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9. 10. 14:52ㆍ글씨쓰기
(이 글은 청주대 국문과 이동석 교수가 잡지 <말과글>에 기고한 내용입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이란 표현이 일본식이라는 일부의 견해에 대한 반론입니다. 역사적 측면에서 다루었습니다. 저도 이 견해에 동의하며, 통사적 측면에서 제 의견을 따로 올립니다.) --------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고향의 봄’이라는 노래의 첫 구절이다. 이원수 선생이 지은 시에 홍난파 선생이 곡을 붙인 이 노래는 한국인의 정서를 잘 표현한 대표적인 노래로 통한다. 이원수 선생은 이 동시를 1926년 아동잡지 「어린이」 4월호에 발표하였고 이어 홍난파 선생이 곡을 붙여 1929년 「조선동요백곡집」(朝鮮童謠百曲集)에 악보를 수록하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노래의 가사와 관련하여 슬그머니 논란이 일기 시작하였다. 논란의 핵심은 바로 1절의 첫 구절인 ‘나의 살던 고향’에 대한 것이다. ‘나’가 ‘살다’의 주체이므로 ‘나의 살던’이 아니라 ‘내가 살던’이라고 해야 옳다는 지적이다.
한때 가사를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었고, 이를 수용하여 가사가 ‘내가 살던 고향’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도 떠돌았지만, 정말 가사가 바뀌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몇몇 사람들에게 물어 본 결과 논란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을 보면 가사를 바꿀 정도로 깊이 있게 논의가 진행되지는 않은 듯하다.
그러나 인터넷 상에서 여전히 논란이 일고 있으므로 정말 ‘나의 살던 고향’이 잘못된 표현인지 심층 분석을 해 볼 필요가 있다. 만약 노랫말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 사실이라면, 가사를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이러한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관련 기관에서 공식적으로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다.
‘나의 살던 고향’에서 ‘나의’는 실질적으로 ‘살던’의 주어 역할을 한다. 그런데 형식상으로는 ‘나의’라는 관형어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처럼 의미상으로는 주어인데 형식상으로는 관형어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을 ‘주어적 속격’이라고 한다. ‘속격’은 ‘관형격’에 대한 예전 용어로서 현행 학교 문법대로라면 ‘관형격’이라고 해야 하지만, 워낙 굳어진 표현이라 ‘주어적 속격’이라는 용어를 일단 그대로 사용하도록 하자.
‘우리의 바라던 바’, ‘나의 무지한 탓’, ‘인생의 덧없음’도 주어적 속격에 속한다. 이들은 의미적으로 각각 ‘우리가 바라던 바’, ‘내가 무지한 탓’, ‘인생이 덧없음’과 같이 주어와 서술어가 호응하는 구문에 속한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주어적 속격 표현이 우리의 전통적인 표현이 아니라 일본식 표현이라는 것이다. 일본어는 관형격 조사로 ‘の’를 사용하는데, 이 ‘の’는 한국어의 ‘의’보다 쓰임이 매우 활발하고 자유롭다. 우리말에서는 ‘하늘의 새의 노래’와 같이 ‘의’가 연달아 나오는 표현이 매우 어색하지만, 일본어에는 이러한 제약이 없다.
따라서 ‘나의 살던 고향’과 같이 굳이 관형격 조사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구문에 ‘의’를 남용했다면, 십중팔구 ‘の’를 활발하게 사용하는 일본어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주어적 속격을 비롯한 ‘의’의 남용은 일본어가 우리말에 아직 영향을 미치기 전에는 발견되지 않고 일본어가 우리말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이후에나 발견될 것이다. 그 시기는 대략 일제강점기로 생각되는데, 조금 더 넓게 잡아도 임진왜란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그 이전부터 일본과 여러 가지 교류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말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대중적인 교류가 있었던 것은 아니므로 시간을 많이 거슬러 올라가지는 못한다.
결국 주어적 속격을 비롯한 ‘의’의 남용이 일본어의 영향이라면 임진왜란 이전 시기, 일례로 세종대왕 당시에는 주어적 속격과 같이 ‘의’를 남용하는 표현이 존재할 수 없었다고 본다. 그런데 세종대왕 당시에 간행된 문헌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발견하게 된다. 세종대왕이 직접 글을 썼다는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비롯하여 「석보상절」(釋譜詳節)과 같은 당시의 문헌들을 보면 다음과 같이 주어적 속격 표현이 매우 흔하게 발견된다.
須達 론 座 (수달의 만든 자리) <석보상절 6:30a> 目連의 降服온 龍 (목련의 항복시킨 용) <석보상절 13:7b> 大衆의 가져온 香木 (대중의 가져온 향목) <석보상절 23:37b>
위의 예문는 각각 ‘수달(須達)이 만든 자리’, ‘목련(目連)이 항복시킨 용’, ‘대중(大衆)이 가져온 향목(香木)’이라는 의미를 갖지만 모두 주격 대신에 관형격이 쓰인 주어적 속격 구문을 이루고 있다.
만약 주어적 속격 구문이 일본식 표현이라면 위의 구문 역시 일본식 표현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세종대왕 당시의 사람들이 이미 일본식 표현을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이 시기의 언어가 일본어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당시에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사람이 거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혹 일본어를 구사할 줄 아는 사람이 많았다 하더라도 단어 차원의 외래어가 아니라 문장 차원의 구문이 외국어의 영향을 받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옛 문헌에서 ‘나의 살던 고향’과 같이 ‘〇〇이 살던 〇〇’이라는 구문을 찾아보더라도 다음과 같이 예문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현대어의 ‘살던’은 예전에는 어간의 ‘ㄹ’이 탈락하여 ‘사던’으로 실현되었는데, 이 ‘사던’이 들어가는 구문으로 다음과 같은 예문을 들 수 있다.
拾遺의녜 사던히여 (습유의 옛날에 살던 땅이여) <두시언해-초간본 3:64a> 雲門 文偃 禪師 사던뎌리오 (운문은 문언 선사의 살던 절이오) <금강경삼가해 3:51a>
위의 예문은 각각 ‘습유(拾遺)가 옛날에 살던 땅이여’, ‘운문(雲門은 문언 선사(文偃 禪師)가 살던 절이오’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들은 ‘나의 살던 고향’과 마찬가지로 주어가 관형어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처럼 이미 500여 년 전에 ‘나의 살던 고향’과 동일한 구성의 문장이 사용되었으니, 설사 이 노랫말이 일본어의 영향을 받은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원수 선생을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주어적 속격의 원조는 500여 년 전의 우리 선조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 원조의 시대가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이다. 신라 시대에 유행했던 향가는 현재 25수가 남아 있는데, 그 25수의 노랫말 중에서 주어적 속격 구문이 무려 4개나 발견된다. 이 중 해석상 논란이 될 수 있는 한 예를 제외한 나머지 세 문장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乾達婆矣游烏隱城叱肹良望良古 (건달파의 논 성을 바라보고) <혜성가> 修叱賜乙隱頓部叱吾衣修叱孫丁 (닦으실 돈부 나의 닦을손뎌) <수희공덕가> 皆吾衣修孫 (모든 나의 닦을손) <보개회향가>
향가에서 ‘矣’와 ‘衣’는 관형격 조사에 해당한다. 위의 작품에서 ‘건달파의’(乾達婆矣)와 ‘나의’(吾衣)는 형식상 관형격이지만 의미상으로는 주격이다. ‘건달파의 논’이 ‘건달파가 논’을 의미한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니 ‘혜성가’가 지어진 7세기에 이미 주어적 속격이 존재했다는 점은 명확하다.
이처럼 우리말에서 이미 오래 전에 주어적 속격을 사용했다는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어적 속격이 일본식 표현이라고 단정하고 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신중하지 못한 태도다. 7세기의 향가 작품과 15세기의 문헌 글에 사용된 주어적 속격에 대해서는 그동안 아무런 문제도 제기되지 않았는데, 고작 20세기 초에 지어진 시구(詩句)에 대해서는 신랄한 비판이 이어지고 있으니,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말에 들어온 외래 요소에 대해서 문제 제기를 하려면 적어도 그러한 요소가 우리말의 역사 속에서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정확히 파악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단지 이웃 나라에서 활발하게 사용한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말이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요소를 외래적인 요소라고 단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언어에는 보편성과 개별성이 있다. 보편성은 대부분의 언어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성질이고 개별성은 특정 언어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성질이다. 그런데 주어적 속격은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언어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요소에 속한다. 영어의 예를 들어 보자.
I want to see his drawing.
위의 문장은 중의성을 띠고 있다. 바로 ‘his drawing’ 때문인데, 이 표현 자체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먼저 ‘그가 가지고 있는 그림’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를 ‘그림’의 소유자로 보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그가 그린 그림’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형식적으로는 ‘his’가 ‘drawing’을 꾸미고 있지만 실제로는 ‘drawing’의 주어가 ‘his’인 셈이다. 이 경우가 바로 앞서 논의했던 주어적 속격에 해당한다.
또 ‘그를 그린 그림’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때는 의미적으로 ‘his’가 ‘drawing’의 목적어가 된다. 이를 목적어적 속격이라고 한다. 이처럼 영어에는 주어적 속격뿐만 아니라 목적어적 속격도 있다.
이렇듯 속격(관형격) 구성은 선행 단어와 후행 단어의 다양한 의미 관계를 담당하며, 이러한 기능은 어느 한 언어만의 특징이 아니라 대부분의 언어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보편적인 특징이다. 영어를 비롯한 서양의 언어가 그러하며 우리말에서도 이미 7세기의 향가 작품에서 예가 발견되니, 주어적 속격을 일본어의 전유물이라고 볼 근거가 희박하다.
20세기 초의 우리 문학 작품을 보면 다음과 같이 주어적 속격의 예가 제법 많이 사용되었다.
길순 잇 쥴을 아르시면 길순의 쥭 것도 르실 터이지……. <귀의성 41> 그 남편의 눈치를 보고 졈순이를 야 죰씨잇게 시침이를 히니 <귀의성 51> 츈쳔집의 고하 모냥이 엇지 그리 불상하던지 <귀의성 92> 사람이 목숨을 버리 것은 사의 제일 셔러 일인 <혈의누 6> 부친의 말는 입을 쳐다보면셔 눈에 눈물이 가득 <혈의누 31> 모란봉 아셔 부모의 곳모르고 어머니를 부르면셔 을 동々 구르다가 <혈의누 32> 모의 삼쳔시든 교육이 업시 무슨 사이 되리오 <자유종 3> 쟝차들은 목숨 산 것만 다히 여겨셔 최씨의 라 로만 터이라 <은세계 21>
위의 예문에서 속격(관형격)으로 사용된 표현들은 의미 면에서 다음과 같이 주격의 지위를 가지며, 이렇게 주격으로 바꾸어 놓아야 문장이 보다 자연스러워진다.
길순의 쥭 것 → 길순이 죽는 것 그 남편의 눈치 → 그 남편이 말하는 눈치 츈쳔집의 고하 모냥 → 춘천집이 고생하는 모양 사의 제일 셔러 일 → 사람이 제일 서러워하는 일 부친의 말는 입 → 부친이 말하는 입 부모의 곳 → 부모가 간 곳 모의 삼쳔시든 교육 → 맹모가 삼천하시던 교육 최씨의 라 로만 → 최씨가 하라는 대로만
물론 이러한 표현들은 일본어의 영향과는 거리가 멀다. 7세기 무렵의 향가 작품에서 발견되는 주어적 속격의 맥락이 20세기 초의 문학 작품에까지 이어져 오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현재는 이러한 주어적 속격이 매우 어색하게 느껴진다. 예전에는 ‘나의 좋아하는 음식’, ‘나의 사랑하는 책’이라는 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내가 좋아하는 음식’, ‘내가 사랑하는 책’이라고 해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바로 이 점이 주어적 속격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킨 직접적인 원인이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주어적 속격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표현이었다. 그러던 것이 어느 순간부터 어색하게 여겨지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내부적으로 통사적 구성에 대한 선호도에 변화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는 국어의 역사적인 변천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는 흔한 일이다. 예컨대 예전에는 ‘먹어 있다, 보아 있다’와 같이 타동사가 보조용언 ‘있다’와 결합하는 구문이 자연스러웠는데, 지금은 매우 어색하게 여겨진다. 또 예전에는 ‘A와 B와 C와를’처럼 마지막에 열거되는 명사 뒤에 ‘와/과’가 결합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A와 B와 C를’과 같이 마지막 명사 뒤에는 조사 ‘와/과’를 결합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에 가능했던 구문이 외래 요소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무턱대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주어적 속격도 마찬가지다. 천 년이 넘게 사용되었던 구문이 어떠한 이유로 쇠퇴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 우리가 주어적 속격을 어색하게 여기는 것은 국어의 내적 변화에 의한 것이지 주어적 속격 자체가 일본어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1920년대는 주어적 속격이 자연스럽게 사용되던 시대다. 지금은 ‘엄마의 입던 옷가지’가 어색하게 들리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이러한 주어적 속격 표현이 아무 거리낌 없이 사용되었다. 따라서 1926년에 발표한 시의 특정 표현에 현재의 기준을 무리하게 적용하여 큰 잘못이 있는 것처럼 정죄(定罪)하는 것은 옳지 않다. 주어적 속격은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전혀 문제될 것이 없고 또 일본어의 영향을 받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나의 살던 고향’을 ‘내가 살던 고향’으로 바꿀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우리말을 아름답게 가꾸고 바르게 사용하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의 노력에는 찬사를 보내지만, 정확한 사실을 토대로 하지 않은 왜곡된 주장에는 학자의 양심을 걸고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지 않을 수 없다. 누구보다도 우리말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말에 대한 왜곡된 지식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짧은 생각을 펼쳐 보았다. ¶ |
- 네이버 블로그 < 윤문공방 > 뜨락내음 님의 글 중에서 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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