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제목 : | 말씀의 초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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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어도 되는지에 대한 논쟁과
관련해서 신자들에게 권고한다. 그 기준은 약한 양심을 지닌
형제에게 걸림돌이 되거나 그가 죄를 짓지 않게 하려는 배려에 있어야 한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그 사람을 성장시키기 때문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이르신다.
하느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랑은 보답을 기대하지 않는 사랑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자비로운 이가 되어야 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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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형제들의 양심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1서 말씀입니다. 8,1ㄷ-7.11-13
형제 여러분,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합니다.
자기가 무엇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아직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께서도 그를 알아주십니다.
그런데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관련하여,
우리는 “세상에 우상이란 없다.”는 것과
“하느님은 한 분밖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늘에도 땅에도 이른바 신들이 있다 하지만
─ 과연 신도 많고 주님도 많습니다만 ─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에게서 나왔고 우리는 그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모든 것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있고 우리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
그렇지만 누구나 다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아직까지도 우상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정말로 그렇게 알고 먹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약한 양심이 더럽혀집니다.
그래서 약한 그 사람은 그대의 지식 때문에 멸망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형제를 위해서도 돌아가셨습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형제들에게 죄를 짓고 약한 그들의 양심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음식이 내 형제를 죄짓게 한다면,
나는 내 형제를 죄짓게 하지 않도록 차라리 고기를 영영 먹지 않겠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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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27-3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준다.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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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이라는 숫자는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세계 무역 센터에
대한 테러로 말미암아 불안한 21세기 세계의 상징처럼 되었습니다.
이 끔찍한 참사는 사람의 삶이 얼마나 허망하게
산산조각 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표식으로 남아 있습니다.
또한 비극적 사태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을 배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느끼게 하는 뼈아픈 사건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9·11 테러 이후 미국을 포함한 서방 세계가 지금까지
‘테러와의 전쟁’을 수행한 결과가 다시 폭력과 혼돈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요즈음의 국제 정세에서 확인합니다.
그날 비극의 본질은 증오와 힘이 더 이상 평화를
유지시키거나 가져올 수 없다는 것이지만,
우리 시대는 응징과 테러의 악순환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며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하심을 기억하고 서로 자비로워야 한다고 이르십니다.
이 말씀을 선택할 때만이 불안과 증오, 경멸과 좌절이 지배하는
21세기가 평화의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개인이 정치로 말미암아 속절없이 희생되는 이 시대에 우리는
역설적으로 시대의 구원이 개인에게서 시작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상실감의 고통 속에서 비극을 망각하지 않으면서도
다시 사랑하며 살아가는 힘을 발견하고, 서로 치유하고
치유받으며 마주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의 희망입니다.
미국의 작가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이라는 영화는
이러한 개인의 소중함을 잘 보여 줍니다. 어린 소년과 어머니는,
너무나 자상하고 친구 같은 아버지를, 따뜻하고 책임감 강한 남편을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한복판에서 잃습니다.
상실감은 채워질 길이 없어 어머니와 소년은 고통의 나날을 보냅니다.
그럼에도 모자는 삶의 의미를 찾고자 최선을 다합니다.
어린 아들은 어머니의 표현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는’노력을 하였고,
어머니는 근심과 슬픔을 묵묵히 이겨 내며 아들과 함께합니다.
이 영화는 참된 애도가 무엇인지,
상처를 딛고 일어서게 하는 사랑이 무엇인지,
상실감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것이 가능한지를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소년은 아버지의 상실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늘 아버지와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며 이렇게 말합니다.
“아빠 없이 못 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걸 알았어요.
아빠도 알면 뿌듯할 거예요. 전 그거면 됐어요.”
죽은 아버지를 돌아오게 할 수는 없으나 스스로의
의미 있는 삶이 아버지의 ‘존재와 의미’를 되살린다고 믿는,
영화의 소년과 같은 사람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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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매일 미사-
♬ 사랑의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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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사즐모(댄스스포츠 사교댄스모임 - 라틴, 모던, 사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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