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7현 / 파한집에서 - 문장(文章)의 가치 外

2015. 2. 20. 00:08잡주머니

 

 

 

 

 

       파한집에서 - 문장(文章)의 가치| ─‥‥고전♡수필방

 

글길 | 조회 66 |추천 0 | 2010.12.20. 10:02

 

   세상사 중에 빈부(貧富)나 귀천(貴賤)으로 그 높고 낮음을 정할 수 없는 것은 오직 문장(文章)뿐이다.  대개 완성된 문장은 해와 달이 하늘에 빛나고 운연(雲煙)이 허공에서 집산(集散)하는 것 같아서, 눈이 있는 사람이면 보지 않을 수 없고 가릴 수도 없다. 그러므로 갈포(葛布)를 입은 비천한 선비로도 넉넉히 무지개처럼 찬란한 빛을 드리울 수 있으며, 조맹(趙孟)의 귀함이야 그 세도가 나라를 부유하게 하고 집안을 넉넉하게 하는 데 부족함이 있으랴만 문장에 있어서는 칭찬할 수가 없다.  이렇기 때문에 문장은 일정한 가치를 지니고 있어 부(富)로써도 그 가치를 감소시킬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양 영숙(區陽永叔=구양수)은, 후세에 정말 공정하지 못하다면 지금까지도 성현(聖賢)이 없었을 것이다."고 하였다.(卷下 22)

 

 복양 오세재는 재사이나 여러 번 과거에 들지 못했다. 홀연 눈에 병이 나 앓으며 시를 지으니,

 

 

늙어 병까지 생겨
한평생 가난한 선비로다
현화는 어른거리고
자석도 광채를 잃어 가네.
등잔 앞에서 책 보기 겁나고
눈 위에 햇빛 보기 부끄러워,
금방이 파하기를 기다려
눈을 감고 앉아 세상을 잊네

老與病相隨 노여병상수
窮年一布衣 궁년일포의
玄華多掩暎 현화다엄영
紫石少光輝 자석소광휘
怯照燈前字 겁조등전자
羞看雪後暉 수간설후휘
待看金枋罷 대간금방파
閉目坐忘機 폐목좌망기

 

라고 하였다. 세 번 장가를 들었으나 매양 버리고 가니, 아들과 송곳 찌를 땅조차 없어 단사표음(簞食瓢飮)도 계속하지 못하다가, 나이 오십이 되어서야 급제하여 객지인 동도에서 떠돌다가 죽었다. 그렇지만 문장에 이르러서는 곤궁하다고 해서 그것을 버릴 수 있겠는가.

-  빈부 귀천으로 가릴 수 없는 문장의 가치

 

 

  대개 문장(文章)은 천성(天性)에서 얻어지는 것이나 작록(爵祿)은 사람이 소유하는 것이므로, 도리로 구한다면 쉽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만물에게 아름다운 것만을 독점하게 할 수는 없었으므로, 뿔이 잇는 것에게는 이(齒)를 버리게 하고, 날개가 있으면 두 다리만 있게 했으며, 이름 있는 꽃에는 열매가 없고, 채색 구름은 흩어지기 쉽게 되었으니, 사람에게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다. 뛰어난 재예(才藝)를 주면 빛나는 공명(功名)은 주지 않게 되는 이치가 이렇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자(孔子)·맹자(孟子)·순자(筍子)·양자(陽子)로부터 한유(韓愈)·유종원(柳宗元)·이백(李百)·두보(杜甫)에 이르는 분들은 비록 문장이나 덕예(德譽)로서는 넉넉히 천고에 치솟을 수 있을지라도 지위는 경상(卿相)에 오르지 못했으니, 장원(壯元)으로 높히 뽑히고 재상에 오를 수 있는 것은 실로 고인이 말하는 양주가학(楊州駕鶴)이라 하겠으니 어찌 흔한 일이라 할 수 있겠는가.(卷下 23)          

- 훌륭한 문장가 중에 지위가 높은 이가 없는 이유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운연(雲煙) : 구름과 안개.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갈포(葛布) : 칡의 섬유로 짠 베. '갈포를 입은 선비', 벼슬하기 전의 선비를 가리킴.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조맹(趙孟) : 중국 춘추 시대 진(晋)의 귀족. 중국 역대 명필의 하나.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구양 영숙(區陽永叔) : 구양수(歐陽修)의 이름. 중국 송나라 사람으로 문명(文名)이 높았고 당송 팔대가의 한 사람이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작록(爵祿) ; 관직과 작위, 녹봉(綠峰).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순자(筍子) : 성악설을 주장한 중국 전국 시대 사상가.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양자(揚子) : 중국 전한(前漢)의 유학자. 문인.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한유(韓愈) : 중국 당나라의 문장가. 당송 팔대가의 한 사람.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유종원(柳宗元) : 중국 당나라의 문장가. 고문(古文)의 대가.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덕예(德譽) : 덕과 명예.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경상(卿相) : ① 재상(宰相) ② 3정승과 6판서.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장원(壯元) : 서당에서 글을 제일 잘 짓거나 성적이 첫째임. 또는, 그 사람.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양주가학(楊州駕鶴) : 많은 즐거움을 함께 받고 싶어하는 것을 비유한 말.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세상사 중에∼문장(文章)뿐이다.

  부유함과 가난함,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문장도 그 격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글을 쓰는 개인의 신분은 훌륭한 문학과는 전혀 별개의 문체이다. 문학의 독자적 가치를 인식하고 있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후세에 정말 ∼ 없었을 것이다."
 
후세인들이 옛 성현의 덕을 공평하게 평가하여 추앙하듯, 시인의 훌륭한 작품도 그의 외적 여건에 구애받음이 없이 공평하게 평가된다면 그 가치가 깊이 전해질 것이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장원(壯元)으로 ∼ 있겠는가.
  훌륭한 문장가이면서 동시에 높은 벼슬에 오르는 일은 흔하지 않다. 뛰어난 재예(才藝)와 공명(功名)을 함께 갖추기 어렵다는 사실의 강조로 볼 수 있다.

 

 

 

  시화(詩話)는 체계적인 비평은 아니나 시 창작에 얽힌 일화나 짤막한 감상평 등을 통해 문학에 대한 그 나름의 견해를 드러낸 것이다. 본문에 쓰인 '문장(文章)'은 오늘날 '문학(文學)'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 글은 원래 제목이 없었으나 주요 내용이 문학의 가치에 대한 것이므로 대부분의 역자들이 '문학의 가치'라고 달고 있다.

  이 글에 제기된 문학은 문학외적인 것으로 평가해서는 안 되며, 문학 그 자체에 일정한 가치가 있는 만큼 그것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은 오늘날에도 거듭 주장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을 입증시키기 위해 이인로는 오세재의 불우한 일생과 그의 시를 함께 제시하면서, 인생은 불우했으나 시는 뛰어나다고 하여, 자기 주장의 근거로 삼았다. 반대로 보면 같은 죽림(竹林)고회(高會)의 일원인 오세재를 높이면서 그 근거로 문학 자체의 독자적 근거를 내세워 그들의 문학적 입장을 표명한 것으로 문학이란 부나 권력으로부터 독립되어 그 나름대로 지고한 가치를 생산·보유하고 있다는 이인로의 문학관을 잘 보여 주는 글이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인로의 문학관

 이인로는 무신란으로 권력을 잃은 문벌 귀족 출신이기 때문에 자기의 포부를 펼칠 수 있는 현실적 참여가 상당히 제한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문학 자체에 독자적 가치를 두는 입장을 세웠다. 아울러 시 비평의 기준으로는 의미와 표현 양쪽 모두를 중시했으나 대체로 표현, 즉 시어의 갈고 닦음에 보다 더 비중을 둔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시화(詩話)의 등장 배경

 '파한집'은 우리 문학사에서 비평이 본격적으로 등장했음을 보여 주는 첫 사례다. 문학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창작해야 하는가, 어떤 작품이 좋은가 하는 등등의 문제를 제기하는 비평이 본격적으로 대두했다는 것은 그 시기에 우리 문학이 상당히 발전했음을 뜻한다. 즉 문학을 하는 것에 대한 반성과 방향 모색이 요구될 정도로 문학의 판도가 커진 것이다. 아울러 문학에 대한 견해의 차이가 작가 개개인의 차원이 아닌 집단의 차원에서 생겼는데, 이는 서로의 견해를 옹호하고 강화해야 할 사회적 필요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파한집(破閑集)

 고려 중기의 문신인 이인로의 시화·잡록집. 3권 1책. 목판본. 저자가 69세로 사망하기 직전에 지은 것으로 그의 사후 40년 뒤 인 1260년 3월에 아들 세황(世黃)이 수집하여 간행하였다. <파한집>의 '파한(破閑)'이란 글자 그대로 한가함을 깨뜨린다는 뜻이나 단순함 심심 파적의 저술이 아니라 우리 나라 고전 시학의 귀중한 연구 자료이다. 그는 파한이라고 이름 붙인 까닭을 세상사에 마음을 두지 않고 산림에 은둔하며 온전한 한가로움을 얻음은 장기·바둑 두는 일보다 낫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내용을 검토하고 나면 그가 말한 한(閑)의 실체를 깨닫게 될 것이다. 내용은 주로 시화·일화·기사 등으로 볼 수 있다. <파한집>은 우리 나라 시화집의 효시라고 볼수 있다. 이인로는 이 책에서 우리 나라 명유(名儒)들의 시 작품들이 기록으로 남겨지지 못한 채 인멸 되어가는 것을 막아야겠다는 사명감에서, 또 시를 삶의 정수로써 사랑하고 음미하면서 많은 시화를 수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에는 다른 문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시편들이 상당수 실려 있고 시학의 근본 문제에서 작시법(作詩法) 혹은 구체적인 작품평에 이르기까지 두루 제시되어 있다. 이는 한국 최초의 비평문학서로서도 가치가 있으며, 고려시대의 각판(刻板) 잔존본(殘存本)으로 소중한 것이다. 후일 최자(崔滋)는 이 책을 본떠서 《보한집(補閑集)》을 썼다. 1911년에 조선고서간행회(朝鮮古書刊行會)에서 중간하였고, 64년에 고려대학 민족문화연구소에서 파한집의 역주본(譯註本)을 발행하였다.

 

이완근과 이학준의 희망의 문학 이인로(李仁老/1152~1220)

 고려시대의 학자. 자 미수(眉). 호 쌍명재(雙明齋). 초명 득옥(得玉).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머리를 깎고 절에 들어가 난을 피한 후 다시 환속하였다. l180년(명종 10) 문과에 급제, 직사관(直史館)으로 있으면서 당대의 석학(碩學) 오세재(吳世才)·임춘(林椿)·조통(趙通)·황보 항(皇甫抗)·함순(咸淳)·이담지(李湛之) 등과 결의, 함께 어울려 시주(詩酒)를 즐겼다. 이들을 강좌7현(江左七賢)이라고 한다. 신종 때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고종 초에 비서감(秘書監)·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었다. 시문(詩文)뿐만 아니라 글씨에도 능해 초서(草書)·예서(隸書)가 특출하였다. 저서에 《은대집(銀臺集)》 《후집(後集)》 《쌍명재집(雙明齋集)》 《파한집(破閑集)》 등이 있다.

 

 

   ㅡ 다음 카페 < 문학의 만남 >   글길 님의 글 중에서 전재 ......

 

 

 

경북인물열전 (74)

거북이 2011.02.07 21:21

경북 인물열전 (56)

   이규보와 망년지우로 지냈던 해좌칠현의 좌장 오세재(吳世才)

                [新增東國輿地勝覽 卷21. 慶尙道 慶州府 寓居 條]

                                                                   이  웅  재


  오세재(吳世才: 1133[인종 11]∼?)는 고려 중기 명종 때의 학자요 문인이다. 본관은 고창(高敞)이고, 자는 덕전(德全) 호는 복양(濮陽)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6권 전라도 고창현(高敞縣) 인물 조를 보면, 한림(翰林) 오학린(吳學麟)의 손자이며, 세공(世功), 세문(世文)의 아우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주역』을 암송하고 손수 육경(六經)을 베끼고 외웠다. 시문에도 뛰어나서, 소 모는 아이나 말 끄는 하인이라도 그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이규보는 그의 시를 평하기를, ‘준매경준(遵邁勁俊: 재주와 지혜가 매우 굳세면서도 뛰어남)’이라 하였고, 최자(崔滋)는 ‘풍섬혼후(豊贍渾厚: 그 글의 맛이 넉넉하면서도 정이 두터움)’라고 평한 바 있다.

 

  그러나 타고난 재주가 너무나 뛰어나서 자유분방하여 법도에 맞지 않으므로 과거를 볼 적마다 불합격되었다. 그는 글씨에도 뛰어났으니, 경기체가인「한림별곡 翰林別曲」제3장에 나오는 “오생, 유생 양선생 위 주필 경하여(吳生劉生 兩先生 偉 走筆 景何如: 오생과 유생 두 선생의 주필[달리듯이 빨리 써 내려가는 글 또는 글씨, 여기서는 글씨를 가리킨 듯]의 광경 그것이 어떠합니까?[대단하지 않습니까?])”에서 오생은 바로 오세재를 가리킨다고 한다.

   명종 때에 와서야 겨우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친구인 이인로(李仁老)가 세 번이나 추천하였으나 그 성격으로 인하여 끝내 벼슬에 오르지는 못하였다.

 

   그는 53세의 나이로 당시 18세였던 이규보(李奎報)와 나이를 따지지 않는 망년지교(忘年之交)를 허락하였고, 이른바 해좌칠현(海左七賢: 江左七賢, 竹林高會)의 한 사람으로 이인로 등과 시주(詩酒)로 즐겼다.

   해좌칠현이란 무인(武人)들이 정권을 장악하자, 출세를 단념하고 초야(草野)에 은거하며 음주와 시가(詩歌)를 즐기며 지내던 사람들이다. 이인로(李仁老), 오세재(吳世才), 임춘(林椿), 조통(趙通), 황보항(皇甫沆), 함순(咸淳), 이담지(李湛之) 등 7명은 중국 진대(晋代)의 죽림칠현(竹林七賢)에 비기어 우리나라의 7현이라는 의미로 해좌칠현(海左七賢)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우리나라 청담(淸談)의 풍류는 여기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가 있다. 그 해좌칠현의 좌장(座長)격인 사람이 바로 오세재였다.

 

  『파한집』에서는, 세 번 장가를 들었으나 매양 버리고 가니, 아들과 송곳 찌를 땅조차 없어 단사표음(簞食瓢飮)도 계속하지 못하다가, 나이 오십이 되어서야 급제하였으나, 가난에 시달리다가 죽고 말았다고 한다. 그의 만년은 외할아버지의 출생지인 동경(東京: 지금의 慶州)으로 제고사(祭告使)의 축사(祝史)가 되어 역마를 타고 가서는 곧 그곳에 살다가 죽었던 것이다.

 

   그가 죽자, 이규보는 그의 재주를 아끼고 삶을 애석히 여겨「오선생덕전애사(吳先生德全哀詞)」를 지어 추모하였다. 여기에서 이규보는 그를 복양선생(濮陽先生)이라 부르고, 친구 아닌 문하생의 입장에서 사사로이 현정선생(玄靜先生)이라 시호(諡號)하여 영전에 바쳤다.

 

   현재 전하는 작품으로는 『동문선』에 오언율시 「극암(戟巖)」등 2편과 칠언율시 1편이 있다.

「극암」은 개성부의 북쪽 31리에 있는 바위인데, 그 전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창바위   戟巖(극암)

        

    북쪽 산마루 우뚝 솟은 저 바위를                        北嶺巉巉石(북령참참석)

    국인(國人)들은 모두 창바위라 부른다네.                  邦人號戟巖(방인호극암)

    멀리 학 탄 왕자진(王子晉)을 칠 듯                       逈樁乘鶴晋(형장승학진)

    가파르게 높아 하늘에 오르는 무함씨(巫咸氏)를 찌르려네   高刺上天咸(고자상천함)

    자루박아 휘두르면 번갯불이 번쩍                        揉柄電爲火(유병전위화)

    창끝을 씻으면 맵짜기가 서릿발                          洗鎽霜是鹽(세봉상시염)

    어느 때 이를 병기로 만들어서                           何當作兵器(하당작병기)

    초(楚) 나라도 패케 하고, 범(凡) 나라도 망케 할꼬.        敗楚亦亡凡(패초역망범)

 

*왕자진(王子晉):주나라 영왕(靈王)의 태자 진(晋)이 신선의 도를 닦아서 피리[笙]를 불며 학을 타고 갔다고 한다.

*무함씨(巫咸氏):산해경(山海經)에 오른손에는 푸른 뱀, 왼손에는 붉은 뱀을 쥐고 있는 여인 무당들이 있는 무함의 나라가 있다고 한다.

*범(凡) 나라: 장자(莊子)에 나온다.


   이규보는『백운소설』에서 이 「극암」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오세재(吳世才)는 시를 지으면 호탕하고 힘이 있어서, 사람들의 입에서 회자되는 것이 많지 않음은 아니나, 능히 어려운 운자를 잘 붙이는 것은 보지 못했다. 한 번은 북산(北山)에 올라가 극암(戟巖)을 읊으려 하여 옆에 있는 사람에게 운자를 부르라고 했다. 그 사람은 골탕을 먹일 생각으로 어려운 운자를 골라 불렀다. 그러나 오세재는 조금도 머뭇거림이 없이 즉시 그 운자에 화답하여 읊었다는 것이다. 역시 작시(作詩)에서의 ‘주필’임에 손색이 없는 일이었다 하겠다.


   김유신 장군이 우뚝 서 있는 경주의 황성공원엘 가면, 목월의 송아지 노래비, 김동리의 문학비와 함께 그의 문학비가 탐방객들을 반기고 있다.

 평생을 남에게 매이지 않았던 선생의 삶과 드높은 문학세계를 기리기 위해 만년 낙향지인 경주에  2001년 10월 전국의 선비들이 문학비를 세운 것이다. 대리석에 새겨진 ‘창바위’ 오언율시는 뛰어난 재주를 가지고도 불우하게 지냈던 그의 일생을 1000여 년이 지난 세월 속에서도 무언으로 대변하고 서 있다.

 

 

경북 인물열전 (56) 이규보와 망년지우로 지.hwp

 

   ㅡ 다음 블로그 < 사람들 > 이웅재 거북이님 의 글 중에서 전재 .........

 

 

 

 

  성씨와 본관

예천임씨(醴泉林氏)

 

 

 

[요약정보]

본관명 예천(醴泉)
성씨명 임씨(林氏)
본관소재지 경상북도(慶尙北道) 예천군(醴泉郡)
본관이칭
시조명 임충세(林忠世)

[상세내용]

본관 연혁

  예천(醴泉)은 경상북도 북서쪽 끝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변진미리미동국(弁辰彌離彌凍國)이라는 소국이 있었다. 신라 영역으로 들어가 수주현(水酒縣)이 되었고, 757년(신라 경덕왕 16) 예천군이라 하였다. 935년(고려 태조 18)에 보주(甫州)로 개칭하였다. 1012년(현종 3) 용궁군(龍宮郡)으로 고쳐져 상주목에 속하였다. 1018년(현종 9) 안동부(安東府)에 편입되었다가 명종 때 기양현(基陽縣)으로 승격, 1204년에는 지보주사(知甫州事)로 승격되었다. 1416년(태종 16) 예천군으로 개칭되었으며, 1729년(영조 5)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연루되어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738년 군으로 환원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용궁군(龍宮郡)을 병합하였고 1937년 예천면은 읍으로 승격되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Re: 죽림 7현 - 고전소설 01| 문학

大江. | 조회 50 |추천 0 | 2003.04.25. 17:50

 

죽림 7현 ;
  竹林七賢이란 魏晉 정권 교체기의 7인의 명사를 일컫는 말로, 阮籍??康?向秀?王戎 ?山禱?劉伶과 阮籍의 조카 阮咸을 가르킨다.


2.죽림 칠현의 기록 
   본래 竹林七賢이란 말은 南宋 劉義慶의 世說新語 에서 처음 보이고 있다. 즉 "陳留의 완적과 제 國의 혜강, 河內의 행수 세사람은 나이가 비슷했는데, 혜강이 조금 어렸다. 이 모임에 어울림 사람은 帝國의 유영과 진유의 완함, 하내의 향수, 琅邪의 왕융이 이었는데, 7인은 항상 죽림에 모여 마음대로 술을 마시며 놀았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죽림칠현이라 일컬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또 세설신어에는 다음과 같은 말도 나온다. "謝?등 여러사람이 함께 竹林의 優劣을 論하는데, 謝公이 말하기를 先輩들도 처음에 七賢을 칭찬과 나무람을 하지 않았다." "나 (왕융)는 전에 ?叔夜(혜강)와 阮嗣宗(완적)과 함께 이 술집에서 흥취있게 마시곤 했는데 竹林之遊에서 나는 말석이었다." "康,완적,산도,유영이 죽림에 모여 흥취있게 술을 마시는데 왕융이 뒤에 왔다. 步兵(완적)이 말하기를 "俗物이 또와서 사람의 興趣를 깨네"하니,왕유이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들의 興趣가 어찌 다시 깨질수 있으리오?"했다.". 이외에도 陶淵明集券九 聖賢群輔錄에는 "河內 山陽에 함께 기거하면서 모두 죽림에서 노니니 세상 사람들은 竹林七賢이라 이름 불렀다"라는 기록도 보인다. 그런데 竹林이란 말 자체에 의문이 제기되기도하여 몇몇 학자들은 그것이 지리학적 이름이라 하기도 한다. 또한 七賢은 林下諸賢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아뭏든 이 모임은 당시의 혼란한 정치상황에서 벗어나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끼리 죽림에서 소요하며, 술과 시?음악을 함께하고 淸談을 나누던 隱者들의 集團임에는 틀림이 없다.


임춘 ; 1147 - 1197
자 기지(耆之). 서하(西河) 출생. 과거에 수차 낙방하였으며, 1170년(의종 24) 정중부의 난 때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이인로(李仁老)·오세재(吳世才) 등과 함께 강좌칠현(江左七賢)의 한 사람으로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다.
한문과 당시(唐詩)에 능하였으며, 이인로가 그 유고(遺稿)를 모아 《서하선생집(西河先生集)》 6권을 엮었다.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에 시문(詩文)이 기록되어 있고, 두 편의 가전체소설이 전한다. 예천 옥천정사(玉川精舍)에 제향되었고, 저서에 《국순전(麴醉傳)》 《공방전(孔方傳)》 등이 있다.

이규보 ; 1168 - 1241
본관 황려(黃驪:驪興). 자 춘경(春卿). 호 백운거사(白雲居士)·지헌(止軒)·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 초명 인저(仁). 시호 문순(文順). 1189년(명종 19) 사마시(司馬試), 이듬해 문과에 급제, 1199년(신종 2) 전주사록(全州司錄)이 되고 1202년(신종 5) 병마녹사 겸 수제(兵馬錄事兼修製)가 되었다. 1207년(희종 3)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권보직한림(權補直翰林)으로 발탁, 참군사(參軍事)·사재승(司宰丞)·우정언(右正言)을 거쳐 1219년(고종 6) 좌사간(左司諫)으로서 지방관의 죄를 묵인하여 계양도호부부사(桂陽都護府副使)로 좌천되었다.

1220년(고종 7) 예부낭중(禮部郞中)·한림시강학사(翰林侍講學士)를 거쳐 30년 위위시판사(衛尉寺判事)가 되었으나, 팔관회(八關會) 행사에 잘못을 저질러 한때 위도(蝟島)에 유배되었으며 1232년(고종 19) 비서성판사(書省判事)에 승진하고,이듬해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정당문학(政堂文學)·참지정사(參知政事)·태자소부(太子少傅) 등을 거쳐 1237년(고종 24)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감수국사(監修國事)·태자대보(太子大保)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호탕 활달한 시풍(詩風)은 당대를 풍미했으며, 특히 벼슬에 임명될 때마다 그 감상을 읊은 즉흥시는 유명하다. 몽골군의 침입을 진정표(陳情表)로써 격퇴한 명문장가였다. 시·술·거문고를 즐겨 삼혹호선생이라 자칭했으며, 만년에 불교에 귀의했다.

저서에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백운소설(白雲小說)》 《국선생전(麴先生傳)》 등이 있으며, 작품으로 시(詩)에 〈천마산시(天摩山詩)〉 〈모중서회(慕中書懷)〉 〈고시십팔운(古詩十八韻)〉 〈초입한림시(初入翰林詩)〉 〈공작(孔雀)〉 〈재입옥당시(再入玉堂詩)〉 〈초배정언시(初拜正言詩)〉 〈동명왕편(東明王篇)〉, 문(文)에 〈모정기(茅亭記)〉 〈대장경각판군신기고문(大藏經刻板君臣祈告文)〉 등이 있다.


무신란 ;
   12세기에 들어와 지배층 상호간에 치열한 갈등이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으로 폭발하였다. 격심한 정쟁을 겪은 뒤에도 문벌귀족이 정치 사회적 지위를 독점하는 정치형태는 지속되었다. 하급 지배층의 진출이 억제되고 활동이 위축되었으며, 그 가운데 특히 무신들의 불만이 높아져 갔다. 기층민들의 동요는 유망에서 더 나아가 저항 도전으로 표출되었다. 의종 24년(1170)에 일어난 무신란은 이러한 정세를 배경으로 발생한 것이다.

   무신란은 일차로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의 갈등에서 폭발한 것이다. 고려시기에 무반은 문반과 더불어 지배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문반은 문직(文職)을, 무반은 문직(武職)의 선에 따라 승진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 무반은 문반에 비해 여러가지로 차별대우를 받았다. 무반은 승진에 있어서 정3품의 상장군까지만 승진할 수 있었고, 그 이상 승진하면 문반직을 받도록 되어 있었으나 이러한 일은 거의 불가능하였으므로 결국 무신은 2품 이상의 재상이 될 수 없었다. 군사행정을 담당하는 병부의 판사(判事)나 상서(尙書)는 모두 문반이 차지하였으며, 외적(外敵)에 대한 출정군(出征軍) 편성시 그 지휘부의 원수(元帥) 부원수(副元帥) 등은 문관이 맡았다. 그리고 군사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는 양계(兩界)의 병마사(兵馬使)도 문관이 차지하였으며, 노상상견례(路上相見禮)에서 무반의 최고인 정3품 상장군이 문반의 종3품과 동등하게 대우를 받는 등 사회적 대우에서도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차별대우를 받는 무신들은, 의종의 실정을 겪으면서 그들의 불만이 높아져 갔다. 의종은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개혁적인 정치를 펴보려고 하였으나, 문신 지배층의 틈 속에서 제대로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문무의 대립을 조정할 수 있는 능력도 없었다. 이에 문무반의 갈등이 매우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무신들이 난을 일으킬 기미는 감지되고 있었다 [자료1]· [자료2].

   무신란 발생의 또 하나의 배경으로 군인들의 불평을 들 수 있다. 군인들은 유사시에는 전쟁에 동원되었으며, 평소에는 각종 공역(公役)에 동원되었다. 그리고 군인전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여 그들의 불평 불만이 누적되어 갔다. 이 때문에 군인들은 무신들의 쿠데타에 적극적인 협조를 하게 되었다.

   무신란은 1170년(의종 24) 8월 국왕의 보현원(普賢院) 행차를 계기로 발발하였다. 정중부 이의방(李義方) 이고(李高)가 주모하였으며, 순검군(巡檢軍)을 모아 호종(扈從)한 문관(文官) 및 대소신료(大小臣僚)·숙관(宿官)을 몰살하였다. 그리고 개경으로 가서 '무릇 문관을 쓴 자는 서리(胥吏)라도 씨를 남기지 말고 모조리 죽여라.'라고 외치면서, 많은 문신을 살륙하였다. 국왕은 거제도(巨濟島)로, 태자(太子)는 진도(珍島)로 내쫓았으며, 대신 왕제(王弟)인 익양공(翼陽公) 호(皓)를 왕으로 삼았다(庚寅의 亂) [자료3].

   무신들은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정치운영을 전담하였다. 개경에서 문신들이 대거 죽음을 당하여 제거되었지만, 쉽게 무신이 정권을 장악할 수는 없었다. 과거의 문신과 연결된 세력이 사회에 널리 포진하고 있어 반무신(反武臣)의 항쟁이 발발하게 된 것이다.

   무신란이 일어난 3년 뒤 1173년에, 동북면(東北面) 병마사인 김보당(金甫當)이 무신토벌과 왕의 복위(復位)를 기도하여 기병하였다. 김보당은 정중부와 이의방을 타도하고 전왕을 다시 세우려고 하였으며, 동북면 지병마사(知兵馬使) 한언국(韓彦國)도 거병하여 이에 응하였다. 그리고 장순석(張純錫) 등으로 하여금 거제도에 있는 국왕을 데려다가 계림(鷄林)으로 나와 살게 하였다. 이 김보당의 난은 다음 달 안북도호부에서 그를 붙잡아 보냄으로써 진압되었다 [자료4]. 김보당의 난 후에, 1170년에 화를 면했던 많은 문신이 또 다시 크게 해를 입게 되었다[계사의 난].

   반무신란은 불교계에서도 일어났다. 승려들 가운데는 문벌귀족 문신가문 출신이 많았으며, 따라서 무신란으로 그들의 부형(父兄)이 죽음을 당한 예가 적지 않았다. 승려들은 하나의 사회세력으로서 외침이 있을 때 활약한 예가 많았다.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는 데 큰 활약을 하였으며, 윤관이 여진정벌을 위한 항마군을 편성하는 데에 참여하였다. 또 이자겸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자겸의 아들인 의장(義莊)이 승병(僧兵)을 이끌고 출동한 적이 있었다.

   1174년 정월에 귀법사(歸法寺)의 승려 100여 명이 이의방을 죽이려고 개경으로 진출하여 이의방의 군대와 충돌하였다. 다시 중광사(重光寺) 등 4개 사찰의 승려 2천여명이 무기를 들고 이의방을 공격하였다. 이의방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중광사 홍호사(弘護寺) 귀법사 용흥사(龍興寺) 지묘사(妙智寺) 복흥사(福興寺)를 파괴하였다. 개경 부근의 사찰에서 승려를 동원하여 무신세력을 무너뜨리려는 시도였지만, 엄청난 희생을 치리고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자료5].

   비슷한 시기에 또한 서경유수 조위총(趙位寵)이 정중부 이의방 등의 토벌을 목표로 거병하였다. 김보당의 난과는 다소 성격을 달리하지만, 무인정권에 대한 반항이라는 점에서 일치하였다. 무인정권에 상당한 위협을 가져다 주었지만, 그의 거사도 실패로 돌아갔다 [자료6].

   무인들은 이러한 반발을 물리치고서 정권은 장악하여 그후 100년간 그 정권을 유지되어 갔다. 무인들이 중앙의 정치기구를 장악하고 권력을 독점하였다. 무신란을 계기로 해서 문벌귀족이 지배하던 체제는 종말을 고하였으며, 그들과 연결된 불교세력도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무신란을 고려시기를 전기와 후기로 나누는 분수령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몽고침입 ;
원의 내정간섭원의 내정간섭으로 고려는 강제로 두 차례 일본 원정을 떠나게 되고 고려의 자주성은 시련을 맞게 되었다.


① 원 간섭기 : 13말 이후 80여년 간

ㄱ. 몽골제국->세조 쿠빌라이 즉위, 원으로 국호 변경, 대도로 수도를 옮김.

ㄴ. 고려 : 무신 정권 붕괴

→ 국왕 중심의 정치 회복, 국왕과 문신이 정치 주도

②원의 내정 간섭 방법

ㄱ. 정동행성의 설치 : 일본원정을 위해 설치되었던 감독기관->계속 존속

ㄴ. 원 공주와 혼인한 고려 국왕을 통한 간접 통치

③원 간섭기 이후 나타난 변화들

ㄱ.일본에 두 차례 강제 원정 : 태풍으로 실패

->인적, 물적, 군사적, 경제적 피해를 입음

ㄴ. 영토 상실 : 원의 직속령 설치

-동녕부 : 자비령 이북 지역 ->충렬왕 때 반환

-탐라총관부 :제주도 ->충렬왕 때 반환

-쌍성총관부 : 철령 이북 지역 ->공민왕 때 공격하여 영토 회복

ㄷ. 관제 용어와 왕실 용어의 격하

ㄹ. 풍속의 변화

- 몽골풍의 유행 : 변발 등 ->두루마기, 연지 곤지,족두리,수라, 진지

- 공물, 매, 공녀 요구->조혼의 악습

(2)개혁정치의 시작원의 세력을 등에 업은 권문세족이 등장하였으나 이들을 제거하기 위한 충선왕등의 개혁은 실패하였다.



①권문세족(친원파)의 등장

ㄱ.원의 세력을 등에 업은 군인, 역관, 환관 출신이나 그 친척들

ㄴ. 백성의 토지를 빼앗아 농장 경영

ㄷ. 가난한 백성들을 노비로 만들고 면세 면역의 각종 특권 향유

ㄹ. 불교의 폐단를 옹호하고 개혁을 반대

ㅁ. 결과 : 조세 수입의 감소->국가 재정 큰 타격

②개혁 정치의 실패

ㄱ. 충선왕, 충목왕의 정치와 경제 제도 개혁 시도 =>실패

ㄴ. 실패 이유 : 원의 간섭과 개혁 추진 세력이 미약

 

    ㅡ 다음 카페 < 구들이의 문학자료실 >  대강님의 글 중에서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