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탁을 받고 “무엇을 써야 하나”하고 몇 며칠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러다가 걸레 스님 중광을 저승에서 먼 길을 오시게 하여 푸닥거리 한 판을 벌이기로 했다.
돌아가신 후 처음으로 벌이는 굿판이어서 질 좋은 고량주와
스님이 평소에 좋아하시던 맛있는 음식들을 진설하는 등 마음속으로 큰상을 차렸다.
물론 우리들의 놀이판에 풍악이 빠지면 안 되겠기에
마음의 귀(心耳)로 들어야 들을 수 있는 사물놀이패도 미리 초청해 두었다.
깽 마구 치익 칙!
망자와 벌이는 굿판은 어차피 추억이란 낡은 필름을 되돌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옛날을 찍은 사진첩을 펼쳐 놓으니 스님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스님은 더 이상 망자가 아니다. 영가 속의 스님이 웃고 있다.
그러니까 삼십 년 세월 저편인 팔십 년대 초 스님과 함께 했던
아름다웠던 날들의 기억들을 숨김없이 진열하면 그게 ‘그 때 그런 일’의
대체용품으로 쓸모가 있을라나 모르겠다.
#2. 스님의 광기
세인들이 걸레라고 부르는 중광 스님은 사실 행주에 가까운 사람이다.
헤진 바지에 누더기 군복이 걸레로 보일 뿐 속은 멀쩡하다.
그의 머릿속은 시심으로 가득하고 가슴은 항상 예술혼으로 불탔으며
몸은 행위예술의 재료로 값지게 쓰일 준비를 완료하고 있다.
멋진 심미안을 지니고 있는 스님에게 걸레라는 칭호는 부당하다.
한 시대를 휩쓸고 지나간 풍류객이다.
정말 걸레 같은 정치꾼들에 비하면 스님의 사고와 행위는 얼마나 정당하고 아름다운가.
다만 승려의 도리인 참선과 염불을 버리고 성직자로서 체통을 지키지 못한 죄는
‘파계승’이란 족쇄를 차고 평생을 갚아도 모자랄 수도 있다.
그리고 비구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계율인 끓는 피의 외침을 억제하지 못하고
바람난 수캐처럼 돌아다닌 것도 죄라면 죄일 수도 있다.
스님은 그걸 청복이라고 했지만.
나는 스님의 불같이 타오르는 광기를 사랑한다.
스님이 연애를 하든, 잿밥에 관심을 갖든 그런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스님의 동침도반(同寢道伴)역을 더러 맡았던 내가 느낀 소회는
‘스님은 천재에 가까운 기인’이란 사실이다.
이건 가까이에서 지켜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는 숨은 진실이다.
#3. 멕시코 룸살롱에서
어느 봄날. 중광스님이 하나님처럼 모시는 시인 구상 할아버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응, 잘 있지. 다섯 시쯤 동대구역에 내려 한정식 집으로 갈 거야. 걸루 와.”
할아버님은 김수환 추기경, 조각가 고 문신 선생 내외, 중광 스님과 함께 대구에 오셨다.
추기경님은 바로 교구청으로 들어가시고 남은 분들끼리 음식점으로 오신 것이다.
식사자리는 반가운 안부를 주고받으며 화기애애했다.
유독 스님만이 안절부절, “빨리 일어서자”며 주위 사람들을 채근했다.
대구의 술집이라면 어느 누구보다도 좋아하는 할아버님도 건강 때문에
문신 선생 내외분과 함께 일찍 숙소로 들어가셨다.
그러자 스님은 불알에 요령소리가 날 정도의 빠른 걸음으로 멕시코 룸살롱으로 진군했다.
알고 보니 대구 마산 간 고속버스 승무원(그 때는 고속버스에도 스튜어디스가 탑승했다)인
묘령의 아가씨와 만날 약속장소가 바로 그곳이었다.
‘염불 보다는 잿밥’이라더니 스님은 술과 안주는 거들떠보지 않고
아가씨 보살에게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밥값과 술값을 책임져야할 대구 사람들은 난감했다.
스님으로부터 그림이라도 한 폭 그려 받아야 그런대로 본전을 건질 텐데
스님은 전혀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스님의 왼손은 아가씨의 젖무덤을 더듬고 있었고
매직잉크를 쥔 오른손은 안주쟁반 위에 황칠만 해대고 있었다.
부아가 치민 나는 황칠접시를 뺏어 인조대리석 바닥에 패대기를 쳐버렸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스님은 “저 놈이 사람 잡겠네”라고 한마디 하고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H씨에겐 석가모니 얼굴에 예수 그리스도의 가시 면류관을 씌운 그림을,
K씨에겐 달마선사를, 멕시코 여주인에겐 해바라기를 그려 주었다.
그리곤 나를 한번 힐끔 쳐다보더니 “넌 엿이나 먹어.”하는 투로
털이 숭숭 난 남성에 잔뜩 풀을 먹여 “옛따"하고 나에게 밀어 주었다.
그날 밤에 그려준 그것이 가장 중광적인 그림이었다.
그 그림은 지금도 내 서가의 한 쪽 구석에서 면벽 가부좌 한 채로
참선 중이지만 빳빳한 풀끼는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아마도 스님 것을 닮은 모양이다.
#4. 코코 카페에서
접시를 깨뜨린 사건이 있고 난 후 스님과 부쩍 가까워졌다.
석가와 가섭의 미소처럼 이심전심으로 통한 것일까.
아무 볼일도 없으면서 살짜기 대구로 내려와
“아무도 부르지 말고 둘이서만 마시자.”며 술집 여기저기를 돌아 다녔다.
한번은 중앙파출소 옆 누드모델 출신이 운영하는 코코라는 술집에서
‘카페 등불 아래 밤 드리 노닐다’보니 밤이 너무 깊어졌다
. 카페의 여주인이 맘에 들었는지 아무리 숙소로 돌아가자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우리 자리는 삐걱 계단 위의 이층 구석이었는데 스님은 오줌이 마려우면
아래 층 변소로 내려가지 않고 제자리에서 질금거렸다.
하도 애를 먹이기에 스님을 버려두고 그냥 집으로 와 버렸다.
카페 주인도 시달리다 못해 문을 밖에서 잠그고 퇴근해 버리자
스님은 기나긴 겨울밤을 꼬박 혼자서 새웠다.
이른 아침 주인이 퇴근할 때 문틈에 끼워둔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서니
“야, 임마. 추워 죽겠어. 해장국 집에 빨리 가자,”며 고함을 질러댔다.
나중 이 이야기를 구상 할아버님과 김종규 회장(한국박물관협회장)등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김 회장은 “스님은 내 승용차 안에서도 오줌을 여러 번 쌌어.”
라고 말하며 "스님은 걸레를 오줌에 헹굴 사람이야.”하고 흉을 보았다.
#5. 운문사 선방에서
어느 해 초 여름. 스님이 사진가 김태선 씨와 함께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주무시겠다며 대구로 내려 오셨다.
스님은 오자마자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러닝셔츠와 팬티 차림으로 집안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스님의 러닝셔츠는 젖 가슴팍을 가위로 도려내어 마치 브래지어를 걸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 집 아이들도 스님이 그러시고 다니는 모습이 신기한지 뒤를 졸졸 따라 다녔다.
이튿날 아침 서울에서 항공편으로 도착한 여성 치과의사와 보살님 한 분을 맞아
우리 집에서 아침식사를 한 후 운문사로 향했다.
운문사에서의 볼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나는 운전기사가 되어 손님들의 수행임무를 맡게 되었다.
보살님들은 불공이 목적인 것 같은데 스님은 그게 아니었다.
어느 비구니 스님의 자색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그 스님을 만나는 게 목적인 것 같았다.
보살님들은 법당으로 들어가셨고 우리는 비구니 스님의 방으로 안내 되었다.
그 스님은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은 무슨 영화에 출연하는 미스 코리아 출신 배우 같았다.
마침 점심시간이어서 밥상이 방으로 들여졌지만
스님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공양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그 비구니 스님만 쳐다보면서 호감 살 만한 이야기들을 밑도 끝도 없이 늘어놓았다.
그 비구니 스님은 아무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위엄과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다.
스님이 열심히 무엇을 이야기해도 그냥 웃기만 하는 품새가
“난 스님의 속마음을 다 읽고 있어요.”라고 대답하는 것 같았다.
그 후에도 스님과 단 둘이서 운문사를 찾았지만 관심과 무관심의 대결은 걸레 스님의 완패로 끝나고 말았다.
나는 지금도 비구니 스님의 법명을 기억하고 있지만 이 자리에서 밝힐 수는 없다.
#6. 감로암 법당 앞에서
동대문 옆 충신동 15번지 감로암은 중광 스님이 살던 곳이다.
프레스 센터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먼저 스님이 계시는 감로암부터 들리기로 했다.
“스님, 오늘 서울 가요. 술상 좀 봐 나요.” “그래 알았어. 오는 길은 알지.”
마침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로댕 전도 볼겸 상경길에 따라 나선 후배와 함께 오후 세시경 감로암에 도착했다.
공양간 가마솥에서는 대병 청주 두병이 끓는 물속에서 따끈하게 데워지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법당 앞에는 연화대에 점잖게 앉아 계시는 부처님조차 항마촉지인을 풀고
“맛 좀 보았으면”싶은 조기찜이랑 여러 가지 안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님의 어머니인 혜련 스님이 옆에 앉아 “저 놈이 너희 집에 가서 애를 많이 먹였다면서”
라고 말씀하시면서 내 손을 꼭 잡아 주셨다.
우리는 입가심으로 맥주까지 마신 후 스님과 함께 종로 2가에 있는 로망스라는 술집으로 밀고 나왔다.
몸을 술에 흥건하게 담갔다 빼내보니 젖은 빨래 꼴이었다.
감로암을 다녀온 후 친구 중에 누가
“어느 절에 갔더니 스님이 공양을 대접하면서 곡차까지 따라 주더라.”는
자랑을 하면 나도 모르게 빙긋 웃음이 나온다.
“법당 앞에 술상 차리고 조기 찜 머어(‘먹어’의 안동 사투리) 봤어.
부처님 코앞에서 청주 마시며 삼겹살 머어 봤어.”
요즘도 답사 여행 중에 법당 앞에 서면 한상 잘 차려 스님을 모시고 술을 마시고 싶어진다.
아마 이 병은 죽기 전에는 낫지 않을 것이다.
#7. 청호장 여관에서
동아쇼핑에서 <걸레 스님 중광>이란 연극이 무대에 올려졌다
. 주최 측에서 스님에게 개막 무대 인사를 부탁한 모양이다.
그동안 스님이 대구에 오실 때마다 남들 몰래 그림 한두 점씩 내게 갖다 주시면서
“이건 너 줄려고 정신 들여 그린거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림이 내 맘에 들지 않아 가까운 친구들에게 나눠줘 버렸다.
스님은 자신의 그림이 명품 대접을 못 받는데 대한 불만을 자주 털어 놓았다.
“야, 넌 그림 볼 줄도 그렇게 모르냐.” 그래도 나는 끝까지 버텼다. “잘 좀 그려 봐요.”
스님은 내려오시기 전에 전화로 “그래, 그림 제대로 한번 그려보자.
히끼시(배접을 미리 해 둔 화선지)를 백 장쯤 사놓아라.”는 주문이 있었다.
그러나 대구 시내 화방을 모두 뒤져도 서른 장 밖에 구하지 못했다.
그날은 술집에 들리지도 않고 여관으로 직행했다.
“어떤 그림을 그려야 네놈 마음에 들겠느냐.”면서 “화선지를 빨리 펴라”고 야단이었다.
그림은 쉽게 풀려 나오지 않았다.
소주와 맥주를 마시다 중국집에서 배달시킨 고량주를 마셔도
엔지(NG)만 날뿐 그림 같은 그림은 그려지지 않았다.
자정이 지나고 새벽 두 시가 넘어섰다.
무엇에 화들짝 놀란 듯 갑자기 일어난 스님은 붓끝을 세워 한 일자를 긋더니
다시 붓을 눕혀 밑으로 내려 그었다.
그런 다음 네 개의 점을 찍고 나니 한 마리 학이 비상할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포스트 칼라의 붉은색을 학의 머리와 꽁지에 찍으니 영락없는 홍학이었다.
정말 걸작이었다. 스님이 그린 그림 중에 최고 작품이었다.
“스님 그대로 계속 그려요. 진작 이렇게 그리지요.” “똥강아지 같으니, 넌 뭘 좀 알어.”
스님이 그날 밤 그린 학은 표구가 되어 우리 집에서 이십 수년을 살았다.
그런데 미국에 살고 있는 막내아들이
“아부지, 이 학을 타고 미국에 갔다가 보고 싶을 때 다시 타고 오면 안 될까요.”하고 보채길래
스님이 나에게 하듯 “옛따.”하고 주어 버렸다.
우리 집에는 풀이 빳빳하게 먹여진 룸살롱 쟁반에 그려진 고추 그림 밖에 없다.
#8. 스님을 그리워하며
스님의 몸이 편찮아 백담사 선방에서 요양 중이란 소식을 풍편에 들었다.
하루는 큰맘 먹고 백담사로 올라갔다.
스님 곁에서 하룻밤 자고 대청봉으로 오를 계획이었다.
공양 간으로 찾아가 보살님에게 스님 안부를 물었더니 “닷새 전에 서울로 떠나셨어요.”라고 했다.
맥 풀린 다리로 대청봉에 올랐다가 대구로 내려왔다.
스님과의 이승에서의 인연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나중 저승에서 만나면 하직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해 뵈올 낯이 없을 것 같다.
구상 할아버님은 중광 스님의 화집 ‘더 매드 몽크’(The Mad Monk)에 이렇게 썼다.
“오늘의 예술가 일반은 시적이긴 해도 시인이 아니다.
그 중에서도 중광은 시인이다.
시가 표현 이전에 존재하듯 중광의 그림은 언어 이전의 시다.”
시인의 멋진 추모사다.
최근 계명대에서 열리고 있는 중국 국보 전에 테이프 커팅을 하기 위해
대구로 내려오신 김종규 회장에게 “중광 스님과 함께 오시지 왜 혼자 오셨어요.”라고 농을 걸었다.
그랬더니 “글쎄 말이야, 나도 많이 보고 싶어.
우리 다시 만나면 승용차를 아예 요강으로 내줘 버리지.”하고 빙그레 웃으셨다.
정말이지 나도 스님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