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은...야오이의 시초였다

2015. 2. 1. 01:11들꽃다회

 

 

 

 

 

      화랑은...야오이의 시초였다..ㅡ.ㅡ;;| ▦ THINK Interesting

 

 

 

(전략)필사본 '화랑세기'에는 화랑들의 동성애적 코드가 농후하게 묻어 있는데도, 정작 필사본 진본설을 주장하고 있는 이종욱 교수도 후에 각주를 붙여 출판한 화랑세기 곳곳에서 각주를 통해 애써 동성애적 코드를 지우려 한다.

그러나 이 필사본이 진본이라면, 그간 사료의 무덤 속 사이에서 유령처럼 조각난 섹슈얼리티로 떠돌고 있던 동성애, 특히 신라 사회의 화랑도에 들씌워져 있던 무수한 혐의의 대상인 호모섹슈얼리티에 관한 훌륭한 조감도를 얻게 될 것이다.

아래의 글은 98년에 모 잡지에 기고했던 글이다. 수정없이 비판을 달게받기 위해 그대로 옮겨 적는다.



< 화랑세기>에 붙이는 미스테리 4가지

1. 화랑花郞 : 왜 화랑인가?

    화랑의 '화花'는 꽃이나 여자의 이름에 쓰는 미자(美字)이며, '랑'은 남자의 유아명의 어미로 여자에 '낭娘'을 붙이는 것과 같다.  해서 그 의미대로 풀이한다면, '미소년' 내지는 '꽃소년'으로 번역될 수 있다.

"… 아름다운 남자들을 뽑아서 곱게 단장하고 화랑이라 이름하여 이를 받들게 하였는데 그 무리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서로 도의를 연마하고 혹은 가악을 즐기면서 산수를 찾아다니며 유람하는데 먼 곳이라도 다니지 않는 데가 없었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

   이 제정된 것은 진흥왕 원년(540)이었다.(2) 원래 선화(仙花)로는 여성인 '원화(源花)'가 있었으나 투기로 인해 준정이
남모를 살해한 이후로 여자 대신 미모의 남자를 화랑으로 삼게 되었다. 신라의 귀족 자제로서 대개 15, 16세인 미색의 소년을
'부분장식'하여 받들어 추대하였으며,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낭도(혹은 풍월風月)라 일컫고 그 우두머리를 풍월주(風月主)라 했다.  '풍월'은 그들이 '가악을 즐기면서 산수를 찾아다니며 유람'한데서 유래된 듯하다.

   , 여기에서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한자문화가 막 유입되기 시작한 진흥왕 시기에 왜 그 미소년을 '화랑'이라 불렀으며, 또
어떠한 이유로 그러한 제도를 마련했는가하는 점이다. 일견 화랑 사다함이나 김유신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통일신라를 이룩키 위해 고군분투하던 군사집단으로서의 전투적인 화랑도 이미지와는 전혀 상반되는 '꽃소년'으로서의 화랑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여성들인 '원화'가 다수의 무리를 이끌고 풍월을 즐기던 것이 '분을 바르고 곱게 단장한'(당나라 영호징의 <신라국기>) 미소년의 '화랑'으로 바뀌게 된 저간의 사정은 대체 무엇인가? 못 이룬 사랑을 위하여 사다함에게 결국 청조가(靑鳥歌)를 애타게 부르게 했던 미실에 의해 폐지된 지 29년만에 다시 대창(大昌)으로 부활한 원화제도는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호국의 명을 받든 심신수양과 관리등용제로 인식되어왔던 화랑을 본래 호칭을 살려 '꽃소년'으로 부르는 것은 정당하다.

    "공의 얼굴이 백옥과 같고, 입술은 마치 붉은 연지와 같고, 맑은 눈동자와 하얀 이를 가졌는데, 말이 떨어지면 바람이 일었다."
(필사본 <화랑세기>, 1세 위화랑)

   "피부가 옥과 같이 부드럽고, 눈은 미솟짓는 꽃과 같고, 음율과 문장을 잘 하였다." (필사본 <화랑세기>, 4세 이화랑)

    "화랑은 신라의 귀유(貴遊)의 이름이다. 오늘은 천한 박수, 광대를 화랑이라 부르는데 그것이 아니다, 그것은 화랑복장이 화려했고 오늘의 광대 역시 복장이 화려한 데서 생겨난 이름이다" (정약용, <아언각비>)

   아무리 직계 선조들의 위상을 미화하기 위한 후손 김대문의 과장된 표현이라 하더라도 소년의 외모에 대한 그들의 관심은 지나치게 이성애적 언어에서 벗어나 있다. 김대문의 시선, 신라인들의 언어적 감수성이 의심스러운 것이다. 

   적어도 일찌기 이익이 <성호사설>에서 신라의 화랑과 낭도들을 남색자들로 싸잡아 비난했던 것과 일본 학자들이 자기 나라 봉건시대의 소성(少姓-귀인 곁에서 시중되는 남색 대상의 미소년)이나 동성애 성격의 군사집단과의 유사성을 논했던 것을 모면하기 위해선 화랑이 왜 화랑으로 불려지게 되었으며, 그들을 단장시켜 낭도의 무리들을 따르게 한 이유에 대해 설득력있는 논거를 제시해야만 할 것이다.

    고대사회의 샤먼니즘(무당)과의 연관성을 논하거나 팔관회 등의 연중행사와 관련지어 화랑를 설명하려는 일단의 연구들조차, 일개 귀족 소년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고 수백, 수천 명의 낭도 무리들이 그를 따르게 했던 그 신라인들의 심리구조에 대해선 아직도 갈피를 못잡고 있을 뿐이다.


2. 사랑好과 권력

   이종욱 교수는 필사본 <화랑세기>의 다음 문장에 궁색한 주를 하나 달았다. '영실공은 남색으로 법흥왕의 총애를 받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법흥대왕은 옥진궁주의 사부인 영실공을 용양군龍陽君으로 삼아 총애하며 높은 위에 있게 하고, 원화를 물러나도록 하였다." (필사본 <화랑세기>, 2세 미진부)

우리는 법흥대왕이 남색을 했는지 어쨌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신라의 궁정 용어에 '용양'이 적극 차용되었다는 점이다.

    "처음에 구리지에게는 용양신龍陽臣 설성이 있었는데, 모습이 아름답고 교태를 잘 지어 보였다." (필사본 <화랑세기>, 5세 사다함)

    낭도 출신이었던 설성은 구리지의 신임에 의해 신분이 상승되었을 뿐만 아니라 후에 그의 아들은 7세 풍월주가 되는 영예를 누리게 된다. '용양'에 버금가는 의미로 <화랑세기>는 폐신(嬖臣-아첨을 잘하여 윗사람의 신임을 받는 신하) 또는 폐아(嬖兒)라는 말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양도공이 (흠순공) 보고 좋아하여 정이 마치 부부와 같았으며, 그 아래에 소속되어 폐신이 되었다." (필사본 <화랑세기>, 24세 천광공)
선덕여왕이 궁정의 연회에서 보량공에게 묻기를 "듣건대 너의 폐아(군관)가 아름답다고 하는데 그 아름다움이 과연 어떠한가?"

   "나의 이름은 미시입니다. 어릴 때 부모님의 다 세상을 떠났으므로 성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이에 그를 가마에 태워 가지고 들어와서 왕에게 뵈니 왕은 그를 존경하고 사랑하여 받들어 국선으로 삼았다." (<삼국유사>, 권제3)

   필사본 <화랑세기> 속에는 '모습이 아름답고 교태를 잘 지어 보여' 폐신이 된 또 다른 설성이 많이 나오고 있다. 또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가 자신의 지위를 계승할 10대 중초반의 소년을 '부제(副弟)'로 두는 것이 화랑조직의 기본 골격으로써 제시되는데, 부제 선정은 풍월주 개인의 자의적인 선택에 의해 결정되는 바가 대부분이다. 풍월주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소년, 아내의 남동생 등 선정의 범위는 다양한 편이었다. 물론 부제 선정 과정이 화랑도 안의 계파간 파벌 싸움으로 점철되었다는 것 역시 주지의 사실이나, 어떻게 권력의 핵심에 속하는 풍월주 계승자를 선택하는 과정에 있어 미색을 갖춘 어린 소년을 거리낌없이 부제로 두었는가에 대해서는 분명한 답이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용양신(龍陽臣), 폐신(嬖臣), 부제(副弟)와 최상급 귀족간의 관계를 단지 인재 등용이나 정치적 파워 게임으로 축소 환원시키기엔 상당한 무리가 따른다. '마치 부부와 같았으며', '사랑하고愛', '좋아하는好' 소년을 자기 밑의 관리로 두었다는 김대문의 말을 그대로 따른다면, 신라 사회는 권력과 미소년을 연계시키는 '심미화된 정치'체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승려 각훈이 중국 귀족과 미소년들의 노골적인 동성애적 관계를 비난하면서 신라의 화랑에선 존경과 숭시의 예를 찾아볼 수 있다고 한 비교 대목과 맞닥뜨리게 되며(각훈, <해동고승전>, 1215), 색을 목적으로 궁궐 안에 미소년들을 불러 들였다는 '진성왕'과 신라 관리를 비롯 당나라 황제에게도 사랑을 받았다는 '묘정'에 대해서도 그것이 쉬이 지나칠 낭설이 아님을 추측하게 된다.



3. 사다함과 무관랑의 동성애는 가짜? 

   텍스트로 읽을 수 있는 내용 중 동성애에 가장 접근하는 이야기로 제시되는 것은 단연 사우(死友) '사다함과 죽지랑'이다.

   "사다함은 처음에 무관랑과 함께 사우(死友)로서 사귈 것을 약속하였는데, 무관랑이 병으로 죽자 그는 심히 슬퍼 7일 동안이나
통곡하다가 또한 죽었다." (<삼국사기>, 권제44, 사다함)

   이에 일본역사학자 鮎見房之進는 사다함과 무관랑의 예를 거론하며 신라의 남색은 공공연히 일반에 행해져 이상하지 않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병사한 벗을 사모하고 통곡한 나머지 17세의 미소년이 순사했다는 것은 단순한 의형제관계가 아닌 필경 그 사이에는 동성애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 신라에 있어서 화랑과 낭도간의 동성애를 공공연히 인정하고, 마치 부부관계로 취급하여 이를 뺏는 자에게는 유부녀를 강간한 것과 같은 극형을 과함을 불문율로…" (鮎見房之進, <화랑고>, 1932)

   하지만 필사본 <화랑세기>는 여기에 당혹스러운 또 다른 사실을 전하고 있다. 낭도였던 무관랑과 사다함의 생모(生母)인 금진이 부정한 관계를 맺었고 그 사실을 안 사다함의 낭도 무리들에 의해 쫓기던 무관랑이 궁궐 담벼락 밑으로 추락사했던 것이며, 7일만에 죽은 사다함을 끌어안고 생모 금진이 자신의 지나친 성욕을 탓했던 것으로 보아 일견 사다함과 무관랑의 이야기는 동성애와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비추어 보인다. 또한 <화랑세기>는 사다함이 미실공주를 열렬히 사모했음을 전하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화랑 사다함과 낭도인 무관랑이 맺고 있는 우정관계를 교우미담의 본보기로 치부할 수 없다는 점이다. 무관랑의 죽음을 애통해다가 7일만에 죽은 사다함이나, 보종공을 등에 업고 다니던 염장종, 적에게 붙잡혀간 화랑 부례랑을 홀로 뒤쫓아가 구출해낸 안상, "낭이여 낭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다니는 길. 다북쏙 우거진 마을에 잘 밤 있으리이까."(<삼국유사>, 권제3)라고 죽지랑을 그리워하는 득오곡 등은 그들이 나중에 결혼을 했든 말든 동성으로 구성된 청소년 집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리고 종종 이성애적 언어의 외피를 입혀 '우정'으로 치환하곤 하는 청소년들의 동성애적 관계의 모형들로 윤곽지을 수 있다.

'청소년 군사 집단에서 볼 수 있는 우정'이란 명제는 사랑/우정을 늘 구분하고 싶어하는 이성애적 관념이 반영되어 있다. 세계 동성애 역사에서 서양 귀족 청년들로 구성된 수많은 기사단, 중세의 수도원, 현대화된 군대 등에서 유추해낼 수 있는 동성애적 관계와 아이콘icon(우상)으로서 기능하는 인물에 바쳐지는 존경이 실은 동성애적 욕망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아이콘으로서의 화랑, 그리고 화랑과 우정으로 맺어진 낭도간의 관계를 동성애적으로 해석해낼 수 있는 것이다.


4. 확실한 동성애자, 아름다운 보종공?

16세 화랑 보종공은 단연 확실한 게이로 보증될 수 있을 것 같다. 필사본 <화랑세기>는 보종의 심리를 빠짐없이 드러내보이는
기염(?)을 토한다.

"공의 성품은 청아하였고 문장을 좋아하였으며… 정이 많았다. 사람들을 위하여 웃고 울었으며, 온화함과 순량함은 마치 부녀자와 같았다.
… 선과 악, 이와 해를 나누지 않았다. 술과 여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 호림이 사랑하여 부제로 삼았다. 정이 마치 부부와 같아
스스로 여자가 되어 섬기지 못하는 것을 한스러워하였다." (필사본 <화랑세기>, 16세 보종공)

16세 보종공은 사다함이 좋아하였던 미실궁주의 막내 아들이었다. 보종공이 색을 밝히지 아니하고 홀로 있는 것을 걱정한 미실궁주가 윤궁의 딸 현강에게 공을 모시도록 하였으나, 공은 접촉한 일이 없이 호림공을 불러 함께 살았다. 나중에 미실공주는 종실의 여자들을 모아 "나의 아들과 친할 수 있는 사람은 상을 주겠다"라고 말하자 종실의 여자들이 다투어 공을 재미있게 해주려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보명궁의 딸 양명공주가 꾀를 내어 공을 유혹하여 마침내 정을 통하게 되지만 보라와 보량 두 딸을 낳은 후에는 다시는 가까이 하지 않았다.

필사본 <화랑세기>에서 보여지는 보종공의 성품과 일대기는 그가 동성애자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비교적 설득력있게 그려보이고 있다. 16세 화랑이 된 보종공은 나중에 염장공을 부제로 삼게 되는데, 그 관계가 평범하지 않았다.

"염장공은 보종공의 아름다움을 좋아하여愛 자원하여 그의 아우가 되었다. 보종은 형으로 처신하지 않고 오히려 공을 형처럼 섬겼다. 염장공의 말을 들어 주지 않는 것이 없었고, 정은 마치 부부와 같았다. … (염장공) 키가 이미 보종공보다 커서 보종공을 아이처럼 늘 업어주었다." (필사본 <화랑세기>, 17세 염장공)

보종공은 그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여 여러 차례 유혹의 손길을 뻗치는 하종공의 딸 하희에게 "만약 우리 염장과 사랑을 하면 나 또한 더불어 사랑할 것이다."라고 하며 그녀의 유혹을 거절할 뿐만 아니라 나중에 풍월주가 되었을 때도 모든 업무를 6살 연하의 부제 염장공에게 맡겨 버린다.


   우리는 이미 혜공왕의 비애(悲哀)를 들어 알고 있다.

"왕은 이미 여자로서 남자가 되었기 때문에 돌날부터 왕위에 오르는 날까지 항상 여자의 놀이를 하고 자랐다. 비단주머니 차기를 좋아하고 도류道流와 어울려 희롱하고 노니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지고, 마침내 선덕왕과 김양상에게 죽음을 당했다." (<삼국유사>)

200여년 뒤 권력싸움의 희생양이 된 혜공왕의 비사에 비해, 피리를 잘 불고 성품이 온화해서 '진성공자'라 불리던 화랑 보종공의
일대기는 비교적 평탄하고 여유롭게 진행되었다. 필사본 <화랑세기>는 16세 화랑 보종공이 남성 동성애자로서의 삶을 영위했음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여자들을 멀리했기 때문에 아니라 호림공과 염장공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화랑은 정말 게이였나 -개방적인 신라의 성풍속

필사본 <화랑세기>가 환영받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 화랑들의 전기 기록 속에 신라 사회의 개방적인 성 풍속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귀족들의 근친결혼, 여성들의 왕성한 성 탐닉, 낭도들과 유화(遊花 = 公娼)간의 자유로운 관계, 하급 관리의 부인과 상급 귀족간의 공공연한 정사와 그로 인해 비롯된 마복자(摩腹子)들의 정치세력화 등 필사본 <화랑세기>에 적힌 대로라면 신라에 관한 기존의 역사 기술은 완전히 새로 써야 할 것이다.

사실 6세기 이전의 남녀 형상을 본뜬 신라 토우들과 향가들은 그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신라 사회가 지니고 있는 개방적인 성 풍속을 전해주고 있다.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 불교 문화와 한자문화가 늦게 정착되고 민간신앙이 신라인의 성 생활에 긴밀하게 터를 잡고 있었다.
또한, 성(性)에 대해 훨씬 열려져 있던 중국 당나라의 도교 문화가 신라 사회에 신속하게 접합된 것 역시 화랑도의 자유로운 성 생활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요인으로 사료된다.

신라를 방탕한 성에 의해 타락한 시대로 보아선 안 된다. 그것은 유교적 시각일 뿐이다. 신라는 신라인의 언어와 시각으로 말해져야 한다. 신라는 다산(多産)기원의 풍요로운 민간신앙, 모계제로 계승되는 왕족 혈통, 성에 대한 솔직한 태도를 지니고 있던 우리 조상들의 시대다. 그리고 거기 어디쯤에 분명하게 신라인들의 동성애에 대한 가식없는 태도가 자리잡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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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cafe.daum.net/mainthink arro-tic1983 님의 글 중에서 전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