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방元曉房 이야기

2014. 10. 23. 12:25들꽃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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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천|조회 21|추천 0|2013.02.22. 17:43

본원이 주관하는 '인문학 강좌 제 4 강좌'가  2월 19일(화) 열렸다.

 다음 제 5강은 3월 세쨋주 화요일에 있을 예정이다.


   

원효방元曉房 이야기

 


    쪽빛 하늘로 밝아오는 이른 새벽에 원효(元曉 617∼686)스님과 사포성인蛇包聖人이 참선을 마친 후 차를 마신다. 청화淸話도 없이 차만 나눈다. 지저귀는 새소리에 찻물 끓는 소리만 장단을 맞춘다. 원효와 사포가 명선茗禪하던 곳.

'원효방元曉房'의 모습이 아닐까.


   "부령 현재縣宰 이 군李君과 다른 손님 예닐곱 명과 함께 원효방에 갔다. 나무사다리가 있는데 높이가 수십 층이나 되어 다리를 후들후들 떨면서 올라가니 정계庭階와 창호窓戶가 수풀 끝에 솟아나 있는 듯 했다. 간혹 호랑이와 표범이 사다리를 타고 오르려다가 결국 올라오지 못한다고 한다. 곁에 한 암자가 있는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사포성인蛇包聖人이 옛날에 머물던 곳이라 한다. 원효가 와서 살자 사포가 와서 모셨는데 차를 달여 원효에게 드리려고 했으나 샘물이 없어 딱하게 생각하던 중, 물이 갑자기 바위틈에서 솟아나왔는데 물맛이 매우 좋아 유천乳泉과 같으므로 늘 차를 달였다고 한다.

   원효방은 겨우 여덟 자쯤 되는데, 한 노승이 거쳐하고 있었다. 그는 삽살개 눈썹과 다 헤어진 누비옷에 도통한 모습이 고고하였다. 방 한 가운데를 막아 내실과 외실을 만들었는데, 내실에는 불상과 원효의 초상화가 있고, 외실에는 병 하나, 신발 한 켤레, 찻잔과 경궤經軌만 있을 뿐, 취사도구도 없고 시중드는 사람도 없었다. 그는 다만 소래사蘇來寺에 가서 하루 한 차례의 재齋에 참예參詣할 뿐이라 한다."


   고려시대의 문신이요 뛰어난 차인茶人인 이규보(李奎報1168~1241)가 1199년에 쓴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에 나오는 ‘원효방’ 이야기다.


   원효방은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개암사 뒤 울금 바위에 있는 석굴石窟로 신라의 고승 원효스님이 수도했다고 전해오는 곳이다. 개암사 경내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이다.


   신라문무왕 16년(676년)에 원효와 의상(義湘625~702)이 개암사에 와서 이 사찰을 중건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곳에서 원효가 기거했음을 알 수 있다.

   아마 신라의 삼국통일 후 나라가 망한 백제인들의 마음을 불법으로 달래기 위해 잠시 머물렀는지 모른다. 어쩌면 증오와 분열, 미움과 갈등, 고통과 절망, 대립과 투쟁의 시대를 이제 마무리하자고 몸소 백제 땅에서 화쟁사상和諍思想을 실천했는지도 모를 터.


   개암사 뒷산에 있는 울금 바위에는 남·북·서 세 곳에 석굴이 있는데 북쪽의 석굴은 세 곳 중 제일 협소하며 백제부흥운동 당시 군사들을 입히기 위해 베를 짰다 해서 베틀굴이라 전해오고 있으며, 서쪽의 석굴은 가장 큰 굴로 역시 백제 부흥운동의 지도자인 복신(福信?~663)이 병을 핑계로 나오지 않았던 굴이라 하여 복신굴이라고 불렀다 한다. 안쪽에는 옥천玉泉이라 부르는 석간수가 사철 내내 가뭄이 들어도 나온다고 한다. 사람들은 원효샘元曉泉이라 부른다.

남쪽의 굴은 바위절벽 중간에 위치하고 있는데, 땅에서 20m 정도 되는 암벽중간에 있어 사다리가 없이는 도저히 오를 수가 없는 곳이라고 옛글은 말하지만, 지금은 벼랑 사이로 좁디좁은 길을 따라 아래는 아득한 낭떠러지인 암벽에 기대고 의지하여 겨우 찾을 수 있다. 석굴의 크기는 6∼7 평 정도이고, 이 석굴 바로 옆에 3평 크기의 또 하나의 석굴이 있다. 석굴에서 바라보면 첩첩산중 변산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와, 세 곳의 석굴 중 가장 경관이 뛰어나고 또한 종일 햇볕을 받을 수 있는 이곳이 원효방이다.


   원효방 이야기엔 ‘감천설화甘泉說話’가 나온다. 차 문화를 논할 때 대표적인 유적 중의 하나가 차의 몸體인 찻물의 원천인 석간수石間水다. 이 감천설화에 등장하여 원효스님께 차茶 시중을 들던 뱀복(蛇包, 蛇福)은 사포성인蛇包聖人이라 부른다. 사포가 차를 달여 스님께 드리려고 했으나 샘물이 없어 안타까워하던 중 바위틈에서 물이 갑자기 솟아났다고 했는데 과연 우연의 일치였을까. 그 유천은 그가 도력으로 바위틈에서 물줄기를 찾았을 샘물이었으리라. 그 사포는 누구였을까.

『삼국유사三國遺事』가 전하는 뱀복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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