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불교의 길, 차의 길 ⑥선차악, 풍류차의 종조, 진감 선사 / 박정진의 차맥

2015. 1. 31. 17:45차 이야기

 

 

[박정진의 차맥] <28> 불교의 길, 차의 길 ⑥선차악, 풍류차의 종조, 진감 선사

참된 것 지키고 속된 것을 싫어하는 성품… 선과 차에 정통
‘한차’ 전통 오늘까지 이어져… 하동 화개골 우리차의 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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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와 차를 말할 때는 으레 중국 남종선(南宗禪)을 먼저 꼽는다. 이는 남종선의 본거지가 양자강을 따라 주로 형성되었고, 이들 지역이 차의 생산지와 겹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차에 관한 기록으로는 북종선이 앞선다. 봉씨문견기(封氏聞見記)가 그것이다. ‘봉씨문견기’에 따르면 산동성 태산 영암사에서 다선도량을 개설한 항마장(降魔藏) 선사는 선과 차를 병행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선수행에서 잠을 쫓기 위해 저녁 대신 차를 마셨다는 기록을 남김으로써 선종차의 시작을 알린 셈이다.

쌍계사 경내에 서 있는 진감국사대공탑비(眞鑑國師大空塔碑).
‘차의 세계’ 제공

 
    항마장 선사는 북종선의 종조인 신수(神秀)의 제자이다. 그는 신수가 호북성 당양(當襄) 옥천사에서 주석하고 있을 때에 스승으로부터 차 마시는 법을 배웠던 것 같다. 옥천사의 차는 12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이것이 항마장 선사에 의해 영암사로 옮겨져 오늘날 영암사는 북종선의 다도조정이 된 셈이다.

    한국에서 중국 영암사에 비할 수 있는 선차의 조정은 역시 쌍계사(雙溪寺)의 진감 선사(眞鑑慧昭·774∼850)이다. 경남 하동군 운수리 삼신산 자락 쌍계사 경내에는 진감국사대공탑비(眞鑑國師大空塔碑)가 서 있다. 신라 말 대문장가인 최치원이 찬한 사산비명(四山碑銘) 중의 하나인 이 탑은 비문 중에 ‘한명’(漢茗)이라는 글자를 남기고 있어, 차인들에게는 가장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한명이란 바로 중국 차를 뜻한다. 비문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선사의 성품은 질박함을 흐트러뜨림이 없으며 기교를 좋아하지 않았다. 입는 것은 헌 솜이나 삼베도 따뜻하게 여겼고, 먹는 것은 보리라도 달게 여겼다. 상수리와 콩을 섞은 범벅에 나물 반찬도 두 가지를 넘지 않았으며, 신분이 고귀한 사람이 가끔 찾아오더라도 다른 반찬이 없었다. 제자들이 뱃속을 더럽히는 것이라고 올리기를 어려워하면 선사가 말하기를 ‘마음이 있어 여기에 왔을 것이니 비록 거친 현미인들 무엇이 해로우랴’라고 했으며 지위가 높거나 낮거나 늙은이나 젊은이를 가리지 않고 대접함이 한결 같았다.(중략) 한차(漢茗)를 공양으로 바치는 자가 있으면 땔나무로 돌가마솥에 불을 지피고 가루로 만들지 않고 그대로 끓이면서 말하기를 ‘나는 맛이 어떤지 분별하지 못한다. 다만 이 차로 뱃속을 적실 따름이다’라고 말하였다. 참된 것을 지키고 속된 것을 싫어함이 모두 이와 같았다.”

    참으로 선과 차에 정통한 선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진감 선사가 지리산 화개골에 들어와 옥천사를 중창하고 국사암에 머물자 사방에서 배우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의원의 문전에 병자가 많은 것처럼 찾아오는 이가 구름과 같았다’고 최치원은 표현하였다.

    민애왕이 838년에 왕위에 오른 뒤 선사에게 제물을 보내어 자신을 위해 재를 올려주기를 청하자 선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부지런히 선정을 닦아야 할 자리에 있으면서 특별히 발원해서 무엇하리오.”

    왕의 사신이 돌아가 복명하자 왕은 부끄러워하면서도 존경심이 일어 ‘혜소’(慧昭)라는 법호를 내리고 서라벌의 대황룡사에 주석하도록 청했다. 그러나 선사는 지리산 화개골을 떠나지 않았다.

    진감 선사의 도력을 짐작하게 하는 임종 때 유훈이 있다.

    “모든 법이 다 공허하니 나도 장차 가게 될 것이다. 하나 너희들은 일심을 근본으로 삼아 더욱 정진할지어다. 내가 가더라도 탑을 세워 형해를 갈무리하거나 명(銘)을 지어 걸어온 자취를 기록하지 말라.”

    이 유훈은 일체를 형상과 명예를 초월한 만법개공(萬法皆空)을 체득하고, 선승으로서 최상승의 경지에 살고 있는 모습을 여실하게 보여 주고 있다. 진감은 사리탑을 세우지 말고 비명을 짓지 말라고 유언했지만 헌강왕의 명으로 대공탑(大空塔)이 세워졌고, 당대 최고문장가였던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썼다. 비를 조성하던 중 헌강왕이 돌아가고 그 뒤를 이은 정강왕은 옥천사를 쌍계사로 고쳐 부르도록 하였다. 진감 선사의 선차는 바로 풍류정신이 깃든 선차였다. 그는 ‘풍류 차의 원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선사는 입적할 때까지 화개골의 맑은 물로 차를 달여 마시고 청아한 목소리로 범패를 부르거나 선정에 들었다. 진감 선사는 그의 종합적인 업적에 비해 선종사에서 평가가 낮은 편이다. 이는 한국의 선종사가 너무 서당지장을 비롯한 구산선문과 임제에 경도된 탓이다.

    효성이 지극했던 진감 선사는 가난한 부모님을 두고 출가할 수가 없어 부모님이 돌아가신 서른 살 되던 무렵, 804년(애장왕 5년)에 출가를 결심한다. 당나라에 들어갈 때도 노비가 없어 세공선의 노잡이가 되어 황해를 건넜다. 당시는 장보고(張保皐) 선단을 이용해서 중국으로 들어가는 일이 많았는데 등주(登州:지금 산동성 文登縣)를 거치는 사례가 많았다. 진감 선사는 등주를 거쳐 창주(滄州:지금 하북성) 흥법사(興法寺)를 찾아가 마조의 제자인 신감대사(神鑑大師)의 제자가 되었다.

   흥법사에서 3년간 교학을 공부한 진감 선사는 다시 숭산(崇山) 소림사(少林寺)를 찾는다. 소림사는 달마 선맥의 발원지였다. 진감 선사는 810년 소림사 유리계단에서 구족계를 받는다. 유리계단에서 수계를 받은 진감은 이곳에서 10여년 연상의 도의 국사를 만난다. 도의 국사는 그보다 20년이나 앞선 784년에 입당하여 구법활동을 하고 있었다. 도의 국사는 821년(헌강왕 13년)에 귀국한다. 진감은 지암(智巖) 대사로부터 불교음악인 범패(梵唄)마저 배우고, 10년 뒤인 830년(흥덕왕 5년)에 귀국한다. 진감은 비록 도의에 비해 귀국이 늦었지만, 선종 이외에 범패를 가지고 온다. 당나라로 건너간 지 26년 만이었고, 그의 나이 57세였다.

   진감이 귀국했다는 소식을 접한 흥덕왕은 도의에게 보인 것과 마찬가지로 기뻐했다. 최치원이 쓴 비문에 이와 같이 전한다.

    “도의 선사가 먼저 들어오더니 두 보살이 생겼도다. 예전에 흑의를 입은 호걸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이제 누더기를 입은 영웅을 보니 하늘에까지 가득 찬 자비의 위력에 온 나라가 기쁘게 의지하는구나. 내가 장차 동쪽 계림의 땅을 상서로운 곳으로 만들겠다.”

    왕이 ‘흑의이걸(黑衣二傑)’이라고 한 것은 중국 남북조시대의 고승 현장과 법현을 두고 한 말인데 진감과 도의를 이들에 비유한 것은 왕이 이들에게 큰 기대를 했음을 말한다. 진감의 인물됨은 당시 도의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비문 중에 뚜렷한 한명(漢茗)이라는 글씨.
    유리계단은 현재 하남성 동봉사 회선사(會善寺) 경내에 자리 잡고 있는데 측천무후와 돈독한 관계를 이룬 혜안 선사가 주석하면서 유명해졌다. ‘역대법보기’에는 측천무후가 혜안 선사를 궁내로 불러 공양을 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진감이 회선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는 사실과 측천무후에 의해 선종의 가사가 지선-처적-무상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신라의 유학승들은 선종 법계의 핵심에 있었다는 뜻이 된다. 진감 선사는 오늘날 ‘선종’과 ‘범패’와 ‘한명’(漢茗)으로 선차문화의 문화적 종조로 다가온다.

    하동 화개골은 뭐니 뮈니 해도 우리나라 차의 본향이다. 화개골에는 지금도 이런 민요가 전한다.

“국사암 나한들은/긴 대밭 차 싹 따서/육조와 차 마실 때/금당 안 선지식들/코만을 골아대네.”

    진감 선사의 ‘한차’ 전통은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에도 이어지고 있다. 진감이 가마솥에 불을 지피고 차를 끓여 마신 전통은 초의의 ‘동다송(東茶頌)’에도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지리산 화개동에 차나무가 40∼50에 걸쳐 자란다. 우리나라 차나무의 자생지로 규명된 화개동 옥부대 아래 칠불선원(七佛禪院)에서는 그곳에서 좌선하는 스님들이 항상 찻잎을 늦게 따서 땔감 말리듯 말려 솥에다 시래기를 끓이듯 삶으니 색은 탁하여 붉고 맛은 몹시 쓰고 떫은 차를 만들었다.”

    초의 선사는 이를 두고 “천하의 좋은 차가 속된 사람들의 손에 더렵혀진다”고 말하였다. 쌍계사 육조탑 아래에 주석한 만허(晩虛) 스님은 그 뒤 제다의 달인이 되었는데 추사 김정희는 ‘화개차가 용정차보다 낫다’고 극찬하였다. 추사는 차 마니아가 되어 제주도 귀양살이 중에 초의 선사가 차를 보낸 것에 감동한 나머지 결국 ‘명선(茗禪)’을 쓰게 되었다. 신라의 ‘한명’은 조선의 ‘명선’으로 이어졌다.

    그 뒤 화개차는 50년대 초 청파(靑波) 노인에 의해 복원되는 것을 시작으로 현재 백가쟁명하고 있다. 화개골은 오늘날도 재배차는 물론이고, 차나무 서식에 적합한 환경으로 야생명차의 고장으로 이름이 높다.

    진감의 범패(魚山이라고도 함)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신라에도 범패가 있었다. ‘삼국유사’ 권5 월명사의 ‘도솔가조’에도 나온다. 월명사는 자신이 국선의 무리이기 때문에 범성은 부를 수 없지만 향가를 부를 수 있다고 하여 범성과 향가를 분리하면서 당시에 이미 범성이 있음을 암시하였다. 그리고 경덕왕 19년(760년) 당시에 이미 범패를 할 줄 아는 승려가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그의 범패는 당나라 식일 것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적어도 오늘날 우리에게 전하는 범패는 당나라식과 신라식이 융합된 것일 확률이 높다. 신라와 당나라는 서로 돌고 도는 선종과 차 문화의 교류사를 가지고 있다. 혹시 신라의 범패가 무상의 인성염불로 변형되고, 무상의 인성염불이 다시 마조의 제자들에게 범패로 이어진 순환 고리를 연상하면 망발일까.

   특히 그의 범패가 무상 선사의 인성염불과 관련되는 것에 대해 국악 학자들의 관심이 높은 편이다. 한명희 전 국악원장은 무상의 일자염불(一字念佛)에 주목하고 있다. 일기(一氣)의 숨을 다 토해낼 만큼 길게 소리를 장인(長引)하는 것은 범패의 짓소리와 닮은 데가 있다. 진감 선사는 선배인 무상의 인성염불 전통을 익혔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입당하는 신라의 선승들 가운데는 무상 선사의 영당을 모신 사천성의 사증당(四證堂)을 참배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기록도 보인다.

    진감이 귀국 후 처음 주석했던 곳은 장백사(長栢寺)였다. 경북 상주시 노악산(露岳山) 기슭에 자리 잡은 장백사지(경북 상주시 내서면 연원동 흥암서원 동쪽)는 절터로 추정되는 터와 석탑지와 장대석만이 남아 있다. 장백사는 한국 범패 음악의 발원지로 볼 수 있다. 당시 범패를 배우려는 승려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자 옥천사로 옮겼다고 한다.

    현재 하동에 못지않게 상주도 소리문화가 발달된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진감 선사의 상주 시절에 대한 자료발굴과 연구가 한층 더 요구된다. 진감은 마조의 손제자이긴 하지만 주류인 남전보원, 서당지장, 백장회해의 주류는 아니다. 그래서 그의 선사적 면모가 평가절하된 감이 없지 않다. 그렇다 하더라도 다선, 혹은 선다의 정신을 실천한 조정임을 누구나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문화평론가 pjjdisco@naver.com

 

   - 세계일보 기사 중에서 전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