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제9회) <요동지역의 변천에 대한 고찰>

2015. 4. 23. 23:32우리 역사 바로알기

 

 

 

 

 

       [스크랩] 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제9회)

<요동지역의 변천에 대한 고찰>| 고구려 토론방

사람이 하늘이다 | 조회 759 |추천 1 | 2014.04.10. 23:11 http://cafe.daum.net/alhc/51q2/6303 

 

<요동지역의 변천에 대한 고찰>

 

1. 머릿글

 

   이 글의 목적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요동지역의 변천과정을 살피는데 있다.

 

   요동은 한민족의 상고사에 자주 등장하는 친근한 명칭이다. 중국 최초의 지리서인『산해경』을 주석한 4세기 초의 곽박郭璞은 “조선은 요동에 있던 낙랑과 동의어” 라고 하였다. 이 말은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요동에 있었다는 뜻이다.

 

   『삼국유사』는 ‘고구려’ 편에서 “고구려는 바로 졸본부여이다. 혹은 말하기를 지금의 화주和州 또는 성주成州라고 하지만 이는 모두 잘못이다. 졸본주는 요동의 경계에 있었다”고 하였다. 또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장수왕, 문자명왕, 안원왕, 양원왕, 평원왕 등이 중국으로부터 받은 관작명에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이 나온다. 고구려가 요동군에서 나라를 열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연개소문의 장남인 연남생의 묘지명에 남생이 ‘요동군 평양성 사람’이라고 나온다. 고구려 최후의 수도인 평양성이 요동군에 있었다는 기록이다.

 

   위의 기록들을 통하여 요동지역은 고조선의 수도인 왕검성이 위치하였으며, 고구려의 흥망이 아로새겨진 역사의 땅임을 알 수 있다. 요동 땅은 한민족 상고사의 향기가 진하게 묻어나는 곳이다. 그러므로 요동지역의 변천과정을 알아야만 한민족의 상고사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요동이 무엇을 의미하는 바를 살펴보자. 명나라 정통正統 8년(1443년)에 편찬된 『요동지遼東志』에 의하면 “요遼는 멀다는 뜻이다. 그것이 멀리 구주의 동쪽에 있으므로 요동이라 이름하는데, 또한 요서를 아울러서 말한다(遼遠也 以其遠在九州之東, 故名遼東, 又兼遼西而言)” 하였다. 위 『요동지』의 기록에 의하면 요동은 중국(九州)의 먼 동쪽지방을 말한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국경은 많은 변동이 있었고, 이에 따라 중국의 먼 동쪽인 요동의 위치도 변동이 있었을 수밖에 없다.

 

2. 본 글

 

   필자가 연구한 바에 따르면 요동지역은 세 번의 커다란 변천과정이 있었다. 하북성 요동과 산서성 요동 그리고 요령성 요동이 그것이다. 전국시대인 연ㆍ진 시기의 요동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다. 그리고 전한 초(BC 202년 경)에 요동지역은 현 중국 산서성 지역으로 이동하며, 후한 화제和帝 영원 16년(AD 105년)에 이르러 요동지역은 다시 현 중국 하북성 지역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 후 요나라 시대(AD 916~1125년)에 요동지역은 현 중국 요령성 지역으로 이동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요동지역의 변천과정을 알고 역사서를 읽어야만 비로소 한민족의 상고사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하북성 요동, 산서성 요동, 요령성 요동의 위치

 

 

(1) 하북성 요동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 요동으로 불리던 시기는 전국시대인 연ㆍ진 시기와 후한 화제和帝 영원 16년(AD 105년)에서 요나라 시대(AD 916~1125년) 이전까지이다. 하북성 요동지역은 본래의 요동지역이라고 할 수 있으며, 한민족의 상고사와 관련이 있는 요동은 대부분 이 하북성 요동지역을 가리킨다.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도 이 하북성 요동지역에 위치하였으며, 고구려의 건국과 멸망도 모두 이 하북성 요동지역에서 일어난 사건들이다. 관련 사료들을 살펴보자.

 

 

진개의 침략 전 『진번과 조선 및 연나라 강역 지도』

 

 

1) 『전국책』ㆍ『사기』ㆍ『후한서』에 기록된 하북성 요동

 

 

   『전국책』에 전국시대 합종책으로 유명한 소진이 연나라 문공(재위 BC 361~ BC 333)에게 연나라 강역을 언급하는 내용이 나온다.

 

   “연나라의 동쪽에는 조선과 요동이 있고, 북쪽에는 임호와 누번이 있으며, 서쪽에는 운중과 구원이 있고, 남쪽에는 녹타와 역수가 있다. 지방이 이천 여리 이다...중략...남쪽에는 갈석과 안문의 풍요로움이 있고 북쪽에는 대추와 밤의 이로움이 있다. 백성들이 비록 농사짓지 않아도 대추와 밤이 넉넉하므로 이것이 이른바 천부이다.(燕東有朝鮮遼東 北有林胡樓煩 西有雲中九原 南有菉沱易水 地方二千餘里...中略...南有碣石﹑鴈門之饒 北有棗栗之利 民雖不佃作而足於棗栗矣 此所謂天府者也)”『전국책』‘연책燕策’

 

   소진의 말에 의하면 연나라 문공(재위 BC 361~ BC 333) 시기의 연나라 동쪽에 조선과 요동이 있다고 하였다. 소진이 이 말을 한 때로부터 30여년 후인 연나라 소왕(재위 BC 311 ~ BC 279) 시기에 연나라 장수 진개가 동쪽을 침략하고 연5군을 설치하게 된다. 『사기』 ‘흉노열전’에 관련 기록이 잘 나타나 있다.

 

   “그 후 연나라에 현명한 장수 진개가 있어 호胡에 볼모로 갔는데 호가 매우 신임했다. 돌아와 동호를 습격해 격파하니 동호가 천여 리를 물러났다. 형가와 함께 진왕秦王을 암살하려 했던 진무양이 진개의 손자이다. 연나라 또한 장성을 쌓았는데 조양에서 양평까지이다. 상곡ㆍ어양ㆍ우북평ㆍ요서ㆍ요동군을 설치하여 호를 막았다.(其後燕有賢將秦開,爲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走東胡,東胡卻千餘里.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開之孫也.燕亦築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谷ㆍ漁陽ㆍ右北平ㆍ遼西ㆍ遼東郡以拒胡.)”『사기』‘흉노열전’

 

   위의 『전국책』 ‘연책’과 『사기』‘흉노열전’ 기록을 종합하면 전국시대 요동의 위치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전국책』 ‘연책’에서 연나라의 동쪽에 조선과 요동이 있다고 하였고, 『사기』‘흉노열전’에서는 진개가 동쪽으로 동호를 천여 리 물리치고, 조양에서 양평까지 연장성을 쌓고 연5군을 설치하였다고 하였다. 진개의 침략 전에 연나라의 동쪽에는 조선과 요동이 있었으므로 결국 진개가 동쪽으로 침략한 동호 지역은 조선과 요동지역이다.

 

   진개가 조선과 요동지역 천여 리를 공략하고 그곳에 상곡ㆍ어양ㆍ우북평ㆍ요서ㆍ요동군 등 연5군을 설치하였으므로, 전국시대 요동의 위치는 상곡군에서 동쪽으로 천여 리 이내에 위치한다. 상곡군은 연5군이 시작되는 기준점으로 현 중국 하북성 장가구시 일대임은 이론이 없다. 하북성 장가구시 일대에서 동쪽으로 천여 리는 하북성과 요령성의 경계인 칠로도산七老圖山까지이다. 이 안에 요동군 등 연5군이 설치되었으므로 이 시기의 요동과 요동군은 모두 현 중국 하북성 지역에 있었다.

 

   또 위의 『사기』‘흉노열전’ 기록에 의하면 연장성은 조양에서 양평까지 이어졌다. 연장성의 서단인 조양은 『사기집해』에서 삼국시대 오나라 사람인 위소(? ~ 273년)의 말을 인용하여 “(조양은) 지명으로 상곡에 있었다(地名,在上谷)” 하였다. 『사기정의』에서는 “상곡군은 지금의 규주이다(上谷郡今嬀州)” 하였다. 또 연장성의 동단인 양평은 『사기색은』에서 위소의 말을 인용하여 “(양평은) 지금 요동군의 치소이다(今遼東所理也)” 하였다. 연장성의 서단인 조양의 위치는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 장가구시 일대로 이론이 없다. 그런데 연장성의 동단인 양평의 위치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연장성의 동단은 한민족 상고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요동군의 치소였기 때문에 그 위치가 매우 중요하다.

 

   연장성의 동단인 양평의 위치에 관하여 오나라 사람인 위소(? ~ 273년)가 “(양평은) 지금 요동군의 치소이다(今遼東所理也)”라고 한 대목이 중요하다. 삼국시대 요동군의 위치는 후한 말의 요동군 위치와 같다. 『후한서』 ‘군국지’에 의하면 낙양에서 상곡군 치소까지의 거리가 3200리 이고, 요동군 치소까지의 거리는 3600리로 나온다. 그러므로 상곡군 치소인 저양현沮陽縣에서 요동군 치소인 양평까지는 400여 리의 거리이다. 저양현沮陽縣의 위치가 현 북경 서북쪽 거용관 부근이므로 이곳으로부터 동쪽으로 400여 리는 현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薊縣 일대이다. 그러므로 후한 말에서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요동 및 요동군은 모두 현 중국 하북성 지역에 위치하였다. 통설에서는 연장성의 동단인 양평의 위치를 현 중국 요령성 요양으로 비정하고 있는데, 이곳은 상곡군에서 동쪽으로 2,000여리나 떨어진 곳이다. 『사기』‘흉노열전’이나 『후한서』 ‘군국지’의 거리 기록과 전혀 맞지 않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전국책』ㆍ『사기』ㆍ『후한서』등의 기록을 참조하면 전국시대 및 후한 말에서 삼국시대에 이르는 시기까지 요동 및 요동군의 위치는 모두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다. 중국 남송시대인 1177년에 제작된 고지도 『기주협우갈석도』에 하북성 요동 및 한민족 상고사의 핵심인 갈석산의 위치와 연5군의 위치 및 요수와 요택 등이 잘 나타나 있다. 참고로 『기주협우갈석도』는 왼쪽으로 90도 회전하여 북쪽이 위로 가도록 한 후 보아야 필자가 현대지도에 옮긴 것과 방향이 같아진다.(『기주협우갈석도』의 자세한 설명은 필자의 글 “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제2회> 참조).

 

 

『기주협우갈석도』 및 『기주협우갈석도를 현대지도에 표시한 지도』

 

 

2) 『삼국지』에 기록된 하북성 요동

 

   『삼국지』 ‘위지동이전’은 고구려 제10대 산상왕 시절 ‘발기의 난’으로 공손씨 정권에게 하북성 요동 땅을 상실하고, 하북성 요동의 동쪽 천리 밖으로 천도한 고구려의 강역 및 주변국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예맥과, 동쪽은 옥저와, 북쪽은 부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환도丸都의 아래에 도읍 하였는데 면적은 사방 2천리가 되고 호수는 3만이다.』<『삼국지』‘위지동이전 고구려’편>

 

   『부여는 장성의 북쪽에 있는데, 현토에서 천 리쯤 떨어져 있다. 남쪽은 고구려와, 동쪽은 읍루와, 서쪽은 선비와 접해 있고, 북쪽에는 약수弱水가 있다. 국토의 면적은 사방 2천 리가 되며, 호수는 8만이다.』                                                                      <『삼국지』‘위지동이전 부여’편>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는데, 큰 바닷가에 접해 산다. 그 지형은 동북간은 좁고, 서남간은 길어서 천리 정도나 된다. 북쪽은 읍루·부여와, 남쪽은 예맥과 접하여 있다. 호수는 5천호이다.』                                                                      <『삼국지』‘위지동이전 동옥저’편>

 

   『예는 남쪽으로는 진한과, 북쪽으로는 고구려·옥저와 접하였고, 동쪽으로는 대해에 닿았으니, 오늘날 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 지역이다. 호수는 2만이다.』         <『삼국지』‘위지동이전 예’편>

 

   『읍루는 부여에서 동북쪽으로 천 여리 밖에 있는데, 큰 바다에 닿아 있으며, 남쪽은 북옥저와 접하였고, 북쪽은 그 끝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다. 그 지역은 산이 많고 험준하다. 사람들의 생김새는 부여 사람과 흡사하지만, 언어는 부여나 고구려와 같지 않다.』

                                                                                          <『삼국지』‘위지동이전 읍루’편>

 

 

『삼국지』에 기록된 고구려의 강역 및 주변국 지도

 

 

   위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기록을 통하여 당시의 공손씨 정권이 차지한 하북성 요동지역 및 고구려 강역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고구려는 사방이 2천리이고, 동쪽은 옥저, 서쪽은 요동, 남쪽은 조선·예맥, 북쪽은 부여와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

 

   먼저 고구려의 동‧서쪽 경계를 살펴보자. 동쪽은 개마대산을 경계로 동옥저와 접하고 있으므로 대략 개마고원 부근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서쪽 경계는 개마고원 부근에서 서쪽으로 2천여 리 떨어진 곳이다. 대략 산해관이 있는 칠로도산까지가 된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서쪽 경계는 난하 또는 칠로도산이다.

 

   다음으로 고구려의 남‧북쪽 경계를 살펴보자. 남쪽은 조선과 접하고 있는데, 조선은 마조선의 수도 평양으로 볼 수 있다. 그러면 북쪽 경계는 한반도 평양 또는 요동반도의 끝인 대련으로부터 북쪽으로 2천여 리 떨어진 곳이다. 대략 서요하 일대가 된다.

 

   그러므로 고구려 강역은 동서로 개마고원에서 난하 또는 칠로도산까지 2천여 리이고 남북으로 요동반도 대련에서 서요하 일대까지 2천여 리에 약간 못 미치는 지역이 된다<위의 ‘『삼국지』에 기록된 고구려의 강역 및 주변국 지도’ 참조>. 그리고 이때의 고구려 수도는 요동의 동쪽 천리 밖에 있으므로 하북성 요동의 동쪽 끝인 칠로도산으로부터 동쪽으로 1천여 리 떨어진 요령성 요양 부근이 된다.(본인의 글 ‘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제7회) <고구려 수도의 변천사>’ 참조)

 

   위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기록을 통하여 공손씨 정권이 차지한 요동지역의 동쪽에 위치한 고구려의 강역이 난하 또는 하북성과 요령성의 경계인 칠로도산七老圖山까지이므로 이 시기의 요동은 하북성 지역이 될 수밖에 없다.<하북성 요동지역 각 군의 위치는 필자의 글 ‘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제5회)’ 참조>

 

   그런데 통설대로 이 시기의 요동을 현 요동반도로 비정하면, 요동 동쪽에 위치한 고구려 강역은 『삼국지』에서 기록된 사방 이천여 리는 고사하고 그 절반인 사방 천여 리도 나오기 어렵다. 또 이 시기에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있었다는 고구려의 수도는 한반도 동해안에서 찾아야 한다. 통설의 요동 위치비정이 크게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진서晉書』‘지리지’에 기록된 하북성 요동

 

   삼국을 통일한 서진시대에는 공손씨 정권이 차지하였던 요동지역에 평주를 설치하였고, 이 평주지역에 창려군‧요동군‧현토군‧대방군‧낙랑군 등이 설치되었다. 『진서晉書』‘지리지’에 나타난 평주의 위치를 살펴보자.

 

   “평주는 생각건대 우공의 기주지역이며, 주나라의 유주이며, 한나라의 우북평군에 속했다. 후한 말에 공손도가 스스로 평주목을 칭했다. 그의 아들 공손강과 강의 아들 공손연이 모두 제멋대로 요동에 의거하니 동이 9종이 모두 복속하였다. 위나라는 동이교위를 설치하여 양평에 거하였고, 요동‧창려‧현토‧대방‧낙랑 등 5개 군을 나누어 평주로 삼았다. 후에 도로 유주에 합하였다. 공손연을 멸한 후에 호동이교위를 두어 양평에 거했다. 함녕 2년(AD 276년) 10월, 창려‧요동‧현토‧대방‧낙랑 등 5군국을 나누어 평주를 설치했다. 26현 18,100호이다(平州. 按, 禹貢冀州之域, 於周為幽州界, 漢屬右北平郡. 後漢末, 公孫度自號平州牧. 及其子康 康子文懿竝擅㩀遼東, 東夷九種皆服事焉. 魏置東夷校尉, 居襄平, 而分遼東 昌黎 玄莵 帯方 樂浪 五郡為平州, 後還合為幽州. 及文懿滅後, 有䕶東夷校尉, 居襄平. 咸寧二年十月, 分 昌黎 遼東 玄莵 帯方 樂浪 等郡國五置平州. 統縣二十六, 戶一萬八千一百.)” 『진서晉書』‘지리지’ <평주平州>

 

   위 『진서晉書』‘지리지’는 요동지역에 설치되었던 평주의 위치를 ‘우공의 기주지역이며, 주나라의 유주이며, 한나라의 우북평군에 속했다’고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 ‘우공의 기주지역’은 어디를 말하는지 살펴보자. 『사기』‘권2 하본기’에 나오는 ‘기주冀州’에 대하여 『사기정의』는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치수와 공부를 살펴보면 제도(帝都, 기주)로부터 시작했다. 황하는 승주 동쪽에서 시작하여 곧바로 남으로 화음에 이른다. 또 동쪽으로 회주 남쪽에 이르고, 또 동북으로 평주 갈석산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동하의 서쪽, 서하의 동쪽, 남하의 북쪽이 모두 기주이다(按理水及貢賦 從帝都爲始也. 黃河自勝州東, 直南至華陰, 卽東至懷州南, 又東北至平州碣石山入海也.東河之西, 西河之東, 南河之北, 皆冀州也)” 『사기』‘권2 하본기’ ‘기주冀州’ 주석

 

 

『우공소재수산준천지도』에 나타난 기주

 

 

   즉 ‘우공의 기주지역’은 황하로 둘러싸인 현 중국 산서성과 하북성 일대이다. 중국 고지도인 『우공소재수산준천지도』에 기주지역이 잘 표시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주나라의 유주’나 ‘한나라의 우북평군’도 동쪽으로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진서』 ‘지리지’에 나타난 평주의 위치는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다.

 

   그런데도 통설에서는 서진의 평주 낙랑군을 한반도 평양에 비정하고, 대방군을 황해도에 비정하고 있다. 서진의 평주 낙랑군을 한반도 평양에 비정하는 것은 한반도 평양지역이 까마득한 하나라ㆍ주나라 시절부터 중국 땅이었으며, 한나라 우북평군이 한반도 평양에 설치되었다는 말과 같다. 통설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알 수 있다.

 

   『진서晉書』 ‘지리지’의 기록을 통하여 서진시대에 평주가 설치된 요동지역이 현 중국 하북성 지역임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아울러 이 평주지역이 공손씨 정권의 요동지역이었음도 분명히 알 수 있다. 위 『진서晉書』‘지리지’의 기록이 특히 중요한 것은 이 시대 사람인 신찬이 “왕검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 하였고, 이 시대의 지리서인『태강지리지』는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왕검성도 갈석산도 만리장성의 동단도 모두 현 중국 하북성 지역에서 찾아야 한다.

 

4) 『위서魏書』‘지형지’에 기록된 하북성 요동

 

   서진시대에 하북성 요동에 설치되었던 평주는 북위시대에 북쪽의 영주와 남쪽의 평주로 나누어진다. 그러나 북위시대에는 광개토왕 이후 하북성 요동지역은 모두 고구려가 회복하였다. 장수왕, 문자명왕, 안장왕, 안원왕 등이 중국의 남조로부터 받은 관작명에 영ㆍ평2주제군사가 나온다. 하북성 요동에 설치된 영주와 평주 지역이 실질적으로 고구려의 영역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시기에 북위도 하북성 요동지역에 영주와 평주를 설치하기는 하였으나 인구도 거의 없는 명목적인 행정구역에 불과하였다. 『위서魏書』‘지형지’에 나타난 영주의 위치를 살펴보자.

 

   “영주는 화룡성에서 다스린다. 태연 2년(AD 436)에 진鎮이 되었고, 진군 5년(AD 444)에 고쳐서 설치하였다. 영안(AD 528 ~ 530) 말에 함락되어 천평(AD 534 ~ 537) 초에 다시 회복했다. 6개군 14현을 다스린다. 가구수는 1021, 인구는 4664명이다(營州, 治和龍城. 太延二年為鎮, 真君五年改置. 永安末陷, 天平初復. 領郡六, 縣十四. 户一千二十一, 口四千六百六十四.)” 『위서魏書』‘지형지’ <영주營州>

 

   북위의 영주에는 창려군ㆍ건덕군ㆍ요동군ㆍ낙랑군ㆍ기양군ㆍ영구군 등 6개군이 설치되었으나, 이 6개군의 총 인구가 4664명으로 정상적인 1개 현의 인구에도 못미치는 규모였다. 북위의 영주가 명목상의 행정구역에 불과하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면 이 때 영주의 치소인 화룡성의 위치는 어디였는지 살펴보자. 화룡성은 전연과 북연의 수도였으며, 서진의 창려군 용성현에 위치하였다.

 

   『위서魏書』‘지형지’ 에 의하면 ‘창려군은 서진에서 요동을 나누어 설치했다(昌黎郡, 晉分遼東置)’ 하였으며, 『진서晉書』‘지리지’에 의하면 ‘창려군은 한나라 때 요동속국 도위에 속했다(昌黎郡, 漢屬遼東屬國都尉)’ 하였다. 또 『후한서』‘군국지’에 의하면 ‘요동속국 도위는 창료(창려)ㆍ빈도ㆍ도하ㆍ무려ㆍ험독ㆍ방 등의 6개성을 다스리는데, 치소인 창려(창료)는 낙양 동북쪽 3,260리에 있다’고 하였다. 결국 『후한서』ㆍ『진서晉書』ㆍ『위서魏書』 등의 기록을 종합하면 영주의 치소인 화룡성은 창려군에 있었고, 낙양 동북쪽 3260리 부근임을 알 수 있다. 『후한서』‘군국지’에 의하면 상곡군이 낙양 동북쪽 3200리이고, 요서군이 3300리, 요동군이 3600리이다.

 

   『후한서』‘군국지’의 거리 기록을 참조하면, 영주의 치소인 화룡성은 상곡군의 치소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였다. 그러므로 북위가 설치한 영주의 위치는 현 중국 북경부근을 벗어 날 수 없다. 역시 북위 시절의 요동지역에 설치된 영주와 평주도 현 중국 하북성 지역임을 알 수 있다. 통설에서는 이 영주의 위치를 현 중국 요령성 조양시 부근으로 비정하고 있는데, 이는 『후한서』 ‘군국지’의 거리기록과 전혀 맞지 않는다.

 

5) 하북성 요동에 대한 종합

 

   『전국책』ㆍ『사기』ㆍ『후한서』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전국시대의 요동은 현 중국 하북성 장가구시 일대인 연나라 상곡군으로부터 동쪽으로 1,000리 이내의 거리에 있었다. 그리고 연나라 장성의 동단이자 요동군의 치소인 양평은 연나라 상곡군으로부터 400여리의 거리에 있었으며,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 천진시 계현 일대가 된다. 이를 통하여 연ㆍ진 시대의 요동과 요동군은 모두 현 중국 하북성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기록을 통하여 고구려의 강역이 사방 이천 리 이므로 고구려의 서쪽 국경이 현 중국 하북성과 요령성의 경계인 칠로도산七老圖山까지이며, 당시 고구려의 서쪽에 위치했던 공손씨 정권의 요동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에 위치할 수밖에 없음을 보았다.

 

   특히 『진서晉書』‘지리지’는 당시 요동지역에 설치되었던 평주의 위치를 “우공의 기주지역이며, 주나라의 유주이며, 한나라의 우북평군”으로 기록하였다. 한나라 우북평군이 현 중국 하북성 지역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진서晉書』‘지리지’의 기록을 통하여 고구려 시대의 요동이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며, 서진의 평주 소속인 낙랑군ㆍ대방군ㆍ창려군ㆍ요동군ㆍ현토군 등이 모두 현 중국 하북성에 위치하였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위서魏書』‘지형지’의 기록을 통하여 북위 당시 고구려와 국경지역이었던 영주營州의 위치를 살펴보았다. 『후한서』ㆍ『진서晉書』ㆍ『위서魏書』등의 기록을 종합하면 영주의 치소인 화룡성은 서진시대의 창려군에 있었고, 낙양 동북쪽 3260리 부근에 있었다. 당시 『후한서』‘군국지’의 거리 기록에 의하면 상곡군이 낙양 동북쪽 3200리이고, 요서군이 3300리, 요동군이 3600리 이므로, 북위의 영주營州 위치는 현 중국 북경 부근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영주의 위치는 수나라와 당나라 시기까지 이어지므로, 고구려 멸망시까지 요동지역은 여전히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었다. 따라서 한민족에 상고사에 등장하는 요동은 대부분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을 가리킨다.

 

(2) 산서성 요동

 

   현 중국 산서성 지역이 요동으로 불리던 시기는 전한 초((BC 202년 경)에서 후한 화제和帝 영원 16년(AD 105년)까지이다. 『사기』‘흉노열전’과 ‘조선열전’에 의하면 연나라가 전성기 시 장수 진개가 동호(진번ㆍ조선)를 천여 리 물리치고, 연장성을 설치하고 그곳에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 등 연5군을 설치하였다. 그런데 한나라가 일어나면서 고조선이 진번과 조선지역을 모두 회복하였으므로, 진번과 조선 지역에 설치되었던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 등 연5군은 현 중국 산서성 지역으로 이치 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 요동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는 ‘도요장군度遼將軍’ 이란 직책이 있었다. 『한서』 ‘권7 소제기’에 의하면 “(기원전 78년) 겨울 요동의 오환이 반란을 일으키자 중랑장 범명우를 도요장군度遼將軍으로 삼아 북변 7군의 2천 기를 이끌고 이를 공격하게 했다(冬, 遼東烏桓反, 以中郎將范明友爲度遼將軍, 將北邊七郡郡二千騎擊之)”는 기록이 있다. 응소가 주석하기를 “요수遼水를 건너 공격하게 되었으므로 이 때문에 도요度遼를 관호로 삼았다(當度遼水往擊之, 故以度遼爲官號)” 하였다.

 

   이 도요장군의 관호는 한동안 나타나지 않다가 『후한서』 ‘남흉노열전’에 의하면 후한 명제 영평 8년(65년) 남흉노와 북흉노가 서로 교통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도요장군度遼將軍 영營을 다시 설치하게 된다. 이때 도요장군 영을 설치한 곳이 현 중국 섬서성에 위치한 오원五原군 만백曼柏현으로 황하 서쪽이다. 당시 남흉노와 북흉노는 황하를 경계로 하였다. 응소의 주석을 참고하면 도요장군은 요수遼水를 건너서 적을 공격하므로 도요度遼를 관호로 삼았는데, 이때의 도요장군은 황하를 건너서 북흉노를 공격하게 되므로 결국 황하가 요수遼水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요동은 황하의 동쪽인 산서성 지역이다.

 

   이 시기에는 산서성 요동과 하북성 요동이 혼용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삼국사기』에 “태조대왕 3년(AD 55년), 요서 10성을 쌓아 한나라 군사의 침입에 대비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고구려가 요서에 10성을 쌓았다는 것은 당시 하북성의 요동군과 요서군 지역은 모두 고구려의 영토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의 기록을 보면, 이 시기에도 한나라에는 강력한 권한을 가진 요동태수가 등장하고 있다.

 

   “영평(永平: 후한 명제 58-75) 중, 제융이 요동태수가 되자 선비를 선물로 유인하여, 반란을 일으킨 오환 흠지분 등을 참수하게 했는데, 선비족들은 돈황, 주천 동쪽의 읍락 대인들까지 모두 요동으로 와서 하사품을 받았다. 청주와 서주 두 주가 돈을 지급했는데 매년 2억 7천만 전을 항상 주었다.(永平中, 祭肜爲遼東太守, 誘賂鮮卑, 使斬叛烏丸欽志賁等首, 於是鮮卑自燉煌、酒泉以東邑落大人, 皆詣遼東受賞賜, 靑、徐二州給錢, 歲二億七千萬以爲常)” 『삼국지』 ‘오환‧선비‧동이전’

 

   태조대왕 3년(AD 55년)에 고구려가 하북성의 요동군과 요서군을 모두 차지했는데, 영평(永平: 후한 명제 58-75) 중에 제융이 한나라 요동태수가 되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 때 한나라 요동태수는 산서성으로 이치된 요동군의 태수였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는 산서성 요동과 하북성 요동이 혼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후한 화제 영원 16년(AD 105년)에 이르러 한나라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으로 요동군을 다시 복치하게 된다. 『후한서』 ‘군국지’의 요동군 기록에 의하면 “본기 화제 영원 16년(AD 105년)에 (요동)군을 다시 복치했다(本紀和帝永元十六年, 郡復置)” 하였다. 이때의 한나라는 국력이 매우 강성하였다. 이름난 장수 반초班超가 서역도호가 되어 서아시아의 차사, 선선 등을 멸망시키고 지중해까지 이르렀으며, 거기장군 두헌竇憲은 5천여리에 이르는 원정군을 일으켜 지금의 외몽고 등지로 북흉노를 대파하였다. 이에 따라 하북성 요동의 서북쪽에 있으면서 고구려에 복속되었던 오환‧선비 등이 한나라에 내속함으로써 한나라가 하북성 지역에 요동군을 다시 복치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부터 고구려와 한나라는 하북성 요동지역의 패권을 놓고 격렬하게 대립했다.

 

(3) 요령성 요동

 

   현 중국 요령성 지역이 요동으로 불리게 된 것은 요나라(916~1125) 이후이며, 이때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하북성 요동이 요령성 요동으로 지명 이동된 시기는 갈석산의 지명이동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사기』 ‘몽념열전’에 의하면 진나라 만리장성이 ‘임조에서 요동까지’라 하였고, 『수경주』‘하수河水 3’에서는 진나라 만리장성이 ‘임조에서 갈석까지’라 하였다. 두 사료를 통하여 갈석산이 요동의 시작점임을 알 수 있다. 또 『사기색은』은 『태강지리지』를 인용하여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고 하였다. 그러므로 갈석산은 낙랑군이 설치되었던 조선의 위치와 요동의 위치 및 진장성의 동단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산이다.

 

   그런데 태행산맥에 위치한 본래의 갈석산(백석산)이 난하 하류의 갈석산으로 동쪽으로 천 여리 지명이동이 일어났다. 갈석산의 지명이동은 조선의 위치와 요동의 위치 및 진장성의 동단 등 한민족 상고사를 송두리째 왜곡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갈석산의 지명이동이 일어난 시기를 살펴보자. 『통전』에는 모두 3개의 갈석산이 나타나는데 태행산맥에 위치한 본래의 갈석산(백석산)과 하북성 보정시에서 천진시 사이인 북평군 노룡현의 좌갈석과 산동성 빈주시 무체현의 우갈석 등이다. 『통전』은 당나라 사람 두우(杜佑 : 735~812)가 801년에 완성한 책이다. 이때까지도 난하 하류의 갈석산은 보이지 않는다. 난하 하류의 갈석산이 문헌에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우적도』(남송시대 1136년 작)이다.

 

   이 『우적도』에서 난하(유수) 부근에 갈석산과 더불어 노룡현과 평주 등의 지명이 나타난다. 이어서 『구주산천실증총도』(남송시대 1177년 작)와 『거란지리지도』(남송시대 작) 등에 난하 하류의 갈석산이 나온다. 그러므로 난하 하류의 갈석산이 생겨난 시기는 『통전』의 편찬 이후인 801년에서 『우적도』가 그려진 1,136년 이전으로 대략 요나라(916 ~ 1125년) 시기로 추정된다(필자의 글 “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제1회> 참조). 그러므로 하북성 요동이 요령성 요동으로 지명 이동된 시기는 요나라(916 ~ 1125년) 시대로 본다.

 

 

갈석산과 더불어 이동된 지명들

 

 

   『요사지리지』에 의하면 요나라는 거란족이 세운 나라로 초기에는 수백 리 영토에 불과했으나 단기간에 일만 여리의 대제국으로 성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하북성과 산서성 등을 점령하면서 사로잡은 포로들을 대거 요령성 등으로 이주시켜 새로 주州를 설치하였다. 이 때 새롭게 설치한 주의 이름을 포로들이 옛날에 살던 주의 이름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

 

   『요사지리지』 ‘서문’은 이때의 정황을 말하기를 “또 정벌하여 사로잡은 포로들로 요해처에 주를 설치하였는데, (포로들이) 옛날에 살던 곳의 이름으로 삼는 경우가 많았다(又以征伐俘户建州襟要之地, 多因舊居名之)”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요나라 시기에 갈석산의 지명이동과 더불어 하북성 지역의 지명들이 요령성 지역으로 대대적인 지명이동이 일어났다(필자의 글 “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제2회>” 참조).

 

   위 지도 『갈석산과 더불어 이동된 지명들』에서 ‘요나라 이전 요동’인 하북성 요동지역 각종 지명들이 실제의 고구려시대 역사와 부합하는 것으로 필자가 고증한 것이다. 그리고 ‘요나라 이후 요동’인 요령성 요동의 각종 지명들은 통설에 따라 표기하였다. 요령성 요동은 요나라(916~1125) 이후에 지명 이동된 것이므로 고조선이나 삼국시대의 기록에 나오는 요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3. 맺는 글

 

   지금까지 중국의 정사들을 통하여 요동지역의 변천과정을 살펴보았다. 『요동지』의 기록에 의하면 요동은 중국의 먼 동쪽지방을 뜻하였다. 그러므로 요동은 불변의 지역이 아니라 중화족의 강역이 변함에 따라 요동의 위치도 바뀌었다.

 

   본문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연ㆍ진시대의 요동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었으며, 한나라 초에는 요동이 현 중국 산서성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후한 화제和帝 영원 16년(AD 105년)에 이르러 요동은 다시 하북성으로 지역으로 이동하였으며, 그 후 요나라 시대(AD 916~1125년)에 요동지역은 현 중국 요령성 지역으로 이동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본래의 요동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었다. 고조선으로부터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의 상고사에 등장하는 요동은 90% 이상이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을 가리키며, 나머지 10% 정도는 현 중국 산서성 지역을 가리킨다. 그리고 현 중국 요령성 지역은 한민족의 상고사에 등장하는 요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고대사학계의 요동에 대한 학설들을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의 학설이 대립하고 있는데, 모두 현 중국 요령성 지역을 고대의 요동으로 비정하고 있다. 한민족의 상고사가 크게 왜곡 축소될 수밖에 없다. 그 문제점을 간단히 짚어보기로 한다.

 

   첫째, 노태돈ㆍ송호정 등으로 대표되는 강단사학계의 통설로 요동이 전국시대인 연ㆍ진 시대로부터 변함없이 지금의 요동반도였다는 시각이다. 현재의 요하를 고대의 요수로 보고 그 동쪽을 요동으로 비정하고 있다.

 

   통설에서 고대의 요동을 현재의 요동반도로 보는 주요 근거는 중국학계에서 주장하는 요령성지역의 연장성 유지이다. 중국학계에 따르면 요하 서쪽의 요령성 지역에 동서로 길게 뻗은 두 줄기의 장성 유지가 존재하는데, 그곳에서 연ㆍ진ㆍ한대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장성 유지를 연장성 유지로 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연장성 유지라면 연나라와 그 이전 시대의 유물만 발굴되어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그곳에서 연ㆍ진ㆍ한대의 유물이 출토되었다면 오히려 한나라 이후의 장성 유지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연장성 유지로 보는 것은 그 근거가 빈약하며, 이를 토대로 현 요동반도를 고대의 요동으로 비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고대 요동의 위치를 알려면 최우선적으로 당시의 중국 정사들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 필자가 본문에서 살펴보았듯이 당시의 중국 정사들은 한결같이 고대의 요동을 현 중국 하북성 지역으로 기록하고 있다. 특히 『진서晉書』‘지리지’는 당시 요동지역에 설치되었던 평주의 위치를 “우공의 기주지역이며, 주나라의 유주이며, 한나라의 우북평군”으로 기록하였다. 한나라 우북평군이 현 중국 하북성 지역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둘째, 윤내현ㆍ이덕일로 대표되는 재야사학계의 학설로 전국시대인 연ㆍ진 시대의 요동이 현 중국 하북성 난하 부근에 위치한 갈석산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시각이다. 난하를 고대의 요수로 보고 있다.

 

   윤내현 등이 난하 이동을 고대의 요동으로 보는 주요 근거는 갈석산이 난하 하류 지역에 있기 때문이다. 『태강지리지』에 의하면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그곳에서 진나라 장성이 시작된다고 하였으며, 또 『사기』‘몽염열전’에 따르면 진장성이 요동에까지 이르렀다고 하였으므로, 난하 하류의 갈석산 지역이 고대 요동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서에 나타나는 갈석산은 여러 개가 있다. 그러므로 『태강지리지』에서 말하는 갈석산이 난하 하류의 갈석산이라는 검증이 필요한데 이러한 과정이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태강지리지』에서 말하는 고대의 갈석산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또는 낭아산)이지 난하 하류의 갈석산이 아니다.

 

   난하 하류의 갈석산은 요나라(916 ~ 1125년)시대에 하북성 요동이 요령성 요동으로 지명이동 되면서 같이 지명이동된 것이다. 고대의 갈석산을 가장 잘 나타낸 것이 본문의 『기주협우갈석도』이다. 필자는 ‘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제1회)’에서 갈석산에 대하여 자세히 언급하였으며, ‘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제2회)’에서 『기주협우갈석도』를 자세히 소개하였다.

 

   한민족의 상고사에 있어서 갈석산과 요동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위치하였으므로 고조선의 중심지를 알 수 있으며, 또한 요동이 시작되는 곳이며 진나라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다. 그리고 요동지역은 갈석산이 있고,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위치하였으며, 고구려의 흥망성쇠가 아로새겨진 역사의 땅이다. 필자가 연구한 바로는 갈석산의 위치를 가장 명확하게 나타낸 지도가 『기주협우갈석도』이며, 고구려시대의 요동을 가장 잘 나타낸 것이 『진서』‘지리지’ <평주>조의 기록이다. 그러므로 한민족의 상고사를 올바로 알고자 한다면, 『기주협우갈석도』를 가슴에 품고 『진서』‘지리지’ <평주>조를 숙독하기를 권한다.(다음호 계속)

 

 
 

 
카론 14.04.13. 14:54
두번째 그림에 대한 질문을 드립니다. -> 전국시대 위 혜왕과 방연의 대화를 보면 BC350경 각국의 위치가 나옵니다. 동쪽은 제, 서쪽은 진, 남쪽은 초, 북쪽은 한, 대, 연입니다. 대는 위나라의 영토였던 중산을 장악하여 양국이 원수처럼 지내던 시기인데요. 두번째 그림대로 따른다면 이 내용에 조선도 등장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기록이 없다면 그곳에 위치하지 않는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 춘추시대의 연과 전국시대의 연의 위치는 다릅니다. 춘추의 연은 산융과 고죽국과의 전쟁을 하였으므로 초기 거점 지역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고, 전국의 연은 중산(석가장시) 북쪽에 있었던 것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요?
 
카론 14.04.13. 15:05
소진이 언급한 연나라 2천리 강역은 만리장성을 보면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서쪽은 북경 서북에 위치해 있는 대동시와 삭주시 주변, 동쪽은 진황도시 정도로 보면 대충 2천리가 나옵니다. / 북경 북쪽의 만리장성을 보면 성곽이 2 중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상곡은 아래쪽 성곽에 해당하는 연경현과 이남지역으로 봐야 하고, 장가구시의 성곽은 진나라때 쌓은 것으로 보는 것은 어떨까요?
 
카론 14.04.13. 15:24
요동에 대한 설명에서 낙랑과 대방이 등장합니다. 이 기록에 나오는 낙랑과 대방은 한 4군의 낙랑이 아닌, 고구려 미천왕이 서안평을 점령하자, 보급로가 막힌 장통이 요동으로 이주한(313년, 314년) 낙랑과 대방이 아닐까요? / 정리를 하면 요동에는 옛 기자 조선의 도읍 험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나라에 의해 멸망합니다. 그때부터 요동의 양평으로 불리게 됩니다. 한나라때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했던 낙랑이 고구려를 피해 요동으로 이주해 오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기록에는 요동에 험독, 양평, 낙랑. 대방 등이 거론되어 아주 헷갈리게 되는데요. 시대별로 정리하면 요동의 위치는 적어도 발해때까지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사람이 하늘이다 14.04.13. 23:22
중요한 질문이군요. 두번째 지도에서 조선의 위치는 여러 사서들의 교차검증을 거친 것입니다. 제 글 『사기』 '조선열전' 해설(제2회)에서 자세히 언급하였으며, '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제5회)'에서도 자세히 언급하였습니다. 그런데 중국의 여러 사서들을 보면 춘추전국 시대에 분명히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부근에 조선이 위치했던 것으로 나오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같은 시기에 그곳에 선우국과 중산국이 존재헸던 것으로 나옵니다. 특히 호타하 북쪽의 영수지역에서는 중산국의 유물이 대대적으로 발굴되었지요. 그렇다면 조선과 중산국이 동시대 같은 지역에서 동시에 존재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사람이 하늘이다 14.04.13. 23:19
이럴 경우는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다. 중산국과 조선이 같은 나라를 의미하든지, 아니면 두 기록 중 하나가 틀린 기록일 것입니다. 그런데 『회남자』에 의하면 “기자는 조선朝鮮에 봉해지고, 기자의 둘째 아들은 우(于, 하북성 平山으로 추정)에 봉해졌다. 여기서 자손들은 조선의 선鮮과 봉지 우于를 따서 선우씨鮮于氏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동한 시대의 비석인 ‘한나라의 안문태수 고 선우황비(漢故雁門太守鮮于璜碑)’에 ‘(선우)의 이름은 황이며, 자는 백겸인데, 그 조상은 은나라 기자箕子의 후예에서 나왔다.(君諱璜 字伯謙 其先祖出于殷箕子之苗裔~)’(장주본 탁본 첫머리)는 구절이 나옵니다.
 
사람이 하늘이다 14.04.13. 23:28
『회남자』와 '한나라 안문태수 고 선우황비'를 통하여 선우씨가 기자의 후손이며, 선우국이 기자의 후손들이 세운 나라임이 입증된 것입니다. 선우국이 후에 중산국으로 이름을 바꾸게 됩니다. 결국 선우국과 중산국은 기자의 후예들이 세운 나라로 조선으로도 불렸던 것이 확인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선우국과 중산국이 바로 기자조선의 실체라고 보고 있습니다.
 
카론 14.04.15. 08:14
사람이 하늘이다 감사합니다. 글의 내용이 조금씩 이해가 되는군요. / 석가장시와 보정시는 지리적으로 하나의 블록으로 볼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해당 지역은 교류가 활발하였고, 유물도 공유하고 있는 지역입니다. 춘추시대는 연이 확장하던 시기였기에 정확히 특정할 수가 없지만 전국시대에서는 조선이 그 지역에 없었던 것은 확실해 보이는데요. / 정리해서 말씀 드리면, 기원전 403년 진이 3국으로 분열하면서 전국시대가 시작됩니다. 춘추시대의 조선의 강역은 기록상 연에 의해 변화가 있었으므로 특정 지역을 지정하기가 어렵지만, 전국시대가 들어서면 조선은 여러 기록으로 봤을때 중산과 보정지역에는 없었다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하늘이다 14.04.14. 00:06
두번째 질문에서 연나라 강역이 사방 2천리이므로 그 동단을 진황도시까지로 보는데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본문에서도 언급하였듯이 소진이 이 말을 한때는 연나라 장수 진개가 동호(진번.조선)를 천여리 공격하여 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군 등 연5군을 설치하기 전입니다. 상곡군. 어양군 등이 현 중국 북경시 부근인 것은 이론이 없습니다. 따라서 위에서 소진이 말한 진개의 동호 침략 전 연나라의 강역은 결코 현 북경지역을 넘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전국책』에서 소진이 말한 연나라 강역과 『사기』'흉노열전'의 기록이 서로 상충됩니다.
 
사람이 하늘이다 14.04.14. 00:05
역사 기록이 서로 상충될 때 어느 기록을 선택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중요합니다. 역사서를 읽을 때 흔히 나타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 다른 관련 기록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신중하게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국책』에서 소진이 한 말은 연문후에게 합종책을 성사시키기 위하여 유세를 하는 도중에 나오는 말로, 유세가가 그러하듯 자신의 주장을 통하게 하려고 과장된 언사를 많이 씁니다. 연나라 강역 사방 2천리도 그런 과장된 강조의 표현으로 볼 수 도 있고, 또 사방 이천리가 동서와 남북이 각각 천리인 경우를 말하는 경우도 종종 있으므로 소진이 말한 연나라 강역 2천리는 다양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사람이 하늘이다 14.04.14. 00:11
반면 『사기』'흉노열전'의 기록은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런 겨우 『사기』'흉노열전'의 기록을 더 중요시 할 수 밖에 없지요.
 
카론 14.04.15. 08:10
연나라의 강역 2천리는 만리장성으로 보면 충분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동쪽은 진황도이며, 요동이 있는 곳입니다. 진황도에서 북경 북쪽의 만리장성1까지가 하나의 블록으로 형성이 되며, 이곳이 요동, 요서, 우북평, 어양, 상곡의 5군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북경 북쪽 만리장성 1과 장가구시 북쪽 만리장성 2 사이를 또 다른 블럭으로 볼 수 있는데 현 연경현에서 대동시와 삭주시까지 연결이 됩니다. 두 곳을 합치면 2천리가 나오며, 삼국지에 연나라가 조선의 강역 2천리를 빼앗았다라는 의미가 혹시 이 지역을 말하는 것이 아닌지도 고려중입니다.
 
카론 14.04.15. 08:59
전국 시대의 진개의 기록을 보면 동호의 땅 천리를 빼앗았다가 아닌 천리 밖으로 쫓아낸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동호가 장가구시의 땅을 잃고 锡林郭勒盟 으로 퇴각을 하였다면 천리 밖으로 쫓겨난 것이 되니까요. 그리고 지리를 살펴보면 5군이 있어야 할 곳은 만리장성이 있는 지역에 있어야 합니다. 그곳이 국경이기 때문입니다. 만리장성을 보면 뺴앗은 영토가 아닌 기존 연의 영토(춘추시대에 획득한 영토)에 5군이 설치된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하늘이다 14.04.16. 16:28
카론님의 역사해석이 독특하군요. 진개가 동호를 천리 밖으로 물리친 것이 땅 천리를 빼앗은 것이 아니라고 보는군요. 진개의 동호 침략과 연장성 설치는 『사기』'흉노열전'의 앞 뒤 문맥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필자의 글 『사기』'조선열전' 해설<제3회> 참조) 관련 글을 보면 진나라가 의거융을 쳐서 멸하고, 농서.북지.상군을 차지하고 장성을 쌓아 호를 막았으며, 또 조나라는 임호.누번을 격파하고 운중.안문.대군을 설치하고 장성을 쌓아 호를 막았으며, 연나라는 동호를 습격해 격파하고 상곡.어양.우북평.요서. 요동군을 설치하고 장성을 쌓아 호를 막았다는 내용이 연결된 문장으로 나옵니다.
 
사람이 하늘이다 14.04.16. 16:27
모두 빼앗은 땅에 새로 군을 설치하고 장성을 쌓아 호를 막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연5군 지역이 진개의 침략 전부터 연나라의 땅이었다는 것은 견해는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그리고 카론님이 난하 하류 방면을 요동을 보는 견해는 윤내현 교수나 이덕일 교수처럼 난하 하류의 갈석산을 낙랑군 수성현의 갈석산으로 보는 때문으로 보입니다. 난하 하류의 갈석산은 태행산맥의 갈석산(백석산)이 지명이동된 것으로 가짜 갈석산입니다. 필자의 글 '갈석산은 고구려의 역사를 알고 있다<제1회>'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카론 14.04.17. 21:25
사람이 하늘이다 역사 기록을 그대로 해석한 것입니다. 사기의 東胡卻千餘里에서 卻의 뜻이 물러나다 입니다. 그냥 동호가 천리를 물러난 것입니다. 천리를 빼앗았다라는 내용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리고 5군을 설치한 이유가 以拒胡 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호를 막기 위해서입니다. 영토를 차지해 다스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동호가 다시 공격해 올 것이 두려워 5군을 설치해 대비를 했던 것입니다. 卻과 拒의 뜻을 정확히 살펴보셨으면 합니다. / 염철론에서도 却地千里로 되어 있습니다. 却 물러나다의 뜻입니다. 진개가 활동했던 기대와 가까운 기록에서는 빼앗다가 아닌 물러났다 입니다.
 
카론 14.04.17. 21:25
사람이 하늘이다 그런데 삼국지에서는取地二千餘里로 되어 있습니다. 2천리를 취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요. 이는 사기와 염철론과는 내용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별도로 해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삼국지의 특징은 여러 시대의 기록들을 마치 동일 시대에 있었던 것으로 쓴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2천리의 진정한 의미를 찾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 정리하면 연 5군에 대한 정리는 사기의 기록을 충실하게 반영한 것입니다. 삼국지는 배재하였습니다. / 진개의 기록과 지형(교통로)을 살펴서 지역을 정리한 결과 요동과 요서 지역을 비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곳을 기준으로 고구려 역사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늘이다 14.04.14. 00:31
세 번째 질문에서 본문에 나오는 낙랑과 대방은 장통이 요동으로 이주한(313년, 314년) 낙랑과 대방이 아닐까 하였는데, 통설을 지지하는 분들이 많이 주장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크게 잘못된 주장입니다. 본문의 『진서』'지리지'<평주조>의 기록을 자세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진서』'지리지'가 하북성 요동지역에 평주(낙랑.대방.창려.요동.현토)를 설치한 해는 함녕 2년(AD 276년)으로 장통이 미천왕에게 쫓겨서 313년 모용외에게 가기 38년 전 일입니다.
 
카론 14.04.15. 08:07
진나라(264년~419년)와 고구려는 요동지역을 두고 다툽니다. 고구려가 313년에 낙랑 땅을 차지했다면 낙랑은 요동의 동쪽에 있어야 합니다. 이때를 편의상 낙랑1로 하고, 낙랑 땅이 고구려에 넘어가면서 장통이 요동 서남쪽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이곳이 낙랑 2가 됩니다. 진의 행정구역상 평주는 낙랑1과 낙랑2 모두를 포함합니다. 왜냐하면 낙랑1 지역은 한나라 영토를 이어받은 진의 영토였으니까요. 다만 기록에 등장하는 낙랑은 후기에 해당하는 낙랑2가 될 것이다. 대방 역시 마찬가지로 해석이 가능하며, 한서보다 진서의 낙랑의 호구가 줄어는 이유도 이와 같은 이유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사람이 하늘이다 14.04.16. 16:42
『삼국사기』기록에 의하면 낙랑군은 요동군의 서쪽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관련 기록을 살펴보면
미천왕 3년(302) 현도군을 침략하여 8천명을 포로
미천왕 12년(311) 요동군 서안평을 공격하여 차지함
미천왕 14년(313) 낙랑군을 침략하여 2천명 포로
미천왕 15년(314)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략
미천왕 16년(315) 현도성을 공격하여 깨뜨림



 
사람이 하늘이다 14.04.16. 17:01
본문의 지도 '『삼국지』에 기록된 고구려의 강역 및 주변국 지도'를 참고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미천왕 시기 고구려와 서진은 하북성과 요령성의 경계인 칠로도산을 국경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미천왕이 제일 먼저 공격한 곳이 현도군입니다. 이때 난하 중류의 현토군 일부지역을 차지합니다. 요둥군 서안평은 난하 하류의 요충지입니다. 고구려가 서안평을 직접 공격하려면 산해관의 좁은 험로를 이용해야 하므로 공격이 용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난하 중류의 현도군 일부지역을 먼저 차지하면 요동군 서안평을 공격하기가 쉽지요. 그래서 난하 중류의 현도군 지역을 먼저 차지하고 요동군 서안평을 공격하여 차지한 것입니다.
 
사람이 하늘이다 14.04.16. 17:26
낙랑군 지역은 그 특성상 수군이 아니면 공격하기 어려운 지역입니다. 그래서 전한 한무제나 후한 광무제 등도 모두 수군으로 낙랑군을 침략하였지요. 난하 하류의 서안평지역은 수상교통의 요지입니다. 고구려가 서안평을 차지하면 낙랑군을 공격하기 아주 좋은 거점을 확보한 것입니다. 그래서 서안평을 차지한 후 수군으로 그 서쪽의 낙랑군을 공격하고 이어서 그 남쪽의 대방군을 공격한 것입니다. 만약 낙랑군이 요동군 서안평보다 동쪽에 있었다면 서안평보다 낙랑군을 먼저 공격하는 것이 상식일 것입니다. 고구려가 낙랑군을 공격하자 장통이 낙랑군의 북쪽에 위치한 창려군 지역의 모용외에게 귀부하고 새롭게 낙랑군을 설치합니다.
 
카론 14.04.17. 21:38
사람이 하늘이다 윗글 '고구려의 해상 교역로에 대한 고찰'에 그림이 있습니다. 연 5군과 낙랑 지역 그리고 역사에 등장하는 각 지역에 대한 위치도 비정하였으니 비교 검토가 가능하실 것입니다. / 위치 비정과 관련하여 설명드리면 기록을 통해 결정적 단서가 되는 내용들로 위치를 잡았고, 지리적 특징을 고려하여 정리한 것입니다. 계속 업데이트하고 있는데요. 최근 버전은 항구를 단서로 잡아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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