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0. 21. 11:41ㆍ들꽃다회
오픈지식
1. 무신란, 몽고란과 문학
⑴ 시대 변화의 추이
무신란 이후 문학은 이전보다 더욱 활기를 띠었는데 한 시대의 문학이 파괴되면서 새로운 문학의 담당층인 신흥사대부가 대두되었다. 몽고가 침략하자 최씨 정권은 몽고에 항쟁하였고 사대부들은 최씨 정권의 항쟁을 지지했는데 이는 새로운 문학이 진취적이고 민중적인 입장을 지닐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무신란 이후에 나타난 고려 후기 문학은 중세적 가치관을 현실에 맞게 재편성하였고 이는 조선 전기까지 이어지게 된다.
⑵ 김극기가 택한 길
김극기는 벼슬을 크게 하지는 못했지만 산림에서 노래하며 문인으로서의 이름은 높았다. 그는 자신의 재능에 대한 자부심 때문에 내심의 갈등으로 번민한 李仁老와는 달리 농촌 생활의 모습을 가가이서 표현했다. 과장과 수식이 없이 생동감 있게 농민의 정서를 표출했다.
⑶ 죽림고회의 문학
무신란 후, 산수를 찾아 고결한 문학을 표방하던 吳世才, 林椿, 李仁老 등 7명이 竹林高會를 열었다.
오세재는 상당한 집안의 선비였으나 일거에 몰락하여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신세를 한탄하고 과거에 급하기를 바랐다. 임춘은 가장 불행했던 문인으로 30대에 요절했다. 이인로가 편찬한 '西河先生集'이 오늘날까지 전한다. 몰락한 자신의 처지를 인식하고 갈등과 충격을 생동감 있게 드러내어 문학사의 전환에 기여했으며 '孔方傳', '麴醇傳' 등의 가전체 소설도 지었다.
이인로는 죽림고회의 중심 인물이었으면서도 벼슬이 정4품에 이르는 등, 홀로 성공했다. 그럼에도 영화를 누리지 못하는데 불만을 품고 좌절된 의지를 문학에서 살리고자 하였다. 최초의 詩話集인 '破閑集'을 지어 문학은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표현을 공교롭게 다듬는 것이 가치를 발휘하는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던 죽림고회의 다른 시인들과는 조금 다른 문학관을 지녔다. 그의 글은 用事를 중시한 까닭에 현실의 문제와 만나는 것을 피했다.
⑷ 최씨 정권의 문인들
琴儀는 최씨 정권의 문인들 가운데 좌장 격의 인물로 최충헌이 문인들을 기용하도록 하는데 상당한 구실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전하는 작품은 없는 것으로 보아 대단한 문인은 아니었던 듯하다. 兪升旦은 '翰林別曲'에 나오는 元淳文의 주인공으로 詩보다는 文에 능했다. '동문선'에 전하는 그의 시는 고려 사회의 모순을 노래하고 있다. 金仁鏡은 시와 부에 능했고, 근체시를 공교롭게 지었다. 은근한 풍자를 지닌 시가 전한다. 陳 는 詩作에 능통했던 인물로 '梅湖遺稿'가 남아 있다. 세상의 모순을 바로 잡으려는 뜻과 민족적 긍지가 엿보이는 작품이다.
⑸ 이규보의 경우
李奎報는 무신란 덕에 정계에 진출한 신흥 사대부의 선두 주자격인 인물로 죽림고회에의 참여 권유를 뿌리치고 벼슬길에 나아갔다. 문학에서는 옛사람의 표현보다 새로운 착상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하여 문학적 평가의 기준을 바꾸어 놓고자 했는데, '東國李相國集'에서 그는 문학 이론과 창작의 여러 면을 보여주고 있어 다방면에 걸친 그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그의 작품에서는 자신이 느끼는 바를 여러모로 천착한 흔적이 나타나 있으며, 사소한 소재도 문학론의 문제 의식과 결부된 표현을 했다.
그는 많은 작품을 썼으나 그 지향하는 바는 몇 가지로 집약된다. 하나는 '東明王篇'에서 보여주는 주체적 역사 의식을 표현하면서 민족 정신을 고취하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몽고에 대한 저항 문학으로 이어진다. 다른 하나는 만년에 농민시를 이룩한 것이다. 그는 대몽항쟁 기간 동안 고난을 겪는 농민의 편에 서서 그들의 어려움을 시로 남겼다. 농촌을 소재로 삼은 시는 그 전에도 있었지만, 이규보처럼 농민의 항변을 격렬하게 보인 것은 없었다.
⑹ 대몽 항쟁의 문학
崔滋는 몽고와 싸우기 위한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三都賦'를 지어 강화에의 천도가 정당함을 주장하였다. 三別抄를 마지막으로 무력 항쟁은 끝났으나 문인들은 지난날의 투쟁을 찬양하는 시를 지었다. 金坵는 그러한 대표적 인물로 그의 문집인 '止浦集'에는 '過鐵州'를 비롯한 항쟁의 시들이 있다. 止, 李穀은 원나라의 가혹한 수탈로 인한 백성의 희생을 처절하게 그렸고, 李承休는 '帝王韻記'를, 一然은 '三國遺事'를 지어 민족 의식을 고취시켰다.
2. 비평 의식의 성장
⑴ '파한집'
비평이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잘라 말할 수 없으나 본격적인 비평은 고려 후기 李仁老의 '破閑集'으로부터 비롯된다. '파한집'은 시화를 모은 책으로 시평이나 작가론, 문학 일반론 등이 수록되어 있다. 최치원 박인량 곽여 이자현 정지상 등 당시까지의 시인과 시 중에서 좋은 것을 가려 뽑아 수록했다. '파한'이란 마음의 바깥 일을 사모하지 않는 경지에 이른 것이 한가한 것이며, 한가함이 온전해야 비로소 그것을 깰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결국 자신의 문학이 대단한 경지에 이르렀으나 인정받지 못함을 한탄한 것이다. 이인로가 이 문집을 편찬한 것은 무신란 후, 문학의 필요성을 역설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옛사람의 모범적인 글을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글의 아름다움을 추구하여 극단적인 형식 주의를 택했다.
⑵ 이규보의 비평
이규보는 비평을 대부분 논설로 내놓아 논리적으로 원론에 접근하면서 때로는 시론을 전개했고, 때로는 풍자하기도 하는 등, 자기 주장을 직접적으로 폈다. 그는 근본적인 것을 중시하여 근본에서 말단으로 나아가야 올바른 시가 될 수 있다고 하였으며 문학에 있어서 독창성을 중시하여 복고주의와 형식주의를 비판했다. 그는 또 반어적 표현을 사용하여 자신의 주장을 펴기도 하였는데, 이런 기법은 '驅詩魔文', '狂辯' 등에서 잘 보인다.
⑶ '보한집'
崔滋가 편찬한 것으로 李仁老의 '파한집'을 보완하면서 李奎報의 문학관을 따랐다. 최자는 유학의 도리에 합당한 것이 문학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며, 그 가치를 발현하기 위해 예사롭지 않은 표현을 쓸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였으나 이규보의 농민시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보한집'은 문학의 여러 문제를 다양하게 고찰하였는데, 특히 품격론에서는 21종의 품격을 두고 이를 上, 次, 病의 세 등급으로 나눠 비평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객관화하려 했으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최자의 문학관은 신흥 사대부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기에 이르러서야 이론과 창작 양면에서 구체화되었다.
⑷ 최해의 경우
고려가 원에 복속된 뒤에 태어난 崔瀣는 처음 원나라에 가서 급제했으나 말년에 비참하게 되었을 때 '東人文'을 지었는데 이는 시 산문 변려문을 모아 각기 편찬한 것이다. 그는 '東人文序'에 한국 한문학을 평가하는 기준과 발전 방향을 제시했다. 여기서 그는 한문은 우리말을 바탕으로 하지 않았으므로 우리가 하기는 어렵지만 문학은 마음에 갖춘 묘리를 나타낸다는 측면에서는 중국의 명문과 우리의 명문이 대등하다고 주장하였다.
⑸ '역옹패설'
저자 李齊賢은 국사를 편찬하고, 古文을 일으켰으며, 시에 있어서도 이에 상응하는 기품을 갖자고 하는 등, 고려 문학을 혁신하는 데 전환점을 마련한 인물이다. 정통적 시문을 새롭게 한 '益齋亂藁'도 편찬하였다.
'역옹패설'은 '대수롭지 않은 잡담거리'라는 뜻으로 前集에는 역사를, 後集에는 문학을 다루었다. 여기서는 고려사를 건국 초기, 광종 이후, 무신란 시기, 무신 정권 이후로 나누고 당시의 시대에서는 무신란 시기의 풍조인 문인이 승려와 가까워져 글 다듬는 재주나 자랑하는 것을 극복하는 것이 사명이라고 하였다. 또 새 문학은 사대부가 신유학을 이념으로 해야 하여 이룩해야 한다며 經明行修를 내세웠다.
이제현은 이인로의 用事論과 최자의 新意論을 함께 포용하며 조화의 묘리를 얻고자 하는 절충론을 취했는데 이는 李穡에 이르러 방향 전환이 뚜렷이 나타나고 鄭道傳에 이르러서는 강경론으로 나타난다.
3. 불교 문학의 새로운 경지
⑴ 불교 혁신 운동과 문학
고려 전기 주도권을 잡았던 교종은 무신란 이후 쇠퇴했다. 이때 등장한 지눌은 귀족 불교를 비판하고 선종을 내세워 社라는 신앙 단체를 결성했으며 후에 선종의 입장에서 교종까지 포괄하여 마음을 수련하는 새 방법을 제시했다. 이를 기화로 불교혁신운동이 본격화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曹溪宗이 성립되었다.
선종의 저작은 기발한 비유나 역설이 많이 사용되어 문학적 표현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어떤 격식에도 매이지 않고 구어체에 가까운 우리말 가사와 같은 형태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 후기 선승의 문학과 신흥 사대부의 문학은 시대 의식과 밀착된 중세 후기 문학으로의 길을 여는 사명을 함께 수행하였으나 원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면서부터 사대부 문학이 불교 문학을 누르고 주도권을 잡았다.
⑵ 지눌, 혜심
知訥은 무득 깨닫는 頓悟와 오래 두고 닦는 漸修를 주장했고 定慧雙修라는 말로 선종과 교종을 융합하고자 하였으며,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표현 방식을 개척했다.
慧諶은 지눌의 사상을 문학을 통해 구체화하였다. 假傳이나 詩도 썼으며 불교 문학을 정리하고 부흥시키는 데 큰 구실을 했다. 당시대의 사상과 문화의 긴장된 양상에 참여하면서 현실 문제를 직접 다루기도 했다.
⑶ 천인, 천책, 무기
天因은 스승 了世를 이어 천태종을 발전시킨 인물이다. '靜明國師詩集'을 지었으며 '동문선'에 상당수의 작품이 전하는데, 장편 고시가 많고 산수에서 수련을 하며 느끼는 흥취를 읊은 것이 주종을 이룬다. 천책은 천인의 후계자로 釋眞靜이라고도 한다. '동문선'에 그의 시 다섯 수가 전하며 '湖山錄', '海東傳弘錄' 등을 지었는데 정약용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의 작품은 유학과 불교, 문학과 신앙을 관련시키고 견주는 데 관심을 두었다.
無寄는 천책의 후계자인 而安의 제자로 '釋迦如來行蹟頌'이라는 장편 서사시를 남겼다.
⑷ 충지
충지는 수선사에서 지눌, 혜심의 뒤를 이은 사람으로 다양한 종류의 작품을 남겼고, 특히 '동문선'에는 승려로서는 가장 많은 수의 작품이 실려 있다. 혜심이 개척한 선시의 품격을 한시 본래의 수준과 함께 구현하며 조화를 찾으려 했으며, 현실 문제도 다뤄 대몽 항쟁 문학의 최고 성과를 이룩했다.
⑸ 경한, 보우, 혜근
景閑은 '白雲和尙語錄'을 지었으며 예측을 불허하는 기발한 표현으로 기존의 관념을 깨고자 했다. 普愚는 '太古和尙語錄'을 남겼는데 감흥이 떠오르면 거침 없이 읊어대는 자유로운 형식의 시를 썼다. 나옹화상으로 불리는 惠勤은 '懶翁集'을 남겼다. '百納歌', '枯體歌', '靈珠歌'의 나옹 3가가 유명하며 가사의 최초 작품이라고 하는 '僧元歌'도 전한다.
4. 민족사 재인식의 시대
⑴ 새로운 시대의 문제 의식과 동명왕편
무신란 이후, 고려 전기 귀족 문화의 규범이 파괴되면서 동시에 주체 의식이 성장한 결과, '삼국사기'를 부정하는 방향에서의 역사 문학 작품이 성행하였다. 따라서 고려 후기의 역사 문학은 중세 문화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하고 고대적인 자기 중심주의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의 대표적인 작품인 이규보의 '동명왕편'은 고대 영웅 서사시를 재현한 작품으로 동명성왕의 신화가 그때까지 구전되었음을 입증해 준다. 무신란으로 귀족 문화의 기반이 무너지자 이규보는 민족적 전통에 대한 새로운 평가로 이 작품을 서술했다.
⑵ '해동고승전'
'海東高僧傳'은 覺訓이 지은 우리 나라 승려들의 전기집으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중간 쯤의 시기에 지어진 글이다. 불교가 우리 문화에 정신적 지도 원리를 제공했던 자취를 정리해 '삼국사기'의 일방적 주장을 시정하려 했다. 그러나 내용면에서는 정신의 역사를 서술하기 위해 문학적 형상화를 중시한 까닭에 인물의 행적을 서술하면서 윤색한 부분이 많다. 각 인물 뒤에는 讚을 붙였는데 이를 연결하면 서사시가 될 수 있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⑶ '삼국유사'
一然의 '三國遺事'는 고려 후기 역사 문학에서 가장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는 글로 당시의 시대 상황에 맞춰 새롭게 자각된 역사 의식을 깊이 있게 나타냈다. 대체로 '삼국사기'와는 상반된 입장에서 역사를 보고자 해서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했으며, 불교에 관한 사항에서는 전기 귀족 불교의 체취가 풍기는 '해동고승전'을 비판하고 민중 문화와 밀착된 불교를 다루고자 했다. 따라서 세속의 역사인 '삼국사기'와 불교의 역사인 '해동고승전'을 아우르고, '동명왕편'에 나타난 새로운 역사 의식의 시각을 다채롭게 구체화하며, 주체성 인식과 민족 문화 평가를 실증으로 이룩했다. 또, 설화에 중심을 두고 역사와 문학을 함께 다뤘으며 사실로써의 근거와 상징적 의미를 함께 이해하도록 하였다. 문장도 우리말에 가까운 한문을 씀으로써 직감적이면서도 절실한 체험을 살리고자 했다.
⑷ {제왕운기}와 그 이후의 상황
고려 후기에 이르러 吳世文의 [歷代歌], 李奎報의 [東明王篇], [開元天寶詠史詩], 李承休의 [帝王韻記] 등 역사를 읊은 詠史詩들이 생겨났다.
{제왕운기}는 상권에 중국의 역사를 적었고, 하권에 '東國君王開國年代'라는 표제로 우리 역사를 서술했다. 단군을 본문의 서두로 삼아 고려까지를 기록했는데, 이 때까지 무관심했던 발해사에 주목하는 등, {삼국유사}보다도 진취적인 면모를 보였다.
당시는 주권을 위협하는 원에 맞서기 위해 국사의 정비가 필요했으므로 李齊賢 白文寶 李達衷이 고려사인 {紀年傳志}를 편찬하려 했으나 완성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적 양상은 계속 이어지지 못하고 조선에 들어와 다시 유학의 합리주의를 기저로 한 역사에 역사 문학의 다양한 모색과 진취적 기상이 사라졌다.
5. 사람의 일생 서술 방법
⑴ 서술 방법의 양상
사람의 일생을 문학으로 표현한 것은 신화로부터 시작되어 그 뒤 金大問의 {高僧傳} 등에서 역사적 인물의 행적을 다루면서 독자적 전통을 정착시켰는데 이것이 역사책의 열전이다.
열전에는 佛家列傳과 儒家列傳, 道家列傳이 있는데 불가열전이 유가열전보다 상상의 폭을 넓히면서 서사문학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섰으며 도가열전은 불가열전에 더 가깝다. 유가열전 중 객관적 서술과 공식적 평가를 갖춰 교술문학 본령에 충실한 것은 行狀과 墓誌이다. 행장은 죽은 인물에 대한 공식적인 서술 평가로 작가가 자기 생각을 나타내기 어려우나 묘지는 고인의 행적에 대한 평가를 표방하는 글이나 격식은 비교적 자유롭다는 차이가 있다. 따라서 묘지는 傳에 보다 가까왔는데 이규보 최해 이제현 이색 등이 많이 남겼다.
傳은 작가가 자신의 의도대로 어떤 인물의 행적을 작품에 담은 것으로 새로운 표현 영역을 개척하고자 하는 노력이 함께 나타나 있다.
⑵ 전의 일반적인 성격과 표현 영역
傳을 쓴 동기를 전달 동기와 표현 동기로 나눌 때, 전달 동기가 두드러진 것은 이색의 [鄭氏家傳], 鄭以吾의 [星主高氏家傳] 등이나 표현 방법에서는 주목할 만한 것이 없다. 여기에 비해 어느 특정한 인물 한 사람을 다룬 것들은 표현 영역이 좀더 확장되었다. 이규보의 [盧克淸傳], 李崇仁의 [草屋子傳], [裵烈婦傳], 이곡의 [節婦曺氏傳] 등이 이에 속하는데, 뒤의 둘은 여자의 행실을 다룬 것이다.
傳을 가장 많이 남긴 인물은 이색으로 그는 이 글을 통해 당시의 문학 기풍에 대해 스스로를 비판하고 어디 메인 데 없이 자기를 나타내는 문학을 칭찬했다.
⑶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
자신의 전을 가상의 인물에 의탁해 쓴 글을 托傳이라고 하며 여기에서는 자신을 너무 내세우는 것을 금기시 했느데 이규보의 [白雲居士傳], 최해의 [猊山隱者傳]이 있다. [백운거사전]은 자기를 높인 글로 문학을 해서 부귀를 꾀하는 자세를 거부하였다. 이에 비해 [예산은자전]은 자신을 낮춘 글로 자신의 처지가 비참함을 강조하였다.
⑷ 가전의 세계
사물을 의인화하여 지은 傳을 假傳이라고 하는데 {동문선}에 7편이 실려 전하는 등, 고려 후기에 처음 나타났다. 사물에 관심을 두고 잘못된 세상을 비판 풍자하면서 사람의 바른 길을 찾자는 의도를 표현한 것으로, 표현 동기가 우세한 교술 문학의 한 갈래로서 景幾體歌의 성격과 비슷하다.
林椿의 [麴醇傳]은 술을, [孔方傳]은 돈을 의인화한 것으로 작가의 처지를 합리화하면서 세상에 대한 불만을 토로한 작품이며, 이규보가 쓴 [麴先生傳]은 술을, [淸江使者玄夫傳]은 거북을 의인화한 작품이다. [청강사자현부전]은 동물을 의인화한 첫 작품이라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이곡의 [竹夫人傳]은 대나무를, 釋息影庵의 [丁侍者傳]은 지팡이를, 李詹의 [楮生傳]은 종이를 각각 의인화했으나 앞의 작품들에 비해 주제 의식이 부족하다.
{동문선}의 수록 작품 이외에도 대나무를 의인화한 [竹尊者傳]과 얼음을 의인화한 [氷道資傳]은 승려인 慧諶의 작품이다.
6. 속악 가사와 소악부의 세계
⑴ 속악 가사의 성격
樂은 국가에서 행하는 공식 행사에 소용되는 雅樂과 비공식적인 잔치 등을 할 때 쓰이던 唐樂, 俗樂으로 나뉘는데, 당악은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고 속악은 국내에서 생긴 것이다. 고려 전기까지 아악과 당악은 풍부한 내용을 갖추며 발달된 데에 비해 속악은 정체되었다.
삼국의 작품 중 [井邑詞]와 [處容歌]가 궁중에서 공연되었고, 고려조의 노래 중 張延祐의 [寒松亭曲], 예종의 [維鳩曲]은 고려 전기의 속악으로 채택되었으며 향가 계통의 노래인 [鄭瓜亭曲]도 속악으로 편입되었다. 그밖에 [風入松], [夜深詞], [紫霞洞]은 한문으로 되었다.
조선조에 男女相悅之詞로 배격된 국문 속악가사들이 채택된 것은 고려 후기인데, 이의 원천은 하층문화와 연관을 갖지만 상층문화로 변모되면서 이중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한편, 속악가사에 민요 계통의 노래가 대폭 삽입된 것은 큰 의의를 갖으며, 구조도 민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이는 당악 정재의 자극을 받은 속악 정재의 음악적 구성에 적합한 때문이었다.
⑵ 처용가 계통의 노래
신라 때 노래 춤 놀이의 복합체였던 [처용가]는 고려에 들어오면서 속악 정재로 정리되었으나 굿으로서의 기능은 계속 유지되었다. 처용을 신으로 섬기며 처용이 재앙을 물리치는 권능을 회복하도록 기원하자는 생각을 강하게 나타내는 한편, 박진감 있는 짜임새는 없다.
⑶ 동동, 쌍화점
속악 정재에서 부른 놀이 노래로는 [動動], [雙花店] 등이 증거가 발견되는 것들이다. [동동]은 1장에서 신령과 임금을 송축한 뒤, 2장부터는 달거리 형식을 취했는데, 자연을 노래하면서 인생 살이를 문제 삼았으며 형식은 민요와 비슷하다. [쌍화점]은 충렬왕 때 吳潛, 金元祥 등이 음란한 짓을 하며 지어낸 것으로 퇴폐적이고 음란한 가극의 대사이다.
⑷ 상저가, 엇노래]
[維鳩曲], [相杵歌], [엇노래(思母曲)]는 장이 나뉘지 않은 짧은 형태의 세 토막 형식 노래라는 유사상을 갖는다. [상저가]는 두 사람이 절구방아를 찧으면서 부르던 노래로 어버이와 자식 간의 사랑을 다룬 것이고, [엇노래]는 '어머니 노래'라는 뜻으로 본래는 노동요였다.
⑸ 이상곡, 만전춘별사, 정석가
[履霜曲]은 여러 형태를 종합한 듯한 모양을 지니고 있는 노래로 여자가 오지 않는 님을 그리워하는 내용이다. [滿殿春別詞]는 장이 나뉘어져 있으나 여음은 없으며, 여러 양상의 사랑을 표현한 노래로 '만전춘'과는 다른, 어디서 따 오거나 지어낸 구절을 모아 새로운 노래말을 만든 까닭에 [만전춘별사]로 부르게 되었다. [鄭石歌]는 정과 돌이라는 악기를 사람처럼 일컬어 지은 노래로 임금 앞에서 벌이는 놀이에 쓰였다. 마지막 5장의 일부 사설이 [西京別曲]에서도 보이는 것은 출처가 서로 다른 노래를 모으고 짓고 보태서 이 작품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추측된다.
⑹ 소악부
李齊賢과 閔思平이 小樂府라는 이름으로 남긴 17편의 한시는 속악 가사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데, 이는 당시 유행하던 우리말 노래를 한문으로 옮긴 것으로 우리말 노래의 전체가 아니라 개요를 옮겼거나 어느 한 대목만을 번역한 것이다. 소악부는 한시이면서도 우리말 노래, 특히 민요의 진솔한 사연을 담고자 한 까닭에 민족 문학으로서의 적극적 의의를 갖는데, 조선 후기에 특히 융성했다.
7. 설화, 무가, 연극의 양상
⑴ 설화
고려 후기에도 많은 설화가 있었으나 문학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격하되었다. 그것은 신유학의 관점에서 합리적이고도 비판적인 역사를 서술하고자 했던 까닭에 이념 수립에 관련된 긴요한 것 이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고, 그것들도 원형을 그대로 남기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李奎報와 一然은 당시의 추세에 구애받지 않고 이른 시기의 설화를 재인식하여 설화를 모으고자 하였다.
고려 후기에 등장한 詩話는 설화의 판도를 바꾸었는데 이는 수록된 시에 관심을 가져야 하므로 자연스레 설화에 대한 관심이 적어진 때문이다. 李仁老의 {破閑集} 이후의 시화집은 시화 이외의 잡록 등을 수록하였는데 상층부의 관심에 의해 보은담, 孝友 烈女 方技 등이 긍정적으로 인식되었다.
몽고란 이후의 설화 중에는 중국인이 나쁜짓을 하여 돌아가는 길에 그를 산신의 아우가 죽였다는 것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임진란 이후의 소설과 연관성이 있다고 보여진다.
⑵ 무가
신유학을 숭상하는 신흥사대부가 등장하면서 무속이 적극적으로 배제되었으나 고려 후기의 혼란스로운 상황에서 예언자이며 구세주로 자처하는 인물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무속에 대한 탄압은 조선에 들어 더욱 심해졌으나 고려 후기부터 전해진 무가가 그대로 전해졌다. 하지만 ㅁ분제성이 있는 사설은 정리되고 곡조를 보아 채택하였다.
⑶ 연극
나라 굿놀이라고 할 수 있는 八關會, 燃燈會, 儺禮 같은 행사에는 歌舞百戱가 따랐는데 이중에서 연극적 요소의 발견 가능성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 고려 후기에 전문적인 놀이패가 있어 연극을 공연했고 궁중에서도 연극이 있었으나 후대로 이어질만큼 자리잡지 못했으며 연극의 주류는 민간 연극과 하층 연극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길거리에서 하는 풍자적 연극이 존재했었다고 하는데 河回 탈춤 등의 탈춤과 꼭두각시놀음도 민간 연극으로 전승되었다.
8. 경기체가, 시조, 가사의 형성
⑴ 고려 후기 시가의 새로운 양상
무신란 이후, 문벌 귀족의 지배 체제가 무너지면서 향가를 이을 수 있는 기반이 사라지고 문화 담당층으로 신흥사대부가 나서서 시가 문학을 새로이 일으키고자 한 결과, 景幾體歌 時調 歌辭가 등장하였다.
경기체가의 첫 작품인 [翰林別曲]은 속악 가사와 비슷한데 이 사람 저 사람이 한 대목씩 부르다 그 표현 방법이 이어져 경기체가의 틀이 생겼다. 이 경기체가는 사물을 중시하고 자아를 세계화한, 표면으로 부각된 최초의 교술시로 신흥사대부는 [한림별곡]의 전례가 자신들의 사고 방식을 표현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하고 이를 조선 전기까지 발전시켰다. 한편으로는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을, 다른 한편으로는 사실에 속한 것과 원리를 이루는 것을 함께 추구하면서 理氣哲學을 이룩하자는 모색이 심화되고 밖에서 들어온 학설을 적용하였다.
시조는 서정시의 필요로 인해 발생하였는데 네 토막 형식으로 그 원형은 [井邑詞]나 [滿殿春別詞]에서도 보인다. 가사는 고려 말에 성립되었는데 현전하는 최초의 작품은 나옹화상의 [僧元歌]이나 이보다 더 이른 시기에 한문으로 전하는, 비슷한 형식의 노래도 있다. 이들은 모두 그 연원을 민요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여음이 삽입되며 장이 나누어지는 형식의 민요는 속악 가사의 일부와 경기체가로, 여음이 없는 짧은 형식의 민요는 향가를 거쳐 시조로, 그리고 여음이 없는 긴 형식의 민요는 가사로 각각 변천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들이 존재했던 시기를 가지고 시대를 구분해 볼 수도 있는데, 경기체가 시조 가사가 공존했던 시기는 중세후기문학기, 경기체가가 붕괴되고 시조와 가사가 공존하던 시기는 중세문학에서 근대문학으로의 이행기, 가사가 탈락하고 시조만 남은 시기는 근대문학기라고 할 수 있다.
⑵ 경기체가
첫 작품인 [한림별곡]은 최씨 정권에 참여하면서 정권에 진출한 문인들이 득의에 찬 기상을 돌아가며 부른 노래로 경기체가의 특징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이 작품은 개별적인 사실이나 사물을 하나씩 열거하다가 한데 모으고 그것을 하나의 명사로 포괄하고는 景을 붙여 어떤 광격을 생각하게 하는 말의 짜임새와 '334, / 334 / 444 / 위……景…… / 4444 / 위……'의 율격적 형식이 계속 이어진다.
安軸의 [關東別曲]과 [竹溪別曲]은 혼자 정착한 경기체가의 첫 예로 꼽히며 신흥사대부가 경기체가를 통해 새로운 사고 방식을 표현한 명백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관동별곡]은 강원도에 벼슬아치로 나가 민심을 살피고 시대의 병폐를 파헤친 기행시이며, [죽계별곡]은 작가의 고향인 순흥의 경치를 찬양하고 거기서 놀며 공부하는 흥취를 표현한 작품이다.
⑶ 시조
고려 말에 나타났으며 작품은 몇백년 간 구전되다가 조선 후기에 국문으로 기록되었다. 많이 작품 중에는 후대인의 의작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들도 있으며 고려 후기에 이르러 시조 작가가 많이 나타나는데 禹倬, 李兆年, 李存吾, 崔塋, 李芳遠, 鄭夢周 등이 유명하다. 사설시조도 이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邊安烈의 [不屈歌]가 그것이다. 이 작품은 고려말의 정치적 격동과 관련되어 창작된 작품으로, 이로 미루어 볼 때, 시조가 그만큼 큰 구실을 하는 동시에 절박한 상황에서도 묘미있는 표현이 개척되었음을 알 수 있다.
⑷ 가사
가사의 첫 작품으로는 나옹화상 혜근의 [승원가]를 드는 것이 보통이나 이 작품 이전에도 원감국사 止의 [臂短歌], 태고화상 普愚의 偈頌 등도 뒤에 가사로 될 수 있는 요건을 갖추고 있다. 가사는 처음에 구전되는 불교가사로 시작됐다고 볼 수도 있으나 申得淸의 [歷代轉理歌]를 볼 때,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9. 사대부 문학의 방향과 문제 의식
⑴ 사대부의 성격과 사고 방식
신흥사대부는 본래 지방의 중소 지주에 지나지 않는 향리 출신으로 그들은 권문세족에 비해 불리한 처지를 사상적거나 문화적 역량으로 극복, 역사 창조의 방향과 논리를 휘어잡을 수 있었기에 승리할 수 있었다. 원나라 수도를 자주 드나들던 사대부 문인들은 古文과 新儒學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자신들의 사고 방식을 구현하며 문화의 혁신을 꾀하였다. 그들은 고향에 대한 애착으로 그곳에 사는 하층민의 처지를 대변하였고 그로 인해 자신의 지위를 안정시켰으며, 농민들을 살리기 위해서 전제 개혁을 단행, 토지 분배의 실현을 위한 문학을 추구하였다.
⑵ 최해, 안축, 이제현
성리학을 표방하면서 고려 문화를 혁신하고자 한 첫 세대는 安珦, 백이정, 禹倬 등인데 이들은 저작 활동을 통해 새로운 사상을 전개할 단게에 이르지 못하였다.
崔瀣(최해)는 {東人文}을 지은 사람으로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자기 발견을 위해 문학 활동을 하였는데 직접 농사를 지으며 농민의 처지를 이해하면서 읊은 농민시도 있다. 安軸의 문집으로는 {謹齊集} 네 권이 전하는데 그의 작품은 실제 삶의 현실에서 접한 고민과 뉘우침이 들어 있어 감명을 주나 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李齊賢의 문학은 원나라를 지향하는 뜻과 고려를 지향하는 뜻이 서로 갈등을 일으키면서 앞의 것들을 수단으로, 뒤의 것을 목적으로 삼으려 했다. 원나라에 가서 당시 최고 수준의 문학 활동을 하며 고려의 이익을 위해 힘썼고 다양한 문학을 전개하였다. 그의 문학의 근본 정신은 고문에 힘쓰면서 신유학의 도리를 구하는 데에 두었는데, 꾸밈이 없는 가운데 실속 있고 공감을 주는 문학을 이룩할 것을 주장하여 신흥사대부가 택할 독자 노선을 실제 창작을 통하여 분명하게 하고자 하였다.
⑶ 이곡, 윤여형, 백문포, 정포, 전녹생
李穀은 이제현이 이미 제시했던 방향을 더욱 구체화하여 유학의 도리를 근거로 삼고 교화를 목표로 하는 문학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尹汝衡은 스스로 농사를 지으며 농민의 처지를 심각하게 다룬 시를 써서 변혁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사상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白文寶는 윤여형이 농민의 처지에서 절실하게 부딪친 문제를 이념적인 방향에서 정립하고자 하였다. 정포는 사대부로서 유학의 도리를 밝히려고 했으나 구체적 경륜을 갖고 현실과 대결하지 못하고 나그네로서의 심정을 지니고 인생을 보냈다. 田祿生은 권문세족의 폐해를 시정하려고 앞서나아가다가 죽임을 당한 인물이다.
⑷ 이색, 이달충, 정추, 김구용
李穡은 이제현과 이곡을 이어 신유학을 발전시켰으나 불교를 온통 배격하지는 않았으며 사상이 한쪽으로 기울지 않았다. 도학을 本道로, 문학을 外道로 생각하여 문장은 마음의 도리를 일깨워줄 때 가치를 갖는다고 하였다. 그는 문학이 특권의식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하고 우리의 풍토나 생활과 관련된 시를 지었다. 李達衷은 시대의 고민과 적극적으로 부딪치고자 했으나 시련을 개탄하기보다는 그에 흔들리지 않는 본질을 찾는 것이 더 긴요함을 역설하고, 왕조가 유지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백성들의 의연한 자세에서 찾고자 했다. 鄭樞는 신돈에게 죽을 뻔하다가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내쫓긴 뒤, 백성의 고난에 동참하여 나라를 근심하며 시를 지었다. 金九容은 그림 같은 정경을 읊고, 신선을 찾아 멀리가고 싶은 생각을 표현하였다.
⑸ 정몽주, 이존오, 이숭인, 이종학
圃隱 鄭夢周는 시의 소재를 확대하고 참신한 수법을 사용하였다. 그는 신유학의 도리를 굳게 지키고 대의명분을 분명히 하고자 하면서 철학적인 시로써 도리를 밝혔다. 李存吾는 신돈을 규탄하다가 겨우 살아 은거하면서 시대를 걱정하고 울분을 터뜨리는 시를 지었다. 李崇仁은 은거를 동경하는 기품에 따라 험난한 세상을 벗어나 숨고자 하는 마음을 시로 나타냈다. 李鍾學은 이곡의 손자이고 이색의 아들로 정도전에 의해 피살되었는데, 귀양과 관련된 시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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