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칠불암 헌다례 - 셋

2015. 4. 27. 00:20들꽃다회

 

 

 

    경주 남산 칠불암 헌다례 ㅡ 셋

      20150405 일요일,을미년 청명절, 흐림  

 

  ㅡ 마애칠불께 다 향 무 화 악 (茶 香 舞 畵 樂)을 바치

      < 평화의 다례 >

 

 

 

숙우회(熟盂會)의 헌다례 ㅡ 천처(淺處)

- 헌다(獻茶), 헌향(獻香), 그리고 헌화(獻花) 중심으로 ......

지도: 숙우회 이계희 원장님 

 

 

 

흘승골 고불친영희우 (訖升骨 古佛親迎喜雨)

- 원부여 흘승골성 옛부처님께서 반가운 봄비를 맞이하시다.-

ㅡ   하단 참고자료 참조......

 

 

 

ㅡ 사람에게  윤회가 있다면 , 역사에는 순환이 있다.

 

 

  

 김알지와 미추왕의 후손들이 고조선, 부여, 고구려, 그리고 발해의 옛땅으로 돌아가

 

금(金)과 청(淸)을 세우고 중원을 제패하여 더 넓은 사방불정토(四方佛淨土)를 이룩한다.

 

 

통일신라 초기 신라 전성기인 7세기 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칠불마애불께 < 평화의 다례>를 올리면서 떠오르는 생각의 한자락이다. 

 

 

역사의 연기법(緣起法)에 의한 회향은 시간의 척도가 인간의 수명보다 휠씬 더 길다.

 

아마도 수십배는 더 길어 보인다.

 

 

 

 

 

향무(香舞) 헌무(獻舞) 준비 ......

 

 

온갖 것을 고루 갖춘 육법공양은 아니지만,

 이 <평화의 다례>는 검소하지만 정성을 다하여 올리는 것으로

오히려 육우의 정행검덕(精行儉德)이라는 차정신에 합당하다.

 

 

 

마애삼존불께 향공양

 

 

 

 

 

마애삼존불 바위 뒷면의 눈썹처마 서까래 거치용 홈과

목조 전각 설치용 홈

 

 ㅡ 칠불암 마애불상군

국보 제312호. 바위 면에 부조된 삼존불상과 그 앞의 돌기둥에 부조된 4구의 불상 등

모두 7구의 불상이 있어 칠불암으로 불려 오고 있다.

유구(遺構)의 상태로 보아 원래는 석경(石經)을 벽면으로 세운

일종의 석굴사원(石窟寺院)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자료 ......

 

 

 

 

 

 

 

 

 

 

 

 

 

 

 

 

 

 

헌악(獻樂) 

ㅡ 서울시 무형문화재 풀피리(草笛) 전수자 백문 김기종 선생님

 

 

 

 

찻잎을 구하기 쉽지 않아서

칠불암의 댓잎을 겹쳐 풀피리 헌악(獻樂)을 올리다.

 

 

 

 

 

 

 

 

 

 

 

 

 

 

 

 

먼저 계정혜향을  사람과 하늘에 고루 나누다.

(先戒定慧香, 妙供均人天)

 

 

 

 

 

 

 

 

 

 

 

 

 

 

 

 

 

 

 

 

 

 

 

 

 

 

 

 

 

 

 

 

 

 

 

 

 

 

 

 

 

 

 

 

 

 

 

 

 

 

좌종(坐鐘) 타종

 

 

 

 

 

 

 

 

 

 

 

 

 

 

 

헌향(獻香)

 

 

 

 

 

 

 

 

 

 

 

 

 

 

 

 

 

 

 

 

 

 

 

 

 

 

 

 

 

 

 

헌다(獻茶)

 

 

 

 

 

 

 

 

 

 

 

 

 

 

 

 

 

 

 

 

 

 

 

 

 

 

 

 

 

 

 

 

 

 

 

 

 

 

 

 

 

 

 

 

 

 

 

 

 

 

 

 

 

 

헌화(獻花)

 

 

 

 

 

 

 

 

 

 

 

 

 

 

 

 

 

 

 

 

 

 

 

 

 

 

 

 

 

 

 

 

 

 

 

 

 

 

 

 

 

 

 

 

 

 

마애삼존불께향(獻香), 헌다(憲茶), 헌화(獻花)

 

 

 

 

 

 

 

 

 

 

 

 

 

 

 

 

 

 

 

 

 

 

 

 

 

 

 

 

 

 

 

 

 

 

 

 

 

 

 

 

 

 

 

 

 

***** 참고자료 *****

 

 

흘승골 고불친영희우 (訖升骨 古佛親迎喜雨)

- 원부여 흘승골성 옛부처님께서 반가운 봄비를 맞이하시다.-

 

백제금동대향로 향실부(香室部) 두껑에 돋을새김으로 새긴 상들에 대한 

기존 해석은 도교의 삼신산을 형상화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상부로 부터 차례로 마고신화에서부터 수렵채취시대~홍산문명을 거치는 과정이

부조(浮彫)로 형상화되어 있고 하단 제일 마지막에  새겨진 상이

요령성 북진시 의무려산의 천제혈(天帝穴)을 닮아있어 이 흘승골성이 먼저 떠오른다. 

 

 

북부여(北扶餘)는 기원전3-2세기 송화강을 중심으로 494년까지 중국 동북지역에 존속했던 국가이다.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1 북부여(北扶餘)조 통해

“「고기(古記)」에 전한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 임술(壬戌)(기원전 58년) 4월 8일에

천제자(天帝子)가 흘승골성(訖升骨城)에 내려와 도읍을 정하고 왕이라 일컫고,

국호를 북부여라고 하고 스스로의 이름을 해모수(解慕漱)라고 하였다.

아들을 낳아 부루(扶婁)라고 하고 해(解)로써 씨를 삼았으며,

왕은 후에 상제(上帝)의 명령으로 동부여(東扶餘)로 도읍을 옮기고

동명제(東明帝)가 북부여를 이어, 졸본주(卒本州)에 도읍을 정하고 졸본부여(卒本扶餘)가 되었으니,

곧 고구려의 시조다.”라고 하였다.

출처 : http://bit.ly/1xcKhk3 kocca 문화콘텐츠닷컴

 

***** 북부여는 방향을 가르키는 뜻도 있지만, 원부여(原扶餘)라는 의미이다.

반면에 동부여(東扶餘)는 새 부여(新扶餘)라는 뜻으로 쓰인다.

 

 

(古記云 前漢書宣帝神爵三年壬戌四月八日 天帝降于訖升骨城[在大遼醫州界]

乘五龍車 立都稱王 國號北扶餘 自稱名解募漱 生子名扶婁 以解爲氏焉

王後因上帝之命 移都于東扶餘 東明帝繼北扶餘而興

立都于卒本州 爲卒本扶餘 卽高句麗之始祖).” 『삼국유사』‘북부여’

 

 

 

  고구려가 일어난 북부여(北扶餘)


‘옛 기록’이란 뜻을 가진 《고기(古記)》라는 책에는

《전한서(前漢書)》라고 되어 있으나, ‘전한’의 잘못인 듯하다.

 “전한(前漢)시대 선제(宣帝)때로 기원전 58년의 일이다.

부처님 탄생일과 같은 4월 8일에 하늘나라의 황제인 천제(天帝)가 흘승골성(訖升骨城)에 내려왔다.

고려 때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가 강성할 때는 거란을 높여서 대요(大遼)나라라고 했나 보다.

이 대요나라의 의주(醫州)로 비정되는 홀승골성

천제는 다섯 용이 끄는 오룡거(五龍車)를 타고 와서 도읍을 정하고는 왕이 되었다.

나라이름을 북부여(北扶餘)라고 하고, 스스로 해모수(解慕漱)라고 했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扶婁)라 하니 해(解 태양)로 성씨를 삼은 것이다 

http://blog.naver.com/dlpul1010/220323509834

 

 

 

고구려, 제후국 신라에 김씨 첫 왕 봉했다

 

ㅡ <고구리사초·략>에 “중천태왕 12년 기묘(259) 봄 정월,

첨해(沾解)를 ‘신라국황제(新羅國皇帝)·동해대왕(東海大王)·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으로

봉하여 금・은 인장 두 개를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중천태왕 14년 신사(261) 12월 28일 첨해가 갑자기 죽고,

조분(助賁)의 사위 미추(味鄒)가 황위 올랐다.

 

중천태왕은 명림어윤으로 하여금 칙명을 받들고 신라로 가서

미추를 ‘신라국황제(新羅國皇帝)·동해대왕(東海大王)·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으로

하고 금・은으로 만든 인장들과 곤룡포와 면류관을 하사하니,

이날이 바로 임오년(262) 정월 25일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천태왕에 의해 졸지에 신라의 황제가 된

미추이사금은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의 후손으로

그 계통은 알지--> 세한--> 아도--> 수류--> 욱보--> 구도--> 미추로 이어진다.

김씨가 김알지 탄생 약 200년만인 262년에 처음으로 신라의 왕이 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13대 미추 이후 14~16대는 석씨가 왕을 하다가,

17대 내물이사금부터는 김씨가 계속 신라의 왕 된다.

결국 천년 신라를 통치한 성씨는 박씨가 10왕 231년,

석씨가 8왕 173년, 그리고 김씨가 38왕 587년이다.

 

스카이데일리(skyedaily@skyedaily.com)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4-10-11 21:56:10

 

 

 

***** 김알지와 미추왕 그리고 내물왕은 신라 경주 김(金)씨 계보로서

삼국통일을 기획한 제29대  태종 무열왕 김춘추로 이어진다.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후손들이 고려의 간섭을 피하여

북쪽 고조선과 북부여의 옛땅으로 되돌아가 금(金 :1115년 건국)과

청(淸 : 1616년 건국)을 이르켜 세워 지금의 중국 영토 보다 더 넓은 대제국을 건설하였으니,

신라 선덕여왕 때 중국에서 귀국한 자장율사의 권유로 건축(645년)한

"해동의 9개국을 복속시킨다."는 황룡사 9층목탑의 건립목적은 이때에 비로소 완성된다.

이렇게 만백성들의 염원과 정성이 담겨있는 꿈의 역사는 긴 시간 단위를 가지고 회향한다.

 

 

일천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 셈이니 길다면 긴 세월이지만,  

 

 후손들이 천년 후에나 쓸, 잠시 태워 없어질 향을 묻는 매향의식(埋香儀式)을    

 

꾸준하게 해오신 우리 선조님들이고 보면 그분들에게 일천년은 그리 오랜 시간이 아니다.

 

 

 

 

조용히 앉아 먼저 마음을 낼 일이다(靜坐妙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