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마니산 들꽃다회 - 넷(完)

2014. 10. 16. 01:17들꽃다회




       


       강화 마니산 들꽃다회 - 넷(完)

                    

                    /  20140927~28 토,일요일, 맑음 & 해무




구절초






꽃며느리밥풀






노을진 흥왕리해변






흥왕리 고려이궁지 일대






해무의 장삼자락....






마니산 북쪽의 진강산, 가릉포평야 일대 ....






마니산 정상 , 참성단 암릉의 해무 ....


















금방 해무가 짙어져 앞이 잘 안보인다.





마니산 정상, 화도면과 양도면 사이에 있는 가릉포평야 일대






길상면 전등사가 있는 정족산(220m), 길상산(336m) , 

김포와 강화도 사이의 바다인 희미한 염하(鹽河)






흥왕리, 여차리해변의 노을 ....






구절초






마니산 암릉의 짙은 해무






이고들빼기






국립지리원 삼각점 안내판





자연 암반에 새겨놓은 삼각점




흰지리털이풀




해무와 암반틈에 구절초






능선상 나뭇잎은 가을빛에 물들어 가고 ...






이미 잎을 떨군 앙상한 관목류도 보인다.





흥왕리해변 일대 ....

방조제 둑을 따라 긴 직사각형이 흥왕리낚시터 ...

앞의 섬은 아래 사진과 대조하여 보니, 왼쪽부터 신도(부분), 시도, 묘도, 장봉도






함허동천과 정수사로 내려가는 갈림길 

직전에 있는 마지막 암릉길 ...

사진 가운데 부분 나무 너머로 논 사이 표주박 모양으로 내민 능선 

오른쪽 계곡부에 함허동천 야영장이 있다.






쥐꼬리새( 일명 :초리새)와 구절초

척박한 바위 벼랑틈에서도 서로 사이좋게 공존하고 있다.

마치 서민들이 주로 살고 있는 곳에서 동네 인심이 더 좋은 것처럼....











암릉상에서 보호받고 있는 소나무


- 짙은 해무로 노출감도를 조절하였더니

감광은입자가 큰(ISO가 높은) 사진처럼 보인다.

사진이 많이 떨리기도 하였다.





암반틈에서도 꿋꿋한 삶을 살아가는 산부추






전망대 - 섬 안내판 






낮으막한 소나무에서 풍겨지는 강인한 생명력 ......






함허동천과 정수사 갈림길 안내판






이제 내려가는 나무계단에 도착했다.





함허동천 등산로 안내도


- 정수사 코스는 거리는 가깝지만 경사가 급하다.

하산길에는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하고, 이 코스로 오르려면

급한 경사를 감안하여 시간을 충분히 잡아 두어야 한다.







길상산(336m) 남쪽 가천대학교가 있는 선두리 일대 ....

사진 왼쪽 중앙 계곡부가 함허동천 야영장






전등사를 품고 있는 정족산(220m),

정상부가 해무에 가려져 있는 길상산(336m)

선두포평야






흥왕리, 여차리해변 저녁풍광




저 암봉을 넘어 정수사로 내려가야 하나하고 망설이고 있는데,
가까이 다가가 보니 왼편으로 우회로가 잘 나있다.






어느새 길상산 정상부에 있던 해무도 걷히고

표주박형 능선 오른쪽에 있는 함허동천 야영장과

길상산 남쪽 산록에 있는 가천대학교 부근 선두리 일대가 건너다 보인다

선두리 앞의 섬이 동검도 ....






사진 중앙부 희미하게 보이는 길정저수지 건너편 길직리 백운곡에 

고려대 문인 이규보 선생님의 묘소가 있다.




내가 읽은 시편 (215)

이규보의 시를 읽는 아침 | 내가 읽은 시편
이승하 2014.04.09 06:29





論詩       시를 논하다

 

 

作詩尤所難             시 짓기가 무엇보다도 어려우니

 

  語意得雙美             말과 뜻이 함께 아름다워야 하네.

 

含蓄意苟深                   함축된 뜻이 진실로 깊어야

 

咀嚼味愈粹               음미할수록 맛이 더욱 알차네.

 

意立語不圓            뜻이 서도 말이 원만하지 못하면

 

澁莫行其意             난삽하여 뜻을 전하기 어렵다네.

 

就中所可後                    그 중 뒤로 미뤄도 될 것은

 

雕刻華艶耳          문장을 화려하게 꾸미는 것이라네.

 

華艶豈必排     화려한 문장을 굳이 배제하겠는가마는

 

頗亦費精思          모름지기 정신을 쏟아야 마땅하네.

 

攬華遺其實            꽃만 붙잡고 그 열매를 버린다면

 

所以失詩旨      시의 본질을 잃어버리는 이유가 되네.

 

邇來作者輩                   요즈음의 글 짓는 무리들은

 

不思風雅義                   풍아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外飾假丹靑              겉꾸미기로 미사여구 늘어놓아

 

求中一時嗜                한때의 기호에만 맞추려 드네.

 

意本得於天                뜻이란 본래 하늘에서 얻느니

 

難可率爾致                쉽게 이루어지기가 어렵다네.

 

自揣得之難                스스로 어려운 줄 알고 있기에

 

因之事綺靡             그리하여 더욱 화려하게만 하여

 

以此眩諸人             이것으로 여러 사람을 현혹시켜

 

欲掩意所匱          깊은 뜻 없는 것을 엄폐하려 하네.

 

此俗寖已成                이런 풍속이 점차 일반화되어

 

斯文垂墮之               문화가 땅에 떨어지게 되었네.

 

李杜不復生               이백 두보가 다시 나지 않으니

 

誰與辨眞僞        누구와 더불어 참과 거짓 구별하랴.

 

我欲築頹基     나는 무너진 터전을 다시 쌓으려 하나

 

無人助一簣                조금이라도 도와주는 이 없네

 

誦詩三百篇                     시 삼백 편을 외운다 해도

 

何處補諷刺         어느 곳을 풍자하여 보충하겠는가.

 

自行亦云可       스스로 행하는 것이야 가능하겠지만

 

孤唱人必戱               사람들은 반드시 비웃을 것을.

 

 

 

 



焚藁        불살라버리곤 하다

 

 

少年著歌詞                 소년 시절에는 가사를 지어서

 

下筆元無疑                붓을 잡으면 멈출 줄 몰랐었지

 

自謂如美玉        스스로 아름다운 구슬처럼 여겼으니

 

誰敢論瑕疵                누가 감히 하자를 논하겠는가

 

後日復尋繹                       뒷날에 다시 검열해보니

 

每篇無好辭             편편마다 좋은 글귀 하나도 없네

 

不忍汚箱衍     차마 (글 모은) 상자를 더럽힐 수 없어

 

焚之付晨炊                불살라서 밥 짓는 데 버렸다네

 

明年視今年              작년의 글들을 금년에 살펴보니

 

棄擲一如斯                    한결같이 버릴 것밖에 없네

 

所以高常侍        고상시(사람 이름)는 이런 까닭으로

 

五十始爲詩    오십이 되어서야 비로소 시를 지었겠지

 

 

 

 

 

詩癖          시 쓸 때의 버릇

 

 

年已涉縱心                    나이는 벌써 七十을 지났고

 

位亦登台司                    지위 또한 태사가 되었으니

 

始可放雕篆             이제는 문필을 버릴 만도 하건만

 

胡爲不能辭           어째서 아직도 그만두지 못하는가

 

朝吟類蜻蛚           아침에는 귀뚜라미처럼 노래하고

 

暮嘯如鳶鴟     저녁에는 솔개와 올빼미처럼 읊는다네

 

無奈有魔者             떼어버릴 수 없는 마귀가 있어서

 

夙夜潛相隨                     朝夕으로 남몰래 따른다네

 

一着不暫捨          한번 붙어서는 잠시도 떠나지 않아

 

使我至於斯         나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게 했네

 

日日剝心肝                    나날이 심장과 간을 깎아서

 

汁出幾篇詩                         몇 편의 시를 짜내자니

 

滋膏與脂液                                  기름기와 진액이

 

不復留膚肌                   다시는 봄에 남아 있지 않네

 

骨立苦吟哦                 앙상한 뼈에 괴롭게 읊조리는

 

此狀良可嗤                    이 모습이 진실로 우습구나


亦無驚人語                   또한 남을 경악케 할 언어로 

 

足爲千載胎        천년 후에 남길 만한 것 못 지었으니

 

撫掌自大笑              스스로 손뼉치고 크게 웃다가는

 

笑罷復吟之          문득 웃음을 멈추고 다시 읊조리네

 

生死必由是               살거나 죽거나 오직 시를 짓는

 

此病醫難醫            이 병은 의원도 고치기 어려우리



 

 

 

 

 

 『동명왕편』을 쓴 이규보

 

     광세(曠世)의 문인인가, 시대의 아부꾼인가. 이규보(李奎報, 1168~1241)를 두고 내려지는 평가는

 극단적이다. 그만큼 문제적 인물이었으며, 복잡다단한 시대 상황이었다. 그러나 어느 쪽의 비판이 되었던 

이규보는 13세기 문학사에서 하나의 지평을 열었다는 데 이론이 없다. 

그가 살았던 시대와 그가 이룩한 문학의 핵심을 정리해본다.

 


  샘 속의 달을 노래함

 

     이규보는 13세기 한국문학사의 지평을 넓힌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 문학인으로 크게 자부했으며, 

더불어 문필을 가지고 시대에 봉사하는 일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것이 극악스러운 최씨 무인정권이었는데도 

그랬다. 한마디로 이규보는 문제적 인간이었으며, 그래서 그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에도 극단으로 갈려 나온다. 

문학적 감수성이나 세계인식이 얼마나 뛰어난 것이었나는 이규보의 다음과 같은 시로 적절히 설명할 수 있다.

 

산승이 달빛을 탐하여                          山僧貪月光

병 속에 물과 함께 길어 담았네               甁汲一壺中

절에 다다르면 바야흐로 깨달으리라         到寺方應覺

병 기울이면 달빛 또한 텅 비는 것을        甁傾月亦空

 

    ‘영정중월(詠井中月)’ 곧 샘 속의 달을 노래한다는 뜻의 제목을 가진 시이다. 

어렵지 않은 글자만 가지고도 정확히 운을 맞추고,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불교 논리를 

완벽하게 소화하여 시화한 작품이다.

 

    달빛을 사랑하는 스님이라면 벌써 그것으로 공(空)의 생애를 충분히 실천한 분이련만, 그조차 욕심이요, 

병 속의 가득찬 물을 쏟아내면 달빛 또한 사라지니, 완벽한 공(空)의 세계를 향한 치열한 싸움이 아닐 수 없다. 

절묘한 표현이다. 샘물에 비친 달빛조차 색(色)의 세계로 여길 정도이니, 인식의 철저함을 넘어 시적 형상화의 

수준에도 혀를 내두를 만하다.

 


  불운한 시절 속의 모색

 

     이만한 문학세계를 구축한 이규보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1168년에 태어났다. 이 해가 의종 22년이었는데, 

그로부터 꼭 2년 뒤에 무신란이 터졌다. 집안이 그다지 번성해 보이지 않으나, 그럴수록 글로써 벼슬을 살고 

집안을 일으켜야 할 형편에, 태어나자마자 만난 이런 시국의 비상사태는 그에게 결코 유리할 것이 없었다. 

한미(寒微)하기는 하나 그 또한 문인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자는 춘경(春卿)이요 처음 이름은 인저(仁低)였는데, 벌써 아홉 살 때 시를 짓는 신동으로 알려지고, 

그의 호 가운데 하나가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거니와, 특히 술을 좋아하기로는 벌써 소년시대 때부터였다. 

술 자체를 좋아했는지, 시대의 울분을 술로 달랬는지 모르겠으나, 자유분방한 성격에 과거 시험 같은 딱딱한 

글은 마음에 차지 않아, 어려서의 소문과는 달리 시험에는 20대 초반까지 합격하지 못하였다. 

대신 강좌칠현(江左七賢) 같은 이들이 관심의 대상이었다.

 

    강좌칠현은 죽림고회라고도 하는데, 무신란의 와중에 자리를 잃고 현실세계에 염증을 느낀 

이인로·오세재·임춘·이담지·조통·황보항·함순 등 7인으로 구성되었다. 중국 진(晉)나라 때 

자유방임적인 노장사상(老莊思想)에 심취하여 시주(詩酒)를 벗 삼던 죽림칠현을 본떴던 것이다. 

그들은 이규보에게 함께 하자고 권했다. 그러나 이규보는 함께 어울리면서도 정작 동참의 권유에는 

완곡하게 거절하면서 이런 글을 보냈다.

 

    “대나무 아래의 모임에 참여하는 영광을 차지하고서 술을 함께 마셔서 기쁘지만, 

칠현 가운데 누가 씨앗에 구멍을 뚫을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실은 중국의 죽림칠현 가운데 인색한 사람 하나가 자기 집의 좋은 오얏 씨앗을 다른 누가 가져다 심을까 

염려해 모두 구멍을 뚫어 놓았다는 고사가 있다. 은거를 표방하되 제 먹을 것 챙기기는 재빨랐던 이가 있었으니, 

그와 마찬가지로 이규보는 죽림고회의 한계와 이중성을 꿰뚫어 보았다. 속으로는 벼슬길을 바라면서 겉으로 

초월한 듯 살아가는 이들에게 보내는 야유이기도 했다.

 

    이규보는 그만의 길을 걸었다. 백운거사(白雲居士)를 자처하고 시를 지으며 장자(莊子) 사상에 심취했다. 

그가 새로운 역사의식을 갖추어 나가는 모습은 25세 때 지은 [동명왕편(東明王篇)]이나 [개원천보영사시

(開元天寶詠史詩)]같은 작품에 드러난다. 이때는 지방을 돌다 개성에 돌아와 궁핍한 생활을 할 때였다. 

우리 역사에 대한 지극한 자긍심과 함께 문란한 정치와 혼란한 사회를 보고 크게 각성한 결과였다. 

특히 [동명왕편]은 민족 영웅 서사시로 오늘날의 평가 또한 극진하다.

 


  입신양명의 길로 나가

 

    한 바탕 풍운의 시기가 지난 다음 이규보는 현실적인 길을 찾기로 하였다. 무신정권은 최충헌에 

이르러 방향을 잡고 있었다. 최충헌이 이의민을 죽이고 실권을 잡은 것이 1196년, 이규보의 나이 28세 때였다. 

이규보는 최충헌의 동향을 유심히 살폈으며, 그에게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시문을 지어 보냈다. 

그런 그를 최충헌이 알아보고 등용한 것은 이규보의 32세 전후로 알려져 있다.

 

   이규보는 1207년 권보직한림(權補直翰林)으로 발탁되었고, 최충헌이 죽은 뒤 그의 아들 최이가 정권을 

물려받은 다음에는 더욱 총애를 받아, 1220년 예부낭중기거주지제고(禮部郎中起居注知制誥)에 올랐고 

국자좨주한림시강학사(國子祭酒翰林侍講學士)를 거쳐 1230년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를 지냈다. 

한때 위도(渭島)에 유배되기도 했지만 얼마 안 있어 복직되었고, 1237년에는 수태보문하시랑평장사

(守太保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다.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의 전성기를 누리던 때 벼슬이다.

 

   이런 그의 행적이 오늘날까지 처신에서의 논란을 불러일으킨다. 1970~80년대의 대표적인 논객인 

평론가 김현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규보로 대표될 수 있는 무인정권하의 기능적 지식인은 권력에 대한 아부를 유교적 이념으로 

호도하며, 그것을 유교적 교양으로 카무플라지한다. 가장 강력한 정권 밑에서 지식인들은 

국수주의자가 되어 외적에 대한 항쟁의식을 고취하여 속으로는 권력자에게 시를 써 바치고 

입신출세의 길을 간다. 그가 입신출세하는 한, 세계는 여하튼 태평성대다.”

 

  한마디로 권력에 아부한 지조 없는 문인이라는 평가이다. 그에 반대되는 입장에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무신정권에서 벼슬을 하는 것을 주저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기회가 오자 당당하게 나아가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최씨정권의 문인들 가운데 으뜸가는 위치를 차지했다. 

그 점을 두고 이규보를 낮게 평가하려는 견해는 수긍하기 어렵다. 벼슬을 해서 생계를 넉넉하게 하자는 

것은 당시에 누구에게나 공통된 바람이었다. 정권에 참여해 역사의 커다란 전환에 기여하고자 한 것이 

잘못일 수 없다. 무신란이 중세전기를 파괴한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규보는 중세 후기를 건설하는 

방향을 제시했다.”

 

    국문학자 조동일의 평가이다. 학계의 일각에서 나오는, 몽골 항쟁에 강한 영도력이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정권에 협조했다고 보는 시각과 궤를 같이 한다.

 

    실상 문인 관료를 척결하고 일어선 무인정권에서는 국가 사무 특히 외교 문서를 맡아 할 전문 관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과거 정권에 때 묻지 않은 사람을 찾으려는 풍조는 오늘날도 마찬가지 아닌가. 

문인이라곤 시골의 서당 선생 하나도 남기지 않고 내몰아 버린 무인정권으로서는 정신 차리고 보니 

중국에 보낼 공문 하나 만들기 어려웠다. 그런 그들에게 새로운 문인, 자신들에게 거부감을 갖지 않는 문인, 

과거 문인에 뒤지지 않을 실력이 갖춰진 문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거기서 이규보가 나타났다. 

그는 이 세 가지 조건을 두루 갖춘, 무인정권이 갈망하던 인재였다.


 

  새로운 세기를 건설하는 방향의 제시

 

    앞서 조동일은 이규보를 ‘중세 후기를 건설하는 방향을 제시’했다고 하였다. 새로운 세기를 건설하는 

방향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규보의 문학은 자유분방하고 웅장한 것이었다. 그것은 이미 [동명왕편]에서 보여준 바였다. 

1193년 명종23년이었다. 이 해는 곧 무인정권이 시작한 지 23년째임을 말한다. 무인정권의 두 번째 

실권자 이의민이 10년째 그 권세를 누리고 있었다. 이의민이 누구인가? 아버지는 소금과 체를 파는 

장사꾼이요, 어머니는 절에서 일하던 노비였다. 오직 힘만으로 권력을 잡고 전횡을 부리던 시절의 풍운아였다. 

살벌한 세월, 왕은 있으나 허울뿐이고, 같은 무인끼리도 더 힘 있는 자가 약한 자를 죽이는 사이, 

나라는 풍전등화와 같은 신세였다. 고려인이 그토록 사모해 마지않던 송나라는 북쪽 오랑캐에게 쫓겨 

남쪽으로 옮겨간 지 오래되었다.

 

    비극적인 시대에 태어난 이규보는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옛 영웅을 떠올린다. 

앞선 시기의 김부식이 버렸던 자료 무더기 속에서 그는 먼저 동명성왕 주몽을 만난다. 

그의 고백은 이렇게 시작한다.

 

  “처음에는 믿을 수 없어서 귀신이고 환상이라 생각했는데, 세 번 거푸 탐독하고 나니 

점차 그 근원에 이르게 되어, 환상이 아니고 성스러움이며, 귀신이 아니고 신(神)이었다.”

 

    환상이 아니며 성스러움이고, 귀신이 아니라 신이였다는 언표는 고구려가 다른 아닌 우리 민족사의 줄기에 

오롯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과, 역경을 이겨내는 슬기로운 왕의 모습을 통해 후손에게 자긍심을 심어주자는 

뜻을 품은 것이었다. 이야말로 고구려의 역사를 우리의 것으로 자리매김하고 웅변한 일대 사건이었다. 

김부식의 시대였다면 있을 수 없는 민족사의 자랑이다.

 

    이규보의 문학론은 기의(氣意)와 신의(新意)에 이르러 하나의 봉우리를 이룬다. 

기의는 기골(氣骨)와 의격(意格), 신의는 신기(新奇)와 창의(創意)를 말한다

시대적·민족적인 문제의식과 만나 바람직한 문학을 만들어야 한다는 기의는 [동명왕편] 같은 작품으로 

현실화했다. 더불어 용사(用事)로 가득한 기존의 시를 비판한 것이 신의이다. 용사는 과거의 사적이나 

시구에서 따와 시를 만드는 방법이다. 이것이 지나쳐 인순과 답습에 지나지 않는 문학으로 도배되는 

현실이었다.

 

    이규보가 재미난 비유로 쓴 ‘시에서 마땅하지 않은 아홉 가지’라는 글이 있다. 그 가운데서 

‘재귀영거체(載鬼盈車體)’‘졸도이금체(拙盜易擒體)’가 돋보인다. 

‘재귀영거’는 귀신을 수레에 가득 싣고 다닌다는 말로, 죽은 이들의 이름을 한없이 나열하는 것을 말한다. 

게다가 옛날 것은 무조건 좋다 여기고, 그다지 뛰어나지도 않은 표현을 슬쩍 훔쳐서 자기 것이라 말했다가 

금방 들통 나는 어리석음에 대해 통렬히 비난한다. ‘졸도이금’이다. 이것은 바로 지나친 용사에 대한 비판이고, 

여기에서 신의로 새로운 세기를 건설하는 방향이 잡혔다.

 

    고운기 |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글쓴이 고운기는 삼국유사를 연구하여 이를 인문교양서로 

펴내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필생의 작업으로 [스토리텔링 삼국유사] 시리즈를 계획했는데, 

최근 그 첫 권으로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을 펴냈다. 이를 통해 고대의 인문 사상 역사를 아우르는 

문화사를 쓰려 한다.

 

 

  이규보를 위한 변명

 

    우리 역사를 빛낸 천재를 꼽는다면, 아마도 고려의 천재문인 이규보(1168~1241)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것이다. 이규보의 공인된 별명은 ‘주필(走筆) 이당백(李唐白)’이다.(<청장관전서> 등) 

당나라 천재시인 이태백에 빗댄 것이니, 영광스러운 별명이었을 것이다. 또 ‘걸음이 빠르고, 말이 빠르며 

시를 빨리 짓는다’ 해서 ‘3첩(捷)’이란 별칭을 갖고 있었다.(<동국이상국집>)

 

    ‘백운거사’란 호를 갖고 있으며, 어릴 적부터 ‘기동(奇童’)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심지어는 스스로 “색마(色魔)는 털어버렸지만 주마(酒魔)와 시마(詩魔)는 버리지 못했다”고 

자랑삼아 한탄하기도 했다. 최고 실력자 최충헌도 “만취상태로 일필휘지로 40여 운이나 시를 짓는 

이규보를 보고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고 하니….

 


  상반된 평가

 

    그러나 조선의 실학자 이덕무의 ‘이규보 평’은 사뭇 다르다. “과거에 급제한 후 최충헌에게 ‘

아부하여’ 한림에 제수되고…. 그의 시는 기발하고 간절한 지취가 전혀 없고, 추솔하고 산만하여 

명실이 꼭 맞지 않았다.”(<청장관전서>)

 

    이덕무는 왜 그런 각박한 인물평을 실었을까. 하기야 이규보의 행적을 보면 이덕무 등의 인물평이 

틀렸다고 단정할 수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규보는 그저 전형적인 ‘생활인’이자, 자신의 입신양명에 

전력투구한 ‘보통사람’이었으니. 어릴 때부터 과거합격에 목숨을 걸어 개인과외 교습까지 받았지만 4수 

끝에 합격했다. 이후엔 이덕무의 말마따나 모든 학맥과 인맥, 혈맥까지 동원, ‘구직’에 목숨을 걸었고, 

급기야 군부독재에 아부했던 속물이라는 평도 들었으니까.

 

    장편 대서사시인 <동명왕편>을 지었고 시만 8천편이나 남겼다는 대시인 이규보와, 일류병과 출세병에 

걸려 평생을 살아온 이규보,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동국이상국집 4수생이자 백수 이규보

 

    어릴 때부터 ‘기동’ 소리를 들었던 이규보는 지방 향리가문 출신이었다. ‘과거’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다. 

교육열도 대단했다. 아버지(이윤수)는 14살이 된 ‘영재아들’을 ‘문헌공도’에 입학시켰다. 해동공자 최충이 

설립한 ‘문헌공도’는 당시 12대 명문사학(12공도) 가운데서도 첫 손으로 꼽히는 최고명문이었다.

 

    “양반자제들 중 과거에 응시하려는 자는 반드시 문헌공도에 입학했다”(<고려사> ‘선거지·사학’)는 

기록이 있으니…. 이규보는 두각을 나타났다.‘문헌공도’가 마련한 ‘하과(夏課·여름철 합숙 과외)’에서 

치르는 ‘급작(急作)에서 거푸 1등을 차지했다. 급작은 ‘각촉부시(刻燭賦詩)’, 즉 ‘촛불에 눈금을 그어놓고 

그 곳까지 타들어갈 때까지 시를 짓는 시험’이었다. 일종의 ‘수능모의고사’라 할까. 모의고사 수석을 

거푸 차지한 아들을 둘러싼 집안의 기대는 하늘을 찔렀다.

 

    아버지(이윤수)는 1183년 5월에 열릴 과거(국자감시)를 위해 과외선생까지 붙였다. 

예비고사 격인 국자감시에 합격해야 본고사(예부시) 응시자격을 얻게 되므로 그야말로 전력투구했을 

것이다. 과거에 임박, 과외를 구했으므로 아마도 ‘족집게 고액과외’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규보는 

3번이나 낙방의 고배를 마시고 만다.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1189년(명종 19년)의 과거를 앞두고 

이름까지 바꾸었으니 말이다.

 

    이규보의 원래 이름은 인저였다. 그런데 어느 날 꿈에 규성(奎星)이라는 노인이 찾아와 

장원급제 소식을 알려주었다(報)고 해서 ‘규보(奎報)’로 개명했다. 개명 덕분인가. 

이규보는 4수 만에 수석합격의 영예를 얻었다. 나이 22살 때였다. 당시 고려의 국자감시 

급제평균연령이 18.6세였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늦깎이 합격’이었다. 

이듬해인 1190년(명종 20년) 본고사인 예부시 제술과(문학적인 능력을 가리는 분야)에 도전한다.

 

    그는 60여일간 절(홍원사)에서 머물며 과거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그 결과 예비고사(국자감시)와는 

달리 첫 도전에서 합격의 영예를 안았다. 그러나 성적은 합격자(제술과 30명, 명경과 5명, 은사 7명) 

가운데 ‘동진사(同進士)’였다. 합격자의 성적은 ‘갑과’, ‘을과’, ‘병과’, ‘동진사’ 등 네 단계로 나뉘었는데, 

동진사는 최하위권이었다. 이규보로서는 대실망이었다.

 

    그는 “차라리 합격을 반려하겠다”고 ‘예비고사 수석’의 자존심을 내세웠다. 그러나 아버지는 

“무슨 전례 없는 짓이냐”고 호통을 쳤다. 우여곡절 끝에 과거의 관문을 모두 통과한 뒤 유유자적의 

삶을 살았다. 스스로 ‘백운거사(白雲居士)’라 일컬으며, 개성 인근 천마산의 초당에 머물었다. 

하지만 ‘백수생활’이 3년 넘게 이어지자 점점 초조해졌다.

 

   “동문들은 모두 잘 나가는데 나만 뒤처졌구나. 세월만 자꾸 흐른다.”(<동국이상국전집>)

 


  눈물겨운 구직활동

 

   초조해진 이규보는 당시 국자감시 좌주(시험총감독)였던 유공권에게 “추천해달라”는 ‘구직시’를 보낸다. 

“골짜기서 나온 꾀꼬리 아직 그대로 나직이 돌면서 차츰 큰 나무에 내립니다. 원컨대 긴 가지 하나 빌려주소서.”

 

  “긴 가지 하나 빌려달라(借一長條)는 것은 자신을 명종 임금에게 추천해달라는 소리다. 구직을 위한 

몸부림은 눈물겨웠다. 1197년 판이부사 조명인 등 4명에게는 “지방관이라도 좋으니 ‘시험삼아’ 벼슬 한자리 

내달라”는 시까지 보낸다. 32살이 되던 1199년(신종 2년), 드디어 최고실력자 최충헌과의 1대1 면접을 통과, 

지방관(전주목사) 발령을 받는다.

 

  그러나 의욕이 너무 강했을까. 토호 및 지방민 등과의 갈등 때문에 고전했다. “전주목사 시절 탐욕스러운 

‘통판 낭장(지방관직 중 하나)’과 여러차례 갈등을 빚었다. 통판이 교묘한 중상의 말을 꾸몄다.”(‘연보’)

 

  여기에 그의 ‘지역편견’도 갈등을 부추겼다. 그의 ‘아무개 서기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깜짝 놀랄만한 

구절이 나온다. “전주는 옛 백제의 땅으로, 그 성질이 사나워 관대한 정사로는 다스릴 수 없기 때문에 

억지로 형벌을 쓴 것이지, 본심은 아닙니다.”

 

  큰일날 소리다. 아니 지역민들을 ‘백제인의 후예들’이라 해서 가혹한 형벌로 다스렸다니. 

그랬으니 지방민들이 가만 있었겠는가. 결국 부임 불과 1년 6개월만인 1200년(신종 3년) 12월 

파직되고 만다.


 


  군사정권에 아부한 이규보

  송나라 때 본격 시작된 과거시험

 

    이규보는 이후에도 면직-복직-탄핵-면직-유배성 좌천 등의 곡절을 겪었다. 그러다 최충헌 사후 

든든한 후원자 최우가 등장하자(1220년·고종 7년) 탄탄대로를 달리게 된다. 최우는 이규보의 재능을 

높이 샀던 것 같다. 최우와 이규보의 일화가 하나 있다. 최충헌 생전인 1213년의 일이다.

 

    “최우가 아버지 최충헌에게 ‘이규보의 재주를 시험해보라’고 권했다. 최충헌은 마땅찮게 여겼지만 

마지못해 이규보를 불렀다. 최우는 ‘이 사람(이규보)은 술에 취해야 시를 짓는다’면서 이규보에게 술을 

취하도록 마시게 했다. 최충헌이 때마침 뜰에 뛰놀던 ‘공작’을 시제로 삼았는데 40여 운이 이르도록 

붓을 멈추지 않았다. 최충헌은 감탄하여 눈물까지 흘렸다.”(‘연보’)

 

    이규보는 최우의 비호 속에 승승장구한다. 보문각대제(정5품)-태복소경(종4품)-장작감(정4품)

-국자제주(정4품)-관위위사(정3품)를 거쳤다.1227년(고종 14년) 임금 앞에서 술에 취해 부축을 받고 

퇴장하는 바람에 대간들의 탄핵을 받았지만, 최우의 비호로 사면되기도 했다. 69세가 

된 1236년(고종 23년)에는 퇴직을 청하는 걸사표(乞辭表)를 올렸다. 그러자 최우가 나서 반려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던진다. 


“(이규보가) 호적 나이를 줄이지 않았나요. 아직 그만둘 나이가 아니니 출근하세요.”

 

    얼마나 끔찍하게 생각했으면 호적 나이 운운하면서까지 사표를 반려했을까. 그러나 이규보는 

이때만큼은 관직에 집착하지 않았다. 세 차례나 더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린 끝에 70세의 나이로 은퇴했다.

 

    돌이켜보면 안타까운 대목이 많다. 이규보가 출세를 구하지 않고 그저 유유자적하며 자신의 재능만을 

발휘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마디 하겠다.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그에게 돌을 던지라고. 과거와 관직을 

최고의 가치라 여겼던 풍토에서 일신의 안녕을 팽개치고 유유자적하는 것이 과연 절대선인가. 아닐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규보의 실수가 하나 있다. 너무 많은 글을 남겼다는 것이다. 그는 <동국이상국집>에서 

전해지는 2천여 편에서 너무도 숨김없이, 꾸밈없이 자신의 속내를 드러냈다. 너무 솔직하게 자신의 속내를 

보여준 것, 그것이 바로 이규보의 실수였던 것이다. 나이 일흔에 접어들 때 후세 사람들을 위해 남긴 말이 

있다. 자신(이규보)을 너무 책망하지 말라는 것이다.

 

  “60여 년 세월의 부침이 이 한 몸에 담겼으니~ 무릇 내 자손들은 못난 내 모습을 비웃지 마라. 

단지 그 마음만 전해주면 조상들에게도 욕됨이 없으리라.”(<동국이상국집>)

 

  글 : 이기환 경향신문 선임기자

 



      - 다음 블로그 < 이승하 : 화가 뭉크와 함께 이후 > 에서 전재 ....





지나온 암릉길 ...






고려이궁지가 있는 흥왕리, 

여차리해변의 석양












곡식을 가는 큰 갈돌받침 모양의 바위 ....

여기다 곡식을 갈면 여럿이 며칠은 밥을 지어 먹겠다.


옆에 그리 작지않은 갈돌도 하나 놓여있다.

이 갈돌로 갈려면 힘이 좀 있는 사람이나 가능하겠다.






이날 밤에는 전등사에서 열리는 삼랑성역사문화 축제의

산사음악회에 참석하다.

산사음악회와 다음날 열린 전등사 역대조사헌다례,승무공연,

영산대제의 사진들은 정리가 끝나는대로 올려드릴 예정입니다.



전등사 탑등(塔燈)




아래의 사진들은 2014. 9. 18일(목요일) 강화도 여행시
찍은 사진들을 함께 올려 드립니다.




동막해변에서 외포리 선착장 가는 길옆에서...







식당 실내풍경이 대형유리창에 흐릿하게 반사된다.






어둠이 깃들자 꽃게잡이 배들이 불을 밝히우고....






월곶돈대(연미정 燕尾亭) 에서 ....


- 보호수 안내판 뒤의 배경이 북한땅 황해도 풍산군,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서 서해와 만나는 조강...







자주국화

- 전등사 경내에 삼랑성역사문화 축제준비로 많은 국화화분을... 






용두돈대에 전시되어 있는 조선조 후기 대포







용두돈대

- 광성보에서 약 1.5km 정도 소나무 숲길을 걸어가면 만나는

내륙인 김포평야와 강화도 사이를 흐르는 바다길인 염하(鹽河)

안으로 마치 용머리처럼 내밀은 곳에 쌓은 돈대







큰금계국






돈대내부






광성보 안해루







광성돈대 내부


대원군 시절 미국함대와 싸운 신미양요의 현장이다.








전등사 대조루 가는 길섶에 핀 석산( 일명 : 꽃무릇)







물고기 모양의 전등사 연등







석산 (꽃무릇)














전등사 대웅전 앞 계단에서 ....

삼랑성역사문화축제 준비 꽃장식







전등사 범종루







미륵반가사유상(미륵보살반가상)







정족사고 
- 전등사 경내 깊숙한 뒷편  지대가 약간 높은 곳에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