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방] 조선,대한제국의 마지막 현장 - 덕수궁,환구단,고종칭경기념비,만세문②

2014. 10. 12. 14:28여행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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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조선,대한제국의 마지막 현장 - 덕수궁,환구단,고종칭경기념비,만세문②
 양기용 기자 (발행일: 2014/07/04 11:48:21)

[탐방] 조선(朝鮮),대한제국(大漢帝國)의 마지막 현장 - 덕수궁(德壽宮),환구단(圜丘壇),고종즉위40년칭경기념비(稱慶紀念碑),만세문(萬歲門)②
-SPn 서울포스트, 양기용 기자


▲ 환구단(圜丘壇) 문으로 본 황궁우(皇穹宇). 고종은 청나라 사신을 맞은 남별궁에 환구단을 짓고, 천자(天子)로서 하늘에 제를 올리며 대한제국 황제에 올랐다. 제를 올린 환구단은 일제때 철도호텔(지금 조선호텔)이 들어서고 황국우만 남아있다. ⓒ20140701,0703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시청 동남방에 위치한 환구단(圜丘壇)은 1935년 보물로 지정된 적이 있으나, 현재는 사적 제157호(1967년 7월 15일 지정). 고종이 황제국을 선언하고 천자(天子)로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단(壇)이다. 원구단(圓丘壇)이라고도 하는데, 예로부터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 하여 하늘에 제사지내는 단은 둥글게, 땅에 제사지내는 단은 모나게 쌓았기 때문.

자료 등을 참고하여 재구성하자면, '圜'은 '둥글다'는 뜻을 지닐 때 '원'이라고 읽고, '두르다'는 뜻을 지닐 때 '환'이라고 읽기 때문에 둥근 모양의 단 이므로 '원구단(圓丘壇)'으로 표시하겠다는 서울시의 주장은 빈약하다. 반면, 문화재청은 "독립신문 1897년 10월 12일자에 고제가 열린 곳을 환구단(圜丘壇)으로 표기해 당시 사람들이 이 문화재를 환구단으로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환구단터는 동그랗게 도드라진 한 언덕이다. 즉, 원구(圓丘 둥근 언덕)에 지어진 제단이 환구단(圜丘壇)으로 정리하면 되겠다. '협의의 '둥그런 제단'보다 광의의 '두르는 제단'이 설득력이 있다. 또 대한제국의 화폐단위 '환(圜)'에도 그 의미가 있을 수 있다.

환구단은 남별궁을 허물어 지었고, 거기에 철도호텔 이 들어섰기 때문에, 엄밀히 남별궁도 없어지고 환구단도 없어졌다. 자료에 남별궁지(南別宮址)가 있어 3일 다시 그 표지석을 찾아 갔으나 조선호텔 관계자가 본 적이 있다고 한 곳은 새로 정원이 조성되었고 2014년 개관 100년을 알리는 호텔 표지판이 서 있었다. [서울포스트가 문화재청에 남별궁터 재표지 의뢰할 예정, 환구단은 2년 후 신위판(神位版)을 모신 황궁우(皇穹宇)가 조성(1899년, 광무 3)되어 현재까지 남아있는고로 '환구단'으로 보아도 무리는 없다.]

▲ 좌측 황궁우 와 우측 원추형의 환구단. 고종의 '남별궁즉위식장'이 이채롭다. ⓒ서울포스트
▲ 철도호텔에서 찍은듯한 사진. 서울시청과 조선총독부 건물이 보인다. ⓒ서울포스트

▲ 남별궁지(南別宮址 남별궁터). 태종때 경정공주(慶貞公主)의 남편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조대림(趙大臨)에게 이 땅을 준 뒤부터 속칭 ‘소공주댁(小公主宅)’이라고 하였는데(서울 중구 '소공동' 의 유래), 선조때 의안군(義安君) 성(城)의 신궁이 되면서 남별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593년(선조 26)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이곳에 주둔한 이래 중국 사신이 머문 곳. 이후 환구단 → 철도호텔 → 조선호텔. ⓒ사진은 김태연 2011년


▲ 1960년대 없어졌다가 수유리 그린파크 호텔 터에서 발견, 2009년 현 장소로 옮겨 복원된 환구단 정문 ⓒ서울포스트


7월3일 자료
▲ 환구단 터. 황궁우 와 1914년 일본이 철도호텔을 지었다가 해방 후 삼성(신세계)이 1968년 리빌딩한 웨스틴 조선호텔. 한국전쟁때 미군 위문으로 온 마릴린 먼로 가 투숙했고 1968년 개관시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찾았다. ⓒ서울포스트



▲ 서울 한복판의 우리들 문화의식 ⓒ서울포스트

▲ 환구단(圜丘壇) 문으로 본 황궁우(皇穹宇). 고종은 청나라 사신을 맞은 남별궁에 환구단을 짓고, 천자(天子)로서 하늘에 제를 올리며 대한제국 황제에 올랐다. 제를 올린 환구단은 일제때 철도호텔(지금 조선호텔)이 들어서고 황국우만 남아있다. ⓒ20140701,0703 세상을향한넓은창 - 서울포스트 양기용
▲ 좌측 황궁우 와 우측 원추형의 환구단. 고종의 '남별궁즉위식장'이 이채롭다. ⓒ서울포스트
▲ 남별궁지(南別宮址 남별궁터). 태종때 경정공주(慶貞公主)의 남편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 조대림(趙大臨)에게 이 땅을 준 뒤부터 속칭 ‘소공주댁(小公主宅)’이라고 하였는데(서울 중구 '소공동' 의 유래), 선조때 의안군(義安君) 성(城)의 신궁이 되면서 남별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593년(선조 26)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이곳에 주둔한 이래 중국 사신이 머문 곳. 이후 환구단 → 철도호텔 → 조선호텔. ⓒ사진은 김태연 2011년
▲ 철도호텔에서 찍은듯한 사진. 서울시청과 조선총독부 건물이 보인다. ⓒ서울포스트
▲ 1960년대 없어졌다가 수유리 그린파크 호텔 터에서 발견, 2009년 현 장소로 옮겨 복원된 환구단 정문 ⓒ서울포스트
▲ 환구단 터. 황궁우 와 1914년 일본이 철도호텔을 지었다가 해방 후 삼성(신세계)이 1968년 리빌딩한 웨스틴 조선호텔. 한국전쟁때 미군 위문으로 온 마릴린 먼로 가 투숙했고 1968년 개관시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찾았다(아래 사진). ⓒ서울포스트
▲ 서울 한복판의 우리들 문화의식 ⓒ서울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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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구단(圜丘壇) - 자료검색 등

고려 시대부터 하늘에 제사를 드리던 곳으로 광무 원년(1897)에 고종이 이 곳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제사를 드림.

사적 제157호로 원구단(圓)이라고도 한다. 고려 시대부터 유교적인 의례에 따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단으로 하늘을 상징하여 제단의 형태가 둥근 모양이다. 그러나 고려말 배원친명정책 이후 원구제는 폐지되었다. 조선이 건국된 이후 성리학적인 명분론에 따라 제후국가인 조선에서 '천자의 제천의례'인 원구제를 거행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큰 가뭄이나 비상 사태에 최후의 기우 대상으로 방편적으로만 거행되었다.

이곳에 중국사신을 접대한 남별궁(南別宮 남별궁터,남별궁지)으로 사용하다가 1897년(광무 1) 조선이 국호를 대한제국이라고 고친 이후 환구단이 다시 건립되었고 이 곳에서 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면서 제사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때 만들어진 환구단은 화강암으로 된 3층의 단이며, 중앙 상부는 금색으로 칠한 원추형(圓錐形)의 지붕이었다. 환구단에는 하늘과 땅, 별과 천지만물에 깃든 신의 신위(神位)를 모시고 동지(冬至)나 새해 첫날에 제천 의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나 1914년 일본은 환구단을 헐고 그 자리에 총독부 철도호텔을 세웠으며, 이 건물은 1968년에 지금의 조선호텔(웨스틴 조선호텔) 건물로 대치되었다.

황궁우(皇穹宇)는 화강암 기단 위에 세워진 3층의 팔각 정자로, 환구단이 조성된 2년 후인 1899년(광무 3년)에 환구의 북쪽에 건립하여 신위판(神位版)을 모셨다. 황궁우의 건물 내부는 통층(通層)으로, 3층은 각 면에 3개씩의 창을 냈으며, 천장의 칠조룡(七爪龍) 조각은 황제를 상징한다. 황궁우 앞에는 1902년(광무 6년)에 고종의 즉위 40년을 기념하기 위한 돌로 만든 북(石鼓)을 세웠는데, 이 북은 제천을 위한 악기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몸체에는 화려하게 조각된 용(龍) 무늬가 있다.

환구단과 황궁우는 당시 고종이 황제로서 제천 의례를 행하던 곳으로, 예로부터 천자라고 주장해 온 중국이나 천황이라고 주장해 온 일본과 대등한 자격으로 서기 위해 황제국의 위용을 과시하는 한편 서구 열강에 대해 독립적인 국가상을 보여주고자 했던 정치적ㆍ역사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현재는 황궁우와 3개의 돌북, 그리고 석조 대문만이 남아 있다.

한편, 1960년대 해체되어 없어진 것으로 알려진 환구단의 정문이 2007년 8월 강북구 우이동 옛 그린파크호텔 터에서 발견된 것을 현 위치로 옮겨 2009년 12월에 복원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 본지 발행인 (양기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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