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漢城) 북대문(北大門)은 홍지문(弘智門),성문(城門) 기능이 없는 숙청문(肅淸門)과 숙정문(肅靖門

2014. 11. 7. 17:16우리 역사 바로알기

 

 

 

 

 

      

 

한성(漢城) 북대문(北大門)은 홍지문(弘智門),

 

성문(城門) 기능이 없는 숙청문(肅淸門)과 숙정문(肅靖門)
조선국 대한제국 역사

2014/11/07 10:29

복사 http://blog.naver.com/msk7613/220174141864

전용뷰어 보기

 

 

한성(漢城) 북대문(北大門)은 홍지문(弘智門), 성문(城門) 기능이 없는 숙청문(肅淸門)과 숙정문(肅靖門) 

 http://blog.naver.com/msk7613    김민수 님의 글 중에서 ....

 

    한성(漢城)은 궁궐,태묘,황단,사직단,선농단,영희전,궐외각사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도성(都城)의 명칭이며 성문(城門)은 외적의 침입을 막고 인마(人馬)를 출입시키는 방어시설물이다. 외적의 침입을 방어할 수 있고 인마(人馬)를 출입시킬 수 있는 성문(城門) 기능을 한 한성(漢城) 4대문은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홍지문이다. 1396년 9월에 성벽과 성문(城門)의 성문의 하부인 월단(月團), 성문의 상부인 누합(樓閤)이 완성되어 한성(漢城)은 주위에 견고한 성벽이 쌓여진 성곽도시가 됐다.1396년 9월 24일 태조 이단이 토성의 한성(漢城)을 건축하는 역사(役事)를 마치고 젊은 장정들을 돌려보냈다. 한성(漢城) 각 문(門)의 성문의 하부인 월단(月團), 성문의 상부인 누합(樓閤)을 지었으며 정북(正北)은 숙청문(肅淸門), 동북(東北)은 홍화문(弘化門)이니 공식 명칭이 아닌 낮추어 부르는 속칭(俗稱) 동소문(東小門)이라 하고, 정동(正東)은 흥인문(興仁門)이니 공식 명칭이 아닌 낮추어 부르는 속칭(俗稱) 동대문(東大門)이라 하고, 동남(東南)은 광희문(光熙門)이니 공식 명칭이 아닌 낮추어 부르는 속칭(俗稱) 수구문(水口門)이라 하고, 정남(正南)은 숭례문(崇禮門)이니 공식 명칭이 아닌 낮추어 부르는 속칭(俗稱) 남대문이라 하고, 소북(小北)은 소덕문(昭德門)이니, 공식 명칭이 아닌 낮추어 부르는 속칭(俗稱) 서소문(西小門)이라 하고, 정서(正西)는 돈의문(敦義門)이며, 서북(西北)은 창의문(彰義門)이라 하였다. 1398년 왕자의 난이 일어나고 정종이 즉위하면서 2년동안 도읍을 개경으로 환도하였으나 태종(太宗)이 즉위하고 1405년 한성(漢城)으로 천도(遷都)하였다. 백악산의 숙청문(肅淸門)과 숙정문(肅靖門)은 적의 침입을 방어하고 인마(人馬)를 출입시키는 성문(城門) 기능이 없으므로 숙종조인 1719년에 탕춘대 바깥으로 치성을 쌓고 북대문(北大門) 홍지문을 건축하였다.

 

1504년 7월 25일 10대 국왕 연종(연산군 묘호 추상)이 전교하기를 “숙청문(肅淸門)을 막고 그 오른편에 새로 숙정문(肅靖門)을 만들라.” 하였다. 백악산의 숙청문(肅淸門)과 숙정문(肅靖門)은 적의 침입을 방어하고 인마(人馬)를 출입시키는 성문(城門) 기능이 없으므로 숙종조에 탕춘대 바깥으로 치성을 쌓고 북대문(北大門) 홍지문을 건축하였다.1523년 6월 29일 예조(禮曹)가 계청(啓請)하기를다음 달 초1일부터 숭례문(崇禮門)을 열고 숙정문(肅靖門)은 닫고서 격피고(擊皮鼓)는 도로 예전에 있던 시장의 그 자리에 갖다 두도록 하소서.”하니중종이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1526년 5월 14일 예조가 아뢰기를, “측수기(測水器)를 살펴보니 내린 비가 6푼으로 두루 흡족하지는 못합니다그러나 우세(雨勢)가 그치지 않을 것 같으니 춘당대(春堂臺못가의 석척제(蜥蜴祭), 가항(街巷)의 기우(祈雨), 맹인(盲人)의 기우(祈雨및 피고(皮鼓)를 치지 못하게 하는 일시장을 옮기는 일숭례문(崇禮門)을 닫고 숙정문(肅靜門)을 여는 일 등에 대해서 고쳐 택일(擇日)하기 위해 감히 아룁니다흥인지문 밖 전농리(典農里)에 있었던 묘사(廟社)의 제향(祭享)에 쓸 곡식을 심은 동적전(東籍田)에서 보고해 오기를 비가 온 뒤로 황충의 10분의 9가 없어졌다.’ 하므로 감히 아룁니다.”하니 중종이 전교하기를알았다우세가 이처럼 아직 흡족하지 않으니 석척제 및 맹인의 기우는 정지하지 말게 하라가항의 기우는 아이들 놀이와 같으니 정지시키라문을 닫고 시장을 옮기고 피고를 치지 못하게 하는 일 등은 고쳐 택일하도록 하라.”하였다.

1528년 7월 24일 중종이 정원에 전교하기를 “비를 비는 일을 예조가 차차 거행하려 하고 있다그러나 지금 외방에는 비가 넉넉한데 경기는 해마다 크게 가물어 백성이 살아갈 수가 없다평소에는 설령 봄에 비를 빌었는데도 오지 않고 여름을 넘기게 되기 때문에 차차 거행했지만이 번은 온갖 곡식이 장차 성숙(成熟)하게 되었는데 가뭄 기세가 이러하여이 달에 비가 오지 않으면 추수할 가망이 없게 되었으니 전하께서도 깊이 우려스럽다숭례문(崇禮門)을 닫고 숙정문(肅靖門)을 열며 피고(皮鼓)를 치지 않고 저자를 옮기는 비를 비는 것에 관계되는 모든 일들을 시급하게 거행해야 할 것이다만일 상례에 구애되어 차차 비를 빌기로 한다면 너무 늦어지게 되지 않겠는가예조에 말해 주라.”하였다. 1528년 8월 1일 3정승인 3공이 아뢰기를봄 여름의 가뭄에는 숙정문(肅靖門)을 열고 숭례문(崇禮門)을 닫으며 피고(皮鼓)를 치지 않고 징을 사용하는 것은 양기(陽氣)가 강성하기 때문에 음기(陰氣)를 붙잡아 세우고 양기를 억제하려 하는 일입니다.”하였다.1557년 7월 17일 예조가 아뢰기를, “날씨가 가물면 숭례문은 닫고 숙정문을 열며 피고(皮鼓치는 것을 금하는 것은 음()을 부지(扶持)시키고 양()을 억제하는 뜻입니다지금 한재(旱災끝에 장마가 개지 않아서 이익은 없고 손해만 있으니전례에 따라 숙정문(肅靖門)을 닫고 숭례문(崇禮門)을 여소서.”하니명종이 그대로 윤허하였다. 1584년 5월 2일 가뭄이 심하여 선조가 숭례문(崇禮門)을 닫고 숙정문(肅靖門)을 열었으며 시장을 옮겼다정전(正殿)을 피해 거처를 옮기고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 임금이 몸소 근신하는 뜻으로 수라상의 음식의 가짓수를 줄이고 음악과 춤 따위를 금지하는 감선 철악(減膳 撤樂)하였다.

 

1702년 8월 11일 우의정(右議政) 신완(申琓)이 숙종에게 이르기를 “우리나라 산천(山川)의 험조(險阻)함은 천하에 으뜸인데 1636(인조 14)년인 병자년에 한성(漢城)의 북서쪽을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일찍이 보건대 창의문(彰義門) 밖에 있는 탕춘대(蕩春臺)의 옛 터는 4면이 험준하고 벽(壁)이 깍아지른 듯이 서 있으니, 산세(山勢)를 따라 돌을 포개어 한성(漢城)의 북서쪽 바깥으로 덧붙여서 쌓는 치성(雉城)과 한성(漢城)의 북대문(北大門:홍지문(弘智門))을 쌓아야 합니다. 창고의 곡식을 예치해 두고 먼저 무기(武器)를 쌓아 두어 한성(漢城)과 안팎이 되어 서로 응원하게 하고 힘을 합쳐서 굳게 지킨다면 나라에는 파월(播越)할 근심이 없고 백성은 견고한 뜻이 있게 될 것인데 가까운 거리에 있는 천연(天然)의 험준(險峻)한 곳을 오히려 지금까지 비어둔 채 버려두었으니, 그 애석함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 태평한 때에 이르러 싸우고 지킬 계책을 미리 강구하여 좁고 막힌 요해처(要害處: 한성(漢城)의 북서쪽 바깥으로 덧붙여서 쌓는 치성(雉城),한성을 방어하기 위해 신축한 홍지문(弘智門))를 신지로 삼아 기필코 사수(死守)하도록 대비하여야 합니다.”하였다.

 

 

1718년 8월 23일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유(李濡)가 말하기를 “탕춘대(蕩春臺) 밖에 한성(漢城)의 북서쪽에 덧붙여서 쌓은 치성(雉城)을 쌓는 것은 형세로 보아서 그만둘 수 없습니다. 성상께서 빨리 대신(大臣)과 장신(將臣)에게 명하시어 가서 성지(城址)를 살펴보도록 한 뒤에 기한을 정하여 역사를 시작하게 하소서. 탕춘대(蕩春臺)를 경기 감영(京畿 監營)으로 옮겨 설치하도록 이미 성명(成命)이 있었는데, 아직도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거듭 신칙(申飭)함이 마땅하겠습니다. 그리고 총융청(摠戎廳)이 소격동(昭格洞)에 있어 창의문(彰義門)과 거리가 편리하게 가까우니, 한성(漢城)의 북서쪽 바깥으로 덧붙여서 쌓는 치성(雉城)의 북대문(北大門:홍지문(弘智門))과 탕춘대(蕩春臺) 일대를 총융청의 신지(信地)로 정하여 총융청으로 하여금 전적으로 관리하며 수호(守護)하게 하는 것이 진실로 편리하고 마땅하겠습니다.”

 

1718년 윤8월 5일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유(李濡)가 이르기를 “만약 탕춘대(蕩春臺) 밖으로 한성(漢城)의 북서쪽 바깥으로 덧붙여서 쌓는 치성(雉城)과 북대문(北大門:홍지문(弘智門))이 없다면 한성(漢城)은 외롭고 위태로워 막아서 끊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며 적의 소굴이 될 경우 그 이해(利害)는 너무나 분명하여 지혜로운 사람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이 때에 이르러 설축(設築)하여 뒷 날에 의귀(依歸)할 곳으로 삼지 않는다면 급박한 사태가 이른 뒤에는 어지럽게 흩어지고 버려지는 것이 1592(선조 25)년인 임진년의 왜란(倭亂)과 1636(인조 14)년인 병자년의 호란(胡亂)의 일과 같을 것이니, 이런 처지에 이르게 되면 후회한들 미칠 수 없습니다. 또 지금 당장은 비록 아무 일이 없는 것 같지만 수년(數年) 안에 외적(外敵)의 경보(警報)가 없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런데도 이렇게 거의 완성된 역사(役事)를 포기한다면 어찌 대단한 실책(失策)이 아니겠습니까?”

1719년 4월 3일 영중추부사(嶺中樞府事) 이유(李濡)가 한성(漢城)의 북서쪽 바깥으로 덧붙여서 쌓는 치성(雉城)의 성역(城役)을 정파(停罷)한 일로 인하여 상서(上書)하여 스스로 진술(陳述)하였는데, 이르기를 “한성(漢城)을 쌓았으면 반드시 아울러 탕춘대(蕩春臺) 바깥까지 쌓아야 훗날 만전(萬全)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탕춘대 바깥으로 덧붙여서 쌓는 치성(雉城)을 쌓은 후에는 백악산(白岳山)·인왕산(仁王山)과 같이 우뚝 높아서 내려다보는 곳은 결코 버릴 수가 없으며, 신이 지난 해에 성(城)을 쌓자고 한 상소(上疏)를 묘당(廟堂)에 내리자, 대신(大臣)들이 복계(覆啓)하여 시행하도록 허락하시고 여러 재신(宰臣)들에게 두루 보였는데, 모두 다른 의논이 없었습니다. 성명(成命)이 이미 내려진 후 봉행(奉行)하는데 급하여 모두 심력(心力)을 기울여 서변(西邊)의 2백여 보의 땅을 설축(設築)하고 공역(功役)이 거의 완성(完成)되었는데, 이제 와서 정파(停罷)하도록 하셨습니다. 만약 이미 쌓은 탕춘대 바깥으로 덧붙여서 쌓는 치성(雉城)을 완성하지도 않은 채 그대로 둔다면 장차 후세(後世)에 비난을 면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하였다.

1773년 10월 27일 5위(五衛)에 속한 종5품의 무관직인 행 부사직(行 副司直) 구선행(具善行)이 영조에게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옛 날 한성(漢城)이 허물어지는 근심을 개탄하였으므로 여기에 한성(漢城)의 북서쪽에 탕춘대(蕩春臺) 바깥으로 덧붙여서 쌓은 치성(雉城)과 북대문(北大門:홍지문(弘智門))을 설치하였으며 근래에는 총융청(摠戎廳)의 으뜸 벼슬 종2품인 총융사(摠戎使)가 종2품 병마절도사인 경기 병사(京畿 兵使)를 겸하여 탕춘대(蕩春臺)에 있는 것은 한성(漢城) 방어를 위한 것이고 한성(漢城)의 북대문(北大門:홍지문(弘智門)인 한북문(漢北門) 길은 굴곡(屈曲)하여 좌우가 막히고 좁아서 말을 타고 열(列)을 이루기 어려우니 이 치성(雉城)을 한번 견고하게 한다면 어찌 적병(賊兵)이 깊이 침입할 수 있겠습니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