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보현봉 마애칠불 헌다례 - 하나

2014. 10. 21. 14:41들꽃다회


   




         북한산 보현봉 마애칠불 헌다례 - 하나 


                                 / 20141011 토요일, 맑음    







모이신 차동호인들의 맑게 붉은 단심(丹心) 만큼이나 단풍도 붉게 물들었다.

 


 

 


세계평화, 사해일가, 국태민안과 조국통일을 기원하는 헌다례가

삼각산 보현봉 칠불께 올리는 차, 향, 무 ,악(樂)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봉행되기 시작할 계획이다.

 

 

 

이번 헌다례의 시작은 월간 <차의 세계> 최석환 회장님의 주관하에

경향 각지에서 모인 차애호가들의 뜻을 모아

간소하지만 갖은 정성을 다하여 봉행되었다.

 

이것이야 말로 다경을 쓴 육상저옹이 말한

정행검덕(精行儉德)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칠불마애불이 있는 일선사 대웅전 앞에서..... 

 

 - 원로산악인이자 옥다구(玉茶具) 수집가이신 조락형 선생님.

조 선배님의 동료들인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한국산악회 에베레스트 원정대

동계훈련대가 1969년 2월 14일  눈사태로 10명의 대원들이 산화(散花)하셨다.

 

- 대웅전 바로 뒤에 있는 암벽에 칠불마애불이 모셔져 있으나

생태계보호구역 지정으로 출입금지되어 대성문으로 헌다례 장소 변경함.


마애칠불(磨崖七佛)은 무학대사가 한양도읍을 정한 후

태조 이단(李旦)에게 칠성도법(七星道法)에 의한

국가번영과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새긴 마애칠불임.

 

이날에도 1969년 2월 14일 설악산 안내피골(이 사고 후 죽음의 계곡으로 이름이 바뀜)에서

한국산악회 에베레스트원정대 동계훈련에서 눈사태로

떨어지는 꽃잎처럼 산화(山化)하신 산친구들의 이름들을

되뇌이시기에 바쁘셨다.

 

45년이란 세월도  조 선배님의 가슴에 남아 있으신 

그날의 흔적을 지우기에 부족한 시간이였나 보다.

 


 


 

 

 

 *****  원로산악인 조락형 선생님의 회한 어리신 회고가

아래 설악산 내피골죽음의 계곡으로 이름을 바꾼 유래에 대한

자료 정리의 계기가 되었음을 너그럽게 혜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한국산악회 해외원정등반훈련대 10명 조난사고사

 

 

 

설악산 노루목 묘지

 

 대원들의 시신은 결단식을 했던 신흥사 보제루로 옮겨져 3월 5일 합동장례식이 거행되었고, 

설악산 입구 노루목 묘지에 안장 되었다.

 대장 이회성은 현역 군인인 관계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었고

부대장 김동기 교수도 선영에 안장되었다.

그러므로 노루목 묘지 2개의 봉분에는 시신없이 유품만 매장되어 있다.

 

 

 

 

 

 

▒ 조난자 명단(10명)


▶ 이희성, 43세, 대장, 육사교수(중령)
▶ 김동기, 39세, 부대장, 서울대 공대 교수
▶ 남궁기, 40세, 부대장, 한국전력
▶ 변명수, 24세, 서울대 문리대
▶ 이만수, 22세, 에코클럽
▶ 오준보, 24세, 연세대
▶ 임경식, 29세, 아카데미사진연구소
▶ 박은명, 23세, 육군본부
▶ 김종철, 21세, 연세대 수학과 2년
▶ 박명수, 21세, 서울대 문리대 4년

 

 

☞ 자료출처 / 속초문화원 발간, 2006년에서

 

 

 

▼ 아래의 동영상은 당시 대한 뉴우스에 소개된 영상자료이다.


 

 


 [설악산 죽음의 계곡 10동지 조난사고]에 대하여..


 

 1. 발생개요
가. 일시 : 1969. 2. 14
나. 장소 : 강원도 설악산 죽음의 계곡
다. 원인 : 1970년 히말라야 원정을 위해 설악산<죽음의 계곡>에서 등반 훈련기간에

              계곡의 막영지에서 취침중 눈사태를 당하여 전원(10명)이 사망한 사고임.

 

2. 피해현황 : 10명(사망 10명)

 

 - 중  략 -


 



 

 

 

 


일선사(一禪寺) 화단에 핀  국화꽃...



 

 

 


 

 

▲ 10동지 하관 : 1969년 3월 5일 설악산 노루목 장지에서 하관을 하고 있는 모습.

슬픔을 억누르는 몇몇 유가족들과 신문기자, 진행요원 등이 서로 다른 표정으로

하관작업을 하고 있다. 이날 서울에서도 장례식이 진행되었다.

 

 

 

▲ 신흥사로 가는 운구행렬 : 설악산 신흥사로 시신을 옮기고 있는 모습.

조난한 10동지의 관 위에는 한국산악회의 대형 회기가 덮여있다.

 

 

 

▲ 10동지 시신 발굴 작업 : 1969년 2월 죽음의 계곡에서 시신을 발굴하고 있는 경찰구조대 대원들.

구조대원들의 머리 위로 쌓여있는 눈이 당시의 적설량을 말해주고 있으며 침낭 속에 들어있는

시신이 잠을 자다가 봉변을 당했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 설악산 10동지 시신 하산 작업 : 1969년 2월 제1차 해외원정등반 준비훈련단에

참가했다가 눈사태로 죽음을 맞은 10동지의 시신을 신흥사로 운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가장 큰 눈사태로 인한 조난사건이라

매스컴의 관심이 집중되어 경찰과 사진기자들이 운구행렬 주위를 따라붙고 있다.

 

 

 

▲ 10동지 조난의 현장 : 일명 죽음의 계곡에서 눈사태로 조난하여 목숨을 잃은 10동지가 묻힌 현장.

표시된 부분의 눈이 무너져 내려 10동지가 막영하던 텐트와 설동을 덮쳤다.(임석제 사진)

 

 

 

 

▲ 죽음의 계곡등반 : 제1차 해외원정 등반 준비훈련단에 참가한 대원들이

죽음의 계곡을 오르고 있다.

이들중 10명은 죽음의 계곡에서 막영을 하다가 목숨을 잃었다.(임경식 사진)

 

 

 

 

▲ 조난한 임경식 대원의 마지막 모습 : 1969년 2월 제1차 해외원정등반 준비훈련단에

참가했던 임경식 대원이 조난지였던 일명 죽음의 계곡(안내피골)에서

막영을 위해 설동을 파고 들어가 앉아있다.

 

임경식 대원의 머리 윗부분에 스노우홀이라는 영문 글씨가 음각되어 있으며

제1차 해외원정등반 훈련대의 기념 페넌트가 걸려있다(임경식 사진)

 

 

 

☞ [자료 출처 : 글 - 서울산악조난구조대( http://www.alpinerescue.or.kr/ )
                       사진 - 한국산악회(
http://www.cac.or.kr/ )]

 


 


 일선사 대웅전 옆에 모셔진 마애칠불(磨崖七佛)

- 전면 가로등 윗편 뒤 보이는 눈썹바위 아래 ....





 

산국(山菊)

가을철 우리 산하에서 피는 소국(小菊)은 산국류가 대부분이다.

감국(甘菊)은 중국원산으로 약용이나 꽃차용으로 밭에서 재배하거나

재배지 부근에서 씨가 날려 자라는 것이 대부분으로

이러한 감국류들은 생존경쟁의 영향으로 토종 야생식물들로 식물군천이(植物群遷移)되어

외래종 야생식물이 되기 어렵다.

 

감국은 꽃잎을 씹어 보면 단맛이 나는데 비하여, 산국은 그 맛이 쓰다. 

 





 


부처님께 차를 올리는 동자들 - 천진불(天眞佛)

 

- 천진불인 동자부처 석가모니불천진부처님 을 타고 차를 올리다 .

 

일선사 대웅전 벽화 중에서 ....

 




 

 

 


일선사 요사채





 

 


일선사 약사전 약사여래불




 

 


 





 

 


 


일선사 대웅전(부분)과 약사전



 



일선사 옆 칠불마애불이 생태환경보호지로 지정으로

출입금지 되어 대성문(大城門) 문루로 헌다례(獻茶禮) 장소를 옮기다.




 

[이지형의 ‘도심에서 선(禪)하다’-20] 북한산과 대도무문

  • 이지형(종교·명리 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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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동문·대남문·대성문 등 북한산의 정상을 원으로 싸고도는  

     

    여러 문들을 놓고 얘기해도 마찬가지다.

     

    어느 문을 통과하든 무슨 차이가 있으리.

     

    혹, 문 아닌 곳으로 백운대를 향해 치고 올라갈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은 일 아니겠는가? 향하는 곳이 정말 크고 넓은 도(道)의 자리라면,

     

    정해진 문(門) 따위는 없다.

     

    대도(大道)는 언제나 그렇게 무문(無門)이니까.

     

     

    
	대도무문
 

     

    대도무문 (大道無門)


     

     

    선(禪) 불교의 대표적 공안 48개를 한 곳에 모아 놓고 ‘무문관(無門關)’이라

     

    이름 한 혜개(慧開·1183~1260) 선사는 그 공안 모음의 서문에다가

     

    대도무문의 변(辯)을 게송(揭頌)으로 읊었다.

     



    대도(大道)는 무문(無門)으로
    천 가지 다른 길이 있나니
    이 관문을 통과한다면
    우주 속에서 홀로 걸을 수 있으리.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산국(山菊)




    팔관회

     

    ★  매년 가을 추수가 끝난 후에 열렸음.

    ★  불교 의식뿐만 아니라 태조 왕건, 하늘의 신, 산,용 등에 제사를 지내는 등

         다양한 종교와 사상이 한데 어우러진 행사였음

    ★  고려 사람들은 온 세상이 태평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 춤, 노래, 놀이를 즐겼음

    ★  왕과 백성뿐만 아니라 송나라 상인, 여진, 탐라의 사신이 참석하여

         나라 사이의 교류가 이루어지기도 하였음

     

    연등회

     

    ★  매년 초에 크게 열렸음

    ★  궁궐과 전국 곳곳에 수많은 등불을 밝히고 밤새도록 행렬을 지어 돌아다니며 소원을 빌었음

     

    네이트 지식에서


     

     

     

    산국

     



    팔관회


    신라시대를 거쳐 고려 때까지 불교와 우리 민족의 고유 신도의 의식이 결부되어

    가적 행사로 성행하였던 의식.

    불가에서 말하는 팔관회 - 살생·도둑질·간음·헛된 말·음주를 금하는

     '오대계(五大戒)'에 사치하지 말고, 높은 곳에 앉지 않고,

    오후에는 금식해야 한다는 세 가지를 덧붙인 8가지의 계율을

    하루 낮 하루 밤 동안에 한하여 엄격히 지키게 하는 불교의식.

    위와 같은 팔관회가 고려에서는 태조가〈훈요십조〉에서

    '천령(天靈) 및 오악(五岳)·명산(名山)·대천(大川)·용신(龍神)을 섬기는 대회'라고

    언급함으로써 태조 때부터 토속신에 대한 제례를 행하는 날로

    그 성격이 바뀌어져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지만

    이런 재회(齋會)를 통해 호국의 뜻을 새기고 복을 비는 것.


    팔관회
    불교의 팔관재계(八關齋珷)와 관련 있음.

    팔관재계는 팔재계(八齋戒) ∙ 팔계(八戒) ∙ 팔계재(八戒齋) · 팔지재법(八支齋法)이라고도 하며,

    재가(在家)의 신도가 하룻밤 혹은 낮 동안 받아 지니는 계율.
    팔관재계의 '관(關)'은 금(禁)한다는 뜻으로 살생(殺生) ∙ 도둑질 · 음행(姪行) 등의

    여덟가지 죄를 금하고 막아서 범하지 않음이고

    '재(齋)'는 하루 오전 중에 한끼 먹고 오후에는 먹고 마시지 않으며

    마음의 부정(不淨)을 밝게 하는 의식이며,

    '계(戒)'는 몸으로 짓는 허물과 그릇됨을 금하여 방지하는 것이다.

     

     


    -943년에 발표한 태조의『훈요십조(訓要十條)』중-

     

    제6조에서
    "내가 지극히 원한 것은 연등과 팔관이었다.‧‧‧‧‧

    팔관은 천령(天靈)과 오악(五岳)·명산(名山)·대천(大川)·용신(龍神)을 섬기기 때문이다.

    뒷세상에 간특한 신하가 가감(加減)을 건백(建白)하면 일체 금지해야 한다.

     

    내가 당초부터 마음에 맹세하여 회일(會日)에는 국기(國忌)를 범하지 않고

    임금과 신하가 함께 즐겼으니 마땅히 공경하게 이대로 거행하여야 한다."

     

    자료 출처 :

    lostland.kr/shop/bbs/board.php?bo_table=talk&wr_id=12128

     

     

     


     

    대성문(大城文)



     

     

     


    연등회(蓮燈會)

     

     

    등놀이 불교 | 브리태니커

    초파일에 등을 밝혀 복을 기원하는 불교의례놀이.

    등놀이

     

     

    등놀이

    연등놀이·관등놀이라고도 한다.

    등놀이를 성대하게 시작한 것은 통일신라 때부터로

    정월 대보름에 황룡사의 백고좌대회(百高座大會)를 들 수 있다.

     

    불교가 융성했던 고려시대에 태조는 등놀이를 포함한

    팔관회와 연등회를 국가적으로 장려했다.

    연등회와 팔관회를 할 때에는 노래 부르고 춤추기 위해 야외무대를 만들고

    이 무대의 주변에 수많은 등을 달아 등산과 같이 장식했으며,

    등불을 늘여 불꽃바다를 이루게 했다.

     

    조선시대의 등놀이는 음력 4월 초파일에 했는데, 고려시대의 정월 보름과 대비된다.

    민간행사가 되었고, 조선 후기에 이르면 완전히 민간주도의 행사가 되며

    특히 저잣거리의 상인층들도 많은 자금을 내어 장삿속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19세기의 기록에는 수박등·마늘등·연꽃등·칠성등·오행등·일월등·종등·북등·

    누각동·난간등·화등·가마등·산벗나무등·병등·항아리등·방울등·알등·용등·

    봉황등·학등·잉어등·거북동·자라등과 같은 다양한 등이 화려하게 등장했다.

     

    당시의 등놀이는 대단히 호화찬란했고 명절 분위기를 한층 돋구었다.

    등놀이가 성황을 이룬 곳은 서울·개성·평양과 같은 옛 도읍으로 이름난 도시들이었으며,

    황해도 평산과 신천, 경기도 수원, 충청남도 논산 등도 등놀이로 유명한 곳들이었다.


     

     




    팔관회와 연등회


    고려 시대에는 불교와 민간 신앙이 결합하여 일반인들의 의식 속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고려 시대의 대표적인 국가 행사로 연등회와 팔관회가 있다.


    연등회는 주로 정월 대보름에 연등을 찬란하게 밝히고

    술과 음식을 먹으며 노래와 춤을 즐기는 행사로서,

    부처님과 천지신명(天地神明)을 즐겁게 함으로써 국가와 왕실의 태평을 기원하던 제전이었다.


    팔관회는 음력 10월이나 11월에 등불을 밝히고 임금과 신하가

    가무를 같이 즐기며 마음껏 먹고 마시던 행사였다.

    이 행사는 천령(天靈, 하늘님)과 용신(龍神, 산천의 신령)에게

    국가와 왕실의 태평을 기원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주술을 섬기고 주술로써 효험을 보려 하는

    무격(巫覡) 신앙의 모습이 보이기도 하였다.


    국가 행사였던 연등회와 팔관회에서 하늘님과 각종 천지신명에게

    국가의 태평과 백성의 안녕을 기원했던 것과,

    사람들이 주문과 방술로써 병을 이겨내려 했다는 것을

    <고려도경>이라는 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고려 시대에는 유교가 정치 이념으로 수용되었다.

    11세기 이후에는 귀족의 자제들은 자연스럽게 유교 사상을 접할 수 있었으며,

    점차 일상생활에서도 충, 효 등의 유교 사상이 기본적인 원리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불교, 도교, 풍수지리설, 무격신앙 등이

    왕실 및 민중들의 생활과 의식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므로,

     유교에 입각한 종교적 의식이 고려 사회에 정착하기는 어려운 실정이었다.


    장례와 제례에 관한 의례를 유교적 규범에 따라 시행하고자 하였지만,

    일반 민간에서는 대개 토착 신앙과 융합된 불교의 전통 의식과 도교 신앙의 풍속을 따랐다.

    즉, 고려 사회에서는 유교적 의식이 일부 지식인이나 지배층 내에서만 적용되었고

    민간에서는 토착 신앙과 유교, 불교, 도교 등이 더 우세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고려의 유학자들은 유교를 치국(治國)의 도(道)로 인식하고,

    불교를 수신(修身)의 도(道)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자료 출처 :
    www.ajummaschool.com/Kimsboard/Kimsboard.php3?action=re&...


     

     


    삼각산 보현봉 헌다례(獻茶禮)를 위하여 만든 백자향로

     

    - 경기도 명장 신현철 作

     

    삼각산 봉우리를 연꽃형으로 형상화하여 만듬.

     

     





     



    옻칠한 나무다관과 차 시음, 다식 시식






     



    대성문 문루에 제단이 마련되고 ....





     



     고종의 어의(御醫)로 한일합방 후 출가하신 수덕사에서 몇해 전 열반하신

    가덕수 스님의 의맥(醫脈)을 이은 성종(性宗) 스님께서 손수 만드신

    뿔향(각향 角香)인 취파향(翠播香)에 불을 붙혀 헌다례 자리를 맑게 정화한다.

     

    *** 이 향을 만드신 성종스님은 취파향 翠波香이라 이름하셨다고 하나

    내달 초에 만나면 翠播香으로 이름을 바꾸는 것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릴 계획임.(播 : 씨 뿌릴 파)

     

    성종스님은 대구시내에서 비슬향운(琵瑟香雲)이라는

    비슬향문화연구소를 운영하시고 향례의 전파를 위하여 노고를 아끼지 않으신다.

    조선조 선조 이래 이어져 내려온 어의(御醫)의 전통 의맥에서 뿌리한

    각종 명상향을 직접 만들고 계시며, 

    현재 대구 화원 근처에 있는 성도암에 주석하고 계신다.

     

     

     <張衡> 

    파여향이막청 <장형>

     

    퍼져가는 향을 들을 수는 없는가??

     

    -후한의 과학자인 장형(張衡)의  <思玄賦> 개시설(開始說)이라는 시(詩)에 나오는 싯귀.

     

     


     


     

     

     

     

    <思玄賦> 개시설(開始說) 전문(全文)

     

     

    先哲之玄训兮,虽弥高其弗违。匪仁里其焉宅兮,匪义迹其焉追?服膺以永靓兮,绵日月而不衰。

    伊中情之信修兮,慕古人之贞节。竦余身而顺止兮,遵绳墨而不跌。志团团以应悬兮,诚心固其如结。

    旌性行以制佩兮,佩夜光与琼枝。镌幽兰之秋华兮,又缀之以江蓠。美襞积以酷烈兮,允尘邈而难亏。

    既姱丽而鲜双兮,非是时之攸珍。奋余荣而莫见兮,播余香而莫闻。幽独守此仄陋兮,敢怠遑而舍勤。

    幸二八之遻虞兮,嘉传说之生殷:尚前良之遗风兮,恫后辰而无及。何孤行之茕茕兮,孑不群而介立?

    感鸾鹥之特栖兮,悲淑人之稀合。
     

     

     

     

     

    장형 [Chang Heng, 張衡]

    중국 후한 [後漢] 과학자 | 브리태니커

     

    장형 요약정보

    세부정보 확인
    태어난 때 72
    죽은 때 139
    소속 국가 중국
    소속 국가 부속정보 후한(後漢)
    직업 과학자
    (병) Zhang Heng (웨) Chang Heng. 72~ 139.

     

    중국 후한(後漢)의 과학자·문학자.

        자는 평자(平子). 허난 성[河南省] 난양[南陽] 사람이다. 학문이 넓고 다재다능했으며 낭중(郎中)·상서시랑(尙書侍郞) 등을 역임했다. 태사령(太史令)을 14년 동안 2번에 걸쳐 지냈다. 이후 시중(侍中)·하간상(河間相)을 지냈으며, 안제(安帝)·순제(順帝)천문대장(天文臺長)을 역임했다. 천문학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그는 중국 고대의 우주구조에 관한 이론인 혼천설(渾天說)의 대표적 이론가이기도 했다. 그는 우주가 공간·시간의 제한이 없다고 생각했다. 당시 유행하던 속유(俗儒)들의 도참(圖讖) 신앙이 허위임을 강조하고 이를 금지·폐지하자는 상서를 올리기도 했다. 그는 미신의 불합리성에 분노를 느낀 합리주의자였다.

     

        또한 전한(前漢) 때 양웅(揚雄)의 우주론 〈태현경 太玄經〉을 탐독했으나 자신의 우주론인 '영헌'(靈憲)을 형성하는 데에는 양웅의 사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았다. 양웅의 천인(天人) 통일관은 관념적·형이상학적 사고였던 것에 반해 그는 그것을 부정했다. 음양가였던 그는 선인들의 우주기원과 변화에 관한 사상을 계승하여 천지만물의 발생과 발전과정을 설명했다.

     

        월식이 일어나는 원인을 정확하게 해석했는데, 지구의 그림자가 달을 가릴 때 생기는 현상이 월식이라고 주장했다. "하늘에서 가까우면 느리고 하늘에서 멀면 빠르다"(近天則遲 遠天則速)는 이론을 이용하여 5성(五星 : 수성·금성·화성·목성·토성) 운행의 완급현상을 해석했는데, 이것은 오성운동의 완급현상을 태양과의 거리의 원근관계로 파악한 초기 이론이다. 또한 중국의 중원(中原) 지역에서 볼 수 있는 항성의 수가 약 2,500개라고 밝혔으며, 해와 달의 시직경(視直徑 : 관측자가 본 천체 직경의 시각)이 약 49′이라는 측정치 내놓았다. 그의 계산과 통계는 오늘날의 수치와 매우 비슷하다. 그는 톱니바퀴를 물시계와 연결하여 수운혼천의(水運渾天儀)를 발명했는데, 이것은 물시계의 낙수력을 원동력으로 삼아 지구의를 매일 균일하게 1번 회전시켜 천체현상의 움직임을 보여주도록 한 것이었다.

        132년 세계 최초의 지진계(地震計)인 후풍지동의(候風地動儀)를 발명했고, 이외에도 지남차(指南車)·기리고거(記里鼓車) 등을 고안해냈다. 저술로는 수학에 관한 명저 〈산망론 算罔論〉이 있으며, 원주율 л〓730/232≒3.1465……, л 〓10≒3.1622……라는 2가지 수치를 계산해냈다. 그가 만든 〈지형도 地形圖〉는 당대(唐代)까지 계속 전해졌다.

     

        그밖에 문학작품으로는 이경부 二京賦〉·〈사수시 四愁詩〉 등이 유명하다.

    그는 또한 당시 6대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조락형 선생님의 사진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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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용가 타이거백의 향무(香舞) 헌무(獻舞)




     


     

    풀피리인 초적(草笛) 무형 문화재 김기종 선생님의 풀피리 헌율려(獻律呂)




     


    풀피리 반주에 맞추어 하늘에 올리는 향무(香舞)





     







     

    김영숙 원장님의 헌향(獻香) 준비







     





     



    백문 김기종 선생님의 도자기제 옥적(玉笛) 헌률(獻律 , 헌악 獻樂)





     








     









     







     









     








     





     










     








     






     

     

     


    원통기둥형 덩이향인 작은 단향(團香)에 불을 붙이고 ....






     








     









     





     

    이은상 선생님 산행 사진

     - 환갑이 훨씬 지나신 67세 때 찍은 사진

     

    ↑ 1969년 2월 설악산 10동지 눈사태 조난 당시 한국산악회 회장으로

    눈 쌓인 설악산을 오르던 노산 이은상(1903년 ~ 1982년).

     ‘해오라기 나는 산’이라는 그의 호처럼

    노산은 평생을 고고한 시조시인으로, 산악인으로 사셨다.



     




     

     

     

    중국역대인명사전

    장형

    [ ]

    출생 - 사망 78 ~ 139

    후한 남양() 서악(西, 하남성 ) 사람. 자는 평자()다. 젊어서부터 글을 잘 지었다.

    영원() 연간에 효렴()으로 천거되어 태학()에 들어가 오경()과 육예()를 배웠다.

    천문()과 음양(), 역산()을 정밀히 연구했다. 안제() 때 불려 낭중()이 되고,

    태사령()으로 옮겼다. 순제() 초에 다시 태사령이 되었다. 나중에 시중()으로 옮겼다.

    영화() 초에 하간상()으로 나가 법령을 제정하는 등 치적을 올렸다.

    또 호족들의 발호를 견제하는 데 공을 세웠다. 상서()로 불린 뒤 죽었다.

    수력()으로 움직이는 혼천의()와 지진()을 측정하는 후풍지동의()를 최초로 발명했다.

    경학 관련 저서에 『주관훈고()』가 있었지만 전하지 않는다.

    천문에 관한 저서로 『영헌()』과 『산망론()』, 『혼천의()』 등이 있다.

    화제() 영원() 연간에 「동경부()」와 「서경부(西)」 등을 지었고,

    나중에 「응간부()」와 「사현부()」 등도 지었다. 저서에 『장하간집()』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장형 [張衡] (중국역대인명사전, 2010.1.20, 이회문화사)

     

     

     

     

     

     

    张衡也是一位文学家吗?

     

     

    2006-06-25 18:00 渔郎问津 | 分类:文学 | 浏览2318次
    2006-06-25 18:01 提问者采纳
    张衡早年的文学兴趣 

    张衡是公元一、二世纪间我国著名的文学家,也是卓越的数学家天文学家地理学家

    张衡(78—139),字平子,南阳西鄂(河南南阳县南)人。他年轻时,家境并不很好。但也受到教育,早年即善于为文。

     

    十六七岁,他便离家拜师访友。从他家西北行,过武关,经蓝田、南山,到达长安。他游览了三辅,京兆、
    右扶风、 左冯翊

     

    此后,东去
    新丰,参观骊山沮泉,作了一篇《温泉赋》。这是他的少作之一。

    新丰再向东,过函谷关,张衡就到了京师洛阳。这时候的洛阳,早一辈的思想家、文学家和学者已经不多见了。

     

    王充已年过七十,未知是否还在人世。大将军窦宪幕府里几位著名的文人,随着窦宪的垮台,也都去世了。班固

     

    崔骃都于和帝永元四年(公元92年)逝世。傅毅还死在他们的前头。贾逵还健在。和帝永元六年(公元94年),

     

    崔的儿子
    崔瑗到京师来了,他慕贾逵之名,就跟贾逵学会了天文、历数、京房《易传》、六日七分等学问,

     

    太学里诸儒生所钦佩。张衡大概在这时候认识了崔瑗,并成为最要好的朋友。

    张衡兴趣广泛,自学了《五经》,贯通了六艺的道理,而且还好研究算学、天文、地理和机械制造等。

    但在青年时期,他的志趣大半还在文学——诗歌、辞赋、散文。扶风班氏是著名的书香世家班固当时的新著 《汉书》

     

    虽很难读、难得,他可能部分看过;大赋《
    两都赋》,他也可能找到了。在洛阳,张衡的名气渐渐地有了,

     

    朋友也多起来了,他结交了
    马融、王符、窦章等。有人荐举张衡为孝廉,他漠然无动于衷。有些公府请他为属官,

     

    他也无意去作。张衡虽非高傲,但不愿与“俗人”交游。因此,他在洛阳几年,所专注的仍是他自己所喜爱的
    文学创作

     

     

    他有一篇
    定情赋》,可惜只存这样四句:

    夫何妖女之淑丽,光华艳而秀客。断当时而呈美,冠朋匹而无双。


    这是对美人的赞叹和思慕。他还写了一篇《七辩》。凡“七”之类,也是一种赋的形式,始创于前汉初期淮阴枚乘《七发》,

     

     

    以七事启发“太子而得到使听者悔悟

    的目的。到了张衡时代,这种赋体仍有人模拟试作。张衡的《七辩》,

     

    借无为先生与虚然子等的谈话而表达自己的志趣所在。虚然子言“宫室之丽”,調

    华子

    言“滋味之丽”,安存子言“音乐之丽”,

     

    阚丘子言“

    女色之丽”,空桐子

    言“舆服之丽”,依卫子言“神仙之丽”。

     

     

    无为先生对

    前五子之说都默然无对;对依卫子之说虽有所言,实际也不以为然

    ,末以“将飞未举”一语婉然谢绝了。

     

    最后,髣无子曰:


     

    在我圣皇,躬劳至思,参天两地,匪怠厥司。率由旧章,遵彼前谋,正邪理谬,靡有所疑。旁窥八索,仰镜三坟,

     

    讲礼习乐,仪则彬彬。是以英人底材,不赏而劝,

    学而不厌,教而不倦。于是二人之俦,列乎帝庭,揆事施教,地平天成

     

     

    然后建

    明堂而班辟雍,和邦国而悦远人,化明如日,下应如神,汉虽旧邦,其政惟新。

    髣无子这一段话,真正打动了无为先生的心,“而先生乃翻然回面曰,‘君子一言,于是观智,先民有言,

     

     

    谈何容易!予虽蒙蔽,不敏指趣,敬授教命,敢不是务。’”这是一篇赋体的寓言。张衡借髣无子的口,

     

    倾吐了自己的理想,“汉虽旧邦,其政惟新”,他把现实想象得这样完美,中兴的汉室,将达到圣人之治的神化境界。

     

    但现实距此境界又如此遥远,他也不敢期其必然,所以他在兴奋之余,还只能表示“敬授教命”,努力以赴,将来究将如何,

     

    不敢多言了。

     

     

     



    南阳时期二京赋南都赋的创作

    京都洛阳是不能久居的。张衡回到了家乡南阳。在这里,他做了南阳太守鲍德的主簿。鲍德是西汉末年鲍永

    的孙子。

     

    永初从

    更始,后归刘秀。有子名显,昱子德。在《后汉书·鲍昱传》末有一段关于鲍德的记载:

    子德,修志节,有名称,累官为南阳太守。时岁多灾荒,唯南阳丰穰,吏人爱悦,号为神父

    。时郡学久废,德乃修起横舍,

     

    俎豆黻冕,行礼奏乐。又尊飨国老,宴会诸儒,百姓观者,莫不劝服。在职九年,微拜大司农,卒于官。

     

     

     



    鲍德是哪年为南阳太守的,这里没有说。张衡为南阳太守主簿,有他的《绶笥铭·序言》为证。但从哪年开始的 也没有讲清楚。

    据近人孙文青《张衡年谱》,张衡从二十三岁(永元十二年,公元160年)开始为南阳太守主簿,大致是可信的。

    张衡和太守鲍德相处很好,他为太守做文书工作。除本职工作之外,时间还是不少的,他有可能继续进行文学创作

    他写了一篇与定情赋有关的同声歌》:

    邂逅承际会,得充君后房。情好新交接,恐栗若探汤。不才勉自谒,贱妾职所当。绸缪中馈,奉礼助烝尝。思为苑蒻席,

    在下蔽匡床。愿为罗衾帱,在上卫风霜。洒扫清枕席,鞮芳以狄香。童户结金局,高下华灯光。衣解巾粉御,列图陈枕张。

    素女为我师,仪态盈万方。众夫所希见,天老教轩皇。乐莫斯夜乐,没齿焉可忘。

    这写新婚夫妇的喜悦,以新妇的口吻,自述妇道,供妇职,求得白首不忘的幸福。这是一首合乐可歌的文人乐府。

    这种五言诗体,在张衡时,还在创造的途中。它说的是直接的抒情叙事呢,还是借新婚夫妇的相得心情而有所比喻呢?

    这是不易肯定的。但如果以之比喻和鲍德的官属友谊关系,似乎也是说得通的。

    在南阳的官邸里,张衡完成了蓄志已久、酝酿约有十年的《二京赋》。这两篇与著名文章家班固的《两都赋》相仿。

    它们的形式相似,寓意也无异,都是说一个故事,以铺陈西都的奢侈为鉴戒,而盛赞东都的节俭以进行讽谕,

    统治者都是有益的。但班张的时代已不同,张衡所处的后汉社会危机已逐渐地加剧了,所以他在《东京赋

    里所表示的讽喻比班固讲的深刻多了。这不是“劝百而讽一”的小讽,而是站在皇朝危亡的高度,大声疾呼了。

    今公子苟好剿民以偷乐,忘民怨之为仇也;好殚物以穷宠,忽下叛而生忧也。夫水所以载舟,亦所以覆舟。

    坚冰作于履霜,寻木起于蘖栽。昧旦丕显,后世犹怠。况初制于甚泰,服者焉能改裁?故相如壮上林之观,扬雄骋羽猎之辞,

    虽系以聩墙填堑,乱以收置解罘,卒无补于风规,祗以昭其愆尤。臣济奓以陵君,忘经国之长基。故函谷击柝于东,

    西朝颠覆而莫持。凡人心是所学,体安所习,鲍肆不知其臰,翫其所以先入;咸池不齐度于咬,而众听或疑:能不惑者,

    其唯子野乎!……

    这一段的讽谏之辞,决不是纵横家那样的危言耸听,而是从人民能否承受的观点以阐明统治者不知不觉的奢侈所带来的严重的

    以致于亡国的后果。它的高度的思想性决不是班固所能想象的。

    张衡在南阳除完成了《二京赋》,还写了一篇《南都赋》,这当是对光武皇帝的歌颂,

    也是对自己家乡一隅之地快意的描绘和赞美。就大赋说,这是一种前所未有的创作。但其结构则比较简单,弘富亦逊于前者。

    鲍德为南阳太守,在职九年。调为大司农,病卒。张衡在鲍德调离南阳后,没有跟着他走。

    这时朝廷上是邓太后临朝,邓氏兄弟秉权,做出招举士人的模样,张衡不为所动。但张衡还是有书信和邓骘保持联系。

    两任太史令。《思玄赋》、《四愁诗》和《归田赋

    安帝早知张衡“善术学”,于永初五年(公元111年)以公车特请他到京都来,给以亲近的郎中职位。

    这时(前一年)朝廷刚成立一个校订典籍的组织,“诏谒者刘珍及《五经》博士,校定东观《五经》、诸子、传记、

    百家艺术,整齐脱误,是正文字”。东观在洛阳南宫,是皇家的藏书处。当时有名的学者如马融、窦章等都在这里,

    校书郎。张衡没有在东观校书,他由郎中迁为尚书郎,再迁为尚书侍郎。元初二年(公元115年)又迁为太史令

    这年他三十八岁。这个职官主管天文、历法等等,对他是合适的,他在这方面早有修养,

    新任职守又给他创造了进一步钻研的条件。这样,从理论到实践,他就不断地有所贡献了。张衡第一次为太史令共六年。

    经过公车司马令五年的转折,从顺帝永建元年(公元126年)再为太史令,又七年。前后十三年的专业职守

    使他的科学事业日益巨大而显著。顺帝阳嘉元年(公元132年)即复为太史令的最后一年,他发明了“候风地动仪”,

    地震仪。这是世界上地震仪鼻祖。此事载之《后汉书·安帝纪》,可见当时受到的重视。

    作为科学家文学家的张衡,并不是不关心政治的。顺帝时,尚书令黄琼上疏言事,颇致力于腐朽内政的改革。

    张衡在这种朝气复萌的形势下,亦自陈其思想政治上的主张。自光武帝以来,图谶成为统治者欺骗人民的工具。

    张衡愤其虚妄,首先上疏论其言而无征,实为少数妄人欺世愚民捏造出来的把戏。他以秦至西汉末的历史事实,

    证明本无图谶,则知图谶成于哀平之际。后来有些人所言某些灾异,亦无事实效验。因此他主张“宜收藏图谶,一禁绝之,

    朱紫无所眩,典籍无瑕玷矣”。这些议论在当时是很大胆的,没有多少人敢说,而且儒者们一直在“争学图谶”。

    这时朝政大权已由外戚转移于宦官集团。张衡复上疏言事。但张衡作为太史令,不在公卿之位,他的几篇奏章,

    虽都言之成理,一律是无效的。这样,他对政事就愈来愈没有兴趣了。

    顺帝即位后,张衡再转为太史令。这职务在他为专业对口,但也说明了他长久官升不上去,总不能没有一点感慨。

    于是他仍用与客谈话的形式,作《应间》赋,表达了他的仕途不得意的情绪。

    阳嘉元年,张衡发明地震仪。次年,迁为侍中。他接近了皇帝,进言的机会多了。

    宦官们则怕张衡告他们的状,揭发他们的丑恶,常以凶恶的目光威胁他。

    因此当顺帝问他事时,张衡就情不自禁地简单说了儿句不明不白的事。

    宦官们始终不放心张衡在顺帝身边,共同诬陷,一意要驱逐他离去。

    本来张衡就受老庄思想影响,以为人的吉凶祸福幽微深藏于无形之中,说不定哪一天要得祸,因此又作了一篇

    思玄赋》,开始说:

    先哲之玄训兮,虽弥高其弗违。匪仁里其焉宅兮,匪义迹其焉追?潜服膺以永靓兮,绵日月而不衰。

    伊中情之信修兮,慕古人之贞节。竦余身而顺止兮,遵绳墨而不跌。志团团以应悬兮,诚心固其如结。

    旌性行以制佩兮,佩夜光与琼枝。镌幽兰之秋华兮,又缀之以江蓠。美襞积以酷烈兮,允尘邈而难亏。

    既姱丽而鲜双兮,非是时之攸珍。奋余荣而莫见兮,播余香而莫闻。幽独守此仄陋兮,敢怠遑而舍勤。

    幸二八之遻虞兮,嘉传说之生殷:尚前良之遗风兮,恫后辰而无及。何孤行之茕茕兮,孑不群而介立?

    感鸾鹥之特栖兮,悲淑人之稀合。

    这是一首骚体赋,学屈原离骚》,坚持自己的理想而不可得,则云游上下四方,以至于天上。

    开阳而?吟兮,临旧乡之暗蔼。悲离居之劳心兮,情悁悁而思归。魂眷眷而屡顾兮,马倚辀而徘徊。

    虽邀游以偷乐兮,岂愁慕之可怀。出阊阖兮降天涂,乘飚忽兮驰虚无。云霏霏兮绕余轮,风眇眇兮震余旗。

    缤联翩兮纷暗暧,倏眩眩兮反常闾。从天上又回人间。

    畴昔逸豫兮,卷淫放之遐心。修初服之娑娑兮,长余佩之参参。文章焕以粲烂兮,美纷纭以从风。

    六艺之珍驾兮,游道德之平林。结典籍而为罟兮,欧儒、墨而为禽。玩阴阳之变化兮,咏雅、颂之徽音。

    嘉曾氏之《归耕》兮,幕历陵之钦崟。共夙昔而不贰兮,固终始之所服。夕惕若厉以省得兮,惧余身之未也。

    苟中情之端直兮,莫吾知而不恧。默无为以凝志兮,与仁义乎消遥。不出户而知天下兮,何必历远以劬劳

    驱除幻想,一切还是照常,不求人知,自我努力而已。不出户可以知天下,何必远游自求劳苦。

    这是儒道思想的诗化,从苦闷中解脱出来,自得其乐。张衡另有《髑髅赋》,则是道家思想的游戏之作。

    在为侍中的时候,张衡曾“上疏请得专事东观,收检遗文,毕力补缀。又条上司马迁、班固所叙与典籍不合者十余事。

    又以为王莽本传但应载篡事而已,至于编年月,纪灾祥,宜为元后本纪。又更始居位,人无异望,光武初为其将,

    然后即真,宜以更始之号建于光武之初。”他几次上书,俱被排斥,不为顺帝所接受,他觉得事已一无可为了。

    于是张衡于顺帝永和元年《公元136年)被调为河间(河北献县)相。在这里,他努力作一些切实的事,如打击豪强,

    整齐法度,使地方安定,上下肃然,政事耳目一新,一切有条规地得到治理。但张衡心中始终去不掉愁思,安静不下来

    不得不寄情于诗,而有《四愁诗》之作。

    一思曰:我所思兮在太山,欲往从之梁父艰,侧身东望涕霑翰。美人赠我金错刀,何以报之英琼瑶。路远莫致倚逍遥,

    何为怀忧心烦劳。

    二思曰:我所思兮在桂林,欲往从之湘水深,侧身南望涕霑襟。美人赠我金琅?,何以报之双玉盘。路远莫致依惆怅,

    何为烦忧心烦伤。

    三思曰:我所思兮在汉阳,欲往从之陇阪长,侧身西望涕霑裳。美人赠我貂襜褕,何以报之明月珠。路远莫致倚踟蹰

    何为怀忧心烦纡。

    四思曰:我所思兮在雁门,欲往从之雪芬芬,侧身北望涕霑巾。美人赠我锦绣段,何以报之青玉案。路远莫致倚增叹,

    何为怀忧心烦惋。

    这是从骚体赋变化来的诗篇,而有歌谣色彩。全诗四章,章七句。所思东南西北四地为理想所在,美人则是理想的化身。

    最高理想在太山、桂林二地,它们是古代圣王封禅、巡狩的地方,属于立德事业;其次是雁门、汉阳二地,它们是西北边疆要地,

    属于立功事业。由此可见他的理想与现实处境的矛盾是很大的,所有理想都为现实困难所阻挠而莫能如愿,

    与美人赠答之事都是幻梦,只有愁思怅望,涕泪霑襟。张衡为人正直,傅学多能,而始终为下级官吏。他虽有许多贡献,

    但不能行其志,愁苦不得解决,遂有“怀土”之思,作归居田园以善终其身的打算,因作《归田赋》以见志:

    游都邑以永久,无明略以佐时。徒临川以羡鱼,俟河清乎未期。感蔡子之慷慨,从唐生以决疑。谅天道之微昧,追渔父以同嬉。

    超埃尘以遐逝,与世事乎长辞。于是仲春令月,时和气清,原?郁茂,百草滋荣。王雎鼓翼,仓庚哀鸣,交颈颉颃关关嘤嘤

    于焉逍遥,聊以娱情。尔乃龙吟方泽,虎啸山丘,仰飞纤缴,俯钓长流,触矢而毙,贪饵吞钩。落云间之逸禽,悬渊沈之魦鰡。

    于时曜灵俄景,系以望舒,极般游之至乐,虽日夕而忘劬。感老氏之遗诫,将回驾乎蓬庐。弹五弦之妙指,咏周孔之图书。

    翰墨以奋藻,陈三皇之轨模。苟纵心于物外,安知荣辱之所如!

    老庄思想和儒家经典精神支柱,以田园游乐为生活旨趣,这样张衡便抛弃了人世间的荣辱,而放荡于复杂矛盾的世界之外。

    然而这只能是最后的一个幻想。在河间三年,张衡上书求退,顺帝徵为尚书。他没有归田。永和四年(公元139年)卒,年六十四。

    张衡是中国历史上一个伟大的科学家和文学家。他的文学创作反映了他在仕途生活中遭受的曲折和坎坷,他在辞赋

    诗歌和散文等方面都有优秀的业绩,表现了独创性。辞赋是汉代文学的主要形式之一,张衡所作各体,大赋、骚体赋

    咏物小赋、抒情小赋,表现了不同程度的继承和发展,后者则是他的创新和开拓,对后世有影响。诗作不多,

    五言诗的成长有贡献。散文则以上书言事的政论为主,而上书驳斥图谶的虚妄,则比“疾虚妄”的王充还彻底些。

     

    参考资料: http://www.lishi99.com/lscd/lhst/2006-02-11/162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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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东汉】张衡


      作者:刘周堂 来源:原创 阅读: 2572 更新:2005年04月24日      字号:

       

      “愿为罗衾帱,在上卫风霜”

      张衡,字平子,南阳郡西鄂县(今河南南阳市北)人。生于东汉章帝建初三年(78)。

      家为著姓,祖父张堪官至渔阳郡(治所在今北京市密云县西南)太守,为官清廉爱民,老百姓赞之为“张君为政,

      乐不可支”。张堪的思想品德对张衡影响很大。
      张衡“天资睿哲”,聪慧过人。少年时曾以善作文章闻名。十七岁时游学三辅,随后又东入京城洛阳,就教于太学,

      拜经学大师贾逵为师,“遂通五经,贯六艺”,(《后汉书·张衡传》)儒家经世济时的思想成了他立身处世的指导思想。

      但这时政归外戚,权任宦官,朝廷开始腐败。张衡认为虽在朝为官也难以实现匡济之志,因此郡国推选他为孝廉,

      公府也几次征召他出来做官,他都加以拒绝。正好这时鲍德出任南阳太守,鲍德“修志节,有名称”(《后汉书·鲍永传》)

      “导以仁惠,教以义方”(张衡《大司农鲍德诔》)又颇重儒术,这正是张衡所向往的人。所以当鲍德邀他出任主簿时,

      张衡满口应承。这从作于此时的同声歌》中可以看出他那兴奋的心情。诗以新婚女子矢志与丈夫同床共枕、

      勉供妇职来表现他辅弼鲍德、尽忠尽职的决心:


      绸缪主中馈,奉礼助蒸尝。思为莞蒻席,在下比匡床。愿为罗衾帱,在上卫风霜。

      洒扫清枕席,鞮芬以狄香。……乐莫斯夜乐,没齿焉可忘。


      遇知音、从明臣的喜悦之情洞然可观。由于二人志趣相投,合作多欢,所以张衡一任九年,直到鲍德被诏拜为大司农才离开。这几年中,他帮助鲍德在南阳修建学校,敬老会儒,以至“济济京河,实为西鲁”(《大司农鲍德诔》)。
      位居幕僚的张衡,虽身在南阳,却心忧天下,对朝廷上下的奢华无度,痛恨不已。然而位卑言轻,既无由在朝廷上慷慨陈词,也不能凭一己之力扭转世风,于是他决心效法前辈赋家用写作大赋的形式来阐发自己的政治见解,以便闻于主上,

      借助皇上的威力来整饬这种败亡之风。大概就在出任主簿之时,他模仿班固的《两都赋》作《二京赋》。

      但他既对班固的《两都赋》“薄而陋之”,也不满意司马相如、扬雄创作的大赋:“故相如壮上林之观,扬雄骋羽猎之辞,

      虽系以隤墙填堑,乱以收置解罘,卒无补于风规,只以昭其愆尤。”(《二京赋》)认为这种曲终奏雅的安排不仅无益,

      反而有害。不能达到振醒君主、除弊救世的目的。他的《二京赋》虽然描写对象与前辈诸家无异,讽谏的力量却大为增强。

      它既有假托历史、故事的暗讽,更有切直无掩的议论:“今公子苟好剿民以娱乐,忘民怨之为仇也。好殚物以穷宠,

      忽下叛而生忧也。”表现出张衡对国家前途的深沉忧患和希望改变江河日下局势的强烈愿望,

      其对现实人生的认真态度和补天救世的良心责任都足令后人折腰膜拜。因此费时十年的《二京赋》不仅以描写对象最众、

      篇幅最长,饮誉“长篇之极轨”,更以其空前绝后的讽谏力高出于他赋之上,

      从而使得三十刚出头的张衡一举成为汉赋四大家之一。当然奠定张衡在文学史上地位的还有那开抒情小赋先河的《归田赋》

      “寄兴高远、遣词自妙”的五言《同声歌》,以及被誉为七言诗之祖的《思玄赋》后的系辞。

      “庶前训之可钻,聊朝隐乎柱史”

      张衡卸任主簿后,回到家乡。这期间大将军邓隲“奇其才”,多次辟他为幕僚,但张衡始终不就。个中原委,不甚清楚。

      但根据张衡一生的出处进退来看,有一点可以肯定:决不是张衡不想做官。这时安帝尚幼,邓隲以大将军兼舅舅的身份辅政,

      大权自然都在邓隲手上。而东汉后期无论是外戚辅政,还是宦官专权,朝政都是十分黑暗的。

      人们对这种架空皇权的现象十分不满,张衡在《陈事疏》中就曾劝顺帝要掌握“刑德八柄”,做到“威自上出”。

      这可能就是张衡不肯应邓隲之辟的原因。


          安帝永初五年(111)诏拜张衡为郎中,三年之后迁为尚书侍郎,一年后再迁为太史令。太史令的职责是掌管天时星

      历,遇上朝廷有丧娶祭祀之事,掌奏吉日及时节禁忌,负责记录灾异符瑞等事。张衡本“善机巧,尤致思于天文、阴阳、

      历算”,对于扬雄《太玄经》所宣扬的盈虚消长、瑞应符现也很感兴趣。现在安帝任以太史令之职,张衡自然高兴,

      “遂乃研核阴阳,妙尽璇机之正”,除了处理太史令的日常工作外,以极大的热情和全部精力投入了器具制作和

      天文学著作的写作上。这几年他先后制造了自动车、指南车、自飞木雕、土圭。特别是他制造成功了世界上最早的用

      水力转动的浑天仪,使人们通过它可以观察到某时某刻的实际天象;第一次正确解释了月食形成的原因,

      认为月食是由于月球进入地影而未能受到日光反照形成的。他在《灵宪》这本著名的天文学著作中不仅提出

      “宇之表无极,宙之表无端无穷”的看法,而且还认识到了行星运行的快慢与距离地球的远近有关。此外还写下了

      《算罔论》,并作了《地形图》、《浑仪图注》、《漏水转浑仪图注》、《灵宪图》,

      从而奠定了张衡在世界科学史上的地位。


      安帝建光元年(121)张衡转为公车司马令,这是卫尉的属官,实际地位比太史令高。但五年之后,

      即顺帝永建元年(126)又转为太史令。这当然是官运不亨。不管原因如何,这是一种不正常的现象,

      所以当时人都认为这“非进取之势也”,是失志的表现。张衡模仿东方朔《答客难》作《应间》表示自己对此事的看法,

      他在文中反复申述了两点:一是“天爵高悬,得之在命”,“求之无益,故智者偭而不思”,认为应该持“得之不休,

      不获不吝,不见是而不惛,居下位而不忧”的达观态度,使自己不至于被现实的重压所击倒。二是在仕途不畅、

      命运不达的情况下也不能自暴自失而自沉,而要“奉顺敦笃,守以忠信”。最后决定:“庶前训之可钻,聊朝隐乎柱史”。

      “朝隐”是张衡在怀才不遇时所提出的一种新的处世策略,它进可以以此为阶升官加爵实现兼济天下之志,

      退可以修身养性而独善其身,中可以借职务之便继续实现人生的价值,这是在新的形势下揉合儒、道两家人生哲学的产物,

      它较之退隐自然要优越得多。张衡正是将势就势,利用太史令之职继续进行他的天文学研究,

      终于制成世界上第一台候风地动仪,“验之以事,合契若神”。“自此以后,乃令史官记地动所从方起”,

      从而开创了我国地震学说的研究。这是继浑天仪之后的又一个伟大成果。
      ^^“共夙昔而不贰兮,固终始之所服也”
      张衡“聊朝隐乎柱史”的真正目的还在于“且韫椟以待价”(《应间》)所以他在履职太史、潜心候风地动仪之时,

      仍不忘政治上的进取。这期间他曾多次上书,就在作《应间》的同时,即上《顺帝封事》,永建五年(130)

      上《陈事疏》,阳嘉元年(132)上《论贡举疏》、《请禁绝图谶疏》,二年,上《京师地震对策》、《论举考廉疏》。

      这些策、疏大都言辞犀利,用语直率,有时甚至直接批评皇帝。大概是张衡这些切直无掩的的策、

      疏终于使顺帝发现了这个多年滞留史官的张衡颇具政治才能,于是将他提升为侍中,其职能是“掌侍左右,赞导众事,

      顾问应对”,即做皇帝的高级顾问。有一次顺帝问他,当今天下人最痛恨的是谁?宦官们怕张衡说出自己,

      都用眼睛瞪着他,张衡只好“诡对而出”。但宦官“恐终其为患,遂共谗之”(《后汉书·张衡传》)。

      这个事情对张衡震动很大,也使他左右为难:任凭宦竖为非作歹而缄默不语,与自己志意相左;我行我愫,

      又难免有危险加身。在这人生的十字路口,他需要求得心理平衡,找到继续实现人生价值的途径。

      《思玄赋》就是他内心从矛盾——平衡——选择——再到新的平衡的真实展现。他在赋中既抨击了“珍萧艾于重笥兮,

      谓惠芷之不香”的反常世道,也抒发了“奋余荣而莫见兮,播余音而莫闻”的深沉浩叹,

      同时也表现了“恫后辰而无及”这生不逢时的苦闷,而且还露出了“畏立辟以危身”的危惧心理。

       

      他希冀进取,现实不允许;消极自沉,有悖于心志。痛苦之极,他曾想学仙远遁,然而强烈的入世精神又把他拉回现实。

      他也曾一度求之于命运,但命运只能帮人解脱,却不能助人重振自我。然而自我实现理想的执着追求终

      于使他对传统命运观进行了积极的改造,从中找到了新的精神支柱,获得了巨大的精神力量。

      他认为命运虽然难知,但命运却统属于天,恶有恶报,善有善报,只要自己处义行仁,必不会有灾祸加身。

      消极的宿命论在张衡那里变成了积极的有命论,“苟中情之端直兮,莫吾知而不恧。”他实现了新的心理平衡,

      决心“共夙昔而不贰兮,固终始之所服也”,一以循道为务,决不向现实妥协,这成为他晚年立身处世的指导思想。


          永和元年(136)张衡出任河间相。这时的河间王是章帝的孙子刘政,骄奢无束,不遵典宪。且其地又多豪强,

      共为不轨,是个很难治理的地方。张衡所以被委任此相,可能是朝中权贵怕他留朝于己不利而企图借此置张衡于死地。

      但是张衡已经在心理上体认到惩办豪强,上符天理,中遵典宪,下合人情,定会得到上天的福佑。

      因而他把这最后的从政理民当作实现政治理想的大好时机,“衡下车,治威严,整法度,阴知奸党名姓。一时收禽,

      上下肃然,称为政理”(《后汉书·张衡传》)。他又以政绩斐然而名垂青史,成为一个政治家。三年后他请求致仕,

      但未获恩准,被“征拜尚书”,当年,这位六十二岁的老人寿终于任上。


      纵观张衡的一生,他所以能成为一个伟大的科学家、文学家、政治家,除了其“天资睿哲”的禀赋外,

      一个很重要的原因就是得力于他的人生哲学。他虽以儒家经世济时思想为指导,但又善于把自己从矛盾苦闷中解脱出来

      虽也用道家达观无争的思想以自广,但又善于从消极观念中引出积极的正题,从而使自己无论在什么情况下

      都能不同程度地实现人生的价值。

       

       

           - 중국 < 바이두 백과 > 자료 중에서 전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