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대묘

2013. 6. 5. 03:24우리 역사 바로알기

 

 

 

 

평안남도 대안시 삼묘리(옛 이름은 강서군 강서면 삼묘리)에 있는 고구려시대 벽화고분의 하나.   / 다음 백과

    부근의 다른 두 무덤과 함께 우현리삼묘·강서삼묘라고도 불린다. 봉분의 직경이 51.6m, 높이는 8.86m에 이르는 대형 봉토석실분으로 널길과 널방으로 이루어진 남향의 외방무덤이다. 장방형인 널방의 동서폭은 3.12m, 남북길이는 3.17m이며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이는 3.5m이다. 널방은 잘 다듬어진 화강암 판석으로 축조했으며 천장은 평행삼각고임 방식으로 쌓아 올렸다. 널방 바닥에는 동서에 나란히 돌로 만든 2개의 관대를 설치했다. 널방벽과 천장부의 석면에 직접 벽화를 그렸는데, 필선이 힘차고 생동감이 있어 고구려 벽화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널방 벽화의 주제는 사신(四神)이며 천장부 벽화의 주제는 신선세계이다. 널방 동벽의 청룡과 서벽의 백호는 널방 입구를 향하여 포효하고 있는데, 세부묘사가 치밀하고 필치에 생동감이 있으며 채색이 화려하여 환상적이고 신비한 느낌마저 준다. 널방 입구인 남벽의 좌우에는 널방문쪽을 향하여 마주보며 막 날아오르는 순간의 주작 1쌍을 그렸다. 연꽃 봉오리 가지를 입에 물고 있는 두 주작의 좌우로 펼친 양날개와 위로 뻗은 긴 꼬리는 팽팽한 원을 이루고 있다. 두 주작의 발밑에는 여러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들이 묘사되어 있다. 이는 풍수지리설과 관련된 표현으로 보인다. 널방 북벽의 현무는 강서대묘의 사신도 가운데 그 뛰어난 작품성으로 인하여 특히 유명한 그림이다. 현무의 뱀과 거북은 거북의 등 부분에서 머리를 마주하고 위로 제끼고 입에서 화염을 뿜어내고 있다.

 

    천장부의 평행고임 제1단은 화려한 연속 인동당초무늬[忍冬唐草紋]로 장식되었다. 제2단에는 산악도와 선인(仙人)과 비천(飛天)들이 묘사되어 있다. 고임돌 동쪽받침과 서쪽받침에는 중앙에 산악도를 그리고, 그 좌우에는 서조(瑞鳥)를 타고 있는 인물들을 표현했다. 남북받침에는 머리를 삭발한 천인(天人)을, 북쪽받침에는 4명의 비천을 그렸다. 비천의 자태는 남북조시대 석굴사원에 등장하는 비천과 여러모로 유사하여 상호영향관계를 짐작하게 한다. 제2단 고임돌에 그려진 인물과 동물들은 모두 자신의 왼편을 향하고 있다. 선인과 비천 및 상서동물들 사이의 공간에는 3엽연꽃과 구름을 그려넣어 공간배치의 균형을 꾀하고 있다.

 

    고임돌 동서측의 산악도는 색조의 농담과 필치의 강약으로 토산과 암산을 구분하고 구름과 나무 등으로 산의 원근과 입체감을 나타내려고 하는 등 높은 수준의 회화적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삼각고임 제1단과 제2단 고임돌에는 봉황·기린·영지(靈芝) 등 각종의 상서로운 동식물을 그렸다. 천장뚜껑돌 밑면에는 오행(五行)의 중심에 해당하는 황룡을 묘사하였다. 황룡은 시계 반대방향으로 힘차게 몸을 틀었는데, 주변의 구름으로 인해 신비감을 자아내고 있다. 강서대묘는 널방의 축조방식이 정교하고 치밀하며 벽화의 구상이 장대하고 기법이 세련되어 그시기 고구려 건축기술상의 수준과 회화기법상의 발전정도를 잘 드러내는 고분이다. 널방축조 및 벽화의 제작연대는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에 이르는 시기일 것으로 추정된다.

 

 

 

 

 

강서대묘 (江西大墓) - 남포직할시 강서구역 삼묘리

    삼묘리 소재지 부락 앞에 3개의 돌칸 흙무덤이 모여있어 이 고장을 삼묘리라 부르기도 한다. 무덤군의 맨 남쪽이 강서대묘, 그 뒤 나란히 놓인 두 무덤 가운데 서쪽 무덤이 강서중묘, 동쪽 무덤이 강서소묘이다. 7세기에 속하는 강서대묘는 사신도를 그린 단실묘로 강서중묘와 함께 고구려 후기 벽화고분을 대표하는 유적 중 하나로 꼽힌다.

    봉토는 진흙과 석회를 번갈아 다져 방대형으로 쌓아 올렸고, 무덤칸은 잘 다듬은 화강석 판돌로 만들었는데 안길과 안칸으로 이루어졌으며 방향은 남향이다. 안길은 안칸 남벽 중앙에 냈다. 안칸 입구에는 두 짝 문을 달았던 문확 자리가 남아 있다. 안칸의 평면은 정방형이고, 천정은 평행삼각고임식이다. 안길은 길이 약 3m, 폭 1.8m, 높이 1.7m이고, 안칸은 남북 길이 3.18m, 동서 폭 3.15m, 높이 3.5m이다. 바닥에는 두 장의 잘 다듬은 판돌을 깔고 굽도리돌을 댔다. 그리고 정교하게 만든 화강암 판돌 관대 2개를 동서 양쪽에 나란히 놓았다.

    안칸의 벽면은 길죽한 판돌 두세 장을 수직으로 포개서 쌓되 윗부분은 안으로 기울어지게 다듬고, 여기에 맞추어 네 구석에는 5각형의 구석돌을 끼워 넣어 모를 죽였다. 또한 천정 각 단의 고임돌들 역시 휘임과 기울임을 주어 무덤칸 내 직선과 평면적 느낌을 덜고자 배려하였다. 이처럼 강서대묘는 당시로서는 치밀한 설계와 능숙한 시공, 세련된 돌 다루는 기술에 의해 이루어져 석조 예술품으로서 손색이 없다.

    벽화는 돌벽 위에 그렸는데 벽면에는 사신, 천정에는 연꽃무늬, 인동덩쿨무늬, 구름 무늬, 산수, 기린, 봉황, 비어, 비천, 신선, 천인, 황룡 등을 배치하였고, 붉은색, 검은색, 흰색, 초록색, 보라색, 노란색, 밤색 등 다양한 안료를 사용하였다. 그림은 먼저 밑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채색한 후 먹선으로 테두리를 치고 세부를 다듬어서 완성하였다. 특히 강서대묘의 현무도와 청룡도는 고구려는 물론 당시 동방 사신미술을 대표하는 걸작품으로 꼽힌다.


강서대묘 (江西大墓) 사신도 (四神圖)

    동서남북의 방위를 나타내고 우주의 질서를 진호(鎭護)하는 상징적인 동물을 그린 그림이다.

사신은 동쪽의 청룡(靑龍), 서쪽의 백호(白虎), 남쪽의 주작(朱雀), 북쪽의 현무(玄武)를 말한다.

    사신에 대한 사상이나 도상(圖像)이 언제부터 유래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에서 진한시대(秦漢時代)에 걸쳐 정착된 것으로 보이며, 오행설(五行說)과도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 나라에서는 삼국시대 고분 벽화에서 최초로 나타나며, 이러한 사상이 계속해서 전해 내려와 조선시대의 민화(民畵)에서까지도 보인다.

    사신도의 형상은 시대에 따라 양식상의 차이는 보이지만, 청룡은 본래가 상상의 동물로서 몸에는 뱀의 비늘로 문양을 넣고 머리에 뿔이 한두 개 돋아 있고 불을 내뿜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백호는 호랑이 얼굴에 몸에는 호피문(虎皮文)이 표현되며 날개가 달려 있고, 혀를 내밀어 위용을 나타내었다. 주작은 봉황의 모습과 유사하다. 현무는 거북과 뱀으로 표현되는데, 뱀이 거북을 휘어 감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백호도 (白虎圖)
    
    강서대묘의 백호도는 박락(剝落)이 심해 그 섬세하고 화려한 부분을 알아 보기가 어려우나 길게 뻗은 목과 크게 벌린 입은 백호의 용맹을 잘 표현하고 있으며, 주황색의 날개는 아주 선명하게 남아 있다. 강서중묘의 백호도와 비슷하다.

    백호(白虎)는 하늘의 다섯 개 구문인 오관(五官)중 서관(西方)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태백신(太白神:금성)으로도 통한다. 예로부터 무덤의 현실(玄室) 서쪽 벽이나 관(棺)의 오른쪽에 그렸다.

 

 

 

 



주작도 (朱雀圖)
  
    힘차게 퍼덕이는 날개, 곧추세운 머리, 회오리 치는 듯한 꼬리, 비상을 준비하는 한 마리 주작. 그 생동감이 가득하다. 불길처럼 타오르는 깃털도 저 고구려인의 예술감각이 보통이 아님을 잘 보여 준다. 아랫 부분 불그스레한 갈색의 산맥이 화면을 부드럽고 그윽하게 해줌으로써 동(動)과 정(靜)의 조화까지 이루고 있다.

    주작(朱雀)이란 남방을 지키는 수호신인 남방성수(南方星宿)의 이름으로 주조(朱鳥)라고도 한다. 붉은 봉황을 형상화하여 예로부터 무덤과 관(棺)의 앞쪽(남쪽)에 그렸다.

 

 

 

 



청룡도 (靑龍圖)

    세련된 구도에 화려한 색채, 보는 이를 압도하는 속도감. 이 청룡은 뿔이 두 개 달렸다. 두눈은 튕겨나갈 듯 하고 길게 내뿜은 혀는 지금이라도 하늘로 솟아오를 듯하다. 몸통 부분에서 절정을 이룬 S자 곡선은 꼬리 부분에 이르러 부드럽고 긴 여운을 남긴다. 현란하게 채색된 비늘은 섬세함의 극치라 하기에 충분하다. 청룡 벽화 중 최고의 걸작이다.

    청룡(靑龍)은 푸른용으로 상징되는 사신으로 하늘의 다섯 개 구문인 오관(五官)중 동관(東方)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태세신(太歲神:목성)으로도 통한다. 예로부터 무덤의 현실(玄室) 동쪽 벽이나 관(棺)의 왼쪽에 그렸다.

 

 

 

 



현무도 (玄武圖)
  
    고구려인의 기상과 예술혼에 그저 감탄할 따름이다. 거북을 휘감고 있는 뱀. 그 부드러운 곡선이 시원함을 넘어 현란함과 함께 힘찬 기상을 뿜어낸다. 서로 맞대고 있는 머리 사이로 긴장감이 몰려와 화면을 가득 채우는, 뛰어난 공간감각을 보여준다. 뱀의 비늘이나 거북무늬의 선명함에서 드러나듯 기법 또한 정교하고 능란하다. 세련미와 원숙미를 잘 보여주는 이 현무도는 고구려 회화의 최고 대표작이다.

     현무(玄武)란 하늘의 다섯 개 구문인 오관(五官)중 북관(北方)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현무의 정체는 <예기>에서 "현무는 거북이다"라 하였고, 또 거북과 뱀의 형상으로 그린 학자도 있는데 대체로 현무를 영구(靈龜)로 보는 것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다. 강서대묘의 현무는 거북이 아닌 거북과 뱀의 형상을 그리고 있다. 예로부터 무덤과 관(棺)의 뒤쪽(북쪽)에 그렸다.

 

 

 


[민족의 혼, 고구려 여행] 강서대묘
화강암으로 만든 널방, 완벽한 건축 기술 뽐내  /   소년한국일보
      

 

강서대묘 천장 벽화인 현무도.


 

 

    고구려 특별전이 2003년 서울에서 열렸을 때, 강서대묘의 널방이 모형으로 공개됐습니다. 필자는 당시 이 전시회를 7 번이나 찾았는데, 가장 주의 깊게 살펴본 것이 강서대묘였어요.

    전문가들은 흔히 고구려 고분 벽화 가운데 최고의 작품으로 강서대묘의 현무도를 꼽습니다. 그런데 현무도 만큼 강서대묘를 빛나게 하는 건 완벽한 건축 기술을 보여 주는 돌로 만든 널방 그 자체입니다.

 

●정교한 장인 솜씨 놀라워

널방 벽면은 길쭉한 판돌을 2~3 장 수직으로 포개 쌓되, 윗부분은 안으로 기울게 다듬었습니다. 여기에 맞춰 네 구석에 오각형의 돌을 끼워 넣어 모서리를 부드럽게 처리했습니다.

또 널방 천장을 안쪽으로 갈수록 좁아지게 만들어, 무덤 안이 지나치게 직선과 평면으로 이루어지는 딱딱함을 갖지 않도록 정교하게 꾸몄습니다.

 

 

 

강서대묘 천장 벽화


 

 

    그런데, 그리스ㆍ로마 건축물에 사용된 대리석과 달리 고구려인이 사용한 돌은 표면 처리가 어려운 화강암입니다. 그럼에도 오늘날처럼 기계가 없는 상태에서 화강암을 유리처럼 말끔하게 다듬고, 또 빈틈없이 돌을 꿰어 맞춰 석실을 완성한 고구려 장인들의 솜씨는 놀랄 정도랍니다.

 

 

●현무도와 신선도, 고분 벽화 최고 걸작

    강서대묘는 영양왕 또는 평원왕의 무덤으로 보이는 고구려 후기 왕릉입니다. 무덤 안에는 시신을 넣은 나무관의 파편과 관을 놓아 두는 관대 두 개만 남아있습니다. 관대는 화강암을 정교하게 다듬어 넓은 판으로 만들었지요. 그리고 옻칠을 한 나무관 파편에는 인동초 문양이 그려져 있습니다.

강서대묘는 이처럼 고구려 태왕의 무덤답게 벽화 뿐만이 아니라, 관ㆍ관대ㆍ석실 벽면까지도 정성 들여 만든 것임을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강서대묘 널방의 사신도는 강서중묘의 것과 닮았습니다.

 

 

강서대묘의 청룡도. 고구려 고분 벽화의 청룡 가운데 가장 위용을 자랑한다.


 

 

 























 

 

    두 개의 뿔이 달린 청룡은 혀를 길게 내밀고 눈을 부릅뜬 채 발을 내딛으며 문에서 들어오는 자를 위해 달려들 듯한 모습으로 동쪽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처럼 강서대묘의 청룡은 고구려 고분 벽화에 그려진 청룡들 중 가장 잘 생겼습니다.

하지만 강서대묘에서 으뜸은 현무도입니다. 뱀이 거북을 감싸고, 거북은 공중을 날고 있는 모습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신비감을 풍깁니다. 특히 뱀이 몸을 뒤틀며 머리와 꼬리를 교차 시키는 그림에서 탄력 있는 곡선의 아름다움이 그대로 느껴지지요. 여기에다 거북 뒷다리의 털까지 휘날리는 모습은 그림의 세부까지도 치밀하고 정성스럽게 그렸음을 알게해 줍니다.

 

    강서대묘 천장에도 인동당초ㆍ연꽃ㆍ구름 문양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보다 더 주목이 가는 그림은 서쪽 천장 아래 고임돌에 그려진 봉황을 탄 신선의 모습입니다. 이 신선이 가는 곳에는 삼신산이 그려져 있지요.

 

    널방에 그려진 두 마리의 주작 아래 역시 삼신산이 보이고, 널방 동쪽 맨 아래 고임돌에도 삼신산이 그려 있습니다. 산들은 원근법이 이용됐는데, 앞산과 뒷산을 색을 달리해 가며 사실적으로 그렸습니다. 강서대묘 천장에는 또 먹으면 사람이 늙거나 죽지 않는 약인 불사약을 든 신선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죽어서도 영혼이 신선으로 거듭나 삼신산에 가서 영원히 살기를 바랐지요. 고구려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죽고 없지만, 그들의 영원한 삶에 대한 갈망은 벽화를 통해 우리에게 徨蠻側?있습니다.

/김용만(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우리그림 한국화] 강서대묘의 현무도, 북쪽을 지켜 주는 신령스런 동물     / 소년한국일보

 

현무도 고구려, 6~7세기, 평안남도 강서군 우현리 강서대묘

   

 

 

 



















    현무(玄武)는 무엇일까요? 북쪽을 지켜 주는 신령스런 동물입니다. 동쪽의 청룡이나 서쪽의 백호, 남쪽의 주작과 달리 두 가지 동물이 한데 엉킨 모습을 하고 있지요. 거북이와 뱀이 그들입니다.

 

    여기서 주인공은 역시 거북이라고 할 수 있지요. 예로부터 거북이는 북쪽을 지켜 주는 신비한 동물로 알려졌답니다. 거북이는 원래 머리나 다리가 짧지만 여기서는 아주 길게 표현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 있고 용감한 모습을 나타내기 위해 화가가 실제보다 과장해서 그렸기 때문입니다. 물론 실제의 거북이와는 좀 다른 역할을 하기 때문에 보다 신비한 모습을 상상하여 나타냈을 수도 있습니다.

 

    거북이는 주로 물에서 사는데도, 이 그림에서는 마치 뭍짐승처럼 힘차게 네 다리를 뻗어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입니다. 안쪽이 깊이 패인 목을 쭉 빼고, 머리는 뒤를 향하고 있습니다. 목 뒤로 바짝 붙은 귀, 부리부리한 눈, 돼지처럼 뭉툭한 코가 인상적입니다. 벌린 입에서는 붉은 혀가 화염처럼 솟아 나와 있습니다. 역시 거북이다운 모습은 등딱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육각형의 무늬들이 가지런합니다.

 

    거북이를 휘감고 있는 것은 아주 긴 뱀입니다. 거북과 뱀은 서로 마주 보며 으르렁거립니다. 뜨거운 기운이 무덤 속에 가득 찬 느낌입니다. 뱀은 마치 철사처럼 빳빳하게 힘을 주고 있습니다. 등과 배의 가늘고 굵은 비늘이 사실적입니다. 몸의 굵기나 뒤틀린 부분, 고리 모양으로 꼬인 부분 또한 자연스럽습니다. 강한 힘이 느껴지는 한편 전체적으로는 우아하고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거북이와 잡아당기는 뱀이 묘한 균형을 이룹니다. 뱀에 의해 나누어진 여러 개의 공간이 아주 적당해서 보기에 시원합니다. 누가 그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고구려 화가의 뛰어난 실력을 알 수 있는 그림입니다.

 

    우리의 역사 책인 ‘삼국사기’에는 이런 글이 있습니다.

“고구려 유리왕 때, 모천이라는 내에서 검은 개구리와 붉은 개구리가 떼 지어 싸우다가 검은 개구리들이 죽었다. 이를 보고, 고구려 사람들은 검은색은 북쪽이니 곧 북부여가 망할 것이라고 여겼다.”

 

    검은색의 거북이를 무덤 안의 북쪽에 그리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검은색 동물이 북쪽을 지켜 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지요.

우리 조상들은 거북이 또한 마치 용처럼 신성하게 여겼습니다. 대개 거북이는 옛 이야기 속에 용궁의 사자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거북이와 비슷한 자라 또한 이런 거북이와 비슷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고려 시대에 권홍이라는 재상이 있었습니다. 그는 벼슬이 높고 나이도 많아 날마다 산천을 유람하며 여유 있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어느 날 이상한 꿈을 꾸었습니다.

“제 말씀을 좀 들어 보십시오.”

머리가 허연 노인이 엎드려 절을 하며 말을 이었습니다.

“권 재상께서는 홍 재상과 가까이 지내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홍 재상이 우리 족속을 죄다 없애려 하니, 재상께서 부디 우리를 살려 주십시오.”

권 재상은 난데없는 말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다 한들 제게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노인은 권 재상의 말에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홍재상이 틀림없이 찾아와서 어디로 함께 가자고 할 것입니다. 그 때 재상께서는 다른 이유를 대고 사양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홍 재상은 그냥 돌아갈 것이니, 저를 살려 주는 셈이 되지요.”

 

    권 재상은 무슨 소린지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알았다 했습니다. 이 때 누군가 대문 쪽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습니다. 권 재상은 꿈에서 깨어나 밖으로 나갔습니다. 홍 재상 댁에서 사람을 보내, 오늘 자라 잡으러 함께 가자는 연락을 하였습니다. 권 재상은 비로소 꿈에 나타난 노인이 자라였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보게. 고맙긴 하지만 오늘은 내가 몸이 안 좋으니 함께 가지 못 하겠다고 전하게.”

나중에 알아 보니, 이 날 홍 재상도 자라 잡으러 가는 일을 포기했다고 했습니다. 자라나 거북이는 이처럼 우리 민족에게 신비한 동물이었습니다.

입력시간 : 2004-05-13 15:21


 

 

 

현무의 발톱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해 2D로 복원한 강서대묘 사신도 중 현무 세부. 왼쪽은 실물 상태이며 오른쪽이 복원품이다. 발가락과 발톱이 완연하게 살아났다.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연합뉴스

 

 


동북아재단 고구려 고분벽화 2D 복원

    고구려인들이 무덤에 남긴 벽화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북한 남포의 강서대묘 사신도(四神圖)다.

강서대묘의 현실(玄室) 동ㆍ서ㆍ남ㆍ북 네 벽면을 각각 장식한 청룡(靑龍)ㆍ백호(白虎)ㆍ주작(朱雀)ㆍ현무(玄武)는 다른 고분 벽화에 견주어 상대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지만 세심히 살펴보면 적지 않은 곳이 훼손됐다.

 

    두 마리 뱀이 거북 몸둥이를 감싼 모습인 현무만 해도 네 발가락과 발톱 부분은 알아보기 힘들다.

이런 현상은 다른 사신 그림에서도 마찬가지다.

    동북아역사재단 김용덕 이사장은 10일 기자간담회를 갖고 '고구려 고분벽화 컴퓨터 그래픽 2D 복원 사업' 일환으로 최근 사신도를 비롯해 현실 천장과 굄돌의 황룡도 및 인동무늬, 비천, 연꽃 문양 등의 강서대묘 벽화 주요 부분을 복원했다고 말했다.

 

 

강서대묘 사신도 중 주작 세부. 왼쪽 사진은 실물 상태이며 오른쪽이 복원품이다.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연합뉴스

 

    복원 작업은 ㈜포스트미디어ㆍ서용(대표 서용.동덕여대 회화과 교수)이 맡았다.

서 교수는 "일제시대에 작성된 모사도와 관련 원색 도판 자료, 그리고 비슷한 시대 같은 모티브를 활용한 그림 등을 토대로 지금은 그 흔적이 사라졌거나, 훼손이 극심한 부분까지 복원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번 작업에 의해 백호와 청룡 또한 '상실한' 발과 발톱, 그리고 희미한 얼굴 윤곽을 찾았으며, 주작 또한 그을음이 잔뜩 앉은 것 같은 색상을 벗고 원색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와 같은 고구려 고분벽화 2D 복원은 덕흥리 고분에 이어 두 번째다.

재단은 이와 같은 성과들을 토대로 올해 6월까지는 3D 고구려 고분 제작을 완료할 것이라고 말했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김태식 기자 taeshik@yna.co.kr (서울=연합뉴스)

 

 

 

 

 

 

 

 

강서대묘는 평안남도 강서군 강서면 삼묘리에 있는 고구려시대의 벽화고분입니다.

강서삼묘중에 강서대묘가 가장 큰 벽화고분인데요 고분의 분구는 원형이며 무덤의 구조는 널방

남벽의 중앙에 달린 널길과 평면이 방형인 널방으로 된 외방무덤입니다.

널방 네 벽과 천장은 각각 한 장의 질이 좋고 잘 다듬어진 큰 화강암 판석으로 축조 되었습니다.

 

 

 

 

 

        천장은 2단의 평행 굄돌을 안쪽으로 내밀고 그위에 2단의 삼각 굄돌을 얹고서 덮개돌을 덮은 모줄임천장

입니다 벽화는 사신도 및 장식무늬로 화칠을 하지 않은 잘 다듬어진 널방 돌벽면에 직접 그려졌습니다

널방 남벽의 입구 주변에는 인동 당초무늬를 그려 장식하고 좌우의 좁은 벽에는 주작을 한마리씩 그렸으며

동벽에는 청룡을 서벽에는 백호를 북벽에는 현무를 천장 중앙의 덮개돌에는 황룡을 각각 그렸습니다

 

 

 

 

 

 

              천장의 황룡은 침수에 의해 깎이고 떨어져 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천장벽화는 천장부를 구성하고 있는

제1단 굄돌 옆면에 인동무늬를 감싸안은 초롱무늬가 S자형으로 이어져나간 무늬띠를 돌렸습니다

이 굄돌의 아랫면에는 인동초롱무늬의 중앙에 연꽃무늬가 가미되어있고 좌우에 연꽃잎을 그린 특이한

무늬가 그려져 있습니다

 

 

 

 

 

강서대묘

 

 

 

 

"고구려의 숨결! 강서대묘"

    만주와 한반도 북부지역의 광활한 영토를 700여 년간 지배한 고구려!
여러 종족을 결집하여 형성된 국가로 화려하고 장대한 수준 높은 문화를 꽃 피웠다.

    그 가운데 100여기의 무덤 안에 그려진 벽화는 당시 생활상과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이자 고구려인들의 역사와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문화유산으로써 세계적으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수많은 고구려의 고분벽화 중 절정기 작품으로 꼽히는 강서대묘.

평안남도 강서군 삼묘리에 있으며 7세기경에 만들어진 벽화고분이다.

    무덤의 분구는 원형으로 되어있으며 크기는 직경 51m, 높이 9m에 이르며 내부 구조는 한 변의 길이가 3m를 넘는 널방과 널길로 이루어져 있다.
널방의 네 벽과 천정은 질이 좋고 잘 다듬어진 큰 화강암 판석으로 축조되었고, 사신도와 장식문양 등이 그려져 있다.

    강서대묘 벽화는 생동감 넘치는 필치와 화려한 채색효과를 보여주는 고구려 회화의 대표작으로 2004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그 가치를 인정 받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강서대묘의 보존 상태는 그 위상을 무색하게 한다.
찬란한 벽화의 모습은 흐려지고 빠르게 훼손 되어가고 있다.
이대로 훼손이 진행될 경우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르는 절박함에 동북아역사재단이 강서대묘의 디지털복원을 추진하게 되었다.
본래 벽화가 가지고 있던 형태를 복원시키는 과정과 디지털 채색 작업을 거치며 강서대묘 벽화는 제 모습을 찾았고 다시금 그 현란한 위용을 우리 앞에 드러냈다.

    새옷을 갈아입고 우리 앞에 다시 생생하게 되살아난 강서대묘 벽화고분.
마치 벽화 속에서 고구려인의 혼이 꿈틀대는 듯 하다.

    널방 네 벽에 그려진 사신도.
동서남북을 지키고 있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 수호신들은 고구려인의 상상력과 영원불멸의 내세관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무덤 내부를 생기로 가득 채우는 현무도.
거북과 뱀이 서로 엉켜 있는 독특한 형상의 현무도는 명확한 입체 표현으로 마치 살아 움직이 듯 생동하는 기운을 느낄 수 있게 한다.

    보는 이를 압도하는 역동적인 청룡도.
속도감이 느껴지는 대각선 구도와 청룡의 기상을 보여주는 탄력 있는 필치는 청룡벽화 중 최고의 걸작이라 일컬을만 하다.

    마음을 사로 잡는 강렬한 주작도.
비상을 준비 하듯 크게 펼친 날개, 둥글게 휘감아진 긴 꼬리는 당장이라도 창공을 가르며 날아 갈듯 사실감이 넘친다.

    고구려의 기상이 느껴지는 백호도.
살아 움직이는 듯한 곡선의 흐름과 포효하듯 사실감 넘치는 백호의 표정은 맹수로써의 백호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역동감과 생기가 넘치는 사신도와 달리 천정부 벽화는 또 다른 영감을 불러 일으킨다.
천정에는 신선사상을 반영한 선계가 표현되어 있다.
첫번째 단에는 인동당초무늬, 두번째 단에는 산악도와 선인 그리고 비천상.
세번째 단 삼각 고임석에는 연꽃무늬, 덮개석 중앙에는 황룡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천인상이나 산악도는 고구려인의 신선관을 보여주는 동시에 당시 산수화의 발전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처럼 1500년의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뛰어 넘어 화려하게 부활한 강서대묘는 벽화고분의 걸작을 품고 있다.

    고구려의 드높은 기상과 패기가 숨 쉬는 고구려 사신벽화의 걸작 강서대묘.
강서대묘에 깃든 혼과 열정 그리고 뛰어난 예술성은 치열하고 험난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변치 않는 감동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안악 3호 고분 동영상

 

이영상은 유투브 dogdolians님이 올리신 영상입니다

 

 

 

    안악3호분은 북한 황해남도 안악군에 위치하고 있는 고구려 벽화고분으로 1949년에 발굴 조사되었으며, 고국원왕 때인 서기 357년에 만들어졌다.
안악3호분의 벽화는 다양한 화면 구성과 유려한 표현방식으로 당시 고구려의 생활 모습이 매우 잘 표현된 벽화 중 하나로 꼽힌다. 묘주부부 초상을 비롯하여 대규모의 행렬도, 주방장면을 그린 실내 생활도, 씨름 및 가무 장면, 문지기, 그리고 연꽃, 귀면 등의 갖가지 장식 문양들이 풍부하게 어우러져 있으며 무덤 주인공을 고국원 왕으로 보는 입장과 동수로 보는 입장의 오랜 논쟁으로 유명한 무덤이다.

 

 

 

 

덕흥리 고분 벽화 동영상

 

이영상은 유투브 dogdolians님이 올리신 영상입니다

 

 

 

    덕흥리 벽화고분은 평안남도 남포시 강서구역 덕흥리에 위치한 408년의 기년명(紀年銘)이 있는 고분이다. 명문에 의하면 피장자(被葬者)는 유주자사(幽州刺史)를 지낸 진(鎭)이라는 인물이다. 벽화를 주제별로 표현하면, 앞칸에는 정사도(政事圖), 유주 13군의 태수들, 행렬도가 있고 천장의 궁륭부분에는 수렵도가 아래를 차지하고 윗부분은 천상세계를 묘사하였다. 앞칸의 북벽에는 묘주(墓主)의 초상화가 있고 동벽에는 불교의 칠보공양(七寶供養)행사가, 다른벽에는 여라가지 생활 장면들이 표현되어 있다. 이들을 통하여 5세기 초의 고구려의 문화와 풍습을 알 수 있는 사료적 가치가 높은 벽화이다.

 

 

 

고구려 고분 1 강서대묘
강서대묘에 그려진 무덤을 지키는 사방신

    강서대묘는 평안북도 남포특급시(南浦特級市) 강서군(江西區郡) 삼묘리(三墓里)에 있는 고구려 벽화고분중 하나이다.
특히 강서대묘는 높이 8.86m, 기저부의 둘레가 51.6m로 같은 삼묘리에 위치한 중묘(中墓)·소묘(小墓)와 함께 강서삼묘(江西三墓)를 이루며, 이 중 규모가 가장 크다.


    7세기 경에 만들어진 고구려 고분으로, 외형적으로는 중국식 묘제가 도입되어 봉분을 이루고 있지만, 그 내부에는 고구려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예술과 신앙세계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강서대묘는 안길과 현실로 된 외간 무덤이다. 현실은 잘 다듬어진 화강암으로 구축되었고 바닥에 두 관대를 설치하였다. 네 벽에는 사신도를 그렸으며, 평행삼각고임부 천장에는 신앙세계를 반영한 다양한 그림과 장식을 배치하였다. 특히 북벽의 현무도, 동벽의 청룡도는 강서중묘의 백호, 주작과 함께 고구려의 사신도 그림중에서도 걸작임이 분명하다.


동방의 수호신 청룡(현실 남벽)

 

 



소리치는 큰 입에서 타는 듯한 혀를 내밀고 눈알은 튀어나갈 듯한 쌍뿔 청룡이다. 흘러내리는 S자 형의 목의 곡선은 가슴에 이르러 굵게 확장되고 몸통으로부터 꼬리로 감에 따라 차차로 가늘게 길어져서 탄력성 있게 움직인다.

 중심이 앞부분에 옮겨져서 앞발을 내밀고 사납게 전진하는 모습은 속도감이 넘치고 웅혼하다. 새빨갛게 테두리를 칠한 가슴날개도 날카롭게 하늘을 날고 도약을 강조한다.

 세련된 구도이며 채색도 화려하다. 장식적 요소가 농후한 비늘이지만 푸른색, 녹색, 주색 등의 배색도 적절하여 섬세하고 호탕한 채색으로 입체감과 생동감을 표현하였다.



 

 


서방의 수호신 백호(현실 서벽)



    얼핏보면 청룡의 모습과 흡사하지만 백호도이다. 이 그림으로 볼 때 고구려 인들을 백호를 현실속에 존재하는 흰 호랑이가 아니라, 용의 모습에 더 가까운 신화속의 동물로 여겼던 것 같다.
 선명치 못한 데가 많아 섬세한 부분은 알아볼 수 없으나 길게 뻗어나간 목과 벌린 아가리는 백호의 용맹을 잘 나타내었고 형식이 중묘와 공통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가슴날개의 색채와 아가리 주변과 몸체 전반의 운동감, 곡선의 흐름이 자아내는 인상이 다르다. 이 백호는 장중한 감이 난다. 이 벽화는 수분이 많은 점도 있어 주홍색의 날개가 아주 선명하다.

 



북방의 수호신 현무(안길 북벽)


    강서대묘의 현무도는 고구려 회화의 조형미가 가장 원숙하고 세련된 사신도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북방위신인 거북이를 마치 미뷔우스의 띠처럼 휘감은 뱀이  곡선이 뿜어내는 역동성과,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있는 두 신물사이에서 생기는 긴장감은 사신도 중에서도 단연 으뜸으로 평가되고 있다.

뱀의 비늘이나 거북의 등 무늬도 섬세하게 그려져 있고 힘찬  묘사와 그윽한 채색로 표현된 입체감은, 전설상의 수호신이긴 하나, 실제  생명을 가진 동물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 .


     훼손이 비교적 덜 된 상태의 현무도, 한눈으로 봐도 위의 그림보다 매우 선명해 보인다. 현재 북한측에서는 이 훼손을 막기 위해 일반인들의 출입을 엄격하게 금지시키고 있다. 물론, 가고 싶다고 해서 갈 수도 없는 곳이긴 하지만....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무덤 내부에서 진행되고 있는 심각한 상태의 색바램 현상등을 막을 수 없다. 따라서 정치문제는 뒤로하고서라도, 남북한 공동의 연구팀과 복원팀을 구성하여서, 고구려 유적들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마련이 시급한 실정이다.

 


남방의 수호신 주작

 

 


(현실 남벽)

힘차게 퍼덕이는 날개와 회오리쳐서 솟을 듯한 꼬리 등, 주작은 곡선의 움직임이 강조되어서 화려하다. 깃털도 타오르는 불길같이 설레이고 있다. 

비록 빗물등이 스셔든 탓에, 원래의 색감이 많이 번지고 퇴색되어 있긴 하지만, 주작 특유의운동감과 함께 색채의 화려함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역시 복원이 절실히 필요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서쪽 천장고임부의 벽화



    사신도는 주작을 제외하면 대부분 벽면에 많이 그렸다. 즉 사신은 천상의 세계와 중간의 세계를 연결해 주는 역활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사방 즉 공간을 담당하는 신물인것이다.
 그리고 천정부로 갈 수록 점점 하늘을 나는 동물들이나 신선, 선녀등을 그려 천상세계임을 강조한다.

    이렇게 점점 위로 올라가다보면, 가장 정점에는 대체적으로 해와 달 그림이 등장한다.  이것은 고구려 인이 하늘의 선택을 받았다는 자부심이 있었으며, 무덤주인은  벽화가 이끄는 대로 승천할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동북아역사재단 누리집에 고구려벽화를 영상복원 해놓은 게있네요. 동영상 처음 20초 정도에

나오는 고구려강역은 영상물을 제작한 곳이 '동북아역사재단'이라는 점은 감안하시고 보시면

좋겠습니다.

 

  

 

 

◎ 강서대묘 사신도 ◎

    동방의 청룡, 서방의 백호, 남방의 주작, 북방의 현무로 대표되는 사신개념은 중국 고대의 오행사상 및 천문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강서대묘는 벽면에 묘사된 사신 이외에도 천정 중앙에 황룡이 묘사되어 완벽한 오행사상을 구현시키고 있다. 강서대묘의 사신도는 회화기법 측면에서도 절정기의 양식을 보여준다. 잠시의 주저함 없이 일필로 휘두른 유려한 선과 화려한 색채, 살아 움직이는 듯 생동감 넘치는 사신의 모습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고구려인들의 웅혼한 민족적 기상과 예술적 혼을 전달해 주고 있다.

 

 

 

▲  1) 청룡도

    용은 선사시대부터 고대인들에게 가장 사랑받고 숭앙되던 신화적 동물로 동방을 상징한다. 포효하는 듯 크게 벌린 입에서는 붉은 기운이 강렬하게 뻗쳐 나오고, S자형으로 흘러내린 목선과 몸통부분에는 푸른색, 녹색, 붉은색을 번갈아 채색하였다. 그 위에 검은 망사무늬의 비늘을 묘사하여 신비롭고 화려한 용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다. 가슴 양옆으로 꿈틀거리듯 붉은 색으로 묘사된 화염무늬 형태의 날개와 도약하려는 듯 크게 벌린 앞 다리의 자세에서 진취적이며 활달한 고구려인의 기상을 느낄 수 있다. 

 

 

 

▲  2) 백호도

 

    호랑이는 청룡과 달리 실재하는 동물로, 그 용맹스러움으로 인해 원시시대부터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어왔으며, 오행사상에서 서방을 상장하는 동물이다. 악귀를 쫓아내려는 듯 부리부리하게 치켜 뜬 눈과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 크게 벌린 입에서 백호의 용맹성을 엿볼 수 있다. S자형의 목선, 계단형으로 마무리된 꼬리, 앞 다리를 위 아래로 힘껏 벌린 자세는 청룡도와 매우 유사하다. 가슴부분에 묘사된 선명한 색채의 붉은 날개가 신수로서의 백호의 성격을 잘 말해준다. 청룡도와 마찬가지로 유려하면서도 힘찬 필선을 보여준다.

 

 

 

▲  3) 주작도

     주작도 청룡과 같은 상상의 동물이며 남방을 상징한다. 그 모습은 봉황과 흡사하다. 힘차게 퍼덕이는 날개와 회오리치듯 말아 올린 꼬리의 강렬한 곡선, 온몸에서 불길처럼 뿜어 나오는 깃털, 붉은 색과 녹색의 기운이 감도는 화려한 모습은 불의 기운을 지닌 남방의 신수로서의 주작의 모습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주작의 발아래 묘사된 불그스레한 산악도는 화면에 신비로운 분위기를 더해준다.

 

 

 

 

 4) 현무도 

 

    현무는 북방의 흑색을 뜻하는 현(玄)과 거북의 견고한 등껍데기를 상징하는 무(武)에서 비롯된 명칭으로, 북방을 상징하는 수호신이다. 고대의 신화전설에 의하면 거북은 수컷이 없어 잉태하려면 그들과 머리가 비슷하게 생긴 뱀과 짝을 지어야 하였기 때문에 화면에 보이는 이들의 교묘한 엉킴은 투쟁이 아닌 음양의 조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거북을 휘감은 뱀의 긴 타원형 곡선과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있는 거북과 뱀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이 화면에 역동성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이 현무도는 거북의 안정감 있는 자세와 뱀의 탄력적인 곡선이 절묘하게 조화된, 고구려 최고의 현무도상으로 간주된다.

 

 역사를 바로 알면 세상이 바로 보입니다.

깨어있는 푸른역사 삼 태 극  cafe.daum.net/mookto

 

 

 

강서대묘 벽화사진

 

    평안남도 대안시 삼묘리(옛 이름은 강서군 강서면 삼묘리)에 있는 고구려시대 벽화 고분의 하나로

 

    부근의 다른 두 무덤과 함께 우현리삼묘 · 또는 강서삼묘라고도 불리지요.
    강서대묘는 그중 가장 큰 무덤으로 사신도 벽화로 유명하지요.
    봉분의 직경이 51.6m, 높이는 8.86m에 이르는 대형 봉토석실분으로 널길과 널방으로 이루어진 굴식 돌방무덤이지요. 입구가 굴처럼 되어 있고  안에 돌방이 있지요. 천정은 모줄임 구조로 되어 있구요. 장방형인 널방의 동서폭은 3.12m, 남북길이는 3.17m이며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이는 3.5m 크기의 무덤이지요.
 


벽화사진은 지난번 방향신에서 올렸는데 한번 더 올려보지요.
 






 


    맨 아래 사진 2점은 새를탄 신선의 모습이지요. 고구려인들은 사후에 신선이 되기를 소망했던 것이지요.
신선도가 그려지는 것을 보니 도교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 보입니다.
이 무덤은 도교 전래후인 6세기말에서 7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굴식돌방무덤은 구조상 도굴이 쉬워서 유물은 거의 발견되지를 않고, 무덤에 벽화만 덩그라니 남아있어 특징적인 벽화의 이름이나 발견된 지역의 이름을 따서 무덤의 이름을 붙인답니다.
이 무덤 역시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발견되어 강서고분, 또는 강서군의 3개 무덤중 가장 큰 무덤이라 강서 대묘라 이름하지요.

 

 

 

 

강서대묘 청룡 채색분석

 

강서대묘의 청룡 사진 네 가지를  싣습니다.

실측도를 다운 받으셔서 채색분석햐여 오시기 바랍니다. 

 

1. 현 상태의 사진입니다. 보이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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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현재 상태의 것을 분명하게 보이도록 복원한 것이어서 이 사진을 참고하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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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실측도입니다. 이것을 프린트하셔서 채색분석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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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것은 일본 화가가 모사한 것이니 참고하기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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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존처리지침 ㅡ 일제강점기

 

 

 

 


 



 

.고구려 태양의 민족


 

삼족오.

태양의 민족 제후국을 거느린 고구려


 


 

 


 



 

대만 박물관(대만 국립 고궁박물관)에 존재한다는 신령스런 느낌의

구려 왕관.


 

장재스가 대륙 탈출할때 싸 짊어지고 간 보물중에 저
고구려
왕관이 포함되어있었고.


 

대만 박물관은 아주 특별 행사할때만 살짝 전시한다고
함.


 

한국 유학생이 우연한 기회에 촬영.



 



 

.북한에 있는 고구려 강서 대묘. 청룡


 






중화민국 역사부도 고구려  영토.







우즈베키스탄 지역에 사신을 보낸
고구려



당나라 지배세력- 북방민족 선비족(몽골계)



한족은 노예





중앙아시아 돈황석굴에 그려진 ㄷ자형의 고구려성
그림





『舊唐書』전성기 高句麗 疆域이 西北으로는 遼水를 건너
營州에 이르렀다고~




안악3호분 행렬도와 묘사도1






 

 안악3호분 행렬도와 묘사도2


 




 

 


 

고구려 백제 신라 중 고구려 왕관의
특징 


 




 



 

 쌍영총 스케치


 




 



 

 쌍영총


 


    한국사를 한반도나 간도로 비정하려는 짱개들의 농간질은 그냥 무시하시고~

한국역사가 많이 날조위축되어있다는것을 보여주는 책을 소개합니다.

    한국의 고대사부분은 한국학계에서 완전히 정립이 안돼서 한국학자마다 부분씩  다른점을 참조하세요~

(중국역사문화가 한족꺼라는 주장에 대한 아무근거도 못대면서  동북공정을 그대로 인정하고 노골적으로 짱개의 중화주의역사관을 외치는 짱개내지는 화교 또는 아류짱개에게 농간당하면,한국은 짱개의 하나의 성으로 전락합니다~

    전형적인 짱개의 역사관을 그대로 주장하는 중화제국주의자 양웬리의 논리~

조선,고구려등 3한과 동이역사,일족 흉노와 선비등 북방민족이 세운 국가와 역사는 북방민족것이 아니라,지금 대륙에 살고있는 한족꺼~

 

    한문등을 만든 한족문화가 위대해서 지금 만몽족등 동이계 소수민족이 중화민족에 동화된것~

지금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땅에서 벌어진 역사와 문화의 주인이다,고로 무조건 한족꺼다~

따라서 동이족 들먹이며 중국사에 명백히 기재된 동이족역사,고조선,고구려등 3한,선비계열 주,진,위(북위),연,수,당,금,원,청등 역사를 들먹이며 한족역사에서 분리하려는 자는 모두다 환빠다~

이게 무슨 개,솔인지~~

중화제국주의자의 한족역사는  허무맹랑,날강도,소설일뿐~~~)

(그래서 양웬리가 백범김구의 명언에 고의로 다문화를 연상시키도록 명언중 문화란 단어가 들어간 극히 일부분만 올리고~

그뒤 중요한 핵심인 국가,민족,피와 역사란 단어가 들어간  부분은 죄다 누락~)


발해연안의 한국 고대문화

이형구 지음

인상깊은 구절


    고구려 벽화 고분이 축조된 시기인 4~7세기경의 중국은 위진 남북조시대(220~589), 당초기(582~668)에 해당하는데,
고구려 벽화 고분에 버금가는 이 시기 중국 벽화 고분의 발견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고구려가 망하고 그 다음해에(669)에
고구려 유민 3만8천200호가 당나라로 끌려가 양자강. 회화 이남으로 강제 이주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경서[오늘날의 서안
이서] 지방으로 옮겨간 고구려 유민 가운데에서 문화 예술인. 화가 건축가들이 당나라의 국가적인 토목공사 즉, 궁성 건축이나 왕릉의
영조에 참여하게 되면서 비로서 당나라는 예술이 중흥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전반에 걸치는 이 시기에는
의덕태자, 영태공주, 장회태자의 벽화 고분이 축조되었다. 이때가 이른바 성당시기이다. 때문에 고구려 벽화 고분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그것은 고구려 문화가 당시 동북아시아 국제문화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짐작하게 하는 증좌이다.


    책소개 만주에 산재한 1만여 기의 고구려 무덤,
빗살무늬토기, 적석총과 석관묘, 고인돌과 향당, 갑골문자와 청동거울, 고분벽화, 고구려 왕성 안학궁, 황금 귀고리 등 중국과 북한에 분포한
유적과 유물을 조사·연구, 동북아시아의 중심 문화였던 한민족 문화의 원류를 추적한다.[YES24
제공]





<경향신문>


출판사 서평



 

    고구려를 자국사에 편입시키려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수십 년에 걸친 실증적인 연구로 반론을 제기한 획기적인 역사서! 2004년 유네스코 지정 확정된 고구려 유적 자료를 대폭 수록한 사료의 보고寶庫!



    지난해 6월 중국 광명일보에 ‘고구려는 중국의 역사’임을 주장하는 기사가 실려 파문이 인 직후부터 고구려와 발해를 둘러싼 한국과 중국의 역사논쟁은 감정적인 대립까지 불사하는 ‘역사전쟁’으로까지 비화되고 있다.


 

사실 중국이 고조선사, 고구려사, 발해사를 포함한 중국 동북 지방 역사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에 착수한 것은 1990년대. 연구결과를 토대로 중국사회과학원이 동북공정 계획을 중점 검토하기 시작한 것은 1996년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난 2002년 2월 중국은 ‘동북변강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이라는 이른바 ‘동북공정’을 시작하여 동북 지방 역사 연구에 대대적인 지원을 하고 있으며 해당 지역 유적을 대폭 정비하고 있다.


 

    동북공정은 단순히 역사 연구의 차원을 넘어 한반도 통일 후 간도 영유권 분쟁이나 동북 지방 소수민족의 독립 요구에 대처하기 위한 사전 포석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이러한 중국의 공세에 맞선 국내의 대응은 감정적 차원을 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무엇보다도 그동안 정치적인 문제로 고대사 연구 영역이 한반도, 그 중에서도 남한에 한정되어 있어 축적된 연구 사료가 부족하여 한국 고대사의 많은 부분이 아직도 의문에 싸여 있어서 학문적인 대응을 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발해연안에서 찾은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에는 한국 고대사, 특히 중국과 북한 지역과 관련된 사료 연구에 독보적인 업적을 이룩해온 선문대학교 역사학과 이형구 교수가 수십년간 연구해온 자료와 연구결과가 수록되어 한국 고대사의 갖가지 의문을 풀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한다.


 

    저자는 대만 유학 후 온갖 어려움과 오해, 심지어는 수사당국의 조사를 불사하면서까지 중국과 북한의 역사연구 성과를 입수하여 고대사 연구에 매진했으며 1990년부터는 중국을, 그리고 2000년부터는 북한을 오가며 실제 유적·유물 조사를 바탕으로 한국 고대사의 원형을 복원하는 데 선구적인 업적을 이룩해 왔다.


 

    그는 ‘동북공정’ 이후 다른 학자들의 출입이 제한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동안 축적한 중국의 인맥과 신뢰를 바탕으로 중국 유적탐사를 계속하고 있다.


 

    이 책에는 만주 전역에 흩어진 한민족의 유적과 유물은 물론 북한과 남한의 각종 고대사 관련 유적·유물의 사진이 300여 컷 수록되어 독자를 생생한 유적답사 현장으로 안내하고 있으며 각 유적과 유물에 대한 조사결과를 수록하여 실증적으로 고대사의 비밀을 밝히고 있다.



    특히 2004년 6월~7월 중국에서 열린 제2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중국과 북한의 고구려 유적 대부분에 대해 총 천연색 사진과 연구자료를 수록하고 있어 고구려 유적에 대한 높아진 일반의 관심에 부응하고 있다.


    한민족 문화는 시베리아가 아닌 발해연안에서 시작되었다! 베일에 싸인 한국 고대사를 구석기부터 고려시대까지 총체적으로 복원한 최초의 저서



    만주 지방과 한반도, 즉 발해연안의 유적·유물들은 구석기부터 철기까지 한결같이 문화의 동질성을 보여주어 만주 지방이 원래 우리 민족의 강역이었음을 보여준다.

 

    이 책에서는 구석기인의 두개골 화석에서부터 빗살무늬토기, 적석총, 황금장식까지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에 걸친 유적·유물들을 낱낱이 조사하여 발해연안에서 발생한 고대문화가 고조선, 부여, 고구려를 거쳐 백제, 신라, 발해, 고려로 면면히 이어져 왔음을 밝혀내었다.



    우리 민족문화는 시베리아나 중국 등 외래문화의 영향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발해연안에서 자체적으로 발생하여 고구려 시기 동북아시아 문화의 황금기를 구가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아래에 제시된 다양한 근거들을 통해 우리 민족의 역사를 한반도에 국한했던 기존 역사해석의 틀에서 벗어나 동북아시아의 중심문화였던 한민족 문화의 원형을 총체적으로 복원한다.


 

l 발해연안에서 발굴된
빗살무늬토기와 적석총은 시베리아보다 1000년 이상 빠르며 한반도 발굴 유적·유물들과 형태면에서 일치한다.


 

l 고구려 벽화의 대장장이신은 동북아 최대 철기 제작국가였던 고구려의 철 숭배사상을 보여준다.



l 고구려 무덤 1만여 기가 흩어져 있는 만주 지방은 고구려 영토의 중심이었다.


 


l 광개토대왕릉비의 현재 비문에 대한 조사는 일제의 비문 조작 의혹이 사실임을 드러낸다.


 

l 고구려 안학궁은 당나라 대명궁보다 규모가 더 커 동북아시아 최강국의 면모를 보여준다.


 


l 고구려에서는 중국보다 이른 시기에 마구 일습이 완성되어 기마 문화를 꽃피웠다.



l 고분벽화를 통해 고구려의 연꽃 숭배가 백제, 신라, 가야로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l 부여, 고구려, 백제가 같은 민족이며 언어, 의복, 음식 등이 동일하다는 기록이 『삼국지』, 『위서』, 『주서周書』, 『수서隋書』에 일관되게 나타난다.


 


l 고구려 멸망 후 유민이 당나라로 유입되면서 당시 문화선진국이었던 고구려 문화의 영향이 당나라 왕릉, 궁성 건축에
나타난다.


 

l 신라의 황금장식은 스키타이로부터 전래된 것이 아니라 발해연안에서 발생한 황금문화가 부여, 고구려를 거쳐 전래된 것이다.


 

l 백제 몽촌토성에서 발견된 토기는 고구려 토기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l 발해의 성곽은 축성법, 성안의 도시계획에 이르기까지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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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구석기] 한민족의
원류


 



[신석기] 발해연안문명의 여명


[청동기] 청동기 문화의 기원


부여 문화의 발흥
고구려의 영광
동방회화의 금자탑
동북아시아의 철과 무기
한강 유역의 백제
신라의 황금예술
발해의 건국
고려의 통일


 




[YES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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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소개 1962년 홍익대학교에 입학하여 최순우(전 국립중앙박물관장) 문하에서 수학했다.


졸업 후 대만에 유학하여 국립대만대학교 고고인류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역사학과에서 <발해연안 고대문화의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대만 고궁박물원과 중앙연구원에서 객원연구원으로 재직했다.


     1981년 귀국 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역사연구소 교수, 한국학대학원 교수, 중국 북경대학 고고학과 객좌교수 등을 역임했다. 현재 선문대학교 역사학과 교수와 대학원장을 겸임하고 있다.


    한편,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동양고고학연구소 대표로 활동하며 2000년 9월에는 개성 영통사 복원추진위원회 남측 대표로 방북했고, 2002년 10월과 2003년 10월에는 평양에서 개최된 단군과 고조선 관계 남북학술회의를 주관하였다.


 

    최근에는 '특별기획전 고구려!' 준비기획위원장을 맡아 남북학술교류에 힘쓰기도 했다. 2000년, 서울 풍납동 백제 왕경(王京) 유적 발견과 풍납토성 보존에 힘쓴 공로로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받았다.


 


    저서로
    <광개토대왕릉비 신연구>(공저), <한국고대문화의 기원>, <강화도 고인돌무덤[지석묘] 조사연구>,
<고구려의 고고문물>(공저), <서울 풍납토성[백제왕성] 실측조사연구> 등이 있다. 논문으로는 「발해연안 빗살무늬토기문화의 연구」, 「발해연안 석묘문화의 원류」, 「고조선시기의 청동기문화 연구」, 「한국민족문화의 시베리아 기원설에 대한 재고」 등 100여 편이 있다.
    이 밖에 <조선고대문화의 기원朝鮮古代文化の起源> 등 일문·중문으로 수십 편의 저서와 논문이 간행되었으며 역서로 <갑골학 60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