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쓰는 화랑세기 / 작성자 한절마 님

2015. 1. 30. 20:46들꽃다회

 

 

 

 

 

 

       다시쓰는 화랑세기 사회

2012/03/11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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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화랑세기

 


다시쓰는 화랑세기

<1>어떤 책인가 


    한국사를 뒤흔드는 새로운 사서인가, 한 독학자의 희대의 위서인가. 한국고대사의 비밀을 해명해줄 「역사의 타임머신」인가, 한국사의 치부를 들춰내는 「판도라의 상자」인가. 화랑세기 필사본이 발견된지 11년. 오랜 진위논쟁에도 불구하고 「화랑세기」는 고대 한국인의 삶의 모습을 그려내는 귀중한 사료다. 본지는 화랑세기 필사본에 대한 학계의 연구성과를 소개하는 한편 이 사서에 담긴 고대신라의 사회와 풍속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하는 시리즈를 연재한다.

지금으로부터 11년여전인 1989년 2월16일자 국제신문 1면 머릿기사. 「花郞世紀 필사본 발견」이라는 시커먼 헤드라인이 독자들의 시선을 단번에 잡아당겼다.「고대 신라사 다시 써야 할 획기적 사료」, 「전설의 사서 천3백년만에 <역사>로 확인」이라는 굵은 제목을 함께 단 이 특종기사가 지난 10년간 한국 사학계의 최대 쟁점이 돼온 「화랑세기 논쟁」의 시작이었다.

당시 이영희기자가 쓴 그 기사는 「책이름만 전해 내려오던 국보급의 「화랑세기(花郞世紀)」 필사본이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화랑세기는 빈약한 고대사 자료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며 글 내용에 있어 기존의 신라사를 다시 써야할 만큼 획기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자못 흥분에 찬 내용으로 시작된다.

국제신문은 특종보도에 이어 재야사학자 이태길(81·광복회 부산지부장)씨의 번역으로 6회에 걸쳐 화랑세기 전문을 연재했다. 본사의 보도 이후 사학계는 큰 충격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그 동안 화랑과 신라사에 대한 연구는 절대적으로 「삼국사기」 등 후대의 사서에 의존했다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화랑세기의 기사 중 삼국사기에 인용된 것은 겨우 「賢佐忠臣 從此而秀 良將勇卒 由是而生(현명한 재상과 충성스런 신하가 이 <화랑>에서 선발되었고 뛰어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에서 나왔다)」이라는 16자. 다시 말해 화랑세기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선 찾을 수 없는 고대신라 사회상과 화랑에 대한 정보가 그만큼 풍부하게 실렸다는 이야기다.

    화랑세기 필사본의 발견은 학계에 10년 동안의 치열한 진위논쟁을 몰고왔다. 한국 고대의 사회 및 풍속사를 해명해주는 「역사의 타임머신」이라는 찬사의 한편으론 이 책이 필사본이며 기존의 사서의 내용과는 일부 다르다는 점을 들어 후대의 위작일 것이라는 주장도 함께 제기됐던 것. 진위논쟁이 계속되던 중인 지난 95년 서울대 노태돈교수에 의해 이 화랑세기 보다 더 자세한 화랑세기(花郞世記)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짐에 따라 본사가 보도했던 최초의 화랑세기는 「발췌본」으로, 95년에 새로 등장한 화랑세기는 「필사본」으로 불리고 있다.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화랑세기는 1천3백여년이란 오랜 세월동안 묻혀있다 세상에 나온 것일까.

    이 책의 발췌본과 필사본은 충북 괴산출신으로 한학을 공부하다 81년 44세의 나이로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난 김종진(金鍾鎭)씨가 한문 스승이었던 박창화(朴昌和)씨에게 물려받은 것. 한학자인 박씨는 일제시대 일본 궁내성 도서료에 근무하면서 화랑세기 원본을 보고 필사한 것이며, 발췌본은 필사본의 내용중 문란한 성관계 등 유교적인 관점에서 껄끄러운 부분을 빼고 발췌해 쓴 것이란게 정설이다. 김종진씨가 오랜 세월 보관하던 것을 김씨의 사후 그의 아내인 김경자(56·부산 북구 모라동)씨가 89년초 당시 부산시 문화재 감정관이었던 양맹준씨에게 감정을 의뢰함으로써 세상에 나오게 된 것. 

   화랑세기는 서기681~687년 사이에 신라시대 역사가 김대문이 쓴 책으로, 그동안은 이름만 전해졌을 뿐 그 내용이 전혀 전해지지 않아 역사가들 사이에 「신비의 사서」로 알려진 책이다. 「화랑세기」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처럼 후대인 고려시대에 쓰여진 사서가 아니라 당대인이 썼다는 점에서 사료적인 가치가 더욱 크다.

   이 책은 540년에서 681년까지 있었던 신라 화랑들의 우두머리인 풍월주 32명의 전기를 담은 책이다. 이 책에는 화랑들의 계보는 물론 신라시대의 왕위계승 방식, 왕실의 근친혼, 동성애 등 분방한 성풍속과 권력 쟁탈을 둘러싼 음모 등 당시 왕족들과 화랑들의 생활상, 그리고 당대 사회의 정치사와 풍속사가 거울처럼 훤히 드러나 있다.

발췌본은 제1세 풍월주 위화랑(魏花郞)에서부터 15세 풍월주 김유신에 이르기까지 차례대로 기술돼 있으나 김유신 편은 중도에서 내용이 떨어져 나갔다. 필사본은 앞부분이 결락됐으나 15세 풍월주 김유신외에 16~32세 풍월주에 관한 기록이 더 포함돼 있다. 즉 발췌본과 필사본을 합치면 풍월주의계보가 모두 나오는 것이다.

화랑세기엔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기존의 사서와도 다른 내용이 많다. 삼국사기가 신라의 골품제도를 성골과 진골로 구분하는 것과는 달리 화랑세기는 대원신통(大元神統)과 진골정통(眞骨正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또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김춘추의 아버지 용수와 13세 풍월주(風月主) 용춘을 이름만 다를뿐 동일인으로 보지만 화랑세기에서는 형제로 기록하는 등 400명이 넘는 등장인물들에 대한 기록을 통해 당시 관직 관등제도에 대해서도 새로운 사실들을 밝히고 있다.

   화랑세기의 작자 김대문은 신라의 귀족 자제로 성덕왕 3년(704)에 한산주 도독이 되었으며 「고승전」 「화랑세기」 「악본」 「한산기」 등 몇권의 전기를 썼다고 한다. 김대문의 가계를 보면 1세 풍월주 위화랑이 5대조이고 4세 풍월주 이화랑이 고조부, 12세 보리공이 증조부, 20세 예원공이 조부, 그리고 28세 오기공이 부친이었다.

   김대문의 부친 오기공은 화랑의 세보를 「향음」으로 저술했으며 김대문은 이를 바탕으로 화랑세기를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기공은 27세 풍월주인 김흠돌의 난을 진압했는데 김대문은 난에 가담한 집단과 화랑세습가문으로써 난을 진압한 가계라는 사실을 역사에 남기려는 것이 화랑세기를 쓴 가장 큰 이유로 분석되고 있다.
   학계의 치열한 논쟁에도 불구하고 화랑세기는 아직까지 진위여부가 확정되지는 않은 상태다. 그러나 진본이 맞을 것이라는 시각이 조금씩 설득력을더해가고 있다.


<2> 학계의 진위논쟁


   박창화씨(1889∼1962)가 일본 궁내성 도서료(현 서릉부)에서 한국 관련문헌자료 담당 촉탁사서로 근무할 당시 필사했다는 「화랑세기」는 김대문이 지은 「화랑세기」 원본을 베낀 것일까, 아니면 박씨가 다른 책들을 참고로 해 창작한 것일까? 89년 본지에 의해 처음 세상에 나온 발췌본 「화랑세기」는 한국 고대사학계에 이 책의 사료적 가치를 둘러싼 논쟁을 불러왔고 95년 필사본 「화랑세기」가 다시 알려짐으로써 한국고대사학계는 본격적인 논쟁에 돌입했다.

   지금은 국문학계까지 가세해 논란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89년이후 지금까지 「화랑세기」관련 논문은 모두 50여편이나 된다. 어떤 학자는 이런 현상을 두고 『「화랑세기」가 마치 한국고대사 연구의 백가쟁명(百家爭鳴)을 불러일으킨 느낌을 받았을 정도』라고 밝히고 있다.

   「화랑세기」가 위작이라고 주장하는 대표 학자는 노태돈교수(서울대 국사학과), 진본의 필사본이 맞다고 주장하는 선두주자는 이종욱교수(서강대사학과). 그 전까지는 조심스럽게 논쟁이 진행됐으나 두 사람이 본격적으로 격돌(?)한 것은 1995년 역사학회세미나에서였다.

   이종욱교수가 이 해 4월 제325회 세미나에서 발췌본 「화랑세기」의 가치를 공식적으로 처음 인정하는 발표를 하자 노태돈교수가 두달 후 열린 한국고대사연구회 월례발표회에서 이교수의 주장을 반박하며 발췌본과 필사본「화랑세기」는 1930년대 이후 1945년 이전에 박창화씨에 의해 만들어진 위서로 단정지었던 것. 여기에 여러 학자들이 가세해 진위논쟁에 불을 지폈다.


우선 위서를 주장하는 학자들의 견해.


   노교수는 97년 「한국사연구」에 발표한 또 다른 글에서 박씨가 지은「도홍기(桃紅記)」 「홍수동기(紅樹洞記)」 「어을우동기(於乙于同記)」등 한문소설의 주요 모티브가 남녀간의 애정과 성관계이며 박씨의 「화랑세기」도 그런 창작의 하나라고 주장했다.

   노교수는 『박씨의 「화랑세기」가 진본을 필사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박씨가 쓴 다른 책들을 검토하지도 않는 등 학자로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할 자료파악과 실증 문제에 소홀했다』며 『지금의 진위논란이 학문연구에서의 상식과 규칙이 지닌 의미를 한번쯤 되씹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권덕영교수(부산외국어대 사학과)는 95년 「필사본 「화랑세기」의 사료적 검토」주제의 논문을 통해 이 책은 위작인 듯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듯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며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으나 최근 나온 「한국학보」 2000년 여름호에선 위서로 보는 견해에 동조하고 있다. 권교수는 박창화씨가 필사본을 만드는 과정에서 적어도 두차례 이상 수정과 가필, 그리고 삭제를 가한 흔적이 있으며 이러한 글자가 무려 332자나된다고 밝혔다.

   이기동교수(동국대 사학과)도 박씨의 「화랑세기」에는 여러 화랑집단의 인적구성의 차이라든가 혹은 기질상의 차이가 상세히 기술된 점에 대해 이처럼 화랑단체를 사회학적 관점에서 기술한다는 사고양식 자체가 이미 근대인의 것이므로 틀림없는 위작이라고 주장했다. 위서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박창화씨가 필사본 「화랑세기」를 좀 더 신빙성 있게 보이기 위해 불필요한 부분을 빼거나 필요에 따라 글자를 새로 더하거나 고치고 문장의 순서를 바꾸어 발췌본 「화랑세기」를 만들었다고 말한다.

 


진본의 필사본임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반론은 이렇다.


   이종욱교수는 위서를 주장하는 쪽은 박씨가 필사본을 만든 후 그것을 기초로 발췌본을 다듬어 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사실은 발췌본이 필사본에 비해 오히려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것. 이를테면 필사본에는 사다함이 「귀당비장(貴幢裨將)」이 된 것으로 나오고 있으나 발췌본에는 「귀당(貴幢)」이 된 것으로 나오는 등 발췌본의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또 위서를 주장하는 학자들이 박씨의 창작품으로 보고 있는 필사본의 향가 「풍랑가」와 「청조가」에 대해서도 이교수는 박씨가 필사했던 1930~40년대엔 향가연구가 태동단계였으므로 박씨가 현실적으로 창작할 능력이 없었을 것이라는 반론을 편다. 이 2수의 향가는 김완진 서울대 명예교수와 정연찬 서강대 명예교수등 국문학자들 사이에서도 위작이라는 설과 현존 최고의 향가라는 주장이 대립되고 있다.

   이종욱교수는 신라의 사회체제를 현장중계하듯이 쓴 「화랑세기」를 현재의 관점으로 보아서는 안되며 신라인의 시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교수는 최근 기자에게 『필사본 「화랑세기」가 진본을 보고 베꼈다는 주장의 근거를 더 확보, 곧 단행본으로 발간하려고 출판사에 원고를 넘긴 상태』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재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객원교수도 이미 89년에 「화랑세기의 사료적가치-최근 발견된 필사본에 대한 검토」주제의 논문에서 김대문이 아니고는 화랑의 세보를 이렇게 소상히 기술할 수 없으며 신라사회의 다른 문제도 연구할 수 있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며 발췌본 「화랑세기」의 가치를 주장했다.

  「화랑세기」의 가치를 인정하는 다른 학자들도 그 책에 나오는 인명 숫자 지명 관명 및 화랑관계 용어들은 「삼국유사」와 「삼국사절요」 등에 나오며 진본 「화랑세기」에도 오탈자가 없다고 보기 어려운데다 필사과정에서 다시 오탈자가 생겼고 문체도 다소 변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사학자인 이도학 정재훈 장지훈 이태길씨 등이 발췌본 「화랑세기」의 신빙성을 지지하는 글을 발표했고 최광식(고려대 한국사학과) 이강래교수(전남대 사학과) 등도 「화랑세기」의 사료적 가치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있다. 국문학자인 김학성교수(성균관대 국문학과)와 이종학씨(서라벌군사문제연구소장)도 이종욱교수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다.

   또 북한 학계도 1991년 펴낸 「조선전사」 제4권에서 필사본 「화랑세기」의 내용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등 사료로서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같은 논쟁에도 불구하고 이 시리즈의 목적이 화랑세기의 진위여부를 가리려는 것은 아니다. 논쟁은 학자들의 몫으로 일단 넘겨두고, 이 시리즈는 발췌본과 필사본 「화랑세기」를 통해 신라시대의 사회상을 조명해보고자 하는 목적에 충실하려고 한다.

           

<3>풍월주의 계보
1세 풍월주(화랑의 우두머리) 위화랑(魏花郞)의 딸인 옥진공주는 어느 날 칠색조가 가슴에 안기는 꿈을 꾸었다. 그녀는 법흥왕과 영실공이 축구를 하고 있는 내정으로 들어가 법흥왕의 손을 끌어당겼다. 졸립고 헝클어진 머리를 한 그녀는 법흥왕에게 『좋은 꿈을 꾸었는데 귀한 아들을 낳을 징조이니 잠자리를 함께 하자』고 은근히 말했다. 그러자 법흥왕은『7색은 섞인 색이고 새는 여자다. 이는 빈첩(嬪妾)의 징조이니 네 지아비와 함께 하라. 대신 아들을 낳으면 태자로 삼고 딸을 낳으면 빈(嬪)으로 삼을 것이다』고 말했다.

법흥왕과 내연의 관계(?)였던 옥진공주의 지아비는 법흥왕의 누이 보현공주의 아들인 영실공이었다. 다시말해 외삼촌이 조카며느리와 정분이 난 셈이다. 이에 옥진과 영실공은 관계를 하여 딸인 묘도(妙道)를 낳았다. 묘도가 자라자 법흥왕은 약속한 대로 그녀를 빈으로 삼고 사랑을 나누었다. 법흥왕은 생질의 딸과 다시 내연의 관계를 맺었던 것. 그런데 법흥왕은 양기가 너무 강했으나 묘도는 작고 좁아 그를 맞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밤이 되면 그녀는 괴로워 했다.

「화랑세기」 11세 풍월주 하종(夏宗)조에 나오는 내용이다. 옥진공주는 골품이 없었으나 법흥왕의 후궁이 돼 비대공(比臺公)을 낳았으며 진골정통(眞骨正統)과 대립했던 대원신통(大元神統)의 시원이 된다.

이 책에는 이처럼 왕실과 풍월주들의 복잡한 근친혼과 출생관계가 얽혀있다. 묘도는 남편인 2세 풍월주 미진부공과 사랑을 나누어 신라최대의 자유부인(?) 미실을 낳았다. 「화랑세기」에서 보이는 신라는 오늘날의 잣대로서도 이해되지않을 만큼 근친혼이 성행했고, 문란한(?) 성풍속을 가진 사회였다. 이같은 기록이 한국사의 순수성을 깎아내리려는 일제의 음모가 아니냐는 시각에서 위작 주장의 한 근거가 되고 있기도 하지만 당대의 신라를 유교적 시각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어쨌든 신라사회는 완전한 의미에서의 일부일처제 사회는 아니었다는 추론도 가능하다.

「화랑세기」에는 풍월주의 출생배경과 각 풍월주들의 성격, 외모, 혼인과 남녀관계, 활동, 임명과 퇴임, 화랑도의 조직, 파맥 등 다양한 내용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이 책에는 이러한 내용 외에 풍월주들에 대한 찬(贊)과 세계(世系)가 나온다. 그런데 26세 진공(眞功)조부터는 찬과 세계가 없고 27세 흠돌(欽突)조부터는 몇 세 풍월주인지도 표시하지 않고 기록 분량도 적다. 원본 「화랑세기」를 쓴 김대문의 아버지인 28세 오기공(吳起公)에 대한 기록도 마찬가지로 자세하지 않다.

「화랑세기」가 풍월주의 전기인 만큼 풍월주의 기원에 대해 알아보면 1세 풍월주 위화랑조에는 지소태후가 국정을 맡자 위화랑을 사랑해 그를 풍월주로 삼았다고 한다. 지소태후는 법흥왕과 보도부인 사이에서 난 딸로, 작은 아버지인 입종공(立宗公)의 부인이 되어 아들인 진흥왕이 7세에 등극하자 섭정을 했다.

이 책의 서문과 2세 풍월주 미진부공조에는 지소태후가 원화(源花)를 폐지하고 화랑을 설치해 국민들로 하여금 받들게 했으며 그 무리를 풍월이라했고 우두머리를 풍월주라 했다고 적혀있다. 원화는 옛날 중국 연나라 부인들이 미인을 많이 모아 이름하기를 국화(國花)라 했는데 이 풍습이 동쪽으로 흘러 우리나라에서도 여자로써 원화를 삼게 되었다는 기록 역시 서문에 나온다.

원화를 폐지한 시기가 「삼국사기」엔 진흥왕 37년(576년)으로 기록돼 있으나 진흥왕 원년(540년)에 풍월주를 설치한 것으로 나오는 「삼국사절요」「동사강목」 「동국통감」 등은 「화랑세기」의 기록과 일치하고 있다. 풍월주의 부인들은 선모(仙母) 또는 화주(花主)라는 지위를 차지했다.

다음은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1세부터 32세까지 풍월주의 이름이다.
△1세 위화랑(魏花郞) △2세 미진부(未珍夫) △3세 모랑(毛郞) △4세 이화랑(二花郞) △5세 사다함(斯多含) △6세 세종(世宗) △7세 설원랑(薛原郞) △8세 문노(文弩) △9세 비보랑(秘寶郞) △10세 미생(美生) △11세 하종(夏宗) △12세 보리(菩利) △13세 용춘(龍春) △14세 호림(虎林) △15세 유신(庾信) △16세 보종(寶宗) △17세 염장(廉長) △18세 춘추(春秋) △19세 흠순(欽純) △20세 예원(禮元) △21세 선품(善品) △22세 양도(良圖) △23세 군관(軍官) △24세 천광(天光) △25세 춘장(春長) △26세 진공(眞功) △27세 흠돌(欽突) △28세 오기(吳起) △29세 원보(元寶) △30세 천관(天官) △31세 흠언(欽言) △32세 신공(信功).

신문왕 원년(681년)에 그의 장인이자 김유신의 딸 진광(晋光)의 남편인 27세 흠돌이 일으킨 반란에 퇴역 및 현역 화랑이 다수 가담하는 바람에 반란이 진압된 직후 화랑제도가 폐지됐기 때문에 풍월주는 32세가 마지막이다. 그후 화랑제도가 부활되지만 그 기능은 무사(武事)와는 거리가 먼 득도(得道)로 변질되었다. 또 「화랑세기」가 687년 이전에 저술된 것으로 추정되는 만큼 그 후의 일은 김대문 자신으로서도 알 수 없는 일이다. 「화랑세기」에는 남자 238명, 여자 180명 합해서 418명이 등장하고 있으며 이들 대부분은 풍월주와 일정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풍월주를 중심으로 한 화랑들은 계파가 있었다. 예컨대 7세 풍월주 설원랑조를 보면 8세 문노의 호국선(護國仙)파와 설원랑의 운상인(雲上人)파로 계파가 나뉜 것을 알 수 있다. 또 10세 풍월주 미생조에는 통합원류(통합파) 실파 문노파 이화류 가야파 등 5개파로 갈린 것이 확인된다. 이는 신라의 정치가 화랑의 계파를 통한 일종의 붕당체제로 운영됐음을 추정케 하는 대목이다.

또 김대문의 3대조인 12세 풍월주 보리공이 화랑을 세습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관직을 원치 않은 것으로 봐서 신라사회에서의 화랑의 높은 지위도 알수 있다. 「화랑세기」에는 540년 풍월주가 설치돼 681년 폐지될 때까지 32명의 풍월주의 전기가 씨줄과 날줄로 얽혀 있는 것을 우리는 읽을 수 있다. 당시 신라사회는 왕을 중심으로 운용되던 골품제 사회였다. 따라서 왕과 얽혀있는 풍월주의 세보는 당시 신라의 정치 지배 세력들을 망라하는 계보이기도한 것이다.

<4>화랑의 조직과 활동
「화랑세기」를 통해 본 화랑도 조직은 크게 화랑, 낭두, 낭도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먼저 화랑 가운데 우두머리는 풍월주였고 그 밑에 부제가 있었다. 부제 아래의 화랑조직에 대해서는 8세 풍월주 문노조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문노는 좌·우 봉사랑(奉事郞)을 좌·우 대화랑(大花郞)으로, 전방(前方) 봉사랑을 전방 대화랑으로 만들어 각기 3부의 낭도를 거느리게 했다. 그 외에 진골화랑 귀방화랑 별방화랑 별문화랑 등의 직제를 두었는데 12~13세의 진골 및 대족의 자제 가운데서 원하는 자를 뽑았다. 그리고 좌화랑과 우화랑을 각 2명씩 두었고 그 밑에 각기 소화랑 3명과 묘화랑(妙花郞) 7명을 거느린 것으로 돼 있다.

화랑이 거느리는 하부 집단인 낭두(郞頭)에 대해서는 22세 풍월주 양도공조에 그 내용이 나오고 있다. 원래 낭두에는 망두 신두 낭두 대낭두 상두 대두 도두 등의 등급이 있었는데 양도공은 대도두, 대노두를 더했고 도두 이하는 각기 별장을 거느렸다. 24세 천광공조에는 대노두는 60살, 대도두는 55살, 도두는 50살, 대두와상두는 45살, 낭두와 대낭두는 40살까지로 한정한 것으로 돼 있다. 대도 중입망자는 망두가 되었고 그중 공과 재주로 천거된 자는 신두가 되었는데 망두만이 낭두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상선(上仙)과 상랑(上郞)의 마복자(왕이 총애한 화랑의 부인이 낳은 화랑의 아들로 일종의 왕의 양자)만이 「입망의 법」에 의해 낭두가 될 수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낭두 밑의 낭도조직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나타나 있다. 22세 양도공조에는 「국초에 서민의 아들들도 준수하면 낭도가 되었다」고 기록돼 있으며 13~14살에 동도(童徒)가 되었고 18~19살에 평도(平徒)가 되었고 23~24살에 대도(大徒)가 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다시 말해 연령별로 소년에서 청년기까지 각각 편제가 이루어져 있었던 셈이다. 대도 즉 성인 낭도 가운데서 입망자는 망두가 되고 신두도 되었다. 또 망두 가운데서 낭두를 뽑은 것으로나온다.

대도는 30살이 되면 병부에 속하거나 혹은 농공에 종사하는 일로 돌아가거나 향리의 장이 되었다고 한다. 이는 낭도로 활동하는 기간이 정해진 것을 의미한다. 풍월주를 물려준 화랑들은 상선 등의 지위를 차지하고 풍월주 위에 존재하는 자문역을 맡았다는 것도 알 수 있다. 풍월주의 부인들은 선모(仙母) 또는 화주(花主)로 화랑도의 운영에 일정한 역할을 했고 화랑도들의 집단인 낭문에는 「유화」가 있었던 것으로 봐서 여자들도 화랑도와 관련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화랑도 중에는 이와 같이 공식적인 편제에 속하지 않았던 사도(私徒)도 있었다.

화랑도의 활동도 알려진 것 보다 다양했음을 알 수 있다. 8세 문노조에는 화랑도 조직이 3부로 나뉘었고 각기 다른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나온다. 그중 좌삼부(左三部)는 도의(道義)·문사(文事)·무사(武事)를 담당했고, 우삼부(右三部)는 현묘(玄妙:춤과 음악)·악사(樂事)·예사(藝事)를 담당했다. 또 전삼부(前三部)는 유화(遊花:산천경개 유람)·제사(祭事)·공사(供事:조정의각종 공식 행사)를 담당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7세 풍월주 설원랑조에는 설원랑의 낭도들은 향가를 잘 했고, 속세 떠나 유람을 즐긴 것으로 나오고 있다. 그에 비해 문노의 낭도들은 무사(武事)를 좋아했고 호탕한 기질을 가졌던 것으로 나온다. 20세 예원공조에는 선도(仙道)는 보종공을, 무도(武道)는 유신공을 따른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로 보건대 각 유파별로 전문으로 수련하는 과정이 어느 정도 차별성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24세 천관공조에는 공과 낭두들이 낭도를 거느리고 친히 활쏘고 말 달리는 것을 익혔는데, 모인 자들을 선발해 병부에 보충한 것으로 나온다. 천관공이 5년간 풍월주로 있는 사이 낭정은 무사(武事)를 중심으로 운영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는 지금까지 알려진 대로 화랑도가 전쟁 수행이나 반란 진압 같은 군사적 활동에 동원됐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9세 풍월주 비보랑조를 보면 진평왕 25년인 건복 25년(603년) 왕이 고구려의 내침을 막으려고 친정할 때 낭도들이 많이 수행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비담의 난을 진압한 세력은 천관공이 거느렸던 화랑도들이었다. 즉 화랑도들의 활동은 순국 무사나 도의 연마, 명산·대천 유람, 노래와 춤 등의 활동 외에 다양한 활동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또 전회에서 언급한대로 화랑도의 조직이 주요한 정치세력이었으며 화랑도를 장악한 정치계파가 정권을 장악했다는 추론도 가능한 것. 특히 삼국통일 과정에서 화랑도들의 종군 활동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또 화랑도는 신라의 인재 양성기구이기도 했다. 화랑도는 다양한 문·무·예등 다방면의 교양을 습득했다. 12세 보리공은 15살에 화랑이 돼 토함공에게 사(史)를 배웠고, 이화공에게 가(歌)를 배웠으며, 문노공에게 검(劒)을 배웠고 미생공에게 무(舞)를 배웠다고 한다. 말하자면 화랑도는 일종의 전인교육 기관이기도 했다. 화랑도의 교육과 활동을 통해 뛰어난 자질을 가진 사람을 골라내 조정에 천거했던 것. 화랑들은 물론이고 서민인 평인들 중에서도 발탁돼 대사(大舍)까지 올라간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한편 화랑도는 신라를 불교사회로 이끄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도 알 수 있다.

화랑도는 신라의 골품제 사회를 유지하는 중요한 장치였다. 다시 말해 신라는 골품사회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화랑도 집단을 사회화 정치화했던 것이다.


<5>마복자(摩腹子) 제도
『네 배가 불러올수록 더 예뻐 보이는구나.』
멀리서 닭이 홰를 치며 울었는데도 벽아부인을 끌어안은 비처왕은 지칠줄 몰랐다. 궁성밖은 안개에 싸인 채 희붐해지고 있었다.
『저를 그토록 사랑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앵두같은 입술로 교태섞인 소리를 내며 왕의 가슴을 더욱 파고들었다. 그는 한 손에 잡힐만큼 작은 그녀의 얼굴을 입술로 부비면서 배를 쓰다듬었다.
『제 아이도 태어나면 저처럼 사랑해주실거죠?』
『그러고 말고. 내 친자식보다 더 아껴줄테니 염려하지 말거라.』
달이 차 벽아부인이 아기를 낳았으니 이 아이가 1세 풍월주 위화랑이다.
하지만 위화랑은 어머니의 정부(情夫)인 비처왕의 자식이 아니고 벽아의 남편인 염신공의 아들이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위화랑은 얼굴이 백옥 같고 입술이 붉은 연지를 바른 듯하며 맑은 눈동자와 하얀 이를 지녀 이야기할 때면 마치 상큼한 바람이 나오는 듯 했다.

그러니까 비처왕이 벽아부인과 사통을 하다가 그녀가 남편의 아기를 배자 그녀를 궁으로 불러들여 출산할 무렵까지 사랑해 주었던 것이다. 일종의 양아버지랄까, 아무튼 비처왕은 출산 직전까지 벽아를 사랑해주다 남편에게 돌려보내고 위화랑이 태어나자 친자식처럼 보살펴주었다. 위화랑은 또한 왕을 아버지처럼 모시며 충성을 맹세했다. 이처럼 부하의 부인이 임신을 하면 불러 아이를 낳을 때까지 사랑해주다 태어난 아이를 보살펴주는 대신 복종하게 하는 신라의 독특한 입양아(?)를 두고 「화랑세기」는 마복자(摩腹子)라 일컫고 있다.

위화랑은 어머니 덕에 마복자가 되었으며 세상에서 부러워하는 마복칠성 가운데 들었다고 화랑세기엔 적혀있다. 마복칠성은 위화랑 아시공(阿時公) 수지공(守知公) 이등공(伊登公) 태종공(苔宗公) 비량공(比梁公) 융취공이다. 비처왕은 마복칠성의 어머니들이 아이를 가지자 벽아부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녀들을 사랑했고 아이들을 보호해 주었다.

법흥왕이 마복칠성의 첫째이고 위화랑은 어머니가 미천한 이유로 마복칠성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전기류인「칠성록(七星錄)」과 「보혜기(寶兮記)」에도 모두 위화랑이 기재돼 있었다고 한다. 이들 마복칠성은 진덕여왕 때 알천공 임종공 술종공 호림공 염장공 유신공 춘추공 등 처럼 국왕을 호위하며 국가의 대사를 의논하던 중신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비처왕과 마복자들은 양부와 양자라는 일종의 부자간의 가족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대신 비처왕은 마복자로 구성된 정치적 추종자들을 거느리게 되었고 마복자는 비처왕이라는 정치적 후원자를 갖게 된 것이다. 이러한 마복자 제도는 왕궁에서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화랑의 하부조직에 속했던 낭두들은 풍월주의 지위를 거친 후 풍월주의 고문 역할을 한 상선(上仙)과 상랑(上郞)의 마복자가 아니면 이른바 출세의 대열에 끼어들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낭두의 처들은 임신하면 곧 산꿩을 예물로 하여 이들이 거처하는 집인 선문(仙門)에 들어가 밥짓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종을 자처하며 사랑을 받으려 애썼다. 이들의 사랑을 받다 처들이 출산할 무렵 물러날 때 그 남편들은 재물을 내놓고 예를 갖추어 처를 맞이하였는데 이를 사함(謝函)이라 불렀다.

물러난 낭두의 처들이 자식을 낳고 석달이 지난 후 다시 선문에 들어가면 그 남편은 양이나 돼지를 바쳤는데 이를 세함(洗函)이라고 했다. 그래서 처가 다시 사랑을 받다 나올 때 그 남편이 또 재물로 아내를 맞이했다. 이 때문에 낭두가 자식을 많이 낳으면 재산을 모두 선문에 내놓는 바람에 오히려 가세가 기우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헤픈(?) 여자는 종종 선문에서 놀려고 거짓으로 임신하였다고 속이고 탕비로 들어가기도 했다. 그녀들은 혹 임신하지 못할까 염려해서 선문의 노예나 병졸들의 아이를 임신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있는 등 그 폐단이 매우 심했다.

이에 22세 풍월주 양도공이 이러한 폐단을 개혁해 인재를 뽑고 사함의 풍속을 금하기에 이르렀다. 17세 풍월주 염장공은 거느린 마복자가 무려 100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화랑세기」에 처음 보이는 이 마복자란 제도가 한국역사학계에서는 「화랑세기」 진위문제의 논쟁거리가 되어 왔다. 서울대 노태돈교수는 마복자라는 제도가 존재하고선 가정이 존립할 수 없다며 이것이 「화랑세기」가 후대에 다시 쓰여진 증거라고 주장한다. 그는 『혹 어떤 아이와 그의 후견인 간의 특수한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 후견인이 그 아이의 생물학적 아버지인 것처럼 꾸며 상징성을 나타내는 경우는 이해할 수 있지만 이처럼 실제 성관계를 맺는 형태의 의례가 행해졌던 경우가 과연 있었겠는가. 더구나 6세기 이후에까지도 신라사회에서 상상을 뛰어넘는 그런 관계가 있었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서강대 이종욱교수는 『이러한 주장은 한 마디로 유교적인 윤리로「화랑세기」를 위작이라고 단정하는 것』이라며 반박했다. 그는 『사회적인 강자가 약자의 처의 성을 강압한 것은 「삼국사기」에도 그 사례가 나오며 중국이나 흉노의 풍속에도 보인다』고 설명했다.

[마복자 거느린 첫 왕은 비처왕]
비처왕은 소지왕(炤知王)이라고도 하며 신라 21대왕으로 재위기간은 479∼499년이다. 「화랑세기」전체를 읽어보면 마복자를 거느린 첫왕으로 기록돼 있다.
「삼국사기」권 제3, 「신라본기」제3에는 비처왕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비처왕이 재위22년(500) 9월에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지역인 날이(捺已)에 행차를 했다. 그런데 그 고을에 사는 파로(波路)라는 사람이 벽화(碧花)라는 16세된 미색의 딸을 수레에 싣고 명주로 덮어 가려서 왕에게 바쳤다. 왕은 음식을 올리는 것으로 여기고 열어보니 그 속에 고운 소녀가 있어 괴이하게 여기고 돌려보냈다. 그러나 궁궐에 돌아온 그는 벽화의 아름다움을 잊을 수 없어 남몰래 그집으로 가서 벽화와 함께 몇차례 잠을 잤다. 한번은 벽화의 집에서 돌아오는 길에 지금의 안동지방인 고타군(古陀郡)에 들러 한 노파의 집에 묵으면서 노파로부터 요즘 왕의 행실이 나쁘다는 말을 들었다. 왕은 매우 부끄럽게 여기며 은밀하게 벽화를 궁궐로 맞아들여 별실에 두었으며 얼마 뒤 아들을 낳았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화랑세기」에는 비처왕과 사통한 벽아부인이 경북 영주에 있을때 딸 하나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나중에 비처왕비가 된 벽화부인이며 위화랑의 여동생으로 나온다. 그러나 파로라는 사람이 위화랑의 아버지인 염신공인지는 알 길이 없다.「삼국사기」에는 영주에 첫행차한 두달뒤인 11월에 죽었다고 기록돼 있는데 그 두달만에 벽화와 사랑하고 궁궐로 데리고 오고 아들을 낳은 것으로 돼 있어 이 기록이 재미있다.

<6>신라 최고의 자유부인 미실(美室)
진흥왕 23년(서기 562년)의 일. 열여섯살의 5세 풍월주 사다함이 병사 5천명을 이끌고 지금의 경북 고령지방인 대가야로 출정하게 됐다. 그러자 그의 애인이었던 미실(美室)이 눈물을 흘리며 「풍랑가(風浪歌)」를 지어 사다함에게 바쳤다. 그러나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은 것. 사다함이 치열한 전투 끝에 살아 돌아왔을 때 미실은 이미 궁중에 들어가 6세 풍월주인 세종(世宗)의 아내가 돼 있었다. 사다함은 이를 슬퍼하고 괴로워하며 「청조가(靑鳥歌)」를 지어 불렀다.

미실이 변심(?)한 경위는 이렇다. 세종의 어머니인 지소태후(법흥왕의 딸로 진흥왕의 어머니)가 사다함이 출정하고 없는 어느 날 고관들의 아름다운 딸들을 가려 궁중에 모이게 했다. 그런데 세종이 2세 풍월주 미진부의 딸인 미실에게 한눈에 반하고 만 것. 이렇게 되자 지소태후는 미실을 궁중으로 불러 세종을 모시게 한 것이다. 세종은 지소태후와 이사부 사이의 통정으로 태어난 인물. 원래 사다함은 미실의 사촌오빠였다. 결국 사다함이 죽자 미실이 천주사(天柱寺)에서 그의 명복을 빌었는데 그 날 밤 꿈에 사다함이 나타나 『나와 네가 부부가 되기를 원하였으니 너의 배를 빌려 태어날 것이다』고 하였다. 미실은 바로 세종과의 사이에서 임신이 되어 나중에 11세 풍월주가 되는 하종(夏宗)을 낳았다. 하종이 사다함과 비슷하게 생겨 세상 사람들이 사다함과 정을 통할 때에 이미 임신을 하고서 입궁하여 낳은 아들이라 쑥덕거렸으나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이 무렵부터 그녀는 가정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자유부인으로 변모한다.

하루는 진흥왕비인 사도왕후가 미실을 불러 『내 아들 동륜태자를 모셔 아들을 둔다면 동륜이 즉위 후 너를 왕비로 삼겠다』고 말했다. 세종은 동륜에겐 씨 다른 작은 아버지였는데도 미실은 기꺼이 동륜과 교합해 임신을 했다. 그런데 이를 알지못한 동륜의 아버지인 진흥왕이 미실로 하여금 자신을 시종토록 했다. 미실의 연이은 근친 탈선에 상처를 입은 미실의 남편 세종은 자청하여 싸움터로 나가버렸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미실은 워낙 미색이 뛰어나 그녀를 한번 본 남자는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고 그녀도 원래부터 남자를 좋아했다고 한다.

왕의 총애를 받으면서 꺼릴게 없었던 그는 더욱 음란한 생활을 하며 7세 풍월주인 설원랑과 10세 풍월주인 미생랑과도 정을 통하였다. 그러나 왕은 이를 알지 못했다. 미실은 재색만 빼어난 것이 아니라 권력욕도 많았다. 정부(情夫)인 설원랑에게 『나를 원화가 되도록 도와달라』고 해 설원랑과 더불어 왕을 설득하여 마침내 원화가 됐다. 그녀는 또 남편인 세종을 풍월주에서 물러나게 했다. 이에 세종은 낭도들에게 『새 원화는 나의 옛 부인이다. 너희들은 불평하지 말고 잘 섬기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다시 말해 「아내는 바람, 남편은 절개」였다고나 할까.

572년 동륜태자가 보명궁에서 사나운 개에게 물려죽은 일이 벌어졌다. 왕이 수색을 명령해 조사한 결과 미실에게 혐의가 갔다. 미실은 죄를 얻을 것을 두려워하여 바로 원화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왕은 아내 때문에 속 썩이는 세종을 불쌍히 여겨 궁중으로 미실을 불러 다시 세종에게 돌아가도록 했다. 진흥왕과 세종은 아버지는 다르나 어머니가 같은 동복(同腹)의 형제간이었으며 진흥왕은 세종을 좋아해 막내동생이라 불렀다. 하지만 미실은 이번에는 죽은 동륜태자를 이어 태자의 자리에오른 금륜(金輪·나중에 25대 진지왕이 됨)과도 관계를 한다.

미실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에는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그녀는 신라 귀족사회의 최고의 「프리마돈나」였다. 그녀는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 그리고 요절한 동륜태자와 정을 통했던 프리섹스의 여성이었던 것이다. 미실의 애정행각은 당대 신라 상류층의 자유분방한 성풍속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했다. 세종은 그의 아버지 이사부처럼 나아가서는 장수가 되고 들어와서는 재상이 되었으나 아내 미실의 애정행각을 보고도 혼자서만 괴로워하며 자신을 다스렸다.
이런 세종에 대해 「화랑세기」에서는 「태후에게 효도하고 대왕과 왕후, 그리고 태자에게 충성했으며 미실에게도 정조를 지켰으니 화랑 중의 화랑이었다」고 찬양하고 있다.

《미실은 누구?》
미실은 화랑정치에 관한한 지소태후보다 더 지속적으로 그리고 막강하게 영향력을 행사한 매력적인 여성으로 기록돼 있다. 진흥왕이 세상을 뜨고 금륜태자가 진지왕으로 즉위하였으나 세상의 여론으로 미실을 황후로 봉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좋아하자 미실은 낭도를 일으켜 진지왕을 폐하고 동륜태자의 아들을 즉위시키니 이가 진평왕이다. 그녀는 스스로 진평왕의 후궁 일을 맡아 조정의 일을 자기 마음대로 주물렀던 것이다.

606년께 미실이 괴질에 걸리자 설원랑이 간호를 하며 자신이 미실의 병을 대신하겠다며 미실을 모셨다. 정말 그가 미실의 병을 가져가 먼저 죽자 그녀는 통곡을 하며 설원랑의 뒤를 따라 죽었으니 그녀의 나이 58세였다.


<7>사다함이 죽은 이유
『사다함공(公), 제가 잘못했습니다. 공의 친구로서, 아랫사람으로서 의리를 배반한 저에게 큰 벌을 내려주십시오.』 무관랑(武官郞)은 사다함(斯多含)앞에서 머리를 들지 못했다. 사방은 어둠속에 고요했고 벌판에 서있는 두사람의 머리위로 별빛만 쏟아졌다. 명활성(明活城) 쪽에서 어렴풋이 불빛이 비치고 있었다. 명활성은 자비왕과 소지왕때 정궁인 월성(月城)을 수리하느라 13년간 임시 궁으로 사용됐던 곳이다. 이는 진흥왕 24년(서기 563년)의 일.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우정이 깊어 평생을 친구로 지내기로 하고 죽을 때도 같이 죽자고 맹세를 한 사이였다. 사다함은 나이가 비록 17세 밖에 되지 않았으나 1년전 대가야 정벌의 승전에 큰 공을 남긴 장수였던데다 5세 풍월주의 신분으로 그의 인품을 수많은 낭도들이 존경하고 따랐다. 그는 전공의 대가로 받은 대가야 노예들을 평민으로 풀어주고 땅을 부하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힘없이 시선을 궁쪽으로 돌려 한참동안 괴로워하던 사다함이 실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야, 자네가 무슨 잘못이 있는가? 모두가 나의 어머니 탓이지. 나는 자네를 이해하네.』 사다함의 어머니 금진이 무관랑을 자주 불러 관계를 한다는 이야기가 낭도들에게 퍼지고 있어 사다함이 무관랑에게 주의를 주고자 기회를 보고 있었는데 마침 그가 먼저 찾아와 용서를 구한 것이다. 『미실낭주로 인해 엄청난 괴로움을 겪고 있는 공에게 제가 고통을 줘 미안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아니야, 사람이란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살아갈 때가 있는 게지. 자네에게 승전(勝戰)에 대한 보답이 돌아가도록 해줘야 했는데 내 힘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해 미안하네. 사실 그게 늘 마음의 짐이 되고 있다네.』

『아닙니다. 제가 신분이 미천한데도 친구로 대해주시고 늘 곁에 두시는 것만 해도 황송할 따름입니다. 앞으로 공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사다함은 돌아가는 무관랑의 뒷모습을 보자 왠지 모를 서글픔이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차츰 멀어져 가는 무관랑은 어느새 그토록 그리워하는 미실의 웃는 모습으로 다가왔다가 분별없이 다른 남자를 탐하는 어머니 금진의 모습으로 바뀌어 혼란스러웠다.
사다함은 진골 출신으로 내물왕의 7세손이며 아버지는 구리지(仇梨知)였다. 어머니 금진은 1세 풍월주 위화랑의 딸로 법흥왕을 섬겼으나 아들이 없었고 구리지와 몰래 정을 통해 토함, 새달, 사다함을 낳았다.

사다함은 월성과 알천(閼川·경주시의 북천) 사이의 벌판에서 무관랑과 밤에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진 며칠 뒤 무관랑이 죽어가고 있다는 연락을 갑작스레 받았다. 사다함이 한숨에 달려가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다함의 어머니 금진이 또 무관랑을 불러 관계를 가질 것을 요구하자 무관랑이 사다함과의 우정을 지키기 위해 금진의 손길을 뿌리치고 뛰쳐나왔다. 무관랑이 급하게 뛰어나오면서 월성의 담을 넘다가 담아래에 있는 못(구지·溝池)에 떨어져 중상을 입었던 것이다. 사다함이 그의 치유를 위해 애를 썼으나 소용이 없었고 며칠 후 무관랑은 죽고 만다.

사다함은 알력과 시기가 횡행하던 당시의 정치 풍토 속에서 무관랑과 유일하게 가슴을 터놓고 이야기를 주고 받았으며 무관랑은 언제나 든든한 후원자였다. 그러던 그가 죽자 사다함은 무척 비통해 했다. 이제 그에겐 삶의 희망이 없었던 것이다. 사랑하던 여자인 미실도 뺏기고 행실이 문란한 어머니를 생각하면 삶의 회의부터 들었던 것이다.

절망속에 사다함은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그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오로지 가슴에 품었던 미실만 생각났다. 대장부에게 한 여자의 배신이 이토록 가슴에 사무칠 줄은 미처 몰랐다. 그렇다고 미실을 미워하는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미실이 세종에게 시집갔다는 말을 듣고 청조(靑鳥·미실을 지칭함)가를 지어 부르며 두 사람이 잘 살기를 바라지 않았던가. 여러 생각들이 겹치고 실의에 빠져있는 사이 여위고 병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지낸 지 7일이 되자 천하의 대장부인 사다함도 숨이 목에까지 차 올랐다. 그 때서야 달려온 어머니 금진은 사다함을 품에 안고 발을 굴렀다.

『나 때문에 너의 마음이 상해서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이제 내가 어찌 살꼬.』 그러자 효자로 소문났던 사다함이 『죽고 사는 것은 운명입니다. 제가 어찌 어머니 때문에 마음을 상하였겠습니까? 살아서 어머니의 큰 은혜를 갚을 수 없었는데 죽어서 저 세상에서 갚겠습니다』하고 힘들게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뒤를 이어 미실의 남편인 세종이 풍월주가 되도록 해달라는 부탁을 하곤 숨을 거두었다.

한편 「삼국사기」열전에는 사다함과 무관랑은 생사를 같이하는 친구가 되기로 언약했는데 무관랑이 병들어 죽자 매우 슬퍼하다 그 또한 7일만에 죽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나 「화랑세기」의 해석에 따르면 사다함이 죽은 근본적인 원인은 미실의 배신이 불러온 실연의 상심 때문이다. 실연의 상처가 큰 와중에 친구 무관랑의 죽음과 어머니에 대한 절망감이 겹친 셈이다. 무관랑이 죽자 사다함이 상심 끝에 뒤따라 죽을 만큼 정서적으로 깊은 유대를 가진 사이였다는 점을 들어 일본 학자 아유가이 후사노신(鮎具房之進)은 저서 「화랑고잡고(花郞攷雜攷)」에서 「두사람은 동성애자였다」는 흥미있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