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들이 머문 다도 정신의 발자취를 찾아서

2014. 10. 26. 00:48차 이야기






       

신라 차문화의 재발견 ①


화랑들이 머문

다도 정신의 발자취를 찾아서


김태경(대경대학교 교수)

 

1. 화랑정신이 다도 정신에 미치는 영향

 

1) 사선(四仙)의 차 유적지


   사선은 영랑술랑안상남석행을 말하며 신라 때의 네 국선(國仙)이다. 조선 후기 홍만종(洪萬宗, 1643~1725)의 《해동이적》에서 신라사선은 영랑·술랑·안상·남석행이고, 사선들은 모두 영남 사람 또는 강원도 동해안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이들 사선의 수행요목으로 고안된 야외용 다구·석지 유물들, 고려 시대 문인들의 시문과 이곡(李穀, 1298~1351)의 《동유기》 <기행문>에서 한송정과 경포대가 차 유적지임을 고증할 수 있다. 이곡이 경포대에 유람을 가서 보니 예전에는 건물이 없었는데, 풍류를 좋아하는 자가 그 위에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또 옛날 신선의 유적(石竈, 돌 부엌)이 있었다 하였다. 한송정 역시 사선이 노닐었던 곳으로 지금은 오직 석조(石竈)·석정(石井)이 그 옆에 남아 있는데, 이것 역시 사선이 차를 달일 때 썼던 것들이라고 전해진다. 그 당시 사선은 국선으로 화랑의 우두머리이나 수련장은 화랑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공용으로 자유롭게 사용했던 차 유적지임을 이곡의 《동유기》를 통해 알 수 있다.

    한송정의 석지조 모양은 1337년 이제현(李濟賢, 1287~l337)이 《묘련사 석지기(妙蓮寺石池記)》에 삼장순암 법사가 한송정을 구경하면서 본 다구 석지조 형태가 개성 묘련사 풀숲에 있었던 것과 같다고 남긴 기록에서 신라 시대 사선들의 다구가 있었음을 고증할 수 있다. 다구는 기능성을 고려하여 차를 달이는 화덕[石臼]과 다기를 씻을 수 있는 석지(石池)와 함께 편리하게 쓸 수 있도록 나란히 만든 독창적인 야외 다구로 고안된 특성이 있다. 이러한 또 다른 특성을 가진 야외 휴대용 앵통은 국선이었던 충담이 미륵세존에게 올릴 차 공양 다구가 담긴 것으로 산천유오에 알맞게 휴대용으로 제작한 것이다. 한송정과 경포대의 다조는 육우가 760년에 기록한 《다경》의 다구보다 앞선 시기이므로 육우의 다구와는 무관하다. 화랑들의 다도수련은 실내가 아닌 야외 수련장에서 이루어졌으며, 자유롭게 이동하지 못하도록 다구의 위치를 큰 돌덩어리를 다듬어 기능성과 특성을 가진 반영구적인 석지조를 고정하여 놓은 것이다. 화랑들의 다도는 마음과 행실을 바르게 닦아 수양으로 아름다운 육체에 아름다운 정신이 깃든다는 영육일치사상과 상통한다. 도는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또는 종교적으로 깊이 깨우친 이치와 그런 경지 등을 행하는 방법으로 차가 매개체가 되어 다도로 구성되어 차를 달이거나 마시는 것을 곧 심신 수련의 목적으로 삼았던 것이다.

 

 

2) 화랑의 기원


   화랑의 기원을 원시 삼한 시대의 청년집회로 보았고,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에 ‘근원은 《선사(仙史)》에 자세히 실려 있거니와…’라고 적혀 있으나 문헌인 《선사》가 없어 기원을 알 수가 없었으나 김해 지방에서 1989년에 발견된 성덕왕(聖德王, ?~737) 때 귀족학자인 진골 귀족 가문 출신 김대문의 《화랑세기》 서문에 기원에 관하여 기록하기를 다음과 같다.
   ‘화랑은 선도이며, 신라에서 신궁을 받들고 하늘에 큰제사를 행하는 것은 마치 연(燕)의 동산이나 노(魯)의 태산과 같다. 옛날 연 부인이 선도를 좋아하여 많은 미인을 길렀는데 이름을 국화라 하였다. 그 풍습이 동쪽으로 흘러들어, 우리나라에서는 여자로서 원화를 섬기게 되었으나 서로 질투하여 죽이게 되자 참하고 지소태후가 원화를 폐하는 대신 화랑을 설치하여 국인들로 하여금 그들을 받들게 하였다. 이에 앞서 법흥대왕이 위화랑을 사랑했는데, 화랑이라 불렀다. 화랑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비롯하였다. 옛날에 선도는 단지 신을 받드는 일을 위주로 했는데, 국공들이 화랑도에 들어간 후에 선도는 도의를 서로 힘썼다.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로부터 빼어났고 훌륭한 장군과 용감한 병졸이 이로부터 나왔다. 화랑의 역사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花郞者 仙徒也 我國奉神宮 行大祭于天 如燕之桐山 魯之泰山也 昔燕夫人好仙徒 多畜美人 名曰國花 其風東漸 我國以女子爲源花 只召太后廢之 置花郞 使國人奉之 先是法興大王愛魏花郞 名曰花郞 (花郞)之名始此 古者仙徒只以奉神爲主 國公列行之後 仙徒以道義相勉 於是賢佐忠臣 從此而秀 良將勇卒 由是而生 花郞之史不可不知也]. 지소태후가 원화를 폐지하고 선화를 화랑으로 삼았던 그 무리를 풍월이라 하였고, 그 우두머리를 풍월주라 하였다. 위화공이 풍월주가 되고, 공이 부제(副弟)가 되었다. 얼마 안 있어 공(위화랑)이 풍월주가 되었다[太后乃廢源花 以仙花爲花郞 號其衆曰風月 號其頭曰風月主 魏花公主之 公副之 未幾公主之]. 화랑의 기원은 원화에서 시작되었다. 진흥왕이 7세에 즉위하여 모후인 지소태후가 섭정하여 국정을 맡으며 화랑을 설치하게 되었는데, 공(1세 위화랑)을 그 우두머리로 삼아 풍월주라 하였다[以公只召太后當國而置花郞 以公爲其首 號曰風月主]. 진흥왕이 다시 나라를 크게 일으키려면 먼저 풍월도를 일으켜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다시 명령을 내려 양가(良家)의 남자로서 덕이 있는 사람을 뽑아 이름을 화랑이라 하고, 처음 설원랑을 받들어 국선을 삼으니 이것이 화랑국선의 시초였다. 제1대 국선이었던 설원랑의 비석은 명주(溟州, 지금의 강릉)에 세웠다 한다. 명주를 비롯한 동해안 일대가 설원랑의 순례지임을 기념하여 화랑들 무리가 비를 세운 것인지도 모른다 하였다. 효소왕(孝昭王, 692~702) 때 동해안 삼일포와 경포대·총석정·한송정에서 머문 사선 영랑, 부례랑 등의 비(碑)가 있었다고 전하나 위치는 알 수 없다. 강릉은 옛 명주로 오대산 아래에 있다. 오대산은 금강산 설악산과 함께 관동의 3대 명산이다.’


   국선은 화랑 단체의 우두머리로 국왕이 받드는 국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이 제도의 단체 안에는 국선과 화랑, 낭도가 있었고, 화랑의 우두머리인 국선을 보좌하고 화랑도의 교육과 자문을 담당하는 승려낭도가 있었다. 국선과 승려를 구별할 때 국선은 이름 끝에 스승 사(師)를 붙이고 지칭할 때는 월명사·충담사라 하며, 승려는 풀 석(釋)자를 붙인다.
576년 지소태후에 의해 국가적 조직으로 편성되어 서라벌 중앙군의 보조적 군사조직 역할을 하였다.

 

 

3) 화랑도의 제도와 목적


   화랑도는 신라 때 청소년으로 조직되었던 수양단체이며, 국선도·풍월도·원화도·풍류도라고도 한다. 화랑을 중심으로 많은 청소년을 모아 군사 훈련을 하고 도의를 연마시켜 인재를 양성하던 화랑 제도와 목적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타난다.
   ‘처음에는 임금과 신하들이 인재를 알아낼 수 없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고 여럿이 모여 서로 어울리도록 하고, 그들이 바른 일을 행한 것을 본 후에 천거하여 임용하기로 하였다[初君臣病無以知人, 欲使類聚群遊, 以觀其行義, 然後擧而用之]. 진흥왕 37년 봄, 처음으로 원화 제도를 두었으나 무리들이 화목하지 못하여 해산하였다. 그 후 다시 미모의 남자를 뽑아 곱게 단장시켜, 화랑이라 부르게 하고 그를 떠받들게 하였다. 그러자 무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언제나 서로 도의를 연마하고, 언제나 노래와 음악을 즐기면서 산수를 찾아 유람하여, 먼 곳이라도 그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인품의 옳고 그름을 알게 되었으니, 그중에서 선량한 인물을 택하여 조정에 추천하였다[三十七年春, 始奉源花. 徒人失和罷散. 其後, 更取美貌男子, 粧飾之, 名花郞以奉之. 徒衆雲集, 或相磨以道義, 或相悅以歌樂, 遊娛山水, 無遠不至. 因此 知其人邪正, 擇其善者, 薦之於朝].’


   화랑도의 조직 목적은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다. 특히 선종에서 차는 수마를 쫓고 정신을 맑게 해주는 효능이 있어 저녁은 금식시키고 차 마시는 것은 허락하였다. 선법을 닦는 것은 선종 수행의 종취로 삼았다. 수행요목 중 화랑들에게 심신수련과 품성을 가꿀 수 있는 정서적인 교양 과목으로 다도를 삼았다. 외형미 못지않게 중요한 내면의 인격도야 목표를 위해 다도를 매개체를 삼았던 것은 유·불·선을 숭상한 화랑들에게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그때 화랑의 연령은 14~15세에서 17~18세이다.
화랑들이 3년 수련기간에 습득할 것을 맹세한 기록이 <임신서기석> 비문에 보인다. 임신년(552~612) 6월 16일 신라의 두 화랑이 학문에 전념할 것과 국가에 충성할 것을 맹세한 내용으로 총 74자의 한자가 새겨져 있다, ‘지금부터 3년 이후에 충도를 지니고 지키며 과실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약 이를 어기면 하늘로부터 큰 벌을 얻을 것을 맹세한다. 만약 나라가 불안하고 세상이 크게 어지러워져도 모름지기 실행할 것을 맹세한다. 또 따로 지난 신미년 7월 22일에 크게 맹세하기를 시·상서·예기·춘추좌전을 차례로 3년 동안 습득할 것을 맹세한다[壬申年六月十六日 二人幷誓記 天前誓 今自三年以後 忠道執持 過失无誓 若此事失 天大罪得誓 若國不安大亂世 可容行誓之 又別先辛末年 七月卄二日 大誓 詩尙書禮傳倫得誓三年].’ 화랑들은 유교경전 습득과 실천을 목표로 경전을 통하여 교양을 쌓았고 지식을 습득하여 충도(忠道)를 지키며 사회적·정서적·신체적·군사적인 경험을 체득하였다.


   특히 세속오계는 <충(忠)·효(孝)·신(信)·용(勇)·인(仁)>의 덕목을 화랑의 정신으로 삼으며, 유교사상의 지도이념과 호국 불교의 성격을 가졌다. 세속오계를 화랑정신으로 삼게 된 연유는 《삼국사기》 <열전 귀산(貴山)> 조에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당시에 원광 법사가 수나라에 유학을 다녀와서 가실사에 있었는데 그때 사람들이 그를 높이 예우하였다. 귀산은 사량부 사람으로서 같은 부의 추항을 벗으로 삼았다. 두 사람은 서로 말하기를, “우리가 선비나 군자와 함께 교유하기를 기대하면서도,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지 않는다면 아마도 욕을 당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어찌 어진 사람 옆에서 도를 배우지 않겠는가?” 귀산 등이 거처에 가서 구의하고 말하기를, 속세의 선비가 어리석고 몽매하여 아는 것이 없으니 한 말씀 해 주시어 평생의 계명으로 삼게 해달라고 하였다. 법사가 말했다. “불가의 계율에 보살계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열 가지로 구별되어 있으나 그대들이 남의 신하로서는 아마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 세속오계가 있으니, 첫째는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는 것이요, 둘째는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는 것이요, 셋째는 벗을 신의로 사귀는 것이요, 넷째는 전쟁에 임하여 물러서지 않는 것이요, 다섯째는 살아 있는 것을 죽일 때는 가려서 죽여야 한다는 것이니, 그대들은 이를 실행함에 소홀하지 말라!”[貴山 等 詣門, ○衣進告曰: ‘俗士○蒙, 無所知識, 願賜一言, 以爲終身之誡.’ 法師曰: “佛戒有菩薩戒, 其別有十, 若等爲人臣子, 恐不能堪. 今有世俗五戒, 一曰事君以忠, 二曰事親以孝, 三曰交友以信, 四曰臨戰無退, 五曰殺生有擇, 若等, 行之無忽”].’


   원광(圓光. 555~638) 법사가 589년에 진나라에 들어가서 불법을 구하고 600년에 귀국하여 창건한 가실사(加悉寺, 청도 운문사)는 화랑정신의 발원지이다. 그 후 602년 8월에 백제군이 침입하여 귀산과 추항에게도 소감(少監) 벼슬을 내려 백제군과 싸우게 하였다. 싸우고 돌아오던 중 죽어 왕은 군신들과 함께 예를 갖추어 장사지내고 벼슬을 내렸으며, 세속 5계는 화랑도의 실천 강목으로 삼아 삼국 통일의 원동력이 되었다.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여기에서 나왔다고 김대문이 《화랑세기》에 기록한 바와 같이 진덕왕과 태종, 문무왕, 신문왕 4대에 걸쳐 재상으로서 나라를 안정시켰다. 화랑의 정신은 신라 고유사상과 중국의 영향을 받은 유, 불, 선의 사상을 포함하여 세속오계와 문무를 겸한 인재를 양성하는 특수한 교육제도에서 나온 것이다. 진흥왕 시대부터 화랑들은 한송정과 경포대에서 다도를 수련했던 신라 다도의 주역들이며, 화랑의 주역들에 의해서 화랑다도가 성립하였다. 다도 정신의 사상적인 배경에는 <난랑비 서문>에 보이듯이 고대 신선사상과 삼교를 포함한 공자, 노자 석가의 교화 등이 포함되어 있다. 


   화랑의 제도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와 《화랑세기》를 보면 ‘화랑은 선도이다. 우리나라에서 신궁을 받들고 하늘에 제사를 행하는 것은 마치 연(燕)의 동산·노(魯)의 태산에서 한 것과 같다. 옛날 연부인이 선도를 좋아하여 많은 미인을 길렀는데 이름을 국화라 하였다. 그 풍습이 동쪽으로 흘러들어, 우리나라에서는 여자로서 원화를 삼게 되었다. 지소태후가 원화를 폐하고 화랑을 설치하여 국인들로 하여금 받들게 했다. 이에 앞서 법흥대왕이 위화랑을 사랑하였는데, 화랑이라 불렀다. 화랑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비롯하였다. 옛날에 선도는 단지 신을 받드는 일을 위주로 하였는데, 국공들이 무리(화랑도)에 들어간 후에 선도는 도의를 서로 힘썼다. 이에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로부터 빼어났고 훌륭한 장군과 용감한 병졸이 이로부터 나왔다[花郞者仙徒也 我國奉神宮 行大祭于天 如燕之桐山 魯之泰山也 昔燕夫人好仙徒 多畜美人 名曰國花 其風東漸 我國以女子爲源花 只召大后廢之 置花郞 使國人奉之 先是法興大王愛魏花郞 名曰 花郞 花郞之名始此 古者 仙徒只以奉神爲主 國公列行之後 仙徒以道義相勉 於是 賢佐忠臣 從此而秀 良將勇卒 由是而生].’


   최초의 화랑은 제1대 풍월주인 위화랑이다. 가장 이른 시기의 화랑은 《삼국사기》 <열전>의 사다함이다. 그는 진골 출신계이자 내물왕(奈勿王, ?~402)의 7세로 본래 높은 가문의 귀한 자손이며, 당시 사람들이 그를 화랑으로 받들기를 청하여 화랑이 되어 진흥왕 562년에 가야국 정벌에 큰 공을 세웠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화랑의 기록 중 차이가 나는 부분이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국선이라는 용어가 없다. 《삼국유사》 <미륵선화·미시랑·진자사> 조에서도 국선들의 자취를 찾을 수가 있다. ‘다시 영을 내려 양가의 남자 중에 덕행이 있는 자를 뽑아 고쳐 화랑이라 하고, 처음으로 설원랑을 받들어 국선으로 삼았다. 이것이 화랑국선의 시초이다[更下今 選良家男子有德行者. 改爲花娘. 始奉薛原郞爲國仙. 此花郎國仙之始].’

 


 
4) 경덕왕과 월명사(月明師)


   경덕왕(景德王, 742~765)은 여러 제도를 당나라식으로 고쳤으며, 국내의 지명을 한자식으로 고쳐 당나라의 문화 문물을 받아들였다. 국선 출신이었던 월명사의 향가 <도솔가>와 충담의 <안민가>는 경덕왕의 요청에 의하여 지은 것이다. 신라 사람이 숭상한 향가는 대개 시(詩), 송(頌) 같은 것으로 이따금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켰다. 
진감(眞鑒, 774~850) 국사가 애장왕 804년에 중국 당나라에 유학 가서 남종선과 범패를 전수받고 돌아와 불교 음악을 대중화시켰으며, 그 당시 절에서 제를 지낼 때 부르는 불교 의식 범패와 차 풍습은 최치원이 교지를 받들어 지은 대공탑비석글에 기록되어 있다. 


   《삼국유사》의 <월명사 도솔가> 조에 의하면 ‘경덕왕 19년(790) 4월 초하루에 해가 둘이 나란히 나타나서 열흘 동안 없어지지 않으니 일관이 아뢰었다. “인연 있는 중을 청하여 산화공덕을 지으면 재앙을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조원전에 단을 정결히 모으고 임금이 청양루에 거동하여 인연 있는 중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때 월명사가 긴 밭두둑 남쪽 길을 가고 있었다. 왕이 사람을 보내서 그를 불러 단을 열고 기도하는 글을 짓게 하니 월명사가 자신은 국선의 무리에 속해 있기 때문에 겨우 향가만 알 뿐이고 성범(聲梵)은 익숙하지 못한다 하였다. 왕이 이미 인연이 있는 중으로 뽑혔으니 향가라도 좋다 하기에 월명이 <도솔가>를 지어 바쳤다[王使召之 命開壇作啓 明奏云 臣僧但屬於國仙之徒 只解鄕歌 不閑聲梵 王曰 旣卜緣僧 雖用鄕歌可也 明乃作兜率歌賦之]. 그런 후에 이내 해의 변괴가 사라졌다. 왕이 이것을 가상히 여겨 품다(品茶) 한 봉과 수정염주(水晶念珠) 108개를 하사했다[王嘉之 賜品茶一襲 水精念珠百八箇]. 당나라 중기 이후 차를 품평하는 바람이 일기 시작하였다[中唐之後 隨著品茗風氣興盛].’


   신라는 경덕왕 때 당나라의 품다 풍습이 보이나 투다의 기록은 보이지 않고, 고려 시대 문신인 이연종(李衍宗)의 <차를 주신 박치암에게 사례하며(謝朴恥庵惠茶)> 시 구절에 차 겨루기 명전(茗戰)이 보일 뿐이다. 당나라 문인들과 부호가들의 품다는 취미생활과 예술로 발전하여 문인·시인·선승들은 다사(茶事)를 시제(詩題)로 서로 다투어 시를 읊었다[茶事成爲文人 詩人 禪僧競相吟詠的材題]. 문인 묵객들에게 음다 풍속이 빠르게 유행하게 되었다. 품다(品茶)가 두다(斗茶)로 발전한 것도 당대이다. 당나라 현종(唐玄宗, 685~762)이 매비와 처음으로 시작한 꽃 겨루기 화투(鬪花)와 차 겨루기 투다(鬪茶)가 있다. 당나라 풍지(馮贄)의 《운선잡기》에 ‘건안(푸젠성) 사람들은 투다를 명전이라고 한다. 교전 때 세 가지 훌륭한 점을 서로 다투는데, 차·물·찻그릇이 우수하면 승리한다. 두다(斗茶)의 유래는 당대 궁궐에 공다(貢茶)하기 위해 차의 우량을 구분하는 행사에서 차를 품평하고, 기교를 다투어 점다 솜씨를 자랑하는 오락으로 유관(留官)과 유지들이 주관하여 투다 문화가 형성되었다.’

<차의 세계> 12월호 참고

 

 

기사 작성일 : 12/3/2010 2:13:39 P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