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보의 문학사상 / 다음 Tip 자료

2014. 10. 17. 20:16들꽃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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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의 문학사상에 대해...

이규보의 문학 사상에 대해서 알고싶어요..

 

넘급한데..

 

지금 나오고 있는 자료들이 너무 포괄적으로 나와서

 

이규보의 문학사상을 잘 알수 없겠더라구요..

익명|2006.12.03 00:56|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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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규보의 문학사상
      


    1) 연정이발(緣情而發) 증언으로서의 문학


    이규보는 글의 연원을 정에 연유한 마음의 격동에 두고 일단 마음 속에 격함이 있으면 반드시 밖으로 나타나게 되어서 가히 그것을 막을 수 없다고 했다(『이상국집』 27 여박시어서서(與朴侍御犀書) 즉 시마(詩魔)에 매이면 병중에도 쓰지 않고는 못 베기는 것이 그의 시세계였다. 천고에 남을 시경을 개척하고 창조하는 작업은 심간을 깎으며 여위는 고통을 수반하기 마련인 것으로 차차 고질이 된 것을 스스로 알지만 능히 스스로 그만 둘 수 없어서 시를 지어서 상심한다고 토로했다. 
    시마는 시는 사람을 들뜨게 하고, 시는 조화, 신명의 영묘함을 누설하며, 시는 거침없이 취하고 읊어 끝이 없이 자부심을 갖게 한다. 또한 시는 상벌을 멋대로 하며, 시는 영육을 다 여위게 하고 상심시킨다고 봤다. 다섯 가지 죄목을 들어 저주하고 쫓아버리고자 했다. 이규보의 문학사상의 일면은 시의 본질이 감흥으로부터 출발하여 사물의 본원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인식이다. 그의 젊은 시절인 26세 때에 국가, 민족의식의 바탕으로 지은 영웅서사시<동명왕편(東明王篇)>에는 창작동기를 밝히고 있는 병서(倂序)가 붙어있다.


    역사시(歷史詩)의 성격을 띠고 있는 작품들을 살펴보려 한다. 종래에는 '동명왕편'(東明王篇)과 '개원천보영사시'(開元天寶詠史詩)만을 묶어서 '영사시'(詠史詩)라는 갈래로 다루었다. '동명왕편'시는 한국 서사시의 효시로서 이규보의 어느 작품보다도 빈번하게 논의되어 왔고 또 높이 평가되어 왔다. 이러한 동명왕편의 구조에 관하여 살펴보면 본시 부분을 축으로 해서 병서부(幷序部), 서두부(序頭部)는 결미부(結尾部)와 대응관계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동명왕편'에는 삼계(三界)가 설정되어 있고, 인물의 유형도 다채롭다. 그리고 작품의 구조를 보면, 단조롭기 쉬운 이 개인의 전기적 기술에 플롯을 전개시키고 있다. 주인공과 상대역과의 이러한 대결을 통하여 사건이 신속하게 전환되는 수법을 사용함으로써 긴박감과 흥미를 더했다.
      


    2) 어의창신론(語義創新論)의 주창 -신의(新意) 신어(新語)


    이규보는 고려시론의 양대 흐름의 하나인 신의론을 주창한 인물이고 이인로는 용사론을 편 인물이라는 논의가 일반화되었다. 시를 창작해 가는 가운데 체험으로 깨닫고 깊이 사색하여 체득한 바로 백운소설에 나와있는 구불의체(九不宜體)의 병폐를 들고 이를 모두 극복한 뒤라야 시를 논할 수 있다고 설파한 것이다. 시를 창작하는 과정에서 맨 먼저 요구되는 것은 설의(設意)임을 강조하고 의(意)란 기(氣)를 위주로 하는데 그것은 타고난 천분(天分)이요 성정(性情), 기질(氣質)이기 때문에 인위로 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천부의 재질을 바탕으로 기상의 높은 경지와 후천적 공력에 따른 세련된 격조가 결합되었을 때 뛰어난 시가 산출될 수 있음을 강조했으며 시를 지은 뒤 발표하기까지의 시인이 취할 자세를 말하는 탁마(琢磨)는 철저한 추고(推敲)를 거쳐서 객관화한 뒤에야 작품을 세상에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 작품마다 전영력(全靈力)을 쏟아 넣는 정성으로 시적 형상화의 성취를 위한 각고의 노력을 감수하는 자세로 시를 아끼는 태도로 임해야만 함을 설파했다.


    그의 시창작론은 ① 시상단계로 의기(意氣)를 중시하였고 천성적 재질에 달렸다고 보았다.
    ② 구상단계는 집착하지 말고 변화자재한 구상이 요구됨을 지적하고 있다. 
    ③ 철사(綴辭)단계는 의기(意氣)와 철사의 이상적인 결합에서도 청경(淸警), 웅호(雄豪), 연려(姸麗), 평담(平淡) 등 중체(衆體)를 구비할 때 우수한 체격을 형성한다고 보고 독창적 신어를 지어내는 쪽을 택했다.
    ④추고, 발표단계는 주견의 바탕에서 타인의 비평, 질정(叱正)을 받아들이고 철두철미한 추고를 거쳐서 객관적으로 보아 병폐, 하자가 발견되지 않을 때에 비로소 작품을 세상에 내놓아야 한다고 했다. 특히 용사와 독창성, 환골탈태(換骨奪胎), 압운(押韻), 난해성, 논리성, 참신성, 윤리성, 표현의 세련도 등 시적 형상화의 문제와 어려움을 체험과 심사숙고를 거쳐서 밝혀 두고있다. 

    시를 짓는데 있어 더욱 어려운 바는 시어와 의경(意境)이 함께 아름다움을 얻는 것이요, 함축한 뜻이 참으로 깊으면 씹을수록 맛이 더욱 그윽하나, 뜻만 서 있고 시어가 원숙하지 못하면 꺽꺽하여 그 뜻을 펴나가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규보의 문학사상은 어느 한쪽에 편벽되지 않고 설의(說義)나 시어(詩語) 사용에 있어서 모두 개성과 독창성을 중시하는 창신론(創新論)을 우선하여 전개해 나갔음을 알 수 있다.


    3) 이문화국(以文華國)으로서의 문학


    시 300편을 한마디로 하면 '생각함에 사악함이 없다'는 것이다.(논어 권 2) 치자(治者)의 도(道)로 군림한 유학은 양반 사대부들의 필수적 교양이요 학문세계였기 때문에 재도적(載道的) 문학관은 시대를 넘어 엄존하였다. 문인관료들의 문학, 이른바 관각문학이나 처사적 문학에 있어서 도문일치(道文一致)의 경향이 가장 지배적이었다. 스스로를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고 자호할 만큼 시와 술과 거문고를 좋아하였던 이규보는 부지런히 그리고 차근차근 학문의 길을 닦았다. 그리하여 14살 때는 문헌공도(文憲公徒)가 되어 성명재(誠明齋)에 들어가 학업을 익혔다. 16살 때 아버지가 수주(水州,지금의 경기도 수원)로 벼슬살이를 나갔으나, 이규보는 청운(靑雲)의 뜻을 품고 개성에 머물면서 이 이부(吏部는 벼슬이름)에게 수학하고 학업에 정진하며 과거준비를 하였다. 이규보는 16살에 처음으로 사마시에 응했으나 낙방을 하고 다시 18살 때에 사마시에 응시하였으나 제 2의 쓴잔을 또 마셔야 했다. 그 후에, 수주에 있으면서 또 사마시에 응시했으나 역시 낙방하였다. 하지만 비록 과거에는 떨어졌지만 벌써 그의 시명(詩名)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20살 때에 또 사마시에 낙방, 그러나 그는 청운의 뜻을 버리지 않아 2년 후인 22세에 장원급제라는 최대의 영광을 차지하게 된다. 1199(신종 2)년은 이규보에게는 인생 최대의 해이었다. 그의 나이 32세로 과거에 장원한지 10년만의 일이다. 전주목사록 겸 서기(全州牧司錄兼書記)가 그의 직함이었다. 하지만 임기인 3년을 다 마치지 못하고 1200년(선종3년)에 모함을 받아 파직을 당하게 되었다.


    당시 경상도는 군웅할거의 시대를 이루고 있었다. 금주(金州, 지금의 김해), 진주, 합주(陜州, 지금의 협천), 운문(雲門, 지금의 청도), 초전(草田, 지금의 위산), 동경(東京, 지금의 경주), 울진, 태백산 등지를 중심으로 여러 도당들이 서로 호응하기도 하고 침공하기도 하는 등 민심을 동요시키는 전운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중 동경중심의 민란은 이비(利備)란 자를 두목으로 한 일당과 운문의 패좌( 佐)를 두목으로 한 일당이 가장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이들은 '고려왕업은 거의 다하고, 신라가 반드시 부흥한다'라는 구호아래 각지에 격문을 돌리고 주군을 침략하였다. 최충헌은 이 민란을 철저히 토벌하기 위하여 대규모의 토벌군을 일으키었다. 관군의 총지휘관인 김척후는 장병들이 피로하다는 핑계로 이들과 대항하지 않으니, 적세는 날로 번창하였다. 모든 사람은 일신의 몸만 아끼느라 도망갔으나, 이규보는「내가 나약하고 겁이 많은 자이기는 하나 역시 한 국민인데 국난을 회피하면 대장부가 아니다.」하고는 스스로 종군의 길을 택하여 병부녹사겸수제원(兵部綠事兼修製員)이 되어, 눈 내리는 12월 동경으로 향했다. 그의 나이 35세였고, 상복을 입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대체로 상중에는 외지로 나가지 않으나, 그는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살신성인(殺身成仁)을 하겠다는 굳은 마음으로 떠난 것이다. 김척후를 대신하여 새로 파견된 중도사 정언진(丁彦眞)은 동경부근에 이르러 계략을 폈다. 서낭당의 문당과 밀약하여, 거기에 기도하러 오는 이비의 부자를 체포하고, 이어 운문산에 대장 함연수(咸延壽)를 보내어 패좌의 목을 베어 개경으로 보냈다. 이로써 경상도 지방의 민란은 그 종말을 거두었다. 
    이 때에 이규보는 운문산에 주둔하면서 난적들을 무찌르기에 온갖 정열을 다 바쳤다. 도통상서부사시랑(都統尙書副使侍郞)에게 서(書)를 올려 전사한 장졸들의 명복을 빌어주고, 또한 논공행상을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상부에서는 이 글을 받자, 이규보의 애민과 논리 정연함에 감복되어, 각 부대에 쌀을 보내 전사자들의 명복을 빌게 하고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이로써, 난적들이 들끓는 와중에도 천륜을 다하고 인륜을 다하여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그의 소망을 알 수 있다. 1204년(신종7) 경상도의 반란군을 진압하고 개선을 했으나 논공행상에서 이규보는 제외되었다. 그는 외직 하나 얻지 못해, 불우한 신세를 한탄하며 문을 닫아걸고 출입도 하지 않았다.  


    최충헌은 다른 무신들과는 달리 문사들을 좋아하여, 기회만 있으면 문인들을 불러 시연(侍宴)을 베풀고 문사들을 후히 대접하였다. 당시의 쟁쟁한 문사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진강후모정기(晋康侯茅亭記)>가 최우수작품으로 뽑히어 현판에 새겨 걸어 놓는 최대의 영광을 얻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12월에 이규보는 직한림원(直翰林院)에 권보(勸補)되었다. 그동안 바라던 벼슬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벼슬은 날로 높아져, 50세에는 우사간지제고(右司諫知制誥)가 되고 문관으로 최대의 영예인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 받았다. 그리고 다시 다음해인 51세에는 좌사간(佐司諫)이 되었다. 하지만 52세 되던 1219년(고종 6)에 팔관하표(八關賀表)를 제대로 마련하지 못하였다고 탄핵되어 외직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는 스스로 '자오(自娛)'라 이름짓고, 자신의 현실에 만족하며 노력하였다. 그는 계양에 있으면서 최우에게 죄를 풀어주기를 비는 시를 지어 바쳤다. 그때는 이미 그를 귀양살이 보낸 최충헌이 죽은 다음해의 일로, 국원을 최충헌에 이어 최우가 잡고 있던 때이다.


    이규보는 1년만에 귀양살이가 풀려 시예부낭중 기거주 지제고(試禮部郎中起居注知制誥)가 되어 복직하였다. 이 모두는 최우의 덕이었다. 다시 그의 벼슬은 날로 올랐다. 그러나 벼슬이 오를 때마다 양사표(讓辭表)를 지어 올려 벼슬에서 물러나게 해 주기를 청했다. 하지만 그의 붓을 아낀 임금은 그를 쉽게 벼슬에서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호화스런 벼슬살이는 계양에서 풀려난 지 10년 만에 또 한번 붓이 꺾이게 되었다. 그의 나이 63세 때이다. 역시 팔관회 연회가 규례에 어긋났음이 문책되어 고도인 위도( 島)로 유배되었다. 이번은 완전 삭탈관직되어 절도에 위리된 것이다. 그는 위도에서 고독한 생활을 보냈다. 이듬해 정월에 감형되어 유배지가 그의 고향인 황려로 옮겨졌다가 65세 되던 해 4월에 완전히 귀양에서 풀려나 정의대부 판비서성사 보문각학사 경성부우첨사자지제고(正議大夫判秘書省事寶文閣學士慶成府右詹事知制誥)에 제수되었다. 이 때가 바로 몽고가 침입하여 강화도로 천도하였던 때이다. 그는 늙은 몸이었으나 몽고군을 막는 데에 온갖 정열을 쏟았다.

     

    2006.12.04 14:41|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