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족의 대이동(제1회) <신라인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2015. 4. 23. 23:40우리 역사 바로알기

 

 

 

 

 

       [스크랩] 동이족의 대이동(제1회) <신라인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고조선,부여,발해 등 고대사토론방

사람이 하늘이다 | 조회 278 |추천 0 | 2014.12.28. 16:37 http://cafe.daum.net/alhc/ALGC/3725 

 

 

신라인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작성자 : 사람이 하늘이다.

 

1. 머릿글

 

   신라는 고구려, 백제와 함께 한민족 상고사의 삼국시대를 열었던 주역이다. 『삼국사기』 등에 따르면 신라는 기원전 57년 건국하여 668년 삼국을 통일하였으며, 935년 고려의 왕건에게 항복할 때까지 992년간을 존속했던 나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존속했던 왕조들 중의 하나에 속한다. 국호인 신라는 ‘덕업이 날로 새로워지고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다.

 

   한민족의 상고사는 고조선뿐만 아니라 삼국시대도 여전히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있다. 특히 신라는 초기 신라를 형성했던 진한의 유이민 집단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삼국사기』는 ‘조선의 유민들이 진한 6부가 되었다.’고 하였으며, 『후한서』및『삼국지』에서는 ‘진秦나라의 망명인들이 진한을 세웠다.’고 하였으며, 『삼국유사』에서는 ‘연나라의 망명인들이 진한을 세웠다.’고 하였다.

 

   이들 사료들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초기 신라를 구성했던 진한인들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로부터 망명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곳을 조선 또는 낙랑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고조선의 중심지가 어디였으며, 한나라 낙랑군이 어디에 설치되었는지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초가 될 수 있다. 아울러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정체성과 더불어 한반도 전역에서 출토되고 있는 중국계 유물들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2. 본 글

  

(1) 진한인들은 고조선의 유민이다.

 

   관련 사료들을 살펴보자.

 

   “시조의 성은 박씨이고 이름은 혁거세이다.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갑자 4월 병진(혹은 정월 15일이라고도 한다)에 왕위에 오르니 이를 거서간이라 했다. 그때 나이는 13세였으며, 나라 이름을 서나벌이라 했다. 이보다 앞서 조선 유민들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뉘어 살아 육촌을 이루었다. 첫째는 알천 양산촌, 둘째는 돌산 고허촌, 셋째는 취산 진지촌(간진촌이라고도 한다), 넷째는 무산 대수촌, 다섯째는 금산 가리촌, 여섯째는 명활산 고야촌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진한 6부가 되었다(始祖姓朴氏諱赫居世 前漢 孝宣帝五鳳元年甲子四月丙辰 一曰正月十五日 即位號居西干 時年十三 囯號徐那伐 先是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爲六村 一曰閼川楊山村 二曰突山髙墟村 三曰觜山珍支村 或云干珍村 四曰茂山大樹村 五曰金山加利村 六曰明活山髙耶村 是爲辰韓六部).” 『삼국사기』 ‘신라본기’

 

   위의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조선의 유민들이 산골짜기 사이에 나뉘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이 진한 6부가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나오는 조선에 대하여 국사편찬위원회의 해설을 보면 ‘조선은 평양 부근을 중심을 존재했던 고조선’으로 이해하고, 고조선 유민의 주력집단은 위만세력에 밀려난 소위 기자조선의 유이민 또는 한나라 세력에 쫓긴 위만조선의 유민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강단사학계의 통설을 인용한 국사편찬위원회의 이러한 해설은 잘못된 것이다. 앞으로 관련 사서들을 통하여 살펴보겠지만, 여기서 나오는 조선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를 중심으로 존재했던 고조선이며, 진한 6부를 구성한 고조선 유민의 주력집단은 단군조선의 유민들이었다.

 

   『삼국사기』의 또 다른 기록을 살펴보자.

 

   “38년 봄 2월에 호공을 마한에 보내 예를 갖추니 마한 왕이 호공을 꾸짖어 말했다. ‘진한·변한은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공물을 보내지 않으니 큰 나라를 섬기는 예의가 어찌 이와 같은가?’ [호공이] 대답했다. ‘우리나라에 두 성인이 일어난 뒤 인사가 잘 닦이고 천시가 순조로워, 창고가 가득 차고 인민은 공경과 겸양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진한 유민으로부터 변한·낙랑·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두려워하지 않는 바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임금께서는 겸허하게 저를 보내 우호를 닦으시니 이는 가히 예의를 넘어서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서는 크게 노하여 군사로써 위협하시니 이는 무슨 의도이십니까?’

   왕이 분노하여 그를 죽이려 하자 좌우가 간하여 그치고 (호공을) 돌아가게 해주었다. 예전에 중국인들이 진나라의 난리를 괴로워하여 동쪽으로 온 자들이 많았다. (이들 중) 마한 동쪽에 자리잡고 진한과 뒤섞여 산 경우가 많았다. 이때에 이르러 점점 번성하자 마한이 이를 싫어하여 책망한 것이다. 호공이라는 사람은 그 종족과 성을 알 수 없다. 본래 왜인이었는데 처음에 허리에 표주박을 차고 바다를 건너왔기 때문에 호공이라 불렀다(三十八年春二月 遣瓠公聘於馬韓 馬韓王讓瓠公曰 辰卞二韓爲我屬囯 比年不輸職?事大之禮 其若是乎 對曰 我國自二聖肇興 人事修天時和 倉庾充實人民敬讓 自辰韓遺民以至卞韓樂浪倭人 無不畏懷 而吾王謙虛 遣下臣修聘 可謂過於禮矣 而大王赫怒劫之以兵 是何意耶 王憤欲殺之 左右諌止乃許歸 前此中國之人 苦秦亂東來者衆多 處馬韓東與辰韓雜居 至是寖盛故 馬韓忌之有責焉 瓠公者未詳其族姓 夲倭人初以瓠繋腰 度海而來 故稱瓠公).” 『삼국사기』 ‘신라본기’

 

   박혁거세 38년의 기록으로 기원전 20년에 있었던 일이다. 여기서 눈여겨 볼 부분은 ‘진한 유민으로 부터 변한‧낙랑‧왜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우리나라를) 두려워한다.’는 내용이다. 또 ‘예전에 중국인들이 진나라의 난리를 괴로워하여 동쪽으로 온 자들이 많았다. (이들 중) 마한 동쪽에 자리 잡고 진한과 뒤섞여 산 경우가 많았다. 이때에 이르러 점점 번성하자 마한이 이를 싫어하여 책망한 것이다.’고 한 내용이다. 진한의 구성 집단에는 진나라의 난리를 피하여 동쪽으로 피난 온 중국인들이 많이 섞여있었다는 것이다. 이 중국인들은 구체적으로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2) 진한인들은 낙랑의 망명인이다.

 

   『후한서』를 보자.

 

   “진한은 그 노인들이 스스로 말하되, 진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로서 고역을 피하여 한국에 오자, 마한이 그들의 동쪽 지역을 분할하여 주었다 한다. 그들은 나라를 방이라 부르며, 궁弓은 고孤라 하고, 적賊은 구寇라 하며, 행주行酒를 행상行觴이라 하고, 서로 부르는 것을 도라 하여, 진나라 말과 흡사하기 때문에 혹 진한秦韓이라고도 부른다(辰韓 耆老自言秦之亡人, 避苦役適韓國, 馬韓割東界地與之. 其名國爲邦, 弓爲弧, 賊爲寇, 行酒爲行觴, 相呼爲徒, 有似秦語, 故或名之爲秦韓).” 『후한서』 ‘한전’

 

   『후한서』는 진한辰韓 사람들이 ‘진나라의 고역을 피하여 망명한 사람들’이라고 좀 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진나라의 고역이란 진나라 만리장성을 쌓는 일을 말하는 듯하다. 기원전 221년 중원을 통일한 진시황은 불로장생의 신선술에 큰 관심을 가졌다. 그리하여 많은 방사들을 동해바다로 보내어 불로초를 구해오도록 하였다. 연나라 사람 노생이 불로초는 구하지 못한 대신 신선의 글이라는 녹도서錄圖書를 구해 바쳤는데, 거기에는 ‘진나라를 망하게 할 자는 호胡이다(亡秦者胡也).’라고 쓰여 있었다. 그리하여 기원전 214년, 진시황은 몽염장군으로 하여금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북쪽으로 호胡를 공격하여 하남지역을 점령하고 장성을 쌓게 하였다. 이것이 인류최대의 토목공사로 일컬어지는 진나라 만리장성이다. 수많은 백성들이 이 고역에 동원되었다.

 

   『삼국지』에서도 『후한서』와 비슷한 기록이 나온다.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진한의) 노인들은 대대로 전하여 말하기를, ‘우리들은 옛날의 망명인으로 진나라의 고역를 피하여 한국으로 왔는데, 마한이 그들의 동쪽 땅을 분할하여 우리에게 주었다.’고 하였다. 그곳에는 성책이 있다. 그들의 말은 마한과 달라서 나라를 방이라 하고, 활을 고弧라 하고 도적을 구寇라 하고, 술잔을 돌리는 것을 행상行觴이라 한다. 서로 부르는 것을 모두 도徒라 하여 진나라 사람들과 흡사하니, 단지 연나라·제나라의 명칭만은 아니었다. 낙랑 사람을 아잔이라 하였는데, 동방 사람들은 나我라는 말을 아阿라 하였으니, 낙랑인들은 본디 그 중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진한辰韓을 진한秦韓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진한은 처음에는 6국이던 것이 차츰 12국으로 나뉘어졌다(辰韓在馬韓之東, 其耆老傳世, 自言古之亡人避秦役 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與之. 有城柵. 其言語不與馬韓同, 名國爲邦, 弓爲弧, 賊爲寇, 行酒爲行觴. 相呼皆爲徒, 有似秦人 非但燕·齊之名物也. 名樂浪人爲阿殘; 東方人名我爲阿, 謂樂浪人本其殘餘人. 今有名之爲秦韓者. 始有六國, 稍分爲十二國).” 『삼국지』 ‘한전’

 

   『삼국지』에서도 진한辰韓 사람들은 ‘진秦나라의 고역을 피하여 망명한 사람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후한서』와 『삼국지』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진한 사람들은 진秦나라의 망명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삼국지』의 기록에서 ‘낙랑 사람을 아잔이라 하였는데, 동방 사람들은 나라는 말을 아阿라 하였으니, 낙랑인들은 본디 그 중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고 한 구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진한 사람들은 진秦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로서 떠나온 고향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아잔이라 불렀는데, 낙랑인들을 아잔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진한 사람들이 떠나 온 고향이 낙랑 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잔’이라는 말에는 멀리 이국땅으로 망명한 사람들이 고향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애틋한 심정이 전해진다. 진한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중국의 진秦나라에서 망명했으며, 낙랑인들을 ‘(고향에) 남아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아잔’이라 불렀던 그들은 도대체 누구일까? 이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의 정체성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3) 진한인들은 연나라 탁수유역의 망명인이다.

 

   『삼국유사』는 아래와 같은 의미심장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어쩌면 한민족 상고사의 비밀을 풀어줄 열쇠가 될지도 모르겠다.

 

   “진한辰韓 또한 진한秦韓이라고도 한다. 『후한서』에 이르기를, ‘진한의 늙은이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진나라 망명자들이 한국으로 오매 마한이 동쪽 지역 땅을 떼어 주었다. 서로를 부를 때 도徒라고 하니, 진나라 말과 비슷하였으므로 혹은 진한秦韓으로 이름 했다 하며 열두 개 작은 나라가 있어 각각 1만 호로써 나라를 일컬었다.’고 하였다.

   또 최치원이 말하기를 ‘진한은 본래 연나라 사람으로서 도피해온 사람들이므로 탁수涿水의 이름을 따서 그들이 사는 고을과 동리 이름을 사탁·점탁 등으로 불렀다.’ 신라 사람들의 방언에 탁涿 자를 읽을 때 발음을 도道라고 한다. 그러므로 지금도 혹 사량沙梁이라 쓰고, 양梁을 또한 도道라고도 읽는다(辰韓 亦作秦韓 後漢書云 辰韓耆老自言秦之亡人来適韓國 而馬韓割東界地 以與之相呼爲徒 有似秦語故 或名之爲秦韓 有十二小國 各萬户稱國 又崔致逺云 辰韓夲燕人避之者 故取涿水之名稱 所居之邑里云沙涿漸涿等 羅人方言讀涿音爲道 今或作沙梁梁亦讀道).” 『삼국유사』 ‘진한’

 

   『삼국유사』는 최치원의 말을 인용하여 ‘진한은 본래 연나라 사람으로서 도피해온 사람들이므로 탁수涿水의 이름을 따서 그들이 사는 고을과 동리 이름을 사탁·점탁 등으로 불렀다.’고 하였다. 고운 최치원(857~?)은 신라 말기의 대학자로 당시에는 자신들의 조상인 진한 유민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최치원의 증언은 상당한 무게를 지닌다고 하겠다. 탁수涿水의 이름을 따서 고을 이름으로 삼은 것으로 보아 진한의 유민들은 연나라의 탁수유역으로부터 이주해 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연나라 지역을 흘렀던 탁수는 어떤 강을 말하는 것일까?

 

   국사편찬위원회의 해설에 따르면 탁수涿水는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를 흐르는 거마하拒馬河라 하였다. 『수경주』에 의하면 거마하는 래수淶水로도 불렸으며,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삼국지연의』의 주인공 유비의 고향인 탁현 누상촌을 감싸고 흐르던 강물이기도 하였다. 『수경주』의 관련 기록을 살펴보자.

 

   “거마하는 대군 광창현 래산에서 나오는데, 즉 래수이다... 중략 ...동남쪽으로 흘러 내현의 북쪽을 지나며, 또 동쪽으로 탁현 곽정 누상리의 남쪽을 지나는데, 즉 유비의 고향이다. 또 동쪽으로 독항택을 지나는데, 못은 방성현을 감싸고 있으며, 방성현은 옛날에는 광양군에 속하였고, 후에 탁군에 속하였다. 『군국지』에 이르기를 ‘(방성)현에 독항정이 있다. 손창의 『술화』에 「독항지도」가 있는데, 말하기를 연나라 태자 단이 형가로 하여금 지니고 진나라로 들어가게 하였는데, 진왕이 형가를 죽이고 지도 또한 없어졌다고 한다.’고 하였다. 『지리서상고성현총지기』에 이르기를 ‘독항 땅은 탁군에 있다. 지금 고안현 남쪽에 독항맥이 있는데, 유주의 남쪽 경계이다.’ 하였다... 하략(巨馬河出代郡廣昌縣淶山, 即淶水也... 中略 ...東南流逕迺縣北, 又東逕涿縣酈亭樓桑里南, 即劉備之舊里也. 又東逕督亢澤, 澤苞方城縣, 縣故屬廣陽, 後隸于涿. 《郡國志》曰:縣有督亢亭. 孫暢之《述畫》有《督亢地圖》, 言燕太子丹使荊軻齎入秦, 秦王殺軻, 圖亦絕滅. 《地理書上古聖賢冢地記》曰:督亢地在涿郡. 今故安縣南有督亢陌, 幽州南界也...下略).” 『수경주』

 

   이로써 초기 신라를 구성하였던 진한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은 옛날 연나라의 탁수涿水가 흐르는 지역에서 왔는데,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의 거마하拒馬河가 흐르는 지역이었다. 그리고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삼국사기』는 ‘진한인들은 조선의 유민’이라 하였고, 『삼국지』는 ‘진한인들이 낙랑 땅에서 왔다.’고 하였다. 거마하가 흐르는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유역이 조선 땅 또는 낙랑 땅이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연나라 탁수유역에서 온 사람들을 ‘조선의 유민’ 또는 ‘낙랑의 유민’으로 부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고조선과 연나라의 역사적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4) 연나라 탁수유역은 고조선의 중심지인 조선지역이었다.

 

   『사기』‘조선열전’과 『삼국지』‘한전’에 의하면 기원전 300년경 연나라의 전성기 때, 연나라 장수 진개가 고조선을 침략하여 진번과 조선지역을 점령한 기록이 나온다. 연나라는 기원전 300년경부터 진나라에게 멸망당하는 기원전 221년까지 대략 80여 년 동안 고조선의 진번과 조선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그런데 연나라가 고조선의 진번과 조선지역을 80여 년 동안 지배하였다고는 하지만 수천 년의 세월을 고조선의 백성으로 살아온 진번과 조선지역의 사람들이 그 정체성을 완전히 잃어버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연나라는 진번과 조선지역을 차지한지 불과 20여년 만에 전성기를 이루었던 연 소왕(재위 기원전 311년 ~ 기원전 279년)이 죽은 후에는 국력이 급속도로 쇠약해졌다. 그리고 기원전 226년에는 이미 진나라에게 연나라의 수도인 계성이 함락당하는 처지였다. 실제로 연나라가 고조선의 진번과 조선지역을 점령한 기간은 80년에도 훨씬 못 미치는 짧은 기간이었으며, 또 전국칠웅 가운데서 가장 허약했던 연나라의 국력으로 보아 고조선의 진번과 조선지역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장악하였을지도 의문이다.

 

   『삼국사기』‧『후한서』‧『삼국지』‧『삼국유사』등에서 진한의 유민들을 ‘진나라의 망명인’ 또는 ‘연나라의 망명인’ 등으로 기록하면서 동시에 ‘조선의 유민’ 또는 ‘낙랑의 유민’으로 기록한 것은 이러한 사정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진한의 유민들이 연나라의 전성기 때 점령당한 조선지역에서 온 사람들이라면, 이들을 ‘진나라의 망명인’ 이나 ‘연나라의 망명인’으로 부를 수도 있으며, 동시에 ‘조선의 유민’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결국 진한 유민들이 떠나 온 곳은 연나라의 탁수가 흐르는 곳으로, 연나라가 전성기 때 점령했던 고조선의 중심지인 조선 지역이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이러한 결론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다.

 

   필자는 이미 ‘고조선의 갈석산을 찾아서’라는 글을 통하여 고조선의 중심부에 우뚝 솟아 있었던 갈석산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白石山, 해발 2,096M)이라는 것을 밝혔다. 또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의 위치 고찰’이라는 글에서는 고조선의 중심부를 감싸고 흐르는 습수와 열수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을 흐르는 영정하와 호타하이며,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滿城縣 일대임을 밝힌바 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은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의 위치를 한반도 평양일대로 보는 강단사학계의 통설은 말할 것도 없고, 현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의 난하 하류 일대로 보고 있는 재야사학계의 주장보다도 왕검성의 위치가 훨씬 더 서쪽으로 나아간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현재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실감이 잘 나지도 않았다. 도대체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현 중국 북경보다 더 서쪽에 있었다면 고조선과 우리가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제 이러한 의문들에 대하여 해답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진한의 유민들은 기원전 3세기경인 진나라 말기에 난리를 피하여 고조선의 중심지였던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지역을 떠나서 머나먼 한반도의 경주지역으로 이주하였다. 그리고 신라를 건설하고 삼국을 통일하였으며, 신라 천년의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것이다.

 

5) 금나라와 청나라의 뿌리는 신라이다.

 

   그렇다면 신라인들은 중원의 옛 고향 땅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한반도에만 안주하였을까?

 

   그렇지 않았다. 앞에서 『삼국지』 ‘한전’에서도 살펴보았듯이 그들은 낙랑사람들을 고향에 남아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아잔’이라 부르며 각별한 정을 표시하였다. 또 『삼국유사』 ‘낙랑군조’에 의하면 “신라인들은 또한 스스로 낙랑이라 일컬었으므로 지금도 이로 인하여 낙랑군부인이라고 일컫고, 또 태조가 딸을 김부에게 주고 낙랑공주라 하였다(新羅人亦以稱樂浪 故今本朝亦因之而稱樂浪郡夫人 又太祖降女於金傅 亦曰樂浪公主).”고 하는 기록이 있다. 신라인들은 스스로를 낙랑이라 부르며,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했던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에서 대륙을 경영했던 자부심을 잊지 않았다.

 

   이러한 자부심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당나라의 침략을 물리치는 원동력이 되었다. 오늘날 통설에서는 통일신라의 강역이 한반도 전역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신라의 삼국통일 의미를 폄하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청나라 고종황제의 칙명으로 만들어진 『흠정만주원류고』에는 신라의 강역이 한반도뿐만 아니라 만주도 아울렀음을 짐작할 수 있는 여러 기록들이 존재한다.

 

   “현경 5년(659)에 소정방을 웅진도대총관으로 삼아 수군과 육군 10만 명을 통솔하게 하고, 이어서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소정방과 함께 백제를 토벌하여 평정하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신라는 점점 고구려와 백제의 땅을 차지하여 그 영토가 더욱 커졌다. 용삭 원년(661)에 김춘추가 서거하자 조서를 내려 그의 아들 태부경 법민이 자리를 잇도록 하고, 개부의동삼사 상주국 낙랑군왕 신라왕으로 삼았다.

   3년(663)에 조서를 내려 신라국을 계림주도독부로 삼았다. 살펴보건대 계림과 지금의 길림은 음역과 지리가 모두 부합된다. 이때 신라는 이미 백제 및 고구려의 땅과 말갈의 땅을 겸하여 소유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에 도독부를 설치하여 왕으로 하여금 다스리도록 함으로써 그 지역의 무게를 더해준 것이다. 법민을 계림주도독으로 삼았다(顯慶五年 命蘇定方 爲熊津道大總管 統水陸十萬 仍命春秋爲嵎夷道行軍總管 與定方討平百濟 自是新羅漸有高麗百濟之地 其界益大 龍朔元年 春秋卒 詔其子太府卿法敏嗣位 爲開府儀同三司 上柱國 樂浪郡王 新羅王 三年詔以其國爲雞林州都督府 按 雞林與今吉林 音譯地理俱符 是時新羅 旣兼有百濟高麗之地與靺鞨 故設都督府於此 俾王領之 以重其鎭耳 授法敏爲雞林州都督).” 『흠정만주원류고』

 

   윗글에서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용삭 3년(663)에 신라국을 계림주도독부로 삼았는데, 계림과 길림은 발음상으로나 지리상으로 서로 부합된다고 하여 계림을 한반도의 경주가 아니라 중국 길림성의 길림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때 신라는 이미 백제 및 고구려의 땅과 말갈의 땅을 겸하여 소유하였다고 한다. 신라의 강역이 한반도를 넘어 만주지역을 아울렀음을 알 수 있다.

 

   『흠정만주원류고』는 청나라(1611~1912)의 황금기를 열었던 청 고종 년간에 태학사 아계阿桂 등이 황제의 칙명을 받들어 총 20권으로 편찬한 책이다. 우리 고대사와 관련이 깊은 만주지역의 원류를 밝힌 책으로 부여‧신라‧백제‧발해 등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참고할 점이 많다. 원래의 책이름은 『만주원류고』인데 앞에 ‘흠정欽定’이라는 말이 추가된 것은 황제의 명으로 편찬되었다는 의미로 오늘날의 국정國定과 같은 뜻이다. 이 『흠정만주원류고』에는 놀라운 기록이 담겨있는데 금나라와 청나라의 정통성을 신라에서 찾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기 935년 신라가 멸망한 후 180여년이 지난 후 만주지역에서는 금나라(1115년~1234)가 일어나서 북경을 수도로 삼고, 만주 전역과 내몽골·화북 지역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또 금나라가 멸망한 후 400여년이 흘러 만주지역에는 청나라(1611~1912)가 일어나서 역시 북경을 수도로 삼고, 중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신라와 금나라 및 청나라는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금나라 시조는 본래 신라에서 왔으며 호는 완안씨이다. 그의 부족을 완안부라 칭했다. 신라왕은 김씨이다. 그러므로 금나라의 먼 조상은 신라에서 나왔다(金始祖本從新羅來 號完顔氏 所部稱完顔部 新羅王金姓 則金之遠派 出於新羅).” 『흠정만주원류고』

 

   “역사가 전하는 바를 살펴보면 신라 왕실은 김씨 성으로 수십 세를 서로 전하였다. 그러므로 금나라가 신라로부터 유래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나라를 세울 때의 국명 역시 이 김씨 성에서 취한 것이다. 『금사지리지』에 ‘나라에 금수원이 있어서 국명으로 삼았다.’고 하였는데, 이는 역사가들이 견강부회한 말로서 족히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以史傳按之 新羅王 金姓 相傳數十世 則金之自新羅來 無疑 建國之名 亦應取此 金史地理地 乃云 以國有金水源 爲名 史家附會之詞 未足憑耳).” 『흠정만주원류고』

 

   『흠정만주원류고』는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에서 왔으며, 금나라의 국명 또한 신라 왕실의 김씨 성에서 유래하였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고려사』에서도 이와 비슷한 내용의 기록이 여러 곳에 보인다.

 

   “이달에 생여진의 완안 아골타가 황제라 칭하고, 이름을 민이라 바꾸었으며 국호를 금이라 하였다. 그 풍속은 흉노와 같고 모든 부락에는 성곽이 없으며 산과 들에 흩어져 산다... 중략 ...그 땅은 서쪽으로는 거란과 맞닿고, 남쪽으로는 우리 경계와 맞닿는다. 예로부터 거란과 우리 조정을 섬겨왔다. 매번 조회할 때마다 사금, 담비가죽, 좋은 말을 예물로 바쳤다. 우리 조정도 또한 은과 비단을 후하게 주었으며, 매년 이와 같이 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옛날에 우리나라 평주의 승려 금준이 여진으로 숨어 들어가서 아지고촌에서 살았는데, 이 분이 금나라의 선조이시다.’고 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평주의 승려 김행의 아들 극수가 처음으로 여진의 아지고촌으로 들어가서, 여진의 여자를 취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고을태사라고 하였다. 고을이 활라태사를 낳고, 활라는 아들이 많았다. 장자는 핵리발이라 하고, 막내아들은 영가라 하였다. 영가가 가장 영웅스럽고 호걸스러워 민중의 마음을 얻었다. 영가가 죽자 핵리발의 장자 오아속이 자리를 이었다. 오아속이 죽자 동생 아골타가 즉위하였다.’고 하였다(是月, 生女眞完顔阿骨打稱皇帝, 更名旻, 國號金. 其俗如匈奴, 諸部落無城郭, 分居山野... 中略 ...其地西直契丹, 南直我境, 故嘗事契丹及我朝. 每來朝, 以麩金·貂皮·良馬爲贄, 我朝亦厚遺銀幣, 歲常如此. 或曰, “昔我平州僧今俊, 遁入女眞, 居阿之古村, 是謂金之先.” 或曰, “平州僧金幸之子克守, 初入女眞阿之古村, 娶女眞女, 生子曰古乙太師. 古乙生活羅太師, 活羅多子. 長曰劾里鉢, 季曰盈歌, 盈歌最雄傑, 得衆心. 盈歌死, 劾里鉢長子烏雅束嗣位, 烏雅束卒, 弟阿骨打立.” 『고려사』「세가」 ‘예종 10년 1월조’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 왕실의 사람이었다는 기록은 위에서 살펴 본 『흠정만주원류고』나 『고려사』뿐만 아니다. 『송막기문』‧『삼조북맹회편』‧『구조편년비요』‧『대금국지』‧『문헌통고』등에도 금나라의 건국과정이 나와 있는데, 하나같이 ‘아골타가 금나라를 세웠는데, 아골타의 선조는 신라 사람이었다.’고 하였다.

 

   또 청나라를 세운 누루하치는 1611년 만주지역을 통일한 후 금나라를 잇는다는 뜻으로 나라 이름을 후금後金이라 하였다. 후금을 세운 누루하치 등 건주여진의 귀족들은 금나라 태조인 완안 아골타의 직계후손들이었다. 후금은 누루하치의 후계자인 홍타이지(재위: 1626~1643년)가 1636년에 나라 이름을 청淸으로 바꾸었는데, 청나라 황실의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였다. 황실 성의 유래에 대하여 『만주원류고』‘권수卷首 유지諭旨’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 왕조의 성은 애신각라씨라 한다. 우리말에 금을 애신이라 이르는데, 가히 금나라와 같은 뿌리라는 증거이다(我朝得姓曰愛新覺羅氏 國語謂金曰愛新 可為金源同派之証).” 『만주원류고』

 

   이상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청나라 황실은 『흠정만주원류고』라는 국정 역사서를 통하여 금나라는 신라로부터 유래했으며, 청나라는 금나라를 계승했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이는 결국 금나라와 청나라의 뿌리가 신라에 있음을 대내외에 천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나라 역사책에는 이러한 내용이 한 구절도 나오지 않는다. 중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대제국을 건설하였던 그들이 ‘우리의 뿌리는 신라이다.’라고 외치고 있는데, 우리는 굳이 외면만 할 필요가 있을까?

 

3. 마무리 글

 

   지금으로부터 2200여 년 전 조선의 유민들은 진나라의 난리를 피하여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에 위치했던 고조선의 중심지로부터 한반도로 이주하였다. 그들은 떠나온 고향과 찬란했던 고조선의 영광을 결코 잊지 않았다. 신라를 건설하고 삼국통일을 이루었으며, 신라천년의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935년에 신라는 비록 멸망하였지만 그들 중 일부는 만주를 거쳐 힘을 기른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서 중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대제국인 청나라를 건설하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신라의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 지나친 비약일까?

 

   오늘날 강단사학계의 통설에서는 신라를 건설한 조선유민들이 현 한반도 평양부근에서 경상도 경주부근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게 보는 것은 평양이 한나라 낙랑군이라는 선입견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삼국사기』‧『후한서』‧『삼국지』‧『삼국유사』등 관련사서 그 어디에도 조선의 유민들이 한반도 평양부근에서 왔다는 기록은 없다. 하나같이 진한의 유민들이 중국에서 왔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삼국유사』에 기록된 최치원의 말에 의하면 진한의 유민들은 연나라의 탁수가 흐르는 지역에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연나라의 탁수는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를 흐르는 거마하이다. 그곳이 고조선의 중심지역이며, 한나라 낙랑군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그리고 통설에서는 한반도 전역에서 출토되고 있는 중국계 유물들을 평양에 설치되었던 한나라 낙랑군을 통하여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인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는 한민족 문화의 타율성을 강조하는 일제 식민사관의 영향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고조선 유민들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에 위치했던 고조선의 중심지를 떠나서 한반도로 피난 올 때, 그들 스스로가 계승 발전시킨 유물들을 지니고 이 땅에 도래하였다. 그러므로 한반도 전역에서 출토되고 있는 중국계 유물들은 그 성격이 새롭게 재조명되어야 하며, 더구나 그 유물들은 한나라 낙랑군이 한반도 평양에 설치되었다는 근거가 될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다음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