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여진족에 대하여 外

2013. 6. 1. 09:05우리 역사 바로알기

 

 

 

 

 

    2003년 단국대 생물과학과 김욱 교수는 동아시아인 집단에서 추출한 표본을 대상으로 부계를 통해 유전되는 Y염색체의 유전적 변이를 분석했죠. 이 결과 한국인은 주로 몽골과 동.남부 시베리아인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유전자 형, 그리고 동남아시아 및 중국 남.북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유전자형이 모두 발견되었습니다.

 

   한국인은 동아시아의 여러 민족 가운데서 동북아 만주족과 유전적으로 가장 유사했고,  묘족이나 베트남 등 일부 동남아시아인과도 비슷했습니다. 이는 한민족이 크게 북방계와 남방계의 혼합 민족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죠. 2300여 년 전 농경문화와 일본어를 전달한 야요이족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 본토로 이주했음을 나타내는 유전학적 증거이기도 하죠.

 

    2006년 김 교수는 모계유전을 하는 미토콘드리아 DNA도 분석했습니다. Y염색체가 아버지를 통해 아들에게만 전달되는 부계유전을 하는 것과 달리 미토콘드리아 DNA는 어머니를 통해 아들과 딸 모두에게 전달된다죠. 더욱이 미토콘드리아 DNA는 돌연변이율이 높고, 교차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일어나는 돌연변이 정보인 하플로타입 상태를 분석해 조상을 추적하기도 합니다.

 

     하플로타입이란 일련의 특이한 염기서열이나 여러 유전자들이 가깝게 연관돼 한 단위로 표시될 수 있는 유전자형을 가리킨다죠. 하플로그룹은 같은 미토콘드리아 DNA 유전자형을 가진 그룹으로 보면 됩니다. 한국인은 3명 가운데 1명꼴로 몽골과 중원대륙 중북부의 동북아시아에 많이 분포하는 하플로그룹D 계통이 가장 많았고, 전체적으로 한국인의 60%~70% 가량이 북방계로, 30%~40% 가량이 남방계로 분류됐습니다.

 

    유전적인 분화 정도를 통해 분석한 결과, 한국인은 중국 조선족과 만주족 그리고 일본인 순으로 가까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중국 한족은 베트남과 함께 다른 계통에 묶여 한국인과는 유전적으로 다소 차이를 보였다고 합니다. 동북아시아에 속한 중국 북경의 한족은 한국인과 다소 비슷한 결과를 보였지만 중국 남방의 한족과는 유전적으로 차이가 있었습니다.

 

    특히 만주족과 중국 동북 3성인 랴오닝(遼寧)·지린(吉林)·헤이룽장(黑龍江)에 살고 있는 조선족은 중국 한족보다는 한국인과 유전적으로 더 가까웠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김 교수는 “과거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서 활동했던 고구려인의 유전적 특성은 중국 한족 집단보다 한국인 집단에 더 가깝다”고 밝혔습니다.

 

    이런 결과로 볼 때 한국인의 유전자는 북방계가 다소 우세하지만 남방계와 북방계의 유전자가 복합적으로 섞여있습니다. 4000~5000년 동안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서 동일한 언어와 문화를 발달시키고 역사적인 경험을 공유하면서 유전적으로 동질성을 갖는 한민족으로 발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만주에 살던 이들은 황하 유역만을 중심으로 발원한 한족과는 달리 한반도에 살던 이들과 깊은 혈연관계였음을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스스로 ‘단일민족’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단일민족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유전적 동질성을 획득했다는 의미이지 한국인의 기원이 하나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히려 한국인은 동아시아 내에서 남방과 북방의 유전자가 복합적으로 이뤄져 형성된, 다양성을 지닌 민족입니다. 

 

 

 

중세고려와 근세조선의 대외관계

 

    고려 왕조 건립의 주체세력은 개성·평양·정주 등 조선반도 중북부 일대를 거점으로 하고 있으며 고구려에 대한 향토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기 993년 (성종12년) 요나라의 침략이 있었을 때, 서희는 요나라 장군 소손녕과 회담을 벌입니다. 당시 서희는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을 서경이라 부른다."고 합니다. 이로써 이 두 국가는 적대 관계를 해소하고, 고려의 압록강 이남의 영토권을 승인하게 됩니다. 고구려는 마치 문제 해결을 위한 블랙박스(Black Box) 같이 보입니다.


    고려의 태조(왕건)는 스스로 고구려의 계승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발해가 멸망(926)한 후 발해의 마지막 태자를 왕족(王族)으로 받아들이고 수만 명의 유민(遺民)들을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것은 여러 사서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 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 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紀)』 등을 지적할 수 있겠군요. 발해 역시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강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는 발해와 고려이죠.
 

     그리고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에 따르면, 청나라의 황족들은 본래 신라에서 와서 그 성이 완안씨이고 신라 왕성(王姓)인 김씨 또한 이미 수십 세에 전하여져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김씨 성을 토대로 나라 이름을 정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지요(本自新羅來姓完顔氏 新羅王金姓 相傳數十世則金之自新羅來 無疑建國之名 :『欽定滿洲源流考』卷七 部族 完顔 五代 金史世紀). 뿐만 아니라 금나라는 말갈과 옛 숙신의 땅이기 때문에 바로 고구려의 영역 속에서 건설된 것이지요. 금나라의 태조는 "여진과 발해는 모두 물길(勿吉)에서부터 나온 한 집안"이라고 말합니다(『金史』卷1 本紀1). 결국 금나라는 고구려와 발해를 계승했다는 말이지요. 즉 금나라·청나라는 고구려와 신라계의 연합세력으로 볼 수도 있죠.
 

    역사를 꼼꼼히 보면, 세계를 무력으로 짓밟은 원나라가 고려와의 관계 속에서는 체면을 구기는 일이 많았습니다. 몽골이 전쟁을 거쳐 정복한 나라를 부마국(駙馬國)으로 삼은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몽골의 통치자들은 사신을 죽이거나 자기들에게 대항한 군주에 대해서는 철저히 보복하는데 고려처럼 부마국으로 삼고 국체(國體)를 유지시켜준 것은 매우 특이한 경우입니다.


    구체적으로 그 일부를 보면, 1224년 원나라는 저고여(扎古雅) 등을 고려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도중에 그만 살해되고 맙니다. 그 후 원나라 태종 3년(1231) 살리타이(薩里台, 또는 撒禮塔)에게 명하여 고려를 정벌하게 합니다. 그러나 고려 고종이 동생을 보내어 강화를 요청하자 그대로 받아들입니다(『元史』208 高麗傳). 같은 경우가 다른 지역에서 발생했을 때는 초토화(焦土化)시킨 것과는 매우 대조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습니다(원나라 황제의 사신을 죽인다는 것은 바로 그 나라가 그 시간 이후 잿더미가 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학살됨을 의미하는데 말입니다. 몽골은 항복하면 평화롭게 받아주지만 반항하거나 대항하면 철저히 보복하고 응징하는 특성을 가진 나라지요). 이 부분을 현재 한국의 고교 국사 교과서에서도 이례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 고려는 오랜 항쟁 결과 원에 정복당했거나 속국이 되었던 다른 나라와는 달리 원의 부마국이 되었다. 고려의 국왕은 원의 공주와 결혼하여 원 황제의 부마가 되었고, 왕실의 호칭과 격이 부마국에 걸 맞는 것으로 바뀌었다[국사편찬위원회 『국사』(교육인적자원부 : 2005) 88쪽]."


    원나라 조정은 역대 고려왕에게 공주를 출가시켜 원나라 황실과의 혈통적인 결합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매우 강한 동질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원나라 세조는 당시 만주의 여진족들이 고려 땅을 침범하는 일이 있자 이를 엄금하도록 조치하고 관(官)으로 하여금 고려 국민을 보호하게 하고 파사부(婆娑府)에 명하여 군대를 둔전하게 하여 압록강 서부지역을 지키게 합니다(乙未, 禁女直侵軼高麗國民, 其使臣往還, 官爲護送. 命婆娑府屯田軍移駐鴨綠江之西, 以防海道 :『元史』卷6 本紀第6 世祖).


    원나라 세조는 고려에 갔던 사신이 돌아와 고려왕이 아프다는 말을 듣자 직접 약을 보내기도 합니다(高麗使還, 以王□病, 詔和藥賜之 : 『元史』卷6 本紀第6 世祖三). 뿐만 아니라 고려의 술에 대해서 이례적으로 세금을 면해주기도 합니다(免高麗酒課 :『元史』卷6 本紀第6 世祖).


    몽골과 고려의 관계는 마치 남녀간의 사랑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합니다. 몽골은 지속적으로 애정표현을 하려고 하고 고려는 피하는 관계라고나 할까요? 몽골은 한족(漢族)과 가까운 것은 다 싫어하는데 유독 고려(高麗)만이 예외였습니다.


몽골 군대가 갈 수 있는 정복 가능한 땅에서 몽골의 직속령(直屬領)이 되지 않은 유일한 나라가 바로 고려입니다.


이것을 한국의 국사 교과서는 "고려의 끈질긴 항쟁의 결과[국사편찬위원회 『국사』(교육인적자원부 : 2005) 87쪽]"라고 하고 있습니다. 말이 안 되지요. 세계를 굴복시키고 복종하지 않은 나라를 온통 잿더미로 만든 나라에게 끈질긴 저항으로 직속령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 말이 안 되지요. 그것도 원나라의 수도 대도(大都 : 현재의 베이징)의 바로 코앞에 있는 국가(고려)가 말입니다.


 원나라 때 고려 습속이 세계의 중심지인 원나라의 서울에서 크게 풍미하여 고려의'한류열풍'이 거세게 불었습니다. 당시의 '한류열풍'은 오늘날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죠. 생각해보세요. 세계의 지배자들이 고려 한류(韓流)에 열광하여 고려양(高麗樣)·고려풍(高麗風)이란 말이 기록될 정도이니 말입니다. 오늘날 한류 열풍이 미국의 뉴욕이나 프랑스 파리, 영국의 런던 등에는 없질 않습니까? 그리고 몽골 제국은 당시 유럽과 중근동의 각종 문물은 물론 세계 모든 나라의 문화를 접해본 사람들이 아닙니까?

 

몽골어는 기본적으로 어순이 우리말이나 일본어와 같고 문법관계를 조사와 어미로 나타내는 것도 우리말과 동일하고 관계대명사·관사·부정관사·성(性)과 수(數)의 일치가 없는 것도 우리말과 같습니다. 몽골어는 성조의 강세가 없지요. 이 또한 한국어와 같은 것이죠. 몽골 사람들은 1200년대부터 1940년대 초까지 거의 7백여 년을 전통 몽골문자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전통문자는 우리말과 같이 실제 생활에 나타나는 많은 것들을 생생하게 발음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러시아의 키릴문자에 두 글자를 첨가하여 오늘날과 같은 문자를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몽골의 나이 관념은 우리와 흡사합니다. 우리나라는 '한국 나이'라는 이상한 나이 개념이 있죠? 그런데 이런 한국 나이 개념이 몽골과 똑같다는 거죠. 몽골은 여자가 임신하는 순간부터 태아를 독립적인 인격체로 간주합니다(천손사상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태어나자마자 한 살을 먹게 됩니다. 그래서 몽골인의 나이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다른 나라사람들보다 한 살이 많게 됩니다. 중국과는 다르지요. 아이를 기를 때는 실이나 천으로 천막의 기둥과 기둥을 묶어서 흔들거리는 장치(요람)에다가 둡니다.
 
  의복 생활에 있어서도 몽골은 한국과 유사한 측면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몽골은 외투도 무릎 아래로 내려가는 법이 없어서 매우 간편합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말 타기에 편하게 만든 것이죠. 여자의 치마도 주름을 잡아서 둘러 입는데 이것은 한족들에게 이상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한국인들은 중국인과는 달리 주름치마를 즐겨 입죠.
 
  우 리는 가까운 사람들과 몸을 부대끼는 것을 좋아합니다.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는 상대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이것은 신체적인 접촉을 싫어하는 중국인들과는 많이 다릅니다. 몽골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신체적 접촉을 통해서 친밀감을 표시합니다. 이것은 북방민족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몽골은 설날이면) 서로 껴안고 인사를 나눈다."라고 말합니다.
 
만주족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주족의 인사법은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만나면 머리를 숙여 인사합니다. 이것은 요즘 한국인들이 하는 것과 동일합니다. 둘째, 친구나 연인을 만났을 때 반드시 얼굴을 껴안고 얼굴을 맞댑니다(李民寏『建州見聞錄』). 이것을 포견례(抱見禮 : 허리를 끌어안고 서로 좋아하는 것)라고 하지요. 셋째, 부녀자가 집안에서 서로 만나면 무릎을 꿇어 앉아 오른 손가락을 눈썹 끝에 갖다 댑니다(李民寏『建州見聞錄』). 『세종실록(世宗實錄)』에 따르면, 이 가운데 만주족의 가장 보편적인 전통 인사법은 바로 포견례(抱見禮)라고 합니다(『世宗實錄』59 15年 2月).

 

 몽골에서 가장 보편적인 놀이는 씨름입니다. 우리나라도 30~40년 전까지는 가장 일반적인 놀이였죠. 씨름은 흉노나 고구려의 벽화에도 등장하는 북방고유의 무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씨름은 북방 기마병들이 육탄전을 벌일 때 쓰는 무술입니다. 일본의 스모나 한국의 씨름도 이와 깊은 관련이 있죠. 몽골어에서 '쉬룬'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뜻은 "격한, 포악한"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쉬룬(몽골) - 씨름(한국) - 스모(일본) 등의 변화 과정 속에서 씨름은 다소 변형되어 정착합니다[박원길,『몽골의 문화와 자연지리』(민속원 : 1999) 129쪽].


1931년 요나라 동경(東京遺址)에서 팔각형 백색 도관(陶罐)이 발굴되었는데 이 유물의 8면에 씨름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지요. 그리고  요나라를 이은 금나라에서도 여전히 이 씨름은 크게 유행했습니다.

 

금(金)나라 때는 주류민족이었던 여진(=만주족)은  물론 피지배층이었던 한족(漢族)들도 씨름을 즐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씨름이 일종의 전투무술이었기 때문에 한족들이 씨름에 몰두하는 것을 금나라 조정에서는 크게 우려합니다. 그리고 전투무술의 비결들이 알려지는 것도 바라지 않았겠죠. 그래서 금나라의 장종(章宗 : 1189~1208)은 '여진인들만 씨름을 하라'는 칙령을 반포하여 중국에서는 씨름이 급격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금나라에서 씨름은 현재의 태권도와 같은 국기(國技)였던 것이죠[장장식,『몽골민속기행』(서울 : 자우출판, 2002) 311쪽]. 그 후 이 씨름의 전통은 몽골이 계승하게 되지요.

 

결국 부여 - 고구려 - 발해 - 거란 - 금 - 몽골 이夷족에게 있어서 씨름은 오늘날의 씨름과 같은 단순한 힘겨루기가 아니라 전투무술을 포함한 상무적인 무술로 생각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권법도 포함되겠지요.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금나라의 장종이 한족들이 씨름을 하는 것을 금할 까닭이 없지요.


고구려 고분 벽화는 다소 특이합니다. 고구려 벽화에서는 서로 엉켜서 하는 씨름 장면도 있고 마치 두 사람이 태권도 대련을 하듯이 거리를 두고서 손바닥을 벌리고 서 있는 모습도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벽화에는 게임의 내용이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죠. 그래서 지금의 씨름과는 조금 다른 것이죠. 그리고 이 무술이 고구려뿐만 아니라 한반도에도 광범위하게 퍼져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신동국여지승람(新東國與地勝覽)』에 "충청도 은진현에 매년 7월 15일 인근의 사람들이 모여 수박을 즐기고 승부를 다투었다(忠淸道恩津縣界每歲七月十五日 傍近兩道居民聚爲手搏戱以 爭勝負 : 『新東國與地勝覽』卷34)"는 기록이 보입니다.
 
  고구려의 멸망(668)·발해의 멸망(926)·통일신라의 멸망(935) 등을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여러 형태의 유민(遺民)이 발생하고 이들이 이 같은 맨손무술, 또는 씨름을 확산시켰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 발해·요(遼 : 거란)·금(金)·몽골·후금 등과 한반도(고려)의 씨름이 동시에 발전하였겠죠. 그렇다면 씨름은 동북아 전역에 걸쳐서 독특하게 현지에 맞게 적용되고 발전하여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일본의 경우 야마도(大和) 왕조의 쇠퇴 이후 나타난 카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 정권을 열어간 미나모토노요리토모(源賴朝 : 1147~1199)도 백제인(남부여인) 세이와 천황(淸和天皇 : 858~876)의 직계후손이었습니다[홍윤기, 『일본천황은 한국인이다』(효형출판 : 2000) 34쪽]. 그리고 미나모토 가문의 직계 손이 끊이자 일시적으로 미나모토의 처족(妻族)이었던 호조 가문이 정권을 장악하는데 이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것이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 : 1305~1358)로 그는 무로마치바쿠후(室町幕府) 정권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스스로 미나모토와 같은 씨족임을 밝히고 그 계승자를 자처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부여계로 면면히 이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9세기에 편찬된 일본 천황가(天皇家)의 의례집(儀禮集)인 『테이칸 기시키(貞觀儀式)』에는 "일본 천황(天皇)이 신상제에서 제사를 드리는 신은 신라신(新羅神)인 원신(園神) 1좌와 백제신(百濟神)인 한신(韓神) 2좌이다. 즉 모두 세 분의 한국 신을 모시고 카구라(神樂)라고 부르는 제례무악(祭禮舞樂)을 연주하면서 천황궁의 신전에서 제사를 지냈다(『貞觀儀式』「園倂韓神祭」)."고 합니다. 이 기록은 이후에도 여러 서적들에게서 무수히 나오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라신은 스사노오노미고도[須佐之男命], 즉 스사노오이고 백제신은 오오진 천황(應神天皇)과 성명왕(聖明王), 즉 남부여(백제)의 대표적 성군으로 부여의 부활을 꿈꾸다가 산화(散華)한 성왕(聖王)입니다. 일본인들은 성명왕을 이마키노가미(今木神)로 높여 부릅니다. 바로 쥬신의 신목(神木)을 상징하는 것이죠. 참고로 조선의 왕조도 목기(木氣)를 바탕으로 하고 있죠

 

 

임진왜란(1592) 때 후일 청 태조가 되는 누루하치는 이조의 임금 선조(宣祖)를 위하여 군대를 파병할 것을 제의합니다. 즉 당시 조선의 병부(兵部)가 요동 도사(遼東都事)를 시켜 자문을 보내왔는데 그 내용에는 누루하치의 건주여진(建州女眞)이 조선을 위하여 구원해줄 것이라고 합니다.
 

  당시 선조는 매우 어려운 처지에 빠져 있었습니다. 선조는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왜(일본)의 군대를 피해 명나라로 가고 싶었으나 그것도 명나라가 거절하는 상태에서 오직 명나라의 원군(援軍)만을 기다리며 평안도 의주에서 기약 없이 머무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누루하치(후일 청 태조)는 공이(貢夷)와 마삼비(馬三非) 등의 입을 통하여 원군 파병을 제안합니다.

 
  "우리(여진) 땅은 조선과 서로 접해 있어서 조선이 일본군[왜노(倭奴)]에게 벌써 침탈되었으니, 며칠 후면 반드시 건주를 침범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희 대버일러이신) 아이신자오뤄 누루하치의 휘하에 기병[馬兵] 3∼4만과 보병(步兵) 4∼5만이 있는데 모두 용맹스런 정병(精兵)으로 전투에는 매우 능한 군대입니다. 이번 조공에서 돌아가 우리의 대버일러[원문에는 도독(都督) - 후일 청 태조 누루하치를 말함]에게 말씀드려 알리면 그는 충성스럽고 용맹스러울 뿐만 아니라 좋은 분이니 반드시 정병을 뽑아 한 겨울 강이 얼기를 기다렸다 곧바로 건너가 일본군을 정벌 살육함으로써 황조(皇朝)에 공을 바칠 것입니다(『宣祖實錄 』卷30 25年 9月 17日 甲戌)"

 
  이에 대해서 조선의 피난정부는 이들이 "천한 오랑캐인 데다 그 속마음을 알 수가 없다"고 하여 나라 전체가 환난을 당하고 있는데도 누루하치의 군사지원을 거절해 버립니다. 그러면서도 오로지 명나라의 군대가 오기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립니다. 민중의 고통쯤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후금(청)에 사신을 보내면서 가짜 왕자, 가짜 형조판서를 보내기도 하고, 후금(청)에 보내는 글에 명나라의 연호를 쓰고, 청태종의 즉위식에서도 조선의 사신들(나덕헌·이확)은 절을 하지도 않았으며[『청사고(淸史稿)』에 따르면, 청나라 대신들이 조선 사신들을 죽이려 하나 청태종은 이들의 처형을 반대하고 조선으로 돌려보냅니다. 그러나 이들이 조선에 돌아오자 자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배를 보냅니다], 후금(청)에서 보내는 사신을 철저히 박대하여 죽이려고 하기도 하고, 양국의 무역에 있어서도 명나라에는 최고급 예물(禮物)을 보내면서도 후금(청)에는 저질의 물품으로 교역하는 등 후금(청)의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르게 합니다. 후금(청)은 끊임없이 조선을 끌어안으려 하는데 조선은 이를 도무지 받아들이려 하지를 않습니다.


실리적인 등거리외교를 취한 광해군이 인조에 의해 사라지자 마자 병자호란이 일어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명말청초의 만주족에 의한 한족 대규모 학살

 

명말청초 대학살의 기록들

[양주십일기], [가정을유기사], [강변기략] 등의 사서에는 청군의 만행이 기록되어 있어, 역사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아래에 나는 청조의 관방자료 내지 제삼자의 서술을 토대로 이러한 만행들에 대한 보다 종합적인 자료들을 모아서 서술했다.

 

1.청조의 관방학살기록자료

 

우선, 청조는 자신이 행한 학살에 대한 예고격인 자료를 발표하였다. 그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청세조실록] 17권 순치2년 6월 병인중의 기록이다.


“ 이 포고령을 공표한 이후, 북경성 내외와 직속 각성에서의 모든 백성은 10일 안에 변발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이를 위반할 시, 어떤 변명도 허용하지 않으며, 그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自今布告之后,京城内外,直隶各省,限旬曰尽行剃完。若规避惜发,巧词争辩,决不轻贷”。并宣称:)

 

이와 동시에,
“변발령을 지켜서 투항하는 지역은 기존의 지위와 부를 보존하게 될 것이다. 만일 반항하는 지역은 대군을 출동시켜, 모든 것을 초토화시키고,살륙할 것이다.”
“所过州县地方,有能削发投顺,开城纳款,即与爵禄,世守富贵。如有抗拒不遵,大兵一到,玉石俱焚,尽行屠戮。

 

청조는 1649년 사천성에서 또 다른 포고령을 발하였고, 그 어감은 앞서와 유사하다.
“일반 백성과 반란군이 혼재하여 구분하기 어렵다. 그래서 모든 성주민을 죽이거나, 혹은 남자만 죽이고, 여자는 남겼다.”(民贼相混,玉石难分。或屠全城,或屠男而留女)


청조의 다른 관방자료인 [동화록] 5권 순치원년조에는

“본조의 명령인 변발과 만주복식을 따르지 않는 자는 용서없이 죽인다.” (不随本朝制度剃发易衣冠者,杀无赦)

진강지부의 포고에 의하면

“가족 중 한 명이라도 변발을 하지 않으면 전가족을 몰살시킨다. 만일 한 가족이 변발하지 않으면 부락 전체를 몰살시킨다.”

(一人不剃发全家斩,一家不剃全村斩)고 하면서, 반항자의 머리를 잘라, 전체 백성을 공포로 몰아 넣었다.

 

순치 2년(홍광원년 1645년), 강년순무 토국옥은 “변발하고, 복장을 바꾸는 것은 새로운 왕조의 제일 중요한 정책이고, 모든 지역에 걸쳐서 실시되어야 한다. 만일 귀족, 군인,일반 백성 등이 자신의 머리를 보존하고자 하면 머리카락을 잘라야 할것이고,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으면 머리는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남산은 옮길 수 있으나, 이 명령은 바뀔 수 없다.”
(剃发、改装是新朝第一严令,通行天下,法在必行者,不论绅士军民人等,留头不留发,留发不留头!南山可移,此令不可动!)

 

이상의 청조의 공식적인 자료에서 ‘전성을 도륙한다.’,’도륙을 실시한다.’,’죽이되 용서하지 않는다’,’전가족을 몰살시킨다’(“屠全城”、“尽行屠戮”、“杀无赦”、“全家斩”、“全村斩”) 등의 흉악한 위협을 찾아 볼 수 있다.

이하의 글에서 청조의 위협이 결코 입으로만 끝난 것이 아닌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2.청군 입관 전의 대학살

 

우선, 청군 입관 전, 요동지역 한족을 대상으로 한 대량학살의 기록이 초기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천명9년 정월 , 누르하치는 9차 명령을 내려서, 소위 ‘무곡지인’이라 하여 곡식의 수확량이 5금두를 넘지 못하는 가난한 한족 인구를 적으로 삼아 사로 잡아서 관내로 돌려 보내게 하였다. 최후로 정월 27일 명령을 내려, 각지에서 조사된 이 한족 인구들을 모두 살해하도록 했다. 즉, 공개적인 종족학살이었다.

천명10년 10월 3일, 누르하치는 한족을 비판하여 ‘간첩을 숨기고,굴욕을 겪는 데 익숙하며, 반란이 끓이지 않는다’며 팔기의 각 패륵과 총병관으로 하여금 병사를 대동하여, 촌락에 한족을 만나면, 말에서 내려 곧장 사살하도록 했다.

 

제삼자인 조선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13년 5월조에 요동인구의 참상에 대해 이렇게 써있다.
“비록 청이 요양을 획득했지만, 이 지역 주민중 이들을 따르지 않는 자들이 많이 변경을 넘어 왔다. 적이 크게 이르자 주민 중에는 변발을 원하지 않는 의로운 자는 거의 압록강에 투신하여 죽었다”(时奴贼既得辽阳,辽东八站军民不乐从胡者,多至江边……其后,贼大至,义民不肯剃头者,皆投鸭水(鸭绿江)以死)

 

3. 청조 입관 이후의 대학살

 

1) 청조관방자료 및 제삼자의 자료

 

청조는 입관 이후, 자신들의 대학살을 적나라하게 인정하였다. 이것은 순치 7년 2월 청의대산서총독 동양량이 이르길,
“대동, 삭주, 훈원 삼성에서 이미 대학살로 인해 백성이 존재하지 않음”

 

청조의 자료 <명청당안>에 의하면, 순치 7년 11월 21일 모든 성주민을 도륙하여 겨우 5명의 범인만이 남아서 이들을 석방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삭주지>에 따르면, “성을 도륙하여 마주치는 것은 모두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광주대학살은 중립적인 제삼자의 자료가 있다. 이태리소속 예수회 수도사 마르티니(1614~1661)가 기록한 <달단전기>에 따르면, “대학살은 11월 24일부터 시작하여 12월 5일까지 계속되었다. 그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여, 일률적으로 잔혹하게 학살하였다. 그들은 다른 말은 결코 하지 않고, 단지 ‘죽여라, 이 반란자들을 모두 죽여라’고만 외쳤다.”(두문개:<청대서인견문록>53페이지, 중국인민대학출판사, 1885년 6월판)

 

네덜란드의 사신 요한 니어호프는 <중국달단대한황제조정에 대한 동인도회사 파견원의 보고>에서 “달단의 전군은 입성직후, 모든 성내는
처참한 광경이 벌어졌다. 모든 병사는 파괴를 시작하고,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부녀, 아동, 노인의 울음소리는 끓이지 않았다.
11월 26일부터 12월 15일까지 각지의 거리에서 들리는 것은, ‘반란자들을 살해하라’는 소리였다. 도처에서 비명소리, 도살, 약탈이었고, 부자들은 목숨을 위해 모든 것을 내놓고, 저 무도한 학살자로부터 겨우 도망칠 수 있었다.”(사도림 저, 이영칭 역 <남명사>131페이지, 상해고적출판사, 1992년 12월판)“


2) 속세로부터 떨어져 있던 출가인이 기록한 대학살의 규모

 

<광주시종교지>에 따르면 청 순치7년(1650), 청군이 광주를 정벌 죽은 자가 70만명에 이르렀다. 교외의 오룡강에 진수화상이 사람을 고용하여 시체를 수습하여 화장하였다.
주의할 만한 것은 광주의 70만명 사망 기록은 당시 직접 시체를 수습한 스님이 기록한 것이다. 그러므로, 직접적인 기록이고 사료적인 가치가 높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보다 가치 있는 것은 이 숫자가 지금에 광주시 대불사 홈페이지에도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출가인은 함부로 말을 하지 않는다.
청조의 대학살을 경험한 후, 그는 “모든 현에 촌락이 없고, 촌락에는 집이 없고, 집에는 사람이 없다.사람은 모두 사라졌다.”고 적었다.

 

관방자료에 의하면, 북경지역“눈을 들어 보면, 논과 밭이 황량하다”(위주원, 통진민고소, 황청조의, 권1),하남성 “온통 황량한 풍경이고, 사람은 극히 적다”(이인룡, 간황의관미력소, 황청조의, 권4), 호광지역”천리를 둘러 보니, 인적이 끓기었다.”(류여모, 간황흥둔소,황조경세문편권34)

 

청조 최고위 통치자의 대학살 참여 증거

 

순치2년 11월 15일, 양주십일대학살의 실행자였던 예친왕 다석은 학살 중 미모가 빼어난 여인 103명을 획득하였다. 이들을 각각의 청조 최고위층에 헌납하였는 데, 순치제에게 10명, 섭정왕 도르곤에게 3명, 부정정친왕 치얼합랑에게 3명, 숙친왕 호격에게 2명, 영랑왕 아제격에게 1명을 바쳤다(<청초내국사원만문당안석편>중 197페이지).

 

3) 서로 다른 시기 인물들의 기록과 지방지의 기재

 

곤산대학살 : “모두 합해 성중 인물들 중 도살당한 사람이 10명 중 4명에 달하고, 침하에 떨어져 죽은 사람이 10명 중 2명, 도망친 자는 10명 중 하나이다.”<곤신양현속수합지>권 51,“


살륙이 끝나자, 성문으로 도망쳐서 물에 빠져 죽은 자, 부녀,어린이의 수는 헤아릴 수도 없다. 곤산 정상에 중 료중이 부녀 천명과 어린아이들을 숨겼으나, 수색하여 모두 죽이니, 피가 강처럼 흐르고, 폭포처럼 떨어졌다.”<연당견문잡기>

 

남창대학살 : “부녀는 각 팔기군으로 분배되어 졌고, 밤낮으로 병사들의 노리개가 되었다. 칼에 맞아 죽는 자, 물에 빠져 죽은 자, 자살한 자, 10명 중 7,8명이 되었다.”(서세박<강변기략>)

 

광주대학살 :”광주에서 학살이 일어나 살아 남은 자가 드물었고, 도망친자는 바다에 빠져 죽었다.”(어재전<속명기사본말>)

 

남웅대학살 : “집집마다 제비집이 비워졌고, 시체는 산과 같이 되었다. 죽은 자는 머리가 잘려졌고, 산자는 포로가 되었다. 피는 땅을 덮어, 어미잃은 아이는 젖을 찾았다.”(청군문서 진잔규,<웅주점가가>)

 

가정대학살: “시민들 중, 목을 매달아 죽은 자, 우물에 빠져 죽은 자, 강에 빠져 죽은 자, 피범벅이 된 자, 사지가 잘린 자, 수족이 잘리어졌으나 아직 죽지 않은 자, 뼈와 살이 찢겨진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청병은 집 위를 달려서, 통행에 제지를 받지 않았다. 성내의 난민은 거리에 돌을 쌓아 막고자 했으나, 도망칠 수 없었다. 모두 강에 투신하여 죽었고, 강물은 시체로 넘쳐 제대로 흐르지 못했다. 대낮에 길에는 강,간이 스스럼없이 행해졌고, 반항하는 자는 양손을 나무판에 못을 박아 강,간했다. 청병은 마주치는 사람마다 재물을 바치라 했고, 그 획득한 재물을 허리에 둘둘 감아, 만족하면 백성을 석방했다. 다른 병사를 만나면 또 다시 똑같은 일을 당한다. 바치는 재물이 부족하면, 즉시 칼이 휘둘려지고, 재물이 다하면, 곧 죽음을 당한다.”([가정을유기사])

 

조주대학살: “병사들의 학살로 인해 시체가 십여만에 이르렀다.” 게양현 관음당 해덕화상 등이 시체를 수습해서 서호산에 화장해서, 유골을 서호남변에 묻었다. 복건성 동안현 학살 당한 자가 5만명에 달했다. 범천사 주지 석무의는 시체를 수습하여 절 동북쪽 1리밖에 묻었다. ‘무사정’이라는 정자를 지어서 ‘만가지 선이 함께 귀의한다’고 새겼다.

 

상숙대학살 : “길을 걸으면 다리 밑 하천을 말랐고, 퇴락한 집에 우물물도 말랐다. 곳곳에 시체만 쌓여 있으니, 오천여 구가 넘었다. 남녀 중 포로가 된자는 수를 세기도 어렵다. 연못 옆 나무에는 사람 목이 걸려 있는 데, 모두 마을 주민의 몸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양주대학살 : 이 일은 길게 말하지 않아도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유명한 <양주십일기>이외, <양주성수기략>에도 이 일이 기록되어 있다. “처음 고걸의 병사가 양주에 이르렀을 때, 주민들은 호수주변으로 피난했으나 많은 사람들이 적에게 해를 입었다. 북쪽은 경계가 엄했으니, 성밖주민들은 모두 성안이 의지할 만하다 여겨, 성안으로 몰려 들어 갔다. 들어 가지 못한 자는 그 머리를 조아려 입성을 탄원하여, 애끓는 소리가 대지를 진동시켰다.공은 마침내 문을 열어 그들을 받아 들였다. 성이 함락당하여, 예왕의 지휘하에 학살이 행해졌고, 7일이 지나서야 마침내 멎었다. 겨우 공의 시체를 수습했으나, 날씨가 더워서 시체가 변질되어 알아 보기 어려웠다.”([명계남략])

 

각지에서 변발에 반항하는 자는 분산하여 학살이 행해졌다. “가을이 되어 새 명령이 발포되어, 변발하지 않는 자는 참형에 처해졌다.
명령 발표 후 마을에 변발하지 않는 자는 모두 군대로 이끌려 와, 아침에 끌려온 자는 아침에 죽고, 저녁에 끌려온 자는 저녁에 죽었다.”(<진확집>권 30)

 

유명한 <강음성수기>에는 “모든 성내 주민의 살해가 끝나자 칼로 성문이 봉해 졌다. 성 내에는 어떠한 것도 남지 않았다. 절의 탑에 숨어 있던 승려 등 53명만이 남았다.
성을 지키기 81일, 성내에 죽은 사람은 9만 7천명, 성밖에서 죽은 사람은 7만 5천명에 이르렀다.”

 

4) 청군의 성폭행([양주십일]과 [강변기략] 중 항시 볼 수 있는 자료는 열거하지 않음)

 

순치 2년 7월 30일, 청군이 사진에 이르러 “보이는 자 마다 금은을 찾아 내어 노략질한 후 칼을 휘둘러 죽였다. 여인은 음행을 위하여 배로 보냈다.”,”주민을 마주쳐 끌고 가서, 숨긴 물건이 발견되면 배를 갈라 죽였다.”(<연당견문잡록>)

 

순치2년, 청군은 양주대학살을 행한 후, 무석에 이르러, “배안에는 모두 양주로부터 얻은 여인들이었다. 모두 값비싼 보석으로 장식하고, 화장을 했다.”(<명계남략>권4)

 

순치 원년(1644) 4월, 청병이 산서성 주질현에 이르렀을 때, 생원 손문광의 처 비씨가 사로잡혔다. 부인은 다른 방도가 없음을 알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내가 금은을 마른 우물에 숨겼으니, 그것을 취하자” 청병이 기뻐하여, 우물주위로 데려가 물속을 살필 때, 부인은 몸을 던져 죽었다. 금도 부인도 잃은 청병이 화가 나 큰 돌을 던져 버리고 가버렸다.(민국 <주질현지>권6)

 

“청의 흥안총병은 부녀를 강탈하여 수가 100명에 이르렀고, 음란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큰 침상을 만들어서 처첩 십여명을 함께 침상에서 차례로 탐했다. 다시 땅에 나무 말뚝을 박아, 첩들 하나 하나씩 음문을 그 뾰족한 말뚝에 박는 놀음을 한후, 시체는 강에 버렸다.”(<평관지> 권12)

 

청군이 강음에서 대학살을 한 후, 청에 반항한 부녀는 강간한 후 죽였다. 지방지에 의하면 그 수는 101명에 이른다.(도광 <강음현지>권 20 <열녀>)

 

5) 청이 노획한 한족 노예

 

숭정 11년 동지에서 12년 봄까지 청군이 기부에서 산동에서 획득한 한족 포로가 46만 2천 3백여명에 달한다. 숭정 15년 동지에서 16년 여름까지 청군이 획득한 포로는 36만 9천명에 달한다.(<청태종실록>)

 

청군은 입관이후 계속해서 백성들을 사로 잡아 포로로 삼았다. 순치 2년 8월 병부에 명하길,'포로들을, 이전 예에 따라 성을 공략하다 부상당한 병사들에게 하사하라'고 했다. (<청세조실록>)

 

한족 노예들은 주인의 학대를 받았을 경우, 대량으로 자살하였다. 강희 초년, “팔기병 집안에서 매년 자살하는 자가 2천명이 넘었다.”([청사고]),이를 보건대, 청군의 입관이후,몇 십년간 자살한 한족의 수는 10만명을 넘었으리라 본다.

만주인의 혹독한 학대로 인하여, 대량의 한족 노예는 도망쳤다. “수개월 동안, 수만명의 노예가 도망쳤다.”<청세조실록>,
청의 통치자들은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1626년 <도인법>을 제정, “도망친 노예를 은닉하면 참수형에 처한다. 그 이웃의 10집, 100집, 지방관도 처벌을 받을 것이다.” 이로 인해, 청조에 투항한 유명한 배신자인 정남왕 화종명조차, 도망친 한족 노예를 숨긴 이유로 강제로 자살했다.

 

4.대학살의 규모에 대해 추정

 

명청교체기 인구변천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명대 중국 인구는 최후로 행해진 공식 통계에 의하면, 51,655,459명이고, 조사시기는 명 광종 태창 원년이었다. (명 가종실록 4권)

청조 최초의 전국적인 인구조사는 청 세조 순치제 8년에 실시되었는 데, 이 때 인구수는 10,633,326명이었다. (청 세조실록 61)

청조가 전국을 완전히 통제한 청 성조 강희제 21년 (1682년, 입관후 48년) 전국 인구는 19,432,753명이었다. 이는 명 광종 태창 원년 인구의 단지 36%이다.

 

이상의 인구 숫자는 당연히 정확한 것은 아니다. 당시 인구에 따라 세금을 납부해야 했으므로 많은 인구수가 조사되지 못했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명대 실제 인구를 대략 1억에서 2억 사이로 추정한다. 비록 청조에서도 이러한 인구은닉현상이 있었지만, 청군의 입관이후, 인구 감소는 최소로 잡아도 5천만이상이다. 48년 동안 새로운 세대들이 계속 태어난 것을 고려하면, 청조 입관 직후 수년 간 인구 감소는 5천만명을 휠씬 상회할 것이다. 즉, 인구감소가 1억을 초과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수천만명이 청군의 입관 후에 학살당했다고 추정해도 충분히 근거가 있는 것이다.

 

 

몽골학을 전공한 박원길 교수는 이 맥족의 원래 이름은 ‘코리’라고 합니다. 즉 ‘위략(魏略)’이나[위략에는 고리(?離 : 중국식 발음으로 읽으면 [까오리])] ‘몽골비사’의 기록처럼, 맥족의 원래 명칭은 모두 코리(Khori)를 음역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특히 몽골은 ‘몽골비사’에서 몽골의 기원이 이 코리족의 일부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사실 몽골 문화 가운데 한국인들과 유사한 것이 많고 외모나 체격 등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닮았습니다.

윤내현 교수(단국대)도 이와 유사한 견해를 피력했습니다. 현재의 몽골인들의 주류 종족은 보르치긴족이라고 합니다. 칭기스칸을 배출한 종족이죠. 윤내현 교수는 이 보르치긴족이 몽골로 이주해 가기 전 북만주 어르구나하 유역에 거주했던 종족이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고대 북만주 지역은 고조선의 영토였다는 점에 주목하면 이들은 결국 고조선을 구성한 종족이라는 말이 된다는 것이죠. 이 후 고조선이 붕괴된 후 이 지역은 동부여 영토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보르치긴족은 한민족의 한 갈래이거나 아주 가까운 지역에 거주했던 사람들로 한민족에서 갈라져 나갔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몽골과 코리족들은 형제, 또는 자매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지요.

흉노는 중국어로는 슝누[xiongnu]인데 몽골어의 훙(XYH)에서 나온 말로 문어(文語)에서는 훙누로 들립니다. 이 말의 뜻은 몽골어로 그저'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음차(音借 : 음을 빌려 표현)하여 한족(漢族)들은 흉노(匈奴)로 불렀지요. 그런데 이 흉(匈)자가 '입심이 좋은(시끄러운)' 이라는 의미이고 노(奴)자는 노예(奴隸)를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저 '사람'이 그 민족의 명칭이 된다는 것도 거북스러운데 이것을 아예 '시끄러운 노예'라고 표기했다는 것이죠.

생각해보세요. 한국인의 명칭을 한족(중국인)이 '사기 사(詐)'와 '누더기 람(襤)'을 사용하여 詐襤(사람 : 성품은 사기를 잘치고 몸은 거지 꼬락서니)이라고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모욕적인가 말입니다.

 

몽골의 원류인 동호계는 주로 해(奚 : 현재의 내몽골 지역), 습(?) 실위(室韋 : 현재의 몽골 지역) 등 입니다(『新五代史』74 契丹 ; 『北史』94 奚).

해(奚 - 여자노예라는 의미), 습(? - 큰바람), 실위(室韋 - 집에서 잘 다듬은 가죽) 등 말들이 이상하죠? 대부분 욕설에 가깝고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요? 그 이유는 이 말들이 음차(音借 : 발음을 빌림)를 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한족(漢族)들은 여전히 이들을 욕설로 부르고 있습니다. 아무리 한족을 잘 봐주려고 해도 신성한 민족이름이 이게 뭡니까? 이렇게 함부로 불러도 됩니까?

이 한자말들은 서로 다르게 보여도 발음은 모두 [쉬], 또는 [쇠]에 가깝게 나타납니다. 즉 해(奚 [x?]), 습(? [x?]), 실위(室韋 [sh?we?]) 등으로 똥고양이라 지칭하는 예(濊), 또는 예맥(濊貊)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발음으로만 보면 이들은 예맥과는 구별이 잘 안 되지요. 결국은 철과 관련된 민족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서 해는 거란이 되고 실위가 바로 몽골이 되었다고들 합니다.

『신오대사(新五代史)』에서는 거란과 동류인 "해(奚)는 본래 흉노의 별종(『新五代史』74 契丹)"이라고 합니다. 『북사(北史)』에 따르면, "해는 거란과 이종동류로 본래 고막해(庫莫奚)라 하였는데 그 선조가 동호의 우문(宇文)의 별종(『北史』94 奚)"이라고 합니다. 요나라 태조가 해(奚)를 정벌하면서 "거란과 해(奚)는 언어가 서로 통하니 하나의 나라이다(『遼史』72 宗室列傳)."라고 합니다. 요나라는 자신의 발상지인 현재 내몽골 자치구 빠린줘치(巴林左旗)를 상경(上京)으로 하였습니다(『契丹國志』22 四京本末).

『북사(北史)』에 따르면 "실위는 대체로 거란의 부류로서 남쪽에 있는 것은 거란이 되고 북쪽에 있는 것은 실위라고 불렀다.(『北史』94 室韋)"고 합니다. 실위는 발음이 예맥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예맥이나 숙신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북사(北史)』에서도 "실위는 풍속이 말갈(靺鞨)과 같다(『北史』94 室韋)."라고 합니다. 이 실위는 바로 이전의 오환·선비이며 그 후 거란·해·실위가 되고 후일 몽골이 되지요.

선비·거란·오환·해·실위·말갈·숙신·동호 등등으로 불러왔던 민족들이 실제로는 별로 다르지 않는데 한족(漢族)들이 지방의 특색 정도에 불과한 것을 완전 별개인 듯이 묘사를 한 것이지요.

 

선진시대에는 발(發)을 맥(貊)과 대신하여 사용하였고 한나라 때에는 조선(朝鮮 : 고조선)을 맥(貊)과 동일시합니다.

후한대(後漢代)에서는 이르러서는 고구려를 맥(貊)과 동일시하기도 하고(『후한서』4 「和帝紀」) “부여(夫餘)는 본래 예(濊)의 땅”이라고 하기도 하고(『후한서』85 「東夷傳」), 동예(東濊)를 가리켜서 예맥으로 칭하기도 합니다(『삼국지』「동이전」) 『후한서(後漢書)』에서는 “예(濊)·옥저(沃沮)·고구려가 본래 조선 땅에 위치해있다”고 합니다(『後漢書』「東夷列傳」: 濊及沃沮句麗本皆朝鮮之地也).

예맥은 중국의 한나라 이전에는 마치 맥과 예가 요동을 동과 서로 나누어 차지하는 것처럼 서술이 되다가 한나라 이후에는 예맥이라는 말을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한서(漢書)』에는 예맥조선(濊貊朝鮮)이라는 말이 등장합니다(『漢書』24 「식화지」). 앞서 본대로 예와 맥은 하나의 범주로 봐야합니다.

예맥이라는 종족은 『관자(管子)』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허뻬이(河北) 동북 지역에 거주하는 종족을 의미하였습니다. 따라서 지리적으로 보면 당연히 선비나 동호 등도 모두 이들로 볼 수 있습니다. 『한서(漢書)』(「소제기(紹帝紀)」)에 따르면, 예맥은 오환(烏桓)ㆍ선비(鮮卑)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여 중원에 위협을 주는 존재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오환ㆍ선비는 동호의 대표적인 민족이 아닙니까? 결국 동호나 예맥을 구별하기 어렵다는 말이죠.

맥(貊)은 중국의 고대 전적에서 야만족의 대표적인 종족으로 묘사되어왔습니다.

그 동안 많은 연구로 몽골 - 만주 - 한반도에 거주했던 여러 종족들이 동일한 민족, 또는 동일한 기원을 가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많은 연구와 증거들이 발굴되고 있습니다. 이제 이 점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유 엠 부찐은 “맥족의 분포 지역은 오늘날의 랴오시(遼西 : 요하 서쪽) 지역(그 이전 시대에는 산둥반도의 일부 지역 포함), 요하(遼河) 중상류의 계곡, 랴오뚱(遼東) 반도 한국의 서북부 해안 지대를 포함한다. 그리고 예족은 지린(吉林)의 남부 및 동북만주 지역이다.”라고 정리하고 있습니다[유 엠 부찐 『고조선』(소나무 : 1990)].

북한학자 리준영은 맥족은 고대 중국 사서(史書)에 나타나는 고리국(?離國)의 구성원이며 이 고리국이 바로 북부여이고, 북한의 탁월한 사가인 리지린 선생은 이들이 동호(東胡)라고 합니다. 이 말은 맥족이 지역적인 분포나 문화적인 특성이 동호와는 구별하기 어렵다는 말이지요. 간단히 말하면 ‘동호 = 맥(예맥)’이라는 것입니다.

 

리지린 선생의 연구에 따르면 황해 연안과 발해만 한반도에 거주했던 종족인 조이족(鳥夷族)과 예맥족이 융합하여 기원전 2천년 경에 숙신(肅愼)이 나타났다고 하고 있습니다(리지린『고조선연구』1963). 여기서 리지린 선생이 지적하는 시기는 의문스럽지만 예맥족과 숙신족도 구분이 대단히 어렵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한 것입니다.

http://weekly.hankooki.com/lpage/nation/200703/wk2007030614592237070.htm

실제로 숙신은 한(漢)나라 이전에는 허뻬이(河北) 지역과 남만주지역에서 나타나고 있고, 한(漢)나라 이후에는 흑룡강과 연해주를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죠. 그런데 한(漢)나라 이전 숙신의 영역은 고조선의 영역과 대부분 겹치고 있으며, 조선(朝鮮)과 숙신이 같이 나오는 기록이 없어 숙신(肅愼)은 조선(朝鮮)의 다른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동호에서 거란(契丹)이 나온 것으로 말하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이들과 몽골(蒙兀)은 민족적으로 다르지 않고 거란 또한 고구려를 구성한 민족과 다르지 않죠.

같은 주거문화, 유사한 장례문화, 같은 토템, 같은 무속(巫俗)에 언어도 같은 계열이고 생물학적 체질과 체격조건도 같은데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자연환경 변화에 따른 생활양식이 다른 것뿐인데 말입니다.

예를 들면 버드나무를 신목(新木)으로 숭배하는 사상은 흉노·몽골·거란·선비·여진·고구려 등 모두에서 공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江上波夫 「匈奴の祭祀」『ユウラシア古代北方文化』東京 1948 227-231쪽). 참고로 선비·오환 등도 동쪽과 푸른색을 숭상합니다. 실제로 『삼국지』(「위서」), 『요사(遼史)』 등에 나타나는 오환ㆍ선비(동호)의 습속은 현대 한국인과도 매우 유사할 정도입니다.

그리고 예맥이 단순히 만주 중부에서 대동강 지역에 이르는 곳에서만 살아온 것이 아니죠.

예맥의 신화(단군신화)로 파악해 보더라도 중국의 베이징 부근으로 이동한 예ㆍ맥족들이 요동 - 만주 - 연해주 지역의 곰토템 민족들과 융합하면서 한민족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죠.

 

곰토템 지역으로만 보더라도 ① 유라시아 아메리카 형(시베리아 산림지대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남 : 야생의 곰을 종족의 수호령, 또는 수렵신으로 간주)과 ② 아이누형(연해주에서 북해도에 걸쳐 나타남 : 곰을 사육하여 의례적으로 죽여서 나눠 먹지만 곰을 조상으로 간주) 등이니 이 지역들은 사실상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서 북해도에 이르는 태평양 주변의 전 지역을 의미하고 있지요.

http://media.daum.net/culture/art/view.html?cateid=1003&newsid=20080327042013010&p=seoul

http://www.kookje.co.kr/news2006/asp/center.asp?gbn=v&code=2505&clss_cd=150810&key=20090102.22018193124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7072401032430065004

『요사(遼史)』에서는 “(거란 수도인 중경의 동부 관문인) 동경요양부는 본래 조선의 땅이라(『遼史』「地理志二」 東京遼陽府本朝鮮之地)”고 합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바와는 다르게 “요나라는 조선의 옛 땅에서 유래했으며, 고조선과 같이 팔조금법(八條禁法) 관습과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遼史』卷四十九 : 遼本朝鮮故壤 箕子八條之敎 流風遺俗 蓋有存者).”고 하고 있지요.

고구려나 몽골은 기원적으로 타브가치(Tabgachi : 拓跋鮮卑), 즉 선비족(鮮卑族)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이 때 사용된 ‘치(chi)’는 몽골계 언어의 인칭대명사입니다. 예를 들면 장사치·벼슬아치 등의 치와 같은 것이죠]. 이 점은 몽골이나 북방 유목민들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이 지적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타브가치는 흔히 탁발선비(拓跋鮮卑)라고 기록된 민족으로 북위(北魏)를 건설한 민족인데 고구려ㆍ몽골과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습니다. 이들의 원주지가 맥족이나 몽골과 겹치고(같거나 인근지역) 있을 뿐만 아니라 언어나 풍속이 거의 같다고 합니다[박원길 『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샤머니즘』(민속원 : 2001) 82쪽, 94~95쪽].

북위의 역사서인 『위서(魏書)』에는 사신이 와서 북위의 세조(世祖)에게 민족 발상지를 설명해주자 세조가 그 곳에 사람을 파견하여 축문을 새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魏書』「烏洛侯傳」). 그런데 내몽골 자치구 후룬뷔일멍(呼倫貝爾盟) 어룬춘(鄂倫春) 자치기(自治旗) 아리하(阿里河) 진 서북 10km 지점에 있는 천연동굴에서 이 축문 비석이 1980년 7월 30일에 발견되었다는 것이지요[박원길 『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샤머니즘』97쪽]. 이 비석은 아리하, 즉 아리수(阿利水) 인근에서 발견되었는데 바로 이 강 이름이 고구려의 시조가 건너간 강과 같은 이름이죠.

 

신석기 때 요서지역에 주로 나타나는 홍산(紅山)문화(4000~3000 B. C.)는 중국 문명인 황하(黃河) 유역의 앙소(仰韶)문화 및 용산(龍山)문화와는 성격이 확실히 다릅니다(흔히 중국인들을 앙소문화의 후예라고 합니다). 홍산 문화에서 나타난 토기는 우리 한국의 것과 유사한 반면, 중국본토의 신석기 토기 형태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이 홍산문화는 청동을 사용하는 형태로 발전하여 하가점[夏家店 : 내몽골 적봉(赤峰) 하가점촌] 하층(下層)문화(2000~1500 B. C.)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같은 지역에서 나타나는 하가점 상층(上層) 문화(1000~300 B. C.)는 이전과는 다르게 유목문화의 특징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죠. 즉 이전과는 달리 스키타이 동물문양들이 나타나는 등 유라시아 초원지대와의 교류를 보여주는 많은 유물들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우리가 앞서 이미 본 비파형 동검은 바로 이 하가점 상층문화에서 나타나죠.

여기서 잠시 봅시다. 일반적으로 하가점 상층문화의 시기와 지역은 동호의 존속기간과 지역이 거의 일치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중국인들은 인심을 써서(?) 요동지역은 고조선(古朝鮮)의 문화로 요서지역은 동호(東胡)의 문화로 생각해오기는 합니다만, 요서와 요동의 문화적 차이가 무엇이 있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애초에 동호 = 예맥인 것이죠. 구체적으로 봅시다.

그 동안의 발굴된 과정에서 나타나는 주요 현상은 돌무덤에서 출토되는 것은 청동검(靑銅劍)과 청동거울 등이 마치 하나의 조를 이루고 있고, 그 합금비율(合金比率)이 한반도·요서·요동 지역 등이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파형 동검은 동일한 세력의 기술정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이들은 결국 하나라는 것이죠.

그리고 한반도 중남부지역에 비파형 동검의 발달된 형태인 세형동검이 나타날 즈음 일본 열도에서는 야요이 문화가 시작됩니다. [조진선, 『세형동검문화의 전개과정 연구』전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 2004) 참고].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34699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11031740465&code=960201

나아가 홍산문화 - 하가점 상하층 문화의 특성들(빗살무늬 토기·민무늬 토기·고인돌·비파형동검)은 요서 - 요동 - 만주 - 한반도 - 일본 열도에도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숙신은 만리장성 이북의 지역에서 동북아시아에 걸쳐서 거주했던 민족들을 부르는 일반적인 명칭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숙신은 카멜레온의 몸 색깔처럼 물길(勿吉)·말갈(靺鞨)·읍루(?婁) 등으로 불리었으며, 후일에는 여진·만주족으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름들이 거의 욕설로 바뀌어졌습니다.

한족(漢族)의 사가(史家)들에 의해 재단된 것이죠. 그러나 이 숙신이야말로 우리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주체 중 하나였습니다.

중국인들은 북방 유목민들을 서융(흉노, 강), 북적(흉노, 선비), 동이(갈, 예맥) 등으로 나눕니다. 그런데 흉노·선비·갈·예맥이니 하는 명칭들은 이들 부족들이 스스로 부르는 명칭이 아니라 중국인들이 자기들이 분류하기 편리한 대로 임의로 부여한 명칭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인간 이하를 지칭하는 욕들입니다.

예컨대 일반적으로 우리 민족을 지칭하는 것으로 알려진 ‘예맥(濊貊)’이란 ‘똥오줌이 묻은 더러운 (승냥이 같은) 짐승’라는 뜻인데 간단히 얘기하면 ‘똥고양이’이죠. 세상의 어느 부족이 자기 부족 그렇게 부르겠습니까? 그리고 선비(鮮卑)란 동물무늬가 있는 허리띠[세르베] (에가미 나미오 교수의 고증), 흉노(匈奴)란 ‘입심 좋은 노예’라는 뜻입니다. 물길(勿吉)은 ‘기분 나쁜 놈(재수 더러운 놈)’입니다.

http://www.sciencetimes.co.kr/search.do?query=한국인의%20고향,%20‘신비의%20왕국’%20찾았다

('찾았다'까지 복사해서 주소창에 붙여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serial_list.html?s_code=af061&page=&page=1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4/11/09/200411090500015/200411090500015_1.html

중국인들은 사방의 오랑캐들을 이렇게 나누지만 실제로는 북적(北狄)이나 동이(東夷)는 구분하기가 어렵습니다.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고구려, 백제, 발해

 

≪삼국유사≫에 의하면 “부여군은 옛 백제의 왕도이니 혹은 소부리군(所夫里郡)이라고도 한다.”고 하였습니다. ≪삼국사기≫에도 “백제 성왕 16년 무오(戊午) 봄에 수도를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한다.”라고 하였고, 주(注)에 그 지명은 ‘소부리’라고 하였습니다. 사비는 지금의 고성진(古省津)이며 소부리라는 것은 부여의 별칭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양전장적(量田帳籍)에 의하면 소부리군은 농부의 주첩(柱貼)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말하는 부여군이란 상고(上古)의 이름을 되찾은 것이죠. 그리고 ≪삼국사 三國史≫에서는 백제왕의 성이 부씨(扶氏)이므로 그렇게 일컬었습니다.

또, ≪고전기 古典記≫를 인용하여 제26대 성왕에 이르러 도읍을 소부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하여 제31대 의자왕에 이르기까지 120년을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남부여라는 국호는 백제가 성왕 때 중흥을 꾀하면서 사용하기 시작하여 멸망할 때까지 불린 것입니다.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과 절대다수의 발해 주민들이 고구려와 같은 부여예맥 종족이라는 근거

<구당서 발해말갈전>
발해말갈의 대조영이란 자는 본래 고려별종이다.
渤海靺鞨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

고려별종이라고 언급한 사서들-당회요, 오대회요, 구오대사, 태평환우기, 책부원구, 신오대사, 무경총요, 자치통감, 고려도경, 송사, 요사, 송회요

<신당서 발해전>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이 고구려에 귀부했던 이들로 성이 대씨이다.
渤海 本粟末靺鞨附高麗者 姓大氏

<속일본기>권22
발해의 문왕 대흠무가 스스로 고려국왕대흠무언高麗國王大欽茂言라 하렸고 일본의 회답서에도 발해를 고려국이라 칭했다.

같은 책 권10에
대무예의 계에....고려의 옛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유속을 가지고 있다.
大武藝啓...復高麗之舊居 有夫餘之遺俗

,책부원구>에서는 속말말갈이 수나라에 투항하자 수나라는 이를 위해 부여후라는 직함을 내렸다.

이는 모두 명확히 속말말갈은 고구려 부여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밝히는 것이죠. 말갈의 7부 중에 <수서 말갈전>에는 불열이동은 모두 돌화살을 사용하며 옛 숙신사람이다.自拂涅印 矢皆石鏃 卽古肅愼氏也라고만 하고 불열 이서지역의 속말말갈 등의 부에 대해서는 옛 숙신인들이라고 여기지 않고 있죠.

 

속말말갈이 거주하던 송화강 상류는 자고이래로 계속해서 예맥족이 살던 지역입니다.

북위때에 동쪽에 있던 물길이 서쪽으로 옮겨갔지만 고고자료나 문헌자료를 통해 볼 때 그들이 송화강을 건너 그 서쪽까지 넘어오지 않았음이 증명됩니다. 그러므로 속말말갈 중에도 틀림없이 숙신종족이 성분이 융입되기는 했으나 역시 주체민족은 예맥종족이었죠.

문헌의 기록을 통해 보면 예맥족의 한 지파는 장기간에 걸쳐 지금의 송화강 상류에 살았고 경제 문화가 비교적 발달해 있었습니다.

부여는 네차례의 과정을 거치면서 고구려에 병합되어지게 됩니다.

첫째는 고주몽이 부여로부터 도망쳐 고구려(즉 계루부)를 건국할 때 따라나온 무리들이 있었죠.

두번째는 A.D22년 고구려 대무신왕이 동부여를 쳐서 그 왕 대소를 죽이자 대소의 종제(從弟)가 1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하여 고구려가 이들을 중심으로 연나부를 설치할 때의 사람들이 있었고 세번째로는 대소의 또 다른 동생이 자립하여 왕이 되어 갈사수 가에 도읍을 정했다가 A.D68년 고구려에 투항할 때 휩쓸려온 이들이 있었죠.

마지막 무리로는 A.D477년 부여왕이 처자와 노비를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할 때 편입된 부여인들입니다. 이들 외에 개별적으로 고구려에 투항한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5세기경에 부여왕이 고구려에 투항한 이후 부여는 모두 고구려에 예속되었죠. <위서 고구려전>에 '(고구려의 강역)은 북으로 옛 부여 지역에 이릅니다. (高句麗疆界) 北至舊夫餘고 하였고 <구당서>와 <신당서>의 <고려전>에도 모두 고구려에 <부여성>이 있다고 했으며 곧이어 당이 고구려를 정복하여 부여성을 무너뜨렸다고 했죠. 부여인으로 고구려에 들어간 무리들의 사정은 서로 다릅니다. 초기에 고구려에 귀화한 부여인은 모두 고구려에 융합되었으나 맨 나중에 편입된 자들은 그때까지 고구려백성으로 다 동화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같은 예맥족이긴 하지만 지역특성이 있고 부여인이라는 정체성도 나름대로 견지하고 있었을 터이죠.

 

부여가 망한 후 지금의 길림시 일대는 고구려의 영역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의 부여 유민은 고구려에 불복 여러차례 고구려의 정복전쟁의 대상이 되었죠. 그들이 사는 곳이 속말수(지금의 송화강 북류 끝)이었기 때문에 역사에서는 이를 속말말갈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과거의 일반인은 모두가 속말말갈을 숙신계로 여겼죠. 즉 물길인이 서쪽으로 이동하여 이곳에 왔다는 것이죠.

그러나 <수서 말갈전>에 불열이동은 화살을 모두가 석촉을 사용하고 있죠. 즉 고대 숙신씨들이다.라 하여 불열 이서지역의 속말말갈은 숙신계가 아님을 밝히고 있습니다. 또 고고문화로 보더라도 물길문화(만주족의 직접조상)의 분포범위는 지금의 길림시 이남 및 이서지역까지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물길인의 서진은 겨우 길림시 동북지역까지만 닿았고 속말말갈의 지역까지 점거하지는 않았음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이죠. 게다가 속말말갈의 족속은 <구당서>등의 여러 문헌에 모두 <고구려의 별종>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무경총요>전집에는 더욱이 발해는 부여의 별종이다. 본래 부여의 땅이다 渤海 夫餘之別種 本夫餘之地라 했고 <속일본기> 권10에 대무예가 일본에 보내는 국서에 자칭 <부여의 풍속이 남아 있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책부원구>권 970에 속말말갈의 추장 돌지계가 수에 투항해 오자 그를 <부여후로 봉했다>고 했다.

 

<구당서 지리지>에 '신주는 속말말갈 오소고부에 두었다. 여주는 신주를 나우어 돌지계가 수에 투항해오자 그를 부여후로 봉했다고 했다'라 해서 속말말갈은 부여말갈이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죠. 속말말갈이 이미 '부여별종' '고려별종''부여의 풍속이 남아 있다' '추장을 부여후로 봉했다'고 한 등등의 기록은 모두가 속말말갈이 부여와 깊은 관련이 있음을 표명하는 말이다. 따라서 대조영의 출신종족인 속말말갈은 부여의 유민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발해는 부여유민(속말말갈) 옥저유민(백산말갈) 고구려유민이 주축이 되어 건국한 한국사의 정통왕조인 것입니다. 절대다수 고구려유민들이 주축이된 발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라와 함께 병립한 남북국시대가 성립할 수 있죠. 예맥족은 한민족이기 때문이죠.

여진족은 불열이동의 흑수말갈 호실말갈 불열말갈등이 나중에 여진족이 되어지며 일부 발해유민들도 흑수말갈족에 융합되어지며 나중에는 만주족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만주족의 주축이 되는 족속은 당연히 숙신계인 흑수말갈이고 발해는 부여예맥계인 속말말갈 고구려유민들인 것이죠.

당시의 사정으로 보면 발해 - 통일신라사이에는 하나의 민족으로 보는 정신적 흐름이 분명히 발견됩니다. 통일신라(統一新羅)는 발해를 북조(北朝), 또는 북국(北國)이라고 명백히 지칭하고 있습니다(『삼국사기』권 10 「신라본기」; 권37 지리지). 아마 이 당시까지만 해도 상당한 공통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통일신라가 발해에 대하여 북조(北朝)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우리가 한반도 북쪽을 북한(北韓)이라고 부르는 것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즉 통일신라는 발해와 현재는 대립하고 있지만 결국은 통일이 되어야할 동족(同族) 전체의 일부라는 의식이 있다는 말이죠.

 

쥐나와 왜국의 억지

 

<교토대 사학과 명예교수 우에다 마사키>
백제에서는 왜왕을 후왕이라 간주했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gqEplun4YnI

<타다시 관장>
일본은 철이 없어서 6세기 중반까지 주로 가야,백제,신라로부터의 철에 의존하였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WOuII_2gN7Y

<이노쿠마 교수>
새로운 문화를 가지고 온 백제인에게 충격을 받았습니다.
서로 앞다투어 고급관료나 귀족들이 백제의 복장을 따라했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7Q4q_QF8uCw

<마메노 교수>
일본에서는 5세기말~6세기 전반에 백제계 칼이 많이 나옵니다.
일본에서는 환두대도를 만들수 없었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LUEavf7Ik4w

노예종족 허구의 짱골라

한나라를 세운 의심 많고 욕심 많은 '유방' - 유협(깡패,불량배를 순화시킨 낱말)출신 (+자격지심으로 자신을 도운 공신들 토사구팽)

명나라를 세운 역시 의심 많고 욕심 많은 '주원장' - 가난하고 무식한 농사꾼출신 (+역시 자격지심으로 자신을 도운 공신들 토사구팽)

쥐나공산국을 세운 또 역시 무식하고 탐욕스러운 '모택동' -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여러 인민들을 학살한 놈 (+쥐나의 스탈린)

이런 무식하고 탐욕스러우며 토사구팽을 밥 먹듯이 하는 비천한 출신의 조상을 둔 짱골라이다 보니 상식이 안 통하지!

지금도 짱골라들은 무조건 우기면 다 되는 줄 안다.

한국 전쟁으로 간도와 북한을 말아먹은 못된똥!

겉으로는 아닌 척 하며 뒤에서는 뒤통수 치는 것을 좋아하는 등소평!

쥐나공산국이 동북, 서북, 서남, 몽골 탐원공정을 벌이고 있는 이 때에

등소평이 남긴 말 중 다음의 말이 우리를 소름끼치게 한다.

 

등소평왈 "3000번을 거짓말하면 진실이 될 것이다!"

 

등소평의 이 말이 짱골라의 억지를 크게 대변하고 있군....

티베트를 가혹하게 압제한 공로로 쥐나의 지도자가 되어 역사 공정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후진타오!

http://blog.naver.com/xxxod/70071717538

13억 중국인 가운데 92%를 차지하고 있다는 한족(漢族)이 실제 조사 결과 '유전학적으론 현존하지 않는 제3의 혈통'으로 나타났다.
'한족은 혈통 개념이 아니라 문화적인 개념'이라는 통설이 학술연구로 밝혀졌다는 점에서 이목을 끈다. 중국 간쑤(甘肅)성 란저우(蘭州)대학 생명과학학원 셰샤오둥(謝小東) 교수는 "순수한 혈통의 한족은 현재 없다"는 연구 결과를 최근 발표했다고 중국 언론들이 15일 보도했다. 그의 연구 결과는 중국 서북지역의 소수민족 DNA 연구 등을 통해 나온 것이다. 셰 교수는 "DNA 조사 결과 현대 중국인은 다양한 민족의 특질이 고루 합쳐진 것으로 어떤 특정 민족의 특질이 도드라지게 나타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오래전부터 '한족은 중원(中原)에 살고 있다'고 생각돼 왔으나 이는 특정 시기의 한족을 주변의 다른 종족과 구별하기 위해 만든 지역적 구분일 뿐"이라면서 "이젠 한족을 그렇게 지역적으로 따져 정의할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춘추전국시대 현재의 산시(陝西)성 시안(西安)에 세워진 진(秦)은 소수민족인 '서융(西戎:서쪽 오랑캐)'이 주류였다는 것이다.
또 중국 역사에 나타나는 중원의 범위는 주로 현재의 산시(山西) 남부와 장쑤(江蘇) 서부 및 안후이(安徽) 서북부 등의 소수 지방을 포함한 허난(河南)성 일대였으나, 이곳에 거주한 사람들을 한족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중국인들은 또 자신들이 "염제(炎帝)와 황제(黃帝)의 자손(炎黃子孫)"이라고 주장하지만 연구 결과 황제와 염제의 발원지도 중국인들이 오랑캐로 치부해 왔던 '북적(北狄)' 지역이었던 것으로 연구 결과 드러났다. 황제와 염제의 발원지는 모두 현재의 간쑤성과 산시(陝西)성에 걸쳐 있는 황토 고원지역으로 이 두 곳 모두 한족의 본거지가 아닌 것은 물론 주요 거주지역도 아니라는 얘기다.

 

셰 교수는 "연구 결과 오히려 중국 북부에서 남부로 이주한 소수민족 객가족(客家族)이 고대 중원인의 문화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밝혀졌다"면서 "이들의 고어(古語), 풍속 및 습관에서 나타나는 역사의 흔적을 보면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중원인"이라고 강조했다.

유전자로 밝혀보는 뿌리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4/11/09/200411090500015/200411090500015_1.html

중국의 역사는 철저한 이민족에게 지배당한 역사였습니다.

한나라가 망하고, 삼국시대 이후, 사마씨에 의해서 진나라가 성립하게 됩니다. 하지만 진나라는 곧 이민족들에게

패퇴하여 남부지역에 자리잡게 됩니다. 이 시기를 일컬어서 동진이라고 하지요. 하지만 동진은 곧 망하고 이민족들에 의해서 5호 16국 시대가 개막됩니다.

동진이 망한 420년부터 오랑케 출신이 세운 수나라가 창건,된 후, 망한 618년까지 이민족의 지배를 받고, 당나라가 들어섰으나, 당나라를 세운 이연도 이민족인 선비족 출신입니다.

즉, 중국역사 420년부터 당나라가 망하는 907년간 총 487년간 한^족은 이민족의 노예였습니다. (420년~907년 487년간)

그러나 여기에서 중국의 노예역사는 그치지 않습니다.

당나라가 망하자 5대10국 시대가 도래하게 되는데 5대 10국의 주축세력은 돌궐족이었습니다.

다시 907년에서 960년 송나라가 세워지기전까지 53년의 노예 역사가 추가 됩니다. (907년~960년 53년간)

지금까지 총 540년이 중국역사 중 노예역사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540년간의 노예역사를 거치면서 그들의 정신세계에는 "나는 노예이다"라는 정신이 깊숙히 박혀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중국 송나라가 세워진 후에도 요나라와 금나라에 조공을 받치면서 스스로 노예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거란족인 요나라가 907년에서 1125년까지, 여진족인 금나라가 1115년에서 1234까지 존재했으니,

총 327년의 역사가 노예역사로 중국사에 편입되게 됩니다. (907년~1234년 327년간)

이런 오랜 노예근성을 버리고자 송나라는 새로이 세력을 확장하던 몽골과 연합하여 금나라를 멸망시켰으나,

노예근성에 찌들어버린 그들은, 마침내 나라까지 이민족 몽골이 세운 원나라에게 내어주게 됩니다.

1234년에서 1368년까지 천한 농민의 자식이 세운 명나라가 나타나기 전까지 몽골 이민족의 노예로써

총 1001년간 이민족의 노예로써, 충실하게 살아오게 됩니다. (1234년~1368년 134년간)

곧이어 명나라가 나타나지만 명나라 1368년에서 1644년까지 276년간은 노예들에게는 과분한 기간이었습니다.

여진족은 이들 노예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갖는것을 용서치 못하여 곧바로 이들 노예들을 응징하러 갑니다.

이로 인해서 또다시 이민족 여진족에 의해서 명나라는 멸망하고, 중국에는 청나라가 세워지게 되어 그후,

1644년에서 1911년까지 267년간을 노예로 살게 됩니다. 여기까지 총 1268년간 노예들의 역사가 이어져 오게 됩니다.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청일전쟁에서 패퇴하고난 뒤 (1644년~1911년 267년간)

20세기초부터 중국의 동북지역에서 홍콩,까지 중국의 동부지역과 내륙일부 지역이 일본에게 정렴당하고 1931년에는

일본에 의해서 만주국이 세워지기까지 합니다. 1945년 일본세력이 물러나기까지 34년간의 노예역사가 추가됩니다.

물론 여기서 노예역사가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홍콩은 영국에 의해서 156년간, 마카오는 1999년까지 포르투갈에 의해서

통치되었습니다.

참고로 진시황의 진나라 역시 허구의 종족 짱골라가 아닌 서융계 왕조입니다.

 

한사군은 한반도에 없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1&aid=0000152227

만리장성은 없다!!!

첫번째 오해는 이 모든 어마어마한 건축물을 모두 진시황이 축조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축조하긴 했지만 엄밀히 따진다면 만리장성을 처음 만든 사람은 진시황이 아니다. 굳이 만리장성의 기원을 따진다면 지나 최초의 통일국가 진나라가 아닌 그 전의 춘추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만리장성이라는 말이 문헌에 나타난 것은 전국시대이다. 결국 엄밀히 말하면 진시황은 전국시대 연(燕)·조(趙)·진(秦) 등의 여러 나라가 외적(흉노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이미 구축했던 장성들을 통일 이후 연결하고 더 연장한 것에 불과하다.
진시황의 장성은 만리장성의 서쪽 일부에 불과하다. (진나라는 원래 서쪽 귀퉁이의 작은 나라에 불과했으니 그 당시 자신의 영토만 지켰으면 됐으니 당연한 일이다. 만약 그 너머를 침범하려 했으면 타국과 전쟁을 각오하야 했을테니까) 지금의 만리장성은 명나라때 완성됐다.

두 번째 오해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만리장성의 존재가 진시황 때 축조한 장성의 모습 그대로 일 것이라는 점이다. 유감스럽게도 진나라 때 축조된 고대 장성은 세월이 흐르고 여러 왕조의 명멸을 거치는 동안 이루어진 수많은 개·보수 및 방치 등을 거쳐 거의 본모습을 볼 수 없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만리장성은 거의 명나라 시대에 축조된 것이다. 명의 영락제 시대 이후부터 진행된 만리장성의 개축은 무려 18차례의 개수를 거쳐서, 16세기 말 동쪽의 하북성 산해관(압록강 인접)으로부터 서쪽의 감숙성 가욕관까지 연결된 실제거리 1만 2000여리나 되는 오늘날의 만리장성이 완성되었다 특히 만리장성은 강력한 국가의 상징일 것이라는 일반인의 세 번째 오해와는 달리 실제 역사상 비교적 세력이 약한 한족 왕조 때 더 활발하게 축조 되었다. (실제 허구의 종족 짱골라의 왕조는 한, 송, 명 3왕조 뿐이다.) 만리장성의 축조 목적이 북방 민족들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서이므로...

 

실제 문물이 융성했던 흉노계 선비족 왕조 당나라대나 유라시아를 통치한 흉노계 몽골족 왕조 원나라대, 고구려발해 후예 예맥부여계 여진(=만주)족 왕조 청나라대에는 만리장성에 대한 개보수나 증축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면 더욱 쉽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지나의 상징이 되어버린 만리장성과 진시황의 악연. 사실 진시황의 진나라마저도 서융계 왕조로서 허구의 종족 짱골라와는 전혀 상관없다. 진시황의 입장으로 볼 때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으로 기존의 장성들을 연결하여 만리장성을 축조했을 뿐인데, 두고두고 백성들의 피와 땀을 강탈해간 폭군으로 회자되는 점은 안된 일이나 그의 악명으로 후세가 두고두고 먹고 살게 되었으니 참 역설적이다.

고구려 유물 밀반출 조선족 2명 사형
http://news.nate.com/view/20040108n01664

노컷뉴스 기사전송 2004-01-08 11:33

조선족 주민 ''고구려역사 파괴대신 북에 밀반출이 나아''

지난해 여름 중국에서 고구려 유물을 북한으로 몰래 가져가려던 조선족 주민이 적발돼 2명이 사형당하고 2명이 25년 징역형을 받았다고 산케이(産經)신문이 오늘 보도했습니다.
문제의 유물은 고구려 유적이 집중돼 있는 지린성 지안의 4호고분과 5호고분에 있던 것으로, 사건에 연루된 조선족 주민들은 "이대로 가면 우리조상인 고구려의 역사가 중국에 의해 은폐되고 파괴되기 때문에 북한으로 반출하려 했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산케이는 중국은 이 사건이 있은 후 고분 등이 있는 현장 일대를 역사적 보존지역으로 지정해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면서 중국 당국의 이런 강경한 조치는 한국과 중국 사이에 고구려를 놓고 벌어지고 있는 역사전쟁과 관련해 중국이 고구려 문제를 얼마나 중요시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풀이했습니다.

CBS문체부 권주만기자

 

후진타오가 동북공정 지시·승인”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8&aid=0000073419

후진타오는 고구려사 왜곡 및 침탈을 위한 ‘동북공정’을 사실상 지시한 인물로 유명하다. 이는 중국 정부 기관의 홈페이지 및 지방 신문 기사를 통해 확인된 사실이다.

중국 헤이룽장(黑龍江)성 헤이허(黑河)에서 간행되는 헤이허일보는 지난 2003년 8월 동북공정 전문가위원회 제3차회의가 헤이허시에서 열린 사실을 보도하면서 “동북공정은 후진타오 동지가 2000년 중국사회과학원을 통해 비준한 사회과학 연구항목”이라고 소개했다.

또 중국 국무원 산하 중앙문사연구관의 랴오닝성 문사연구관은 홈페이지에서 연혁을 소개하며 “쑨진이(孫進已) 연구관의 고구려 관련 연구를 지도자들이 매우 중시하고 지지했으며, 후진타오, 딩관건(丁關根·당시 공산당 선전부장), 리란칭(李嵐淸·당시 부총리), 첸치천(錢其琛·당시 외교담당 부총리), 리톄잉(李鐵映·사회과학원장) 동지 등이 모두 중요한 지시를 했다”고 밝혔다. 이로 인해 ‘동북공정은 중앙 정부와 무관하다’는 중국측의 주장은 거짓말로 확인된 바 있다.

지난 2002년부터 5년간 진행된 동북공정은 고구려사뿐 아니라 고조선에서 간도 문제까지 한국사 전반에 대한 문제를 다뤘고, 2004년 한국의 반발에 부딪쳐 일단 축소되는 듯 했으나 은밀히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중국의 동북공정은 고구려 역사를 침탈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어도가 한국 영토라는 것을 인정못한다’고 밝히며 전선을 동북아 전역으로 확대할 의사를 밝히고 있다. 중국은 지난 2007년 동계아시안게임에서 백두산이 자신들의 영토임을 강조하는 동영상을 홍보하기도 했다.

한편, 후진타오는 지난 1989년 티베트 학살 현장을 진두지휘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중국은 몽골이 중국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몽골제국을 일으킨 칭기즈칸마저도 중국 사람이라고 교과서에 기술하는 등 몽골 역사를 크게 왜곡하고 있습니다.”

몽골국립대학 잠미얀 바트투르(39) 교수는 “중국의 동북공정은 결코 한국만을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면서 “중국은 역사학자들을 동원해 공공연히 ‘몽골을 되찾자.’고 주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바트투르 교수는 지난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용덕)에서 열린 국내 전문가들과의 비공개 간담회에서 ‘중국 역사학자들의 역사인식’을 주제로 강연하면서 이같이 밝혔다.

그에 따르면 중국은 ‘몽골의 중국화’를 중요한 과제로 다루고 있다. 몽골 학계에서 몽골사를 3권으로 정리해 출간하자 중국측은 곧이어 8권짜리 몽골사로 정리했고, 다시 몽골측이 5권을 발간하자 지난해 중국측은 15권을 펴내 물량공세도 서슴지 않고 있다.

바트투르 교수는 “당시 중국 학계 및 언론은 몽골 역사의 연구중심이 중국이 됐다고 선전했다.”고 전했다. 바트투르 교수는 교과서 왜곡에 대해서도 분개했다. 중국의 초·중·고 역사교과서에 ‘원나라=중국 국가’라고 기술돼...

그러나 바트투르 교수는 “원나라를 세워 중국을 정복한 쿠빌라이칸 이후 명나라 설립 전까지 중국을 통치했다.”면서 중국의 교과서 왜곡을 비판했다.

그는 “한 사람만으로는 가족을 이룰 수 없다.”며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한국과 티베트, 카자흐스탄 등 역사왜곡 피해당사국간의 공동연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세계몽골반점 동족지도자 국제평화회의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2&aid=0000053814

쥐나의 억지스런 궤변...

대학 동창 하나가 있는데 주변 사람들은 그를 백족(白族) 총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분증에는 ‘한족’(漢族)이라고 적혀 있다. 또 다른 회사 동료는 성이 왕씨다. 몽골족인데 호적지와 출생지가 다 (한족 문명의 중심지인) 하남성 남양으로 돼 있다. 산서성과 내몽골자치주를 여행할 때 운전을 맡은 기사는 산서성의 한족이었다. 그러나 그는 할아버지가 몽골족이라고 털어놓았다. …여기 무너져내린 만리장성의 모습을 보면 이곳에서 엄청난 역사극들이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를 주름잡던 그 많은 소수민족은 도대체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중국의 한 네티즌이 쓴 글 ‘한족, 중화민족 그리고 악비정신’ 가운데) “중국 역사상 가장 무식한 교육 당국” 2003년 12월 중국은 갑자기 때 아닌 ‘민족영웅 논쟁’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12월9일 <베이징청년보> 등 언론들이 “신판 고등중학교 역사 대강에서 ‘악비(岳飛)와 문천상은 외국 침략에 대항한 인물이 아니므로 더 이상 ’민족영웅‘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정의했다”고 보도하면서 엄청난 파문이 일어난 것이다. ‘sohu.com’을 비롯해 중국 유수의 사이트는 이 조처를 비난하는 글로 도배되다시피 했다.

“우스워 죽을 지경이로다. …이 귀여운 변증법과 중국 역사학자들이여! …이건 정말 중국 역사상 가장 무식한 교육 당국이다.”

http://news.donga.com/fbin/output?n=200707250129

당시의 사정으로 보면 발해 - 통일신라사이에는 하나의 민족으로 보는 정신적 흐름이 분명히 발견된다. 통일신라(統一新羅)는 발해를 북조(北朝), 또는 북국(北國)이라고 명백히 지칭하고 있다(『삼국사기』권 10 「신라본기」; 권37 지리지). 이 당시에도 상당한 공통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통일신라가 발해에 대하여 북조(北朝)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우리가 한반도 북쪽을 북한(北韓)이라고 부르는 것과도 다르지 않다. 즉 통일신라는 발해와 현재는 대립하고 있지만 결국은 통일이 되어야할 동족(同族) 전체의 일부라는 의식이 있었다.

참고로 인구학적으로 범위를 최대로 좁혀서 따진다면 남한은 신라의 후예라기 보다는 부여의 후예가 더 정확할 것입니다. 고구려와 백제 및 발해는 모두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국가들이죠. 뿐만 아니라 현재 대한민국의 국명은 코리아로 불립니다. 이 역시 거슬러 올라가자면 고구려에서 유래된 말이죠.
인구 비율로 따져도 신라의 인구보다는 고구려와 백제 계통의 인구가 훨씬 더 우세했습니다.
실제로 삼국시대 신라의 인구는 백제의 인구 절반도 채 안 되었습니다. 다만 당나라의 개입으로 반도를 차지할 수 있어서 그렇지. 당나라의 개입이 없었다면 신라는 오히려 고구려-백제 연맹에게 복속되었을 겁니다. 그러니 남북국시대 신라의 인구에서 신라계는 적었습니다. 오히려 신라에 병합된 한반도 이북과 이남에 있던 고구려-백제계 백성들이 훨씬 더 많았죠.
이것이 나중에 중세고려가 일어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