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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의 기원
정보컴퓨터공학부
발표일 : 2005. 5.31
담당교수 : 신호철
조원: A511180 염정원
A511196 유혜경
A311030 김준빈
A511170 심우한
A411139 송재훈
9815225 이해구
목 차
1. 서 론 ------------------------------------------ 1
2. 한글의 기원 ------------------------------------- 2
2-1. 고전 기원설 (이해구) -------------------------- 2
2-2. 가림토문자 기원설 (심우한) -------------------- 3
2-3. 아히루문자 기원설 (염정원) -------------------- 5
2-4. 산스크리트문자 기원설 (유혜경) -------------- 6
2-5. 몽고 파스파문자 기원설 (김준빈) ------------- 8
2-6. 발음 기관 상형설 (김준빈) ---------------------- 9
2-7. 히브리문자 기원설 (송재훈) -------------------- 10
3. 결 론 --------------------------------------------11
♣. 참고문헌 ----------------------------------------- 13
♧. 참고 WEB SITE ------------------------------------13
1. 서 론
초등학교 시절부터 한글(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집현전의 학자들과 더불어서 창제했다고 막연히 알고 있었는데 한글의 기원에 대하여 조사를 하면서, 놀라운 점은 한글의 기원에 대한 설만 30개 정도가 된다는 사실이다. 한글이라는 우리 민족만의 고유 언어이자 과학적인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문화적 자긍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정작 그 언어의 기원에 대해서는 무지하다는 사실이 부끄럽게 생각된다.
한글의 창제는 세종대왕이 명령하였으며 실질적인 작업은 집현전 학자들이 했다는 주장 또한 다를 수가 있다. 실록에 보면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만든 후 학자들의 거센 반발이 있자 “내가 만든 글자인대 너희들이 왜 그리 반대를 하는가?”라고 했으며 그러자 집현전 학자들이 말하길 “그렇게 큰일을 어찌 비밀리에 전하 혼자 하셨습니까?” 라고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보아 집현전 학자들 모르게 세종대왕 혼자 하신 비밀프로젝트 같은 것이 아닐까 한다. 현제 알 수 있는 기록으로는 세종 25년 12월에 새 글자를 만들 때까지 집현전 학자들이 무엇을 했다는 기록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집현전 학자들이 한 일은 새로 만든 글자에 대한 해설을 삼 년에 걸쳐 세종 28년 9월까지 해설서를 만들었다는 것이다.1) 훈민정음이 반포 된지 50일 만에 반대 상소문을 낸 것도 부재학 최만리 등의 집현전의 실학자였다는 사실이 이와 같은 사실을 뒷받침 한다.2)
여기에서는 한글의 기원에 관한 여러 학자들의 이론들 중에 고전 기원설, 가림토 문자 기원설, 아히루문자 기원설, 산스크리트문자 기원설, 몽고 파스파문자 기원설, 발음기관 상형설, 히브리문자 기원설을 조사해서, 한글의 근원지를 찾아 가고자 한다. 그러나 이 여러 가지 이론 중 어느 한가지로 확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어느 한 가지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학설들이 있는가를 확인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다.
2. 한글의 기원
2-1. 고전 기원설
?세종실록? 제102권 세종 25년(1443) 음력 12월 30일 그믐 조에,
“이달에 임금이 몸소 언문 28자를 지었는데, 그 글자는 古篆(고전)을 모방하였고,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룬다.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우리 말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되었지마는 전환 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이른다.”3)
라고 하고, 정인지의 ?훈민정음? 해례 서문에서도, “글자는 고전을 모방하였다(字倣古篆-자방고전)” 라고 하였으니, 이는 훈민정음이 중국 옛글자인 고전을 본받았음을 말해 주는 유력한 고전 기원설이다.
‘古篆’이라는 것은 옛날 한자(전서체)이다. 세종대왕 때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의 훈민정음 반대 상소문에서도,
“설혹 말하기를,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받은 것이고, 새로 된 글자가 아니라 하지만,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 篆字(전자)를 모방하였다 할지라도 소리로써 글자를 합하는 것이 모두 옛 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때가 없사옵니다.”4)
라고 하였으니, 여기서 앞의 자방고전을 뜻한 ‘전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나 그 중 중국 옛 글자를 모방하였음이 유력시 되고 있다.
이덕무도 그의 ?청장관전서? 제54권 훈민정음조에,
“훈민정음에 초성?종성이 통용되는 8자는 다 고전의 형상이다. ㄱ ‘고문의 급(及자)에서 나온 것인데, 물건들이 서로 어울림을 형상한 것이다.’ ㄴ ‘익(匿)자에서 나온 것인데, 은(隱)과 같이 읽는다.’ ㄷ ‘물건을 담는 그릇 모양인데, 방(方)자와 같이 읽는다.’ ㄹ ‘전서의 기(己)자이다.’ ㅁ ‘옛날의 위(圍)자이다.’ ㅂ ‘전서의 口자이다.’ ㅅ ‘전서의 인(人)자이다.’ ㅇ ‘옛날의 원(圓)자이다.’ 또 ㅣ‘위 아래로 통하는 것이니, 고(古)와 본(本)의 번절이다.’ 번절(?切) ‘세속에서는 언문으로 반절(反切)이라 하여 반(反)자를 배반한다는 반(反)자로 읽고 반절(反切)의 반(反)자 음(音)이 번(?)인 줄은 알지 못한다. 1행에 각각 11자이다.’ 모두 14행인데 글자를 좇아 횡으로 읽으면 ‘가(可)?나(拿)?다(多)?라(羅)의 유와 같다.’ 자연히 범주(梵呪)와 같다. 대체로 글자의 획은 전주(篆?)보다 더 좋은 것이 없으니, 성인이 아니면 어떻게 여기에 참여 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여 고전기원설을 내세웠다.
하지만 박종국은 ?국어학사?에서 고전 기원설을 이렇게 비판하였다. ?세종실록?의 글이나 정인지의 ?훈민정음해례? 서문에서는 구체적으로 이러한 설명이 부족하고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의 훈민정음조에 훈민정음의 초성, 종성이 모두 고전의 혀상을 모방했다는 설명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훈민정음 초성의 ‘ㄹ’과 전서의 ‘기(己)’가 글자 모양이 비슷하고, ‘ㅅ’과 전서의 인(人)이 글자 모양이 비슷하다고 해서, 바로 그것을 모방하였다고 단정하여 말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우연의 일치에 불과하여 유기적 관련성이 없으므로 그 일치에 아무 의미를 발견할 수 없고 하였다.5)
유창균 교수는 1966년에 쓴 논문을 통해 훈민정음의 다각적인 기원설을 설명하면서 기본자형의 구성은 상형이 자형구성의 원리를 말하는데 대하여 ‘자방고전(字倣古篆)’을 글자의 형태에 국한시켜 ‘전서체(篆書體)의 각이 진 모양(角形)’을 본떴다는 견해를 폈다. 다시 말해서 자방고전은 글자의 형태를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이다.
그리고 허웅은 ?한글과 민족문화?에서 ?세종실록?에 나타난 글이나 정인지의 ?훈민정음해례? 서문의 글의 뜻은 훈민정음이 바로 고전 글자에서 왔다는 것이 아니라, 꼴을 본떠서(象形) 글자를 만들어 놓았는데, 그 상형(象形)한 것이 고전(古篆)의 글자와 비슷한 모양이 되었다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
2-2. 가림토문자(加臨土文字) 기원설
‘가림토문자’는 ‘가림다문자’라고도 한다. 가림토문자설은 1983년 10월에 열린 제2회 한국사 학술회의에서 제기되었다. 이 회의에 참석한 안호상 박사가 “단군시대에 한글이 창제되었다는 기사가 『환단고기』에 있다.” 고 이야기했다. 그후 송호수 박사(개천학회 회장)가 『광장』지 1984년 1월호에 “한글은 세종 이전에도 있었다.”라는 글을 발표해 본격적인 가림토문자 기원설을 제기했다.
가림토문자 기원설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원래 한글은 신치(神誌)가 사슴의 발자국을 보고, 이를 문자화하여 짐승가죽에 기록한 데서 출발한다. 바로 이것이 태고 문자의 시조인 녹도문(鹿圖文)이었다. 이 문자는 훗날 가림토(加臨土. 가림은 사물을 분명히 가린다는 뜻이고 토는 사물의 뜻을 분명히 한다는 뜻임)의 원조가 되는 글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3세 가륵 단군(檀君 嘉勒)이 BC 2181년 즉위 2년에 이르러 삼랑 을보륵(三郞 乙普勒)으로 하여금 이전의 문자를 다시 정리해 정음(正音) 38자를 만들었는데 이를 가림토문자라 했다. 이는 후진적인 상형문자를 알기 쉬운 표음문자로 바꾸어 만드는 한편, 조선의 강역 내에서조차 녹서(鹿書)는 물론 여러 서로 다른 문자가 사용되고 말이 잘 통하지 않자 이를 통일하고자 만든 것이다.
고려 말기의 학자 이암이 쓴 「단군세기」에 가림토문자 기원설이 다뤄지고 있다. 가림토문자 38자에서 10자를 제거한 것이 곧 28자인 훈민정음이라고 본다. 한자문화의 팽창으로 가림토문자가 우리 나라에서는 거의 사라진 반면, 상대적으로 안전지대였던 일본에서는 가림토문자를 모방한 아히루문자(신대문자의 일종)가 남아 있다.』7)
하지만 가림토문자설은 국어학계에서 전혀 인정을 받지 못했다. 반론자들의 근거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문자 발달사의 원리에 정면으로 위배된다는 것이다. 문자는 일반적으로 그림문자와 상형문자의 단계를 거쳐 표의문자나 표음문자로 발전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서기전 2181년이면 수메르상형문자와 이집트상형문자나 존재할 정도이고, 중국 갑골문자도 아직 나타나기 전이다. 그런 시대에 음소문자인 가림토문자가 있었다는 것은 문자학의 상식과 맞지 않는다.
두 번째로 가림토문자의 출전인 「단군세기」가 1911년 계연수가 편찬한 「桓檀古記」에 들어 있다는 점이다. 즉, 「환단고기」에 들어 있는 「단군세기」가 고려시대의 원본이라는 보장이 없다는 지적이다. 「단군세기」의 저자 이암도 「古記」에 의지해 쓴 것으로 돼 있다. 이근수 교수는 “원래 이암이 쓴 「단군세기」에는 가림토문자가 없었는데, 후대에 한글의 자형을 가필첨가 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교수는 그 외에도 단군시대에 창제되었다는 가림토문자가 무려 3천 2백년이 지난 고려초까지 단 한 조각의 언어자료가 남아 있지 않은 점을 지적했다. 조철수 박사도 “가림토문자가 단군시대에 창제되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중국유태인이 쓰던 히브리문자의 영향을 받아 고려시대에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에 영남대학교 정연규 교수는 가림토문자의 실체를 인정했다. 그의 주장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가림토 정음의 모음체계는 훈민정음과 같다. 그러나 자음은 ㄱ, ㄴ, ㄹ, ㅁ, ㅇ, ㅈ, ㅿ 등의 음성표기체가 같으니 1911년 계연수가 「환단고기」를 쓰면서 가림토문자를 거짓으로 史實을 펴냈느냐하는 것이 의문으로 남는다. 가림토문자의 실체를 인정하는 편에서 다음 몇가지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1) 그림문자→상형문자→표의문자→기호문자 등 세계언어의 문자발달의 과정으로 보아서 ‘녹서, 우서, 용서, 화서, 신전(가림토문자)’8)로의 발전과정이 자연스럽다는 점이다.
(2) 만약 가림토문자가 허위라면 일본의 신대문자, 양사호 문화권의 빤포유적기호, 리우완유적기호, 인도 구자르트주의 간판에 새겨진 글자, 남미 볼리비아에서 발견된 이와 비슷한 문자 등의 연구가 널리 되어서 가림토문자와 한글의 기본적인 관계에 대한 논쟁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9)
2-3. 아히루문자(神代文字) 기원설
일본의 사학자 吾鄕淸彦氏에 의하면 가림토의 글 모양이 비슷한 소위 신대문자라는 [アヒル](아히루)문자가 대마도 및 그외의 神社에서 발견되었다. 일본에 한자가 들어가지 이전에 이 [アヒル]문자가 사용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일본학자 鹿島昇씨는 가림토문자가 海南島의 설형문자 및 [오루메가]의 신성문자와 비슷하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구주지방에도 A.D. 700~800년 경에 존재하였다고 추정되는 [アヒル](아히루)문자가 있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神社의 이 文字 앞에 절을 하고 복을 비는 풍습이 있다. 문자체계를 보면 가림토문자와 비슷한 체계를 갖추고 있다.
↗
<신대문자1>
↖ <신대문자1>
↖
<신대문자3>
<신대문자4> ↗
케이블 TV에서 방영한 적이 있는 ‘한글, 그 비밀의 문’이라는 한글날 특집 프로그램에서는 일본의 신대문자를 추적해서 한글의 기원을 밝히려고 했었다. 내용을 보면 ‘이세신궁’에 신대문자라고 추정되는 고대문자가 있는데, 한글과 무척 비슷하며, ‘아타노 거울’에 새겨진 신대문자를 비롯해서 5백여점 이상의 신대문자가 존재한다고 한다. 708년에 세워진 비석에 신대문자가 새겨진 것으로 보아 일본인들은 나라시대 이전 즉, 약 5~6세기부터 신대문자가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신대문자가 고대부터 있었다는 확실한 근거는 찾기 어렵다. 더욱 한글이 일본의 신대문자를 모방했다는 설이 의심스러운 것은 일본이 신대문자를 공개하지 않고 꼭꼭 숨긴다는 것이다.
2-4. 산스크리트 문자(Sanskrit) 기원설 = 梵字 기원설
成俔(성현)은 ?용재총화? 제7권에서,
“세종께서 언문청을 설치하여 신숙주, 성삼문들에게 명하여 언문을 짓게 하니, 초?종성이 8자, 초성이 8자, 중성이 12자였다. 그 글 자체는 범자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며, 우리 나라와 다른 나라의 어음문자로써 표기하지 못하는 것도 모두 막힘없이 기록할 수 있었다. ” 라고 하여, 글 자체는 범자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최초로 말하였고, 이수광은 ?지봉유설?에
“우리 나라 언서는 글자 모양이 전적으로 범자를 본떴다. 아국언서자양전방범자(我國諺書字樣全倣梵字).”라고 하여, 역시 범자 기원설을 주장하였다. 황윤석은 ?운학본원?에서, “우리 훈민정음의 연원은 대저 여기에 근본하였으되, 결국 범자의 범위 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능화는 ?조선불교통사?에서 언문 글자법이 원래 범자에 근원한 것임을 말하고, 범자와 언문 글자의 꼴과 소리가 서로 비슷한 것 몇 가지를 들어 보였다.
한국어와 드라비디언 어족과의 친연성을 주장한 사람은 Homer BezaIeeI Hulbert(1863~1949)였다. 그는 20년(1886~1905) 한국 문교부의 고문으로 일했으며, 1905년 ?한국어와 인도 드라비디언 방언의 비교 문법?을 한국 감리교 출판부에서 간행했다. Hulbert는 이 두 언어의 어휘, 형태, 유형의 유사성을 주장하고, 다음과 같이 한국어와 타밀어 어휘를 대응 시켰다.
어휘 |
한국어 |
타밀어 |
어휘 |
한국어 |
타밀어 |
너 |
n, ni |
ni |
나 |
na |
na |
돌다 |
tol |
tiru |
비 |
pi |
pey |
먹다, 음식 |
m?k |
meyk |
칼 |
khal |
kadi |
닫다 |
tat |
satt |
오다 |
o- |
wo |
귀 |
kwi |
kevi |
죽다 |
cuk |
chak |
나무 |
namu |
namu |
|
한국어 : Sal ‘to live’ + am(Nom) → Salam ‘사람’
타밀어 : Nil ‘to stand’ + am(Nom) → Nilam ‘땅’
한국어 : Khal Kajigo(knife - having) ‘with a knife’
타밀어 : Kadi Kamdu(knife - having) ‘with a knife’
A.D.1285년경 충렬왕 11년경 보각국사 일연이 찬한 ?삼국유사?에 보면 수로왕이 인도의 아유타국의 공주를 맞이하였는데, 그녀의 이름이 ‘허황옥’이다. 이 ?삼국유사?의 기록은 과연 인도의 드라비디언 인종이 배를 타고 한반도에 이주해 왔느냐? 라는 문제, 중앙아시아에서 있던 몽골인종이 인도반도로 남하하였느냐? 그러면 인도의 남쪽에 이 어족이 왜 분포되어 있을까?
1996년 3월 8일자 중앙일보 ‘한국문화 닮은 문화, 아세아 10만리 19’에 유엔 FAO 아프카니탄 고문인 김병호 박사가 쓴 기사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인도의 구자라타주의 간판에 새겨진 글자가 우리 한글과 닮고, 서낭당 곁 돌무더기, 여인들이 냇가에 모여 정겹게 빨래 방망이질 하는 모습, 우리 선조들이 타고 다녔던 과하마를 보고 그들은 감탄하고, 우리의 선조들이 인도에 체류했다고 추정했다. 그 기사를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탐사팀은 인도 수라스트란반도 구자라타주 바도다라시에 우리 조상들의 흔적을 찾고자 갔다. 그 도시의 박물관장을만났는데, 그는 “옛날부터 수라스트란 사람들이 인도네시아?수마트라?태국?베트남을 거쳐 한국이나 일본으로 많이 흘러갔으니까요.” 라고 말했다. 바도다라시의 길가에 즐비하게 걸려 있는 간판마다 씌어 있는 글자들은 한국 사람이면 60% 이상은 읽을 수 있는 낯익은 글자들이었다. 뜻은 비슷하지 않았지만, 글자 모양은 틀림없이 우리 한글과 닮아 있었다. 탐사팀은 이것을 밝혀내기 위해 이 고장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MS대학을 찾아갔다. 그곳에는 지금으로부터 2천백여년전 아쇼카대왕 시절부터 현대에 이르는 문자의 변천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차트로 작성해 두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 우리 한글 자모와 같은 모양의 글자를 찾아보니 놀랍게도 ‘ㄴ, ㄷ, ㅌ, ㅇ, ㅁ, ㅂ, ㄹ, ㅓ, ㅗ, ㅣ’가 같았다. 그리고 인도에서 유명하다는 산스크리트어 학자를 찾아갔는데, 그가 읽는 산스크리트어 알파벳은 우리가 초등학교 때 배운 한글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꺼커거, 쪄쳐져, 떠터더, 뻐퍼버, 셔허” 게다가 산스크리트어의 알파벳은 우리 한글처럼 ‘ㄱ’으로부터 시작해, ‘ㅎ’으로 끝난다고 했다.
더욱이 산스크리트어는 음성까지도 무척 한글과 닮았다. 그 학자의 설명에 따르면 산스크리트어 알파벳 발음은 입과 목구명의 모양에 따라 구분된다고 한다. 즉 ‘커’처럼 목구멍에서 나는 소리, ‘처’처럼 입천장에서 나는 소리, ‘뻐’처럼 입술에서 나는 소리로 구분된다고 했다.
탐사팀의 관심은 모은 것은 세종대왕이 창제했다는 한글 글자꼴을 인도에서 가져왔다는 움직일 수 없는 옛 기록이다.??
이와같이 인도 구자라트에 한글의 모양이 닮은 것은 자음가운데,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등이고, 모음은 ‘ㅏ, ㅑ, ㅓ, ㅕ, ㅗ, ㅛ, ㅜ, ㅡ, ㅣ’의 열자가 똑같다.10)
외국학자의 의견을 더 들어보면, 라쿠페리(Lacouperie 1892)는 훈민정음은 동아시아에서 유일한 음소문자라는 점에서 그 기원을 직접적인 원천은 불확실하지만 궁극적으로 인도 문자 계통으로 판단하고, 훈민정음의 몇몇 특정한 자형, 예를 들어 ‘ㄹ’과 같은 것은 티베트 문자와 같은 중간 매개를 거쳐서만 파생될 수 있다고 보았다. 스코트(Scott 1893, 1895)는 훈민정음의 기원이 산스크리트 문자임을 주장하면서, 산스크리트 문자가 인도에서 티베트와 중국을 거쳐 한국에 도달할 때까지 자형에 있어 많은 변화와 수정을 겪은 뒤, 훈민정음에서는 문자 다음에 문자를 쓰는 방식이 아닌 음절 형태로 바뀌었다고 보았다.11)
2-5. 몽고 파스파(Phasgspa 八思巴)문자 기원설 = 팍파(hPagspa)문자 기원설
한글의 기원이 이 문자였다는 설은 조선 실학시대 이후 수시로 거론 되어왔었다.(송기중 1991,p 169-172) 조선 숙종 때의 이익이 그의 ‘성호사설’에서 훈민정음이 몽고글자와 같은 것이라고 하였고 순조 때의 유희는 ‘언문지’에서 “我世宗朝命使臣 依蒙古字樣 ……. 以製諺文誰始於蒙古成於我東”(강신항의 해석: “우리 세종 때 사신에게 명하여 몽고 글자 모양을 본떠서 만들어 졌다. 언문은 비록 몽고에서 시작되었으나 우리나라에서 이루어졌다.) 라고하여 몽고글자를 본받았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김형주는 이익의 설명은 몽고글자(위구르계통의 문자)와 파스파문자를 구별함이 없이 혼동하여 말한 것으로 보아 몽고문자 기원설은 타당성이 없다고 하였다12). 그리고 유희의 언문지에서 말하는 몽고글자는 파스파문자를 설명한 것으로 훈민정음 자체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주장은 최근 일부 학자에 의해 구체적으로 되풀이 되고 있는데, 그에 대한 예로서 유창균은 양자의 대조에서 파스파 자형을 간략화 한 것이 훈민정음의 기본 다섯자(ㄱ,ㄷ,ㄹ,ㅂ,ㅈ)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13) 이 이론은 동시에 인도문자 기원설이나 티벳문자 기원설과도 관련성을 가진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파스파문자는 티벳자를 개량해서 만든 것이고 티벳문자는 인도 문자에서 기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훈민정음의 기원설에 산스크리트어,티벳자, 파스파문자 기원설을 낳게 할 수 있는 이유가 충분하다고 하였다. 그렇지 않다면 혀뿌리가 목구멍을 닫는 꼴을 ‘ㄱ’과 같이 할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을 구체적인 이유로 들고 있다.
조두상은 성호사설의 기록을 들어 파스파 문자의 영향을 추정14)하였으며, 김진우도 어느 정도의 유사성을 설명하고 있다15).
언어 발달사는 역사전개와 무관하다고 볼 수만은 없다는 입장에 서면 1269년 원나라 세조 때의 창제된 파스파문자가 몽고의 지배 하에 있던 우리나라 고려 말엽에 들어와 조선 초기까지는 어느 정도 영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파스파문자 기원설은 국어학계에서 유력한 학설로, 위의 훈민정음 기본초성자 ‘ㄱ,ㄷ,ㅂ,ㅅ’의유사와 문자구성의 원리, 원용의 유사점을 들고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실제의 구체적인 문헌자료가 없으므로 쉽게 단언할 수는 없는것이다.
2-6. 발음 기관 상형설
?훈민정음 해례본?의 제자해에 따르면, “초성글자의 기본자는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고, 중성글자의 기본자는 天?地?人의 三才를 본떠 만들었다.”고 훈민정음의 제자 원리를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이후 ‘발음 기관 상형설’이 정설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훈민정음에 수록되어 있는 한글 제자의 해설은 다음과 같다.
(1) 牙音 ㄱ 象各根閉喉之形 舌音 ㄴ 象各附上?之形
(2) 脣音 ㅁ 象口形 齒音 ㅅ 象齒形
(3) ㅋ比ㄱ,聲出稍?,故加?. ㄴ而ㄷ ㄷ而ㅌ ㅁ而ㅂ ㅂ而ㅍ ㅅ而ㅈ ㅈ而ㅊ ㅇ而ㆆ ㆆ而ㅎ 其因聲加?之義皆同.
(4) 半舌音ㄹ 半齒音ㅿ 亦象舌齒之形而異其體無加?之義焉
(5) ㆍ : ???形之圖 象乎天也
ㅡ : ???形之平 象乎地也
ㅣ : ???形之立 象乎人也
한글 字形의 특징은,
(1) 圖點 : ㆍ 直線 : ㅣ ㅡ 一角 : ㄱ ㄴ ㅅ 圖 : ㅇ
(2) 圖點과 直線의 組合: ㅗ ㅏ ㅜ ㅓ ㅛ ㅑ ㅠ ㅕ ㆎ ㅢ ㅐ ㅔ ㅒ ㅖ ㅚ ㅟ ㅘ ㅝ ㅙ ㅞ
圖點, 圖, 直線의 組合 : ㆆ ㆁ
角, 直線, 圖點의 組合 : ㅋ ㅌ ㅁ ㅂ ㅍ ㅈ ㅿ ㅇ ㅊ
극도로 단순화된 조합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며, 5획을 넘지 않는 이상적인 자형이다. 위 ㆍ ㅡ ㅣ 즉 天地人의 상징은 天地人一體의 천부경의 사상에서 철학적 개념을 얻었다고 볼 수 있다.16)
2-7. 히브리문자 기원설
훈민정음의 히브리문자 기원설은 최근에 나온 학설로 이색적이지 않을 수 없다. 이 기원설을 주장한 학자는 조철수 박사로 그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헌을 남긴 수메르어를 전공한 아시리아 학자이다. 동아일보 매거진 신동아 1997년 5월호의 “이색논단 한글의 비밀을 밝힌다”에 소개된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훈민정음이 본떴다는 옛글자(古篆)는 ?단군세기?에 기록된 가림토문자다. 그리고 이 가림토문자는 11~15세기에 중국유태인들이 쓰던 히브리문자를 모방한 것이다. 따라서 훈민정음은 가림토문자를 바탕으로 중국음운학과 히브리어 문자?히브리어 음운학을 참조해 창제했을 가능성이 높다.”
조철수 박사는 “훈민정음이 가림토문자를 매개로 히브리문자를 모방해 창제됐다”는 요지의 글을 발표했다. 조박사의 ‘히브리문자 기원설’은 여러 측면에서 충격적이다. 우선 한글과는 인연이 전혀 없어 보이는 히브리문자를 훈민정음의 모델로 상정했다는 점이다. 히브리문자는 페니키아문자에 기원을 둔 문자로 현재 이스라엘에서 사용되고 있는 문자다. 조박사의 주장대로라면 훈민정음 창제 당시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히브리문자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둘째, ?단군세기?에 기록된 가림토문자의 실제를 인정한 점이다. 47대 단군의 역사를 기록한 ?단군세기?는 역사학계에서 위작 여부로 논란을 빚은 책이다. 가림토문자 역시 국어학계에서는 훈민정음 후대에 만들어진 한글의 변체(變體)로 보고 있다. 일부 재야사학자들에 의하면 가림토문자는 3대 단군시대(지금으로부터 4500년 전)에 만들어진 문자로 훈민정음의 기원이 됐다고 한다. 하지만 조박사는 “가림토문자가 훈민정음의 모델이 된 것은 인정하지만, 가림토문자의 창제 연대는 고려시대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시 원나라 지배하에 있던 고려 말, 민족의식의 발흥으로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중국 유태인의 히브리문자를 모방한 가림토문자를 만들어 넣은 것이라는 이야기다.
셋째, 훈민정음의 음운체계와 히브리 음운학의 관계를 설정한 점이다. 조박사는 중국 유태인의 음운서였던 ?창조서?와 훈민정음의 5음체계 순서가 같은 점을 들어 히브리 음운학의 영향을 주장했다. 그간 국어학계에서는 훈민정음의 음운체계는 전적으로 중국 성운학을 원용한 것으로 보아왔다.
그러나 국어학자 대부분은 조박사의 글에 대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중에는 “논리적으로 비약이 심하다”는 지적이 가장 많았다. “히브리문자 기원설의 논거로 제시한 사항들이 잘못되었거나 불확실하다”거나 심지어 “논문으로서 가치가 없다”는 혹평도 있었다. 조박사의 주장이 국어학계의 정설과 상치하는 것이니만큼 어느 정도 예상됐던 반응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히브리문자와 한글의 유사성에 주목한 평도 나오고, 중국유태인의 음운서로 알려진 ?창조서?에 대해 관심을 보이는 등 분분적으로 긍정적인 반응도 있었다.
조박사의 히브리문자 기원설은 최소한 훈민정음의 기원에 대한 새로운 논의의 장을 펼쳤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 히브리 음운서와 중국 음운학의 관계가 명확하게 밝혀져야 히브리 기원설이 설득력을 얻을 것이다.
Ⅲ. 결 론
사실 훈민정음의 기원에 대한 논란은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훈민정음의 기원에 관한 연구는 크게 상형설과 외국문자 기원설의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는 그 연구 서술의 대상이 문자의 자형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문자의 계통에 관한 것인지에 따라 다시 세분되어져야 한다. 문자의 자형에 있어서의 기원은 말 그대로 한 문자의 표면적?시각적 형태가 어떤 문자의 형태에 기원을 두고 있는가를 말하는 것이고, 문자 계통에 있어서의 기원은 세계 문자발달사의 흐름에서 한 무자가 어디에 연결되어 있는가를 말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훈민정음의 기원에 관한 연구는 자형의 기원이라 면에서 주로 접근돼왔다. 기존의 古篆, 梵字(Sanskrit), 파스파, 한자의 약자, 거란, 티베트, 팔리문자 등 외국 문자 기원설은 자형의 기원에 근거한 연구로 분류되어져 왔다. 그러나, 이렇게 나뉘어진 연구들은 실제에 있어서는 문자의 계통이란 면에서 각 외국 문자들을 언급한 경우가 상당수에 달한다. 물론 발음기관, 태극, 고대문자, 창호 기원설은 분명히 字形의 기원이란 점에서 주장된 것이다.
국내 학자들의 훈민정음 기원에 대한 연구는 근세 조선을 특징짓는 사상인, 脫中國的 자아인식에서 출발한 실학에 힘입어 17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져, 이수광의 ?지봉유설?(1614)의 범자 기원설, 이익의 ?성호사설?(18세기초)의 파스파문자 기원서, 신경준의 ?운해?(1750)와 홍양호의 ?경세정운도설 序?(18세기 후반)의 발음기관상형설, 황윤석의 ?이재유고?“자모변”(18세기 후반)의 범자 기원설, 이덕무의 ?앙엽기?(18세기 후반)의 고전 기원설, 유희의 ?언문지?(1824)의 몽고자 기원설, 강위의 ?동문자모분해?(1869)의 발음기관상형설 등이 주장되었다.
그러나 훈민정음의 자형 기원이 기존의 외국 문자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는 국내 학자들의 여러 견해들은 1940년, 세종 때 발간된 ?훈민정음?의 발견 이후 약화되고, 일반적으로 발음기관상형설을 인정하게 되었고, 이러한 연구 경향은 외국인들의 연구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하지만 이런 연구 경향에도 불구하고 외국 문자 기원설들이 제기되고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자형의 기원이란 면에서의 주장이 아니라 문자의 계통면에서의 훈민정음과 외국 문자와의 연관성을 설명한 것임을 알 수 있다.17)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한글은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의 독창적인 면이 있지만, 문자발달의 유산을 이어 받았을 것이며, 알타이 언어들의 문자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기 때문에 서투른 결론을 내지 말고 더욱 깊고, 넓게 연구할 우리의 과제로 여겨야 하며, 잃어버린 한글의 뿌리를 찾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 참 고 문 헌
1. 김진우, 언어, 탑출판사, 1985
2. 김민수외 5명 공저, ?외국인의 한글 연구?, 태학사, 1997
3. 권재선, ?훈민정음 글월의 구성 분석적 이해?,우골탑, 1998
4. 박종국, ?한국어 발달사?, 문지사, 1996
5. 박종국, ?국어학사?, 문지사, 1994
6. 박인수, ?가림토 : 배달민족 5000만의 상고사 길라잡이?, 거근당, 1999
7. 정연규, ?언어로 풀어보는 한민족의 뿌리와 역사?, 한국문화사, 1997
8. 허웅 ?한글과 민족문화?,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9
♧ 참고 WEB SITE
1. http://www.hangeul.or.kr/
2. http://cc.kangwon.ac.kr/~sulb/kl-data/hunbib.htm
3. http://www.hahnnet.org/hahnnet/han1_9.html
4. http://members.iworld.net/hahngoon/hanron/pro21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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