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6. 12. 10:18ㆍ詩
處處聞啼鳥(처처문제조). 곳곳에서 새소리 들린다.
夜來風雨聲(야래풍우성), 간밤에 비바람 소리 들렸는데,
花落知多少(화락지다소). 꽃은 얼마나 떨어졌을까?
작가 맹호연은 성당시기의 전원시파에 속하는데, 그의 전원시에는 전원의 한적함과 즐거움을 노래한 시보다는 오히려 세상을 한탄한 시가 많을 뿐 아니라 분위기 또한 그다지 밝지도 않다.
그의 전원시가 이러한 음조를 띠는 이유는 곧 그의 <전원작(田園作> 말미에서 언급한 “누가 능히 양웅(揚雄)을 위해, <감천부(甘泉賦)>를 추천한 것처럼 나를 한번 추천해 줄 수 있나?(誰能爲揚雄, 一薦甘泉賦.)”에서 그 실마리를 감지할 수 있다.
맹호연은 유력자의 천거로 인해 벼슬길에 올랐던 양웅의 일을 상기하며 부러워했는데, 그는 평생 장구령(張九齡)의 막부에서 종사(從事)를 잠시 지낸 것을 제외하고는 산림에 은거하면서도 관직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못한 것이 중요한 원인이었을 것이다.
관직을 향한 그의 염원을 그가 살아온 이력과 비교하여 살펴보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의 이력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그는 젊은 시절 고향인 호북성 양양(襄陽)의 녹문산(綠門山)에 은거하면서 시로써 즐겼다. 이후 40세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장안(長安)의 진사시에 응시하지만 낙방하고 만다. 낙방에 실망하여 오월지방을 유람하고 나서, 한조종(韓朝宗)이 양주(襄州)자사가 되어 맹호연과 함께 장안으로 가서 그를 추천하기로 약속을 하였다.
그러나 약속한 날 그는 친구와 술을 마시고선 약속을 저버리고 장안으로 가질 않았다. 이후 그는 장구령의 막부에서 잠시 지냈을 뿐이었다. 끝내는 친구 왕창령(王昌齡)이 양양(襄陽)으로 놀러 와서 맹호연을 찾아왔기에, 그는 등에 악성종기가 있었지만 이를 무시하고 마음껏 술을 마시며 생선을 날 것으로 먹고서 세상을 떠나게 되었으니, 그의 나이 52세였다.
의문이 드는 것은 첫째 평생 관직의 꿈을 포기하지 못한 그가 왜 40세가 될 때까지 자신의 가원인 남원(南園)과 녹문산에 은거하였는가? 둘째 그가 그토록 갈망하던 관직의 추천을 해주기로 한 한조종과의 약속을 왜 지키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첫째, 왜 40세까지 녹문산에서 은거했는가?
그 이유를 알 길이 없지만 그가 개원(開元)12, 13년 그의 나이 36, 37세 무렵에 낙양(洛陽)으로 나선 일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개원13년은 당 현종이 봉선의례를 위해 낙양을 출발하여 태산(泰山)으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낙양은 조야의 인사들이 일시에 운집하였고, 맹호연 역시 이곳에서 저광희(儲光羲), 기무잠(綦毋潛)과 교유를 맺었고, 장구령(張九齡)과도 아마 이 시기에 사귄 것으로 사료된다.
그런데 유력자로부터 추천을 얻을 것이라는 희망과 추천을 얻지 못한 실망이 이 시기에 쓴 많은 시에서 드러난다. 낙양으로 출타한 목적이 관직으로의 추천이었다면 그가 녹문산에 은거한 진짜 이유가 혹 ‘종남첩경(終南捷徑)’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을까?
그는 실제로 문재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과거시험을 위해 40세 무렵 장안에 갔던 사실은 앞에서 말한 대로다. 왕사원(王士源)의 <맹호연집서(孟浩然集序)>에 의하면, “비서성(秘書省)에서 한가롭게 놀 때, 가을 달이 비치고 새로 날이 갰다. 뛰어난 인물들이 모여 연구(聯句)를 짓는데 맹호연의 차례가 되었다.
‘엷은 구름은 은하수를 흐르고, 성긴 비는 오동나무잎에 떨어진다.(微雲澹河漢, 疎雨滴梧桐.)’라고 하자, 온 좌중이 이 구절이 아주 깨끗한 것(淸絶)에 감탄하고 모두 붓을 놓고 더 이상 이어서 짓지를 못했다.
승상인 범양(范陽)의 장구령, 시어사인 경조(京兆)의 왕유(王維), 상서시랑인 하동(河東)의 배비(裴胐), 범양의 노복(盧僕), 대리평사인 하동의 배총(裴總), 형양(滎陽)의 정천지(鄭倩之), 태수인 하동의 독고책(獨孤冊)이 모두 맹호연과 친교를 맺었다.”고 하였으니, 당시 그의 문재가 대단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 ≪신당서(新唐書)≫에 이러한 고사가 전한다. 한번은 이렇게 하여 알게 된 시어사 왕유가 사사로이 내관으로 그를 초청하였다. 그때 마침 현종이 찾아왔기에 맹호연은 놀라서 침상 밑에 숨었다. 왕유는 속일 수가 없어서 사실대로 아뢰자 현종이 기뻐하며 “짐이 그 사람의 소문을 들었지만 만나보지를 못했다. 무엇이 두려워 숨는가?”라고 하며, 맹호연을 나오도록 불렀다.
현종이 그의 시를 물으니 맹호연은 재배하고 스스로 지은 시를 읊는데, ‘재주가 없어 현명한 임금에게 버림받고(不才明主棄)’라는 구절에 이르자, 현종은 “그대는 벼슬을 구하지 않았고 짐이 그대를 버린 적이 없는데, 어찌 나를 무고하는가?”라고 말하고 맹호연을 돌아가게 했다.
‘不才明主棄’의 구절은 맹호연의 <세모에 종남산으로 돌아가다(歲暮歸南山)>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런데 종남산(終南山)이 어떤 곳인가? 바로 ‘종남첩경’의 그 산이 아니던가? 이 고사는 진위여부에 논란이 있지만 사실이었다면 평생 한번 올지도 모를 절호의 기회를 그는 잡지 못한 셈이다.
‘재주가 없어 현명한 임금에게 버림받고(不才明主棄)’의 바로 뒷 구절이 ‘병이 많아 친구마저 멀어졌다(多病故人疎)’고 한 것을 보면, 병이 많다고 표현한 것은 구실일 뿐 그곳에서 사귄 명사들과 소원해졌거나 혹 그들이 맹호연의 본심을 알아채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 진짜 이유는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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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백이 쓴 <맹호연에게 줌(贈孟浩然)>이란 시를 참고로 하여 완전히 엉뚱한 상상을 해 본다.
吾愛孟夫子(오애맹부자), 내가 좋아하는 맹호연,
風流天下聞(풍류천하문). 풍류가 세상에 유명하더라.
紅顔棄軒冕(홍안기헌면), 젊은 시절 관직을 버리고,
白首臥松雲(백수와송운). 반백이 되어 소나무와 구름이 있는 산속에 누웠더라.
醉月頻中聖(취월빈중성), 달에 취해선 술을 자주 마셨고,
迷花不事君(미화불사군). 꽃에 심취해 임금을 섬기지 않았다.
高山安可仰(고산안가앙), 높은 산과 같은 그를 어찌 우러러 볼 것인가?
徒此揖淸芬(도차읍청분). 다만 이 맑고 향기로운 이에게 경의를 표할 뿐.
이백은 맹호연이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며, 달에 취해 술을 마시고, 꽃에 심취해 임금을 섬기지 않았던, 풍류로서 유명한 그의 ‘맑은 향기(淸芬)’을 칭찬하였다. 그런데 이 ‘淸芬’은 앞에서 언급한 왕사원의 <맹호연집시서>에 나온 ‘淸絶’과도 같은 의미다.
이백과 맹호연의 만남은 맹호연이 실망하여 장안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 뒤 오월지방으로 유람할 때였다. 실망에 가득 차서 불만과 관직에 대한 염원을 드러낸 그 시기에 맹호연을 만난 이백조차도 그의 본의를 알지 못하고, 오롯이 관직을 염두에 두지 않은 그의 깨끗한 모습에 경의를 표했던 것이다.
그러니 장안에 있을 때도 그가 너무 ‘淸絶’만을 강조하다보니, 친구들이 혹 그의 본심을 알아채지 못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정말 그가 세속의 일보다 산수자연에 더 심취했던 것일까? 아니면 혹 정사를 돌보지 못할 만큼 술에 빠졌던 것일까?
둘째, 그는 왜 한조종이 추천하기로 약속한 날을 지키지 않은 것인가?
우선 이 고사의 내용을 한번 보자. ≪新唐書孟浩然傳≫와 <맹호연집서>에 의하면, 개원 23년(735년) 산남채방사(山南採訪使)이자 양양(襄陽)자사인 한조종(韓朝宗)이 맹호연은 한가로움을 시로써 읊는데, 대도(大道)에 적합하고 교화에 훌륭하다고 하였다.
이로 인해 함께 조정에 가서 맹호연의 이름을 알리고자 했으나, 함께 가기로 약속한 날에 술을 마시게 되었다. 그때 맹호연은 친구를 만나 술을 마시며 시문을 담론하였다. 어떤 이가 “당신은 한공과 약속을 하고 이를 지키지 않으니 옳은 일이 아닙니다.”고 하니, 맹호연이 꾸짖어 “이미 술을 마셔서 몸이 즐거운데 다른 일을 생각할 겨를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는 술자리를 파하고도 가지 않았는데, 한가로움으로 인해서 약속을 어기게 되었던 것이다. 맹호연 역시 후회하지 않았다.
한조종은 채방사의 자격으로 맹호연의 시를 조정에 추천하려고 했지만 맹호연은 술로 인해 그와의 약속을 파기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표면으로 드러난 것 외에 그 무언가가 있지 않고서 단순히 친구와의 음주로 인해 관직의 꿈을 포기한다는 것은 결국 맹호연 자신이 만든 운명인 셈이다. 그는 관직의 꿈이 좌절될 때마다 무수히 한탄하고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현실을 원망한 것을 볼 때 결국 그는 무책임할 뿐만 아니라 이율배반적이다.
이율배반적? 그렇다. 보통의 문사들은 ‘불우(不遇)’한 경우를 당하여, 산수전원에 은거하거나 만유를 떠나거나 술에 탐닉하는 모습을 보인다. 맹호연에게도 이러한 모습이 드러나지만, 그의 산수시, 유람시, 음주시 등을 살펴보면 이것들에 탐닉하는 모습이나, 이것들로 인해 인생을 달관한 모습 등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불우한 상황을 고민하고 아파하는 모습으로 일관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그의 산수시조차도 경물을 보고 느끼어 감정이 자연스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강렬한 주관적인 감정이 자연을 빌어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또한 ‘淸絶’의 풍격을 추구하고 있으니, 이율배반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의 시들은 전체적으로 어둡기도 하거니와 가슴에 쏙 와 닿지 않는다. 이건 필자만이 느끼는 감정일까? 이러한 느낌은 혹 맹호연이 자신의 감정을 자제하고서 ‘청절’을 추구했기에 사물에 완전히 몰입되지 못한 결과인 것은 아닐런지...
맹호연의 전체시 265편 중에 65편이 음주와 관련되었다고 하는데, 이중에 대부분이 친구와의 교유 속에서 비롯된 것이다.
맹호연은 한조종과의 약속도 지키지 못한 것이나 그의 죽음 또한 음주와 관련이 있는 것을 볼 때, 그가 술을 좋아한 것은 사실인 듯 하다. 또한 그의 이력으로 볼 때 그의 음주시에는 통음하며 세상을 한탄하거나 원망하는 모습이 많을 듯 하지만 실제로 그러한 묘사는 많지 않다. 아마도 작가가 최대한 절제하여 음주하는 모습을 한두 구절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언외의 높은 풍격을 얻었는지는 몰라도 이러한 구절이 예전의 시인들에게서 한두 번쯤 본 듯 하기도 하고, 자신의 감정을 읊는다기보다 일반적인 상황을 읊고 있는 듯 하여 깊은 동감을 느끼기가 힘들다.
이중 제법 운취를 느낄 수 있는 것으로 <추운 저녁 장명부의 잔치(寒夜张明府宅宴)>와 <봉림사 서쪽 등성이를 유람하고(游凤林寺西岭)>가 있다.
<추운 저녁 장명부의 잔치에서(寒夜張明府宅宴)>
瑞雪初盈尺(서설초영척), 서설이 처음으로 1척쯤 쌓여,
寒宵始半更(한소시반경). 추운 밤 첫 한밤중.
列筵邀酒伴(열연요주반), 펼쳐진 잔치자리에 초대된 술꾼,
刻燭限詩成(각촉한시성). 시간을 재도록 새긴 촛불은 시가 완성하기를 제한한다.
香炭金爐暖(향탄금로난), 향나무 숯은 금향로를 데우고,
嬌弦玉指清(교현옥지청). 교태로운 현은 옥같은 손가락에서 맑은 소리를 낸다.
醉來方欲卧(취래방욕와), 취하여 막 눕고 싶은데,
不覺曉鷄鳴(불각효계명). 어느새 새벽닭이 우는구나.
<봉림사 서쪽 등성이를 유람하고(游凤林寺西岭)>
共喜年華好(공희년화호), 좋을 때를 함께 즐기려고,
來游水石間(내유수석간). 물과 바위가 있는 곳으로 놀러왔다.
烟容開遠樹(연용개원수), 안개의 모습은 멀리있는 나무에서 퍼지고,
春色滿幽山(춘색만유산). 봄색은 그윽한 산에 가득하다.
壺酒朋情洽(호주붕정흡),병속의 술에 우정이 돈독해지고,
琴歌野興閑(금가야흥한). 거문고의 노랫소리에 야외의 흥취가 한가롭다.
莫愁歸路暝(막수귀로명),돌아갈 길이 어둡다고 근심하지 마시오,
招月伴人還(초월반인환). 달을 불러 사람과 짝하여 돌아가면 되니.
필자는 사실 시란 굳이 해석할 필요가 없다고 여긴다. 각자가 느끼는대로 느끼면 되는 것이다. 맹호연의 시를 ‘淸絶’, ‘淸芳’으로 평가하는데, 이러한 시들이 바로 이러한 평가에 해당하는 것이리라. 굳이 거나하게 술을 마시는 모습을 표현할 필요가 있는가? 마지막 두 구절로 술자리에서의 즐거움, 거나하게 취한 모습, 뒷일을 걱정하지 않는 모습을 충분히 추측해 볼 수가 있는데 말이다.
그의 음주시가 대부분 이러한 모습이다.
<가을에 만산에 올라 張子容에게 부치다(秋登萬山寄張五)>
……
何當載酒來(하당재주래), 언제가 되어야 술을 싣고 와서,
共醉重陽節(공취중양절). 중양절에 함께 취할까?
<포융의 집 잔치자리에서(宴包二融宅)>
……
開襟成歡趣(개금성환취), 흄금을 터놓고 즐거운 운치를 이루니,
對酒不能罷(대주불능파). 술을 마주하고는 멈출 수가 없다.
烟暝栖鳥迷(연명서조미), 안개가 자욱하여 깃든 새가 길을 잃는데,
余將歸白社(여장귀백사). 나는 백사로 돌아가리라.
*白社:낙양의 동쪽에 있었는데, 지금의 하남성 언사현(偃師縣)임. 옛날 도사 동위련(董威輦)이 기거하던 곳으로 뒤에 와서는 은사의 처소를 가리킴.
<초봄 한중에서 배를 띠우고(初春汉中漾舟)>
……
傾杯魚鳥醉(경배어조취), 술잔을 기울이니 물고기와 새도 취하는 듯,
聯句鶯花續(연구앵화속). 연구를 지으니 앵무새와 꽃이 하련을 잇는 듯.
良會難再逢(양회난재봉), 좋은 모임은 다시 만나기 어려우니,
日入須秉燭(일입수병촉). 해가 저물면 마땅히 촛불을 들고 놀아야지.
<청명절 매도사의 방에서 연 술자리清明日宴梅道士房>
……
童顔若可駐(동안약가주), 아이같은 얼굴은 머무를 만 하다고 알려주는 듯하니,
何惜醉流霞(하석취류하). 신선주같은 술에 어찌 취하기를 아끼겠는가?
<낙양에서 월땅으로 가다(自洛之越)>
……
且樂杯中物(차락배중물),잠시 잔속의 술을 즐길 뿐이니,
誰論世上名(수론세상명). 누가 세상의 명성을 논하랴?
위에서 인용한 이러한 음주시로써 그가 술을 즐겼음을 충분히 알 수 있지만, 시의 풍격에 힘쓴 나머지 폭음한 표현이 부족한 것이 아쉽기도 하다. 다만 <봄날 왕구상이 찾아와 기뻐서(春中喜王九相尋)>와 <장난삼아 짓다(戱題)>가 바로 술로 인해 죽은 그의 죽음을 충분히 설명해 준다.
<봄날 왕구상이 찾아와 기뻐서(春中喜王九相尋)>
二月湖水清(이월호수청),2월에 호수는 맑고,
家家春鳥鳴(가가춘조명). 집집마다 봄날 닭이 운다.
林花掃更落(임화소갱락),숲속의 꽃을 쓸면 다시 떨어지고,
徑草踏還生(경초답환생). 길가의 잡초는 밟으면 다시 자라난다.
酒伴來相命(주반래상명),술친구가 와서 서로를 부르고,
開尊共解酲(개존공해정). 술병을 따서 함께 숙취를 해소한다.
當杯已入手(당배이입수),술잔을 대하면 벌써 손안에 들어오니,
歌妓莫停聲(가기막정성). 가기는 노래를 쉬지 말기를.
<장난삼아 짓다(戱題)>
客醉眠未醒(객취면미성), 객은 취하여 잠을 자도 아직 술이 깨지 않았는데,
主人呼解酲(주인호해정). 주인은 해장하자고 부른다.
已言具鷄黍(이언구계서), 닭과 기장밥이 준비되었다고 말하고,
復道瓮頭清(부도옹두청). 다시 술독을 비우자고 말한다.
이 두 시는 같은 날 같은 일을 읊은 시라고 추측된다. 술에 취해 아직 깨지도 않았는데, 주인(맹호연)은 다시 해장술을 권한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맹호연의 음주모습이라고 여겨진다. 그렇기에 한조종이 그를 추천하려고 했을 때도 술에 취해 약속을 어긴 일이나 등에 종기를 앓고 있으면서 친구 왕창령의 방문에 기분이 좋아 폭음과 날생선을 먹고 죽은 일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그러니 맹호연은 또 누구를 원망하랴! 바로 자신이 자기의 운명을 그르치고, 자신이 술에 먹힌 것을!
‘적당히’란 말이 참으로 어려운 말이지만, 음주는 자신의 상황에 따라 적당히 마시고 생활의 활력소가 되어야지, 술에 빠져 자신을 찾지 못하면 그것이 곧 술에 먹힌 것이 아니겠는가?
데일리안 뉴스 기사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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