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1. 17. 17:17ㆍ우리 이웃의 역사
공자를 통해 보는 춘추 시대 이야기
(3)노나라 삼환(三宦)씨의 기원
문리스 (남산 강학원)
5. 역사와 반복
제(齊)나라 권력 싸움에서 승리한 제환공은 춘추 시대 첫 번째 패주(覇主)가 되었다. 패주가 되었다는 건 무엇이고, 첫 번째라는 건 또 무슨 소리인가. 간단히 말해 이 말은 제환공을 기점으로 스스로 자신들의 강력한 정치력을 과시하는 국가(정치가)들이 경쟁하는 시대가 본격화되었다는 뜻이다. 이 시대를 우리는 춘추(春秋)시대라고 한다. 그러므로 춘추시대라는 명칭은 문왕․무왕․주공 등이 활약한 주(周)나라의 시대가 끝이 났다는 뜻이기도 하다.
제나라는 주나라의 개국공신인 태공망 강태공의 봉지(封地)였다. 역사와 명분이 약한 것은 아니지만 지리적으로 동쪽에 치우쳐 있었던 까닭에 상당 기간 변방의 큰 나라 정도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과연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어서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입장에서는 희극이지만 누군가의 입장에서는 비극이 되는 것이어선지, 이 변방의 나라가 제환공 시대를 맞아 활짝 꽃이 피었던 것.
춘추시대 첫번째 패주, 제환공
(사진출처-네이버)
그런데 변방의 대국 제나라가 본격적인 초강대국으로 성장하는 동안 이웃나라인 노나라는 어떠했을까. 제양공 시대 성스캔들로 얽혔던 제나라와 노나라는 제나라에 의해 노나라 환공이 살해당하는 최악의 사건으로 치달았다. 사건은 유야무야 넘어갔지만 이 사건 이후로 두 나라의 운명은 사뭇 갈리게 된다. 제나라는 양공 사후 벌어진 자식들의 권력 싸움에서 최종 승리한 제환공이 춘추시대 첫번째 패자가 되었다면, 노나라는 환공 사후 집권한 노장공이 관중을 제거할 기회를 놓쳐버렸을 뿐 아니라, 노장공 이후 후계 문제와 관련해 향후 노나라의 최고 우환거리가 되는 계손․숙손․맹손의 삼환(三宦)세력이 등장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제환공이 천하의 패주 노릇을 하게 된 것이나, 대부였던 삼환씨가 노나라의 실질적인 제후 노릇을 한 것이나 구조의 측면에서 보면 차이가 없다. 어찌됐건 제환공 역시 아직까지 주나라 천자에 대해서는 신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신하에 불과한 제환공이 주나라 천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버젓이 천하의 대장 노릇을 자임했던 것은 명백한 월권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역사는 제나라 환공과 노나라 삼환을 전혀 다르게 기억한다. 한 쪽은 인류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주인공이고, 다른 한 쪽은 국가 기강을 문란케 한 부패한 기득권 세력으로. 이 차이는 무엇 때문일까. 작은 것을 훔치면 도적이 되지만 나라를 훔치면 영웅이 된다는 이치인 것일까. 하지만 우주의 눈에서 보자면 결국 똑 같은 게 아닌가. 정말 다른 것일까.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건 이러한 역사는 늘 반복되어 왔다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도. 리얼리?
6. 노장공과 삼환의 기원
노나라는 장공은 관중을 제거해야 한다는 대부 시백의 충언에도 불구하고 관중을 산 채로 제나라에 보냈다. 그로부터 6년 뒤 관중을 얻은 제환공은 춘추시대 최초의 패자가 되었다. 따지고 보면 노나라 장공 시절에 노나라에는 훌륭한 인재들이 없지 않았다. 우선 제나라의 야심과 관중의 인물됨을 정확히 꿰뚫었던 대부 시백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후 노나라가 제나라에게 땅을 빼앗겼을 때, 제후들끼리 만나는 자리에서 제환공을 칼로 협박해 기어이 자신들이 빼앗겼던 땅을 되찾아온 ‘생떼’형 장수 조말도 아직 노나라에 건재했다.
관중을 얻은 제환공은 춘추시대 최초의 패자가 되었다
노장공의 부인은 제환공의 동생인 애강(哀姜)이다. 그런데 장공은 애강과의 사이에서 자식이 없었다. 장공은 애강의 동생 숙강(叔姜)과도 관계가 있었는데, 숙강으로부터는 아들 개(開)를 얻었다. 하지만 숙강은 정식 부인이 아니었고 당연히 개는 태자가 아니었다. 사실 노장공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따로 있었다. 대부 당씨의 맏딸인 맹녀(孟女)가 그 주인공인데, 노장공은 맹녀와 아들 반(班)을 낳았고, 마음 속으로 반을 자신의 후계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노장공이 병이 들어 오래 몸져 눕게 되었는데, 하루는 둘째 동생인 숙아(叔牙)가 병문안을 왔다. 노장공에게는 경보(慶父)․숙아(叔牙)․계우(季友)라고 하는 세 명의 남동생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하나 같이 야심을 가진 동생들이었다. 숙아와 이야기를 나누던 노장공은 슬쩍 자신이 언젠가 죽게되면 노나라의 후계자를 누구로 세울지 걱정이라며 숙아의 속마음을 떠보았다. 기회를 보아 적당한 시기에 맹녀의 아들인 공자 반을 태자로 만들려는 속셈을 털어놓을 계획이었다. 그런데 노장공의 정치적 수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동생 숙아는 이 말을 듣고 진심으로 노장공을 걱정해 이렇게 대답했다.
형님은 무슨 그런 걱정을 하십니까? 우리 노나라의 법에 따르면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계승하고, 형이 죽으면 동생이 이어받는 것입니다. 설혹 태자가 없으면 어떻습니까? 경보 형님이 아직 저렇게 건재하니 충분히 뒤를 이을 수 있습니다. 무슨 걱정이십니까?
<노주공세가>
노장공은 숙아가 경보를 왕으로 세울까 걱정되어 다시 계우를 불러 은근히 물었다. 계우는 노장공의 마음을 알아채고 자신은 목숨을 걸고 장공의 아들 반을 왕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그러자 노장공은 슬그머니 조금 더 욕심이 났다. 계우에게는 숙아와 경보가 함께 왕의 자리를 노린다고 정보를 흘렸고, 자신은 계우와 일을 도모하겠다고 계우를 부추겼다. 계우는 얼결에 거사에 휘말린 셈이 되었다. 계우는 장공의 명령이라며 숙아를 대부 침무(鍼巫)씨의 집으로 불렀고, 침계(鍼季)를 시켜 숙아를 위협해 살해하도록 명령했다. 침계는 숙아에게 독주를 마시도록 강요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술을 먹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 후손이 끊기지는 않을 것이지만, 반항한다면 집안이 멸족될 것이오.” 왕의 마음을 제대로 읽지 못한 죄로 숙아는 그렇게 비명에 죽임을 당했다. 숙아가 죽자 장공은 그의 아들을 숙손(叔孫)씨로 삼았다.(숙손씨의 기원)
숙아를 제거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노장공이 죽었다. 노장공이 죽자 계우는 약속대로 장공의 아들 반을 군주로 옹립했다. 그런데 순조롭게 마무리되는가 싶었던 노나라 왕위 계승 문제는 또다시 엉뚱한 데서 문제가 발생했다. 사실 경보는 노장공이 살아있던 시절부터 장공의 부인인 제나라 애강(哀姜)과 사사로이 정을 통하는 사이였다. 애강은 비록 노장공과의 사이에 자식이 없었지만, 자신의 여동생인 숙강(叔姜)은 장공과의 사이에 개(開)라는 아들이 있었다. 즉 애강은 자신의 조카를 내세우고 싶어했던 것이고, 경보는 경보대로 태자도 아닌 장공의 아들이 왕위를 잇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앙심이 남은 상태였다. 경보는 과거에 반과 원한이 있던 낙(犖)이라는 인물을 시켜 반을 살해하도록 지시했다. 계우가 반을 왕으로 세운 지 불과 두달 여 만의 일이었다. 하루아침에 반이 살해당하자 당황한 계우는 이웃나라인 진(陳)나라로 달아났다. 경보는 장공의 아들이자 애강의 조카인 개를 왕으로 삼았고, 이 사람이 노나라 민공(湣公)이다.
민공이 왕이 되자, 배후의 실력자였던 경보의 위세는 더욱 강해졌다. 아울러 경보와 애강의 관계는 점점 더 노골적으로 진행되었다. 결국 경보와 애강은 민공을 복의땅에서 쳐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다. 역사란 지나고 보면 멈추어야 했을 자리가 보이지만, 늘 현실에서는 과도한 법이다. 경보는 끝내 자기가 멈추어야 할 자리를 알지 못했다. 노나라의 정변 소식을 들은 계우는 진(陳)나라와 주(邾)나라의 도움을 받아 노나라로 쳐들어왔다. 때는 아직 춘추시대였던 것.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있었다고는 하나 명분이 없는 정권은 설 자리가 없었다. 심지어 노나라 사람들까지도 경보를 죽이려고 하자 경보는 거(莒)나라로 애강은 주(邾)나라로 도망쳤다. 노나라로 돌아온 계우는 민공의 동생 신(申)을 왕으로 세웠는데 이 사람이 희공(釐公)이다.
한편 계우는 거나라로 사람을 보내 경보를 찾았고, 기어이 불러 들였다. 경보는 계우에게 목숨을 구걸했지만 목숨을 구할 수 없었다. 경보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경보의 후손은 이후 맹손(孟孫)씨가 되었다.(맹손씨의 기원).
애강은 제나라 환공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제나라 환공은 자신의 여동생인 애강이 음란한 행동으로 노나라를 어지럽혔다며 주나라로부터 애강을 불러 들여 죽였다. 그리고 애강의 시체를 노나라에 돌려보냄으로써 노나라에서 찢어죽이게 했다. 따지고 보면 노나라는 결정적인 순간마다 제나라 여인들에 의해 발목이 잡힌 셈이기도 하다. 어찌됐건 애강의 시체는 희공에 의해 겨우 노나라에 매장되었다.
계우의 후손은 이후 계손(季孫)씨가 되었다.(계손씨의 기원). 계손씨는 이때로부터 수백년간 노나라의 중심 세력으로 자리했다. 공자는 이로부터 100여년이 지나 태어났지만 공자 시대에도 대부들의 세력은 왕을 압도했고, 그 중에서도 삼환(三宦)씨, 삼환씨 가운데서도 계손씨 가문은 노나라의 정치를 좌지우지하는 최고 실력자 가문이 되었다.
다 지난 이야기지만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때 노나라 장공이 관중을 살려 돌려보내지 않았더라면 노나라의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이웃한 제나라의 불행을 빌어 나의 불행을 줄이려 들다니, 부질없을 뿐 아니라 안쓰럽기 그지없는 약자의 상상일 뿐이다. 반복하게 되는 말이지만, 우주의 시간에서는 반드시 제나라 환공이 더 행복할 것도 노나라 장공이 더 불행할 것도 없다. 이들의 일생이 그 일생의 가치가 똑 같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결국 나아간 자리나 넘어진 자리나 크게 보면 차이가 크지 않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종종 대충 살아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느냐 라고 우리에게 묻는다. 중요한 건! 바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더 좋은 삶을 욕망해야 하는가이다. 아직 이에 대한 대답을 찾기엔, 갈 길이 멀다.
- moving-vision.tistory.com/473 Moving Vision Quest 자료 중에서 ....
'우리 이웃의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자를 통해 보는 춘추 시대 이야기(5) - 제환공의 빛과 그림자(3) (0) | 2014.11.17 |
---|---|
공자를 통해 보는 춘추 시대 이야기(4) - 제환공의 빛과 그림자(1) (0) | 2014.11.17 |
공자를 통해 보는 춘추 시대 이야기(2) - 제나라 환공과 관중 (0) | 2014.11.17 |
공자를 통해 보는 춘추 시대 이야기(1) - 노나라 三宦세력의 기원 (0) | 2014.11.17 |
일본의 역사와 언어.. (0) | 2014.10.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