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은’을 위한 변명(2)

2014. 9. 10. 14:55글씨쓰기






       


'나의 살던 고향은' '내가 살던 고향은'(2)  글의 논리 / 문장강화 

2010/11/28 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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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던 고향은’을 위한 변명

 

1. 들어가는 말

<말과글> 122호에 주목할 만한 연구물이 실렸다. ‘나의 살던 고향’이일본식 표현이므로 ‘내가 살던 고향’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기존 주장에 이론을 제기한 글이다. 우선 세종대왕이 직접 썼다는 월인천강지곡, 석보상절에도 ‘나의 살던 고향’과 같은 주어적 속격 구문이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한마디로 주어적 속격이 일본어투가 아니고 우리의 고유 표현이라는 것이다. 필자인 이동석 교수는 “천 년이 넘게 사용되었던 구문이 어떠한 이유로 쇠퇴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 우리가 주어적 속격을 어색하게 여기는 것은 국어의 내적 변화에 의한 것이지 주어적 속격 자체가 일본어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다.”라고 결론 지었다. 이 견해에 따르자면 주어적 속격이 일본식 표현이라는 일각의 주장은 타당성이 재검증돼야 할 것 같다.

 

사실 한국어나 일본어는 어법 구조가 같기 때문에 표현 기법도 비슷하다. 다만 어느 특정 표현은 어느 나라가 더 발달했다는 식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단어가 아닌 구문 표현을 놓고 한국어와 일본어 사이에서 원조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해 보인다. 이동석 교수가 <말과글> 123호에서 제기했던 ‘에의’ ‘에서의’ 역시 이런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학계에서는 현대 우리말의 주어적 속격 현상을 두 가지 측면에서 바라보는 것 같다. 첫째는 그것이 우리의 고유 표현이라는 점에 무게를 두는 입장이다. 이는 일본어 영향론을 배제하는 쪽이다. 둘째는 그것이 고유 표현이긴 하지만 이미 중세 때 사라졌고, 나중에 일본어의 영향을 받아 다시 생겨났다는 입장이다. 이는 일본어 영향론을 인정하는 쪽이다.

이는 해석하기 나름이거니와 일본어 영향론을 받아들이기에는 석연찮은 점이 하나 있다. 만약 ‘나의 살던 고향’이 일본어투라면 우리 말투에 해당하는 ‘내가 살던 고향’으로 바꾸어야 할 텐데, 그것이 가당한가 하는 점이다. 본고는 이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양자의 차이점을 알아보고, 주어적 속격이 우리말 속에 어떤 형태로 발현되는지 살펴본다.

 

2. 주어적 속격이 필요한 표현

 

‘나의 살던 고향’과 ‘내가 살던 고향’을 놓고 보면 후자가 우리말다운 표현이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나의 살던 고향’은 무조건 ‘내가 살던 고향’으로 바꾸는 게 좋을까. 그렇지는 않다. 둘은 뉘앙스가 다르다. 아래 예문을 보자.

 

(가) 조국이여, 나의 사랑하는 조국이여.

(나) 조국이여, 내가 사랑하는 조국이여.

 

(가)와 (나)는 의미 차이가 뚜렷하다. (가)의 ‘나의 사랑하는 조국’은 관심의 초점이 ‘사랑’이다. (나)의 ‘내가 사랑하는 조국’은 관심의 초점이 ‘나’이다. 우리는 흔히 (가)처럼 표현할 뿐, (나)처럼 표현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관심의 초점이 ‘사랑’이라는 점 외에 (나)의 경우 화자가 ‘나’이므로 ‘나’에 또다시 관심의 초점을 둘 필요가 없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이것 하나만 보더라도 주어적 속격인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네 언어에서 자연스럽게 구사되는 표현임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예문을 보자.

 

(다) 나무의 자라는 속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라) 나무가 자라는 속성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 그녀의 재산보다는 그녀의 나를 사랑하는 마음에 끌렸다.

(바) 그녀의 재산보다는 그녀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에 끌렸다.

 

두 묶음으로 된 각각의 문장을 보면, 우선 (다)와 (라)는 언뜻 보기에 같은 뜻을 지닌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다)는 ‘나무의+자라는 속성’이라는 의미 구조를 지니고, (라)는 ‘나무가 자라는+속성’이라는 의미 구조를 지닌다. 따라서 두 문장은 전달하려는 뉘앙스가 다르다. 물론 그 차이를 정확히 집어내기가 쉽지는 않다. 한편 이 문장에서는 한 가지 더 생각할 만한 게 있다. (라)의 경우 ‘나무가’와 ‘것이’가 겹쳐 나온다. 겹주어 형태여서 흐름이 좋다고 할 수만은 없다.

 

(마)와 (바)는 구문의 차이가 더 크다. (마)는 ‘그녀의 재산’과 ‘그녀의 마음’이 대구를 이룬다. 단, ‘그녀의 마음’은 중간에 ‘나를 사랑하는’이라는 말이 끼어들었기 때문에 완전한 대구 형태는 아니다. 이 문제를 접어둔다면 구문의 완성도가 높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바)는 이와는 다른 구조다. ‘그녀의 재산’과 ‘그녀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이 적절한 대구를 이루지 못한다. 그러므로 의미구조를 파악하기도 쉽지 않다. 이 구문은 완성도가 현저히 떨어진다.

 

이상의 관점에서 소결론을 얻어 보자. ‘나의 살던 고향’을 ‘내가 살던 고향’으로 바꾸는 것은 현대 우리말의 어법 구조를 고려할 때 수긍할 여지가 충분하다. 하지만 (다)와 (라)의 구문을 비교하면 양자 사이에 뉘앙스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마)와 (바)를 놓고 보면 구문의 구조상으로 양자가 1 대 1 변환되지 않는다. 이런 이유에서 주어적 속격 구문을 주어 구문으로 변환시키는 문제는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

 

3. 주어적 속격을 위한 변명…가분수형 관형어

 

(가)이곳이 나의 살던 고향이다.

(나)이곳이 내가 살던 고향이다.

 

(가)는 부자연스럽고, (나)는 자연스럽다. 아마도 (가)와 같은 문장 형태를 근거로 삼아 주어적 속격이 우리말답지 않다고 할지 모른다. 그런데 다음 문장을 살펴보자.

 

(다) 그녀의 비 맞은 모습이 아름답다.

(라) 그녀가 비 맞은 모습이 아름답다.

 

(다)는 주어적 속격을 사용했고, (라)는 주어적 속격을 주격으로 변환시킨 것이다. (라)가 (다)보다 자연스럽다고 하기는 어렵다. (라)는 흐름이 어색하다. 어색한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주격조사 ‘이/가’가 겹친 겹주어 형태이기 때문이다. 겹주어는 우리말에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기는 하지만 음운충돌 현상을 빚는다. ‘도둑이 제 발이 저린다’보다는 ‘도둑이 제 발 저린다’가 선호되는 것도 이런 현상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라)와 같은 표현을 만나면 대주어(전체주어)를 그대로 두고 소주어(부분주어)를 바꾸고자 하는 심리가 생겨난다. (다)가 그러한 예다.

 

(라)가 어색한 둘째 이유는 주어를 수식하는 관형어가 늘어지기 때문이다. 이를 가분수형 관형어라고 이름 붙일 수 있겠다. 가분수형 관형어란 관형어 안에 주술구조, 목술구조 등이 있는 형태다. 관형어는 명사를 수식하는데, 그 수식하는 말이 주술구조나 목술구조로 되어 있다 보니 글이 늘어지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수식하는 말은 간단할수록 좋다. 절보다는 구, 구보다는 단어를 수식어로 삼아야 흐름이 부드럽다. ‘발이 닿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라는 표현에서는 ‘발’에 붙은 조사를 생략하는 게 더 낫다. ‘비가 오는 날에는 빈대떡을 부쳐 먹는다’에서도 주격조사를 없애고 ‘비 오는 날’로 하면 ‘비 오다’가 한 단어처럼 느껴져 뒷말을 수식하기가 한결 편해진다.

 

결과적으로, 늘어짐을 방지하려면 조사를 생략하거나 ‘의’라는 관형격 조사를 넣어 수식구조로 만드는 게 좋다. 이렇게 되면 어휘 간 긴밀도가 높아진다. 예컨대 위의 예문에서 ‘비 맞은 모습’은 본래 ‘비를 맞은 모습’로서 목술구조인데 목적격 조사 ‘를’을 생략하여 긴밀도를 높였다. 이런 현상은 우리의 언어 생활에서 매우 많이 나타난다. ‘앙꼬가 없는 찐빵’은 ‘앙꼬 없는 찐빵’으로 ‘번지가 없는 주막’은 ‘번지 없는 주막’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물론 가분수형 구조라고 해서 늘 주격조사를 생략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해당 주어가 관심의 대상인 경우에는 넣어주는 게 낫다. 예를 들면 '비가 안 오는 날도 있네'와 같은 꼴이다.

 

3. 나가는 말

 

주어적 속격이 일본어투냐, 우리의 고유 어투이냐 하는 문제는 관심거리가 되기에 충분하다. 우리나라 사람은 일본 알레르기가 심해서 일본 것이라면 일단 피하고 보려는 심리가 강하기 때문이다. 주어적 속격 역시 일본어투라는 혐의 때문에 사용을 꺼리는 경향이 많았다. 하지만 이상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그것이 일본어투인지 아닌지를 떠나, 어법이나 의미 구조 측면에서 불가피하게 사용해야 할 때가 있다.

 

언어를 다룰 때는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특정 언어 현상을 피하려 할 때는 대안이 되는 언어가 그것을 완벽하게 대체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주어적 속격도 이런 관점에서 접근할 만하다. 우리말의 미묘한 뉘앙스를 고려하건대 주어적 속격이 지니는 글맛을 외면할 수 없는 것이다. 다만 이 표현은 현대에 그리 많이 쓰이지 않고, 열에 여덟 아홉은 관형절로 바꾸어도 무리가 없다는 점을 고려하여 선별적으로 사용하는 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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