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바오로 사도는 교우끼리 송사를 하며 욕심을 내세우는 모습을
강하게 질책한다. 신앙이 있다고 자처하며 형제들을 속이며
불의를 저지르는 이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할 수 없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밤새도록 기도하신 뒤 열두 사도를 뽑으신다.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간 예수님께서는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낫게 하신다(복음).
| |
<형제가 형제에게, 그것도 불신자들 앞에서 재판을 겁니까?>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6,1-11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 누가 다른 사람과
문제가 있을 때, 어찌 성도들에게 가지 않고
이교도들에게 가서 심판을 받으려고 한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은 성도들이 이 세상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모릅니까?
세상이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아야 할 터인데,
여러분은 아주 사소한 송사도 처리할 능력이 없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천사들을 심판하리라는 것을 모릅니까?
하물며 일상의 일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런 일상의 송사가 일어날 경우에도,
여러분은 교회에서 업신여기는 자들을 재판관으로 앉힌다는 말입니까?
나는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 말을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는 형제들 사이에서 시비를 가려 줄 만큼
지혜로운 이가 하나도 없습니까?
그래서 형제가 형제에게, 그것도 불신자들 앞에서 재판을 겁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이 서로 고소한다는 것부터가 이미 그릇된 일입니다.
왜 차라리 불의를 그냥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왜 차라리 그냥 속아 주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도리어 스스로 불의를 저지르고 또 속입니다.
그것도 형제들을 말입니다.
불의한 자들은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모릅니까?
착각하지 마십시오. 불륜을 저지르는 자도 우상 숭배자도 간음하는 자도
남창도 비역하는 자도, 도둑도 탐욕을 부리는 자도
주정꾼도 중상꾼도 강도도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도 이런 자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느님의 영으로
깨끗이 씻겨졌습니다. 그리고 거룩하게 되었고 또 의롭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 |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뽑으시고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2-19
그 무렵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인간관계가 기대처럼 고상하고 이상적인
모습이 아니라 사사로운 욕심에 물든 세속의 복사판이라고
실망하거나 교회를 멀리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그러한 고민이 어제오늘이 아니라, ‘죄인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숙명처럼 끌어안았던 과제라는 것을 엿보게 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현실을 직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세속적 탐욕에 일그러진 사람들이 모인 교회 안에 참으로 ‘초월적’
순간들이 존재함을 감지하는 것 또한 그리스도인의 참모습에 속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인간의 어떠한 죄와 약점으로도 손상될 수 없는
초월적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면,
음악의 감동을 떠올리면 좋을 것입니다.
음악에 깊이 감동할 때면 세속적 시간과 공간과
행위 속에 초월이 스며 있다는 것을 직감하기 때문입니다.
진실한 신앙과 숭고한 음악이 모두 초월과 맞닿아 있기에,
음악의 아름다움이 매개가 되어 신앙에 다가가고, 깊은 신앙을 통해
음악의 아름다움에 깊이가 더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신앙과 음악에 존재하는 초월적 아름다움이 평범한 인간의 삶에서
피어날 수 있다는 좋은 보기로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세속적이고 경박한 생활 환경 속에서도
신앙에서 빛나는 초월의 광채를 깊이 체험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무리 친근하고 단순한 음률이라 할지라도,
한없이 명랑하고 쾌활한 리듬이라 할지라도, 더없이 깊은 슬픔의 곡조라
할지라도 그 안에는 언제나 순수한 초월적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습니다.
도미니코회의 한 수도자는 모차르트 음악의 종교적 힘을
이처럼 아름답게 표현합니다. “여기에서는 침묵이 지배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언젠가 떠올랐던 가장 순수한 희망,
가슴을 있는 대로 에는 탄원을 듣는다.” 그러면서 슬프면서도 영롱한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제2악장을 들어 보라고 권유합니다.
그의 음악을 들으며, 무엇보다 교회 공동체를 소리 없이 채우는,
약점투성이인 ‘우리’를 악기 삼아 주님께서 연주하시는
초월적 음률을 마음으로 들을 수 있기를 간구합니다.
|
-출처 매일 미사-
♬ 저를 보내소서 - 하딴(하느님의 딴따라)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