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4. 23. 23:26ㆍ우리 역사 바로알기
[스크랩] 동이족의 대이동(제4회) <백제인 그들은 누구인가? (1/3)>고조선,부여,발해 등 고대사토론방
백제인 그들은 누구인가?
작성자 : 사람이 하늘이다
1. 머릿글
삼국의 역사 중에서 백제의 역사가 가장 난해한 듯싶다. 신라나 고구려는 건국 시조가 단일한데 비하여 백제는 <시조 주몽설>‧<시조 우태설>‧<시조 온조설>‧<시조 비류설>‧<시조 구태설> 등 다섯 가지나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백제의 역사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우리나라 역사서와 중국 역사서가 전하는 백제의 기록이 매우 다르다는 사실이다.
『해동고기』나『삼국사기』등 우리나라 사서들은 백제 역사를 ‘주몽-온조’ 계통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왕 주몽의 아들 온조가 졸본부여에서 한반도로 남하하여 한강유역에서 백제를 건국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한의 여러 나라들을 병합하여 황해도‧경기도‧충청도‧전라도 등을 강역으로 하는 국가로 성장하였다는 것이다. 오늘날 강단사학계의 통설도 이와 같은데, 이 설에 따르면 백제는 한반도 서남부의 소국으로 성장하다가 소멸한 나라였다.
반면 중국의 여러 사서들은 백제의 역사를 ‘동명-구태’ 계통으로 기록하였다. 북부여왕 동명의 후손 구태가 대방고지에서 백제를 건국하였으며, 전성기에는 바다를 건너 요서와 진평 등을 차지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백제가 여러 왕과 제후들을 임명하는가 하면, 북위의 수십만 기병을 무찌르고 중국 산서성 및 하북성과 중국 동해안 지역 여러 곳에 태수들을 임명하는 기록들도 나온다. 오늘날 재야사학계의 대부분은 이 설을 따르고 있는데, 백제가 동아시아 대륙을 호령하던 해상강국이었다는 것이다.
너무도 다른 백제 역사의 두 얼굴이다. 과연 어느 것이 백제 역사의 진실인지 자못 궁금하다. 이글의 목적은 백제인들의 이동경로를 추적하여 중국의 여러 정사들이 전하는 요서백제가 백제 역사의 진실임을 밝히는데 있다. 이를 위하여 다음과 같은 순서로 글을 엮어가려고 한다.
(1) 백제 역사의 두 얼굴 먼저 백제의 역사를 바라보는 우리나라 역사서와 중국 역사서의 서로 다른 시각을 간략하게 살펴볼 것이다.
(2) 동명과 주몽은 다른 사람이다. 백제 역사의 두 얼굴에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근원적인 문제가 존재한다. 동명과 주몽이 같은 사람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인가 하는 문제이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우리나라 역사서들은 모두 동명과 주몽을 같은 사람으로 보았다. 동명을 고구려의 건국시조로 인식한 것이다. 반면 중국의 역사서들은 모두 동명과 주몽을 다른 사람으로 보았다. 동명을 북부여의 건국시조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시각 차이는 부여와 고구려 및 백제의 역사를 근본부터 흔들리게 할 수 있는 중대한 문제이다.
불행하게도 김부식은 동명과 주몽을 같은 사람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면 동명을 북부여의 건국시조로 기록한 중국 역사서들의 기록을 불신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김부식은 『삼국사기』‘백제본기’를 편찬하면서 중국 역사서들이 기록한 요서백제를 백제의 역사에서 지워버렸다. 백제 역사의 모든 왜곡은 여기서부터 비롯되었다. 과연 김부식의 판단은 옳았을까? 관련 기록을 통하여 그 타당성을 살펴본다. 결론적으로 동명을 북부여의 건국시조로 본 중국 역사서들의 기록이 더 신뢰할 수 있으며, 그들이 전하는 요서백제 기록을 적극 수용할 필요가 있음을 살펴보려고 한다.
(3) 중국의 역사서들이 전하는 요서백제 중국 역사서들의 백제관련 기록들을 간략하게 살펴볼 것이다. 중국의 역사서들도 남조와 북조의 정사들이 전하는 백제의 역사가 서로 다르다. 『위서』‧『주서』‧『수서』‧『북사』로 이어지는 북조의 정사들은 ‘북부여왕 동명의 후손 구태가 대방고지에서 백제를 건국했다’고 기록했다. 반면 『송서』‧『남제서』‧『양서』‧『남사』로 이어지는 남조의 정사들은 ‘한반도의 백제가 요서로 진출하여 요서군과 진평군을 차지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중국 남조와 북조의 백제관련 기록의 차이점을 살펴보려고 한다.
(4) 백제와 부여가 요서에서 만나다. 얼핏 보면 중국의 남조와 북조가 기록한 백제의 역사가 매우 달라 보인다. 그런데 중국 북조의 역사서들이 기록한 동명의 후손 구태집단의 이동경로를 추적해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중국 남조의 역사서에서 한반도의 백제가 요서로 진출했다고 한 시기에 북부여왕 동명의 후손 구태집단이 이미 요서지역에 정착하여 큰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결국 ‘주몽-온조’ 집단의 한반도 백제와 ‘동명-구태’ 집단의 북부여가 요서에서 만나 새로운 백제로 비약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요서백제는 북부여의 정통성이 백제로 이어지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5) 요서백제의 위치는 현 중국 북경 일대였다. 그러면 요서백제는 과연 어디에 위치하였는가? 그리고 한반도의 백제는 요서로 진출할 어떤 필연성이 있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세계적인 천문학자인 박창범 교수는 『삼국사기』‘백제본기’의 일식기록들을 토대로 일식 최적관측지를 과학적으로 규명하였는데, 놀랍게도 그 위치가 현 중국 북경유역으로 밝혀졌다. 여러 사서들의 기록을 토대로 요서백제의 위치가 박창범 교수의 연구결과와 일치함을 살펴본다.
(6) 요서백제는 동아시아 해양세력의 중심지였다. 끝으로 요서백제의 지정학적 위치를 통하여 동아시아 대륙에서 그들이 차지했던 위상을 더듬어 보려고 한다. 아울러 백제라는 국명 속에 담긴 백제인들의 정체성을 통하여 그들이 해양세력의 중심이었음을 밝히려고 한다. 요서백제의 위상과 관련하여 통일신라시대의 대학자인 최치원은 이렇게 말하였다.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 시에는 강한 군사가 백만이었습니다. 남쪽으로는 오나라 및 월나라를 침공하였고, 북쪽으로는 유주와 연나라 및 제나라와 노나라의 지역을 어지럽혀 중국의 커다란 좀이 되었습니다(髙麗百濟全盛之時 強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蠹).” 『삼국사기』 ‘최치원전’
백제가 전성 시에 백만 대군을 보유하고 중국 동해안 지역을 휩쓸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배운 백제 역사와는 사뭇 달라서 선뜻 가슴에 와 닿지 않을 수도 있다. 과연 요서백제의 위상이 그러하였는지 그 가능성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글은 위와 같이 (1)번에서 (6)번까지 순서에 따라 백제역사의 진실을 더듬어 볼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동명과 주몽이 다른 사람이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학창시절에 동명과 주몽이 같은 사람으로 배워왔다. 그래서 많이 혼란스러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동명과 주몽이 다른 사람이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백제의 역사는 여전히 혼돈 속에 머물 수밖에 없다.
다행히도 최근에는 강단사학계에서도 동명과 주몽을 다른 사람으로 보는 견해가 힘을 얻어가고 있다. 동명과 주몽을 다른 사람으로 보게 되면, 중국의 역사서들이 전하는 요서백제의 기록들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백제인 그들은 과연 누구였는지 이글이 백제 역사의 진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2. 본 글
(1) 백제 역사의 두 얼굴
『삼국사기』등 우리나라 역사서가 전하는 백제의 역사와 『통전』등 중국의 역사서들이 바라보는 백제 역사의 차이점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우리나라 역사서들은 백제의 역사를 고구려 유이민 집단인 ‘주몽-온조’ 계통으로 파악하였으며, 전성기시 강역도 황해도‧경기도‧충청도‧전라도 등 한반도 서남부의 소국으로 기록하였다. 반면 중국의 역사서들은 백제의 역사를 북부여 유이민 집단인 ‘동명-구태’ 계통으로 파악하였으며, 전성기시 대륙으로 진출하여 요서‧진평 2군을 차지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1)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의 역사
『삼국사기』는 『고전기』를 인용하여 백제의 역사를 아래와 같이 간략하게 기록하였다.
“『고전기』를 살피건대 동명왕의 셋째 아들인 온조가 전한 홍가3년 계묘년에 졸본부여에서 위례성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왕이라 칭하였다. 389년이 지나 13세 근초고왕에 이르러 고구려 남평양을 취하고 한성에 도읍했다. 105년이 지나 22세 문주왕 이 도읍을 웅천으로 옮겼다. 63년이 지나고 26세 성왕이 도읍을 소부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하였다. 31세 의자왕에 이름에 122년이 지나고 당나라 현경 5년에 이르러 의자왕 재위 20년 때에 신라 김유신과 당나라의 소정방이 함께 토벌해 평정하였다(古典記 東明王第三子温祚 以前漢鴻嘉三年癸卯 自卒夲扶餘至慰礼城立都稱王 歷三百八十九年至十三世近肖古王 取髙句麗南平壤都漢城 歷一百五年至二十二世文周王移都熊川 歷六十三年至二十六世聖王 移都所夫里國號南扶餘 至三十一世義慈王歷年一百二十二 至唐顯慶五年是義慈王在位二十年 新羅庾信與唐蘇定方討平之).” 『삼국사기』「잡지」‘백제’
윗글에서 동명과 주몽을 같은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고구려 유이민들인 ‘주몽-온조’ 계통이 졸본부여에서 위례성으로 이주하여 백제를 건국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온조를 셋째 아들로 기록한 것은 주몽의 적장자인 유리태자를 첫째 아들로 보고 비류 왕자를 둘째로 본 까닭이다. 『삼국사기』‘백제본기’는 큰 틀에서 윗글의 내용과 일치하며, 요서백제의 흔적은 찾기 어렵다.
2) 『통전』에 기록된 백제의 역사
중국 역사서의 백제관련 기록들은 중국 남조와 북조의 정사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이런 차이점들을 가장 산뜻하게 통합한 역사서로 『통전』을 꼽을 수 있다. 관련 기록을 살펴보자.
“백제는 후한 말 부여왕 위구태의 후손이다. 후위 때 백제왕이 표를 올려 말하기를 ‘신과 고구려의 선조는 부여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처음 백가가 바다를 건넜으므로 백제라 칭하였다. 진晉나라 때 고구려가 요동을 경략하여 차지하자 백제 또한 요서와 진평 2군을 차지하였다. 지금의 유성과 북평 사이이다. 진나라 이후에 여러 나라를 병탄하여 마한의 옛 땅에 거하였다. 그 나라는 동서가 400리이고, 남북이 900리이다. 남쪽으로 신라와 접하였고, 북쪽으로 고구려와 1,000여리의 거리이다. 서쪽은 큰 바다를 한계로 하였으며, 작은 바다의 남쪽에 있었다(百濟,卽後漢末夫餘王尉仇台之後,後魏時百濟王上表云:「臣與高麗先出夫餘。」初以百家濟海,因號百濟。晉時句麗旣略有遼東,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今柳城、北平之間。自晉以後,呑幷諸國,據有馬韓故地。其國東西四百里,南北九百里,南接新羅,北拒高麗千餘里,西限大海,處小海之南).” 『통전』「변방전」‘백제’
윗글은 백제를 부여왕 위구태의 후손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백제가 요서와 진평 2군을 차지한 기록이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요서백제의 위치가 당나라 시대의 유성과 북평 사이라고 구체적으로 기록하였다.
(2) 동명과 주몽은 다른 사람이다.
오늘날 백제의 역사가 매우 혼란스러운 데는 근원적인 문제가 존재한다. 즉 동명과 주몽이 같은 사람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인가 하는 점이다. 『삼국사기』는 동명과 주몽을 같은 사람으로 보았으며, 동명을 고구려의 건국시조로 인식하였다. 반면 중국의 역사서들은 동명과 주몽을 다른 사람으로 보았으며, 동명을 북부여의 건국시조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시각 차이는 부여와 고구려 및 백제의 역사를 근본부터 흔들리게 할 수 있는 중대한 문제를 가져왔다.
1) 『삼국사기』는 왜 ‘동명-구태’설을 수용하지 않았을까?
김부식은 『삼국사기』‘백제본기’를 편찬하면서 『북사』‧『수서』등 중국의 여러 사서들이 전하고 있는 백제의 건국설화인 ‘동명-구태’ 설을 수용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백제의 전성기에 해당하는 요서백제가 역사에서 사라져버렸다. 김부식은 왜 그랬을까? 관련 기록을 통하여 그 타당성을 살펴본다.
『삼국사기』‘백제본기’는 백제의 건국설화를 세 가지로 소개하고 있다. <시조 온조설>‧<시조 비류설>‧<시조 구태설>이다. 김부식은 이 세 가지 건국설화를 전하면서 ‘어느 설이 옳은지 알 수 없다(未知孰是)’고 하였다. 그런데 『삼국사기』‘잡지 제사조’에 의하면 <시조 동명설> 과 <시조 우태설>이 추가로 나와 있다. 결국 백제의 시조에 대하여 다섯 가지 설이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김부식은 여러 가지 건국설화 중 ‘어느 설이 옳은지 알 수 없다(未知孰是)’고 스스로 말하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편찬하면서 주몽에서 온조로 이어지는 ‘주몽-온조’설만 취하고 나머지는 모두 누락시켜 버렸다. 이에 대하여 김부식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살펴보건데 『해동고기』에는 혹은 시조 동명이라 하고, 혹은 시조 우태優台라고 한다. 『북사』및『수서』에는 모두 이르기를 동명의 후예로 구태仇台가 있으며, 대방에 나라를 세웠다. 이에 이르기를 ‘시조는 구태이다’ 하였다. 그러나 동명이 시조로 간주됨은 사적이 명백하지만, 그 이외에는 신뢰할 정도는 아니다(按海東古記 或云始祖東明 或云始祖優台 北史及隋書皆云 東明之後有仇台 立國於帶方 此云始祖仇台 然東明爲始祖事迹明白 其餘不可信也).” 『삼국사기』「잡지 권32」 ‘제사조’
김부식은 『해동고기』의 <시조 동명설>만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믿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김부식이 이렇게 본 것은 『삼국사기』‘백제본기’에서 온조왕 원년(bc 18)에 동명왕의 사당을 세우고, 다루왕 2년(29)‧책계왕 2년(287)·분서왕 2년(299)‧계왕 2년(345)·아신왕 2년(393)·전지왕 2년(406) 등의 봄 정월에 시조 동명의 묘에 제사를 지낸 기록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온조나 비류 또는 우태優台를 시조로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므로 김부식이 온조‧비류‧우태를 백제의 시조에서 제외한 것은 일리가 있다고 본다. 그런데 <시조 구태설>은 상황이 다르다. 『주서』및 『수서』등에 “그 나라의 왕은 매 계절의 중월에 하늘과 오제의 신에게 제사지내고, 또 해마다 네 번씩 그의 시조 구태의 사당에 제사 드린다(其王以四仲之月, 祭天及五帝之神. 又每歲四祠其始祖仇台之廟).”는 구체적인 제사 기록까지 나온다.
<시조 구태설>은 구체적인 제사 기록이 나올 뿐만 아니라, 중국의 여러 역사서들은 일관되게 백제의 시조는 북부여왕 동명의 후손 구태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백제의 역사에서 <시조 구태설>을 상당한 이유 없이 누락해서는 곤란하다. 김부식은 스스로도 ‘어느 주장이 옳은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시조 구태설>을 신뢰할 수 없다면서 관련기록들을 『삼국사기』에서 누락해버렸다.
백제의 역사에서 <시조 구태설>을 누락해버린 데에는 김부식의 착각인지 아니면 고의인지는 몰라도 커다란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는데, 김부식은 동명과 주몽을 같은 인물로 본 것이다. 이는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나 ‘백제본기’에 잘 드러나 있다. 이로 인하여 오늘날 우리들은 동명과 주몽을 같은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동명왕을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왕으로 인식한 김부식의 견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여기서부터 백제역사는 근본적으로 뒤틀리게 되었다.
2) 북부여왕 동명과 고구려왕 주몽은 다른 사람이다.
『후한서』‧『삼국지』‧『양서』‧『수서』‧『북사』등 중국의 정사들은 한결같이 동명왕을 북부여의 시조로 보고 있다. 특히 연개소문의 셋째 아들인 『천남산묘지명』을 통하여 동명과 주몽은 다른 사람임을 잘 알 수 있다.
“군의 휘는 남산이니 요동 조선인이다. 옛날에 동명이 기를 느끼고 사천을 넘어 나라를 열었고, 주몽은 해를 품고 패수에 임해 수도를 열었다(君諱男產 遼東朝鮮人也 昔者東明感氣 踰㴲川而開國 朱蒙孕日 臨浿水而開都).” 『천남산묘지명』
이처럼 북부여의 건국시조인 동명왕과 고구려의 건국시조인 주몽왕은 전혀 다른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김부식은 동일한 사람으로 인식하고 백제의 역사를 기록하였다. 동명과 주몽을 같은 인물로 보면 어떤 문제점이 발생하는가? 부여의 역사와 백제의 역사가 대혼란에 빠지게 된다.
중국의 모든 역사서들은 동명을 북부여의 건국시조로 보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모든 역사서들은 동명을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시조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중국 기록과 우리나라 기록 중 하나는 틀린 기록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김부식을 비롯하여 우리나라 학자들은 중국 역사서의 기록을 틀린 것으로 보았다.
조선 후기 실학자인 안정복의 견해를 보자. 참고로 『동사강목』은 ‘한국고전종합DB’의 번역을 인용한다.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 참조)
“『북사』에 ‘동명이 부여에 이르러 왕이 되고, 동명 뒤에 구태仇台가 대방 옛 땅에 나라를 세우자, 한나라의 요동태수 공손도가 그에게 딸을 보내 아내를 삼아 주었는데, 드디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고 하였다. 상고하건대 이는 동명으로 부여국의 왕을 삼은 것인데, 그 말은 대개 『후한서』의 그릇된 것을 인용한 것이다. 부여국에 보인다.
또 『문헌통고』에 ‘한나라 헌제 때 구려‧선비가 강성하여, 요동 태수 공손도가 부여왕 위구태尉仇台로 두 나라 사이에 있게 하고 그 종녀로 아내를 삼아 주었다.’ 하였으니, 이는 북부여의 일을 『북사』에서 백제의 선조로 인용한 것이다. 대개 백제의 시조에 우태優台가 있고 또 백제의 성이 부여이기 때문에 혼동하여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북사』‧『통전』에 모두 ‘백제가 그 시조 구태의 사당을 국성國城에 세우고 해마다 네 차례씩 제사한다.’ 하였으니, 이는 모두 우태의 와전이다.
중국 사람들이 항상 부여와 백제를 혼동해 일컫기 때문에 『남사』에는 ‘진나라 때 구려가 요동을 점유하고 백제 또한 요서의 진‧평 두 고을을 점거하였다.’ 하였고, 『자치통감』진晋 목제 영화 2년(346)에는 ‘처음에 부여가 녹산에 있다가 백제(구려의 오류인 듯하다)의 침략을 받아 부락이 소산消散해지므로 서쪽으로 옮겨 연나라에 근접하였다.’ 하였다. 이와 같은 여러 말은 모두 중국에서 그릇 전문傳聞된 것인데, 억단하여 의견을 세워 놓은 것이다.” 『동사강목』「부록 ‘고이’편」 ‘우태와 구태의 분별’
안정복은 『북사』에서 동명을 부여국 왕으로 삼은 것은 『후한서』의 그릇된 것을 인용한 것으로 보았다. 『후한서』‧『삼국지』를 비롯하여 중국의 모든 역사서들은 동명을 부여국의 왕으로 보고 있는데, 안정복은 이런 모든 기록들을 잘못으로 보았다. 그리고 중국의 여러 정사들에 실려 있는 백제관련 기록들을 부여 기록의 혼동으로 보았다. 따라서 요서백제의 기록도 부여 기록의 혼동으로 본 것이다. 동명과 주몽을 같은 인물로 보면 이러한 혼란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김부식으로부터 안정복으로 이어지는 이러한 혼란상은 오늘날 강단사학계에도 고스란히 통설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하여 중국의 각종 정사에서 전해오는 백제관련 기록들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정사들이 전하는 백제관련 기록들은 상상을 초월한다. 백제가 북위의 기병 수십만을 물리치는가 하면, 백제가 여러 왕들을 임명하는 기록도 나온다. 뿐만 아니라 백제가 중국 산서성 지역의 서하태수를 임명하고, 중국 동해안지역의 여러 곳에 태수를 임명하는 기록도 등장한다. 과연 이러한 기록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이 시점에서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할 사항이 있다. 과연 동명과 주몽이 같은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김부식은 『해동고기』의 기록을 토대로 동명을 주몽과 같은 사람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 『해동고기』는 누가 언제 편찬한 것인지도 모른다. 반면에 동명을 주몽과는 다른 부여왕으로 보는 기록은 후한 시대 왕충(AD 27~99?)의 『논형』으로부터 시작하여 『후한서』‧『삼국지』등 수많은 중국 역사서에서 전해지고 있다. 부여가 존재했던 당대의 생생한 기록들이다. 뿐만 아니라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연개소문의 3남인 『천남산묘지명』에도 동명과 주몽은 다른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과연 김부식의 『삼국사기』기록이 더 신빙성이 있을까? 아니면 중국의『논형』‧『후한서』‧『삼국지』등 부여국이 존재했던 당대의 수많은 기록들과 『천남산묘지명』의 기록이 더 신빙성이 있을까? 그 해답은 자명하다. 북부여왕 동명과 고구려왕 주몽은 다른 사람이다. 오늘날 백제의 역사가 혼란에 빠진 근본원인은 김부식이 동명과 주몽을 같은 사람으로 인식한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3) 중국의 역사서들이 전하는 요서백제
백제 역사를 올바로 이해하는 첫걸음은 ‘동명과 주몽은 다른 사람이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라 본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북부여왕 동명과 고구려왕 주몽은 별개의 인물이다. 그런데 『삼국사기』를 비롯한 우리나라의 역사서들은 동명과 주몽을 같은 사람으로 인식함으로써 백제의 역사가 첫 단추부터 잘못 채워졌다. 그래서 중국사서들의 부여와 백제관련 기록들이 뒤죽박죽된 것처럼 혼란스럽게 보였다. 급기야는 백제의 역사를 북부여왕 동명의 후손 구태로 기록한 중국의 모든 역사서들을 불신함으로써 요서백제를 역사에서 지워버렸다.
동명과 주몽을 다른 사람으로 보면, 백제의 역사를 ‘주몽-온조’ 계통으로 파악한 우리나라 역사서들과 ‘동명-구태’ 계통으로 파악한 중국 역사서들의 기록이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중국 사서들의 백제관련 기록을 불신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백제의 역사에 중국 정사들의 기록을 적극 수용해야 할 필요가 있다.
1) 백제와 동시대의 중국 정사들의 백제관련 기록 요약
먼저 백제와 동시대의 중국 정사들의 백제관련 기록들을 간략하게 살펴보기로 한다. 중국 남북조시대의 남조와 북조의 백제관련 기록들이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이들을 자세히 검토해보면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남조의 사서들은 한반도의 백제가 요서로 진출한 상황을 기록하였으며, 북조의 사서들은 북부여의 유민들이 요서로 이동한 정황이 담겼다. 그러므로 남조와 북조의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한반도의 백제와 내몽골의 북부여 유민들이 요서에서 만나 하나되어 백제가 동아시아의 해상강국으로 부상하는 과정을 짐작할 수 있다. 백제와 동시대의 중국 정사들은 아래의 표와 같다.
① 『후한서』‧『삼국지』에서는 백제가 마한의 한 나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부여는 동명의 건국설화와 더불어 부여왕통이 위구태-간위거-마여-의려 등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② 『진서』에는 백제 관련 기록은 없고, 마한의 사신이 수차례 서진을 방문한 기록이 있다. 부여는 태강 6년(A.D.285)에 이르러 모용외의 습격을 받아 패하여 부여왕 의려는 자살하고, 그의 자제들은 옥저로 달아나 목숨을 보전하였다. 이듬해 부여후왕 의라가 나라를 다시 회복하였다.
③ 중국의 남북조시대에 접어들면 남조와 북조의 정사들이 전하는 백제 관련기록들이 많은 차이를 보인다. 이 시기에 백제는 중국의 남조와 활발한 교류를 하였으므로 남조의 정사인『송서』‧『남제서』‧『양서』‧『남사』등에는 백제관련 기록들이 비교적 풍부하다. 남조의 정사들은 백제가 한반도에서 대륙으로 건너가서 요서‧진평 2군을 차지하고 백제군을 설치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반면 북조의 정사인 『위서』‧『주서』‧『수서』‧『북사』등은 백제가 부여의 별종으로 보았다. 그래서 북조의 정사들은 부여의 건국설화인 동명설화를 기록하고, 부여왕 동명의 후손인 구태가 대방고지에서 백제를 건국하는 것으로 기록하였다.
2) 중국 남조와 북조 정사들의 백제관련 기록 비교
하나의 백제에 대하여 중국의 남조와 북조 정사들의 기록은 많은 차이를 보인다.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남사』와『북사』의 기록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남사』와 『북사』는 모두 당나라 때 이연수가 편찬하였으며, 각각 중국 남조와 북조의 역사를 종합한 정사이다.
“백제는 그 시초가 동이의 삼한국인데, 하나는 마한이요, 다른 하나는 진한이요, 또 하나는 변한이었다. 변한과 진한은 각각 12국이 있었고, 마한은 54국이 있었다. 대국은 1만여가, 소국은 수천가로서 모두 10여만호가 되었는데, 백제는 곧 그 중의 한 나라였다. 뒤에 점차 강대하여져서 여러 작은 나라들을 합쳤다.
그 나라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의 동쪽 천여 리 밖에 있었다. 진晋나라 때에 이르러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경략하자, 백제 역시 요서·진평 2군의 땅을 점거하여 스스로 백제군을 설치하였다(百濟者, 其先東夷有三韓國: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弁韓·辰韓各十二國, 馬韓有五十四國. 大國萬餘家, 小國數千家, 總十餘萬戶, 百濟卽其一也. 後漸强大, 兼諸小國. 其國本與句麗俱在遼東之東千餘里, 晉世 句麗旣略有遼東, 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 『남사』「동이열전」 ‘백제’
“백제국은 대체로 마한의 족속이며, 색리국에서 나왔다. 그 왕이 출행 중에 시녀가 후궁에서 임신하였다. 왕은 환궁하여 그녀를 죽이려고 하였다. 시녀는, ‘앞서 하늘에서 큰 달걀만한 기운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거기에 감응되어 임신하였습니다.’고 아뢰었다. 왕은 그 시녀를 살려 주었다. 뒷날 아들을 낳으매 왕이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렸으나, 돼지가 입김으로 불어 주어 죽지 않았다. 뒤에 마굿간에 옮겨 놓았으나 말 역시 그와 같이 하였다. 왕은 신령스럽게 여겨 그 아이를 기르도록 명하고, 이름을 동명이라 하였다. 장성하면서 활을 잘 쏘자, 왕은 그의 용맹스러움을 꺼려 또 다시 죽이려고 하였다. 동명이 이에 도망하여 남쪽의 엄체수에 다다라,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들이 모두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동명은 그것을 딛고 물을 건너 부여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
동명의 후손에 구태가 있으니, 매우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다. 그가 처음으로 대방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한의 요동태수 공손도는 딸을 구태에게 시집보냈는데, 마침내 동이 중에서 강국이 되었다. 당초에 백가가 건너 왔다고 해서 백제라고 불렀다. 그 나라는 동쪽으로는 신라에 닿고 북쪽으로는 고구려와 접한다. 서남쪽으로는 모두 대해로 경계 지어져 있고 소해의 남쪽에 위치하는데, 동서의 거리는 450리이며 남북의 거리는 900여리이다(百濟之國, 蓋馬韓之屬也, 出自索離國. 其王出行, 其侍兒於後姙娠, 王還, 欲殺之. 侍兒曰: 「前見天上有氣如大鷄子來降, 感, 故有娠.」 王捨之. 後生男, 王置之豕牢, 豕以口氣噓之, 不死, 後徙於馬闌, 亦如之. 王以爲神, 命養之, 名曰東明. 及長, 善射, 王忌其猛, 復欲殺之. 東明乃奔走, 南至淹滯水, 以弓擊水, 魚鼈皆爲橋, 東明乘之得度, 至夫餘而王焉. 東明之後有仇台, 篤於仁信, 始立國于帶方故地. 漢 遼東太守公孫度以女妻之, 遂爲東夷强國. 初以百家濟, 因號百濟. 其國東極新羅, 北接高句麗. 西南俱限大海, 處小海南, 東西四百五十里, 南北九百餘里).” 『북사』「열전」 ‘백제’
위『남사』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는 마한의 한 나라였는데, 뒤에 점차 강대하여져서 여러 작은 나라들을 합쳤다. 그리고 진晋나라 때에 이르러 고구려가 요동을 경략하자, 백제 역시 요서·진평 2군의 땅을 차지하고 백제군을 설치하였다.
반면 『북사』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는 부여왕 동명의 후손 구태가 처음으로 대방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한의 요동태수 공손도가 딸을 구태에게 시집보냈는데, 마침내 동이 중에서 강국이 되었다고 하였다.
위의 『남사』와 『북사』는 모두 같은 백제에 관한 기록이므로 분명 서로 연관성이 있을 것이다. 『북사』에서 기록한 백제의 시조인 북부여의 ‘동명-구태’ 계통을 『삼국지』‧『진서』‧『자치통감』등을 통하여 추적해보면 이들이 요서로 이동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백제가 요서로 진출하여 백제군을 설치하던 시기에 북부여의 ‘동명-구태’의 후손들이 이미 요서에 정착하여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관련 사료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4) 백제와 부여가 요서에서 만나다.
중국 정사들의 기록을 토대로 북부여의 ‘동명-구태’ 후손들이 요서지역으로 이동하여 정착하는 과정을 살펴본다. 아울러 한반도의 ‘주몽-온조’ 후손들이 요서지역으로 진출하여 이들과 만나는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1) 북부여의 ‘동명-구태’ 후손들의 요서지역 정착 과정
① 『삼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북부여의 왕통은 위구태-간위거-마여-의려로 이어졌다. 이때 부여성은 현토군의 북쪽 천여 리에 위치하였으며, 현 중국 내몽골자치주 파림좌기 부근이다. 부여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부여는 본래 현토군에 속하였다. 한나라 말년에 공손도가 해동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외이들을 위력으로 복속시키자, 부여왕 위구태尉仇台는 소속을 바꾸어 요동군에 복속하였다. 이때에 고구려와 선비가 강성해지자, 공손도는 부여가 두 오랑캐의 틈에 끼여 있는 것을 기화로 일족의 딸을 [그 왕에게] 시집보내었다.
위구태가 죽고 간위거簡位居가 왕이 되었다. 간위거에게는 적자가 없고 서자 마여가 있었다. 간위거가 죽자, 제가들이 함께 마여를 옹립하여 왕으로 삼았다. 우가의 형兄의 아들도 이름이 위거였는데, 대사가 되어서 재물을 아끼지 않고 남에게 베풀어 주기를 좋아하니 국인들이 그를 따랐으며, 해마다 위나라 서울에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정시 연간(A.D.240~248)에 유주자사 모구검이 고구려를 토벌하면서 현토태수 왕기를 부여에 파견하였다. 위거는 대가를 보내어 교외에서 맞이하게 하고 군량을 제공하였다. 계부인 우가가 딴 마음을 품자, 위거는 계부 부자를 죽이고 그들의 재물을 적몰, 조사관을 파견하여 재산 목록을 만들어 관에 보내었다.
옛 부여의 풍속에는 가뭄이나 장마가 계속되어 오곡이 영글지 않으면, 그 허물을 왕에게 돌려 ‘왕을 마땅히 바꾸어야 한다’고 하거나 ‘죽여야 한다’고 하였다. 마여가 죽고, 그의 아들인 여섯 살짜리 의려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삼국지』「위서동이전」‘부여’
② 『진서』의 기록에 의하면 북부여의 왕통은 의려-의라로 이어졌다. 이때의 부여성은 역시 현 중국 내몽골자치주 파림좌기 부근이다.
“ [서진]의 무제 때에는 자주 와서 조공을 바쳤는데, 태강 6년(A.D.285)에 이르러 모용외의 습격을 받아 패하여 부여왕 의려는 자살하고, 그의 자제들은 옥저로 달아나 목숨을 보전하였다. 무제는 그들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부여왕이 대대로 충성과 효도를 지키다가 몹쓸 오랑캐에게 멸망되었음을 매우 가엾게 생각하노라. 만약 그의 유족으로서 복국 할 만한 사람이 있으면 마땅히 방책을 강구하여 나라를 세울 수 있도록 하게 하라.’ 이에 유사司가 보고하기를, ‘호동이교위인 선우영이 부여를 구원하지 않아서 기민하게 대응할 기회를 놓쳤습니다.’고 하였다. [무제는] 조서를 내려 선우영을 파면시키고 하감으로 교체하였다.
이듬해에 부여후왕 의라는 하감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현재 남은 무리를 이끌고 돌아가서 다시 옛 나라를 회복하기를 원하며 원조를 요청하였다. 하감은 전열을 정비하고 독우 매침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호송하게 하였다. 모용외 또한 그들을 길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나, 가침이 모용외와 싸워 크게 깨뜨리니, 외의 군대는 물러가고 의라는 나라를 회복하였다. 그 후에도 모용외는 매번 부여의 사람들을 잡아다가 중국에 팔아먹었다. 황제는 그것을 가엾게 여기어 다시 조서를 내려 국가의 비용으로 속전을 주고 그들을 부여로 되돌려 보내었으며, 사주와 기주에 명하여 부여 사람의 매매를 금지시켰다.” 『진서』「동이열전」‘부여’
③ 『진서』‘모용황재기’에 따르면 서기 346년 모용황이 부여를 공격하여 부여왕 현과 포로 5만여 구를 잡아 왔다. 이때 모용황의 근거지는 요서의 용성이었다. 『자치통감』에는 아래와 같이 이때의 일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부여왕 현은 진군장군에 임명되고 모용황의 딸과 결혼할 정도로 상당한 입지를 확보했음을 알 수 있다. 북부여 ‘동명-구태’ 의 후손들이 요서에 자리 잡는 사건이었다.
“앞서 부여는 녹산에 자리잡고 있다가, 백제의 침략을 받아 부락이 쇠산해졌다. 그래서 서쪽으로 연나라에 가까운 곳으로 근거지를 옮겼는데, 방비를 하지 않았다. 연왕 모용황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모용군, 모용각, 모여근 세 장군과 함께 1만 7천 기병을 이끌고 부여를 습격하도록 하였다. 모용준은 중군에서 지휘하고, 군사는 모두 모용각이 맡았다. 드디어 부여를 멸하고 그 왕 현과 부락 5만여 구를 포로로 하여 귀환하였다. 모용황은 현을 진군장군으로 삼고 딸을 처로 삼게 하였다(初,夫餘居於鹿山,爲百濟所侵,部落衰散,西徙近燕,而不設備. 燕王皝遣世子俊帥慕容軍ㆍ慕容恪ㆍ慕輿根三將軍ㆍ萬七千騎襲夫餘. 俊居中指授,軍事皆以任恪. 遂拔夫餘,虜其王玄及部落五萬餘口而還. 皝以玄爲鎮軍將軍,妻以女).” 『자치통감』「권97」‘영화2년’
④ 『자치통감』에 의하면 서기 370년 전진이 전연을 멸망시킬 때, 부여왕자 여울이 전연의 수도 업성의 북문을 열어 전연이 멸망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383년 비수대전의 패배로 전진이 몰락하고 모용수가 후연을 건국할 때 부여왕 여울은 핵심세력으로 참가하였다. 관련 기록을 살펴보자.
“연나라 산기시랑 여울이 부여와 고구려 및 상당의 인질 오백여인[호삼성 주: 여울은 부여왕자다. 그런 까닭으로 은밀히 여러 인질들을 거느리고 성문을 열어 전진 병사들을 맞아들인 것이다]을 거느리고 밤에 업성의 북문을 열어 전진의 군대를 맞아들였다. 연왕 모용위는 상용왕 평, 낙안왕 장, 정양왕 연, 좌위장군 맹고, 전중장군 애랑 등과 함께 용성으로 달아났다(燕散騎侍郎餘蔚帥扶餘ㆍ高句麗及上黨質子五百餘人,[餘蔚, 扶餘王子, 故陰率諸質子開門以納秦兵] 夜,開鄴北門,納秦兵,燕主暐與上庸王評ㆍ樂安王臧ㆍ定襄王淵ㆍ左衛將軍孟高ㆍ殿中將軍艾朗等奔龍城).” 『자치통감』「권102」‘태화4년’
“부여왕 여울이 형양태수가 되자, 창려선비 위구 및 여러 장수와 그 무리들이 모용수에게 항복했다...중략...아우 모용덕을 거기대장군으로 삼고 범양왕에 봉했다. 형의 아들 해를 정서대장군으로 삼고 태원왕에 봉했다. 적빈을 건의대장군으로 삼고 하남왕에 봉했다. 여울을 정동장군 통부좌사마로 삼고 부여왕으로 봉했다. 위구를 응양장군으로 삼고, 모용봉을 건책장군으로 삼았다(故扶餘王餘蔚爲滎陽太守,及昌黎鮮卑衛駒各帥其眾降垂...中略...以弟德爲車騎大將軍,封範陽王;兄子楷爲征西大將軍,封太原王;翟斌爲建義大將軍,封河南王;餘蔚爲征東將軍,統府左司馬,封扶餘王;衛駒爲鷹揚將軍,慕容鳳爲建策將軍).” 『자치통감』「권105」‘태원9년’
윗글에서 특히 모용수가 부여왕 여울을 형양태수로 삼자, 창려의 선비족들이 모두 모용수에게 항복했다는 기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울이 요서지역인 창려 일대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모용수가 연왕에 오르면서 여울을 정동장군 통부좌사마 부여왕으로 봉했다. 이로 미루어보아 중국의 정사들이 백제를 ‘동명-구태’ 계통으로 기록하였는데, 이들이 요서지역에서 자립할 만한 충분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한반도의 백제와 북부여가 요서에서 만나다.
앞에서 중국 남조의 정사들을 종합한 『남사』와 북조의 정사들을 종합한『북사』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남사』에서는 백제가 마한의 한 나라로 성장하였으며, 진나라 때에 이르러 고구려가 요동을 경략하자 백제 역시 요서‧진평 2군을 차지하고 백제군을 설치하였다고 하였다. 반면 『북사』에서는 부여왕 동명의 후손 구태가 대방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고 하였다.
지금까지 중국 사서들의 기록을 통하여 부여왕 구태 후손들의 행적을 추적해 본 결과, 여울로 대표되는 부여 유이민 집단들이 진나라 말기에 요서일대에서 커다란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남사』에서 한반도의 백제가 요서에 진출했다고 기록한 시점에, 『북사』에서 백제의 건국시조로 기록한 구태의 후손들이 요서 일대에서 커다란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주몽-온조’ 계통인 한반도 백제와 ‘동명-구태’ 계통인 북부여가 요서에서 만나 하나되어 새로운 백제로 거듭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요서백제는 북부여의 정통성이 백제로 이어지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다음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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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고의 노래 원문보기▶ 글쓴이 : 사람이 하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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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도 반론으로 표시되어야 우리같은 사람들도 배울것이 있지 비난이 된다면 볼성 사납기만 하겠지요.
그리고 박창범 교수의 일식기사 분석도, 삼국사기의 일식기사는 한반도 삼국의 관측기사가 아니라 중국측의 기사를 그대로 옮겼기에 당연히 북경 일대와 비슷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부여인들이 당시 백제인과 과연 동류의식을 느꼈는지는 의문입니다. 부여와 백제는 서로 교류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런 기록이 존재하지도 않으며 단순히 백제가 자신들의 조상이 부여에서 왔다고 남부여라고 국호를 바꿨다는 것이 전부입니다.
남당유고 신라기에는 일식기록이 전무합니다.
2. 고구려는 초기부터 전천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중국 최초의 전천천문도인 <순우천문도>보다 무려 1000여년이 빠른 것입니다. 신라 고구려 백제 등은 모두 해양국가 였습니다. 바다를 항해하는데는 고도의 천문기술이 요구되지요. 해양세력인 동이족들이 농경세력인 중화족이나 유목세력인 흉노족보다 천문기술이 발달한 것은 당연하다고 봅니다. 고구려에 동명력이 있었다고 한 내용은 흥미롭습니다.
남당유고 신라기 내해이사금 10년 기사
十年 七月 太史斗宣奏 太白犯月
10년(266) 7월 태사(太史) 두선(斗宣)이 태백(太白, 금성)이 달을 범하였다고 아뢰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내해이사금 10년 기사발췌
十年 (중략) 七月 霜雹殺穀 太白犯月
10년(205) 7월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이 죽고, 태백(太白, 금성)이 달을 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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