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부梅花賦/박주병

2015. 2. 7. 21:37

 

 

 

 

      

매화부梅花賦/박주병 汝同 朴籌丙

 

 

 

  

  무슨 근심에 매화는 이리도 여위었나.

뒤틀린 밑동이며 몸통은 풍상을 말해 주고 성기고 거친 가지에는 인고의 세월이 흘렀다.

툭 부러진 줄기에서 높이 벋은 새 가지는 달이라도 딸 참인가.

가만가만 달빛을 밟으며 벌레 소리를 듣다가 벌레마저 문득 목이 잠기면 가을은 벌써 깊을 대로 깊어졌고

천지가 닫힌 듯 적막해진다.

 

적막도 한때, 참새가 떨고 있는 매화나무 가지에서 작은 소요가 천지의 침묵을 깬다.

낙목한천에 누구와 언약했나. 가지마다 도도록이 볼가진 꽃망울을 만난다.

정염이 불타올라 뾰루지가 났나 보다.

섬섬한 어린 여자 같은 것이 추위와 줄다리기하다니 내가 누구 편이겠는가.

은근히 줄을 당겨도 이리도 내게 무심한 것은 누구를 위함인가.

몸은 낙탁한 백훼百卉 속에 머물러도 뜻은 높아 별이 되었나 

 

 

 

  뜻이야 홍매도 높지만 백매가 더 높고 천엽도 청초하지만 단엽에 미치랴!

단엽인 흰 매화 그 꽃이 입춘 무렵이면 눈이 펄펄 날리는 한데인데도 핀다.

첫 봉오리가 부리를 반쯤 벌리면 여자의 속살을 보게 된 듯 정신이 아뜩하고

활짝 벌리면 나는 그만 헉 하고 숨이 막힌다. 눈을 감는다. 길래 신음한다.

 

 

 누가 간밤에 내 집 문을 두들겼던가.

은하수에 떠있던 하얀 별 하나가 내 집 창가에 떨어졌구나!

하얀 별, 이 천하의 우물尤物한테 한낱 범용한 늙은이가 마음을 두다니 길이 헛되이 탄식할 것을,

공연히 매화 곁에서 왔다갔다한다. 밤잠을 설친다. '

 

선잠을 깨고 보니 천지개벽이다.

만개한 흰 매화에 흰 눈이 수북이 쌓였다.

누가 고절苦節을 쉬이 입에 담는가.

눈얼음에 이 아침을 당하고서야 매화는 도리어 보다 짙은 청향을 토한다네.

청향이 한껏 표일해지는 한낮에 만발한 매화꽃 그늘 아래 들어가 본 사람은 안다.

깊은 산속에서 울려오는 범종의 여음 같은 그 음향이 문득 사람을 외롭게 한다.

은혜하는 사람을 태우고 먼 하늘가로 떠나가는 비행기 소리가 이처럼 가슴 아플까.

꽃마다 벌 벌 벌 벌 무수히 들꾄다, 들렌다.

벌들의 훤화喧譁에 탈려 꽃가지가 울리는가, 우는가. 

 

 

 

  벌한테서 들었는지 도를 통했는지 매화꽃에서 하늘(천지)의 마음을 본다고 한 사람들이 있었다.

정도전鄭道傳 이숭인李崇仁 강회백姜淮伯 서거정徐居正 장현광張顯光 이인행李仁行 등이다.

우습게도 이 말은 돌이킴에서 아마도 하늘땅의 마음을 볼진저!復其見天地之心乎라는

주역의 말을 업어다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돌이키다니 그 까닭이 뭔가.

헤겔의 말마따나 만물은 그 자체 내에 부정否定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인가.

 왜 부정을 함유하는가.

저절로 그렇다고 할 수밖에 나는 그런 것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돌이킴에서 아마도 하늘땅의 마음을 볼진저!”라는 말에서 돌이키는 것은,

우선은 동지의 해를 두고 한 말이다.

동지를 천근天根, 동지의 해를 일양一陽이라 일컫는 것은 그럴듯하거니와

일양은 일양이라는 그 이름만큼 고독하다. 두드러지지도 않다.

 

 소옹邵雍동지음冬至吟이란 시에서 이 일양을 무술[玄酒]에 견주기도 하고

노자의 이른바 대음大音(大音希聲)에 비유하기도 했다.

무술이라니 그 맑은 찬물에 어찌 취해 장차 천하 만물이 고동친단 말인가.

대음이라니 들어도 듣지 못하는 그 소리에 어찌 놀라

장차 만호천문萬戶千門이 차례차례 열린단 말인가.

끝없이 되풀이하여 고동치고 끝없이 되풀이하여 열린다.

나고 또 난다. 이것을 하늘땅의 마음이라 한 것 같다.

하늘땅의 마음을 매화꽃에서 본다고 큰소리친 사람들은

일양의 기운을 맨 먼저 받아 피는 꽃이 매화라고 생각했겠지.

맨 먼저 피는 꽃일 따름인가.

냉염冷艶과 관능官能이 한 가지에 핀 꽃, 지유至柔와 지강至剛 지미至微와 지창至彰을 한 송이가 머금었다.

화용花容은 가인佳人을 울리고 화품花品은 한사寒士를 부끄럽게 한다.

조화옹造化翁께서 시기하실라.    

 

 

  시기할 자 조화옹뿐이겠나.

자칫 땔나무꾼한테서라도 해코지당할까 싶어 태탕駘蕩한 춘풍에 앞서

눈 날리는 내 집 담 밑으로 비켜섰거들랑 혹시나 시들마른 이 가슴에

이름 모를 아픔 같은 거라도 남길까 봐 황황히 떠난다고는 하지 마라.

가지에 가득한 저 꽃이 바람에 날리면 그리움이 되겠지.

지레 두근거리는 가슴 들킨 듯 무안터니 무어라 가지마다 낙화이더냐.

뒷날의 기약일랑 묻지를 마라.

돌이키는 것이 하늘땅의 마음이라지만 명년 이때 피는 꽃이

오늘의 낙화에 대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초록 바탕 위에 흰색 무늬를 수놓은 듯 흰 매화를 받들어

이녁은 한갓 푸른 배경背景이요 객경客景이요 파수꾼이라던 대나무도 오늘따라 빛을 잃었다.

아슴푸레한 달빛 아래 그윽하던 그 암향이 갸웃이 웃던 모호한 그 미소가 이리도 쉬이 이별이라니,

더없이 고고한 한 사나이의 뜨거운 눈물처럼 그렇게 꽃잎이 떨어져 내린다.

낙화는 잔에 지고 여향餘香은 내 가슴에 진다.

꽃 아래 나 홀로 잔을 비우다가 바람에 뜨는 꽃잎에 시름만 더하였네.

취한 눈 길게 뜨니 남산이 제물에 무너져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