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계룡산鷄龍山의 분청 찻사발

2014. 10. 26. 00:30차 이야기






       

 출처; 선차닷컴 http://www.suncha.co.kr/Article/Article_View.aspx?ArticleSeq=605

조선 찻사발 이야기

공주 계룡산鷄龍山의 분청 찻사발

정충영(옛그릇연구회)

일본에 전세되고 있는 조선시대 찻사발의 산지는 주로 부산 근교(양산, 진해, 김해, 밀양 등)가 많은 편이다. 이외에 거제도, 고흥반도, 강진, 해남 일대의 분청과 청자가 남해안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이번 호에 소개하는 분청 찻사발은 위의 생산지와는 많이 떨어진 계룡산 일대에서 만든 것들이다. 일본의 기록이 맞는다면 임진왜란 이전부터 계룡산 부근에서 만든 분청 찻사발이 다회에 사용되었던 것 같다. 물론 전부는 아니다. 기록이 불분명한 것이 더 많다. 전자의 경우는 조선 전기 왜국에서 오는 사신을 접대할 때 가져간 것일 가능성이 있고 후자의 경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그리고 사무역(私貿易)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분청사기 중에 명문(銘文)이 들어있는 경우가 있다. 명문이라는 것은 관청의 이름일 수도 있고 지방명의 이름일 수도 있는데 관청의 경우 내자시(內資寺), 내섬시(內贍寺), 예빈시(禮賓寺), 장흥고(長興庫), 인수부(仁壽府), 덕녕부(德寧府), 인녕부(仁寧府) 등이 있고 지방명의 경우 김해(金海), 경주(慶州), 울산(蔚山), 밀양(密陽), 언양(彦陽), 곤남(昆南), 금산(金山), 군위(軍威), 경산(慶山), 영천(永川), 삼가(三加), 합천(陜川), 함안(咸安) 등이 있다. 일본에서는 위와 같은 관사명과 지방명의 명문이 새겨진 그릇을 매우 귀하게 여겨 ‘라이힌 미시마(禮賓三島)’라고 통칭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예빈시(禮賓寺)는 “고려 태조 4년(921)에 처음으로 설치되어 조선으로 계승된 관청으로 빈객(賓客)을 담당하였다”라고 『경국대전』에 나와 있고 내섬시(內贍寺)의 경우에는 각 궁전에 대한 공상(供上) 2품 이상에게 주는 술과 왜인, 야인에게 주는 음식 등을 맡아보는 관청이라고 되어있다. 일본사신이 한양에 도착하여 어떤 식으로든 관청명과 지방명이 쓰여있는 그릇으로 식사나 차 대접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후자의 경우는 설명할 필요 없이 전란 중에 입수했거나 서해안을 통한 사무역이 있을 수 있겠다. 실제로 서해안의 서천, 보령 일대와 멀리 제주도까지 계룡산요의 철화분청이 출토되고 있는 점을 참고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현재 일본에 전세되는 유명한 찻사발 3점을 예로 들어 설명해보자. 
도꾸가와 미술관(德川美術館)에 철화(鐵畵)로 ‘예빈(禮賓)’이라고 쓴 찻사발이 있다.(사진Ⅰ)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전형적인 분청사기다. 안팎으로 인화문과 귀얄을 시문하였고 외면에 단정하게 철화로 ‘예빈’이라 썼다. 이 찻사발은 구경이 19.6cm나 되는 대형 사발에 속한다. 언뜻 봐도 식기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왜 찻사발이 도꾸가와(德川) 가문의 보물로 전세되었을까. 그 이유를 앞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이는 바로 왜국의 사신이 이 그릇에 차를 마시고 예물로 가져갔음을 짐작케 한다. 찻사발이라면 대개가 구경이 15cm 전후가 대부분이며 굽도 안정되어 있는 편인데 이 찻사발은 어떤 식으로 해석해도 찻사발과는 거리가 있다. 단지 예빈(禮賓)이라는 글씨가 찻사발의 조건을 대신한 셈이다. 바로 이 찻사발은 계룡산요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조선 초기 관청에 공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계룡산요에서 만든 찻사발 중에 ‘니도꾸미시마(二德三島)’라는 것이 있다.(사진Ⅱ)
이 찻사발을 대명물(大名物; 무로마찌시대부터 전해오는 다도구)로 지정되어 있는데 일설에는 센리큐(1591년 말)가 소지하였다고 하며 그 후 니도꾸(二德)라는 사람이 소지하여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는 설과 찻사발을 만든 기법 두 가지, 즉 ‘인화기법’과 ‘귀얄’로 만들었다고 해서 ‘니도꾸(二德)’가 되었다는 설 등이 있다. 아마도 후자의 설이 그럴듯하게 보인다. 안쪽의 인화기법, 바깥쪽의 귀얄기법 이 두 가지를 이덕(二德)으로 해석한 것 같다. 이 찻사발은 이후 대대로 미쯔이(三井)가문에 있다가 잠시 사카이(酒井)가문을 거쳐 다시 미쯔이 가문으로 옮겨 현재 미쯔이문고(三井文庫)가 소장하고 있는 명완이다. 이 찻사발은 전형적인 계룡산요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몸체에 비해서 조금 작은 굽, 다갈색의 태토 위에 눈처럼 흰 분장, 거침없는 인화와 귀얄의 시문, 모든 것이 안정되고 앙증맞다. 특히 내면에 차가 고이는 부분은 깊고 은근하여 마치 눈이 녹아 고인 연못과도 같아 보인다. 
끝으로 ‘고요미데(曆手)’(사진Ⅲ) 찻사발이 있다. ‘고요미데’라고 하는 것은 옛날 책력과 같은 문양을 빗대어 붙인 이름으로 가는 붓으로 글을 써 내려간 듯이 시문되어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미시마(三島) 신사(神社)의 달력과도 닮은 문양이다. 이 찻사발은 센리큐의 일곱 제자 중의 한 사람인 후루따오리베(古田織部, 1544~1615)의 제자 우에다소꼬(上田宗箇)가 소유한데서 ‘우에다고요미데(上田曆手)’로 명명되었다. 이후 사까이가(酒井家)를 거쳐 현재 동경 아오야마(靑山)의 네즈(根津)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그림으로 보면 구연부는 약간 외반되어 있고 전체적으로 단정함이 있다. 외측에는 예리하고 힘찬 선각의 귀얄시문이 뚜렷이 남아있다. 귀얄문의 운동감도 사선을 이루며 힘차고 그 밑에 승렴문이 울타리처럼 둘러싸고 있어 정겹다. 또 오랫동안 사용하여 나타난 찻잔의 풍경이 고졸한 맛을 더해준다. 위의 세 작품을 통하여 계룡산요의 대강을 설명하였다. 그러면 계룡산 부근의 가마에 대하여 조금 언급해보자.

계룡산 부근에는 분청사기 요지만 15기 이상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세종실록 지리지』의 ‘공주목(公州牧)’에 나오는 동학동(東鶴洞)이 여기에 해당되는 것 같다. 
일제강점기의 조선총독부가 수많은 도자기 가마터 중에서 왜 계룡산 학봉리 요지를 주목했을까? 여기에는 필시 사연이 있을 것 같아 조사를 해보니 과연 그랬다. 역시 찻사발 때문이었다. 앞에서 이미 설명한 라이힌데(禮賓手), 고요미데(曆手), 니도꾸(二德), 하케메(刷毛目) 등 부지기수의 도편들이 이곳에 널려 있어 일본 사람들이 이성을 잃고 마구 도굴을 일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계룡산 동학사 인근에는 유성온천이 일본인에 의해 경영되고 있었으며, 각종 요리집과 찻집 등이 즐비하여 경성에서 기차를 타고 휴양 삼아 많은 일본인들이 동학사를 구경하고 온천을 즐겼다고 한다. 이런 와중에 조선 찻사발의 가치를 익히 알고 있던 일본인들이 가마터를 도굴 훼손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발굴을 담당했던 노모리다케시(野守健)가 쓴 ‘계룡산(鷄龍山)’이라는 글에 따르면 “이 요지는 경기도 광주(廣州)의 분원요(分院窯)에 뒤지지 않는 중요한 곳”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는 이어서 계룡산 요지 발굴 경위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계룡산의 고요지는 일부 사람들 사이에 1918년부터 1919년에 걸쳐 입소문이 나있었는데 이 요지가 난굴(亂堀)되고 부지기수의 유물과 유편(도자편)이 내지(內地; 일본 국내를 말함)로 흘러가 계룡산의 이름이 유명하게 되었다.”(사진Ⅳ) 
일본인 스스로가 이 요지를 도굴했음을 인정하는 대목이다. 사진Ⅳ를 참고하면 그 당시의 발굴한 도편이 유출되어 상품화된 것임을 단번에 알 수 있다. 이 두 사진은 마상배(위)와 이배(耳盃)(아래)로 현재 국내에 있다.
이와 같은 이유로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박물관은 계룡산 고요지군을 발굴 조사하였고 이로 인해 1929년에는 발굴 보고서까지 나오게 되었다. 계룡산 부근에는 반포면 학봉리 일대의 대규모 분청사기 외에도 진잠면(鎭岑面) 일대의 청자요지, 학봉리의 백자요지, 흑유요지 등이 있었다고 한다.

분청사기 요지에서 제작된 기물들은 주로 굽이 작고 기벽이 얇으며 모래를 뿌려 구운 흔적이 있다. 사발을 비롯하여 접시, 고배, 장군호, 유병, 묘지 등이 있고 소수이기는 하나 연적, 벼루, 주전자, 제기, 기와, 화분 등이 출토되었다. 또 몇 점의 명문도 출토되었는데 내자(內資), 예빈(禮賓), 대(大), 공(供) 등이다. 
제작기법을 살펴보면 귀얄, 인화문, 면상감, 철화 등이 있고 문양으로는 당초문, 연꽃, 모란, 인삼문, 물고기, 파초, 새 등과 추상문양도 많이 보인다. 특히 계룡산 요지에서는 제작 연대를 가늠할 수 있는 몇 점의 묘지도편도 출토되었는데 ‘성화(成化 23년, 1487)’, ‘홍치(弘治, 1490)’, ‘가정 15년(嘉靖, 1536)’ 등이다. 이 묘지명의 연대를 참고하면 계룡산 요지는 1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니고 있었으며 조선 초기의 분청에서부터 백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도자기 발달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이상으로 계룡산 분청 찻사발의 내력을 대강 훑어보았다. 공주군 계룡산에서 멀리 일본까지 전해진 찻사발과 분청사기들을 보고 있으면 문득 몇백 년 전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 사기장들의 위로받지 못한 영혼이 새삼 떠올라 옷깃을 여미게 한다.

《차의 세계》2006년 6월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