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6. 3. 16:56ㆍ우리 역사 바로알기
오회분 4호묘
고구려인들의 신앙 세계 벽면에 '가득'
▲오회분 4호묘 널방 동벽의 청룡과 신선 |
벽마다 신선 그려져 있어
그리고 널방 네 벽의 모퉁이 아래에는 괴수, 위에는 용 두 마리가 교차해 있습니다. 또 네 벽의 윗부분에는 용이 서로 몸을 꽈서, 천장과 아래 공간을 구분 짓고 있습니다. 이것은 5호묘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수레바퀴신 ▲숫돌가는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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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쪽 고임돌에 그려진 9 명의 신선은 거문고ㆍ소ㆍ횡적ㆍ뿔피리 등의 악기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남쪽에 그려진 신선은 약단지를 들었고요.
조선 시대에는 대장장이를 농민보다 못한 신분으로 여겼지만, 고구려는 달랐습니다. 대장장이들을 우대했기에 대장장이 신도 함께 섬겼을 테니까요.
학과 용을 타고 승천하는 신선과 달을 상징하는 두꺼비가 그려져 있다.
용의 몸뚱아리가 적-황-청의 보색대비로 그려져있으며 비늘은 지금도 선명하다.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4호묘 ②
[고구려 고분벽화] 오회분 5호묘
소머리에 벼이삭을 들고 질주하고 있다.
오회분 4-5호묘는 사신총과 함께 7세기 고분에 속한다.
무덤의 구조와 벽화의 배치상태 등이 잘 나타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 삼실총 ①
[고구려 고분벽화] 삼실총 ②
갑옷과 투구를 착용하고 긴 칼을 찬 무장이 묘실의 무덤 주인을 보호하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11명으로 구성된 행렬도의 10번째 위치하는 것으로 봐서 평민으로 보인다.
집안 고구려 고분벽화 삼실총 행렬도의 평민 복장 여인.
오늘날의 애교머리를 닮은 특이한 헤어스타일이 재미있다.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저고리와 통이 넓은 바지는 고구려 평민들의 전형적인 복식이었다.
[고구려 고분벽화] 사신총
삼각형 천장 받침대가 만나는 부분을 귀면 판석으로 처리한 것이 특징이다.
[고구려 고분벽화] 각저총
쪽구들에 앉은 부인들과 맨바닥에 의자를 놓고 걸터앉은 남편이 상위에 차린 음식을 즐기며 담소하고 있다.
말의 등에는 안장이 놓여있고 마부의 손엔 채찍이 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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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황해도 연탄군 송죽리 고구려 벽화 고분에서 1600여년만에 모습을 드러낸 고구려인의 모습.
북한 황해도 연탄군 송죽리에서 발굴된 고구려 벽화.부리부리한 눈의 고구려 호랑이.훼손으로 인해 주위는 떨어져나갔다.
[고구려 고분벽화] 쌍영총
평남 남포시 쌍영총의 8각기둥과 주두
[고구려 고분벽화] 안악 제1호분
황해도 안악 제1호분 벽화의 주두.
[고구려 고분벽화] 덕흥리 고분
평양 덕흥리 고분 묘주와 지석글씨.
왼쪽에 묘지 주인공이 꽃무늬로 장식된 화려한 방에 앉아 있는 보습을 그렸다.
위에는 주인공의 신상을 기록해 놓았는데,
이에 따르면 그는 이름이 진이고, 요동태수와 유주 자사 등을 지냈으며 77세에 죽었다.
[고구려 고분벽화] 안악 제3호분
현재 북한에 있는 안악 3호분의 마구간 그림.
주인공의 생활 면모를 그린 동쪽 측실 벽화 가운데 하나다.
마구간 구유에서 여물을 먹고 있는 말의 모습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대륙을 달리던 고구려인들의 분위기가 물씬 난다.
수산리고분 현실 북쪽 벽에 그려진 귀신 얼굴모양 부채.
묘지 주인공 부부의 시종들이 들고 있던 것으로,
부채 혹은 햇빛가리개의 용도로 쓰였을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귀신밑으로 S자 비슷한 손잡이까지 달려있는 것이 특징.
고구려 벽화에서 보는 유일한 형태이다
상투를 머리 뒤로 묶고 아랫도리 일부만을 가린채 금방이라도 한번 맞붙을
역사들의 체구와 역사들의 몸짓을 다소 희화적으로 과장되게 그렸다.
고구려 유물들 ①
왼쪽에서 네번째 줄 아랫부분에 '고구려 비단(高麗錦)'이란 구절이 보인다.
고구려 유물들 ②
6세기쯤 신라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우리나라 최초의 '반가사유상'
일본인들이 비문을 조작해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했다.
복제품 진품운 평양박물관
사진은 고구려실에 전시한 금동투조장식 복제품.
진품은 평양 진파리 1호분에서 발굴돼 현재 평양역사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높이 14cm, 너비 23cm. 고구려하면 대륙적이고 강인한 것만을 연상하지만,
이 유물은 고구려가 얼마나 정교하고 섬세한 기술을 지닌 국가였는가를 보여주는 명품이다.
오회분의 태양신과 달의 신이 마주보고 있는 벽화 사진
제목 | COLUMN&JOURNAL [역사이야기] 고구려 고분벽화 : 1,500년을 견딘 해신과 달신: 오회분4호묘 벽화 /관악구 자료 | 작성자 | 이대훈 |
날짜 | 05-11-23 13:55:00 | 조회 | 37 |
4.1,500년을 견딘 해신과 달신, 오회분4호묘 벽화 고구려의 후기 고분벽화는 무덤칸 벽과 천장고임에 백회를 바르지 않고 그림을 그리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지금도 돌 면에 그대로 그림을 그릴 때에 잘 흡착되어 오래 보존될 수 있는 안료를 특별히 골라서 사용하는 경우가 있음을 고려하면 1,500년 전, 무덤칸의 돌 벽에 백회를 바르지 않고 안료를 입혀 오늘날까지 견디게 한 고구려인의 기술과 지혜는 높이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오회분5호묘와 오회분4호묘에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려 해와 달을 받쳐든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낸 해신과 달신은 半人半獸의 몸을 지닌 존재이다. 위는 사람, 아래는 龍의 몸을 지닌 신은 중국의 漢代 화상석과 화상전, 고분벽화에도 빈번히 보이지만, 6세기 고구려 고분벽화, 특히 오회분4호묘 널방 고임에 그려진 해신, 달신과 같이 세련되면서도 힘있는 모습은 아니다. 중국의 장의미술에는 人身蛇尾의 선인이나, 人身龍尾의 신이 여럿 등장하는데, 이 가운데 해, 달과 관련된 존재는 人身龍尾의 신 복희, 여왜이다. 복희와 여왜는 본래 땅과 하늘을 나누고, 인간과 만물을 만들어낸 창조신으로 이미 중국의 戰國時代부터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흔히 바르고 둥근 것을 재고 나누는 도구인 規와 矩를 한 손에 들고 있어 자신이 복희와 여왜임을 알게 하는데, 前漢代 화상석 등에서는 각각 한 손에 해, 달을 받쳐들거나, 배 앞에 해, 달을 안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복희, 여왜가 창조신이자 해신, 달신이 된 것이다. 오회분4호묘의 복희형 해신과 여왜형 달신은 시원스럽고 또렷한 이목구비, 길고 갸름한 얼굴을 지닌 전형적인 고구려인이다. 좌우로 힘있게 펼쳐진 날개옷의 깃, V자형으로 휘며 강하게 뻗어나간 용꼬리, 一자형에 가깝게 앞뒤로 뻗은 두 다리와 긴장되게 휘어진 발톱이 어울려 자아내는 역동감과 긴장감이 눈에 가득히 들어온다. 중국의 漢이나 隋唐시대의 복희와 여왜 그림에서는 발견할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것이다. 얼굴에 흐르는 부드러운 미소와 몸 전체를 휘감고 나가는 강한 기운이 이루어내는 묘한 울림은 그야말로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만 느낄 수 있는 긴장된 조화의 결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
오회분의 태양신
오회분의 달의 신
오회분의 태양을 상징하는 삼족오와 옆에는 용과 학을 타고 하늘을 나는 신선의 모습
오회분의 학을 타고 횡적(옆으로 부는 피리)을 불며 하늘을 나는 신선
오회분의 불의 신과 농경의 신
집안 오회분4호묘 널방 천장고임에는 누구나 그 정체를 쉽게 파악할 수 있는 神이 등장한다. 한 손에 곡식 이삭을 든 채 앞으로 내 닫는 머리는 소, 몸은 사람인 특별한 존재. 농사의 신이다.(그림) 고대 중국의 신화에서 농사의 신이 신농으로 불리고 소머리에 사람 몸인 존재로 인식되었으며, 東夷系 신들의 하나로 알려진 점을 고려할 때, 6세기 고구려 고분벽화에 모습을 드러낸 소 머리 농사의 신 역시 신농으로 불리며 믿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고구려인의 종교신앙에서 농사와 관련하여 등장하는 최초의 신적 존재는 시조 주몽의 어머니 유화이다. 큰 강의 神 河伯의 딸, 때문에 그 자신도 물의 세계를 다스리는 능력을 지녔음이 확실한 유화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남으로 떠난 아들 주몽에게 비둘기를 전령으로 삼아 '오곡의 종자'를 건넨다. 물고기와 자라들이 만든 다리를 건넘으로써 부여의 추격병들을 간신히 따돌린 주몽이 곡식 씨앗을 건네 받은 곳이 큰 나무 밑이었다는 기사에서 우주 기둥 및 신의 사자 비둘기를 매개로 한 여신과 영웅 사이의 교통을 읽어낼 수 있다.
곡식 씨앗을 건네 받은 뒤 卒本에 이르러 새 나라를 세운 주몽은 어떤 존재로 보아야 할까. 큰 위기를 모면한 건국시조 주몽이 어머니 유화로부터 매우 특별한 방법으로 곡식 씨앗을 건네 받은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주몽은 아버지 해모수로부터는 빛의 세계, 어머니에게서는 물의 세계와 교통하는 능력을 한 몸에 받은 신성 영웅이다. 그 자신 빛과 물의 만남이 이루어낸 결정체이다. 빛과 물은 곡식의 씨앗을 싹틔우고 자라서 열매 맺게 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될 요소들이다. 주몽은 빛의 신과 물의 신의 만남에서 비롯된 새 세계의 씨앗이자 열매이다. 주몽이 건네 받은 곡식 씨앗 역시 고구려라는 새로운 세계를 열고 피워 나가는 바탕이자 결실이 될 것이다.
6세기 집안의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농사의 신, 소머리의 신 신농을 언급한 고구려의 문헌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仙界의 입구를 지키는 문지기로 묘사되는 소머리의 仙人이 2세기의 漢 화상석에 등장할 뿐 3세기 이후 중국의 종교미술에서 신화상의 신농은 확인되지 않는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소머리를 한 농사의 신이 모습을 드러내는 과정이 궁금할 따름이다.
(그림)오회분4호묘 널방 고임 벽화: 농사의 神
오회분의 대장장이 신의 모습
오회분의 수레바퀴 신
오회분의 천정과 벽화의 모습
하늘로 오르는 디딤돌, 오회분4호묘 벽화 청룡의 척목 전호태(울산대학교 역사문화학과)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어떤 소설의 제목이다. 하늘로 비상하려면 날개가 있어야 된다는 관념, 날개가 없으면 날 수 없다는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구절이기도 하다. 중근동과 유럽 사람들에게 하늘은 날개가 있는 존재에게만 허용된 세계였고, 날개 달린 것의 도움 없이는 이를 수 없는 공간이었다. 천사도 등에는 반드시 날개가 달려 있었고, 신들도 천상과 지상 사이를 오갈 때에는 거대한 새나 날개 달린 말의 힘을 빌렸다. 하늘과 땅 사이를 잇는 우주적 크기의 산이나 거대한 나무를 두 세계의 통로로 삼을 수는 있었지만 무한한 창공을 날아다니려면 날개가 필수적이라는 생각을 떨쳐내기 어려웠다. 공룡과 비슷한 모습을 한 그리이스나 북유럽신화 속의 드래곤이 등에 박쥐의 가죽날개 같은 것을 달고 있는 존재로 묘사되는 것도 이러한 관념 위에서이다. (그림1)오회분4호묘 벽화: 청룡
집안의 오회분4호묘 벽화에는 아름다운 오색청룡(五色靑龍)이 등장한다.(그림1) 화려하고도 복잡한 연속무늬 위에 묘사된 까닭에 창공 한가운데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앞발을 크게 내닫으며 포효하는 모습에서 우주적 수호신 특유의 힘과 기세는 완연히 느껴진다. 벽면에 가득 차게 그려진 청룡의 몸은 온통 비늘로 덮여 있고 몸통 부분은 색동주름치마를 입은 것처럼 긴 띠를 이루며 오색으로 채색되었다. 목과 몸통의 경계는 녹색, 적색 두 줄 목띠로 구분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연속마름모꼴 색띠가 차곡차곡 이어진 것처럼 묘사된 목 위에 덧그려진 불꽃 모양의 무늬이다. 양 어깨에서 날개처럼 뻗어나가는 불꽃 형태의 무늬가 사신이 뿜어내는 상서로운 기운을 나타낸 것이듯이 목 위의 무늬도 청룡의 기운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한다면 이 부분에 굳이 눈길을 모을 필요는 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신과 같은 신수(神獸)를 둘러싼 상서로운 기운은 어깻죽지나 허리, 네 발의 무릎 근처처럼 움직이는 힘이 강하게 나타나는 데에 묘사하는 것이 상식이고, 실제 고분벽화나 전각화(塼刻畵)에서 이와 같은 표현방식이 적용된 사례를 찾아보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벽화 속 청룡 목 위의 불꽃 모양의 기운은 무엇을 나타낸 것일까. 어떤 의도를 담은 표현일까. 중국 한대의 문헌 『논형(論衡)』에는 ‘용은 한 치의 나무, 곧 척목(尺木)이 없으면 하늘로 오르지 못한다.’는 구절이 있다. 그런데 시대를 한 참 건너 뛴 뒤 쓰인 당대의 문헌 『유양잡조(酉陽雜俎)』에는 ‘용의 머리 위에 한 가지 물체가 있으니, 박산(博山)처럼 생겼고 이름을 척목이라고 한다. 용은 척목이 없으면 하늘로 오르지 못한다.’는 글이 실려 있다. 수백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용이 하늘로 오르기 위해 디딤대로 삼았던 한 치 크기의 나무가 용의 머리 위에 붙어 있는 박산 모양의 승천 장치로 바뀐 것이다. 박산은 바다 위에 떠 있다는 신선의 세계로 한대에는 향로 뚜껑 도안에 많이 쓰인 전설상의 산이다. 박산향로는 한대에 특히 많이 만들어졌지만 남북조시대의 전각화에도 자주 등장할 정도로 후대까지 애용되었던 기물 가운데 하나이다. 당대 이전 어느 시기부터인가 척목이 용의 머리 위에 있는 물체로 인식되고 표현되기 시작했음은 고분벽화나 전각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남북조시대의 전각화 등에서는 화염보주 형태로 묘사된 척목을 청룡 뿐 아니라 백호의 목 위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그림2) 박산의 형태가 아닌 화염보주의 모습으로 그려진 것은 원하는 모든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전하는 화염보주에 대한 인식 때문일 것이다.
(그림2)중국 강소 상주 척가촌 南朝墓 전화: 백호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척목이 처음 발견되는 것은 장천1호분 앞방 천장고임에 그려진 청룡에게서 이다. 청룡의 엉치 위쪽에 표현된 척목은 삶은 계란을 어슷하게 잘라서 올려 놓고 그 주위에 가는 털들을 붙인 듯한 모습이다. 물론 가는 털들처럼 표현된 것은 상서로운 기운이 어려 있고 뻗어 나가는 모습이라고 하겠다. 덕화리1호분 벽화에 이르러서야 척목은 청룡의 목덜미 위에 묘사된다. 형태도 화염보주의 외형과 비슷하다. 오회분4호묘청룡에 이르면 화염보주의 보주에 해당하는 부분은 보이지 않고 상서로운 기운이 강한 불꽃 형태로 뻗어 나가는 것처럼 그려져 또 한 번 변화를 보인다. 동아시아에서 하늘을 나는 존재에 대한 관념은 서아시아 및 유럽의 그것과 달랐다. 중국이나 한국 옛 왕조의 화가들이 용이나 백호와 같은 신수가 하늘을 나는 모습을 그릴 때에 등에 날개를 덧붙이지 않은 데에서 이런 관념의 차이가 잘 드러난다. 그러나 동아시아에서도 날개를 달지 않은 채 하늘을 날기는 어렵다고 생각했음을 용의 승천에 척목이 필요하다고 상정한 글과 이에 바탕을 둔 회화적 표현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승천을 위한 매개물에서 몸에 달아야 하는 장치로 바뀐 척목의 형태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는 변화를 보인다는 사실이다. 승천장치로 보기 어려운 강한 기운의 표현으로 바뀌는 것이다. 아마도 고구려 화가들은 청룡과 같은 우주적 신수에는 승천을 위한 최소한의 보조 장치나 매개물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오회분 4호묘 ㅡ 제후의 무덤일 가능성 / 김 용 만 |
좋은 생각입니다. 우선 지적할 것은 오회분 4호묘와 5호묘는 평원왕 연대라고 정확히 편년된 것은 아니며, 대략 6세기말에서 7세기 초반으로 보고 있을 뿐입니다. 또 한가지는 오회분 4호묘와 5호묘는 통구사신총보다는 다소 시기가 늦은 것으로 보는데, 통구사신총은 오회분 4호묘 바로 뒤에 위치해 있습니다. 통구사신총 내부에 그려진 벽화는 그 주제면에서 4호묘와 5호묘와 상당히 유사합니다. 그런만큼 오회분 4호묘와 5호묘 등의 피장자 문제를 논할 때는 통구사신총도 함께 논해야 할 것입니다. 이 점을 한번 더 고려했으면 합니다. 자, 이제 내 개인적인 견해(이것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고구려 제후왕 문제와 관련하여 논문을 준비하다가 잠시 중단했기 때문입니다.)를 잠깐 이야기하자면 이렇습니다. 고구려 무덤은 크게 적석총과 봉토석실묘로 구분됩니다. 이 가운데 고구려 후기에 유행한 봉토석실묘를 갖고 이야기해봅시다. 이 무덤이 유행한 5세기 이후 고구려 왕은 장수왕, 문자명왕, 안장왕, 안원왕, 양원왕, 평원왕, 영양왕, 영류왕, 보장왕 까지 9명이 됩니다. 이들 가운데 보장왕은 당나라 북망산에 묻혔으므로 제외하고, 장수왕의 경우는 적석총인 장군총에 묻혔을 가능성이 반반이므로 7~8명의 왕이 봉토석실묘에 묻혀야 합니다. 그런데 봉토석실묘 가운데 왕릉급으로 추정되는 무덤은 8기가 넘습니다. 우선 그 후보들을 살펴보면 평양지역에서 경신리1호무덤, 동명왕릉, 용강대총, 연꽃무덤, 호남리사신총, 강서중묘, 강서대묘가 있지요. 이들 중 경신리1호무덤은 한변의 길이가 54m, 높이 12m에 이르는 봉토석실묘 가운데 가장 큰 무덤으로 장수왕 혹은 문자명왕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벽화가 없습니다. 동명왕릉은 비록 5세기의 것이지만, 추모왕의 무덤을 이장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고, 용강대총은 벽화에 그려진 성곽도가 안학궁성을 연상시키고 있고, 연꽃무덤은 안칸의 규모가 가장 큰 무덤으로 왕릉급으로 볼 수 있습니다. 호남리 사신총은 고구려벽화무덤 가운데 유일하게 대리석으로 축조된 고분으로 사신도무덤 가운데는 비교적 이른시기에 나타난 왕릉급 무덤입니다. 또 강서대묘, 강서중묘, 강서소묘는 영양왕과 영류왕, 그리고 보장왕의 아버지 태양왕은 삼형제로서 같은 지역에 나란하게 묻힌 것이라고 추정한 북한의 최택선의 논문이 있습니다. 이들 무덤이 전부 왕릉이라면 최소 6-7명이 이 무덤에 묻힌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추모왕이 변수) 그렇다면 남은 왕은 0~2명에 불과합니다.(장수왕이 변수-장군총에 묻혔는가 아닌가에 따라) 그런데 장수왕 이후의 왕들의 무덤은 기본적으로 수도가 평양인 만큼 평양인근에서 찾는 것이 더 옳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집안 지역의 왕릉급 무덤에 고구려 왕이 묻혔다면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자, 여기서 집안 지역에 있는 봉토석실묘 가운데 왕릉급 무덤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가 문제가 됩니다. 통구사신총, 오회분4호묘, 오회분 5호묘, 그리고 아직 발굴이 안되었지만, 그 크기가 오회분 5호묘보다 큰 2호묘와 4호묘와 비슷한 3호묘가 왕릉급 무덤들에 해당됩니다. 이 무덤들에 고구려 왕이 묻혔을 가능성이 있을까? 만약 묻혔다면 호남리사신총보다 이곳의 무덤이 더 상위급 무덤이므로 최대 3명이 묻혔을 가능성도 있습니다.(호남리 사신총 제외가 변수) 특히 오회분2호묘, 4호묘, 5호묘가 그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대왕이 왜 자신들이 태어난 평양지역이 아닌 국내성지역에 와서 묻혔는지는 설명이 안됩니다. 장수왕이 장군총에 묻혔다고 하더라도, 무덤들의 연대를 판정해보면 문자명왕이나 영양왕, 영류왕은 확실히 평양지역에 묻힌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중간에 안장왕, 안원왕, 양원왕, 평원왕 이들이 이곳에 와서 묻힌 것일까? 안원왕의 경우는 병사를 했고, 그가 죽었을 때 평양에서 외척들간에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의 무덤을 국내성지역으로 옮겨왔을 가능성은 거의 없지요. 양원왕은 평양지역의 외척의 지원을 받아 왕위에 오른 만큼 세력기반인 평양지역에 묻혔을 것입니다. 또 평원왕은 수도를 안학궁성에서 장안성으로 옮긴 왕인 만큼 평양주변에 무덤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당시 정치상황에서 국내성에 묻힐 가능성이 있는 왕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무덤들은 국내성의 제후왕의 무덤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이 무덤의 주인공을 단지 귀족들의 무덤으로 볼 수도 없습니다. 오회분4호묘에는 무덤 주인공이 왕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천장에 황룡이 그려져있습니다. 오회분5호묘는 천장에 용과 호랑이가 서로 어울어진 모습이 그려져 있으며 무덤의 크기도 4호묘보다 큽니다. 왕릉급 무덤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최소 제후왕의 무덤으로 보아야 합니다. 제후왕의 무덤으로는 이들 외에 왕자(王字) 무늬가 그려진 미창구장군묘, 장천2호분, 산성하332호분, 감신총을 꼽을 수 있습니다. 왕이 아닌 귀족이 무덤내에 왕자 무늬를 함부로 새겨 넣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고구려 최초의 수도였던 환인지역의 가장 큰 무덤인 미창구장군묘의 경우 무덤 주인공이 누구인가에 대한 논란이 많습니다. 추모왕이나 산상왕의 형이었던 발기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무덤의 연대가 5세기 이후라서 연대차이가 매우 크게 납니다. 그렇다면 그는 환인지역에 있던 고구려의 제후왕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유리명왕의 아들 해명이 환인지역에 계속 머물면서 주변의 황룡국을 견제했듯이 고구려 최초의 수도였던 환인지역은 고구려 후기까지 중요한 지역으로 각광을 받았던 만큼 한 시기에 비교적 강력한 제후왕이 등장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장천2호분에는 25×23줄의 575개의 왕자 무늬가 있는데 고구려 중급 귀족의 무덤인 장천1호분에 비해 규모가 커서 한변의 길이가 34~41m에 이르고 높이도 9m가 됩니다. 무덤내부의 나무관에는 옻칠을 하고 금동못을 박았으며 금동으로 만든 매화꽃모양의 장식물을 달아놓는 등 무덤에 묻힌 인물은 국왕 다음가는 최고의 귀족으로 고추가급의 제후왕의 무덤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산성하332호분이나 감신총의 경우도 집안지역이나 남포지역에 있던 작은 제후왕의 무덤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고구려에 제후왕이 있었다는 것은 덕흥리고분 묵서에 나의 자손이 제후왕이 되기를 바란다는 문장을 통해서도 확실히 알 수가 있으며, 보장왕의 아버지 태양을 왕에 추존했다는 것으로도 추론할 수 있습니다. 또 고구려 초기에는 낙씨왕이라는 확실한 제후왕의 존재도 찾을 수 있습니다. 나는 이런 이유를 들어 오회분 4호묘를 제후왕의 무덤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공식적인 논문을 쓰지는 않았으므로, 더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 이 글을 재인용할 때는 분명하게 내가 오늘 여기에 이런 글을 썼음을 분명히 밝히고 인용하기 바랍니다. --------------------- [원본 메세지] --------------------- 오늘은 집안시에 있는 오회분 무덤군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려 합니다. 오회분 무덤군은 4.5호 무덤이 발굴조사 되었는데 두 무덤 다 벽화무덤입니다. 따라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나머지 무덤들도 벽화무덤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오회분 4.5호 무덤은 고구려 고분벽화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힙니다. 벽을 가득 메운 사신도와 신선. 이 무덤들의 피장자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았는데 국내성 귀족의 무덤이니 왕의 무덤이니 하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저는 이 무덤들의 피장자에 대해서 조사해 보았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오회분 4호묘는 왕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무덤의 천장에 황룡이 그려져 있기 때문인데 황룡은 중국의 황제. 혹은 고구려의 태왕을 상징하는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회분 5호묘는 황룡 대신 용과 백호가 그려져 있기 때문에 왕이라기 보다는 왕족의 무덤으로 보는 편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오회분 무덤군 중에서 가장 커다란 고분이 오회분 2호묘입니다. 아직 조사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이 무덤군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이 묻혀있다고 추측되는 무덤입니다. 저는 이 무덤군이 왕과 그의 가족들의 무덤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평양천도 이후의 왕릉은 평양지역에 만들어 졌으므로 이 무덤들이 왕릉으로 보기 힘들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인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무덤들이 후대에 만들어진 고구려 왕과 가족들의 무덤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평원왕 때 이 무덤들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큰데 제위 초부터 왕권강화를 위해 노력했던 평원왕이 왕권의 신성함을 알리려는 목적으로 선왕들의 묘를 수리하면서 새로 만든 무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평원왕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 무덤군의 피장자들은 누구일까요? 어쟀든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자세히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저는 3호분이 4호분과 외형적으로 비슷한 크기인 점을 미루어 3호분의 왕 역시 왕일 수도 있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5호분은 지금 남아있는 규모는 가장 작지만 원래 크기가 2호분과 맞먹을 정도로 컸다는 현지 주민들의 진술을 토대로 볼 때 5호분의 피장자는 왕은 아니였지만 왕 이상의 권력을 가진 사람. 즉 왕의 아버지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1호분은 다섯 무덤 중 가장 작은 무덤으로 왕자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회분의 피장자들의 관계를 조사한 결과 2호분에 묻힌 사람이 가장 먼저 죽은 사람이며 그 다음이 5호분. 그다음이 1.3.4호분 입니다. 5호분의 피장자는 2호분묘의 피장자의 동생.아들.아버지 이며 1.3.4호분의 피장자는 5호분의 피장자의 아들.조카.손자 입니다. 5호분의 피장자는 일찍 죽은 탓에 왕이 되지 못했지만 그의 아들 혹은 손자가 왕이 되어 고추가에 봉해 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제가 제시한 기준 대로라면 2호분은 태조대왕, 1호분은 태조왕의 아들 막덕.막근 3호.4호분은 차대.신대왕 5호분은 태조왕의 아버지 재사의 무덤으로 볼 수 있습니다.(2호분의 피장자를 태조대왕으로 보았을 경우) 혹은 2호분은 미천왕, 1호분은 미천왕의 아들 무 3.4호분을 고국원왕과 봉상왕 5호분을 미천왕의 아버지 돌고의 무덤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2호분의 피장자를 미천왕으로 보았을 경우) 제 의견이 틀렸을 수도 있지만 다섯 무덤의 피장자들의 관계를 생각해 보신다면 제 의견이 맞을 가능성은 큽니다. 어쨌든 확실한 사실은 이 무덤들은 평원왕에 의해서 다시 만들어진 무덤들이며 이 무덤들의 무덤은 왕과 그의 가족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지금 집안에는 주인을 알 수 없는 고구려의 무덤들이 수만기 있습니다. 이 무덤들의 피장자를 밝혀내는 일은 잃어버린 고구려를 찾기 위해 꼭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이 고구려의 무덤들의 피장자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계시는 많은 분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바랍니다. |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어떤 소설의 제목이다. 하늘로 비상하려면 날개가 있어야 된다는 관념, 날개가 없으면 날 수 없다는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구절이기도 하다. 중근동과 유럽 사람들에게 하늘은 날개가 있는 존재에게만 허용된 세계였고, 날개 달린 것의 도움 없이는 이를 수 없는 공간이었다. 천사도 등에는 반드시 날개가 달려 있었고, 신들도 천상과 지상 사이를 오갈 때에는 거대한 새나 날개 달린 말의 힘을 빌렸다. 하늘과 땅 사이를 잇는 우주적 크기의 산이나 거대한 나무를 두 세계의 통로로 삼을 수는 있었지만 무한한 창공을 날아다니려면 날개가 필수적이라는 생각을 떨쳐내기 어려웠다. 공룡과 비슷한 모습을 한그리이스나 북유럽신화 속의 드래곤이 등에 박쥐의 가죽날개 같은 것을 달고 있는 존재로 묘사되는 것도 이러한 관념 위에서이다.
(그림1)오회분4호묘 벽화: 청룡
집안의 오회분4호묘 벽화에는 아름다운 오색청룡(五色靑龍)이 등장한다.(그림1) 화려하고도 복잡한 연속무늬 위에 묘사된 까닭에 창공 한가운데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앞발을 크게 내닫으며 포효하는 모습에서 우주적 수호신 특유의 힘과 기세는 완연히 느껴진다. 벽면에 가득 차게 그려진 청룡의 몸은 온통 비늘로 덮여 있고 몸통 부분은 색동주름치마를 입은 것처럼 긴 띠를 이루며 오색으로 채색되었다. 목과 몸통의 경계는 녹색, 적색 두 줄 목띠로 구분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연속마름모꼴 색띠가 차곡차곡 이어진 것처럼 묘사된 목 위에 덧그려진 불꽃 모양의 무늬이다. 양 어깨에서 날개처럼 뻗어나가는 불꽃 형태의 무늬가 사신이 뿜어내는 상서로운 기운을 나타낸 것이듯이 목 위의 무늬도 청룡의 기운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한다면 이 부분에 굳이 눈길을 모을 필요는 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신과 같은 신수(神獸)를 둘러싼 상서로운 기운은 어깻죽지나 허리, 네 발의 무릎 근처처럼 움직이는 힘이 강하게 나타나는 데에 묘사하는 것이 상식이고, 실제 고분벽화나 전각화(塼刻畵)에서 이와 같은 표현방식이 적용된 사례를 찾아보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벽화 속 청룡 목 위의 불꽃 모양의 기운은 무엇을 나타낸 것일까. 어떤 의도를 담은 표현일까.
중국 한대의 문헌 『논형(論衡)』에는 ‘용은 한 치의 나무, 곧 척목(尺木)이 없으면 하늘로 오르지 못한다.’는 구절이 있다. 그런데 시대를 한 참 건너 뛴 뒤 쓰인 당대의 문헌 『유양잡조(酉陽雜俎)』에는 ‘용의 머리 위에 한 가지 물체가 있으니, 박산(博山)처럼 생겼고 이름을 척목이라고 한다. 용은 척목이 없으면 하늘로 오르지 못한다.’는 글이 실려 있다. 수백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용이 하늘로 오르기 위해 디딤대로 삼았던 한 치 크기의 나무가 용의 머리 위에 붙어 있는 박산 모양의 승천 장치로 바뀐 것이다. 박산은 바다 위에 떠 있다는 신선의 세계로 한대에는 향로 뚜껑 도안에 많이 쓰인 전설상의 산이다. 박산향로는 한대에 특히 많이 만들어졌지만 남북조시대의 전각화에도 자주 등장할 정도로 후대까지 애용되었던 기물 가운데 하나이다.
당대 이전 어느 시기부터인가 척목이 용의 머리 위에 있는 물체로 인식되고 표현되기 시작했음은 고분벽화나 전각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남북조시대의 전각화 등에서는 화염보주 형태로 묘사된 척목을 청룡 뿐 아니라 백호의 목 위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그림2) 박산의 형태가 아닌 화염보주의 모습으로 그려진 것은 원하는 모든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전하는 화염보주에 대한 인식 때문일 것이다.
▲오회분 4호묘 널방 동벽의 청룡과 신선 |
지난 1998년 고구려 역사 유적을 답사하면서 중국 장춘시 길림성 박물관에 있는 오회분 4호묘의 모형 전시실에 들른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함께 갔던 사람들이 관람을 다 마치고 나올 때에도 나는 쉽게 그 전시실에서 발걸음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의 신앙 세계가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벽화 속에 가득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현재 이 모형 전시장은 없어졌으며, 그 대신 집안시 오회분 4ㆍ5호묘 곁에 벽화 전시장을 만들어 놓고 4호묘 내부를 찍은 비디오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벽마다 신선 그려져 있어
오회분 4호묘는 5호묘와 달리 사람들의 방문을 막아 벽화 상태가 좋은 편입니다. 1500 년 전의 그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채색을 아직 간직하고 있지요.
무덤 안 널길에 들어서면 좌우 벽면에 2 명의 무사가 섰습니다. 널방 안에 들어서면 사신(청룡ㆍ주작ㆍ백호ㆍ현무)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벽마다 그려진 신선입니다. 동벽에 1 명, 남벽에는 2 명, 서벽에는 3 명, 북벽에는 4 명 등 모두 9 명의 신선이 그려져 있지요.
남벽에는 흔히 주작이 2 마리 그려지기 마련인데, 오회분 4호묘는 무덤 입구가 남벽 중앙이 아닌 동쪽으로 치우쳐 있기 때문에 주작이 한 마리만 그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입구가 한쪽에 치우친 것은 오회분 5호묘와 다른 점입니다.
그리고 널방 네 벽의 모퉁이 아래에는 괴수, 위에는 용 두 마리가 교차해 있습니다. 또 네 벽의 윗부분에는 용이 서로 몸을 꽈서, 천장과 아래 공간을 구분 짓고 있습니다. 이것은 5호묘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천장 네 벽의 고임돌 아래에는 5호묘가 연꽃 문양이 있는 것과 달리 용이 그려져 있습니다. 더욱이 천장 맨 위 덮개 돌에는 황룡이 그려져 있어요. 이 4호묘의 황룡은 빨강과 노랑이 강렬하게 대비되어 강한 인상을 줍니다.
대장장이 신·수레바퀴 신도 섬겨
▲수레바퀴신
대장장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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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회분 4호묘는 5호묘와 달리 해신과 달신이 서로 다른 돌에 그려져 마주보고 있습니다. 또 아래 고임돌 벽면 가운데에는 용을 그려 넣어 두 신을 떨어뜨려 놓았고, 위쪽 고임돌 가운데에는 해ㆍ달ㆍ북두칠성 등을 그려 신들을 떼어 놓았습니다.
이처럼 오회분 4호묘는 5호묘와 비슷한 소재를 벽화에 그렸지만, 화가들이 다르게 그림을 그리려 한 흔적이 아주 뚜렷합니다. 유행만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개성을 살리려고 노력했던가 봐요.
위쪽 고임돌에 그려진 9 명의 신선은 거문고ㆍ소ㆍ횡적ㆍ뿔피리 등의 악기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남쪽에 그려진 신선은 약단지를 들었고요.
아래 고임돌에는 8 명의 신이 그려져 있는데 이 또한 오회분 5호묘와 닮았습니다. 동남쪽 고임돌에서부터 살펴보면 불꽃을 든 불의 신, 대장장이 신, 수레바퀴를 만드는 신, 숫돌에 쇠붙이를 가는 신, 용을 타고 모자를 쓴 신, 달을 든 달신, 해를 든 남자인 해신, 소머리를 한 농사의 신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신들을 보면, 그리스 신화에서 대장장이 신인 헤파이스토스가 12 신의 하나였던 것처럼 고구려인들도 대장장이ㆍ수레바퀴 신을 해신ㆍ달신처럼 중요한 신이라고 보았던 것을 알 수 있지요.
조선 시대에는 대장장이를 농민보다 못한 신분으로 여겼지만, 고구려는 달랐습니다. 대장장이들을 우대했기에 대장장이 신도 함께 섬겼을 테니까요.
고구려가 수공업이 발전하고 부유해진 이유를 이와 같이 고구려인의 신앙 세계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 김용만 소년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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