현재 중화문 동쪽에 일부가 남아 있다.

- 석조전: 석조전은 정면 54m, 너비 31m의 장대한 3층 석조 건물이다. 대한제국기 동안에 지어진 것으로,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신고전주의 양식의 석조 건물이다.

구한말 총세무사 브라운의 권유로 영국 사람 하딩(J. R. Harding)이 설계했다. [5] 심의석(한국인), 사바틴(러시아인), 오가와(일본인), 데이비슨(영국인) 등이 감독으로 1900년 기공하여 1909년 준공했다. 그리스 건축을 조형(祖型)으로 르네상스 양식을 가미한 이른바 콜로니얼 스타일(식민지 양식) 건물로서 같은 모양의 건물이 18세기 이후 영국 식민지의 여러 곳에 세워진 바 있다.

대한제국의 고종황제가 집무실과 외국사신들의 접견실로 사용할 목적에서 지어졌는데, 1층에서는 시종들이 대기하고, 2층은 황제의 접견실, 3층은 황제와 황후의 침실과 응접실로 사용되었다. 석조전의 정원으로 영국인 하딩의 설계로 같은 기간에 서양식 정원과 분수대가 세워졌다. [6] 석조전은 해방 후에는 국립박물관으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궁중유물전시관이 있었으나 경복궁 자리로 이전하였다.

석조전 서관은 1937년 나카무라 요시헤이의 설계로 이왕직박물관으로 지어졌다. 1950년 한국 전쟁 중 전화(戰火)를 입어 석조의 구조만을 남기고 전부 소실된 것을 1953년 수리하였으며,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으로 활용하다가 경복궁 옆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을 옮기고 공사를 하고 있다.

- 준명당: 준명당에서 바라본 석어당준명당(浚眀堂)은 1904년의 화재로 다시 지어졌다. 원래의 준명당은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897년에 새로 지은 내전(內殿)의 하나로 한때 고종이 거처하며 외국사신을 접견하던 곳으로, 후에 고종과 순종의 초상화를 봉안하였다.

준명당은 서쪽과 북쪽으로 가퇴를 덧달아 내놓았으며, 뒤쪽에 온돌방 4칸을 덧붙여 전체적으로 'ㄴ' 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 즉조당: 즉조당(卽祚堂)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덕수궁의 침전이다.

임진왜란으로 의주까지 피난 갔던 선조가 난이 수습된 뒤에 돌아와 시어소(時御所)로 사용하였다. 1623년 반정으로 인조가 그곳에서 즉위한 뒤에 즉조당이라 불린다.

1897년 고종이 경운궁으로 옮겨온 뒤 1902년 중화전이 건립될 때까지 정전으로 사용되었다. 1904년 화재 후 중건되었다. 이후 고종의 후비인 엄비(嚴妃)가 순종 융희 원년(1907년)부터 1911년 7월 승하할 때까지 거처하였다.

즉조당 앞에 놓인 괴석들은 1984년에 창경궁에서 옮겨온 것이다.

건물은 준명당과 복도 및 난간으로 연결되어 복합적인 구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 건물의 오른쪽과 뒤쪽에 각각 가퇴(假退)를 덧달아 내놓아 평면을 확장시키는 수법을 쓰고 있다. 정면을 기준으로 평면구성을 보면, 준명당과 복도로 연결된 맨 오른쪽 한 칸은 한 단 높게 구성된 누마루이며, 오른쪽 두 칸은 방과 방에 부속된 퇴이고, 그 옆은 대청과 개방된 현관, 맨 왼쪽 한 칸은 방이다.

- 석어당: 석어당(昔御堂)은 궁전에 지어진 건물 중 전각을 제외한 유일한 이층집이다. 1904년(광무 8년) 화재 후 중건하였고, 원래의 건물은 석어당은 선조 26년(1593년) 창건했었다. 한때 인목대비가 유폐되었던 곳이며, 역대 국왕들이 임진왜란 때의 어렵던 일을 회상하며 선조(宣祖)를 추모하던 곳이기도 하다.

석어당은 정면 8칸, 측면 3칸이고, 위층이 정면 6칸, 측면 1칸인 굴도리집 우진각지붕이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서쪽 끝의 칸에 설치되었고, 2층은 칸막이 없이 넓은 공간으로 구성되었고, 사방에 창을 내었다. 궁내 건물임에도 단청을 하지 않아 가식이 없고 검소하며 소박하여 친근감을 준다.

- 덕홍전: 덕홍전덕홍전(德弘殿)은 1911년에 건립된 덕수궁 내 현존 전각 중에 가장 나중에 건조된 전각으로 내외 귀빈이 황제를 알현하던 곳이다. 함녕전 서쪽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이익공 팔작지붕으로 기단은 장대석을 3단으로 돌려 쌓고 알맞은 기둥 높이에 간결한 익공을 얹어 처마를 받게 하였다. 용마루에는 양성(양쪽으로 회반죽을 바름)하고 귀 마루에는 용두와 잡상을 얹어 잡귀와 화재에 대비하였고 지붕은 측면에 합각부를 가지고 있다.

- 함녕전: 함녕전(咸寧殿)은 광무 1년(1897년)에 지어진 목조건물이다. 대형 건물로, 보물 제820호로 지정되었다. 정면 9칸, 측면 4칸에 한쪽 후면 4칸이 더 붙은 'ㄱ' 자형을 하고 있으며, 익공으로 결구된 간결한 건물이다.

고종(高宗)이 왕위를 물려준 다음 순종(純宗)이 창덕궁으로 옮기자 고종이 거처하던 침전(寢殿)이다.

함녕전 남쪽으로는 행각(行閣)이 있고 치중문(致中門)과 봉양문(鳳陽門)이 있으며 정문은 광명문(光明門)이다.

- 정관헌: 동양적인 요소가 가미된 서양식 정자인 정관헌(靜觀軒)은 1900년경에 건립되었다. 고종이 다과를 들고 음악을 감상하던 곳으로, 한때는 태조·고종·순종의 영정을 봉안하기도 하였다. 벽돌을 쌓아 올린 조적식(組積式) 벽체에 석조기둥을 세우고 건물 밖으로 목조의 가는 기둥을 둘러 퇴를 두르듯이 짜인 건물이다. 덕홍전 뒤편과 정관헌 사이에는 작고 아담한 후원이 있고 예전에는 러시아공사관으로 통하던 문이 있었다고 한다.

- 광명문: 광명문(光明門)은 함녕전의 정문으로, 1904년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는 문만 남아 있다. 현재 이곳에는 흥천사 범종, 자격루의 일부, 화차가 전시되어 있다.

-인화문: 인화문(仁化門)은 본래 덕수궁의 정문이었는데 대안문(大安門)(현재의 대한문)주변으로 도로가 나면서 그 기능을 상실했고 그 후 1905년의 화재로 타버렸다. 그 자리에 건극문(建極門)이 새로 세워졌었다. 대안문의 현판은 이왕가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현재는 건극문도 없는 상황이다.

- 양이재: 정관헌 너머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 옆에는 예전에 황실 교육기관으로 쓰이던 양이재가 있다. 현재는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장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 중명전: 평성문 밖에는 이 층 서양식 건물로 접견실 또는 연회장으로 쓰였고 을사조약이 체결되기도 했던 중명전(重明殿)이 있는데, 그 북쪽에 만희당(晩喜堂)·흠문각, 서쪽에 양복당(養福堂)·경효전 등이 있었다. 이 주변 일대의 건물 전체를 수옥헌(漱玉軒)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건물이 개인 소유가 되면서 사무실 등으로 이용되면서 심하게 훼손되었었는데, 2010년 복원 공사를 마쳤다.

없어진 건물: 선원전이 있던 지금 덕수초등학교와 전 경기여자중고등학교 일대에는 선원전 외에 사성당(思成堂)·흥덕전(興德殿)·흥복전(興福殿)·의효전(懿孝殿)이 있었다.

= 기타 유물:
광명문 자리에 국보 229호인 보루각 자격루(自擊漏)가 전시되어 있다. 이는, 세종 때 만들어진 것을 중종 29년(1536년)에 보완한 것이다. 흥천사 범종과 신기전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자료)

서울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서울 高宗 御極 40年 稱慶紀念碑), 속칭 비각(碑閣)은 대한제국의 고종 즉위 40년을 기념하여 1902년 세운 기념비이다. 이 기념비의 비문에는 고종이 황제를 칭한 것과, 광무라는 연호를 사용한 것, 그리고 고종이 즉위 40년이 된 사실 등을 기록하였다. 1969년 7월 28일 사적 171호로 지정되었다.

비문에는 고종(재위 1863년~1907년)이 즉위한 지 40년이 된 것과 51세가 되어 기로소에 입소한 것,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의 칭호를 쓰게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웠다고 쓰여 있다. 돌거북 위에 세워진 비석의 앞면에는 '대한제국 대황제 보령 망육순 어극사십년 칭경기념송'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당시 황태자인 순종이 글씨를 썼다.

비를 보호하기 위한 작은 규모의 비각에는 '기념비전'이라는 현판을 달아 격을 높였다. 비각은 2중의 기단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서 있는 정자형 건물로, 20세기 초 전통적인 건축양식이 사라지기 직전에 세워진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다.

건물의 남쪽으로 돌기둥 위에 '만세문'이라 새긴 무지개 모양의 문이 있다.

광복 후 1954년에 비각을 보수하면서, 일본인에게 팔렸던 돌로 된 만세문과 담을 찾아다가 일부를 복원하였고, 1979년에 전면적으로 다시 고쳐 옛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 본지 발행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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