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1. 11. 20:37ㆍ들꽃다회
강화 전등사 역대조사 다례재(茶禮齋) - 하나
/ 20140928 일요일, 맑음
전등사 동문 밖 신축중인 건물에서 고기와 그림전이 열리고 있다.
동문 근처의 삼랑성(三郞城)
-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전하여 짐.
삼랑성은 일명 정족산성이라고도 한다.
주위가 가파른 절벽으로 천험한 요새다.
성의 시설물로는 남문과 누각(종해루), 동문, 서문, 북문지가 있다.
또한 성 안에는 13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하며 고구려시대에 창건했다고 전하는 전등사가 있다.
삼랑성은 원래 단군왕검이 단기 51년(BC2283)에
세왕자 부여, 부우, 부소에게 명하여 쌓았다는 전설이 있다.
토성이었으나 삼국시대 석성으로 증축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자연석을 쌓아 만든 석성은 둘레는 약 2~3km, 높이 2.3m~5.3m에 이르는 규모로
삼국시대 석성 축조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연꽃 꽃담
꽃담 장식들
- 이러 하듯이 하찮게 보이는 흙담장에 기와무늬 장식을 하여
화엄경에서 말한 연화장세계를 하나하나 만들어 간다.
우리가 사는 이곳과 이 시절이 곧 연화장세계이자
극락(極樂)이라는 말없는 가르침을 이 흙담 꽃장식을 통하여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우리 가까이에 있는 불교미술 상징성의 한 단면이다.
양헌수 장군 승전비
-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의 상륙을 막아내어
정족사고에 있던 각종 전적류와 조선조 역대왕들의 족보와 영정을 지켜낸
양헌수 장군의 승리를 기념하는 비석으로 동문 안에 있다.
정족산 전등사에는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 을 보관한 사고가 설치(1660년)되었는데
지금 그 실록들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병인양요(1866년)때 양헌수 장군이 이끄는 370여명의 군사들은 삼랑산성에서
프랑스군 올리비에 대령이 이끄는 160명의 해병을 기습하여 무찔렀다.
10월 3일 쳐들어왔던 프랑스군은 열흘 후에 패주했다.
이를 기리는 양헌수 장군 승전비가 삼랑성 동문 입구에 있다.
1866년 1월초 대원군은 쇄국양이(鎖國洋夷) 정책의 하나로 천주교 금압령을 내리고,
9명의 프랑스 신부와 수천 명의 조선인 천주교도를 처형했다.
이때 탄압을 피하여 탈출했던 3명의 프랑스 신부 가운데 리델이
7월 청나라의 톈진[天津]으로 탈출해 프랑스의 극동 함대 사령관 로즈에게
천주교 탄압 사실을 알리고 이에 대한 보복을 요구했다.
이 사건은 1846, 1847년 2차례 조선을 침략했다가 실패했던
프랑스에게 좋은 구실이 되었는데, 프랑스의 실제 속셈은 무력으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고
불평등한 통상조약을 맺는 데 있었다.
리델의 보고와 보복요청을 받은 주중 공사 벨로네는
"조선 국왕이 우리 불행한 동포에게 박해를 가한 그날은
조선 왕조의 최후의 날이다"라고 단언하면서 로즈 제독에게 조선 침략을 명령했다.
로즈는 강화해협을 중심으로 한 서울까지의 뱃길을 탐사할 목적으로
3척의 군함을 이끌고 1866년 8월 10~22일에 제1차 원정을 단행했다.
프랑스 군함은 서울의 양화진·서강까지 올라와 수로탐사를 한 뒤 물러갔다.
이에 조선 정부는 황해도와 한강 연안의 포대를 강화하고
의용군을 모집하는 등 프랑스의 침략에 대한 해안 방어대책을 강화했다.
같은 해 9월 15일 로즈는 전함 3척, 포함 4척, 병사 1,000여 명을 동원하여 조선을 침략해왔다.
이때 길잡이는 리델과 조선인 천주교도 3명이었다.
침략군은 16일 강화를 점령하고 서울에 이르는 주요보급로를 차단하여
조선 정부를 궁지에 몰아 항복을 받을 속셈으로 한강을 봉쇄했다.
강화를 점령한 로즈는 조선이 프랑스 선교사 9명을 학살했으니 조선인을 죽이겠다고 하면서
속히 관리를 자신에게 보내 통상조약을 맺게 하라고 조선 정부를 협박했다.
한편 조선 정부는 순무영을 설치하고, 이경하·이용희·양헌수를
각각 대장·중군·천총에 임명하여 강화를 수복했다.
9월 20일 문수산성에서 다시 패한 조선군은 우세한 프랑스군의 화력을 이겨내고
강화도를 수복하는 데에는 기습작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10월 1일 밤 양헌수가 549명의 군사를 이끌고
강화해협을 몰래 건너 정족산성에 들어가 잠복하여
10월 3일 정족산성을 공격해오는 프랑스군을 물리쳤다.
프랑스군은 전사 6명을 포함하여 60~70명의 사상자가 났으나,
조선군은 전사 1명, 부상자 4명뿐이었다.
조선군의 정족산성 승리는 프랑스군을 물러나게 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군은 1개월이 넘는 원정에 따른 병사들의 피로,
정족산성의 패배에 따른 사기 저하 등으로 10월 5일 강화도에서 철수했는데,
이때 외규장각에서 대량의 서적·무기·금은괴 등을 약탈해갔다.
이 사건은 이후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 다음 팁 자료 중에서
연꽃 사진전 -화(和)7 처염상정(處染常淨)
사진작가 : 우제광,
장 소 : 윤장대 주변
윤장대 연화문 꽃창살
윤장대 용문 머름판
연꽃 사진전 안내문
- 제 14회 삼량성 역사문화축제
〔헤럴드경제=이형석 기자〕2014 인천아시안게임 10대 대표축제로 선정된
강화 전등사 삼랑성역사문화축제가 지난 19일 개막해 오는 10월 5일까지 계속된다.
삼랑성 역사문화축제 조직위원회(공동위원장 범우 전등사주지ㆍ
지용택 새얼문화재단이사장ㆍ최종수 사단법인 한국효문화센터이사장)는
‘천년의 기다림, 새로운 시작. 2014 화-Harmony’라는 주제로 진행하는
이번 행사는 2014 인천아시아경기대회가 개최되는 시기에 열려
인천을 찾는 많은 아시아인들에게 다양한 한국문화를 선보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이번 축제는 미술, 음악, 공연, 전통예식 등 다양한 행사로 구성됐다.
특히 오는 27일 열리는 전등사 가을음악회는 인천을 찾은 관광객과 외국인들에게 큰 볼거리다.
방송인 전제향의 사회로 가수 최백호와 마야, 권진원, 김종환, 리아킴이 무대에 오른다.
이날 오전에는 삼랑성 전등사에 대한 자연과 문화, 역사와 신화를 생각하며
표현하는 미술 실기대회와 글쓰기 대회가 진행된다.
오는 28일에는 다례재와 영산재가 열린다.
오전 10시 30분에는 1600년 동안 전등사를 가꾸어 온 스님들에 대한 ‘다례재’를 진행한다.
이어서 같은 날 오후 1시에는 호국영령을 위한 ‘영산대재’를 갖는다.
전등사는 해마다 인천 강화지역의 호국영령을 발굴하여 위령재를 봉행하고 있는데,
올해는 인천출신 애국지사 이경훈 독립운동가의 위령대재를 치를 예정이다.
이경훈 독립 운동가는 1944년 중국 호북성 유양현에 주둔하고 있던
중국군 제9전구 99군 유격대에 입대하여 활동했다.
비목나무 열매
이질풀
- 전초는 약용
전등사 요사채 관해암
- 유리문이 나있는 지층부는 공양간으로 사용중.
보리자나무( 일명 보리수나무)
- 중국 원산, 절에 심는 낙엽교목, 관상용
절에서 보리수나무라 하는 것으로 열매를 보리자라고 함.
열매로 염주를 만듬.
보리자나무
들꽃연구가이자 차그림전문가인 오병훈 선생님
대조루 옆 단풍나무
- 단풍나무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나무이다.
몇해전에 천연기념물 지정이 추진되었으나,
밑둥부를 자세히 살펴보면 두 그루가 맞붙은 나무라는
심의위원의 지적이 있어서 천연기념물 지정에서 유보되었다. (오병훈 선생님 증언)
전등사 역대조사 다례제(茶禮祭)
전등사를 창건한 아도화상부터 전등사 발전에 기여해오신
역대조사님들께 올리는 다례재로 차 뿐만아니라
육법공양 법도대로 향, 등, 꽃, 차, 과일, 쌀 등이 차례로 공양되었다.
전등사(傳燈寺)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에 아도(阿道)가 창건하여 진종사(眞宗寺)라 하였다.
그 후 고려 제27, 28, 30대의 충숙왕(忠肅王)·충혜왕(忠惠王)·충정왕(忠定王) 때에 수축하였고,
1625년(인조 3)과 1906년에도 중수하였으며, 또 일제강점기에도 두 차례 중수하였다.
전등사라는 이름은 충렬왕(忠烈王:재위 1274∼1308)의 비 정화궁주(貞和宮主)가
이 절에 옥등(玉燈)을 시주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때 정화궁주는 승려 인기(印奇)에게 《대장경》을 인간(印刊), 이 절에 봉안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 절에는 보물 제178호인 전등사 대웅전(大雄殿), 보물 제179호인 전등사 약사전(藥師殿),
보물 제393호인 전등사 범종(梵鐘)이 있다.
또 대웅전에는 1544년(중종 39) 정수사(淨水寺)에서 개판(改版)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목판 104장이 보관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전등사 [傳燈寺] (두산백과)
향공양
육법공양의 의미
공양(供養)은 공급하여 자양한다는 뜻으로 부처님께 드리는 것을 말하며
나아가 스님 및 어떤 대상에게 무엇을 드리는 것 까지도 의미한다.
또한 음식을 먹는 행위를 공양이라고 한다.
육법공양은 부처님께 올리는 여섯가지 공양물을 말한다.
쌀,향,꽃,과일,차 ,촛불
이 여섯가지를 공양하는 의미는 육바라밀을 행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므로,
부처님께 공양한다는 것은 법계에 공양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진리를 받들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육법공양
1)향香공양의 향은 해탈향이다.
향은 자기를 태워 주위를 밝게 하므로 희생을 상징한다.
향은 부처님 도량을 향기롭게 하는 공덕을 짓는다.
2)등燈공양의 등은 반야등이다.
지혜가 없으면 어둠에 사는 인생이며,지혜가 있으면, 모든 고생을 바르게 보며 참되게 산다.
즉, 등불은 지혜를 상징한다.
3)꽃花공양은 만행화(萬行花)이다.
꽃을 피우기 위해 온갖 인고의 세월을 견딘다.
이처럼 중생들도 성취의 꽃을 피우기 위해 온갖 수행을 한다는 것이다.
4)과일果공양은 보리과의 깨달음이다.
우리들의 수행과 공부를 깨달음이란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이다.
5)차茶공양은 감로다(甘露茶)이다.
부처님 법문은 감로의 법문이다.
부처님 법문은 만족과 청량함을 준다.
6)쌀米은 선열미(禪悅米) 이다.
쌀은 농부에게 있어서 곧 기쁨이다.
쌀공양은 육신을 가진이에게 음식을 베푸는 공덕으로 보시 바라밀을 의미한다.
차공양
꽃공양
과일공양
비교적 자세하게 사진을 정리하는 연유는
정법대로 하는 육법공양 사진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각종 의궤류와 같이
훗날의 참고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비록 작은 것이지만 하나의 역사기록물이 될 수 있음이다.
떡공양
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서 한명씩의 공양자가 나와서
공양대 중간에서 만나 괘불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
쌀공양
등(초)공양
괘불(掛佛) - 거는 부처님
괘불은 야단법석과 같은 불교의 큰 행사시
불당내에서 사부대중이 전부 모일 수 없을 경우,
마당이나 야외에서 내거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그림부처님이다.
큰 사찰에서는 이러한 큰 행사를 위하여 괘불을 내다 걸 수 있는
석조 괘불대받침석이 있는 경우가 많다.
유목민이던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와 혼인동맹을 맺은
고려중기 이후에 원의 공주인 왕비의 시주로 야외에서 행군이나 이동시에
예불을 올릴 수 있도록 두루마리로 만든 화불(畵佛)이 많이 만들어졌고,
그중 일부는 원황실의 요청으로 화려하게 제작되었다.
유목민들은 그들의 이동식 생활 때문에 야외예불용 화불이 평상시에 늘 필요하였다.
티베트불교에서 현재 가정용불단용으로 많이 사용되는 탕카(탱화 撑畵)도
원나라 지배시에 널리 보급되었던 이 화불이 티베트인들의 고산 유목생활에
적합하기에 지금도 가정용불단에서 이를 흔하게 사용하고 있다
대형화불의 테두리를 튼튼하게 천으로 표구하여 큰 야외행사시에
사용할 수 있게 만든 것이 괘불이다.
.
이때 그려진 이동식 예불용 그림을 일본인들의 표현대로 흔히 고려불화라고 부르고 있으나,
이는 불교미술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일 뿐이고, 예불의 대상으로 제작되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고려화불(高麗畵佛) 즉 그림부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사용목적에 맞는 바른 용어이다.
(고려불교사를 전공한 원로사학자이신 한국학중앙연구원 허흥식 명예교수님의 주장)
번기와 청사초롱이 걸린 대웅보전
대웅보전 모서리기둥(隅柱) 주두(柱頭)
외공포부에 장식된 나부상(裸婦像)
좌로부터 명부전, 향로전,약사전
육법공양을 마치고 사부대중께 인사....
전등사 여신도회의 찬불가 율여공양(律呂供養)
대웅보전 대들보 외부에 조각된 도깨비상(치우천황상)
- 전등사를 품고 있는 삼랑성이 단군의 세아들이 쌓았다는 전설로 미루어 보건데,
대웅보전의 대들보와 도리의 맞춤부 끝단에 새겨진 도깨비상은
단군조선 시대의 황제 중에서 전신(戰神)으로 추앙받는 치우천황상을
목조각 장인인 깍수가 새긴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불교문화는 민중설화를 포용하는 불교의 통섭성과
깍수의 호국정신이 함께 어우러진 걸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웅보전 네귀퉁이에 있는 나부상
누가 이 여인을 아시나요 ?
사백년, 400년을 이러고 있다. 벌거벗고, 쪼그리고 앉아, 큰 절집 지붕을 받치고 있다.
처음 백년은 부끄럽기도, 억울하기도 했다.
두번째 백년은 내 몸이 바짝 바짝 마르는 아픔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 다음 백년 동안 새벽녘 목탁소리, 스님들 독경소리에 귀가 뚫렸다.
네번째 백년, 비로소 봄날 흐드러진 진달래도 보이고, 가을 밤 달빛에 숨죽인 빨간 단풍도 눈에 들어왔다. 이제는 나를 보는 중생들의 조롱과 연민의 눈길들이 뜬금없이 울어대는 처마밑 인경 소리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안다.
여기는 강화도 정족산 전등사 대웅보전이다. 절집 네 귀퉁이 큰 기둥 위에서 지붕을 받치고 앉아 있다. 사람들은 나를 나부상, 벌거벗은 여인상이라고 부른다. 조선 땅 강화 섬에서 술을 팔고, 밤을 팔며 이생에서 한 삶을 마감한 내게 무슨 대단한 이름이 필요할까. 이제 나무에 새겨진 조각으로 다시 태어났으니 '벌거벗은 여인상' 그 이름으로 충분하다.
내가 왜 여기 이러고 있는가 ?
그 이야기를 하자면 이 큰 절집을 고쳐 지을 때로 돌아가야한다.
조선조 광해군 때라나. 그 때 절 공사의 최고 기술 책임자, 도목수로 나이 지긋한 총각이 왔다.
당시 나는 절 아래 마을 주막집 주모. 어찌어찌 눈이 맞고 배가 맞게 된다.
뜨내기 도목수와 동네 주모가 바람처럼 만나는 게 뭐 특별한 일도 아니다.
문제는 내가 갑자기 강화를 떠나게 되면서 일어난다. 그 전에 도목수는 그 동안 받은 삯을 내게 맡겼다. 내가 좋았고, 나를 믿었던 터다. 따로 피붙이도 없고 친구도 없는 터에 타향에서 정분난 여인에게 번 돈을 맡기는 게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말 못할 사연으로 내가 갑자기 동네를 떠난다. 도목수에게 귀띔이라도 할 처지가 아니었다.
도목수 번개맞은 황소처럼 길길이 뛰다가, 자식 잃은 여인네처럼, 꺼이꺼이 울다가, 독한 술로 배를 채우고 잠들곤 했단다. 정든 여인에다가 묻어놓았던 돈까지 사라졌으니, 당연한 반응이지. 나도 안쓰럽지만 예상했던 일이고.
세월이 약이지. 얼마 후 도목수 기력 차리고 마음 다잡고 공사를 잘 끝냈다고. 훌륭하게 대웅보전을 중수해 놓고 단청하는 이에게 다음 일을 맡겼다네. 그런데 이상한 일은 대웅보전 네 귀퉁이 처마 밑에 벌거벗은 여인상을 끼워넣은 것이다. 그게 내 모습이지. 그리고 단청장에게 온몸은 붉은색 그리고 두눈은 파란색으로 단장을 해달라는 부탁을 해놓고, 도목수 사라졌다네. 아침 햇살에 스러지는 바다 안개처럼.
사람들이 수근대기 시작한다. 저 여인은 말없이 사라진 술집주모가 틀림없다. 그 도목수가 실연과 배신에 대한 앙갚음으로 그 여자를 발가벗겨 절집 지붕 밑에 놓아둔 거라고. 전등사 대웅보전 나부상, 정을 준 남자, 돈을 바란 여자의 이야기라고. 그래서 나는 지난 400년 동안 나쁜 년의 표상으로 여기 큰 절집 지붕밑에 쳐박혀 있는 것이다.
과연 나는 나쁜 여인인가 ?
살아 생전에는 누구에게도 내 속깊은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이생의 육신으로는 강화에 돌아올 수도 없었다. 몸의 껍데기를 벗어버리고 전등사로 날아와서 내 육신의 형상을 껴안고 흐를 수 없는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400년, 이제는 담담하다. 뭇사내의 음탕한 눈길, 조롱섞인 표정, 뭇여편네의 “고것 봐라”하는 듯한 질시, 다 받아내고 있다. 변명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 무색,무명,무정의 내 영혼은 자유롭다. 이제는 내 얘기를 할 수 있다.
내가 강화를 떠난 것은 당시 큰 스님의 부탁이 있어서였다. 사십대 중반의 도목수는 삼십대 초엽의 내 몸에 빠져있었다. 신업(身業), 몸으로 짓는 카르마에 꼭 붙잡힌 집착, 그 고리를 끊을 길은 오직 내가 떠나는 수 밖에 없었다.
큰 스님은 내게 말했다.
“예서 배를 타고 충청도 땅으로 가거라.”
“여기서 공사가 끝나면 넌지시 도목수에게 알려줌세.”
그 걸로 도목수와의 인연은 끝이었다. 충청도 당진 갯가에 자리잡고 삼년을 기다렸다. 세월이 더 지나간 다음 지나가던 한 스님이 큰 스님 말씀을 전했다.
“그 도목수 인연이 아닐세.”
“공사 끝나고 인사할 틈도 없이 사라졌네. 마지막 받을 돈은 다 절에 시주하고.”
“그가 자네 모습을 새겨 절집 처마밑에 얹어 놓은 것은 꼭 미움 때문만은 아니리라.”
나도 그가 그립다.
전등사에서 연인으로 맺었던 그 인연,
언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리오?
석모도 보문사 오백나한 상중 일부. 세상사는 일이 뭐 그렇게 궁금하다고. 석모도는 강화도에서 배타고 5분거리에 있는 다른 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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