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족의 대이동(제2회) <고조선 준왕의 망명과 소삼한의 성립>

2015. 4. 23. 23:43우리 역사 바로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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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하늘이다 | 조회 490 |추천 1 | 2015.01.11. 10:02 http://cafe.daum.net/alhc/ALGC/3728 

 

 

고조선 준왕의 망명과 소삼한의 성립

 

                                                                                                       작성자 : 사람이 하늘이다

 

   1. 머릿글

 

   한민족 상고사의 최대쟁점은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의 위치와 삼한의 위치가 아닐까 싶다. 특히 삼국시대의 전신에 해당하는 삼한의 위치 문제는 고려시대 이후로 지금까지 일천여년 동안 학자들 간에 첨예하게 의견대립이 되어온 사안이다. 대한민국의 국호 또한 삼한으로부터 나왔으므로 삼한의 성립과정과 위치문제는 오늘날 우리들의 정체성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한민족의 상고사가 고조선에서 삼한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의 망명사건이다. 준왕의 망명사건은 고조선과 삼한을 이어주는 연결고리에 해당한다.

 

   기원전 3세기를 전후하여 동아시아대륙은 격변의 시기였다. 기원전 221년 중원을 통일한 진나라의 진시황은 불로장생의 신선술에 큰 관심을 가지고, 많은 방사들을 동해바다로 보내어 불로초를 구해오도록 하였다. 연나라 사람 노생이 불로초는 구하지 못하고 신선의 글이라는 녹도서錄圖書를 구해 바쳤는데, 거기에는 ‘진나라를 망하게 할 자는 호胡이다(亡秦者胡也).’라고 쓰여 있었다.

 

   진나라를 망하게 할 ‘호胡’가 자신의 아들인 호해胡亥를 가리키는 줄도 모르고, 북쪽의 흉노라고 생각한 진시황은 기원전 214년 몽염장군으로 하여금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북쪽으로 호胡를 공격하여 하남지역을 점령하고 장성을 쌓게 하였다. 이리하여 인류역사상 최대의 토목공사로 일컬어지는 진나라 만리장성의 축조가 시작되었다. 만리장성에 동원된 인부는 무려 150만여 명에 달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고역을 피하여 많은 난민들이 한반도로 흘러들었다. 『위략』에 따르면 이 시기에 조선왕 부否가 죽고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이 즉위하였다.

 

   기원전 210년 진시황은 천하를 순행하던 중 사구평대(沙丘平臺: 현 하북성 형태시 평향현)에서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진시황 사후 곧바로 진승과 오광의 난이 일어나서 기원전 206년 진나라는 멸망하고 말았으며, 그로부터 5년 후인 기원전 202년 한고조 유방이 천하를 다시 통일할 때까지 10여 년간 중원은 또 다시 피비린내 나는 전란에 휩싸였다. 중원의 대혼란은 고조선에도 그 여파가 고스란히 파급되었으며, 기원전 195년 한고조 유방이 세상을 떠나자 연왕 노관은 흉노로 망명하였고 위만은 고조선의 준왕에게로 망명하였다.

 

   『삼국지』에서 인용한 『위략』의 기록에 따르면 위만은 고조선의 서쪽 변방에 거주하도록 해주면 중국의 망명자를 거두어 조선의 울타리가 되겠다고 준왕을 설득하였다. 이에 준왕은 그를 믿고 사랑하여 박사에 임명하고 규圭를 하사하고, 백리의 땅을 봉해 주어 서쪽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 위만은 중국의 망명자들을 유인하여 그 무리가 점점 많아지자, 사람을 준왕에게 파견하여 속여서 말하기를, ‘漢나라의 군대가 열 군데로 쳐들어오니, 왕궁에 들어가 숙위하기를 청합니다.’ 하고는 드디어 되돌아서서 준왕을 공격하였다. 준왕은 만과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못하였고,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을 떠나 망명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고조선의 준왕은 어디에서 어디로 망명한 것일까?

 

   준왕이 위만에게 패하여 떠난 왕검성지역은 고조선의 중심지이며 훗날 한나라 낙랑군이 설치된 곳이다. 또 『삼국지』‧『후한서』등에 따르면 준왕이 바다를 경유하여 망명한 곳은 한韓의 땅으로 마한의 수도가 위치했던 곳이다. 그러므로 준왕의 망명사건을 통하여 고조선에서 삼한으로 이르는 한민족 상고사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해 본다.

 

   현재 강단사학계의 통설은 준왕이 떠난 왕검성을 한반도 평양일대로 보고, 준왕이 바다를 경유하여 도착한 곳을 전북 익산 일대로 비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고조선의 강역을 한반도 북부와 만주일대로 보고, 마한은 경기도·충청도·전라도 지역, 진한과 변한은 경상도지역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강단사학계의 이러한 통설은 정사 기록들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각종 사료들을 토대로 준왕이 떠난 고조선의 중심지와 바다를 경유하여 준왕이 도착한 마한의 위치를 살펴보려고 한다.

 

   2. 본 글

 

   (1) 왕부의 『잠부론』으로 보는 왕검성의 위치

 

   준왕의 망명과 관련하여 왕검성의 위치를 살펴볼 수 있는 최고의 사료는 왕부의 『잠부론潛夫論』이다. 준왕의 망명사건은 『후한서』‧『위략』‧『삼국지』등 여러 사서에 언급되어 있지만 이들 사서들은 모두 준왕의 망명사실과 망명하여 도착한 곳에 대한 정보만 있을 뿐, 준왕이 떠난 왕검성의 위치에 대한 정보는 전무한 실정이다. 그러므로 준왕의 망명과 관련하여 왕검성의 위치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는 사료는 현재로서는 왕부의 『잠부론』이 유일하다.

 

   왕부(王符, 85?~ 162)는 후한시대 사람으로 그가 지은 『잠부론』은 왕충의 『논형』및 중장통의 『창언』과 더불어 후한시대의 3대 저작으로 손꼽히는 명저이다. 『잠부론』에는 고조선의 준왕이 떠난 왕검성의 위치가 어디인지 상당히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이 담겨져 있어 예로부터 많은 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다.

 

   “옛날 주 선왕 때 역시 한후가 있었는데 그 나라는 연나라 가까이 있었다. 『시경』에 이르기를 ‘커다란 저 한성은 연나라 백성들이 쌓은 것이라네.’라고 하였다. 그 후에 한韓의 서쪽에서도 역시 성을 한韓이라 하였는데, 위만에게 정벌당하여 해중海中으로 옮겨가 살았다(昔周宣王亦有韓侯,其國也近燕,故詩云:普彼韓城,燕師所完. 其後韓西亦姓韓, 爲魏滿所伐,遷居海中).” 『잠부론』‘지씨성’

 

   『잠부론』의 ‘지씨성’조는 중원에 존재하는 성씨의 유래를 적은 것이다. 위의 내용 중 위만에게 정벌당하여 바다로 옮겨간 한韓씨는 조선왕 준을 가리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에 한의 서쪽에서도 역시 성을 한이라 하였다(其後韓西亦姓韓).’는 구절에 나오는 ‘한서韓西’는 주 선왕 때 한후가 다스리던 한국 또는 한성韓城의 서쪽이라는 의미이며, 종합적으로 한후가 다스렸던 한성의 서쪽으로 봐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 한성의 서쪽에 역시 한韓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는데 이는 조선왕 준을 가리킨다. 이를 통하여 주나라 선왕 때 한후가 다스리던 한성의 서쪽에 조선왕 준이 다스리던 고조선의 수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시경』에 나오는 한후가 다스렸던 한성의 위치는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이 한성의 위치를 찾으면 그 서쪽에 위치한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의 위치도 자연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위의 『잠부론』에서 언급한 시는 『시경』 ‘한혁편’에 나오는데, 서주의 선왕(宣王, 기원전 828?~782년) 때 황실을 방문한 한후韓侯를 칭송하여 당시 서주의 대신이었던 윤길보가 쓴 작품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성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하여 『시경』 ‘한혁편’의 내용 일부를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溥彼韓城(부피한성) : 커다란 저 한韓나라의 성은

   燕師所完(연사소완) : 연나라 백성들이 쌓은 것이라네.

 

   以先祖受命(이선조수명) : 선조들이 받으신 명을 받들어

   因時百蠻(인시백만) : 여러 오랑캐 나라들을 다스리신다.

 

   王錫韓侯(왕사한후) : 왕께서는 한韓나라 제후에게

   其追其貊(기추기맥) : 추追와 맥貊을 내려주셨도다.

 

   奄受北國(엄수북국) : 북쪽 나라들을 모두 다 맡아서

   昊以其伯(호이기백) : 그곳의 최고 통치자가 되었다.

 

   『시경』속에 나오는 한후韓侯는 기원전 800년경 서주 황실을 방문하여 서주의 제10대 여왕厲王의 조카딸과 혼인하고, 추追와 맥貊 등 북쪽 나라들을 모두 맡아 다스리는 강력한 통치자로 묘사되고 있다. 이 한후가 다스렸다는 한성韓城의 위치와 관련하여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지금의 중국 섬서성 한성현韓城縣이고 다른 하나는 현 중국 하북성 고안현 방성方城이다.

 

   『시경』 ‘한혁편’은 첫머리에 “높고 큰 양산은 우임금이 다스렸도다. 밝으신 그 도를 한韓나라 제후가 명을 받았도다!(奕奕梁山 維禹甸之 有倬其道 韓侯受命)”로 시작되고 있다. 우임금이 다스렸다는 양산은 현 중국 섬서성에 위치한 한성韓城과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시경』 ‘한혁편’에 나오는 한성은 섬서성에 위치한 한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수경주』에는 ‘한혁편’에 나오는 한성을 현 중국 하북성 방성에 위치한 한성으로 보는 견해도 보인다. 『수경주』 ‘성수조’의 관련 기록을 살펴보자.

 

   “... 상략 ...성수는 또 동남쪽으로 한성韓城의 동쪽을 지난다. 『시경』‘한혁장’에 이르기를 ‘저 커다란 한성은 연나라 백성들이 쌓았네. 왕께서 한후에게 추追와 맥貊을 주시니 북쪽 나라를 모두 맡았네.’라고 하였다. 정현은 말하기를 ‘주나라가 한후를 봉하니 한성에 거하여 후백이 되었다. 험이의 핍박으로 점점 동쪽으로 이동하였다.’고 하였다. 왕숙은 말하기를 지금 탁군 방성현에 한후성이 있다. 세상에서는 한호성이라 이르는데 옳지 않다... 중략... 성수는 또 동남쪽으로 흘러 거마하로 들어가므로 바다에는 이르지 못한다(... 上略 ...聖水又東南逕韓城東, 《詩韓奕章》曰:溥彼韓城, 燕師所完, 王錫韓侯, 其追其貊, 奄受北國. 鄭玄曰:周封韓侯, 居韓城為侯伯, 言為獫夷所逼, 稍稍東遷也. 王肅曰:今涿郡方城縣有韓侯城, 世謂之寒號城, 非也... 中略 ...又東南流注于巨馬河而不達于海也).” 『수경주』 ‘성수조’

 

   성수聖水는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와 랑방시의 경계를 흐르는 백구하白溝河를 가리킨다. 그 성수가 한성韓城의 동쪽을 지난다고 한다. 『수경주』의 저자인 역도원은 그 한성을 해설하면서 『시경』‘한혁장’을 언급하고 있다. 역도원은 『시경』에 나오는 한성을 방성현에 위치한 한성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정현의 주를 인용하여 한성이 점점 동쪽으로 이동하였음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섬서성 한성현에 위치한 한성이 이곳 하북성 방성현으로 옮겨졌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왕숙의 말을 인용하여 한성이 탁군 방성현의 한후성韓侯城이라고 하였다.

 

   『수경주』등의 이러한 기록에 따라 오늘날 학자들은 『시경』에 나오는 한성의 위치를 중국 섬서성 한성현韓城縣 또는 하북성 고안현 방성方城으로 보고 있으며, 김상기에 의하면 서주 시대에는 섬서성의 한성에 있다가 동주 시대에는 하북성 한성으로 이동하였다고 보고 있다.(『한국학기초자료선집 고대편, 164쪽 주』참조)

 

   『잠부론』의 저자인 왕부도 역시 한성의 위치를 현 중국 하북성 랑방시 고안현 방면에 위치한 한성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잠부론』에서 “한의 서쪽에서도 역시 성을 한이라 하였는데, 위만에게 정벌당하여 해중으로 옮겨 살았다.”고 하였다. 만약 한후가 다스렸던 한성의 위치를 현 중국 섬서성 한성현으로 본다면 한성의 서쪽에 위치한 고조선도 섬서성에 위치한 것이 되므로 이는 역사와 잘 부합하지 않는다.

 

   『잠부론』에 나오는 한후가 다스렸던 한성을 현 중국 하북성 랑방시 고안현 일대로 보면,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의 위치를 대략적으로 알 수 있다. 『잠부론』에 의하면 왕검성은 한성의 서쪽에 위치한다. 한성이 위치한 현 중국 하북성 랑방시 고안현의 서쪽에는 하북성 보정시가 위치하며, 더 서쪽으로 나아가면 험준한 태행산맥이 나오고 그 너머로는 전통적으로 연나라 땅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위치할 수 있는 곳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밖에 없다(아래의 왕검성 및 한성위치 지도 참조). 더구나 한성의 서쪽에는 한나라 낙랑군에 속하였던 수성현遂城縣이라는 지명이 아직도 남아있으며, 위만의 도성으로 보이는 만성현滿城縣이라는 지명도 남아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잠부론』의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임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강단사학계의 수많은 학자들은 왜 이렇게 손쉬운 왕검성의 위치를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이는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현 한반도 평양일대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왕검성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에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왕검성 ‧ 섬서성 한성1 ‧ 하북성 한성2의 위치

 

 

   그러면 강단사학계는 저 유명한 왕부의 『잠부론』에 나오는 기록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 것일까? 도대체 어떻게 해석하길래 이처럼 손쉬운 왕검성의 위치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잠부론』의 핵심에 해당하는 “그 후에 한韓의 서쪽에서도 역시 성을 한韓이라 하였는데, 위만에게 정벌당하여 해중으로 옮겨가 살았다(其後韓西亦姓韓, 爲魏滿所伐,遷居海中).”는 구절의 ‘한서韓西’에 대한 이병도의 해설을 살펴보자.

 

   “여기의 한서韓西를 성명으로 보는 이도 있지만, 그렇게 보면 문장상 한韓이 겹들어 가고 또 동서同書의 문례로 보더라도 서西는 확실히 방위를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한후국韓侯國의 서쪽이라고 해서는 아래의 구절과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래의 구절은 분명히 조선에 관한 이야기인데, 조선의 위치가 한후국의 서쪽에 있다고 해서는 말이 되지 아니하므로, 나는 일찍부터 ‘한서’를 ‘한동韓東’의 오誤로 보았다.”『한국고대사연구 48쪽』

 

   아니나 다를까 이병도는 조선의 위치가 한후국의 서쪽에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서韓西’를 ‘한동韓東’의 오기로 보고 『잠부론』의 원래 뜻과는 정반대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한나라 낙랑군이 한반도 평양이라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이와 다른 내용의 사료들은 모두 위서나 오기로 부정해버리는 것, 이것이 현 강단사학계 통설의 실체라고 할 수 있다.

 

   (2) 준왕의 1차 망명지는 현 한반도 평양지역이다.

 

   지금까지 왕부의 『잠부론』을 통하여 고조선의 준왕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부근에 위치한 왕검성에서 위만에게 패하여 바다를 경유하여 망명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 준왕이 망명하여 처음 도착한 곳은 어디인지 살펴보기로 한다.

 

   『잠부론』에서는 “위만에게 정벌당하여 해중海中으로 옮겨 살았다( 爲魏滿所伐,遷居海中).”고 하여 준왕이 망명한 곳을 ‘해중海中’으로 표현하였다. 『잠부론』의 내용만으로는 준왕이 망명한 곳을 구체적으로 알기 어렵다. 『삼국지』에서는 준왕의 망명과정을 좀 더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조선)후 준이 참람되이 왕이라 일컫다가 연나라에서 망명한 위만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빼앗겼다. (준왕은) 그의 근신과 궁인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를 경유하여 한의 지역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한왕이라 칭하였다. 『위략』에 이르기를 ‘준의 아들과 친척으로서 (조선)나라에 남아있던 사람들도 그대로 한씨라는 성을 사칭하였다. 준은 해중海中에서 왕이 되었으나 조선과는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그 뒤 준의 후손은 절멸되었으나, 지금 한인 중에는 아직 그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이 있다.’고 하였다(侯準旣僭號稱王, 爲燕亡人衛滿所攻奪,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 魏略曰: 其子 及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 準王海中, 不與朝鮮相往來. 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삼국지』「위지동이전」 ‘한전’

 

   준왕의 망명과 관련한 원사료는 『잠부론』과 『위략』으로 볼 수 있는데, 두 사료는 모두 준왕이 망명한 곳을 ‘해중海中’으로 기록하였다. 이때까지도 중국에서는 한반도를 섬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반면 『위략』을 인용한 『삼국지』에서는 ‘해중海中’이라는 단어 대신 ‘한의 땅(韓地)’으로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후한서』에서는 아래와 같이 준왕이 망명한 곳을 마한이라고 더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과거에 조선왕 준이 위만에게 패하여, 자신의 남은 무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도망, 마한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스스로 한왕이 되었다. 준의 후손이 끊어지자, 마한 사람이 다시 자립하여 진왕辰王이 되었다(初, 朝鮮王 準爲衛滿所破, 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 攻馬韓, 破之, 自立爲韓王. 準後滅絶, 馬韓人復自立爲辰王).” 『후한서』‘동이열전’

 

   『후한서』는 중국 남조의 송나라 범엽(范曄 : 398~446)이 엮은 책으로 진수의 『삼국지』보다 150여년 후에 편찬된 사서이다. 『후한서』에서는 준왕과 함께 망명한 무리가 수천 명이라는 구체적인 망명자의 규모와 더불어 준왕이 마한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스스로 한왕이 되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덧붙이고 있다.

 

   남조의 송나라(420~479) 시대에는 백제가 송나라와 사신을 교환하던 시기였으므로 『후한서』의 저자인 범엽은 한반도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준왕의 망명과 관련된 기록은 『후한서』가 앞선 기록인 『잠부론』‧『위략』‧『삼국지』등과 내용이 서로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가장 상세하므로 최종적인 것으로 인용하려고 한다.

 

   그러면 『후한서』에서 ‘조선왕 준이 위만에게 패하여 무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도망하여 마한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스스로 한왕이 되었다.’고 하였는데, 준왕이 공격한 마한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살펴보자.

 

   “신라의 최치원은 ‘마한은 고구려,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이다.’라고 하였으니, 이와 같은 여러 설이 모두 유사하다고 할 만하다(崔致遠曰: ‘馬韓則高麗, 卞韓則百濟, 辰韓則新羅也’ 此諸說, 可謂近似焉).” 『삼국사기』 ‘잡지 제3’

 

   “『위지』에 이르기를 ‘위만이 조선을 치니 조선왕 준이 궁인과 좌우를 데리고 바다를 건너 남으로 한 땅에 이르러 나라를 건국하고 이름을 마한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견훤이 태조에게 올린 글에 이르기를 ‘옛날에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혁거세가 일어나자 이에 백제가 금마산에서 나라를 창건하였다.’고 하였다. 최치원이 말하기를 ‘마한은 고구려요, 진한은 신라이다.’라고 하였다. 『본기』에 의하면 ‘신라가 먼저 갑자년에 일어나고 고구려가 그 후 갑신년에 일어났다.’고 하였는데, 이렇게 말하는 것은 조선왕 준을 두고 말한 것이다. 이로써 동명왕이 일어난 것은 이미 마한을 병합한 때문이란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고구려를 일컬어 마한이라고 한 것이다. 요즘 사람들이 더러는 금마산을 두고 마한이 백제로 되었다고 하지만 이는 대체로 잘못이다. 고구려 땅에는 본래 마읍산이 있었으므로 이름을 마한이라 한 것이다(魏志云 魏滿擊朝鮮 王凖率宫人左右 越海而南至韓地 開國號馬韓 甄萱上太祖書云 昔馬韓先起赫世勃興 於是百濟開國於金馬山 崔致逺云 馬韓麗也 辰韓羅也 㨿本紀則羅先起甲子 麗後起甲申 而此云者以王凖言之耳 以此知東明之起 已并馬韓而因之矣 故稱麗爲馬韓 今人或認金馬山以馬韓爲百濟者盖誤濫也 麗地自有邑山故名馬韓也).” 『삼국유사』 ‘마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모두 “마한은 고구려,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이다.”라고 하는 최치원의 설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운 최치원(崔致遠, 857년 ~ ?)은 통일신라시대의 대학자이며, 당시에는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 540 ~ 576) 때 거칠부 등이 편찬한 역사책이 전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삼한의 역사와 관련하여 최치원의 말은 무게를 지닐 수밖에 없다.

 

   특히 『삼국유사』는 ‘고구려 땅에는 마읍산이 있었으므로 이름을 마한으로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읍산은 현 한반도 평양지역에 위치한 산으로 비정되므로 마한의 수도가 현 한반도 평양지역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후한서』에서 조선왕 준이 위만에게 패하여 무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도망하여 공격한 마한 땅은 현 한반도 평양일대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위의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요즘 사람들이 더러는 금마산을 두고 마한이 백제로 되었다고 한다.’는 구절에서 보듯이 당시에도 마한을 고구려가 아니라 백제로 보는 견해도 상당했던 듯하다.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는 1285년에 편찬되었는데, 그보다 2년 늦은 1287년에 편찬된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는 ‘준이 마침내 금마군으로 이거하였다(準乃移居金馬郡).’고 하였다. 준왕이 망명한 곳을 전라북도 익산지역으로 본 것이다. 권람의 『응제시주』에도 ‘기준이 위만의 난을 피하여 바다를 통해 남쪽으로 금마군에 이르러 마한을 세웠다. 지금의 익산군으로 52개의 작은 나라를 거느렸다(箕準避衛滿之亂 浮海而南至金馬郡 開國號馬韓 今益山郡 所統小國五十二).’고 하였다.

 

   또『고려사지리지』에서도 아래와 같이 금마군을 마한으로 보았다.

 

   “금마군: 본래 마한국이다(후조선왕 기준이 위만의 난을 피하여 바다를 통해 남쪽으로 와서 한의 땅에 이르러 나라를 열고 마한이라 하였다). 백제시조 온조왕이 병합한 이래로 금마저라 불렀으며, 신라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에 이르러 내속하였다. 충혜왕 후5년에 원순제 기황후의 외향이라는 이유로 익주로 승격시켰다. 미륵산 석성이 있다(세간에 전하기를 기준이 처음으로 성을 쌓았다고 하여 기준성이라 부른다). 또 후조선 무강왕과 왕비의 릉이 있다(속칭 말통대왕릉이라고도 하며, 또한 백제 무왕의 아명이 서동이었다고도 한다)(本馬韓國【後朝鮮王箕準, 避衛滿之亂, 浮海而南, 至韓地開國, 號馬韓.】.百濟始祖溫祖王幷之, 自後, 號金馬渚, 新羅景德王, 改今名. 至高麗, 來屬. 忠惠王後五年, 以元順帝奇皇后外鄕, 陞爲益州. 有彌勒山石城【諺傳, 箕準始築, 故謂之箕準城】. 又有後朝鮮武康王及妃陵【俗號末通大王陵, 一云, 百濟武王, 小名薯童】.” 『고려사지리지』 ‘금마군’

 

   『고려사지리지』는 ‘금마군의 미륵산 석성을 기준성箕準城으로 부르며, 금마군에 후조선 무강왕과 왕비의 릉이 있다.’고도 하였다. 후조선 무강왕은 조선왕 준을 가리킨다. 청주한씨 족보의 마한세계馬韓世界에 따르면 마한은 1세 무강왕武康王으로부터 9세 계왕稽王까지 202년간 전해졌다고 한다. 『제왕운기』‧『응제시주』‧『고려사지리지』 등의 ‘조선왕 준이 바다를 통해 남쪽으로 도망하여 금마군(현 전라북도 익산시)에 이르러 마한을 세웠다.’는 이러한 견해는 훗날 일부 실학자들이 기자조선을 남쪽의 마한과 연결하여 삼한정통론을 내세우는 이론의 배경이 되었다. 현 강단사학계의 통설도 준왕이 도망한 곳을 익산‧금마 일대로 비정하여 이를 계승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왕 준이 망명한 마한의 위치를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 북부지역으로 보는 견해와 전라북도 익산을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 남부지역으로 보는 견해가 크게 엇갈리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삼한의 위치도 ‘고구려를 마한’으로 보는 견해와 ‘백제를 마한’으로 보는 견해가 서로 엇갈려 고려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일천여 년 동안 학자들 사이에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또 『후한서』에서는 ‘조선왕 준이 마한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스스로 한왕이 되었다.’고 기록한 반면 『삼국유사』및 『응제시주』등 우리나라 대부분의 역사서들은 조선왕 준이 마한을 건국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먼저 조선왕 준이 마한을 건국한 것인지 아니면 준왕 이전부터 마한이 있었는지 살펴보자. 『후한서』와 『삼국지』의 ‘동이열전’ 기록에 의하면 “진한은 그 노인들이 스스로 말하되, 진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로서 고역을 피하여 한국에 오자, 마한이 그들의 동쪽 지역을 분할하여 주었다.”고 하였다. 진나라의 고역이란 만리장성의 축조를 말하는 것이므로 진한의 유민들이 망명 한 시기는 대략 기원전 214년경으로 볼 수 있다. 반면 준왕의 망명은 기원전 194년경이므로 준왕이 망명하기 20여 년 전부터 이미 마한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후한서』에서 ‘조선왕 준이 마한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스스로 한왕이 되었다.’고 한 기록이 정확한듯하다.

 

   다음으로 조선왕 준이 공격하여 쳐부순 마한의 위치와 관련하여 필자는 최치원이 말한 ‘마한은 고구려이다.’라고 하는 설이 타당하다고 본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최치원은 통일신라시대의 대학자일 뿐만 아니라 당시에는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 540 ~ 576) 때 거칠부 등이 편찬한 역사책이 전해졌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도 최치원의 말을 따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마한을 고구려로 보면, 마한 땅은 마읍산이 있었다는 평양일대를 중심으로 한반도 북부지역 뿐만 아니라 만주일대까지 포함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당시 마한이 진한의 유민들에게 경상도 경주부근의 땅을 나누어 주었다고 하였으므로 마한은 한반도 전체를 다스렸다고 보아진다. 결국 준왕에게 격파되기 전의 마한은 평양일대를 중심으로 한반도 전체와 만주일대를 포괄하는 넓은 강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3) 준왕의 2차 망명지는 현 전라북도 익산시 일대이다.

 

고조선 준왕의 망명로

 

 

   그러면 이승휴의 『제왕운기』를 비롯한 우리나라 대부분의 역사서에 준왕이 남쪽으로 도망하여 금마군(현 전라북도 익산시)에 이르러 마한을 세웠다고 한 까닭은 무엇일까? 또 『후한서』와 『삼국지』의 ‘동이열전’에서 ‘마한의 북쪽에 낙랑 또는 대방이 있다.’고 기록하여 마한을 평양 이남지역으로 보고 있는데 이러한 기록들도 가볍게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서로 상반되어 보이는 역사기록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후한서』‧『삼국사기』‧『삼국유사』등의 기록에 따라 준왕이 수천 명의 무리를 이끌고 망명하여 처음 도착한 곳은 마읍산이 있는 마한의 수도인 현 한반도 평양지역이 분명해 보인다. 당시 마한은 중국의 혼란으로 이전부터 많은 유민들이 유입되었으며, 준왕 집단의 망명은 마한사회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준왕 집단은 고조선이라는 국가를 경영한 경험이 있으며, 무리가 수천 명에 달하였으므로 백여 척 이상의 배를 동원하여 상당한 양의 재물과 무기도 지니고 망명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한 상황에서 정변이 일어나서 마한이 분열되었으며, 마한의 수도였던 평양지역에는 낙랑국이 들어서고, 준왕은 또 다시 쫓기어 금마군(현 전라북도 익산시)으로 남하하여 새로운 마한을 세웠을 가능성이다. 또는 준왕 집단에게 격파당한 마한의 지배층들이 남하하여 새로운 마한을 세웠을 가능성도 있다. 이럴 경우 이승휴의 『제왕운기』를 비롯한 우리나라 대부분의 역사서에서 ‘준왕이 남쪽으로 도망하여 금마군에 이르러 마한을 세웠다.’고 하는 기록도 충족할 수 있다.

 

   3. 마무리 글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의 망명과 관련하여, 준왕이 떠난 왕검성의 위치에 대한 정보를 알 수 있는 직접적인 사료는 왕부의 『잠부론』이 유일하다. 『잠부론』에 의하면 옛날 주나라 선왕 때 한韓나라 제후가 있었는데, 그 한후가 다스리는 한성이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 랑방시 고안현 일대에 있었다. 그리고 그 한성의 서쪽에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있었다. 현 하북성 랑방시 고안현의 서쪽은 현 하북성 보정시 일대가 되므로 준왕이 떠난 왕검성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에 위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194년경 위만에게 왕검성을 빼앗긴 준왕이 바다를 통해 처음 망명한 곳은 마한의 수도인 한반도 평양일대였다. 『후한서』에 의하면 준왕은 망명할 때 수천 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있었으며, 마한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스스로 한왕이 되었다고 하였다. 준왕의 망명사건은 마한사회에 큰 변화를 몰고 왔다. 준왕이 한반도 평양일대에 위치한 마한을 쳐부수고 그곳에 안착하였는지 아니면 안착하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망명하였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청주한씨 족보의 『마한세계』에 따르면 준왕은 전라북도 익산의 금마로 수도를 옮긴 후 그 해에 세상을 떠나고, 그의 후손들이 9세에 이르도록 202년 동안 마한을 다스린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승휴의 『제왕운기』이래로 『응제시주』‧『고려사지리지』등 여러 역사서에서 준왕이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 일대로 망명하여 마한을 세웠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러한 기록들을 긍정적으로 검토하면 준왕은 1차 망명지인 한반도 평양일대의 마한에서 안착하지 못하고, 다시 전라북도 익산의 금마일대로 2차 망명하여 그곳에서 새로운 마한을 세웠을 가능성이 있다.

 

   지금까지 강단사학계에서는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을 현 한반도 평양지역으로 보고, 위만에게 왕검성을 빼앗긴 준왕이 바다를 통해 도망한 곳은 현 전라북도 익산부근으로 비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왕부의 『잠부론』에 나오는 준왕의 망명기록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등에서 최치원의 설을 인용하여 “마한은 고구려, 변한은 백제, 진한은 신라이다.”라고 하는 가장 기본적인 사료의 내용마저도 충족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하여 고조선에서 삼한을 거쳐 삼국시대에 이르는 한민족의 상고사가 아직도 짙은 안개 속을 헤매는 것이다.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에 위치하였다. 필자는 ‘동이족의 대이동(제1회) <신라인들은 어디에서 왔는가?>’라는 글을 통하여 신라를 형성하였던 진한인들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의 탁수유역에서 왔으며, 그곳 낙랑사람들을 ‘아잔’이라고 부르고 신라인들 스스로도 낙랑이라 불렀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신라를 형성하였던 고조선 백성들의 대이동은 마한이 그들에게 동쪽 땅을 떼어주어 살게 함으로써 안정될 수 있었다.

 

   그러나 고조선 준왕의 망명은 일반 고조선 백성들의 망명과는 사뭇 달랐다. 준왕의 망명집단은 고조선이라는 나라를 경영하였던 경험이 있는 지배층으로 무리수도 수천 명에 달하였고, 상당량의 재력과 무기를 지니고 망명하였을 것이다. 『후한서』에서 ‘마한을 쳐부수고 스스로 한왕이 되었다.’고 기록한 것처럼 마한사회에 큰 변화를 몰고 왔다. 이로 인하여 마한이 분열하여 임진강 일대를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낙랑국 등이 들어서고 남쪽으로는 소삼한이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기원전 200년경을 전후하여 고조선 백성들의 망명과 뒤이은 고조선 준왕 무리의 망명사건은 고조선의 중심축이 현 중국 하북성 지역에서 한반도 지역으로 이동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므로 한민족 상고사의 정통성은 단군조선에서 삼한으로 이어지고, 삼한에서 삼국으로 이어졌다고 할 것이다. 진한 유민들의 망명과 준왕의 망명사건을 통하여 현 중국 하북성 지역에 있었던 고조선이 어떻게 수천 리 떨어진 한반도의 삼한과 연결되는지 이해할 수 있다.(다음호 계속)

 
 

 
피그베이 15.01.11. 18:02
모바일로 정독하는데 30분 정도 걸렸던것 같습니다. 일단 글 문장들이 상당히 읽기 쉽게 되어있어, 상당히 집중하면서 읽을수 있었습니다. 궁금한점이 있습니다. 왜 이병도 선생님은 평양 근처로 비정을 하게되었나요? 식민지 시절에야 어쩔수 없다고 쳐도, 해방이후에도? 자신의 오류가 명성을 위협할 정도여서? 이점이 읽으면서 내내 궁금했습니다. 논문 이상의 글 잘 읽었습니다.
 
사람이 하늘이다 15.01.11. 19:59
반갑습니다. 한나라 낙랑군을 한반도 평양으로 비정하는 견해는 고려시대부터 있어왔습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한사군의 위치를 요동으로 보는 견해와 한반도 일대로 보는 견해가 공존해 오다가 일제의 낙랑유물 발굴을 계기로 낙랑군 재평양설이 통설이 되었고 아마도 이병도는 스스로도 한나라 낙랑군이 한반도 평양으로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보다도 훨씬 많은 사료들을 접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고, 아마도 도 지금의 강단사학자들 중에는 자신의 명성을 생각해서 진실을 알면서도 입을 다물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리라 봅니다.
 
 
노하라신노스케 15.01.12. 14:02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죠
 
사람이 하늘이다 15.01.12. 17:24
안녕하세요. 한나라 낙랑군이 한반도 평양에 있었다는 통설은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보듯이 <잠부론>의 기록도 한서韓西를 한동韓東으로 정반대로 해석해야 가능합니다. 그리고 낙랑군 수성현에서 진나라 장성이 시작된다는 <진서> '지리지'의 기록도 <진서>가 틀렸다고 보지 않으면 한나라 낙랑군 재한반도설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이와같이 한나라 낙랑군 재한반도 평양설은 중국 정사인 25사 등 각종사료들과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나라 낙랑군 재한반도 평양설은 낙랑유물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데 일제 식민사학자들에 의해서 발굴 조사된 것들이라 진위가 의심되는 것이 많습니다.
 
노하라신노스케 15.01.13. 05:38
유화 이게 정설입니다. 김용만 선생님도 낙랑군 평양설을 따르고 한국학 학자-외국-도 평양설을 따릅니다. 정설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 정설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정설이 틀린 경우 그리 보지 못했습니다.특히 고대사는
 
노하라신노스케 15.01.13. 06:54
사람이 하늘이다 학자들도 다 본 자료죠
 
사람이 하늘이다 15.01.13. 08:35
노하라신노스케 <잠부론> 같은 경우는 한민족의 상고사와 관련되는 너무나 유명한 구절이기 때문에 상고사를 연구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당연히 잘 알고 있지요. 문제는 해석을 엉터리로 하는데 있습니다. 사실 <잠부론>에 나오는 한서韓西는 지극히 평범하게 해석하면 됩니다. 한의 서쪽으로 말입니다. 이병도의 해설을 다시 한번 보십시요.
 
사람이 하늘이다 15.01.13. 08:38
노하라신노스케 “여기의 한서韓西를 성명으로 보는 이도 있지만, 그렇게 보면 문장상 한韓이 겹들어 가고 또 동서同書의 문례로 보더라도 서西는 확실히 방위를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한후국韓侯國의 서쪽이라고 해서는 아래의 구절과 일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래의 구절은 분명히 조선에 관한 이야기인데, 조선의 위치가 한후국의 서쪽에 있다고 해서는 말이 되지 아니하므로, 나는 일찍부터 ‘한서’를 ‘한동韓東’의 오誤로 보았다.”『한국고대사연구 48쪽』
 
사람이 하늘이다 15.01.13. 09:02
노하라신노스케 이병도를 비롯한 강단사학계는 <잠부론>을 통해서 왕검성의 위치를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왕검성의 위치를 한반도 평양으로 정해놓고 이에 맞추어 <잠부론>을 마음대로 띁어고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료를 접하는 올바른 태도가 될 수 없지요. 왕검성의 위치와 관련하여 <잠부론>의 저자인 왕부는 왕검성이 멸망한 후 200여년 후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당시에는 낙랑군이 그 자리에 있었고요. 그래서 왕부는 충분히 왕검성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통설이라고 모두 옳은 것은 아닙니다. 특히 통설의 역사체계는 일제 총독부하에서 완성된 것이기에 현재의 통설은 식민사관이지 자주사관으로 볼 수 없습니다.
 
노하라신노스케 15.01.13. 09:39
사람이 하늘이다 전 학자들 해석이 옳다고 봅니다
 
 
大欽茂 15.01.12. 14:38
문장력이 좋은듯 싶습니다. 님의 학설은 북의 이지린과 남의 윤내현과 연결되는듯 하나 중심지를 하북성일대로 비정하니 더 서쪽으로 전진하는듯 하구요. 윤내현은 요서일대가 기자와 위만 그리고 한사군 중심지였다고 비정했는데 만주와 한반도의 정치체는 계속 단군조선이 전개된 것으로 그렸던 것 같거든요. 그런데 님의 학설은 만주와 한반도에서는 삼한사가 전개된 것으로 그리고 있군요. 궁금한게 있는데요. 잠부론에서 한성을 연나라 백성이 쌓았다는 표현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요? 또 보통 한후를 고조선과 연결시키는데 그렇다면 주왕실로부터 봉해진 춘추전국시대 한후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사람이 하늘이다 15.01.12. 17:42
반갑습니다. 한백겸 선생 이후로 한반도 북부는 삼조선이고, 한반도 남부는 삼한으로 이해하여 왔으나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는 삼조선은 곧 삼한이라고 보았는데 저도 단재의 설이 옳다고 봅니다.

<시경>에서 한성을 연나라 백성들이 쌓았다는 한성의 위치는 본래 현 중국 섬서성 한성현 지역입니다. 당시 연나라의 위치도 그 부근이었고, 한후는 연나라 백성들을 사역에 동원할 정도로 막강한 권한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어느 시기엔가 한후가 다스리는 한韓나라가 현 하북성 지역으로 이동하였고, 그 한후의 후예가 곧바로 고조선의 준왕과 이어지는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기록이 불충분한 상황입니다.
 
사람이 하늘이다 15.01.12. 17:46
사람이 하늘이다 우리가 <잠부론>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단지 그 한후가 다스렸던 한성의 서쪽에 고조선의 왕검성이 있었다는 것 뿐입니다. 그 한후가 과연 주나라 희성의 제후였는지 또는 그 한후의 후예가 고조선의 한씨조선으로 이어졌는지는 더 연구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사람이 하늘이다 15.01.12. 17:55
참고로 북의 이지린과 남의 윤내현의 학설은 현 중국 하북성 난하일대를 한나라 낙랑군으로 보고 있는데, 이렇게 보는 배경에는 그곳에 갈석산이 있기 때문입니다. 리지린이나 윤내현은 갈석산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여 갈석산의 위치가 이동된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밖에 인식하기 못하였을 것입니다. 제가 쓴 '고조선의 갈석산에 대하여'를 읽어보시면 갈석산이 언제 어떻게 이동되었는지 알 수 있으리라 봅니다.
 
노하라신노스케 15.01.13. 05:37
사람이 하늘이다 단재의 주장은 오류 투성이죠. 시대적 한계지만. 그리고 평양으로 보아도 크게 어긋나지는 않습니다. 단재의 삼조선설을 따르면 당장 삼한-삼국이 되지 못한 나라들은 우리 역사의 정맥에서 지워지는 큰 위험이 있습니다
 
사람이 하늘이다 15.01.13. 08:55
노하라신노스케 단재의 주장에 오류가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만 통설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단재는 삼조선과 삼한을 한반도와 만주일대로 보았으나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이미 제가 '동이족의 대이동' 1회에 2회에서 밝혔듯이 (진)조선 또는 낙랑 또는 진한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입니다. 앞으로 계속되는 글을 보면 알겠지만 삼조선 또는 삼한은 현 중국 동해안 지역과 하북성 및 동북삼성 그리고 한반도 일대입니다. 이 속에 삼한-삼국이 되지않은 나라는 없습니다.
 
 
부르간不咸 15.01.13. 11:36
燕과 周 제후국 韓의 위치..
 
사람이 하늘이다 15.01.13. 19:25
안녕하세요. <잠부론>에서 나오는 한韓나라는 기원전 9세기에 존재했던 나라이며, 지금 지도에 표시된 한韓나라는 기원전 5세기에 진晉나라가 한韓나라, 위魏나라, 조趙나라로 나뉘면서 건국된 나라로 전혀 별개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당시 연나라의 강역은 현 하북성 지역을 넘지 못하였습니다. 지도의 연나라 강역은 많이 왜곡된 것입니다.
 
부르간不咸 15.01.13. 23:45
사람이 하늘이다 아 오해가 좀 있었군요.

춘추시 지도에도 韓은 曲沃옆에 나오고요 서주 시대 지도에도 韓은 曲沃옆에 있더군요. 춘추시대 지도 첨부했어요.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8/8a/%E6%98%A5%E7%A7%8B%E8%AF%B8%E4%BE%AF%E5%A4%A7%E5%9B%BD%E7%AE%80%E5%9B%BE.png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건
시경 한혁에 나오는 韓은 위치와 내용상 周의 제후국으로 있던 韓과는 완전 다른 나라라고 생각이 들어서 지도를 올린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하늘이다 15.01.14. 10:17
부르간不咸 서주 시대의 한韓이 다른 곳으로 이동한 후 전국시대의 한韓이 그 자리에 건국되었기 때문에 같은 위치가 맞습니다. 그리고 <시경> '한혁'에 나오는 한韓과 주의 제후국으로 있던 한韓이 같은지 다른지에 대해서는 아직 심도있게 연구를 해보지 못하였습니다.
 
부르간不咸 15.01.14. 15:46
사람이 하늘이다 혹시 "북방이족과 조선상고사"라는 책을 읽어보셨나요? 저 한혁에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님한테 도움이 될까해서요.
 
사람이 하늘이다 15.01.14. 21:55
부르간不咸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부르간不咸 15.01.14. 22:21
사람이 하늘이다 쪽지확인해주세요.
 
사람이 하늘이다 15.01.15. 09:16
부르간不咸 감사합니다. 댓글을 보고 '북방이족과 조선상고사'라는 책을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구이넷에서 무료로 다운받을 수 있도록 자료를 올려놓았더군요. 그래서 다운받아서 모두 읽어보았습니다.
 
 
부르간不咸 15.01.13. 11:40
奄受北國... 여기에서 奄을 나라이름으로 봐도 되지 않나요?
 
사람이 하늘이다 15.01.13. 19:33
<시경> '한혁편'은 한후에 대한 내용들입니다. 제가 본문에서 언급하였듯이 "북쪽 나라들을 모두 다 맡아서"로 해석하는 것이 무난할 듯합니다. 엄奄은 주나라시대에 산동성지역의 노나라 지역에 위치했던 나라로 <시경> '한혁편'의 내용과는 무관해 보입니다. 혹시라도 엄奄은을 나라로 해석할 만한 근거가 있는지요?
 
부르간不咸 15.01.14. 00:01
사람이 하늘이다 奄受北國이라 했고 奄의 북쪽에 貊, 燕, 韓이 다들 위치해 있으므로 奄을 나라이름으로 봐도 무방할것 같아서 여쭤본것입니다. 근데 다시 저 본문을 보니 저같이 해석하면 문맥에 안맞는 해석이군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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