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발견 / 원광대 김용만

2013. 6. 1. 02:09우리 역사 바로알기

 

 

 @@@ 고구려의 발견 11 - 고수, 고당 문명대전

                                                                                                                       김 용 만

   살수대첩. 살수대첩은 우리 역사상 가장 크게 적군을 물리친 자랑스런 사건이지만, 우리에게 을지문덕 외에 다른 이미지는 남아있지 않은 것 같다.

살수대첩은 고구려와 수(隋)와의 4차례 전쟁중 두 번째 전쟁에서 고구려가 승리한 평양성, 요동성 전투와 함께 3대첩(大捷)의 하나이다. 30만 5천명이나 되는 적 별동대를 불과 2,700명만 살아서 돌아가게 한 엄청난 승리였다. 하지만, 612년 당시 수가 고구려를 공격해온 숫자는 무려 113만 3,800명. 보급대까지 합치면 300만에 육박하는 규모였다. 7세기초 고구려 인구가 결코 500만명을 넘지 않았다고 볼 때, 그것은 수소폭탄이 한반도 상공에 떨어진다는 공포심을 고구려인들에게 갖게 하기에 충분한 엄청한 병력이었다. 수가 진(陳)을 물리치고 통일 중국을 건설하기 위해 동원한 군사가 50만명에 불과했음을 고려한다면, 수는 나라의 운명을 걸고서 고구려를 공격해온 셈이다.

전쟁은 상식과 달리 수가 장차 고구려를 공격해올 것을 알고 사전에 전략적 우위를 차지하려는 고구려에 요서지역 침공에 의해 시작되었다. 598년 30만명의 수군(隋軍)은 고구려에 참혹하게 패했다. 그러나 아버지와 형을 죽인 패륜아 수 양제(楊帝)에 의해 더 큰 전쟁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수백만 대군을 동원했던 수는 살수에서 참패를 당했다. 이를 만회하려 613년과 614년 거듭 30만을 동원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이로 인해 결국 수가 멸망을 하게 되었다. 두나라의 전쟁은 인구비례로 볼 때 역사상 세계최대의 전쟁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수가 멸망한 후, 건국한 당(唐)도 645년 안시성싸움에서 패한 이후로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국운을 걸고 고구려를 공격했다. 고구려는 662년 연개소문이 사수(蛇水)에서 당나라 방효태군을 전멸시키는 등 효과적인 전쟁을 수행했었다. 고구려는 일방적 방어를 한 것이 아니라, 적의 보급로를 적극 차단하며 적의 후방을 공격하기도 했었다. 고구려군은 성(城)을 이용한 방어술과 적의 보급로를 끊는 청야전술, 기동력에서 고구려군은 장점을 발휘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고구려가 이길수 있던 것만은 아니다. 고구려는 동아시아에서 통일 중원세력과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문명대국이었다. 높은 기술력을 비롯한 문명국가의 힘, 전국민이 갖고 있던 문명대국인의 자부심이 있었다.

5∼6세기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고구려, 북위, 송, 유연 등에 의한 다극체제였다. 고구려는 그 가운데 중심국가로서 세계질서를 이끌어갔다. 그러나 7세기 중국을 통일한 수·당은 동아시아 전체를 지배하여 중국중심의 하나의 세계로 만들려는 야심을 가졌다. 실제로 돌궐을 비롯한 유목국가를 제압한 후 그것은 실현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다극체제를 유지하고 하는 고구려가 반대하고 있었다. 결국 두세력간의 전쟁은 필연적이게 된 셈이다. 전쟁의 원인은 바로 문명의 질투·충돌이었다. 전쟁은 문명의 생존과 번영에 직결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와 수·당은 사생결단의 자세로 전쟁을 벌렸던 것이다.

고구려는 수를 멸망에 이르게 하였고, 당 태종(太宗)을 죽음에 이르게 했었다. 하지만, 668년 마지막 전쟁에서 고구려는 패배하여 멸망하고 말았다. 왜? 갑짜기 수와 당을 이기던 고구려는 멸망을 하게 된 것일까?




고구려의 발견 12 - 고구려 멸망의 원인과 그 의미

                                                                                                                      김 용 만

   고구려는 왜 멸망하게 되었을까? 수·당과 당당히 맞서서 승리를 거두었던 고구려가 왜?
아쉬움을 접고 그 원인을 살펴보기로 하자. 로마제국, 원제국도 멸망했다. 대영제국도 해가 졌으며, 미국도 언젠가는 소련처럼 해가 질 것이다. 한 국가의 멸망기에는 전성기에 보이지 않았던 작은 요인들에 의해 멸망에 이른다. 그 원인을 살펴보는 가운데 오늘의 우리를 반성할 기회를 가져볼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는 제국이었다. 하지만, 중심이 강했을 때 제국은 번영하지만, 수많은 제국이 그러했듯이 중심이 흔들리면 걷잡을 수 없이 뿔뿔이 흩어져 버리는 단점을 갖고 있었다. 문명의 중심지인 평양과 국내성, 요동, 한반도 북서부 등에 비해 동부만주쪽은 제대로 개발되지 못했다. 또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음에도 백제와 신라, 가야를 통일하지 못하고 예속국으로 놔두었다가 결국 반기를 들은 신라에게 비수를 받게 되었다. 고구려 제국체제가 확고하지 못한 것이었다. 다양한 생산기반과 문화를 가졌다는 장점도 멸망기에는 오히려 단점이 되었다.

중심이 무너진 가장 큰 사건은 독재권력을 휘두르던 연개소문의 죽음이었다. 그는 분명 영웅이이만, 그가 죽은 후 고구려는 그의 공백을 메우지 못했다. 그의 독재권력은 조선 말기 세도정치와 같은 폐해를 일으켰다. 그의 지나친 대외강경책은 국제정세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전통적인 합의정치가 무너지고 독재정권이 다시 약화된 상태에서 고구려는 급격히 분열의 길을 걷게 된 것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연개소문의 아들들인 남생과 남건 형제의 대립이었다. 국내성과 평양성 세력을 기반으로 서로 견제하던 그들은 결국 형제간의 대립이 지나쳐 남생은 조국을 배반하고 당에 투항하였고, 당 침략의 앞잽이 노릇까지 했다. 용의 아들이 지렁이만도 못한 셈이었다. 이러한 배신자는 멸망의 순간에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난공불락의 수도 장안성은 배신자 신성이 적에게 성문을 열어줌으로써 함락된 것이었다.

물론 고구려 내부에서만 멸망의 원인을 찾을 수는 없다. 가장 중요한 외적 요인은 당의 침입이었다. 고구려의 경직된 대외정책이 원인이기도 했지만, 당의 야심은 너무나 컸다. 수는 인해전술만을 구사한 나라에 불과했지만, 당은 고도의 전략을 구사한 한 차원 다른 국가였다. 수와 당태종이 고구려에게 참패한 것을 교훈으로 삼아 당은 고구려를 약화시킬 장기 계획을 갖고 국지전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또 군량보급을 원할히 할 수 있도록 고구려 배후에 있는 신라를 동맹국으로 삼았고, 고구려를 도와줄 백제를 먼저 멸망시켰다. 고구려의 전쟁수행능력을 약하게 한 후, 마침내 전면전을 벌려 고구려를 무너뜨린 것이다. 고구려는 너무나 강한 적과 만난 것이었다.

고구려는 국제질서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여 백제의 멸망을 지켜보았고, 신라를 끝내 적대국으로 놔두었다. 5∼6세기에 구사했던 상호견제를 통한 국가간의 세력균형을 이루지 못한 체, 당과 신라와 맞서다 마침내 멸망하고 만 것이었다. 고구려의 멸망으로 동아시아는 중국중심의 하나의 체제가 형성되었으며, 동아시아의 다양성이 상실되는 비극이 초래된 것이었다.





@@@ 고구려의 발견 13 - 고구려 영원한 생명력

                                                                                                                김 용 만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단지 주권만 빼앗기고, 사람들이 그대로 그곳에서 살고 있었다면, 고구려는 언젠가 부흥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唐)은 말살정책을 실시했다. 고구려 영토를 지배하려는 목적에서 전쟁을 치른 것이 아니라, 당나라에 위협이 되는 강력한 동방세력의 존재를 없애려는 목적으로 전쟁을 했기 때문에 고구려를 철저히 파괴했다.

인구의 분산시키고 생활터전을 황폐화시켰다. 평양과 국내성 지역의 고구려인 20만명 이상을 강제로 고구려와 멀리 떨어진 당의 내지 깊숙한 곳으로 끌고가서 나누어 배치시켰다. 이들은 대개 귀족과 문화계층으로 고구려 중심세력이었다. 국내성지역은 배신자 남생이 10만호를 이끌고 당에 항복함으로써 인구가 급격히 감소했다. 요동지역은 오랜 전쟁으로 많은 백성들이 흩어지고 농경지는 파괴되었다. 가장 피해가 큰 곳은 역시 수도였던 평양이었다. 250년이 지난 후 고려가 다시 이 지역을 개척할 때까지 황무지로 남아있을 정도로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한때는 세계국가 고구려의 번창한 수도였던 평양이 이 지경이 될 정도로 전쟁과 당의 약탈로 인한 피해가 컸다. 676년까지 당과 신라가 평안도, 황해도 일대를 중심으로 전쟁을 함에 따라 많은 고구려인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이곳 저곳으로 옮겨가야 했다.

일부는 신라로, 일부는 돌궐, 멀리 일본열도로도 피난을 떠났다. 계속해서 강제로 당나라에 끌려가거나, 전쟁으로 죽은 사람도 많았다. 당으로 끌려간 사람들 중에는 치청절도사로 산동성 지역에 작은 고구려를 만든 이정기 같은 인물도 있었지만, 대개는 비참한 생활을 했다. 나라를 잃은 백성들인 고구려인의 생활은 아무리 개방적이고 이민족에게 관대했다는 당나라라고 하지만 결코 자기 나라에서 사는 것만 같을 수는 없다. 더욱이 고구려는 중국인에게는 수많은 자기 형제들을 요동벌에서 죽인 원수 나라의 백성일 뿐이었다. 따라서 고구려 유민들의 나라를 찾고자 하는 열망은 강할 수밖에 없었다.

지속적으로 부흥운동을 일으킨 고구려 유민들은 결국 대조영을 중심으로 발해를 세워 고구려를 부흥시켰다. 고구려 멸망후 31년 만이다. 하지만, 상당수의 고구려 사람들은 발해 건국에 동참하지 못했다. 발해는 고구려가 다스렸던 평양과 황해도, 요동지역 등 비옥한 농업지대를 중심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했기에 고구려만큼 문화적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국제적 영향력 또한 고구려에 비해 약했다.

그러나, 발해는 고구려 후손에 의해 세워진, 고구려 계승을 대내 외에 과시한 고구려의 부흥이었다. 고구려는 멸망했지만, 발해로 계승되었고, 고구려 멸망 후 450년, 발해 멸망 200년이 지난 12세기까지도 발해부흥운동이 지속되었다. 고구려의 생명력은 그렇게 강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