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숭도감(封崇都監)

2014. 11. 18. 16:29우리 역사 바로알기

 

 

 

 

 

      

봉숭도감(封崇都監) 조선국 대한제국 역사

2014/11/18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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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숭도감(封崇都監)

 

    

 

 

http://blog.naver.com/msk7613    김민수 님의 글 중에서.... 

 

 

1394(태조 2)년 10월 21일 태조 이단이 내전에서 1백 8명의 승려에게 밥을 먹이어 국사(國師)의 봉숭례(封崇禮)를 행하여 안장을 갖춘 말인 안마(鞍馬)를 하사하였다.1400년 6월 16일 조선국 2대 국왕 정종이 봉숭도감(封崇都監)을 설치하였으니 장차 태상왕의 존호(尊號)를 올리려 함이었다. 정승(政丞) 성석린(成石璘)·민제(閔霽)·판3군부사(判三軍府事) 하윤(河崙)으로 제조(提調)를 삼았다. 7월 2일 태상왕 태조 이단이 좌정승 성석린(成石璘)·우정승 민제(閔霽)·판삼군부사 하윤(河崙)에게 각각 구마(廐馬) 1필, 단초(段綃) 각각 1필을 하사하고, 3사 좌사(三司 左使) 이직(李稷)·참판삼군부사(參判三軍府事) 최유경(崔有慶)·첨서(簽書) 이문화(李文和)·전서(典書) 한상경(韓尙敬) 등에게 단초(段綃) 각각 1필을 하사하였으니, 모두 봉숭(封崇)하는 예(禮)에 집사(執事)한 사람들이었다.1404년 7월 20일 태종이 세자 봉숭도감(世子 封崇都監)을 설치하였다. 1418년 6월 3일 태종이 봉숭도감(封崇都監)을 설치하여 세자를 책봉(冊封)하는 의주(儀注)를 마련하고, 찬성 최이(崔迤)·참판 이적(李迹)을 제조(提調)로 삼았다. 영의정 류정현(柳廷顯)이 2품 이상을 거느리고 대궐의 뜰에 나아와서 김한로(金漢老)의 죄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418년 8월 12일 세종이 상왕 태종 및 대비에게 책보(冊寶)를 올리려 봉숭도감(封崇都監)을 설치하여 박은과 이원으로 도제조(都提調)를 삼고 박신·허지·허조·이명덕으로 제조(提調)를 삼았다. 1421년 8월 22일 예조에서 세자 봉숭도감(世子 封崇都監)을 두자고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9월 7일 참찬 허조와 이조 참판 원숙으로 태상왕(太上王) 봉숭도감 제조(封崇都監 提調)로 삼았다. 9월 11일 사간원(司諫院)에서 상소하기를 “원육전(元六典)에 무릇 대소 관원의 절하고 읍(揖)하는 예에 대간원(臺諫員)에 대해서는 보통과 달리 답례한다는 것이 이미 일정한 법제가 되어 있거늘 이제 봉숭도감 제조(封崇都監 提調) 등이 말하기를 ‘비록 대간(臺諫)이라도 어명을 받든 것이 아니면 바로 속육전(續六典)에 정한 대로 계급이 한 등급 현격하면 답례가 없다.’는 조문에 좇아서 평상 하급 관원으로 대하여 예하는 데 답례하지 아니하니 신 등은 생각하기를 대간(臺諫)은 전하의 이목(耳目)과 같은 벼슬이어서 상시로 봉명하고 있는 것이니 어찌하여 여러 도감(都監)의 각색(各色)에 참여하였으면 문득 평상 하급 관원들과 같이 대하겠습니까. 청컨대 일체로 원육전에 의하게 하소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