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공(茶供)의 의식에 관계된 것으로는 중국의 백장선사(百丈禪師)의 「백장청규(百丈淸規)」가 있는데 이것은 우리나라나 일본을 막론하고 다례에 커다란 영향을 준 것으로 특히 지금도 불가에서 사용되는 식당작법(食堂作法), 발우공양(鉢盂供養) 등의 의식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그것은 예전의 화려했던 다문화의 의식이 다의 쇠퇴기인 조선시대에 잠시 단절되었다고 하더라도 식당작법 등에 의하여 그 전통적인 행주좌와(行住坐臥)의 예의와 정신은 바로 문헌으로만 우리에게 전해지는 우리 고유의 다례의 그것과 가장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식당작법에 대하여 몇 가지 살펴보면 먼저「오관게(五觀偈)」에서는 지사보은(知思報恩)하는 뜻이 들어 있는데 이는 바로 한잔의 다를 앞에 놓고 깊은 생각에 잠기는 다인의 마음이라 하겠다.
「시물(施物)이 온 과정을 헤아리고 스스로의 덕행을 생각해 보고 그런 귀중한 음식을 방심하여 먹으면 허물이 되니 욕심 내지 말고 내 몸의 건강을 위해 양약으로 여겨서 먹고는 도업(道業)을 이루리라 [註41]」
다음은 「삼함(三緘)인데 음식을 먹는 사이 오관(五觀)을 새기면서 신구의(身口意)로써 세 번 입을 다물어 금상으로 된 부처님처럼 하라는 말이다. 다음은 「삼륜청정(三輪淸淨)」인데 이는 시자(施者)와 수자(受者)와 시물(施物)이 모두 순진무구(純眞無垢)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다인은 한 잔의 다를 통해 지은보은(知恩報恩)의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이 「오관(五觀)」과「삼함(三緘)」과 「삼륜청정(三輪淸淨)」에서 우러나오는 정신은 바로 한국의 다례의 근원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다를 불공에 쓴 것은 신라 때부터인데 충담선사(忠談禪師)가 남산 삼화령(三花嶺)에 올라 미륵세존(彌勒世尊)에게 다공양을 드렸다는 기록 [註42] 과 보천(寶川), 고명(考明) 두 왕자가 오대산에서 수도할 때 문수불(文殊佛)에게 공양하였다는 등의 고사가 보이는 것으로 이미 다의 전래 직후에 다불공(茶佛供)은 정착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국불교의 대승경전(大乘經典)인 『화엄경』에서도 다가 향화(香花)와 더불어 중요한 불공의 예폐(禮幣)인 것을 보여준다.
조선시대 불교의식을 적은 문헌에서는 다게(茶偈)-일종의 정형화된 다에 관계된 게송(偈頌)으로 주로 불전(佛前)에 있는 다기(茶器)로써 다를 행할 때 송한다-가 많이 나타나지만 막상 다례란 단어가 나타나기는 조선 중기 때이다. 지환도인(智還道人)이 지은 의전서(儀典書)인 『수륙의문(水陸儀文) 범음집(梵音集)』을 보면 사구재(四九齋)를 지낼 때 재자(齋者)가 위패를 모시고 영단(靈壇)에 나가서 다기에 다를 따르며 다편(茶偏)를 송(頌)한다.
「백초(百草)중에 뛰어난 다나무여 조주(趙州)스님이 항상 여러 사람에게 권했구나. 강심수(江心水)를 돌솥에다 끓여 영단(靈壇)에 바치니 원컨대 고륜(苦輪)에서 헤어나소서」
또 「고승사리운의조(高僧舍利運儀條)」에도 게송(偈頌)이 나오는데 그 주(註)에는
「제자가 다례를 행하고자 하면 제수를 차려놓은 다음에 초헌(初獻)을, 제문을 읽은 다음에 재배하며 아헌(亞獻)을, 다음에 종헌(終獻) 삼배한다 [註43]」
위의 다게(茶偈)는 몇 가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보는데 삼헌을 다로써 행했다는 것 「삼헌」, 「제문(祭文)」, 「전(奠)」 등의 유교적인 단어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모든 문제점은 유교와 관련지을 수 있는데 때는 조선중엽 문공가례(文公家禮)에 의한 풍습은 이미 민간 깊숙이 스며들었을 때라 불가에서도 기복불교화 되는 과정에서 이를 모든 의식에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불가에서는 다례란 단어를 쓴 기록이 없는데 유독 『범음집(梵音集)』에만 유교적인 문자 「다례」가 보이는 것도 유가와 관련지을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후기에 들어오면서 다의 쇠퇴에 따라 다의 공양의식은 유교적인 형식주의가 흘러 들어가 그 빛을 잃고 말았다. 그 뒤 말기의 백파선사(白波禪師)의 『귀감서(龜鑑書)』에는 이미 다가 청정수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우리의 청정수(淸淨水)는 감로다(甘露茶)가 변한 것이다.」
지금도 불단에 있는 청정수 그릇을 「다기」라고 한다든가 수많은 다게라든가 하는 것에서 그 언어의 흔적만 남아 있고 불타(佛陀)의 다공양의식(茶供養儀式)은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다문화의 맥을 이어온 불가에서조차 다가 사라져갈 조선후기에 한 선승(禪僧)에 의하여 한국의 다문화는 기사회생하게 되었다.
전남 해남 대흥사(大興寺)의 초의선사(草衣禪師)(1786-1866)는 순조(純祖) 28년(1828) 지리산 칠불암(七佛庵)에서 『만보전서(萬寶全書)』에서 추출한 『다신전(茶神傳)』과 한국 최초의 다의 전문서적이라고 할 수 있는 『동다송(東茶頌)』을 지어 다의 이론을 정작하였다. 물론 동다(東茶)란 단어는 초의선사의 스승격인 다산 정약용이 지은 『동다기』에서 먼저 나타나지만 유감스럽게도 『동다기』는 현존하지 않기 때문에 『동다송』은 한국의 유일한 다전문서(茶專門書)라 할 수 있다. 또한 초의는 이론적인 것 외에 실제 생활면에서 다를 넓게 보급하기도 하여 잊혀져가던 다문화를 중흥시키기도 하였다. 대흥사의 주위에는 강진(康津) 귤동(橘洞)에 유배되어 있었던 다산 정약용이 있었는데 다산은 그의 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다를 사랑하여 『동다기(東茶記)』 『다합시첩(茶盒詩帖)』등을 남기었고 또한 유배에서 풀려 서울로 올라올 때는 「다신계(茶信契)」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다산 이외에도 제주도에 유배되어 있던 추사(秋史, 초의선사와는 동갑이었으며 두터운 우정을 나누었다) 김정희(金正喜)가 있었는데, 이 3인(초의, 추사, 다산)을 잇는 다를 통한 교류는 참으로 뜻 있는 일이었다. 그들 외에도 정조의 부마(駙馬)인 홍현주(洪顯周)와 홍석주(洪奭周) 형제, 영의정 권돈인(權敦仁), 대학자 신위(申緯), 훈련대장 신관호(申觀浩), 남화(南畵)의 대가 허유(許維) 등 당대의 문인묵객(文人墨客)과 홍학석유(鴻學碩儒) 등과의 폭넓은 다의 교류를 통하여 한양과 해남 그리고 제주도를 잇는 다문화는 다시 싹트기 시작하였다.
초의선사가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의 다문화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이니 그의 출현은 우리나라 다문화에 다행한 일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