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4. 15. 23:58ㆍ차 이야기
가야차 시배설에 대한 시론
글:오순제 명지대 기록과학대학원 객원교수
이능화의 대표적인 한국불교사 연구서인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에 인도차(가야차) 전래에 대해 ‘김해의 백월산에는 죽로차가 있다. 세상에서는 수로왕인 허씨가 인도에서 가져온 차씨라고 전한다’(金海白月山有竹露茶 世傳首露王妃許氏 自印度持來之茶種)고 기록하였다.
이것은 우리나라 차재배의 시원을 밝힐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기록으로 필자는 이러한 사실들을 인도의 허황후와 함께 전래된 소승불교와 함께 그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후의 자출에 대한 것은 이종기(李種琦)이종기, 『가락국탐사』, 일지사, 1977.2의 연구로 그는 김수로왕릉 납릉 정문에 있는 물고기문장이 인도의 아요디아에서도 나타나고 있으며 초선대의 인물상은 가야의 2대 왕인 거등왕의 초상으로 그 형태가 인도의 모헨조다로에서 출토된 인물상 및 드라비다족과 비슷하다고 보았는데 그 앞에는 불족적(佛足迹)이 있다.
명월사지에서 발견된 탑신에 새겨진 조각은 삼매에 잠긴 불타를 한 마리의 거대한 뱀이 감고 있는 형상으로 뱀의 목덜미에는 동그란 무늬가 있어 이것이 인도에 사는 코브라임을 알 수 있었고 이것은 소승불교에서 나타나는 조각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인도에서 가져온 파사석탑을 말하였다.
허명철(許明徹)【 허명철, 『가야불교의 고찰』, 종교문화사, 1987.4】도 ‘파사석탑이 1978년 인도학자들의 현지조사에 의해 인도산임을 확인 하였다’고 하였으며 ‘닭의 피에는 녹아서 없어지는 특이한 돌’임을 입증하였다. 파사(婆裟)라는 명칭도 ‘바사’라는 범어에서 나온 것임을 입증하였다. 그리고 인도 갠지스강(강가강) 하구의 탐록에서 출발하여 니코발군도를 거쳐 쟈바, 수마트라를 거쳐 중국의 광주에서 가야로 왔는데 총 90일이 걸렸을 것으로 보았다.
<가락국기>에 출발일이 5월 도착일이 7월 27일로 약 3개월에 걸친 것으로 인도에서 남행하려면 4-6월에 부는 계절풍을 이용했으리라고 보아 출발일시가 5월 이였음이 타당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창원공단 개발 시에 중국 호남지방과 교역한 흔적이 있는 부족국가 취락지가 발견되었고 인도의 쿠샨왕조가 중국의 항구에 진출하여 비단을 싣고 갔다는 것은 이러한 인도에서 가야까지의 뱃길이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허황후의 시호인 ‘보주(普州)란 넓다, 위대하다, 훌륭하다’라는 뜻으로 보았다. 그리고 허왕후의 오빠인 장유화상의 존재로 고구려 소수림왕 때에 대승불교가 들어오기 전에 가야에는 이미 인도의 소승불교가 들어왔음을 밝혔다.
한양대학의 김병모(金秉模)교수는 허황후 일족이 인도의 아요디아에서 중국사천성 안악으로 이동하였는데 그곳은 허황후 능비에 “보주태후(普州太后)”라고 한 보주(普州)지역으로 허황후가 나타날 당시 쌍어문이 나타나는 사천성은 촉(蜀)이라 불렀는데 <후한서>(後漢西)에는 47년에 촉지방에서 신전에 쌍어를 모시는 소수민족 신앙집단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 당하여 무창으로 강제이주 당하는데 그 반란의 주동자가 허성(許聖)이였다.
이러한 허황후 일행은 양자강을 따라 배를 타고 동남쪽으로 바다를 건너 가락국으로 왔다는 것이다. 그는 쌍어문(雙魚文)이 인도의 아요디아, 중국의 사천성 안악, 무창, 한국의 김해에 나타나며 특히 김해의 다호리 가야고분에서 중국 한나라 때의 구리거울과 사천성의 대표적 사물인 칠기가 다량으로 나타나 허황후 일족이 인도의 아요디아→중국의 보주→양자강→황해→김해로 이동해왔다고 보았다. 이것에 대한 연구는 계속 진척되어야 한다고 본다.
김영태(金煐泰)【김영태,가락불교의 전래와 전개, 『불교학보』 27집, 90.11】는 가야의 초기불교는 김수로왕의 일곱왕자가 허황후의 동생인 보옥선인을 따라 지리산으로 들어간 칠불암을 보면 왕실중심의 소승적 불교로 대중과는 격리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제8대 질지왕이 452년 즉위하자마자 왕실의 권위를 신성하게 하기 위해 시조왕의 왕후를 기리고 명복을 비는 ‘왕후사’(王后寺)를 세우고, 허황후의 동생 보옥선인을 기리는 ‘장유사’(張遊寺)를 세웠는데 이 절들이 왕실의 복을 비는 곳일 뿐만 아니라 왜를 진압하기 위한 호국적 불교의 성격을 띠고 있어 이 당시 초기의 소승적 불교에서 대중적 불교로 전환, 공인되었음을 지적하였다.
필자(筆者)는 대승불교의 유입은 백제를 통한 것으로 보고자 하는데 그것은 고령(高靈)의 고아동벽화고분의 구조가 터널형 천정으로 공주의 송산리 6호분,무녕왕능과 유사하고 연화문의 형태와 필법이 부여 능산리 벽화고분의 것과 유사하여 백제(百濟)의 영향을 나타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즉 연화문이란 불교적인 것으로 이것은 고구려, 백제의 고분에 나타나고 있으며 대승불교의 전래 이후 있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의 불교의 특징을 보면 고구려는 대승불교를 처음으로 받아들인 나라이며 백제는 중국을 통해 인도불교를 직접 받아들여 일본까지 전파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가야불교의 특징은 소승(小乘: 南方)불교 전래의 최초국가가 되는 셈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본다면 허황후는 인도에서 가야로 직접 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냐하면 불교와 차는 오랜 세월 동안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맺어왔다. 차는 불교와 함께 전래되었고 불전에 올리는 중요한 공양물의 하나이기도 했다.
그리고 수행자들로서는 머리를 맑게 하고 잠을 쫓아주는 덕에 자연스럽게 가까이하게 되었다. 또한 선과의 만남으로 인하여 ‘다선일치’(茶禪一致) 사상이 완성됨으로써 일상적 생명력을 가진 선다(禪茶)문화를 형성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중국 선종의 <선원청규>의 ‘불강탄조’(佛降誕條)에는 ‘석가여래가 탄생하신 날에 많은 수행승 들이 위의와 장엄을 갖추고 향화(香花), 등촉(燈燭), 차엽(茶菓)으로써 공양을 올린다. 주지가 상단에 처음 향을 올리고 삼배를 하며, 다시 향을 사르고 점다(點茶; 차를 내는 일)를 한 뒤 삼배를 하고 나서 방석을 걷는다’라고 불단의식 중에 다사(茶事)가 나온다.
음다(飮茶)의 풍속은 불가의 헌다식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차는 불교의 전래와 더불어 주로 스님들의 불공의식에서 출발하여 점차 왕족이나 귀족사회에 퍼졌고 다시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보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존경하여 드리는 헌다의식’인 다례에서 출발한 차는 점점 다반사(茶飯事)라는 일상적인 형태로 대중화되어 갔던 것이다.
따라서 이 당시 전래된 인도의 소승불교와 함께 차(茶)가 전래되어 와서 백월산에서 처음으로 재배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그 당시 불교 중요한 인물이 바로 허황후의 오빠인 장유화상으로 그는 김해 불모산 장유사와 지리산 칠불암 등에 그 유적이 남아있는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본명은 허보옥으로 여동생의 신행길을 함께 와서 이 산에 들어와 부귀를 뜬구름과 같이 보며 불도(佛道)를 설경하고 길이 노닐면서 산을 떠나지 않았다(長遊不返)고 하여 장유화상이라 불렀다고 김해시 장유면 대청리 불모산 정상 부근에 장유화상 사리탑이 남아있다.
이 사리탑은 가락국의 8대 질지왕이 장유사를 중건한 뒤 1400여년이 지나는 동안 여러 번의 방화로 불타는 재난을 겪었지만 사리탑만은 남아 있었다. 1935년 장유사를 중수할 때 사리탑을 두르는 석란간과 비석을 세웠다. 탑 높이 224cm로 연화대를 상징하는 팔각기단위에 세워져 있다. 그리고 가야차(伽倻茶)가 처음으로 재배되었다고 전해지는 백월산은 경남 창원시 북면 마산리에 있는 높이는 453m의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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