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한국 전통차 태동기의 산파역 도범스님을 만나다

2015. 4. 16. 00:05차 이야기

 

 

 

 

 

      

동아시아 차문화 연구소 (東亞細亞 茶文化 硏究所)

 

 

[ 연구소 소식 ]

[인터뷰] 현대 한국 전통차 태동기의 산파역 도범스님을 만나다

     - "차 법제는 스님들, 차 문화는 명원" - (미디어붓다, 2015.1.6)

 

 

[인터뷰] 현대 한국 전통차 태동기의 산파역 도범스님을 만나다

“백자다기는 토우, 분청다기는 천한봉, 청자다기는 해강 선생이 최초 제작”

 

 

   지난해 12월 21일부터 23일, 2박3일 간 도범 스님을 취재하기 위해 스님과 함께 제주에 머물렀다. 도범 스님은 우리나라 전통차의 역사와 관련, 밀착취재를 해야 할 많은 경험과 이력을 갖춘 분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기자는 스님과 함께 제주에 머물면서 스님의 살아오신 이야기를, 특히 차와 관련된 소중한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 전통차의 근현대사의 기준이 될 만한 스님의 이야기를 게재한다. <편집자>

 

   도범 스님과 함께 제주에 도착하던 날, 제주에는 많은 눈이 내렸다. 제주도인데도 날씨가 몹시 찼다. 제주에서 눈이 오는 일이야 놀랄 일은 아니지만, 서귀포의 해안가에 내린 눈이 녹지 않고 다음날 아침까지 쌓인 것은 근 30년 동안 보지 못했던 일이라고 제주 사람들은 입을 모았다.

   도범 스님과의 2박3일 밀착취재를 하게 된 배경은 도범 스님이 우리나라 전통 차의 현대사에 산 증인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해 11월 15일 국립중앙박물관 소강당에서 성균관대학교와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주관으로 열린 <21세기 전통차 진흥을 위한 대토론회 ‘전통차 문화의 의미와 전망’>을 취재하면서 도범 스님의 우리 전통차 역사에서의 핵심적 위상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두루 알다시피 우리나라 전통차계는 소속 단체별로, 또는 각자의 입장 별로 법제 및 차의 역사 등에서 제 각각의 견해와 주의주장이 난무하고 있고, 따라서 보다 객관적인 시각에서의 근현대 우리 전통차의 역사를 정리할 필요성이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도범 스님은 우리나라 전통차 문화가 태동하던 시기에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했고, 따라서 차를 하는 차인들 사이에서 현대 전통차의 역사를 올곧게 정리할 수 있는 장본인으로 회자되었던 분이기도 하다.

 

   지난 해 11월 15일, 대토론회에서 도범 스님은 ‘현대차 문화 운동 태동기의 제반 문제’라는 부제로 <70년대 차 문화 운동 태동기에 얽힌 인연>이라는 기고문을 발표했다. 이 기고문에서 스님은 70년대 차 문화가 어떻게 갱생되었는지, 명원 김미희 여사와의 인연은 어땠는지, 해인사를 방문했던 박정희 대통령과의 일화, 박동선 회장과의 인연 등에 대해 생생한 기억을 공개해 차계의 이목을 모았다. 그러나 시간적인 한계 등으로 스님의 이야기를 듣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도범 스님과의 2박3일은 그래서 더욱 더 소중한 시간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아이투무역 김영희 대표이사의 배려와 후원으로 가능했음을 아울러 밝혀둔다.

   스님과의 인터뷰는 주로 호텔 방에서, 그리고 제주시내를 투어하면서 간헐적으로 이루어졌다. 혹시 민감한 내용이 있을 법한데도 스님은 솔직하고 담담하게, 그리고 친절하게 답변을 해주셨다. 우리나라 전통차의 역사를 정리하는 의미도 있다는 기자의 말에 공감하셨기 때문이다.

 

 

 

도범스님

 

-스님께서는 어떻게 차를 만났습니까?

 

   “출가를 해서 스님이 된 후에 우리 전통차를 처음 만났습니다. 1968년 경 은사 일타 스님을 시봉하면서 스님께서 마시는 차를 얻어 마시며 차를 알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차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은사 스님은 당시 차를 마시는 몇 안 되는 스님들 중 한 분이셨습니다.”

 

-출가 전에는 우리 차를 전혀 몰랐습니까? 그리고 다른 스님과 달리 차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출가 전에는 차에 대해 전혀 몰랐습니다. 차는 은사(일타) 스님을 모시면서 처음 접했고, 자연스럽게 배웠습니다. 제가 차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일종의 애국심이 바탕이 되었고, 또 하나 이유는 절에서 예불 때 올리는 다게(茶偈)에 대한 의아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때는 박정희 대통령이 새마을 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할 시기였는데, 이상하게도 우리 전통차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적었습니다. 전국 도처에 있는 다방들이 간판에는 다방, 다실이라는 글씨를 적어놓고 정작 차는 없고, 커피를 주로 파는 게 납득이 안 되었지요. 그래서 우리 전통차를 되살려야겠다는 마음이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또 잘 아시겠지만 절에서 예불 때 올리는 ‘아금청정수 변위감로다 봉헌삼보전 원수애납수(我今淸淨水 變爲甘露茶’ 奉獻三寶前 願垂哀納受)라는 게송을 들을 때마다 부처님 전에 차 대신 물을 올리면서 이런 게송을 하는 것이 맞지 않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차에 대해 관심을 갖게 했지요.”

 

-은사 일타 스님께서 마시던 차는 어떤 차였습니까?

 

   “일타 스님께서는 조태연 씨의 차를 주로 드셨고, 일본차나 대만차도 이따금씩 드시는 것 같았습니다. 일본차 가운데 ‘옥로(玉露)’ 같은 것은 값이 비싸고 귀해서 많이 드시지는 않으셨습니다. 조태연 씨 차는 나중에 보니까 통도사 극락암의 명정 스님도 자주 갖다가 드시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타 스님께서 조태연 씨의 차를 드셨고, 명정 스님도 조태연 씨의 차를 주로 즐겼다는 말씀이 나왔으니 말인데, 당시 차인들이 즐겨 마신 차가 어떤 것이었는지 기억나는 대로 말씀해주십시오.

 

   “효당 최범술 선생의 차는 김종희 교수랑 같이 다솔사로 찾아 가서 뵙고 처음 맛보았습니다. 당시 효당 선생은 김종희 교수에게 ‘토우’라는 호도 주었고, 차도 한 통 주셨습니다. 저는 봉다리(봉지)에다 차를 주셨는데, 김종희 씨에게는 남양분유 깡통에 차를 넣어 주셨습니다. 그때 처음 효당차를 맛보았던 것이지요. 차맛이 참 좋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효당차의 맛을 구체적으로 기억하실 수 있습니까?

 

   “증차 맛이었습니다. 증차 특유의 부드러움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색깔도 녹색이었구요. 그러나 그 뒤로는 효당차를 구할 길이 없어서, 주로 조태연 차를 마셨고, 지금도 조태연 차를 주로 마시고 있습니다. 당시에 스님들은 주로 조태연 씨 차를 마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조태연 선생은 사실 차를 잘 모르셨습니다. 차의 이름은 조태연 차였지만, 만들기는 그분의 부인 되는 분이 만들었지요.”

 

-그 외에 다른 차는 없었는지요?

 

   “그 뒤 한참 후에 우헌 최덕인, 석란 노학경, 춘설 허백련 선생의 차를 마시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춘설도 차를 직접 만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는 차를 뜨겁게 우려내 마셨습니다. 춘설도 일본에서 차를 배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보통 일본차는 식혀서 우려내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춘설은 뜨겁게 차를 우렸군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뜨겁게 우리고, 식혀서 우리는 것이 일본차냐 아니냐를 구분 짓는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춘설은 일본차를 뜨거운 물로 빨리 우려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렇게 하면 뜨겁게 우렸을 때의 텁텁한 맛을 줄일 수 있으니까요.”

 

 

 

-지금부터는 스님께서 출가 초기에 차를 만나고, 차를 배우고 하던 시절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60년대 후반, 70년대 초중반까지 스님께서 해인사에서 보냈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시지요.

 

   “오래 전의 일이라 제 기억의 순서에 두서도 없고, 기억이 또렷하지도 않지만, 기억나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972~73년대 초, 해인사 강원에서는 외전(外典, 불경이 아닌 다른 서적)을 도입했습니다. 전통적인 내전(內典) 외전이란 전통강원에서 배우는 과목 이외에 영어, 국어 등 외부의 학문도 배워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돼 최초로 외전과목을 신설한 것이지요. 그때만 해도 대학을 나온 스님들이 많지 않아서 대학출신 스님들에게 외전 강의를 맡겼습니다. 저는 국어를 가르쳤고, 여연 스님은 학인 신분이면서도 영어를 가르쳤습니다. 성균관대 출신 난아 스님도 외전을 강의했습니다. 저는 당시 강원에 가지 않고 선방으로 바로 갔습니다. 은사스님께서 책을 보지 못하게 하시고 선을 하라고 워낙 강하게 재촉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외전 강의에 응한 이유는 강사 각성 스님의 강의를 청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 스님(일타스님)은 경을 보지 못하게 하셨지만, 각성 스님의 강의는 꼭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지요.”

 

-여연, 선혜 스님 등 오늘날 차를 하시는 스님들 중 당시 해인사 강원에서 공부한 학인들이 있는데, 당시 그 분들은 어떻게 차를 배웠습니까? 또 당시에 그 스님들도 차에 대해 잘 알고 있었는지요?

 

   “당시 절집에서는 대학 나온 사람을 시기하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학을 나온 스님들이 이따금씩 분을 못 참아서 내방에 와서 씩씩거리는 일이 몇 번 있었는데, 그럴 때면 저는 차를 내어주면서 그 스님들을 달래주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 스님들이 차를 알았는지, 몰랐는지 잘 알 수가 있지요. 결론부터 말한다면 당시 스님들은 차를 몰랐습니다. 해인사 산내 암자인 희랑대의 스님이 시금치를 우려 주면서 이 차는 도범 스님이 준 차라고 하면 그 스님들은 ‘(도범스님이 준 차이니) 역시 차 맛 좋다’고 말했을 정도였으니까요. 시금치를 우려낸 맛과 차 맛을 구분하지 못한 것이니 차를 알았다고 할 수 없지요. 당시의 강원 학인스님들 가운데 차를 아는 학인들은 없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 스님들이 해인사 강원시절 다솔사에 계시던 효당에게 찾아가 차를 배웠다는 말도 일각에서 있던데요. 사실이 아니겠네요?

 

   “아닙니다. 그 당시 비구들은 효당에게 차를 배울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는 비구·대처의 갈등이 심했던 시기였습니다. 대처 측이었던 효당은 비구들을 아주 싫어했습니다. 만나주지도 않았고 아주 쌀쌀맞게 대했했습니다. 그 때 효당이 사용한 찻통은 주로 남양분유 깡통이었습니다. 효당은 원효스님 원고가 있다며 이 원고를 책으로 낸다고 했는데 돈이 없어서 못냈습니다. 찻통을 구할 수 없을 만큼 형편이 어려웠지요. 효당은 부산의 대각사를 놓고 경우 스님과 다투고 그랬습니다. 비구들을 만나줄 효당이 아니었지요. 그 스님들이 효당을 처음 만난 것은 효당이 말년에 서울 삼청동에서 살고 계실 때, 저와 함께 가서 뵌 것이 처음입니다.”

 

-그렇다면, 그 스님들이 효당에게서 차를 배웠다는 말을 왜 나왔을까요?

 

   “아, 그것은 이런 것 같습니다. 그 스님들이 효당에게 직접 차를 배운 적은 없지만, 효당 아래에서 차를 만들었던 아주머니들을 모아서 전라남도 보성의 류종선 씨 소유의 차밭에 가서 차를 만든 일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여러 사람이 잘 수 있는 긴 방이 있는 집이 있었지요. 당시 여연, 선혜, 선문, 선견 스님이 저와 함께 갔습니다. 그때가 차인회 발족한 이듬해 봄, 그러니까 1979년 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럼 왜 보성까지 가서 차를 만들었는가? 이유는 당시 마실 차가 부족했으니까요. 차인회는 발족을 시켜놓았는데 마실 차가 없었거든요.”

 

-당시 명원 김미희 여사님께서 전통 차 복원에 큰 관심과 힘을 기울였다고 들었는데, 그 이야기를 들려주십시오.

 

   “제가 명원 김미희 여사를 만난 시기는 1972~3년도 쯤(외전 강의할 때) 아닌가 합니다. 김미희 여사님을 저는 불국생 보살이라고 불렀는데, 당시 불국생 보살님께서 준 자금으로 차와 관련된 조사를 많이 할 수 있었습니다. 보살님을 처음부터 만난 것은 아니고, 당시 쌍용가(쌍용그룹 오너)를 위해 기도를 해주시는 명심화라는 기도보살님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 보살님께서 해인사 법당에서 기도하고 가시면서 마침 제 방(관음전)에 들러 제가 우린 차를 한 잔 마시고 서울로 올라가셨습니다. 명심화 보살로부터 ‘해인사에서 차 한 잔 얻어먹고 왔다’는 말을 들은 불국생 보살님께서 차를 내어 준 스님 좀 모시고 오라고 해서 일주일 만에 해인사로 다시 내려오셨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제가 명심화 보살을 따라 서울로 올라가서 만났는데, 그것이 명원 김미희 보살님과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명원 김미희 여사님의 당부로 당시 차와 관련한 조사를 했다고 들었는데요.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박정희 대통령의 해인사 방문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해인사 왔을 때에는 육영수 여사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 그 이듬해였는데 그때 해인사 주지를 맡았던 현경 스님께서 저를 보고 차를 준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안내는 무아 스님이란 분이 담당했고, 차는 제가 우렸습니다. 관음전에서 차를 대접했는데, 관음전은 경반 스님들이 공부하며 자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방을 서둘러 비우고 박 대통령을 맞이했습니다. 차를 마시는 자리에 성철, 일타 스님은 암자에서 내려오지 않으셨고, 혜암 스님만 참석했습니다. 차는 대통령의 가족에게만 드렸는데, 4잔을 내어 주니까, 감식관이 먼저 시음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잔이 부족해 한 잔을 더 우려냈습니다. 차를 우릴 때는 시간이 좀 걸리니까, 그때 제가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차는 한국 전통차입니다. 그런데 신라부터 조선 후기까지 전해 내려오다가 지금은 거의 그 맥이 끊기고 절에서는 몇몇 스님들만이 마시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전국적으로 다방이 없는 곳이 없는데, 다방에서 다를 팔지 않고 커피를 주로 팔고, 쌍화탕이나 홍차 같은 것을 팝니다. (그때 홍차는 망했을 때, 홍차가 수요가 딸리니까 홍차에 맹감잎 등을 섞어 팔다가 대서특필되고 그랬다고 도범스님은 회고했다) 절에서는 떡을 먹을 때 차를 마시고, 차 마실 때 다식(茶食)도 곁들여서 먹습니다. 절에서 먹는 떡을 절편이라 하고, 절편이나 다식은 문양을 찍어서 먹습니다. 문양 중에 제일 많은 것이 연꽃 문양입니다. 그 다음은 음양을 상징하는 원앙새, 꽃사슴, 나비 한 쌍 등의 음양문양이 많습니다. 세 번째는 십장생 문양이 많습니다. 옛날 사람들도 오래살기를 원했고, 또 오래 사는 것만 원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고 편안하게 복과 덕을 갖추고 살기 위해 강령, 수복, 복덕 등의 문양이 많습니다. 그 다음에는 오행사상에서 나오는 문양이 많습니다. 그래서 떡을 먹되 떡만 먹지 않고, 차를 먹되 차만 마시지 않고 종교를 상징하는 의미 있는 떡을 먹고, 예술을 먹고, 철학을 먹고, 예의와 낭만과 멋을 먹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상징하는 멋을 마신 것입니다. 우리의 전통차를 다시 복원해서 국민에게 계몽운동을 해서라도 우리의 멋과 낭만과 전통을 전통 차를 통해 회복하는 운동을 하면 어떻겠습니까?’

 

   차를 우려내며 대통령께 이런 말씀을 드렸고, 박 대통령은 차를 한 잔 마시더니, ‘군에 있을 때 차를 한 잔 마셔보았다. 좋은 말씀이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추진할 대안을 마련해서 제출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쌍용가의 명원 김미희 여사에게 가서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또 해인사 주지 스님에게도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대안이 없었습니다. 해인사 주지를 비롯해서 절의 스님들은 대안을 만들 엄두는 내지않고, 도범스님이 국어강사를 하고 있으니, 그런 일은 국어강사가 다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시면서 미뤘습니다. 그런데 그 때 마침 미국에서 돌아온 박동선 씨를 만난 것입니다. 박동선씨에게 이런 전후 사정을 말씀드렸고, 문화예술, 특히 우리나라 전통문화에도 관심과 조예를 갖추고 계셨던 박동선 씨를 주축으로 차인회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때 김미희 여사께서 전국의 차밭 현황, 차를 법제하고 즐기는 스님들은 어떤 분들인가를 조사해달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차 뿐 만이 아니라 골동품에도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관심이 아마도 차기를 고안하는 배경이 되었을 텐데요.

 

   “제가 출가 전부터 골동품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골동품을 모으는 취미가 있었지요. 쌍용가 명원 김미희 보살님을 알기 전부터 골동품에는 관심이 있었습니다. 1969~1970년 후반쯤에 제가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에서 옛날 질그릇으로 만든 숙우(熟盂) 모양의 토기(가야시대 토기 추정)를 보고 구입했습니다. 저는 이 그릇을 ‘귀사발’, 또는 ‘물식힘그릇’이라고 불렀습니다. 나중에 한국에 와보니까 숙우(또는 수구)로 부르고 있더군요. 그리고 이보다 조금 먼저 전라북도 정읍에 있는 한 가정집에서 다관(또는 다병) 모양으로 된 간장그릇으로 사용하던 토기를 구입했습니다. 이 때가 1970년 쯤 전반쯤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이 그릇들을 계명대 교수였던 김종희 씨에게 잘 만들어 달라고 의뢰했습니다. 김종희 교수는 교수로 불렸지만, 기술을 가르치는 교수였습니다. 그분은 자기를 만드는 실력이 매우 뛰어났습니다. 일본에서 도자기 만드는 방법을 배워 오신 분이지요. 그러니까 오늘날 차인들이 널리 사용하는 다기는 제가 김종희 교수에게 의뢰해서 처음 만들어진 것이 처음이지요. 그 때가 70년대 후반이나 71년도 초반쯤 됩니다. 김종희 교수에게는 마상배(밑부분에 받침이 없이 둥글둥글한 것으로, 말을 타고 갈 때 그물 안에 넣고 다니는 물병 용도의 도자기)도 역시 함양 안의에서 구입해 건네주기도 했습니다. 그 당시 최초로 만든 다기는 얼마 전 전통차 진흥을 위한 대토론회를 주관한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박동춘 소장에게 드렸습니다. 안의에서 구입한 귀사발(숙우)은 부산에서 고려민예사를 하던 금당 최규용 선생이 일본사람들에게 팔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가 자꾸 달라는 것을 주지 않았더니, 나중에 은사 일타 스님까지 동원해서 끝내 가져가더니 그렇게 됐습니다. 안타깝습니다. 제가 끝까지 보관했어야 했는데, 은사스님께서 ‘중이 뭐 물건에 그렇게 집착하냐’고 야단을 쳐서 그만 지키지 못했네요.“

 

-다관과 숙우 이외에 다른 것들은 만들지 않으셨나요?

 

   “아닙니다. 더 있지요. 제가 구리로 쓰는 찻잔 받침대를 처음 고안하셔서 부산에 사는 김수복 선생에게 제작 의뢰했습니다. 차꽃 모양의 받침이었지요. 김수복 씨도 차를 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은 붓글씨 쓰는 서예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사업이 잘 안되어서 이것을 해볼까 저것을 해볼까 고민하던 하던 중이었는데, 제가 연구해서 차꽃 모양의 구리 받침 제작을 의논하니까, 이것을 가지고 사업을 해볼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김수복 씨는 찻잔 받침대를 많이 만들어서 전국적으로 보급을 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이 찻잔 받침대가 부산에서 주로 판매가 되었습니다. 부산차인회를 중심으로 어느 정도 인기가 있었습니다. 부산은 서울 다음으로 차 마시는 분이 많아 가능했습니다.”

 

-부산에서도 차인회가 결성되었네요?

 

   “그렇습니다. 장명식 씨라고 부산제분 사장을 하시던 분이 있었습니다. 이분은 경주 최 부잣집 네째 사위이기도 합니다. 차인회를 결성하기 전에는 불교, 유교계통으로 인연이 넓었던 분입니다. 그때 그 분과 같이 차를 했던 분이 안 회장(목화가구 백화점 회장), 일념회 회장 대원행 보살의 남편 최경선 씨, 국제신보 기자 김응문 씨 등 지금 나이 76살 또래 그룹들이 부산 차인회를 만들었습니다. 장명식씨가 첫 회장이 되었고요. 이분은 현재 서초동에서 살고 계십니다. 이 분들이 부산에 차붐을 일으킨 주역들이지요. 이분들을 중심으로 차 시연회도 열고, 세미나 같은 것도 하고, 범어사 주지 덕명 스님과 범어사 강사 백운 스님 등을 모셔 차 강의를 듣기도 했습니다. 스님들은 차를 한 분이라기보다는 차에 관심이 있었던 분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덕명 스님은 차 행사가 열리면 인사말씀을, 백운 스님은 불교와 차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시고 그랬습니다. 서울이나 부산이나, 당시 불교가 아니었으면 차 문화는 복원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불교가 전통차를 지키지 않았다면 커피 등 외래문화에 다 밀려버렸을 것입니다.”

 

-명원 김미희 보살님으로부터 차와 관련한 조사나 실태파악 등에 대해 부탁을 받으셨는데, 그 결과에 대해서 말씀도 해주시지요.

 

   “불국생(명원 김미희 여사) 보살과의 인연으로 제가 봉암사 주지를 살 때 불사에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불사금이 필요해서 전화를 드리면 불국생 보살님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오세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찾아가면 차도 마시고 차 이야기도 하고 시주금도 주고, 알부민 주사도 주고 그랬습니다. 불국생 보살님은 당시에 드물게 차실까지 집안에 두고 계셨습니다. 불국생 보살님은 제게 어느 스님이 차를 마시는지? 차밭은 어디에 있는지? 법제, 즉 차를 만드시는 스님은 누구신지? 등에 대해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해방 전에 출가하신 스님들은 아마도 일본 스님들에게서 차를 배우신 것 같다는 말씀을 드렸지요. 불국생보살님은 저에게 당신이 궁금한 것에 대해 조사를 해줄 수 있느냐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답사와 조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불국생 보살(명원 김미희 여사)의 부탁으로 그 당시 차를 하는 스님과 절에 대한 조사를 한 결과가 궁금합니다. 실제로 당시 차밭을 일궈 차를 만들고 마시는 스님들이 계셨나요?

 

   “불국생 보살님의 부탁을 받기 전에도 차에 대한 관심으로 여기저기 답사를 다녔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더 조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스님들의 차에 대한 관심은 그리 높지는 않았습니다. 차밭도 그리 많지 않았지요. 쌍계사 주변으로 경상남도 일부와 전라남북도 사찰 주변은 야생 차밭이 거의 있었습니다. 대흥사에 차가 유명해서 대흥사에 가보았지만 정작 차나무를 보지 못했습니다. 법당 뒤에 차 몇 그루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솔사에는 차밭이 아주 잘 가꿔져 있었습니다. 효당 선생이 잘 관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쌍계사에는 야생 차나무만 있었고, 송광사에서는 차나무를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백양사에도 차나무가 많지는 않았지만 더러 있었고, 장흥 보림사에는 차나무가 많았습니다. 당시 차를 즐겨 마신 스님들은 구례 화엄사의 도광스님, 해인사의 일타스님, 통도사 극락암의 경봉스님 등이셨습니다. 차를 직접 만드시는 스님은 효당과 응송 스님 정도였습니다. 효당의 차는 맛을 보았지만, 응송 스님은 비구를 몹시 꺼려서 가까이서 보지 못했습니다. 두 분의 법제 방법이 확연히 달라 맛이 달랐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제 사제나 후배스님들 가운데 선혜, 태허 스님 등이 차를 한 스님들입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절에서는 구기자차, 오미자차, 결명자차, 보리차 등을 마셨습니다. 선방에서는 구기자차를 많이 마셨습니다.”

 

-응송스님과의 인연은 특별한 것이 없으시다는 말씀이신지요?

 

   “저와 응송 스님과는 특별한 관계가 없습니다. 꺼꾸리 극작가 김봉호씨를 통해서 <동다송>, <다신전>이 그곳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 번 찾아가 뵌 일이 있었고, 그분께서 일지암 복원에 일조를 했다는 것을 아는 정도입니다. 응송 스님은 그 당시 업혀서 올라가서 일지암이 있던 장소를 일러주신 분입니다. 조자룡, 김봉호 씨 등과 일지암을 복원한다고 기왓장 같은 것을 보러 같이 어울려 다녔는데, 그분들 중에 식사 때면 꼭 술과 여자를 부르는 풍류객이 한 사람 있어서 승려신분으로서 불편한 마음이 들어서 그 뒤로 같이 다니지 않았습니다. 김봉호 씨가 번역한 <다신전>, <동다송>을 뒤에 보았는데 아주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의정 스님 같은 분이 도와주었다는 이야기를 풍문으로 들었습니다.”

 

-스님과 춘설 허백련과의 인연은 어느 정도였나요?

 

   “그리 깊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차를 통해 춘설 선생을 만났고, 그 인연으로 당시 만들었던 다기를 선물했고, 그 답례로 그분의 그림도 한 점 받아 가지고 있는 정도입니다.”

 

-다구를 만든 분 가운데 해강 유근형 선생이 계시다고 들었는데요.

 

   “네 제가 다기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선생께서 만들어주시기는 했는데, 청자여서 대중화 될 수 없었고, 게다가 일본식이었습니다. 그나마 제가 가지고 있던 해강 선생의 다기는 해인사에서 여는 팔만대장경 기념행사 때 깨지고 말았습니다. 해강 선생이 만든 다기는 부처님께 올리는 용도의 다기였습니다. 앞서 언급했지만 일본식 청자 다기여서 대중성이 없었지요. 이 시기는 차인회가 만들어지기 전입니다.”

 

 

 

제주 오설록 차밭을 배경으로 아이투무역 김영희 대표와 담소를 나누고 있는 도범스님.

 

-다구를 만든 다른 장인은 없었나요?

 

   “더 있지요. 문경에 사는 천한봉 선생은 분청으로 다구를 만들었습니다. 그 분은 내가 봉암사 주지 시절(70년대 말 79년 경)에 자주 만났습니다. 천 선생이 만든 다구를 놓고 여러 차례 교정을 하면서 마음에 드는 다기가 나올 때까지 만들었으니까요. 천한봉 씨는 나중에 무형문화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다기를 만든 분들과 시기를 정리하면 차인회가 결성되기 직전에 토우 김종희 선생이 백자 다기를 만들었고, 차인회가 결성된 직후에 분청 다기를 천한봉 선생이 만들었고, 또 해강 류근형 선생이 청자로 다기를 만들었다는 것으로 대강 정리할 수 있겠군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해강의 다기는 청자로 만들었고, 일본식이어서 대중성도 없었고, 마음에 들지도 않았습니다. 그나마 내가 간직하고 있던 그의 다기는 깨져서 없어졌지요. 해강은 해인사 부처님께 올리는 다구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둥글둥글 잘 만들었지만 지금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토우 김종희 선생이 만든 백자 다기는 보관을 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이 다기를 보관한 이유는 박정희 대통령이 해인사에 왔을 때 차를 우린 다기라는 점에서, 또 박동선 씨에게도 선물을 했던 다기라는 점에서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이 다기 2세트는 모두 박동춘 선생에게 드렸습니다.”

 

-봉암사에서 주지를 맡았던 시절에도 차를 즐기셨나요?

 

   “그렇습니다. 봉암사에 어둠이 드리우고 달빛이 교교하면, 소연한 삭풍이 문풍지를 타고 울부짓습니다. 그런 밤이면 이슥하도록 공허함이 맴돕니다. 외풍이 있는 방이라 윗목에 다로(茶爐)를 들여놨지요. 그곳에 참숯을 넣고 따끈한 찻물이 항상 유지되도록 철차관을 올려놓습니다. 숯불은 재로 덮여 있을 때는 죽은 듯 묻혀있다가도 인두로 재를 살짝 젖히면 빨간 참숯이 구름 비낀 태양처럼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내 끓어오른 차관을 받침목에 내려 물을 잠재우면서 서두름 없이 차 달일 준비를 하지요. 도전다기(陶煎茶器)에 법제한 차를 넣어 경숙된 물을 붓고 여법하게 우려내어 씻은 찻종에 서서히 따릅니다. 차의 향훈아취가 드맑게 피어오르며 손 모아 찻종을 받쳐들게 하고 반쯤 눈을 감게 합니다. 닫힌 듯 마른 입안에 조금씩 감미로운 차를 음미하니 심회가 통창해지고 무이한 신심이 풀려갑니다.”

 

-산승이 산방에서 차를 달여 마시는 모습을 말씀하시니 한 편의 동양화를 보는 듯합니다.

 

“   청산 첩첩 선방 섬돌 위에 하얀 고무신을 가지런히 벗어놓고 참선에 혼신을 다하며 가끔씩 차 한 종지로 피로를 풉니다. 혼자 마시는 차 시간은 자신과의 대화요 자연의 소리에 귀 밝아지며 모두를 받아들이게 합니다. 지금 어디쯤 내가 가고 있나? 내가 서 있는 곳은 어디이며? 가야할 곳은 어디인지? 한 걸음 성큼 나아간 것도 없고 한 걸음 물러선 것도 없으며 그렇다고 그대로 멈추어 선 것도 아닙니다. 그럴 때면 조주 스님의 차 법문(茶偈)이 떠오릅니다. 법문을 음미하며 차 한 종지로 마음을 쉬는 것이지요.

 

초목 가운데 첫째가는 맛으로 신령하여

조주스님은 항상 수천 명에게 차를 권하였나니

맑은 강물 길어와 돌솥에 달여 전하오니

원하옵건대 망령이여 괴로움의 윤회를 쉬소서.

고혼이여 윤회를 그치소서.

제령이여 안락하소서.

百草林中一味新

趙州常勸幾千人

烹將石鼎江心水

願使亡靈歇苦輪

願使苦魂歇苦輪

願使諸靈歇苦輪”

 

-당시 차를 우릴 때, 차를 넣는 양은 어느 정도였나요?

 

   “아주 조금 넣었습니다. 이유는 차가 귀했거든요. 차를 조금 넣고, 많이 우려먹었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다가 몇 년 시간이 흐른 뒤에 많이 넣어 짜게 마시는 경향이 생겨났지요.”

 

-스님께서는 바퀴가 달린 차탁(찻상)을 고안했다는 이야기도 있던데요.

 

   “네. 그렇습니다. 그 당시 호가 ‘한도’라는 노인이 계셨는데, 서울의 세검정에서 분재를 하면서 사신 분이었습니다. 이 분도 차를 하셨던 분입니다. 이 당시가 1970년도 초반이니까 그 분도 일본식 차를 마셨습니다. 아주 진하게 마시는 편이었지요. 그런데 그 분과 세검정 한 동네에서 괴목을 가지고 여러 형태의 가구를 만드는 분이 있었다. 이름은 기억할 수 없는데, 이 분은 괴목을 썩혀서 긁어내서 여러 가지 다양한 작품들을 다 만들었던 재주가 뛰어난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그때 제가 찻상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는데, 도저히 무거워서 움직일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고민 끝에 이 괴목 찻상에 회전의자 바퀴를 달면 되겠다는 생각을 내서, 바퀴를 사다가 그 분에게 주고 달도록 했습니다. 지금은 바퀴달린 찻상이 많은데, 따지고 보면 그 때 만든 찻상이 바퀴를 단 첫 작품인 셈이네요. 이때 만든 최초의 찻상이 지금도 봉암사에 있을 것입니다.”

 

-당시에 다완(찻잔)의 모양은 어땠습니까? 종지 모양이거나 대접 모양이거나 했을 것 같은데, 지금과 같은 찻잔의 모습은 언제부터 정착되었나요?

 

   “그 당시에도 찻잔 모양은 일정한 것이 없었습니다. 여러 형태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김종희 교수와 찻잔 모양에 대해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찻잔 종류는 수없이 변했습니다. 오늘날의 일반적인 찻잔 모양은 사람들의 선택에 따라 자연스럽게 정착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찻잔 받침은 구리로 차꽃 모양으로 만들었습니다. 구리로 만든 차꽃 모양의 찻잔은 지금도 서울 조계사 앞 명가원이라는 찻집에 가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태허(홍제암) 스님이 만든 차를 담는 깡통 ‘심자한(心自閑)’도 있습니다. 찻통의 이름을 ‘심자한’으로 지은 것은 ‘스스로 차를 마시면 한가해진다’는 의미로 태허 스님의 작명이지요. 심자한이라는 글씨는 진주 비봉로에 살았던, 해인사 해탈문 주련을 쓴 은초 정명수 선생이라는 분이 써주셨습니다. 그 찻통은 홍제암에 태허스님이 갖고 계셨는데, 아마 이 찻통은 지금도 난곡사에 있을 것입니다.. 태허스님이 갖고 계시다가 상좌에게 물려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스님의 말씀을 듣고 있노라니, 정말로 중요한 역할을 하신 분이라는 것을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 역할에 비해 스님의 명성이나 평가가 크지 않거나 다뤄지지 않은 느낌입니다.

 

   “차나무가 하나 있으면, 사람들은 대개 차 꽃이나 차 열매를 원하지만, 저는 뿌리를 더 원합니다. 저는 나서기를 싫어하는 성격입니다. 차나무를 보면서도 ‘나는 앞으로 살아갈 때 뿌리의 정신으로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하곤 했습니다. 제가 이파리나 줄기, 열매가 되어 살아가고자 했다면 아마도 라이벌이 많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뿌리는 라이벌이 없습니다. 보이지 않으니까요. 뿌리처럼 묵묵히 일만하면 그것이 열매도 잎도 만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살다보니 그동안 제가 하는 일에 방해를 많이 받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만약 제가 잘난 체하고 꽃이나 열매가 되려했다면 크게 다쳤을 것입니다.”

 

-박동선 씨가 우리나라 전통차를 알게 되고 차인회 설립의 주역이 된 것도 스님의 역할이 컸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그렇습니다. 제 말이 아니더라도, 박동선 씨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도범 스님이 하도 차를 권해서 차를 알게 되었고, 차인회에도 간여하게 되었다고 밝혔는데,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박동선 씨는 워낙 우리 문화 및 외국 문화에 대한 식견이 높은 분이셨습니다. 내가 처음 만나 차 이야기를 나눴을 때에도 그분은 이미 중국의 차와 일본차, 그리고 대만의 차에 대해서도 훤히 꿰뚫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우리 전통 차 문화의 정립과 발전의 필요성에 대해 설명을 했더니 오래지 않아 함께 하기로 승낙을 하신 것이지요.”

 

-지난 해 11월 21세기 전통차 진흥을 위한 대토론회에서 정승연 다례원 원장이 <현대차 문화 운동의 태동기에 대한 조명>이라는 발표에서 차문화와 차예절에 대한 정립과 홍보에 큰 역할을 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정 원장의 발표에 대해 공감하는 분도 계셨지만, 그렇지 않은 분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발표를 직접 들으셨는데, 스님의 견해는 어떻습니까?

 

   “이런저런 말을 보태면 더 혼란스러워집니다. 다만 정승연 씨가 다소 엉뚱한 발표를 했다고 말하겠습니다. 전통 다례와 법제의 전통을 되살리고자 노력한 분은 불국생 보살님, 즉 명원 김미희 여사셨습니다. 당시의 정황이나 내용을 잘 아는 분들이 정승연 씨가 발표를 하는 내용을 미리 알았다면 아마도 그분은 연단에 올라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말하겠습니다.”

 

-스님께서 어느 날 훌쩍 미국으로 가셨습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요?

 

   “박동선 씨 인연으로 미국에 갔다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속담에 '영국만 알면 영국을 모른다'며 미국에 대한 관심을 일으켜주셨지요. 제가 해인사에 있을 때 미 대사가 해인사를 구경하러 왔는데 마침 안내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 분에게 미국비자를 낼 수 있느냐고 하니까 내주었습니다. 그때가 85년쯤으로 기억됩니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여비를 얻어서 한 3~5개월 있다가, 오니까 미국바람이 불었습니다. 88년도에 파리에 다시 가서 있다가. 올림픽 때 미국단장으로 온 사람이 마침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파리에서 13개월 동안 잘 있다가 돌아와서 바로 미국으로 가겠다는 결심을 하고,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하버드 대학이 있다는 이유로, 교육에 관심이 있어서 보스턴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학교를 다니려니까 숙식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유학생들이 절을 하자고 해서 절을 하기로 했지만, 돈이 부족해서 마침 국내에 있던 집을 팔아서 절을 냈습니다. 매년 내는 모기지가 있어서 지금까지 묶여 있습니다. 미국에 들어간 때는 1990년입니다. 보스턴은 깨어있는 사람들이 사는 동네라고 합니다. 그리고 보스턴의 가로수는 보리수나무가 많습니다. 하버드 앞 빵집에 보리수나무 네 그루가 있는데 유명한 만남의 장소이기도 합니다. 또 대장경을 만든 자작나무가 많습니다. 보스턴이 포함돼 있는 매사추세츠 주는 미국에서 불자가 가장 많은 곳이기도 합니다. 불연(佛緣)이 깊은 도시라고 생각합니다.“

 

-후학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제가 해인사 주지 직무대행 할 때(1983년 경, 지관스님 전) 얼마나 바쁜지 어디로 가서 딱 3일만 쉬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막상 주지 직무대행 자리를 내놓고 나니까 잠도 잘 안 옵디다. 쉬는 것도 금세 싫어지더라고요. 왜? 언제든지 쉴 수 있으니까, 잘 수 있으니까. 흔한 말이지만 돈과 행복과 건강을 다 갖추기는 어렵습니다. 화분이 자주 죽는 이유는 밑받침 때문입니다. 물받이에 물이 고이면 숨이 막혀 있어서 죽는 것이지요. 여기에는 베풀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도 베풀 줄 알아야 합니다. 돈은 자꾸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돌아다니면서 대접을 받으려 하는데, 이것을 가둬 놓으면 사단이 생기는 법이에요. 뭐든지 주고받고 순환하고 하는 것이 좋지, 막아 놓고 쌓기만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오랜 시간 말씀 감사합니다. 끝으로 우리나라 전통 차의 역사를 간단하게 정리해 주실까요?

 

   “이런 저런 말이 많겠지만, 간결하게 정리해보겠습니다. 차인회는 박동선씨 주도로 만들어졌고, 차문화나 차 예의범절 등의 복원과 관련된 세미나 등은 명원 김미희 여사가 되찾고 정립하는데 중심 역할을 했으며, 스님들은 차를 법제를 해서 차를 마시게 하는 역할을 담당했고, 김종희 교수는 차기(도자기)를 만드는 역할을 했으며, 그 뒤를 바로 이어 천한봉씨가 다기를 만들어서 보급을 했다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2박3일 동안의 밀착취재는 이렇게 끝났다. 참으로 많은 대화를 나눴다. 스님은 인터뷰 내내 연도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내는데 어려움을 호소했다. 평소 날짜를 기억하는 습관이 없어서 그렇다며 미안한 표정을 지으시기도 했다. 스님의 말씀마따나 우리나라 전통차의 역사는 매우 짧다. 그런데도 복잡하고 제각각 견해가 달라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도범 스님과의 이 인터뷰가 차 역사를 바로세우는 데 일조가 되기를 바란다.

 

 

*도범(道梵) 스님은?

   스님은 1967년 합천 해인사에서 동곡당 일타 스님의 상좌로 출가한 후 해인사선원을 시작으로 봉암사, 망월사, 극락암, 도솔암 등에서 참선수행을 했고, 해인사 율원을 제1회로 졸업한 스님이다. 스님은 대학생 시절에는 대학생불교연합회 발기인으로 활동했으며, 대불련 수련회를 통해 얻은 수행체험이 인연이 되어 불교에 입문했다.

   고우 스님에 이어 조계종립선원 봉암사의 주지를 역임했으며, 당시 서암 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결제는 물론 산철결제까지 충실히 외호를 하였다. 당시 스님은 절을 찾아오는 수많은 관광객으로 인해 수행에 방해를 받게 되자 선원스님들과 함께 일주문 밖 산문을 막는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이때 시작된 봉암사 출입금지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10·27법난 때에는 봉암사 산철결제 대중으로 계시던 탄성 스님을 비롯하여 여러 대덕 스님들을 모시고 총무원에 올라가 종단 사태를 수습하는 데 그 역할을 하시도록 도왔다. 그때 탄성 스님은 대한불교조계종 정화중흥회의 상임위원장으로 추대됐다.

1992년 하버드, MIT 등 세계적인 명문대학들이 소재한 미국 보스턴에 지혜의 도량인 문수사(文殊寺)를 창건했고, 2년 후에는 마이애미에 보현사(普賢寺)를 창건했다. 문수사가 있는 보스턴 <깨어 있는 마을 'Wakefield'>에는 아름다운 호수, 큰바위 얼굴로 유명한 화이트 마운틴 등이 자리하고 있다.

   도범 스님은 미국 동부 승가회 초대회장을 역임했고, 현재 전 미주 승가회 고문 및 문수사와 보현사의 회주로 있으면서 한국불교를 타민족에게 알리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애써 밝히기를 꺼렸지만, 스님은 대학을 졸업 후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잠시 경험했다. 이 경험으로 인해 스님은 해인사 강원에서 외전(국어과목)의 강사를 지내기도 했다.

 

 

섬네일

dongasiacha 이웃

동아시아 차문화 연구소 (東亞細亞 茶文化 硏究所)

 

옮겨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