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준의 다향선미4-분황사와 원효의 무애차

2014. 11. 24. 23:49차 이야기

 

 

 

 

 

       26.박희준의 다향선미4-분황사와 원효의 무애차| ┃♡.靑* 年 * 佛 *者.♡┃

혜덕(慧德) | 조회 43 |추천 0 | 2000.09.18. 08:35

 

 

박희준의 '다향선미' 4[기획/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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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와 원효의 무애차

 
아, 걸림없는 삶이여 원효의 무애여


차에 향기가 있듯,

우리 삶에도 꽃의 향기와

같은 마음이 있다.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5가지 향기를

부처님께 올린다.



그 원효스님은 개망초 꽃이 눈송이처럼 핀 분황사 당간지주를 만났다. 장마틈새에 맞이한 몇일 만의 햇빛에 젖은 날개를 말린 흰나비들이 무리를 지어 날고 있다.
원효를 찾아가던 나는 잠시 그 화려한 잔치에 눈이 팔렸다. 나도 모르게 개망초꽃 사이에서 이 거룩한 생명의 산하대지에 마치 합장을 하는 두 손같은 당간지주 앞으로 걸음을 향하다가 문득 멈추어 섰다.
당간지주 사이에 돌 거북이 한 마리가 뭍으로 헤엄쳐 나와 있지 않는가? 왼발은 깨어져서 형체가 없는데도, 목을 쭈욱 빼어들고 소리 없이 빙긋 웃고 있는 거북, 거북도 분명 개망초 꽃향기를 찾아온 흰나비의 춤을 즐기고 있는 것이 분명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잠시 그 거북의 코앞에 앉았다. ‘너는 왜 무거운 몸으로 태어나서 저 나비처럼 날지도 못하고 당간지주 사이에 끼어서 꼼짝 달싹 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다리 하나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여 잃어버리고서도 너스레를 떨고 있니? 이렇게 내가 슬며시 딴지를 걸자, 어느새 내 안에 들어와 있는 거북이 웃음을 그대로 머금고 대답한다. ‘너는 두 다리가 멀쩡하여 밤낮없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도 늘 나처럼 웃지 못하니? 그렇게 스스로 자문자답을 하다가 웃음이 절로 나왔다. 나도 모르게 원효스님 흉내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동안 내웃음을 내가 참지 못하고 허리가 끊어져라 웃었다.
21세기 인류의 화두는 화해를 통한 공존이다. 투쟁과 대립을 버리고 화해를 통한 공존을 통해 인류가 새로운 문명역사의 장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 최근 문명사가들의 최대의 과제다. 그런점에서 원효스님은 새로운 인류문명사의 중요한 인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원효의 화쟁사상은 모든 다툼의 실마리를 푸는 열쇠를 가지고 있다.
모든 논쟁을 조화시키려는 불교사상. 한국 불교의 핵심사상 중 하나이다. 신라시대 원광(圓光)과 자장(慈藏)에서 비롯되어 삼국통일시대 원효(元曉)에 의하며 집대성되었다. 원효가 설파한 화쟁사상의 근본원리는 극단을 버리고 화(和)와 쟁(諍)의 양면성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원효는 크게 형이상학적 관점, 언어철학적 입장, 윤리적 태도로써 화쟁사상을 설명하였다.
첫째,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화쟁의 논리적 근거를 일심(一心)에 두었다. 세상 모든 것은 일심에서 비롯되므로 모든 대립적인 이론들은 결국 평등하다는 것이다.


둘째로, 화쟁은 언어로 표현된 이론을 대상으로 하므로 진리를 전달 또는 왜곡하기도 하는 언어 자체의 성격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하고 언어에 집착하지 않으면 이견의 대립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자기의 견해만 맞다고 하는 아집·집착을 버릴 때 쟁론이 해소된다는 것이다. 즉, 화쟁의 방법으로 이론상의 집착에서 벗어나고 부정과 긍정의 극단을 버리면 부정과 긍정을 자유자재로 하며, 경전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통해 상호대립적인 쟁론을 지양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화쟁의 원리·내용은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 등에 잘 나타나 있다. 원효의 화쟁사상은 고려의 의천(義天)·지눌(知訥) 및 중국의 법장(法藏) 등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경주 만선북리에 한 과부가 살았는데 남편도 없이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는 열두 살이 되도록 말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그래서 뱀복이라 불렀다. 어느 날 그 어머니가 죽었다. 그때 원효는 고선사에 머물러 있었다.

뱀복은 원효를 찾아왔다. 원효가 뱀복을 맞아 배례하자 뱀복은 답례도 않은 채 말했다. “그대와 내가 지난날 경을 싣고 다니던 암소가 죽었다. 같이 장사지내는 것이 어떤가?” 원효는 그러자고 대답하고 같이 뱀복의 집에 와서 장례를 치렀다. 원효가 시신을 향해 말했다. “나지 말지어다. 그 죽음 괴롭도다. 그 태어남 괴롭도다.” 원효의 말을 듣고 뱀복은 “말이 번거롭다.” 라고 말하고는 “죽는 것도 사는 것도 괴롭다.”라고 말했다. “지혜있는 호랑이를 지혜 숲속에 장사지냄이 그 아니 마땅한가.” 이에 뱀복이 게송(부처의 공덕을 기린 노래)을 지었다.
옛날 석가모니 부처님 / 사리수 사이에서 열반하셨네
지금도 같은 이 있어 / 연화장계 넓은 데로 들려하네
게송을 마친 뱀복은 띠풀을 뽑았다. 풀뿌리 아래에 한 세계가 열렸다. 그 세계는 명랑하고 맑으며 칠보 난간과 누각이 장엄했다. 뱀복은 시체를 메고 그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자 땅은 이내 아물었다. 원효는 혼자 돌아왔다.
옛날 원효스님은 길을 가다가 한 광대가 이상한 복장으로 큰 표주박을 들고서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서 크게 깨닫고, 마치 광대와 같이 큰 표주박을 들고서 춤을 추면서 불교의 진리를 노래로 불러 일반 대중들도 부처님의 법을 알 수 있게 하였다.



이때 추었던 춤이 바로 아무런 걸림이 없다는 뜻의 무애무(無碍舞)이고, 그 내용은 일체의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에서 벗어난다(一體無碍人 一道出生死)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 때가 원효스님이 요석공주와의 사연으로 실계(失戒)를 하여 소성거사(小性居士)라고 하여 속인행사를 하던 시기로 추정하고 있다. 그때 스님이 추었던 무애춤, 요사이의 리듬체조의 하나인 공체조나 젊은 사람들의 막춤과도 흡사하였을 무애무를 추고 있었던 원효를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마셨을 차한잔, 걸림이 없는 무애차를 생각한다.


●가볼만한 주변 풍광


분황사와 설총 화왕계


차를 처음 익히던 시절, 지금의 법련사에서 다회가 1978년 있었다. 늘 신문과 책을 통해서 뵙던 선생님 한분을 처음 뵙게 된다. 효당 최범술. 어쩌면 그 찻자리에서 내가 그를 만났다는 것은 내 삶의 한부분인 된 차한잔을 그 분을 통해서 얻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내가 처음 선생의 글을 보게 된 것은 중학교 때인 1973년 독서신문을 통해서이다.

지금도 그때의 자료를 스크랩을 하여둔 것을 보면, 차한잔이 어쩌면 나를 그 날 그 자리에서 선생님의 차한잔을 마시게 하였느지 모른다.
643년 자장이 당나라에서 대장경의 일부와 불전을 장식하는 물건들을 가지고 귀국하자 선덕여왕은 그를 분황사에 머무르게 하였다.

또 원효는 이 절에 머물면서 ‘화엄경소’, ‘금광명경소” 등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또 원효가 죽은 뒤 그의 아들 설총은 원효의 유해를 소상으로 만들어 이 절에 모셔두고 죽을 때까지 공경하였다. 또한 좌전 북쪽 벽에 있었던 천수대비 그림은 영험이 있기로 유명했다. 이 벽화는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 벽화가 있었다고 하며, 경덕왕 14년(755)에는 무게가 306,700근이나 되는 약사여래입상을 만들어서 이 절에 봉양하였다고 한다.
몽고의 침략과 임진왜란 등으로 모두 유실, 현재 분황사 경내에는 분황사 석탑과 화쟁국사비편, 삼룡변어정이라는 우물 등이 있으며, 석등과 대석 같은 많은 초석들과 허물어진 탑의 부재였던 벽돌 모양의 돌들이 한편에 쌓여 있다.

1965년 분황사 뒷담 북쪽으로 30여미터 떨어진 우물 속에서 출토된 불상들이 경주박물관 뜰에 늘어서 있다. 고선사는 창건 연대와 연유가 분명치 않으나 원효가 주지로 있었다는 절이었으니 그 역사가 오래됨은 말할 것도 없다. 적어도 원효가 세상을 떠난 신문왕 6년(688) 이전에 세워졌을 것이다. 뒤이어 한 장부(할미꽃)가 베옷에 가죽띠를 매고 백발을 휘날리며 지팡이를 짚고 뒤뚱거리며 구부정한 모습으로 오더니 아뢰었습니다.
“저는 서울 밖의 한 길가에 살고 있습니다. 아래로는 넓고 푸른 들판을 굽어보는 위로는 드높은 산악을 대하고 있는데, 이름은 백두옹(白頭翁)이라고 하옵니다. 생각하옵건대, 좌우의 신하들이 공급하여 주는 것이 비록 충분하여, 고량진미(膏梁珍味)로 배를 채우고, 차와 술로 정신을 맑게 한다 하더라도, 상자 속에는 기운을 보할 양약(良藥)과 독을 제거할 악석(惡石)을 모두 갖추어 두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명주실이나 삼실과 같은 좋은 실이 있다고 하더라도 실 대신 쓸 수 있는 왕골이나 띠풀과 같은 보잘것없는 것도 버리지 않기 때문에, 무릇 군자는 대비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옵니다. 혹 왕께서도 이러한 것에 뜻이 있사옵니까”
꽃에 향기가 있듯, 우리 삶에도 꽃의 향기와 같은 마음이 있다. 그래서 우리가 염송하는 아침 저녁 예불문에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 이라고 5가지의 마음의 향기를 가장 먼저 부처님께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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