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흥덕왕興德王과 왕의 녹차
최정간(도예가, 하동 현암도예연구소) 장보고의 발탁과 청해진 설치 통일신라 하대에서 가장 위대한 군주를 꼽는다면 신라 41대 흥덕왕(서기 776~836)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우리 역사에 있어서 흥덕왕의 위대한 업적은 서기 9세기, 세계해양무역지도에서 한국을 최초로 표기한 불세출의 해상무역왕 장보고(張保皐)의 발탁과 청해진(淸海鎭)의 설치이다. 흥덕왕의 바다로 향한 해외무역의 개척 정책은 바스코 다 가마를 후원하여 서양의 대항해시대를 개척한 포르투갈의 엔리케(henrique) 왕자보다 무려 600년이나 앞선 일이었다. | 흥덕왕릉 귀부 부근에서 발견된 비단석. ‘무역지 인간’이란 문구는 흥덕왕과 청해진 장보고 대사와의 관계를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22×14cm,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
1977년 8월 국립경주박물관과 경주 사적관리사무소 당국이 경주 흥덕왕릉귀부 부근을 공동 발굴, 조사한 결과 무려 70여 점의 비편들이 발굴되었다. 이 중 20여 점에서 150자의 비문이 판독 가능하였다. 그중에는 흥덕왕 재세 시에 장보고를 통해 해외 무역을 장려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비석편이 있었다. 길이가 22cm×42cm이며 글자 크기는 2.2cm인 이 비편에는 무역지인간(貿易之人間)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 비편은 흥덕왕과 장보고와의 해외무역 관계를 증명해 주는 실증적인 고고학적 유물이다.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제10권 ‘흥덕왕 3년’조에 의하면 서기 828년 흥덕왕 3년 4월에 왕은 장보고의 요청으로 군사 1만 명을 파견해 그를 청해진 대사에 임명하였다. 세계적인 동양사학자 에드윈 오 라이샤워는 대사(大使)란 호칭을 영문으로 총독(commissioner)이라 번역해 흥덕왕의 왕권을 대리하여 지방 행정과 해외 경영의 전권을 행사한 직책이라고 해석하였다. 곧 해외 총독이란 직책인 것이다.
이처럼 장보고는 서기 9세기 우리 역사에서 가지지 못한 세계사적인 영웅이었다. 흥덕왕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청해진을 본거지로 한 그는 서남해(西南海) 일대에서 신라의 평민들을 납치하여 당나라에 노비로 판매하는 해적 일당을 소탕했다. 그리고 서해, 환중국해 등 해상권을 장악하여 멀리는 아라비아, 페르시아 지역과의 무역을 확대하여 신라의 위상을 드높였다.
그동안 한국의 역사학계는 식민지와 분단을 경험하면서 편협한 사관에 매몰되다 보니 장보고란 세계사에 우뚝 선 보석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한국학계에서는 1935~1936년 동안 김상기 박사에 의해 <진단학보> 1, 2호에 <고대 무역의 형태와 나말의 해상발전에 취하여 - 청해진 대사 장보고를 주하여 ->가 발표되었다. 1955년 라이샤워 박사에 의해 저술된 《엔닌(圓仁)의 당(唐) 여행기》1)가 출판되어 신라의 장보고 대사는 세계 역사학계 최초로 해상무역왕(Trade Prince of The Maritime Commercial Empire)이란 표현으로 위상을 떨치게 된다.
장보고는 신라의 우수한 조선술과 항해술을 바탕으로 하여 막강한 해군력을 가진 다음, 당나라의 산둥반도와 수도 창안(長安)을 연결하는 중요 무역과 해상교통권을 장악하였다. 산둥과 경항(京杭) 대운하 사이의 중요 요충지에 신라촌과 신라방을 설치하여 자치권을 행사하였다. 이것은 곧 라이샤워 박사의 학설처럼 당나라 내부에서 신라의 식민지(colony) 역할을 하였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장보고가 활약한 시대에 한·중·일 3국의 해역에서 그 어느 때보다 교역이 활발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평화가 거친 파도를 잠들게 하였다. 3국이 다양한 선진문물의 교류를 통해 각자 나름대로 훌륭한 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다. 장보고 선단을 통해 당나라로부터 신라의 가장 하이테크(hightech)인 청자 번조 기술이 전래된 것은 청자 문명의 이전이라고도 볼 수 있다. 9세기 신라 구산선문을 중심으로 한 선성들의 다선일여 선풍 진작은 많은 청자다완의 수요를 창출하였다. 1979년 서울 숭전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수학하고 있던 일본인 학생 요시오카관수케(吉岡完祐)는 전남 강진 청자 요지와 장보고 유적지가 있는 완도 청해진 유적지를 정밀 답사한 후 이곳에서 발견된 해무리굽 청자를 중국의 월주요(越州窯) 청자와 비교 연구하여 한국에서의 청자 발생이 장보고의 청해진 시대와 동일하다는 과감한 학설을 제시하였다.
그동안 긴 겨울잠을 자는 것과 마찬가지이던 한국 도자사학계는 젊은 일본학도 요시오카의 학설이 나오자 매우 당황하였다. 왜냐하면 고려청자란 이미지에 국민 모두가 너무나 깊게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청자의 발생 시기가 9세기 신라 말기로 당겨지게 되면 교과서와 모든 역사서를 수정해야 한다. 처음에는 일본인 학자 요시오카의 9세기 신라 청자 발생설을 부정하는 기류가 강했지만 지금은 한국 학계에서 장보고의 여러 가지 실증적 유물들이 중국과 한국의 유적지에서 발굴되어 9세기 중반 신라 청자의 발생설이 어느 정도 받아들여지고 있다. 필자도 요시오카의 장보고 열망에 의한 9세기 당나라의 청자 하이테크가 신라로 이전되었다는 설에 전적으로 공명하는 바이다.
장보고 시대 당나라에서 신라로 수출한 무역품은 면채, 능채, 오석능채, 능라, 서문금직물, 금포, 자포, 입금선수라치마, 금대, 은기, 동경, 금은세기, 불경, 효경, 역법, 자기, 차, 화폐 등이라고 한다.2) 장보고의 신라인들을 위한 위대한 업적들을 언급하고자 할 때, 재당 신라인들의 마음의 구심점 역할이 되어 주기 위한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의 건립을 빼놓을 수 없다.
엔닌의 《입당구법 순례행기》에는 당시 법화원의 규모와 성격, 법회를 가지는 신라인들의 모습, 그리고 차를 마시는 차회 의식[相看吃茶]이 잘 묘사되어 있다. 중국인 학자 우치공(牛致功)은 엔닌의 《입당구법 순례행기》 속에서 차에 관한 기사를 정밀 분석하여 장보고 당시 차가 예불에 사용되는 모습과 차가 정신문화와 사회 전반에 미치는 의의에 대해 <원인모하적 ‘차’(圓仁芼下的 ‘茶’)>란 훌륭한 논문을 발표하였다.3) 한국 언론매체 중에서 최초로 중국 현지의 장보고 대사 유적지를 기행답사하여 보도한 것은 <국민일보>이다. 1988년 12월 11일 <국민일보 창간 기념특집 - 장보고의 해상실크로드 ->란 제목으로 매주 1회씩 1989년 2월 25일까지 컬러판 사진과 함께 이용범, 박태근의 학술 기행문이 연재되자 국내 학계와 독자들로부터 장보고 대사에 대한 많은 관심이 일어나게 되었다. 박태근의 기행문에서도 장보고 선단의 교역품 중에 차가 포함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명으로 지리산에 차를 심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0권 신라 ‘흥덕왕 3년조’에는 12월 사신을 당에 보내어 조공하니 (당주) 문종이 인덕전에서 (사신을) 불러 보고 사연(賜宴) 사물(賜物)로 차를 내렸다. 입당사(당에서 돌아온 사신) 대렴(大廉)4)5)이 차 종자를 가지고 와 왕은 그것을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왕(신라 27대왕) 때부터 있었지만 이때에 이르러 성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의 내용은 우리나라 유일의 정사 기록인 《삼국사기》에 기록된 신라 흥덕왕의 왕명에 의해 지리산에 차나무가 심어진 연유이다.6) 위 기록을 근거로 하여 1982년 5월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쌍계사 입구에 <김대렴공 녹차시배추원비>가 세워졌다. 이 일대는 고대로부터 녹차가 생육할 수 있는 좋은 토양과 기후 등 환경조건을 겸비하고 있어 수령이 몇백 년이 넘은 고차수가 지금도 자생하고 있다. 인근에는 신라 선종의 천년 고찰인 쌍계사(雙溪寺)가 자리 잡고 있어 흥덕왕과 차나무 시배지의 인연을 더욱 깊게 하고 있다.
|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 국보 47호로 경남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쌍계사 소재. 서기 887년 건립. 전체 높이 3.63m. 신라 최치원이 비문을 지었으며, 서기 9세기 중반 신라 선승들 사이에서 행해진 선다일여의 정신과 제다법에 관해 잘 묘사가 되어 있다. |
쌍계사는 원래 신라 성덕왕 23년(서기 723) 의상 대사의 제자가 되는 삼법(三法) 화상에 의해 창건되었다. 삼법 화상은 귀국하기 전에 육조 혜능의 정상(頂相)을 모셔다가 삼신산의 눈 쌓인 계곡 위 꽃이 피는 곳에 봉안하라는 꿈을 꾸고 육조 혜능의 머리를 중국 홍주 개원사에서 훔쳐 와 오늘날 쌍계사에 모셨다. 옛날 이름은 옥천사(玉泉寺)이며 나중에 진감혜소(眞鑑慧昭) 선사에 의해 육조 혜능의 영당이 이곳에 모셔졌고 쌍계사를 조사선의 본당으로 삼으려 했다. 진감혜소 선사는 당나라에서 마조도일의 제자 창주신감(滄州神鑑) 선사로부터 인가를 받아 신라 흥덕왕 5년(서기 830)에 귀국하여 상주 장백사에 머물다가 이곳 삼법 화상이 머물던 옛 절터를 중창하여 옥천사라 하고 선풍을 드높였다.
진감혜소 선사와 흥덕왕은 각별한 사이였다. 진감선사비문에 의하면 왕은 먼저 귀국한 도의 선사와 혜소 선사를 두 보살에 비교하였다. 특히 왕은 혜소 선사에게 친히 편지를 보내며 그의 귀국을 환영하였다. 《삼국사기》 기록과 쌍계사의 진감선사비문 등을 종합해 볼 때 서기 828년에 대렴이 가져온 차 종자를 흥덕왕이 왕명으로 지리산에 심게 하고 서기 830년 혜소 선사가 당에서 귀국하여 흥덕왕의 환영을 받다가 지리산으로 와서 쌍계사 건립을 중창하고 육조 영당을 모셔 범패와 선차 의식을 함께 한 것으로 되어있다. 이러한 역사적 정황 증거로 보아 이곳 화개 골짜기가 가장 녹차 시배지로 적합하다고 볼 수 있다. 혜소 선사의 선차 정신을 잘 알 수 있는 기록이 진감선사비문에 구체적으로 남아있다.
혹 호향(胡香)을 선물하는 사람이 있으면 곧 질그릇에 화롯불을 담아 환(丸)을 짓지 않고 사르면서 나는 이것이 무슨 냄새인지 알 수 없고 마음을 정성되게 할 뿐이로다 하고, 한명(漢茗)을 바치는 사람이 있으면 곧 땔나무로 돌솥에 불을 지펴 가루로 만들지 않고 끓이면서 “나는 이것이 무슨 맛인지 알 수 없고 배를 적실뿐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곧 혜소의 능가선과 북종선 모두를 흡수하여 남종선을 바탕으로 한 마음 선법인 동시에 지리산 화개 골짜기에서 펼친 선다일여의 정신이라 하겠다. 진감혜소 선사는 신라 문성왕 12년(서기 850) 정월 9일 열반에 들었다. 세수 77세, 법랍 41세였다. <진감선사비>는 열반에 든 지 36년이 지난 신라 헌강왕 때 세우려 하였으나 헌강왕이 서거하고, 진성여왕 1년(서기 887)에 건립되었다. 비문을 짓고 쓴 사람은 당대 문장가 고운 최치원이며 이 진감선사비명은 고운의 사산비명(四山碑銘) 중 하나로 불리며 명문장으로 꼽히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차의 역사에 있어서도 서기 9세기 중반의 제다법과 음다법에 관해 잘 묘사를 하고 있어 귀중한 금석문 자료임에 틀림없다. 진감혜소 선사의 법맥은 그가 입적한 후 그 법계가 문경 봉암사를 창건한 도헌(道憲)에게 이전되었다고 <정진대사비>에 기록되어 있다. -<차의 세계> 1월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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