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외교,고분벽화의 내용과 의미, 고구려의 천문학 /원광대 김용만

2013. 6. 1. 01:56우리 역사 바로알기

 

 

 

  <고구려의 발견>책에서 지금도 내가 좀 아쉬운 것은 고구려의 5-6세기 고구려의 대외관계를 다룬 부분이 좀 어색했다는 점이었습니다. 광개토대왕의 왜국정벌, 고구려와 북위의 관계 등에 있어서는 좀 성급한 견해를 보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아래 글에서는 그 책의 이러한 단점을 보완한 글을 썼습니다.



@@@ 고구려의 발견 8 - 고구려의 외교 - 북위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김 용 만

  외교란 국가와 국가간의 교섭관계이며, 외교적 위상은 각국의 국력을 평가하는 잣대이다.

장수왕과 문자명왕에 이르는 시기는 고구려가 대제국의 번영을 누린 전성기였다. 하지만, 기록에는 고구려가 당시 북중국을 지배하던 북위(北魏)에게 빈번하게 조공(朝貢)이란 방식을 통해 신하의 예를 했다고 한다. 강력한 고구려도 중국의 국가에게는 조공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아니다. 시대에 따라 외교적 위상은 바뀌기 마련이다. 기록의 전후관계를 살펴보면 고구려가 조공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북위에게 떵떵거리며 외교적 우위를 누리며 실익을 챙기고 있었다.

북위와의 첫 만남은 435년 고구려를 종주국으로 대하고 있던 북연(北燕)이 북위의 공격을 받아 멸망의 지경에 이르렀을 때였다. 고구려는 북연왕의 도움 요청을 받고, 장군을 보내 북연왕과 백성들을 고구려로 송환한다. 이 작전을 지켜보던 북위의 군대는 고구려가 두려워 나서지 못했다고 한다. 북위는 이 일로 고구려를 공격할 것인가에 대해 논쟁을 벌이나, 결국 포기하고 만다. 이후 북위와 고구려는 서로 사신을 보내지 않는 냉전관계에 돌입한다.

그러자 고구려는 북위와 적대관계에 있던 남중국의 지배자인 송(宋)과 연합해서 북위를 공격할 것을 계획했다. 또 북위와 적대관계에 있던 북방의 유연(柔然)과 평화관계를 유지하며 유연과 송을 연결시켜주어 북위를 삼면에서 포위하는 압박전술을 구사했다. 고구려는 적극적인 외교력으로 북위를 견제하는데 성공한다.

462년 북위와 사신왕래를 재개한 후 고구려는 대량의 무역거래를 하며 급격히 관계를 회복한다. 470년대에 백제와 물길(勿吉)이 북위에게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하자는 요청을 했으나, 북위는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고구려에 이 사실을 통보해준다. 북위는 주변 여러 나라와 교섭했음에도 고구려를 남중국의 제(齊)와 함께 최고의 대외교섭국가로 우대했다.

장수왕과 문자명왕이 죽었을 때 북위에서 보여준 태도는 우리의 상식을 넘어선다. 북위의 고조는 소위모와 포심의라는 상례(喪禮)복장을 하고 동쪽 교외에 나가 장수왕의 죽음을 애도하는 의식을 했다. 북위의 정권을 쥔 영태후는 동쪽 사당에 가서 문자왕의 죽음을 애도했었다. 또한 508년 북위는 산동성에 고구려 시조를 제사지내는 고려묘(廟)라는 사당을 세우기도 했다. 중국의 어떤 나라도 다른 나라 왕이 죽었다고 왕이 직접 애도식을 주관하고 그 나라의 시조를 제사하는 사당을 지어준 사례는 없었다.

왜 이렇게 북위는 고구려에 대해 최상의 예를 갖춘 것일까. 당시 북위는 적대국으로 둘러싸여 늘 전쟁을 치러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막강한 기마군단을 보유하고 강력한 해군력을 갖고 있던 고구려 마저 적으로 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고구려는 강력한 힘으로 주변제국을 통솔하는 고구려 중심의 세계질서를 구축하고 있었다. 여기에 당시 국제정세를 정확히 읽고 그것을 활용한 뛰어난 외교력이 있었기 때문에 5∼6세기에는 큰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를 누리며 번영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과거에는 우리가 외교등신이 아니라, 외교천재였던 것이다.




@@@ 고구려의 발견 9 - 고분벽화의 내용과 의미

                                                                                                              김 용 만

  세계적 문화유산인 고구려 고분벽화. 고분벽화는 과연 무엇이고, 어떤 내용과 의미가 있을까. 또 왜 고구려 고분벽화인가?

고분벽화는 집안과 환인, 평양을 비롯한 평안남도와 안학지방을 중심으로 약 95기의 고분에서 발견되었다. 고분벽화는 고구려 사람들이 직접 그린 당시대의 사회상과 그들의 정신세계를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고구려를 알 수 있는 1급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고분벽화는 죽은 자를 위한 예술이다. 고구려 사람들은 영혼불멸을 믿었고, 영혼이 무덤에서 거주한다고 생각하여 무덤을 튼튼하게 만들었고, 묘지기(守墓人)를 두고 그것을 보호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집안지역에 12,358기라는 엄청난 수의 고분은 고구려인들의 사후세계에 대한 관심, 무덤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음을 알게 한다.

이러한 고구려였기에 고분벽화가 그려지자, 세계에서 가장 잘 발달할 수 있었다. 벽화는 죽은 자의 생전에 즐거웠던 삶을 기억하고, 죽어서는 영혼세계에 가서 다시 재생하거나, 영원히 사는 신이나 신선(神仙)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려졌다. 나쁜 기운이 들어와 영혼의 안식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호위무사나 악령을 쫓는 호위신령인 사신(四神)을 그리기도 했다.

벽화의 내용은 크게 생활풍속을 그린 것, 장식무늬를 그린 것, 사신도를 그린 것으로 구분된다.
생활풍속도를 그린 안악3호분은 왕릉급 무덤으로 고분벽화에서 첫손에 꼽을 대작인 250명과 함께 묘주인공이 행차하는 대행렬도가 그려져 있다. 덕흥리고분은 유주자사를 지낸 진(鎭)의 무덤으로 풍부한 내용이 담긴 신화세계가 묘사되어 있고, 생전에 부하들로부터 업무를 보고 받는 그림을 비롯해 집안생활과 공적생활 장면이 그려져 있다. 생동감 넘치는 수렵도가 그려진 무용총, 다양한 놀이장면이 그려진 장천1호분 등에서 생활풍속도가 그려져 있어 당시 사회상을 보여주고 있다.
연꽃무늬를 비롯해 동심원무늬, 불꽃무늬, 구름무늬 등 다채로운 상징성을 가진 무늬를 무덤 내부에 그린 장식무늬계 고분벽화는 집안지역을 중심으로 5세기에 특히 유행하였는데 산연화총, 환문총, 동명왕릉 등이 있다.

고구려 후기에는 사신도를 벽화의 큰 주제로 삼게 되는데 시신을 넣어둔 널방 4벽의 동쪽에는 청룡, 서쪽에 백호, 남쪽에 두 마리의 주작, 북쪽에 현무를 각각 그렸다. 특히 신성함과 생동감이 우러나와 가장 완벽에 가까운 걸작으로 꼽히는 강서대묘의 현무도는 세계 고분벽화의 최고봉이다. 살아서 날아갈 듯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주작도와 백호도를 그린 강서중묘, 마치 어제 그린 그림을 보는 듯한 오회분4호묘와 5호묘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명품들이다.

이렇게 훌륭한 고구려의 고분벽화는 당시 중국의 남북조나 수·당의 고분벽화에 비해 훨씬 뛰어나다. 고분벽화는 단순한 장의(葬儀)예술이 아니라, 당시대의 문화수준을 반영하는 종합예술이란 면에서 고구려 문화가 당시 중국에 비해서도 높은 수준이었음을 알려준다.

아쉬운 것은 나날이 고분벽화가 훼손되어 사라지고 있고, 고분벽화가 그 가치에 비해 잘 알려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우리의 관심이 요구된다.




@@@ 고구려의 발견 10 - 고구려의 천문학

                                                                                                                      김 용 만

 『삼국사기』에는 정치, 군사, 외교, 사회 등에 관한 기사가 대부분이지만, 뜻밖에도 천문관측에 관한 기록이 많이 나오고 있다. 그 기록들은 현대 과학으로 분석해도 정확도가 매우 높다.

천문학은 제왕(帝王)의 학문으로 알려질 만큼 고대인들에게 중요한 학문이었다. 하늘을 관측하여 자연의 변화를 알아내는 일은 농업, 어업, 교통 등 실생활에 매우 필요한 일이었다. 하늘의 변화는 인간의 변화에 선행하며, 별자리가 인간세계와 상호 관련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천문관측은 꾸준히 행해졌다. 고구려 천문학 체계는 태양이 지나가는 길인 황도(黃道)에 위치한 28수(宿-별자리)와 하늘의 중심인 북극과 북두칠성, 해와 달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분벽화를 통해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데, 22기의 고분벽화에서 별자리 그림이 그려져 있다. 또 해와 달은 27기에서 그려져 있다. 진파리4호분 천장에는 91개의 금박으로 그려 넣어진 화려한 성좌도(星座圖)가 있고, 덕화리2호분에는 28수와 북두칠성이 그려져 있다. 28수 보다 중요시 된 것은 북두칠성으로 수명과 사후와 내세를 주관하는 별자리로 해와 달과 함께 많은 고분에서 그려져 있다. 특히 북두칠성과 마주하는 남두육성에 대한 관심도 대단했다.

별자리는 고대인들에게 시간과 방향 감각을 갖게 해준다. 고분벽화에는 북두칠성, 남두육성과 아울러 동쪽과 서쪽에 각기 쌍삼성(雙三星)이 그려져 있어 방향을 표시하는 지표가 되고 있다. 사신도, 일월상(日月象)과 함께 삼중체계로 고분벽화에서 방향을 표시하는 관념은 고구려의 독특한 방위체계이다. 이것은 세계의 중심이라는 의식이 없이는 설정될 수 없는 것이다. 강서대묘나 오회분4호묘 등의 천장에 우주의 중앙을 상징하는 황룡(黃龍)이 그려진 것은 이러한 관념체계의 산물이다.
고구려의 특징적인 천문관은 북극을 표시하는 방법에서도 나타난다. 중국은 천추(天樞)·사보(四輔)라는 표현방식에 의해 9개의 별로 북극자리를 표시했다. 고구려는 북극3성으로 북극성좌를 표시한다. 북극3성은 가운데별이 좌우별보다 더 크게 강조되어 있으며, 오회분4호묘와 5호묘, 통구사신총 등에서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표현방식은 14세기 고려 서곡리벽화묘에서도 보인다. 고구려 별자리 체계가 고려까지 계승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의 천문도로 알려진 천상열차분야지도는 서기 1세기경의 고구려 하늘을 그린 것으로 조선초에 발견되어 오늘에 전하고 있다. 1464개나 되는 별과 282개의 별자리, 북극을 중심으로 적도원, 황도원, 북극원, 경도선, 은하수까지 그려진 대단히 정확한 천문도다. 이것은 고구려의 높은 천문학 지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일본에서 발견된 기토라고분의 천체도는 고구려 하늘을 그린 것으로 고구려 천문지식이 일본에 전해진 구체적 증거가 되고 있다.

고구려의 뛰어난 천문학 수준은 당대의 높은 과학지식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천오백년의 세월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은 성벽과 무덤을 쌓은 건축술, 철갑옷을 만들던 금속가공기술, 각종 염료를 만든 화학기술 등 고구려의 과학지식은 우리의 상식을 넘어 크게 발달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