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광스님의 대표작 <허튼소리>

2014. 12. 20. 11:21잡주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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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레스님 중광 —그는 과연 파계승인가?| ♠▒ ▷사이버법당
베르닉도 | 조회 189 |추천 0 | 2014.01.15. 16:03

 

 

 

걸레스님 중광 —그는 과연 파계승인가?

 

 

 

반은 미친듯이 반은 성한듯이 세상을 걸림없이 살다간 한 마리 잡놈 걸레스님!

21세기 최대의 기인이었던 중광스님—

그는 진정한 성자인가? 예술가인가? 파계승인가? 아니면 인간 중퇴자인가?

 

술과 여자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귀를 쫑긋 세우고 당장 찾아나섰던 걸레스님은 하루에 담배 20갑, 정종 5병을 먹었다. 많은 여성들과 동침을 하고 애정은 인간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동물에게도 있다며 고양이, 돼지, 말과 애정을 나누는 등 온갖 기행과 스캔들을 일으켜 불경죄로 종단에서 승적을 박탈당하기도 했고 그 유명한 <허튼소리>라는 책을 내자마자 당국에 의해 판매금지를 당했고, 김수용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자 제2의 비구니 파동을 일으켜 전국 종단에서 영화상영금지 가처분까지 당했고, 이에 격분한 김수용감독은 감독은퇴선언까지 하기에 이르렀던 최고의 문제작이었다.

 

중광스님은 매년 4월 10일이면 법당에 촛불을 밝히고 스스로 자작한 제문을 읽었다. 자신이 입적하였으니 영가제사를 올린 것이다. 이승에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제문을 잃고 난 중광은 목탁을 치며 무상계를 읽었다. 삶과 죽음이 분리되어 고혼만이 앉아 마치 독백을 하는 것 같았다. 자성이 무중력세계에 떠 있는 것을 바라보며 자기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었다.

 

중광은 자작한 제문처럼 스스로 자신을 비하하여 가짜중이고 땡땡이라는 모든 속어를 동원하여 중광 영가야! 하고 불렀다.

이러한 의식은 절규에 가까웠다. 번뇌의 뒷골목까지 자신을 몰아붙여 그곳에서 자성을 확인하는 무서운 자기 실험이고 견성실험이다. 그리고 자신이 이승에 머물러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육신은 땅에 묻혀 살덩이는 썩어버리고 앙상한 뼈만 남아 있다고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뼈로 숨을 쉬고 뼈로 말을 하고 뼈로 걸어다니는 것이었다.

 

나는 가짜중 땡땡이 올시다

마을에서도 못살아 머리깎고

절에서도 못살아 쫓겨나고

중도 소도 아닌 중음신이 된

가짜중 땡때이 올시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이시여!

나는 죄가 많아 파계승

부처님께 가사장삼을 바치고

중광은 사십구제를 올립니다.

중광 영가야! 중광 영가야! 중광 영가야!

너는 어찌된 물건이기에 이 체제에서

각설이 노름도 제대로 못하고 고혼이 되었느냐

죽이면 죽, 밥이면 밥, 고기면 고기, 술이면 술,

담배면 담배, 여자면 여자 그대로 일체를 버리지 아니했건만

나는 파계승 나는 파계승

갖지도 않고 버리지도 안했건만

넓은 공간에 창구멍하나 그만큼 만들어 놓고

따뜻이 비쳐 오는 빛을 몸에 받아가며

담장 밑에 앉아 속옷에 있는 이를 잡는다.

뚝 뚝 뚝

발에 채이는 돌처럼 밟히는 쇠똥처럼 살아도

못살아 이십원짜리도 못된 나는 가짜중 땡땡이 올시다.

중광 영가야! 중광 영가야! 중광 영가야!

 

허튼소리 4

 

한만춘 판사 자모님 49제를 지내 달라기에

서슴치 않고 대답을 했지

그리고 현금 2만원을 달라고 했지

마침 돈쓰고 싶은 일이 있어서

그리고 밥상에 기어 올라갔지

밑천이라곤 뱃속에 똥뿐인데

김혜윤 영가야!

이름을 불러놓고 할 말이 있어야지

갑자기 이미자 노래 생각이 떠오르더군

그래서 냅다 꽃피는 유달산아 꽃을 따던 처녀야!

신나게 불렀지

영가야!

내가 부른 노래는 영가가 부른 노래니라

속히 속히 일러라

주장자를 세 번 내려쳤더니

늙은 노송이 귀를 막고 돌아서 간다

그래놓고 법상에서 내려왔더니

잿손님들이 쑥덕쑥덕하더군.

 

중광스님은 1935년 제주도에서 출생하여 1960년 경남 양산 통도사 구하스님 제자가 되었고, 이후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종회의원을 역임하였고, 노수현화백에게 그림을 사사받은 후 영국 왕립 아시아학회 초대 선화선시를 발표하였고, 미국에서 <THE MAD MONK>를 발간하여 동양의 피카소라는 칭송을 얻기에 이르렀다. 미 버클리대, 샌프란시스코 잰 센터,로스앤젤리스 젠 센터,스탠포드대에서 선화선시를 강의하기도 했다.

또한 영화 <청송으로 가는 길>에 직접 출연하여 대종상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기도 하였고, 말년에는 도자기 예술에 혼을 사르기도 했으며 2002년 3월 경기도 곤지암 토굴에서 세상을 떠났다. (67세, 법랍 41세)

 

* 중광은 불교 전통의 최고의 가르침을 깊이 깨닫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잘 훈련된 참선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결코 불교를 배반한 승려가 아니다.

  당신은 저명한 동양의 화승이며, 동양의 피카소요.

  당신의 그림은 피카소보다 낫소

 

                         -루이스 랭카스터(미 버클리대 동양학 교수)

 

 

허튼소리. 1 허튼소리. 2

 

 

 

* 중광은 이제 고전적 달마에서 벗어나 스스로 달마의 자체에 발길을 들여놓고 자 신이 달마임을 실현   하고 있다. 남이 볼 수 없는 예리한 칼을 들고 인간 원형을 찾아내고 나아가 불필요한 살점을 깎으며, 또 하나의 인간 최선을 만들고 있다.

                              -김정휴스님

 

이 책을 읽지 않고 중광을 논하지 말라!!

    중광스님 10주기를 맞아 판매금지 당했던 중광스님의 대표작 <허튼소리>가 다시금 발간되었다.

 

 

 

 

 

 

 

- 다음 카페 <석란정> 베르닉도 님의 글 중에서 전재 ....

 

 

 

 

 

걸레 중광스님| ″``°³о♡ 한잔★그리움

☆공명목☆남포동 블루스 | 조회 74 |추천 0 | 2010.08.07. 02:14

걸레 스님 중광과 그 주변


#1. 푸닥거리 한 판

남들이 알지 못하는 ‘그 때 그런 일’은 내겐 없다.

비화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무슨 은밀한 이야기를 털어 놓거나

자랑할 만한 것을 기억으로 갖고 있질 못하다.

내가 훌륭한 사가(史家)라면 현상 뒤에 숨어 있는 본질까지도

능히 꿰뚫어 볼 수 있는 혜안으로 오늘(現在)에 앉아 어제(過去)와 내일(未來)을

주섬주섬 챙겨가며 입담 좋게 ‘그런 일들’을 풀어 낼 수 있으련만 그러하질 못하다.

그래서 이 글을 쓰면서도 송구스런 마음을 지우지 못하고 있다.


청탁을 받고 “무엇을 써야 하나”하고 몇 며칠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러다가 걸레 스님 중광을 저승에서 먼 길을 오시게 하여 푸닥거리 한 판을 벌이기로 했다.

돌아가신 후 처음으로 벌이는 굿판이어서 질 좋은 고량주와

스님이 평소에 좋아하시던 맛있는 음식들을 진설하는 등 마음속으로 큰상을 차렸다.

물론 우리들의 놀이판에 풍악이 빠지면 안 되겠기에

마음의 귀(心耳)로 들어야 들을 수 있는 사물놀이패도 미리 초청해 두었다.

깽 마구 치익 칙!


망자와 벌이는 굿판은 어차피 추억이란 낡은 필름을 되돌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옛날을 찍은 사진첩을 펼쳐 놓으니 스님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스님은 더 이상 망자가 아니다. 영가 속의 스님이 웃고 있다.

그러니까 삼십 년 세월 저편인 팔십 년대 초 스님과 함께 했던

아름다웠던 날들의 기억들을 숨김없이 진열하면 그게 ‘그 때 그런 일’의

대체용품으로 쓸모가 있을라나 모르겠다.


#2. 스님의 광기


세인들이 걸레라고 부르는 중광 스님은 사실 행주에 가까운 사람이다.

헤진 바지에 누더기 군복이 걸레로 보일 뿐 속은 멀쩡하다.

그의 머릿속은 시심으로 가득하고 가슴은 항상 예술혼으로 불탔으며

몸은 행위예술의 재료로 값지게 쓰일 준비를 완료하고 있다.

멋진 심미안을 지니고 있는 스님에게 걸레라는 칭호는 부당하다.

 한 시대를 휩쓸고 지나간 풍류객이다.

정말 걸레 같은 정치꾼들에 비하면 스님의 사고와 행위는 얼마나 정당하고 아름다운가.


다만 승려의 도리인 참선과 염불을 버리고 성직자로서 체통을 지키지 못한 죄는

 ‘파계승’이란 족쇄를 차고 평생을 갚아도 모자랄 수도 있다.

그리고 비구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계율인 끓는 피의 외침을 억제하지 못하고

바람난 수캐처럼 돌아다닌 것도 죄라면 죄일 수도 있다.

스님은 그걸 청복이라고 했지만.


나는 스님의 불같이 타오르는 광기를 사랑한다.

스님이 연애를 하든, 잿밥에 관심을 갖든 그런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스님의 동침도반(同寢道伴)역을 더러 맡았던 내가 느낀 소회는

‘스님은 천재에 가까운 기인’이란 사실이다.

이건 가까이에서 지켜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는 숨은 진실이다.



#3. 멕시코 룸살롱에서


어느 봄날. 중광스님이 하나님처럼 모시는 시인 구상 할아버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응, 잘 있지. 다섯 시쯤 동대구역에 내려 한정식 집으로 갈 거야. 걸루 와.”

 할아버님은 김수환 추기경, 조각가 고 문신 선생 내외, 중광 스님과 함께 대구에 오셨다.

추기경님은 바로 교구청으로 들어가시고 남은 분들끼리 음식점으로 오신 것이다.


식사자리는 반가운 안부를 주고받으며 화기애애했다.

유독 스님만이 안절부절, “빨리 일어서자”며 주위 사람들을 채근했다.

대구의 술집이라면 어느 누구보다도 좋아하는 할아버님도 건강 때문에

문신 선생 내외분과 함께 일찍 숙소로 들어가셨다.

그러자 스님은 불알에 요령소리가 날 정도의 빠른 걸음으로 멕시코 룸살롱으로 진군했다.

알고 보니 대구 마산 간 고속버스 승무원(그 때는 고속버스에도 스튜어디스가 탑승했다)인

묘령의 아가씨와 만날 약속장소가 바로 그곳이었다.


‘염불 보다는 잿밥’이라더니 스님은 술과 안주는 거들떠보지 않고

아가씨 보살에게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밥값과 술값을 책임져야할 대구 사람들은 난감했다.

스님으로부터 그림이라도 한 폭 그려 받아야 그런대로 본전을 건질 텐데

스님은 전혀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스님의 왼손은 아가씨의 젖무덤을 더듬고 있었고

매직잉크를 쥔 오른손은 안주쟁반 위에 황칠만 해대고 있었다.

 부아가 치민 나는 황칠접시를 뺏어 인조대리석 바닥에 패대기를 쳐버렸다.

 그때서야 정신을 차린 스님은 “저 놈이 사람 잡겠네”라고 한마디 하고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H씨에겐 석가모니 얼굴에 예수 그리스도의 가시 면류관을 씌운 그림을,

 K씨에겐 달마선사를, 멕시코 여주인에겐 해바라기를 그려 주었다.

그리곤 나를 한번 힐끔 쳐다보더니 “넌 엿이나 먹어.”하는 투로

털이 숭숭 난 남성에 잔뜩 풀을 먹여 “옛따"하고 나에게 밀어 주었다.

그날 밤에 그려준 그것이 가장 중광적인 그림이었다.

그 그림은 지금도 내 서가의 한 쪽 구석에서 면벽 가부좌 한 채로

 참선 중이지만 빳빳한 풀끼는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아마도 스님 것을 닮은 모양이다.


#4. 코코 카페에서


접시를 깨뜨린 사건이 있고 난 후 스님과 부쩍 가까워졌다.

석가와 가섭의 미소처럼 이심전심으로 통한 것일까.

 아무 볼일도 없으면서 살짜기 대구로 내려와

 “아무도 부르지 말고 둘이서만 마시자.”며 술집 여기저기를 돌아 다녔다.


한번은 중앙파출소 옆 누드모델 출신이 운영하는 코코라는 술집에서

‘카페 등불 아래 밤 드리 노닐다’보니 밤이 너무 깊어졌다

. 카페의 여주인이 맘에 들었는지 아무리 숙소로 돌아가자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우리 자리는 삐걱 계단 위의 이층 구석이었는데 스님은 오줌이 마려우면

 아래 층 변소로 내려가지 않고 제자리에서 질금거렸다.


하도 애를 먹이기에 스님을 버려두고 그냥 집으로 와 버렸다.

카페 주인도 시달리다 못해 문을 밖에서 잠그고 퇴근해 버리자

스님은 기나긴 겨울밤을 꼬박 혼자서 새웠다.

이른 아침 주인이 퇴근할 때 문틈에 끼워둔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서니

 “야, 임마. 추워 죽겠어. 해장국 집에 빨리 가자,”며 고함을 질러댔다.


나중 이 이야기를 구상 할아버님과 김종규 회장(한국박물관협회장)등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김 회장은 “스님은 내 승용차 안에서도 오줌을 여러 번 쌌어.”

라고 말하며 "스님은 걸레를 오줌에 헹굴 사람이야.”하고 흉을 보았다.

 


#5. 운문사 선방에서


어느 해 초 여름. 스님이 사진가 김태선 씨와 함께

우리 집에서 하룻밤을 주무시겠다며 대구로 내려 오셨다.

 스님은 오자마자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러닝셔츠와 팬티 차림으로 집안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스님의 러닝셔츠는 젖 가슴팍을 가위로 도려내어 마치 브래지어를 걸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 집 아이들도 스님이 그러시고 다니는 모습이 신기한지 뒤를 졸졸 따라 다녔다.


이튿날 아침 서울에서 항공편으로 도착한 여성 치과의사와 보살님 한 분을 맞아

우리 집에서 아침식사를 한 후 운문사로 향했다.

운문사에서의 볼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나는 운전기사가 되어 손님들의 수행임무를 맡게 되었다.


보살님들은 불공이 목적인 것 같은데 스님은 그게 아니었다.

어느 비구니 스님의 자색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그 스님을 만나는 게 목적인 것 같았다.

보살님들은 법당으로 들어가셨고 우리는 비구니 스님의 방으로 안내 되었다.

그 스님은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은 무슨 영화에 출연하는 미스 코리아 출신 배우 같았다.

마침 점심시간이어서 밥상이 방으로 들여졌지만

스님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공양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그 비구니 스님만 쳐다보면서 호감 살 만한 이야기들을 밑도 끝도 없이 늘어놓았다.


그 비구니 스님은 아무도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위엄과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었다.

스님이 열심히 무엇을 이야기해도 그냥 웃기만 하는 품새가

 “난 스님의 속마음을 다 읽고 있어요.”라고 대답하는 것 같았다.

그 후에도 스님과 단 둘이서 운문사를 찾았지만 관심과 무관심의 대결은 걸레 스님의 완패로 끝나고 말았다.

나는 지금도 비구니 스님의 법명을 기억하고 있지만 이 자리에서 밝힐 수는 없다.



#6. 감로암 법당 앞에서


동대문 옆 충신동 15번지 감로암은 중광 스님이 살던 곳이다.

프레스 센터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먼저 스님이 계시는 감로암부터 들리기로 했다.

“스님, 오늘 서울 가요. 술상 좀 봐 나요.” “그래 알았어. 오는 길은 알지.”


마침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로댕 전도 볼겸 상경길에 따라 나선 후배와 함께 오후 세시경 감로암에 도착했다.

공양간 가마솥에서는 대병 청주 두병이 끓는 물속에서 따끈하게 데워지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법당 앞에는 연화대에 점잖게 앉아 계시는 부처님조차 항마촉지인을 풀고

 “맛 좀 보았으면”싶은 조기찜이랑 여러 가지 안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님의 어머니인 혜련 스님이 옆에 앉아 “저 놈이 너희 집에 가서 애를 많이 먹였다면서”

라고 말씀하시면서 내 손을 꼭 잡아 주셨다.

우리는 입가심으로 맥주까지 마신 후 스님과 함께 종로 2가에 있는 로망스라는 술집으로 밀고 나왔다.

몸을 술에 흥건하게 담갔다 빼내보니 젖은 빨래 꼴이었다.


감로암을 다녀온 후 친구 중에 누가

“어느 절에 갔더니 스님이 공양을 대접하면서 곡차까지 따라 주더라.”는

자랑을 하면 나도 모르게 빙긋 웃음이 나온다.

 “법당 앞에 술상 차리고 조기 찜 머어(‘먹어’의 안동 사투리) 봤어.

부처님 코앞에서 청주 마시며 삼겹살 머어 봤어.”

요즘도 답사 여행 중에 법당 앞에 서면 한상 잘 차려 스님을 모시고 술을 마시고 싶어진다.

아마 이 병은 죽기 전에는 낫지 않을 것이다.


#7. 청호장 여관에서


동아쇼핑에서 <걸레 스님 중광>이란 연극이 무대에 올려졌다

. 주최 측에서 스님에게 개막 무대 인사를 부탁한 모양이다.

그동안 스님이 대구에 오실 때마다 남들 몰래 그림 한두 점씩 내게 갖다 주시면서

“이건 너 줄려고 정신 들여 그린거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림이 내 맘에 들지 않아 가까운 친구들에게 나눠줘 버렸다.

 스님은 자신의 그림이 명품 대접을 못 받는데 대한 불만을 자주 털어 놓았다.

 “야, 넌 그림 볼 줄도 그렇게 모르냐.” 그래도 나는 끝까지 버텼다. “잘 좀 그려 봐요.”


스님은 내려오시기 전에 전화로 “그래, 그림 제대로 한번 그려보자.

히끼시(배접을 미리 해 둔 화선지)를 백 장쯤 사놓아라.”는 주문이 있었다.

그러나 대구 시내 화방을 모두 뒤져도 서른 장 밖에 구하지 못했다.

그날은 술집에 들리지도 않고 여관으로 직행했다.

“어떤 그림을 그려야 네놈 마음에 들겠느냐.”면서 “화선지를 빨리 펴라”고 야단이었다.


그림은 쉽게 풀려 나오지 않았다.

소주와 맥주를 마시다 중국집에서 배달시킨 고량주를 마셔도

엔지(NG)만 날뿐 그림 같은 그림은 그려지지 않았다.

자정이 지나고 새벽 두 시가 넘어섰다.

 무엇에 화들짝 놀란 듯 갑자기 일어난 스님은 붓끝을 세워 한 일자를 긋더니

다시 붓을 눕혀 밑으로 내려 그었다.

그런 다음 네 개의 점을 찍고 나니 한 마리 학이 비상할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포스트 칼라의 붉은색을 학의 머리와 꽁지에 찍으니 영락없는 홍학이었다.

정말 걸작이었다. 스님이 그린 그림 중에 최고 작품이었다.

 “스님 그대로 계속 그려요. 진작 이렇게 그리지요.” “똥강아지 같으니, 넌 뭘 좀 알어.”


스님이 그날 밤 그린 학은 표구가 되어 우리 집에서 이십 수년을 살았다.

그런데 미국에 살고 있는 막내아들이

“아부지, 이 학을 타고 미국에 갔다가 보고 싶을 때 다시 타고 오면 안 될까요.”하고 보채길래

스님이 나에게 하듯 “옛따.”하고 주어 버렸다.

우리 집에는 풀이 빳빳하게 먹여진 룸살롱 쟁반에 그려진 고추 그림 밖에 없다.



#8. 스님을 그리워하며


스님의 몸이 편찮아 백담사 선방에서 요양 중이란 소식을 풍편에 들었다.

하루는 큰맘 먹고 백담사로 올라갔다.

스님 곁에서 하룻밤 자고 대청봉으로 오를 계획이었다.

공양 간으로 찾아가 보살님에게 스님 안부를 물었더니 “닷새 전에 서울로 떠나셨어요.”라고 했다.

 맥 풀린 다리로 대청봉에 올랐다가 대구로 내려왔다.

스님과의 이승에서의 인연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나중 저승에서 만나면 하직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해 뵈올 낯이 없을 것 같다.  


구상 할아버님은 중광 스님의 화집 ‘더 매드 몽크’(The Mad Monk)에 이렇게 썼다.

 “오늘의 예술가 일반은 시적이긴 해도 시인이 아니다.

 그 중에서도 중광은 시인이다.

시가 표현 이전에 존재하듯 중광의 그림은 언어 이전의 시다.”

 시인의 멋진 추모사다.


최근 계명대에서 열리고 있는 중국 국보 전에 테이프 커팅을 하기 위해

대구로 내려오신 김종규 회장에게 “중광 스님과 함께 오시지 왜 혼자 오셨어요.”라고 농을 걸었다.

그랬더니 “글쎄 말이야, 나도 많이 보고 싶어.

우리 다시 만나면 승용차를 아예 요강으로 내줘 버리지.”하고 빙그레 웃으셨다.

 정말이지 나도 스님이 보고 싶다.


 

중광스님의 그림과 사진


 

중광 스님의 학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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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광스님과 구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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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레 스님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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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광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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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광걸레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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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광스님과 함께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와 글은 펌입니다~

개인 해석 차이가 있지만 한번쯤은

걸레(중광)스님의 걸어온 길을 짚어 봄직도

좋을듯 하여 울 궁전에 올려 봅니다~

 

 

 -   다음 카페 <여시의 궁전 > 남포동블루스 님의 글 중에서 전재 ....

 

 

 

 

 

 

 

걸레스님 중광의 무애(無碍)사상

걸레스님 중광의 무애(無碍)사상

 

"괜히 왔다  간다!" 라며 죽음의 문턱을 넘어 가면서도 자신의 무애와 파계의 삶을 소주 한 잔 마시듯 쉽게

넘어가 버린 걸레스님 중광 "나는 세속의 굴레에서 노예처럼 살고 싶지 않다  

나는 모든 제약에서 벗어난 완전한 자유를 추구하며 내 생활과 내 작품 안에서 그 자유를 성취하고자 한다"라며

하얀 도선지 위에서 춤을 추는 검은붓자루처럼 자유롭게 춤을 추며 삶을 살았던 고창율씨

창률이는 1935년도에  제주도 제주시 외도리 275번지에서 출생하여 통도사의 김구하스님의 제자가 되면서

출가의 길을 걷게된다

고창률이라는 속명을 버리고 월하스님으로 부터 중광이라는 법명을 받고는 수행을 하지만 오래지 못하고

스스로 파계의 길로 들어간다

그의 자유롭고 거침이 없는 행동은 일반인들로서도 이해하지 못하는 기행자(奇行者)였고 급기야는 불교 종단에서

쫓겨나게 된다.

세상을 닦아내어 더욱 빛나게 해 주는 천한 걸레임을 자처하며 밑바닥인생을 살았다

모든 사람들이 재물과 권위로 삶에 존재했음의 도장을 찍을 때 중광은 그림과 시로서 삶의 흔적을 허공에 띄워 보낸다 

세상 사람들이 음밀히 즐기는 성행위를 중광은 표면 밖으로 꺼집어 내어 즐기기도 한다

그는 성행위를 우주의 가장 원천이며 근원으로 접근을 하였다

그리고 가장 아름답고 신성한 행위로 간주되어  부끄러워 하거나 추하게 생각지 않는다

아무 거리낌이나 걸림이 없는 의식의 소유자였다

세상 모두가 미친놈의 예술을 처다보지도 않을 때 세계적 대석학 루이스 랭카스터 박사가 중광의 예술과

오도(悟道)의 세계를 발견한 것이다

그는 동양의 신비한 예술세계를 찾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였다가  중광의 작품을 보고 "정말 멋지다 한국의 피카소다"

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에게는 중광이 동양의 숨은 진주를 발견한 듯  그의 작품에 빠져 들었고 급기야 중광의 작품 선화집을 

미국에서 발간하였고 그를 초청하기도 하였다

걸레가 미국과 유럽을 여행하면서 외부에 먼저 명성이 알려지자 국내에서도 그의 작품세계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전시회와 영화(허튼소리), 방송의 조명을 받게된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세상을 조롱하는 미치광이었다

부처의 도리를 지켜야 할 스님들이 법도를 이탈하여 파계의 길로 빠진 스님들도 많다

신라의 원효를 비롯하여 경허선사,대안스님,만공,혜월 등 많은 스님들이 있지만 중광스님 만큼 광인은 아니었다

그만큼 중광은 실험대상의 인물로 지목되어 "허튼소리"라는 중광스님을 모델로 하여 영화화 되고 또 다른 영화

"청송으로 가는 길"에서는 직접 출연 하기도 한다

"중광의 허튼소리" "걸레스님 중광" "괜히왔다 간다"등 중광의 기행을 담은 글들은 미친중,걸레중,狂人,奇人으로

서술되어있다

 

법의 도리에서 벗어나면,사슬의 굴레를 벗어 던진다면 우리도 중광처럼 춤을 출 것이다

일체에 걸림이 없는 철저한 자유인이 된다면 우리도 중광처럼 옷을 벗어 던지고 성기를 내어 놓고 거리를

활보할 것이다.

그는 자연과 인간을 둘로 보지 않았고 부처와 중생을 갈라 세우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육신을 파괴하면서까지 가식적 세상과 부딪혔다

그의 원초적인 행위를 봄으로서 위선으로 감추어진 세상을 알게 해 준 스님이었다

 

그의 예술작품은 해학적이면서 천진난만하였고 우주의 원초적인 성기를 달마의 머리에다 씌우기도 하며

부처를 어린동자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는 많은 그림과 시를 남겼다

작품에서 중광의 삶을 확실히 이해 할수 있다 

여기에 일부분을 소개한다

첨부파일 중광스님.hwp

 

 

<미친소리>

 

나는

천당과 극락을

오른쪽 호주머니에

가지고 다니고

 

지옥은

발바닥 밑바닥에

가지고 다닌다

 

양심은 

하늘에 걸어두고

이슬처럼 따먹는다

 

 

 

<허튼소리>

 

한민춘 판사님 자모 49제를 지내 달라기에

서슴치 않고 대답을 했지

그리고 현금 2만원을 달라고 했지

마침 내가 쓰고 싶은 일이 있어서지

그리고 법상에 기어올라갔지

밑천이라곤 뱃속에 똥뿐인데...

김혜윤 자모 영가야!

이름을 불러 놓고 할 말이 있어야지

갑자기 이미자 노래 생각이 떠오르더군

그래서 냅다 꽃피는 유달산아 꽃을 따던 처녀야!

신나게 불렀지

영가야!

내가 부른 노래는 영가가 부른 노래니라

속히속히 일러라

주장자를 세 번 내려 쳤더니

늙은 노송이

귀를 막고 돌아간다 돌아간다

그래놓고 법상에서 내려왔더니

49제손님들이 쑥덕 쑥덕 하더군

-어느 판사님이 모친의 49제를 부탁하길래 할 말은 없고-

 

 

 

<허튼소리>

 

청동맥(오상순의 호)

그는 온 세상을 다 준다해도

마다하고 돌아 앉았다

그는 시를 쓰지 않았다

시 이전의 시를 먹고 살았다

 

그는 철학을 말하지 않았다

철학을 먹고 철학을 똥싸고 살았다

그는 주소가 없는 것이 아니라

티끌 속에서 우주를 유희하며 살았다

좆도 씽씽 씹도 씽싱 하늘도 씽싱

-중광이 공초 오상순 시인의 위패 제자가 되면서 바친 시-공초시인도 중광스님 만큼이나 기인이었다

 

 

<허튼소리>

 

가야산 사자 한 마리가 있었는데

홍류동 물소리에 놀란것은

삼하도인(三河盜人)과는 무관하다

-이 시는 해인사의 성철스님이 자신의 무애행위에 거부 반응을 보이자 동료스님이 화해를 부탁하자 단박에

거절하며 글을 써 성철스님에게 보낸다 성철은 말없이 웃고만 있다고 한다  성철의 속마음이 무척 궁금하다-

 

 

 

<허튼소리>

 

삼소굴에 병든 사자가

법을 먹고 토할 줄 알더라

 

영축산은 상복을 갈아입고

만춘(晩春)은 어이 어이 슬퍼라

-통도사의 경봉스님 또한 중광이 쏘아 올린  화두의 시 화살에 대한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걸레>

 

나는 걸레

반은 미친 듯 반은 성한 듯

사는 게다

 

삼천대천세계는

산산이 부서지고

나는 참으로 고독해서

넘실넘실 춤을 추는 거야

 

나는 걸레

남한강에 잉어가

싱싱하니

탁주 한 통 싣고

배를 띄워라

 

별이랑,달이랑,고기랑

떼들이 모여들어

별들은 노래를 부르고

달들은 장구를 치오

 

고기들은 칼을 들어

고기 회를 만드오

나는 탁주 한 잔 꺽고서

덩실 더덩실

신나게 춤을 추는 게다

-중광이 불교계의 감찰부에 끌려가 모진 고난을 받고는 중복을 벗고서 쓴 시-

 

 

<再入山>

 

지금쯤 황소 타고 고향에 가면

마늘 짱아찌 까맣게 익어

먹음직할 게다

보리밥에 파리 날리며

밥 먹던 어린 시절

삼삼히 눈 속에

눈물이 열리고 있다

이제는 고향가면 꼭 돌담 초가집 묻어놓고

눈꼽낀 못난 아낙네에게 장가를 들어서

머리 맞대고 앉아 눈물을 서로 닦아주며

고구마 구워서 재 털며 먹듯이

이 세상을 살다가

나는 얄라리아

나는 얄라리아

-중광의 애인 영희를 미극에 남겨두고 와서 그리워 하는 시 -눈꼽낀 못난아낙네가 영희이다-

 

 

 

정휴스님이 1982년에 쓴 책 "걸레스님 중광"의 마지막 부분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중광"

어느 날 그를 세워 어디를 가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웃으면서 "화장막으로 가는 중이야,

이대로 가서 형체 없는 바람으로 떠돌아 다녀야겠어." 하고 말없이 걸어간다

한국의 피카소,걸레도인,미친 놈,숱한 별명을 가진 그는 2002310일 입적 하였다

그의 천한 몸뚱아리는 그가 출가 하였던 통도사에서 다비식을 치러 주었으며 

정휴스님이 생전에 쓴 책의 내용처럼  그의 영혼은 바람처럼 흩어져 갔다.

 

 

[출처] 걸레스님 중광의 무애(無碍)사상|작성자 무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