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실 관련 고전 모음 - 다섯 / 조선왕조실록

2014. 11. 21. 16:26향 이야기

 

 

 

 

 

    

 향실 관련 고전 모음 -  다섯  / 조선왕조실록

중종 14년 기묘(1519년) ~

 

 

 

  중종 14년 기묘(1519,정덕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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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21일 (임자)
조강에서 정이 같은 사도가 없음을 안타까워 하고, 간원의 직책에 대한 것을 논의하다

조강에 나아갔다. 상이 먼저 ‘정이(程頤)가 졸(卒)하였다.’고 쓰인 데를 가리키며 논하기를,
“정이가 공자와 맹자의 전승(傳承)되지 않은 학문을 체득하여 사람들 교회(敎誨)하기를 게으름없이 하였기 때문에 그 문하에서 배출된 학자가 가장 많고, 후세에는 그와 같은 사람이 없었다. 폐조(廢朝) 시절에는 비록 더러 남을 교회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마침내 화를 당함이 그러했고, 지금에 와서는 이 학문에 전력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했다.”
하매, 동지사 조광조(趙光祖)가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는 지극히 옳은 말씀이십니다. 사도(師道)가 세워진 다음에 후진들이 향방을 알아차려 어버이 섬김과 임금 섬기는 도리가 모두 그로부터 나오게 되는 것이니, 만일에 혹 사표(師表)될 만한 사람이 있다면 후진들의 향방이 일정해져 조정안에 명사(名士)들이 많이 있게 될 것입니다. 폐조 때는 사림(士林)의 화가 참혹하여 김종직(金宗直)의 문도(門徒)들이 모두 살륙을 당했고, 지금에 당해서는 종직과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림들 사이에는 더러 의구(疑懼)스러운 생각을 가져 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고, 또한 더러는 감히 감당하지 못하여 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며, 해보려 하는 사람도 단지 자기의 소견대로만 가르칠 뿐입니다.”
하고, 이청(李淸)은 아뢰기를,
“지금 혹시라도 정이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사도(師道)의 책임을 또한 모두 위임해야 합니다.”
하고, 광조가 아뢰기를,
“이때에 있어서는 비록 한 가지만 잘하는 사람이 있어도 모두 발탁하여 쓰니, 만일 정이와 같은 사람이 있다면 어찌 끌어다 쓰지 않겠습니까? 송(宋)나라 때에도 만일 정이를 등용하였다면 어찌 멸망하게 되었겠습니까? 지금 사도(師道)는 없으나 붕우(朋友)의 도리는 조금 남아 있어, 비록 옛날처럼 간절하게 권면하는 도리를 다하지는 못하지만 서로 규계(規戒)하고 책망하며 힘써 해가기 때문에 조정의 풍습이 이에 힘입어 조금 달라졌는데, 만일 뒷날에 조정이 변동된다면 반드시 붕당(朋黨)이라고 지목하여 공격하고 모함할 것이니, 이 글에 ‘조서하기를 제로(諸路) 및 감사(監司)의 직임에는 원우(元祐) 때의 학술(學術)을 배운 사람들을 임용하지 말라.’고 한 것이 곧 이것입니다. 지금 비록 힘써 다스리기를 도모하지만 뒷날의 일을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 조정이 완전하고 든든해진 후에야 소인이 저절로 간예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종조에 사대부들이 거의 모두 사장(詞章)만 숭상하고 학술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때 성종께서도 권장함이 없지 않았기 때문에 풍습이 이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붕우의 도리에 있어 비록 간절하게 권면하는 도리를 다하지는 못하였지만 또한 더러는 하였기 때문에 한때는 서로 마음을 놓고 교유(交遊)했던 것인데, 오래지 않아 참혹한 화를 만났었습니다. 대저 우리 나라는 사림의 화가 서로 잇달아 일어났었는데, 비록 일일이 들어 진달하지 않더라도 상께서 또한 반드시 아실 것이니, 오늘날 세상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나라는 본래 인물이 많지 않은데다가, 한 번이라도 인물이 나와 세상에 쓰이며 다스려 보기에 뜻을 두면 마침내는 사림의 화로 소탕이 됩니다. 이는 그 자신에 대해서는 염려할 것이 없지만 그런 사람이 죽음으로 해서 나라가 시들게 되니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세상에 있어서는 반드시 이런 일이 있지 않겠지만, 성자 신손(聖子神孫)의 때에 이르러 혹 있게 될까 싶습니다. 이러므로 옳고 그르다를 명백히 하지 않고 오로지 몸을 보전(保全)하기에만 뜻 두는 사람이 지금 세상에도 없지 않으므로 반드시 지금에 있어 사기(士氣)를 진작(振作)해야 하니, 이 시기가 매우 중대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세상에서는 정이 같은 사람을 얻기 어려우나 또한 없다고 할 수는 없으니, 만일 이런 사람이 있어 사람들 가르치기를 게으르지 않게 하며 사도(師道)를 자기의 책임으로 여긴다면 반드시 흥기(興起)하게 될 것이다.”
하매, 광조가 아뢰기를,
“정이가 만일 세상에 쓰였다면 그의 문인들이 각기 알고 있는 사람들을 천거하여 잘 다스린 세상을 일으키게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도 정이 같은 사람이 없다고는 할 수 없으니 초야에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비록 한 가지 재주만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모두 쓰이고 있으니 또한 반드시 있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대저 한때의 인물이 있은 다음에 한때의 다스림이 있는 법이나, 그 중에도 관계가 긴요한 바는 임금과 정승에게 달린 것입니다. 임금과 정승이 호오(好惡)와 시비(是非)가 분명하면 아랫사람들이 또한 반드시 생각하는 바를 펴게 되지만, 만일 임금과 정승이 호오와 시비가 분명하지 못하면 비록 한때의 인물이 있다 하더라도 있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대저 인재는 매우 중요한 관계가 있으니 배양(培養)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지금 삼공(三公)이 서사(署事)하는 규모가 이미 정해졌으나 대강령이 거행되지 못하여 공론이 대간에게 달렸으니, 대간에 적임자를 얻지 못한다면 참으로 안 될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대한 생각을 또한 두지 않아서는 안 된다. 성종조(成宗朝)에 현명한 사람들이 많이 배출되었었는데, 폐조 때에 이르러 남김없이 죽여 없앴으니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청이 아뢰기를,
“간원(諫院)의 직책은 보궐 습유(補闕拾遺)를 맡는 것으로 임금의 언어 동정이 잘못되는 때가 있으면 간원이 즉각 논하는 것인데, 우리 나라에서는 대궐 밖에다 관서(官署)를 두었기 때문에 모든 일을 대개 하리(下吏)들의 보고에만 의거하여 듣고 보게 됩니다. 이러므로 임금이 비록 잘못하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더러는 듣지 못하게 되니, 신의 생각에는 정원(政院) 곁에다 따로 하나의 관청을 설치하여 간원의 관원이 한 사람씩 순번으로 직숙(直宿)하며 임금의 동정과 과실을 빠짐없이 듣게 하되, 소소한 일이라면 즉각 간하고, 큰 일이라면 출근하기 기다렸다 동료들과 의논하여 논계(論啓)하도록 한다면 거의 직책을 다하게 될 것이고, 비록 직숙은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아침에 들어갔다 저녁에 나온다면 또한 방해롭지 않으리라 여깁니다. 지금 청정(聽政)하시기로 하는 때로서 법도가 일신해졌는데, 이도 또한 아름다운 일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간원이 대궐 밖에 있어 과연 먼 듯하다. 무릇 일을 때로는 혹 미처 듣지 못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지금은 상하가 막힌 시절이 아니니, 따로 간원을 둠이 옳은지 나는 모르겠다.”
하고, 이어 대신의 뜻은 어떤지를 묻자, 영사 안당이 아뢰기를,
“간원은 헌부(憲府)와 같은 예가 아닙니다. 신이 성종조에 보건대, 간원은 단지 임금의 덕에 관하여 논할 뿐이고 사람 논박에는 참예하지 않았었는데, 근래에 인물을 탄핵하는 폐단이 점차로 이루어져 드디어 헌부처럼 하므로 간원의 소임이 크게 번다하고 중해졌습니다. 지금 또한 따로 대궐 안에다 간원을 설치하여 순번으로 직숙하게 한다면 반드시 미처 본원에서 회좌(會坐)하지 못하는 폐단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따로 간원을 둠도 과연 불가하고, 간원으로 하여금 단지 임금의 덕에 관해서만 논하고 인물을 논박하지 못하게 함도 또한 불가하다.”
하매, 청이 아뢰기를,
“간원은 곧 보궐 습유하는 직책을 맡은 것이니, 모름지기 좌우에 있게 해야 하고 소원하게 할 수 없습니다.”
하고, 광조는 아뢰기를,
“청의 말이 좋기는 합니다. 그러나 대궐 안에 이미 승정원이 있고 또한 홍문관이 있으니 지금 다시 간원을 둘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향실(香室) 일은 매우 중요하다. 내가 조종조의 옛적 일을 보건대, 단지 승지만 가서 보도록 한 것이 아니라 더러는 친림(親臨)하실 때가 있었으니, 나도 또한 친히 가보고 모든 제사의 축문도 또한 친압(親押)하고 싶은데 가하겠는가? 이는 곧 임금의 거둥이어서 신중히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좌우의 의견들은 어떠한가?”
하매, 광조가 아뢰기를,
“이는 매우 아름다운 일이니 거행하심이 좋으나 다만 향실이 매우 좁으니 어찌하리까? 그러나 아름다운 일을 자리가 좁은 것 때문에 중지할 수는 없습니다.”
하고, 박세희(朴世熹)는 아뢰기를,
“신이 보건대 향실의 지형이 과연 협소했으나 그 안의 모든 사상(事狀)은 매우 정결했습니다. 다만 소위 사령(使令)이란 사람들의 관복(冠服)이 조례(皂隷)들과 다름이 없어 이런 것이 설만(褻慢)한 듯하였으니, 사령의 명칭을 고치고 또한 관복을 변경하여 별감(別監)들이 착용하는 것과 같이 함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과연 옳은 말이다. 문소전(文昭殿)·연은전(延恩殿)에도 수복(守僕)이 있으니 향실도 또한 이 예대로 함이 가할 듯하다.”
하였다.
【원전】 15 집 557 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의식(儀式) / *사상-유학(儒學) / *윤리(倫理)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의생활(衣生活)

 


[주D-001]정이(程頤) : 송대(宋代)의 학자. 자는 정숙(正叔), 시호는 정공(正公). 그의 형 정호(程顥)와 함께 유학(儒學)을 부흥시켰다. 저서로 《역전(易傳)》·《춘추전(春秋傳)》·《어록(語錄)》 등이 있다. 《송사(宋史)》 권427 《송원학안(宋元學案)》 권15.
[주D-002]원우(元祐) : 송 철종(宋哲宗)의 연호.
[주D-003]보궐 습유(補闕拾遺) : 임금의 잘못을 바로 잡아 고치게 하는 것.
[주D-004]향실(香室) : 국가의 대소 제사에 쓰는 향과 축문을 보관해둔 직소. 교서관(校書館) 소속이다.
[주D-005]친압(親押) : 왕이 향실에 거둥하여 친히 축문 글자를 짚어 가며 틀린 데가 없는지 살피는 것.
[주D-006]수복(守僕) : 제사의 일을 맡아보는 구실아치

 

 

 

  중종 14년 기묘(1519,정덕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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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28일 (기미)
향실에 친히 행하여 8월 삭제와 각 능·전 제사에 쓸 향축을 친압하다

친히 향실(香室)에 행행하여 8월 삭제(朔祭)와 각 능(陵)·전(殿) 제사에 쓸 향축(香祝)을 친압(親押)하였다.
【원전】 15 집 560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중종 14년 기묘(1519,정덕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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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29일 (경신)
향실에 친히 행하여 향축을 친압한 것은 좋은 일이나 예에 어긋남이 있었다고 아뢰다

영의정 정광필·좌의정 신용개가 아뢰기를,
“듣건대 상께서 향실에 행행하여 향축을 친압하였다 하니, 이는 매우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신 등이 《오례의주(五禮儀註)》를 보건대 ‘향축을 친압하는 날 임금이 사정전에 나아가 교서관 정자(校書館正字)로 하여금 향축을 모시고 와 어전(御前)에 놓도록 하여 상이 즉시 친압하고, 비록 더러 친히 전하지 않게 되더라도 친압은 반드시 그날 의식(儀式)대로 거행한다.’ 하였습니다. 신 등의 생각에, 《오례의주》는 세종 때에 시작하여 성종 때에 완성한 것으로서 일대(一代)의 제도가 남김없이 다 갖추어진 것이니, 마땅히 《의주》대로 거행한다면 정성과 공경을 다하는 도리에 있어 합당하게 되리라 여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문이 그렇다면 마땅히 그대로 준행해야 한다. 다만 이번은 내 억견(臆見)으로 거행한 것이 아니라, 전일에 경연에서 우의정 안당 및 좌우 제신(諸臣)들과 의논하여 거행한 것이다.”
하였다.
【원전】 15 집 560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중종 14년 기묘(1519,정덕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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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12일 (계유)
향실에 나아가 문묘의 석전 제사 축문을 친압하다

상이 향실(香室)에 나아가 문묘(文廟)의 석전(釋奠) 제사 축문을 친압(親押)하였다.
【원전】 15 집 562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중종 15년 경진(1520,정덕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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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12일 (신미)
전향할 때에 대내에 들어와서 수결 받게 하다

전교하였다.
“전향(傳香)할 때에 자주 향실(香室)에 가서 직접 수결(手決)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기는 하지만 진실성이 없는 것이므로, 대신들도 친압(親押)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으니, 이뒤로는 향축단자(香祝單子)에 계(啓)자를 찍어 내려보내거든 즉시 대내(大內)에 들어와 수결을 받도록 하되, 이를 항규(恒規)로 삼으라.”
【원전】 15 집 621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중종 15년 경진(1520,정덕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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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14일 (신미)
정원에서 선릉의 급사한 전사관 윤시호로 인해 다시 전수를 장만하여 제사지내는 문제로 아뢰다

정원(政院)이 아뢰기를,
“선릉(宣陵)의 전사관(典祀官) 윤시호(尹時豪)가 급사(急死)하였는데 제물(祭物)과 숙수(熟手)가 다 곁에 있었으므로 범염(犯染)되었으니, 그 전물(奠物)을 쓰기가 매우 미안합니다. 곧 사관(史官)을 보내어 예관(禮官)과 대신(大臣)에게 수의(收議)하게 하고 다시 전수(奠需)를 장만하여 보내어 제사지내는 것이 어떠합니까? 또 능참봉(陵參奉)도 다 범염되었으므로 제사에 참여할 수 없는 형편이니, 입번(入番)한 충의위(忠義衛) 2인에게 말을 주어 보내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전사관의 연고 때문에 제사를 안 지낼 수는 없다. 곧 예조 낭관(禮曹郞官)을 불러 본조의 당상(堂上)에게 묻게 하라.”
하매, 정원이 또 아뢰기를,
“전사관은 치재(致齋)하지 않은 자를 차출하여 보낼 수 없으니, 향실(香室)에 입직한 관원에게 말을 주어 보내는 것어떠합니까?”
하니, 상이 ‘그리하라.’ 하고 전교하기를,
“전자에 문소전(文昭殿)에 입직한 충의위가 급사하였으나 친제(親祭)하지 않았는데, 돼지가 공릉(恭陵)의 영토(塋土)를 팠을 때와 종묘(宗廟)의 우양(牛羊)이 죽었을 때에는 반드시 경계를 보인 것이리라고 생각하여 다 친제하였다. 이번 일은 저번 일과 같지는 않으나 친제하는 것이 어떠한가? 전수를 다시 장만하고 내일의 제사는 멈출 것인지를, 사관을 보내어 대신에게 아울러 묻게 하라.”
하매, 대신이 의논드리기를,
“내일의 제사는 전물을 다시 장만하고서 지내는 것이 마땅합니다. 다만, 상릉(上陵)의 예(禮)는 평시에 행하는 것이라면 워낙 마땅하겠으나 사람이 우연히 죽은 것 때문이라면 희생으로 경계를 보인 것과 같은 유가 아닌데, 특별히 이 때문에 별제(別祭)한다면 괴탄(怪誕)한 것이 될 듯합니다.”
하고, 예조 판서(禮曹判書)가 의논드리기를,
“전사청(典祀廳)도 범염되었으므로 전물을 장만할 수 없으니, 따로 전사청을 설치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하니, 전교하시기를,
“괴탄하다는 것은 알 수 없다. 다만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행하려는 것이 아니라, 능에 참배하는 것은 상시의 예이며 이제 이 변을 당하여 마음에 미안하므로 물은 것이다. 사람은 과연 희생과 다르니, 대신의 의논도 마땅하다.”
하였다.
【원전】 15 집 645 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식생활-기명제물(器皿祭物)


 

[주D-001]숙수(熟手) : 음식 만드는 사람.
[주D-002]치재(致齋) : 제사 전에는 심신을 깨끗이 하고 부정(不淨)한 일을 멀리하는데, 이것을 재계(齋戒)라 한다. 며칠 동안의 재계 중에서, 처음 수일 동안은 애문(哀問)을 삼가고 음악을 듣지 않고 흉한 일을 대하지 않는 등 근신하는데 이것을 산재(散齋)라 하고, 그뒤 바로 제사 전까지는 제사 외의 모든 일을 생각하거나 간여하지 않고 오로지 제사에 관한 일만을 하면서 재계하는데 이것을 치재(致齋)라 한다.
[주D-003]문소전(文昭殿) : 본디 태조 때에 태조의 비(妃) 신의 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의 사당을 세워 인소전(仁昭殿)이라 하였던 것을 태종 때에 이 이름으로 고쳤고, 세종 때에 태조의 태종의 위패(位牌)를 모셨다.
[주D-004]공릉(恭陵) : 예종의 비(妃) 장순 왕후(章順王后) 한씨(韓氏)의 능. 파주(坡州)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