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칠불암 평화의 다례 전후

2015. 4. 9. 00:32들꽃다회

경주 남산 칠불암 평화의 다례 전후

 

20150404~06 토~월요일

흐림 & 가랑비~소나기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마태복음 28절

 

 

 

 

 단석산은 삼국통일의 상징 인물인 김유신이 15세인 청소년 시절 화랑이 된 후

17세에 입산하여 무예를 닦으며 통일을 염원한 곳이다. 국보 마애불도 있다.

'단석산(斷石山)'이라면 '돌[石]을 자른[斷] 산'이라는 뜻이다.

 단석산의 이름은 김유신이 화랑 시절 이곳에 들어 무예를 수련하던 중

난승이라는 도승으로부터 신검과 검법을 전해받고

산 정상에 있는 큰 바위를 칼로 내리쳐 두 동강을 낸 데서 유래했다.

 

유신은,
"이 바위가 둘로 갈라지면 삼한일통이 이루어지고,

아니 갈라지면 통일이 되지 않는 것으로 알겠나이다."

하고 천지신명께 기원했는데, 유신의 칼에 바위가 정확하게 반으로 갈라졌다.

그 바위가 지금의 단석산 진달래 능선 근처에 있는 천주암이라고 전해진다.

 

단석산 정상에 있는 둘로 쪼개진 바위는 자연현상으로 둘로 갈라진 것이라는

신선사 주지 용담스님의 말씀을 절에 있는 처사분이 전한다. 

 

 

 

알록제비꽃

 

 

 

 

신선사 전경

 

<평화의 다례> 하루 전에 삼국통일에 활약한 김유신 장군과 화랑들의 수련장인

건천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을 둘러보다.

 

 

〈동국여지승람〉 경주산천단석산(慶州山川斷石山)조에는

도승에게서 검법을 전수받은 김유신이 바위를 단칼에 내리쳐 잘랐다고 하여,

 당초 이름인 달이 뜨는 의미의 달나산(月生山)에서 단석산(斷石山)으로 바뀜.


조선시대의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김유신이 고구려와 백제를 치려고 신검을 구해

월생산(月生山)의 석굴 속에 숨어 들어가 검술을 수련했다.

칼로 큰 돌들을 베어서 산더미같이 쌓였는데, 그 돌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 아래에 절을 짓고 이름을 단석사(斷石寺)라 하였다'고 적고 있으나,

현재 단석사의 흔적은 발견할 수가 없다.

 

 

 

 

 

 

 

 신선사 마애불상군(국보 제199호) 유리보호돔

 

 

 

 

 

배낭 속에 넣어둔 찻솔(茶筅)을 찾지 못하여

바람에 꺽인 솔가지로 차를 젓다.

 

찻숟가락은 히말리아 고산지대인 티베트 야크뿔로 만든 것임 .

 

 

 

 

 

 

원효대사께서 삼국통일후 백제와 고구려 유민들을 위무하고

서로 화합시키기 위하여 창안하신 진한 가루차 무애차(無碍茶)를 올리다.

 

헌다례를 마치자 못난 저를 석굴에 잡아두려는지,

세찬 소나기가 내리고 강풍이 불어와 다포가 펄럭인다.

 

사진 정면은 동쪽 절벽에 조성된 보병을 든 관세음보살상

좌측은 북면의 본존불인 미륵불상, 우측은 남면의 지장보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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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석산신선사마애불상군

다른 표기 언어 斷石山神仙寺磨崖佛像群 툴바 메뉴    

 

요약 테이블
시대 고대/삼국
성격 불상
유형 유적
크기 본존 높이 8.2m
지정 (지정일) 국보 제199호 (1979년 5월 22일)
건립시기 7세기 초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송선리 단석산
분야

예술·체육/조각

경상북도 경주시 건천읍 송선리 단석산에 있는 신라시대의 불상군.

[내용]

   본존 높이 8.2m. 국보 제199호. 이곳은 예로부터 김유신(金庾信)의 수도처로 알려져 왔다. 석실의 규모는 길이 약 18m, 너비 3m의 ㄷ자형으로 자연 석실 내부에 10구의 불보살상과 400여 자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동북쪽의 독립된 바위 면에는 깊은 돋을새김[高浮彫]으로 표현된 여래입상이 있는데 둥근 얼굴에 고졸한 미소가 가득하며, 머리 위에는 2단의 작은 육계(肉髻)가 솟아 있다. 법의는 통견(通肩)이며 U자형으로 트인 가슴 사이로 군의(裙衣)의 띠 매듭이 노출되어 있다.

 

   양손은 손마디가 짧고 둥근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여 시무외(施無畏)·여원인(與願印)을 지었으나 팔목은 표현되지 않았다. 양 무릎 위에는 상체에서 이어진 동심타원형 옷주름을 성글게 표현하였으며, 발은 가지런히 모아 정면을 향하였다.

 

   동쪽 면에 새겨진 보살입상은 나형(裸形)의 상체에 보관은 생략되었으며, 왼손은 들어서 가슴에 대었고 오른손은 몸 앞에서 보병(寶甁)을 잡고 있다. 마멸이 심하여 분명하지 않지만 남면에도 광배가 없는 1구의 보살입상을 새겨 앞의 불보살상과 함께 삼존을 이루고 있다.

 

   이 보살상의 동쪽 면에는 ‘慶州上人巖造像銘記(경주상인암조상명기)’라는 400여 자의 명문이 음각되었는데, 이 중에 “神仙寺作彌勒石像一區高三丈菩薩二區(신선사작미륵석상1구고삼장보살2구)”라는 문구가 보인다. 북면에는 모두 7구의 불보살상과 인물상이 상하 일렬로 얕게 부조되어 있다.

 

    뒷면에는 왼쪽에서 오른쪽을 향하여 우견편단(右肩偏袒)의 여래입상, 보관이 생략된 보살입상, 우견편단의 여래입상, 상체가 나형인 반가사유상을 나란히 배치하였다. 반가사유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왼손을 본존 쪽으로 내밀어 아래쪽의 인물상을 인도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머리 위에는 보주형(寶珠形)의 광배를 갖추고, 발밑에는 단판(單瓣)의 연꽃을 배치하여 대좌로 삼았다.

 

   아랫면에는 일렬로 서서 본존을 향하여 걸어가는 모습의 인물상 2구와 여기서 조금 동떨어진 곳에 동안의 여래상 1구가 새겨져 있다. 이 중 인물상은 모두 버선처럼 생긴 관모(冠帽)를 쓰고 긴 저고리에 통바지 같은 것을 입고 있어 당시의 복식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 손에는 각각 손 향로와 나뭇가지형을 쥐고 있어 이 인물상은 공양상이 분명하다.

 

   이 마애불상군은 우리 나라 석굴사원의 시원적 형식을 보여 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클 뿐만 아니라, 당시 신앙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조성 연대는 7세기 초경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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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한국의 불상』(진홍섭, 일지사, 1976)
  • 『문화재대관』 5-보물 3- (한국문화재보호협회, 대학당, 1986)
  • 「경주상인암의 조상명기」(홍사준, 『고고미술』 29, 1962)
  • 「단석산신선사마애불상군」(황수영, 『한국불상의 연구』, 삼화출판사, 1973)

 

 

 

 오른쪽에 계신 반가사유상과

왼손을 들어 장육존상인 본존미륵불로

인도하는 3분의 여래입상

 

 

 

 

 

남면 지장보살상

 

 

 

 

남면 지장보살상

 

 

 

 

 

북면 본존불 미륵여래상

 

 

 

 

 

본존불 미륵여래상

 

 

 

 

 

공양상(북면 반가사유상 하부에 위치)

 

- 손잡이 자루가 달린 병향로(柄香爐)를 든 공양상과

나무가지를 든 헌화(獻花) 공양상

신라 왕족과 귀족들이 본존불인 미륵여래께 올리는 헌향, 헌화상......

 

도예가인 최정간 선생은 이 신선사 마애불상군의 병향로를

자루달린 솥인 초두(鐎斗 자루솥)라고 하여 차공양상이라고 주장한다.

 

 

금관총 출토 초두

초두(鐎斗) : 높이 15.9㎝, 손잡이 길이 33.7㎝.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1921년 경주시 노서동 봉황대(鳳凰臺) 앞 민가에서 출토된 초두이다.

 

 

 

창녕교동 (비사벌가야) 고분군 출토

토기 자루솥과 청동 자루솥   /  창녕박물관

 

 

 

초두는 발이 세개이고 자루가 달린 냄비를 뜻하는 청동기시대의 자루솥이며

왕이나 지방호족들의 위세품으로  신라, 가야와 풍납토성 등 백제의 옛땅에서 출토되었다.

이 초두(鐎斗)에 한약과 차 등을 달여서 마셨다.

후대로 갈수록 풍로나 화로의 사용으로 세개의 다리 길이가 짧아지거나 생략된 것도 나타난다.

 

 

 

 

 


    << 서기 8세기 무렵 신라의 무상선사와 김지장 보살이 입당하기 전에 이미 신라의 차문화는 상류사회에 보편화되었다. 화랑의 상징이고, 삼국통일을 완수한 김유신이 수련을 했다는 단석산(斷石山)의 ‘화랑헌다공양상(花郞獻茶供養像)’은 불교가 융성하기 이전에 이미 왕가는 물론 귀족과 승려 사회에 보편화되었음을 알려준다. ‘화랑헌다공양상’이라는 명칭을 붙인 최정간씨는 “이미 서기 6세기경에 한민족 고유의 풍류도 정신이 깃든 음다문화를 꽃피웠다”고 한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미술사학계에서는 경주 단석산 인물상이 들고 있는 기물을 손잡이가 달린 향로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고 말하는 최정간씨는 “손잡이가 달린 향로는 동아시아 고고학에서 8세기경에 등장하는데, 단석산의 모습은 석리총에서 출토된 손잡이가 달린 작두형의 다기 가깝다”고 말한다.>>

 

   **** 여기서 "작두형의 다기""초두형의 다기"의 오기로 보인다.

 

[박정진의 차맥] 〈21〉 한국차 신화학 다시쓰기 - ⑨ 화랑의 차, 한국 차 문화의 원형

<화랑의 四仙 그들도 차 문화 즐기며 심신단련 했다.> 중에서 발췌 ......

 

 

 

 구 신인사지(神印寺址 현 옥룡사) 탑골(塔谷)마애불상군

 보물  제 201호

신라 밀교의 명랑법사가 신인종을 창건한 신인사지 옆 부처바위

황룡사 9층목탑과 다른 7층목탑이 새겨져 있음.

 

 

 

 

이 탑골마애불상조상군에도 동쪽면에 목탁치는 스님상이 새겨져 있다.

이 목탁치는 염불승상(念佛僧像)도 과거에는 차공양상으로 알려져 왔었다.

 

 

  

 

초두(斗 자루솥) 자료 모음

 

 

천마총 자루솥 (天馬塚 斗.보물 제622호.경북 경주시 일정로 186,

국립경주박물관 (인왕동,국립경주박물관))

천마총은 경주 황남동고분 제155호 무덤으로 1973년 발굴하여

금관, 팔찌 등 많은 귀중한 유품들과 함께 천마 그림이 발견되어 천마총이라 부르게 되었다.
천마총 자루솥(天馬塚 斗)은 술, 음식, 약들을 끓이거나 데우는데 사용하던 그릇으로,

대부분 왕릉을 비롯한 큰 무덤에서만 출토된다.


이 청동 초두는 높이 20.5㎝, 몸통 지름 18㎝, 손잡이 길이 13㎝의 크기이다.

 전체 형태는 납작한 구형의 몸통에 뚜껑을 덮은 형식으로, 밑에는 3개의 동물 모양 다리가 달렸다.
몸통에는 가로로 한 줄이 돌려 있고 이 위에 휘어진 뿔이 달린 양머리 모양의 액체를 따르는 주구가 달려 있다.

이와 직각되는 위치에 손잡이가 달렸는데, 모가 나 있고 속이 비어 있을 뿐 아니라,

끝에 못 구멍이 있는 점으로 보아 필요에 따라 나무 손잡이를 더 꽂아 사용했던 것 같다.

뚜껑 위에는 꽃봉오리 모양의 꼭지가 있고,

 

손잡이 위에서 경첩으로 몸통에 연결하여 여닫게 만들었다.
몸통 크기, 다리 높이, 손잡이 길이가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양 머리 모양의 주구 형식은 사실적이다.(출처:문화재청)

 

 

충남 서산 부장리 유적5호 분구묘에서 출토된

철제 자루솥(斗)  / 문화콘텐츠닷컴 자료

 

 

 

양머리 모양 청동제 초두

 

양머리 모양 청동제 초두(경주=연합뉴스) 국립경주박물관은 17일부터 5월3일까지

 

'아름답고 착한 동물, 양(羊)' 특집전을 연다.

 

사진은 경주 서봉총에서 출토된 양머리 모양 청동제 초두(자루솥).

 

2015.2.13 << 경주박물관 >> shlim@yna.co.kr

 

 

 

철제 초두와 쇠항아리

철제 초두와 쇠항아리   2014. 10월 출토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흥전리 절터 발굴품 /문화재청과 불교문화재연구소 자료

 

 

 

청동자루솥

청동자루솥

청동자루솥 : 원주 법천리 백제고분에서 발견되었다. 중국에서 들어왔다.

 자루솥은 액체를 데우는 데에 사용했던 용기의 일종으로, 대개 청동으로 만들었다.

이 유물은 몸통에 말발굽 모양의 다리 3개가 있고 손잡이가 붙어있는 형태이다.

 

 

 

 

 

▲ 남원 월산리 고분군 출토 철제자루솥

88고속도로 확장공사 구간인 남원시 아영면 월산리

/ 국립전주박물관과 (재)전북문화재연구원이 기획한 특별전

 ‘운봉고원에 묻힌 가야무사’에 전시되는 유물

 

 (前略)  철제 자루솥을 소개한다.
이만큼 요모조모 쓰임새가 많았던 도구가 또 있을까.

의기(儀器), 야전 취사용기, 술을 끓였던 온주기(溫酒器)….

중국 고대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자루솥의 용도들이다. 

 

『설문해자(說文解字)』, 『사기(史記)』 등 중국의 기록에 의하면

그 용량이 한 말(斗) 정도였다고 한다.

자루솥이 처음 사용된 시기는 중국의 한나라 때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중국 제품을 수입했고, 어느 시기부터는 직접 제작했다.

국내에서 자루솥이 출토된 유적은 거의 모두 왕과 지방 우두머리 거주지나 무덤이다.

신라의 황남대총이나 백제의 수도였던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자루솥이 좋은 예일 것이다.

 아마도 자루솥을 소유하고 이와 관련된 문화를 누릴 수 있었던

사람들은 한정되어 있었던 듯하다.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남원시 아영면 월산리 고분군 출토품의

높이는 16㎝, 지름은 13㎝이며 자루까지 합한 길이는 34.5㎝이다.

둥근 몸체를 가지고 있어 금관총 출토 청동제자루솥이나

서산 부장리 5호분 철제자루솥과 닮았는데, 모두 5세기 무렵의 유물들이다.

 

기사입력: 2012/08/19 [18:50]  최종편집: ⓒ 전북매일신문 기사

 

 

 

 

 

신선사 마애불상군(국보 제199호) 

 

왼쪽 남면에 400여자의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글자의 마멸이 심하나 이중에서 200여자가 판독 가능하다.

미륵여래의 조성 경위와 절의 이름이 신선사임이 밝혀졌다.

 

 

 <<명문에는 미륵삼존불과 신선사라는 명칭이 나온다. 내용인즉 이렇다.

“신선사의 신선은 미륵선화를 칭하며 미륵선화가 신라화랑의 화신이므로

이곳 신선사가 삼국통일 이전 신라 화랑들의 삼국통일 염원이 서린 호국사찰이다.” >>

 

上揭書 박정진의 차맥 <21> 기사 중에서 ......

 

 

 

 

 

남산동의 봄날 ......

 

 

 

 

 

 동계용 해먹인 단소(桓檀巢)로 감싼 백제용봉대향로(무게 20kg 이상)

다례용 떡을 지고가는 다음 카페 <차맛어때> 카페지기이신 산울림님.....

 

이 글을 빌어서 님의 노고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대안당(大安堂) 당호 편액

- 원효대사께서 그의 스승이신 대안스님으로부터

무애대안행(無碍大安行)의 불법을 전수받은 곳이 칠불암이라 전해진다.

 

 

 

 

 

새로 지은 칠불암 요사채 대안당

 

 

 

 

신라 소지왕이 차를 다려마셨다는 천천(天泉)

- 칠불암 요사채 대안당 옆 계곡부

위 사진의 산벗나무 아래에 있는 <샘터> 표지판을 따라가면

계곡 옆에 이 하늘샘인 천천(天泉)이 있다.

 

지난 해 동지무렵의 헌다례 때, 대안당 옆에 있는 샘이 천천(天泉)인지 궁금하였는데,

이번 마애칠불께 평화의 다례를 올린 후,

칠불암 법당에서 다회를 하는 도중에 칠불암 주지이신 비구니 예진스님께 여쭈어 보니,

대안당 옆에 있는 샘이 천천임을 확인하여 주셨다. 

 

 

 

서출지(書出池)의 전설과 이 천전정에 얽힌 설화가 있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정월조에 의하면

"신라 소지왕(炤智王) 10년 정월 15일 왕이 천천정(天泉亭)에 행차했을 때

날아온 까마귀가 왕을 깨닫게 하여,

우리 풍속에 보름날 까마귀를 위하여 제사하는 날로 정하여

찹쌀밥을 지어 까마귀 제사를 함으로써 그 은혜에 보답하는 것이다"라 한 것으로 보아

약반은 오랜 역사를 지닌 우리의 풍속이다.

이 약반은 지방에 따라 오곡밥, 잡곡밥, 찰밥, 농사밥 등을 그 대용으로 즐기기도 한다.

대보름날엔 세 집 이상의 타성(他姓) 집 밥을 먹어야 그 해의 운이 좋다고 하며,

평상시에는 하루 세 번 먹는 밥을

이 날은 아홉 번 먹어야 좋다고 해서 틈틈이 여러번 먹는다.

 

 

 

서출지

경주의 남산 동쪽에 있으며 신라 21대 왕인 소지왕시대에

삼국유사 권일 사금갑의 전설과 관계있는 못이다.

 

소지왕이 즉위 10년(488) 정월 15일에 천천정에 행차하였는데

쥐와 까마귀가 나타나서 울어대더니 쥐가 사람의 말로

「이 까마귀가 날아가는 곳을 찾아가 보시오」라고 지껄였다.


왕은 기사로 하여금 까마귀를 따라가 보도록 하였는데,

남쪽으로 피촌에 이르자 두 마리의 멧돼지가 한창 싸움질을 벌이고 있었다.

기사는 돼지들의 싸움에 정신이 팔려 한창 구경하다 그만 까마귀의 행방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낙심한 기사가 근처를 서성거리고 있노라니

문득 길옆의 연못 속에서 한 노인이 나와 글을 올렸는데

그 글의 겉봉에는

「이 글을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요 열어 보지 않으면 한사람이 죽을 것이다.」

라고 쓰여 있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왕은 희생을 줄이겠다는 의도로 편지를 열어보지 않겠다고 했으나

일관(日官)이 「두 사람이란 일반인이오 한사람이란 왕을 말한 것입니다.」고 하니

왕은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하며 글를 열어 보았는데 그 내용은 「금갑을 쏘아라

라고 쓰여 있었다. 왕은 즉시 궁으로 돌아와서 금갑을 향해 활을 쏘았다.

 

그 안에는 내전에서 분향수도를 하고 있던 승과 궁주가 은밀히

간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두 사람은 마침내 죽임을 당하였다.

 

 

정월 대보름날 먹는 오곡밥(藥飯)의 유래가 된

소지왕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천천(天泉)

 

 

 

 

 

  ㅡ 다음 블로그 < The Man> 덤으로가는 남남산 봄 천상산행    삶의 달인 님의 사진 ......

blog.daum.net/ponyexcel/16831639   THE MAN

 

 

 

 

(15-16)2015.04.05. 경주남산

 

 

 

 

 

 

 

 

 

 

http://blog.daum.net/ddchon/493 염소 2015.04.06 00:35
 다음 블로그 <삐딱한 염소> 자료 중에서 발췌 ......

 

 

 

 

 

헌다의식(4월5일)| ♧ 칠불암 소식 ♧

大安(칠불암지킴이) | 조회 49 |추천 0 | 2015.04.06. 17:43

 

 

 

 

 

 

 

 

 

 

 

 

 

 

 

 

 

 

 

 

 

 

 

 

 

 

 

 

 

 

 

 

 

 

 

 

 

 

 

 

 

 

 

 

 

 

 

 

 

 

 

 

 

 

 

 

 

 

 

 

 

 

 

 

 

 

 

 

 

 

 

 

 

 

 

 

4월 5일 남산 칠불암에서 한국 국제 선차 문화연구회 주최로 칠불에게 올리는

茶.香.舞.畵.樂 을 바치는 平和의 茶禮 行事를 거행하였습니다.

 

 

 

cafe.daum.net/529816/MzkN/91   경주 남산 칠불암

大安 님의 글 중에서 전재 .........

 

 

 

 

 

 추신 :  더 자세한 이야기는 월간<차의 세계> 5월호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