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4. 19. 16:57ㆍ들꽃다회
금오산 용장사지에서......
ㅡ 20150406 월요일, 봄비 & 가랑비
용장골의 산이내
ㅡ 산 아래 평야부에 드물게 보이는 비닐하우스 너머로
경부고속도로와 경부고속전철이 지나간다.
이영재와 봉화대 능선
- 배반들 너머로 희미하게 토함산이 보인다.
이영재, 용장골과 봉화대 능선에 피어오르는 산이내 ......
건너다 보이는 단석산 ,망산
경주 남산을 금오산(金鰲山)이라 함은
남산의 지형을 하늘에서 보면 자라를 닮았다는 것에서
이름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황금까마귀인 금오(金烏)는 태양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과
우리 한민족의 선조의 주류인 예맥족의 기저신앙이 태양신을 받들고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전 신라 이두문에서 황금자라를 뜻하는 금오(金鰲)와
황금까마귀를 뜻하는 금오(金烏)가 서로 혼용되어 쓰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육당 최남선의 <불함문화론>에서 말하고 있는 민간신앙과 불교(佛敎)의 습합이라는
한반도 내에서 불교전래 초기인 포용기(包容期)에서
불과 밝음(불의 扶餘,沸流,不咸, "환하다"의 桓, "밝다"의 朴達,倍達,白岳, 박달나무 단 檀)의 태양신이
조로아스터교(배화교, 중국에서 현교 顯敎)에서 근원한
불교의 태양신인 비로자나불(法身佛)과 융합하는 과정에서
금오(金烏)라는 이름에서 이두문식으로 음차(音借)하고
여기에 지형을 중시하는 풍수사상과 결합하여 황금자라인 금오(金鰲)라고
쓰여졌을 가능성이 크다.
태양을 상징하는 금오(金烏)는 고구려의 고분벽화의 삼족오와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탄생설화인 황금알,
백제의 원이름인 부여(扶餘), 온조와 함께 남하한 비류(沸流 : 불의 이두식 표현) 등에서
상징되고 있는 것처럼,고조선~ 삼국시대 초기에 요서지방~북만주지방~한반도에 걸쳐
동이족인 한민족의 원형질적인 기저신앙으로 자리잡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동명이산(同名異山)의 금오산이 여섯 군데 있다.
경북 구미 금오산(977m)과 경남 밀양 삼랑진 금오산(730m),
경남 하동 진교 금오산 (849m), 전남 여수 금오산(323m),
경주 남산 금오산(468m) 그리고 충남 예산 금오산(234m)이 있다.
여섯 개 가운데 구미,밀양,예산은 황금까마귀란 뜻의 금오산(金烏山)이고
나머지 셋은 황금자라(金鰲)라는 뜻의 금오산(金鰲山)이다.
금오산(金烏山)이라고 불리우는 곳은 내륙지방에 위치하고 있고,
금오산(金鰲山)이라 불리우는 곳인 하동, 여수 돌산도, 경주 지방은
바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연안(沿岸)지역이거나 도서인 것으로 보아
해양문화의 영향을 배제하기 어렵다.
경주 남산 최고봉인 고위봉(해발 494.6m)
고위봉에서 서북방으로 뻗은 중간능선이 이무기능선
사진 좌측 중하단부 : 태봉
ㅡ 고위봉은 경주 남산에서도 용장골~이영재 남쪽
최남단에 있어서 일명 南南山지구 라고 부르기도 한다.
봉화대 능선,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백운재, 고위봉
금오산 이름의 유래를 설명한 다른 기록은
<삼국사 본전〔三國史本傳]> [고운 선생 사적]에서 최치원 선생님이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을 할 때, 동년(同年)의 당나라 벗인 고운(顧雲)이 최치원 선생에게 준 송별시에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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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 중국에 유학할 당시에 강동(江東)의 시인 나은(羅隱)과 알고 지내었다.
나은은 자부심이 대단하여 남을 쉽게 인정하지 않았는데,
공이 지은 가시(歌詩) 5축(軸)을 누가 그에게 보여 주자 그만 감탄하여 마지않았다고 한다.
또 동년(同年)인 고운(顧雲)과 벗으로 친하게 지냈는데,
공이 귀국할 즈음에 고운이 시를 지어 송별하였으니,
이는 대개 공에게 심복(心服)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황금 자라 머리 위에 높고 높은 산 / 金鼇頭戴山高高
산 위에는 주궁패궐 황금전이요 / 山之上兮珠宮貝闕黃金殿
산 아래엔 천리만리 드넓은 바다라네 / 山之下兮千里萬里之洪濤
그 옆에 푸른 한 점 계림이 있는데 / 傍邊一點鷄林碧
금오산 빼어난 기운이 기걸한 인물을 내었나니 / 鼇山孕秀生奇特
십이 세에 배 타고 바다를 건너와서 / 十二乘船渡海來
문장으로 중화의 나라를 뒤흔들다가 / 文章感動中華國
십팔 세에 횡행하며 사원에서 힘 겨루어 / 十八橫行戰詞苑
화살 한 발로 금문의 과거에 급제하였다네 / 一箭射破金門策 "
동해 바다에 있는 삼신산(三神山)이 뿌리가 없어서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자
천제(天帝)가 거대한 황금 자라 여섯 마리로 하여금
그 산을 머리로 떠받치게 했다는 신화가 《열자(列子)》 〈탕문(湯問)>편에 전한다.
이는 비록 문학적인 수사라고 할지라도, 고운(顧雲)이 살고 있던
당나라에서 신라를 이상향인 삼신산으로 여기고 있었음을 뜻하며,
경주의 남산인 금오산(金鰲山)을 이상향을 떠받치고 있는
여섯마리 황금자라 중의 하나라고 보고 있는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삼층석탑지 ㅡ 흩어진 탑신부
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 보물 제186호)
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륜대좌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187호)
ㅡ 사진 좌측 수직벽 빗방울 흔적 아래에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
경주 남산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 (보물 제913호)
사진 우측 바위 중하단부에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이 새겨져 있다.
용장사지
깨어진 석탑 옥개석 부분
백운재 , 사자봉 , 태봉, 고위봉
금오초당 옛터??
(금오초당 옛터는 현 설잠교 건너편 태봉 가는 길옆의 은적골에 있었다고 전하여진다.)
- 매월당이 금오초당 근처 대밭에서 차나무를 길렀던 텃밭......
금오초당(金鰲草堂)
ㅡ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다실(茶室)이다.
매월당은 조선 세조(世祖)때 문인으로 뛰어난 시인(詩人)이자,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으며, 출가하여 설잠(雪岑)이란 불명을 얻은 승려이다.
전국을 유랑하다가 금오산 용장사에 가서 작은 초당을 짓고
금오초당이라 이름붙이고 은거하기를 7년간 하였다.
이곳에서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저술하였고,
염포(鹽浦:울산)에 와 있던 일본승 준장로가 찾아오자
차를 끓여 대접하고 시를 지어 주며 교류를 하였다.
준장로는 매월당의 인품과 학덕에 반하여 매우 존경의 예를 표했다.
돌아가서는 매월당의 금오초당을 본떠 초당을 세우고 차를 달여 마셨다.
이때 금오초당에는 땅바닥을 파서 만들어 놓은 “땅화로(地爐)”가 있었다.
이 땅화로는 일본다도의 핵심문화로 자리 잡고 지금까지 계승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라졌지만, 매월당의 땅화로 문화는 일본에서 꽃을 피웠다.
이 금오초당은 오랜 세월이 지나자 폐허가 되고 빈터만 남아있다.
이를 확인하여 고증을 거쳐 이곳 초의선사*에 복원을 했다.
아름다운 문화가 계승되는 것은 후세 사람들이 해야 할 또 하나의 의무이다.
[출처] 금오초당(金鰲草堂) 해설 안내 |작성자 고월 용운스님
***** 초의선사(草衣禪寺) : 오랫 동안 일지암에서 주석하셨던 용운스님이
초의 스님의 탄생지인 전남 무안군 삼향면에 새로 지은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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