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칠불암 헌다례 - 하나

2015. 4. 26. 16:27들꽃다회

 

 

 

    경주 남산 칠불암 헌다례 - 하나

      20150405 일요일,을미년 청명절, 흐림  

 

 

  ㅡ 마애칠불께 다 향 무 화 악 (茶 香 舞 畵 樂)을 바치

      < 평화의 다례 >

 

 

 

 

 

 

 

 

 

 

 

 

 

 

 

봄비에 새잎

하루 전 건천 단석산 신선사 앞에서 ......

 

 

 

 

 

칠불암 요사채 대안당

 

- 칠불암은 원효가 그의 스승이신 대안대사께

대안행(大安行)의 불법을 배운 곳으로 전해진다.

 

 

 

 

 

대안당(大安堂) 편액

 

 

 

 

 

 

 

 

 

 

 

 

대안당과 천천 앞 바위틈에 핀 산개나리

 

 

 

 

 

천천(天泉)

ㅡ 신라 소지왕의 반란 평정과 정월 대보름 약반(오곡밥, 찰밥)의 유래가 깃든 하늘샘 천천(天泉).

< 삼국유사 사금갑조(射琴匣條)>

 

 

 

 

 

대안당 지붕으로 처진 이대 가지 ....

 

 

 

 

 

대안당과 칠불암 중간에 있는 이대숲 사이로 난 계단

 

 

 

 

 

 

 

 

 

이대숲을 지나 칠불암에 오르다. 

 

 

 

 

 

산복숭아꽃

 

 

 

 

 

삼성각

 

 

 

 

삼성각 편액

 

 

 

 

 

삼성각 치성광여래(북극성 또는 환인),진 좌측 나반존자(환웅), 우측 산신(단군)

- 치성광여래는 칠성신앙의 이두문식 불교표현이라는 설도 있음.

 

 

  

 

삼성각 건너 남쪽 봉화대 능선은 운무에 젖어있고 ......

 

 

 

 

 

 

 

 

 

 

 

칠불암 인법당(引法堂)

- 인법당에는 따로 불상을 모시지 않고

사진에 보이는 삼층석탑 위쪽에 계신 마애칠불 쪽으로

큰 유리창을 내어 배례를 한다.

 

 

 

 

 

 

 

봉화곡 제1사지(칠불암)의 평면도

 

 

 

 

 

 

 

 

 

 

 

 

 

 

 

 

 

 

 

 

 

 

 

 

 

 

 

 

칠불암 마애삼존불

ㅡ 좌로부터 관세음보살, 본존불 석가여래, 다라보살상

 

그 앞에 사방불(四方佛)은 정면으로 남면 보생불(寶生佛), 동면 약사여래상

 

***** 칠불암 마애삼존불과 사방불의 명칭은 학자에 따라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나,

 이글에서는 다음 블로그 <토함산솔이파리>  솔뫼 님의 뜻에 따라

 밀교의 만다라를 바위에 형상화하여 새긴 것으로 보는 견해에 따르기로 한다.

 

   "사방불의 존명에 대해서는 당나라에서 8세기초에 번역된

불공견삭신변진언경(不空羂索神變眞言經)에 의거하여 순서대로

동쪽면에는 약사불(藥師佛), 남쪽면에는 보생불(寶生佛)

서쪽면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북쪽면에는 세간왕불(世間王佛) 등으로 추정되나

사방불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려지는 곳이 많아 확실하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동면의 약사불은 약합이 있어 약사불이 확실하므로

반대쪽 아미타불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밀교의 전법사상

 

   밀교는 대승불교의 한 분야로 7세기 경 인도에서 성립되었다. 밀교가 성립될 당시의 인도불교는 부파불교시대(소승불교시대)로서 실천보다는 전문적 이론과 승려중심의 경향이 매우 짙었다.

  이러한 불교계의 흐름은 교학(敎學)의 찬란한 발전을 가져오는 장점도 있었지만, 많은 신도를 잃게 되고 교단의 위축을 스스로 가져오는 단점도 있었다.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고 실천을 위주로 한 대중불교운동이 밀교이다.

 

  당시까지 발전되었던 불교사상의 두 주류인 중관학파(中觀學派)의 공사상(空思想)과 유가유식학파(瑜伽唯識學派)의 유사상(有思想)을 동시에 계승, 발전시키면서, 바라문교와 힌두교 및 민간신앙까지 폭넓게 받아들여, 그것을 다시 불교적으로 정립한 것이 밀교의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밀교사상의 이론적 원리[敎相]를 밝힌 ≪대일경 大日經≫실천법의 체계를 세운 ≪금강정경 金剛頂經≫은 밀교의 근본경전들이다.

이에 의하면 밀교는 법신불(法身佛)인 대일여래(大日如來)를 중심으로 한 태장계(胎藏界)와 금강계(金剛界)의 수행법을 닦아 익히면 이 육신 자체가 바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즉신성불(卽身成佛)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밀교의 수행자는 누구나 입으로 진언(眞言)을 염송하고 손으로 결인(結印)을 하며 마음으로 대일여래를 생각하는, 신구의(身口意)의 삼밀가지(三密加持)를 행하여 중생의 삼밀과 부처님의 삼밀이 서로 감응일치하여 현생에서 성불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와 같이 근본경전을 중심으로 조직된 밀교가 성립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그리하여 일반적으로 ≪대일경≫과 ≪금강정경≫이 성립되기 이전의 밀교사상을 ‘잡밀(雜密)’이라고 하고, 그 이후의 것을 ‘순밀(純密)’이라고 하여 구별하였다. 이러한 인도밀교의 두 형태 가운데서 중국에 먼저 전래된 것은 잡밀계통이다.

 

 ㅡ 중략 ㅡ

 

   백제와 고구려의 밀교 대해서는 그 자료의 절대적인 부족으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신라에서는 7세기 초부터 잡밀계통이 전래되었고, 8세기에 접어들면서 순밀계통 전해지면서 본격적인 발전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밀교는 고려나 조선시대까지 민중신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밀교는 이론이나 교학적인 발전보다는 실천적 수행면에 치중되었으며, 독자적인 발전보다는 선(禪)이나 정토신앙 또는 천태종(天台宗) 등과 밀접한 관계성 속에서의 발전 보았다.

 

 

칠불암 마애삼존불

ㅡ 좌로부터 관세음보살, 본존불 석가여래, 다라보살상

 

 

 

   신라시대의 밀교

 

(1) 밀교 승려들의 활약과 전래교법

 

   신라에 최초로 밀교를 전한 승려는 안홍(安弘)이다. 그는 600년(진평왕 22) 혜숙(惠宿)과 함께 중국으로 가서 서역승(西域僧) 세 사람, 중국승려 두 사람을 데리고 귀국하여 황룡사(皇龍寺)에서 ≪전단향화성광묘녀경 栴檀香火星光妙女經≫을 번역하고, 640년(선덕여왕 9) 만선도량(萬善道場)을 회향하였다.

 

   안홍과 거의 같은 시기의 밀교승으로는 명랑(明朗)이 있다. 명랑은 632년 당나라로 가서 3년 동안 밀교를 공부하고 귀국하였다. 그는 귀국한 뒤 자신의 집을 금광사(金光寺)로 고쳐 짓고 이곳을 중심으로 밀교신앙운동을 전개하였다. 안홍과 명랑을 기점으로 하여 명효(明曉) 등은 잡밀계통을 받아들였고 혜통(惠通)은 처음으로 순밀사상을 전래시켰다.

 

   혜통에 이어 현초(玄超)·의림(義林)·혜일(惠日)과 같은 밀교승려들의 활약으로 신라밀교는 많은 발전을 보게 되었다. 그 결과 신라의 밀교사상 신인비법(神印祕法)·사리탑(舍利塔)·오대산신앙(五臺山信仰)·소재활동(消災活動:재앙을 없앰) 등을 통하여 활발히 전개되었다.

 

   신라 신인비법은 명랑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명랑이 금광사를 중심으로 밀교신앙을 활발히 전개시키고 있었던 668년(문무왕 8) 당나라가 신라를 침공하자, 문무왕은 명랑에게 이를 물리쳐줄 것을 부탁했다.

명랑은 낭산(狼山) 남쪽 신유림(神遊林)에다 임시로 절을 짓고 풀로 오방신상(五方神像)을 만들어서 비법에 밝은 12명의 승려와 더불어 신인비법을 행하여 당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이러한 명랑의 신인비법은 그 수용 초기부터 호국이념과 연결되면서 대단한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고, 그 법맥은 안혜(安惠)·낭융(狼融)·광학(廣學)·대연(大緣) 등으로 계승되어 고려시대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신인비법은 원래 문두루법(文豆婁法, Mudra)으로서 그 사상은 ≪관정경≫ 제7권의한 것이다.

 

   이 경은 주로 제석천(帝釋天)과 사천왕(四天王)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과 그 나라가 어려울 때 신인비법으로써 구제될 수 있는 방법과 내용이 제시되어 있다. 부처님의 제자들 중 사악한 귀신 때문에 공포에 떠는 사람이 있거나, 병에 걸려 생명의 위협을 받거나, 다른 나라가 침략을 할 때는 마땅히 오방신상을 만들어 문두루법을 행하면 모든 재난을 극복하여 물리칠 수 있다고 하였다.

   개인과 국가적 재난이 문두루법을 행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근거는 이들 5방의 신장이 각각 7만의 부하신을 거느리고 문두루법을 행하는 목적에 부응하여 보호해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신인비법은 ≪관정경≫에서 사상적·의례적인 연원을 찾을 수 있지만, 신라의 신인비법은 ≪관정경≫ 사상을 주축으로 하면서, 그 위에 ≪관불삼매해경 觀佛三昧海經≫과 ≪금광명경 金光明經≫의 사상지도 폭넓게 수용하였다.

 

   따라서, 신라 신인비법의 사상은 독자성을 가지고 발전하면서도 용이나 사천왕, 제석천 등의 사상을 무리 없이 포섭하게 되었고, 그러한 현상은 소재활동과 짝하여 신라밀교가 무속신앙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는 길을 열어놓는 결과가 되었다.

이와 같은 명랑의 신인비법을 중심으로 한 밀교의식은 고려시대 가서 신인종(神印宗)이 성립할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또한 혜통이 진언을 외워 신문왕의 등창을 낫게 함으로써 성립된 일맥은 고려시대에 와서 총지종(摠持宗)으로 성립되었다.

 

   그러므로 명랑을 신인종의 초조(初祖)로, 혜통을 총지종의 초조로 삼고 있다. 이 밖에도 의림은 805년(애장왕 6) 103세의 나이로 밀교의 전교에 힘을 기울였는데, 그는 주로 순밀계통의 태장계법과 금강계법 위주로 하였다.

 

 

(2) 오대산신앙(五臺山信仰)

 

   오대산을 중심으로 한 불교신앙운동은 선덕여왕 때 자장(慈藏)에 의하여 시작되었고, 그것은 당나라의 오대산신앙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나 자장 당시는 오대산신앙이 크게 발전하였거나 체계화되지는 못하였다.

   신라에서 오대산을 중심으로 한 신앙이 본격화된 것은 8세기 초 정신대왕(淨神大王)과 그의 태자인 보천(寶川)과 효명(孝明)에 의해서였다.

이들 세 부자가 오대산신앙을 전개한 사실은 ≪삼국유사≫ 대산오만진신조(臺山五萬眞身條)와 명주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溟州五臺山寶叱徒太子傳記)에 전해지고 있다. 이에 의하면 보천과 효명은 오대산에 들어가 수양을 하였다.

 

   하루는 산의 다섯 봉우리를 보려고 산에 올랐더니 동쪽 봉우리에서는 1만의 관음보살이, 남쪽 봉우리에서는 1만의 지장보살이, 서쪽 봉우리에서는 아미타불을 수위(首位)로 1만의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북쪽 봉우리에서는 석가모니불을 수위로 500의 아라한(阿羅漢)이, 중앙에서는 비로자나(毘盧遮那)를 수위로 1만의 문수보살이 각각 나타났으므로 예배를 올렸다.

   그 뒤, 보천태자만이 오대산에 계속 남아 ≪수구즉득다라니경 隨求卽得陀羅尼經≫을 매일 염송하면서 50년을 수양하였다. 이러한 보천이 말년 나라를 지키고 이익하게 할 비법을 남겼는데 다음과 같다.

 

   동쪽 봉우리에는 관음방(觀音房)을 두어 관음상과 푸른 바탕에 1만의 관음상을 그려 모시고, 다섯 명의 복전(福田)을 두어 낮에는 ≪금광명경≫과 ≪인왕반야경 仁王般若經≫ 및 천수주(千手呪)를 외우게 하며, 밤에는 관음예참(觀音禮懺)을 염송하게 하고, 원통사(圓通社)라고 이름하게 하였다.

   남쪽 봉우리에는 지장방(地藏房)을 두고, 지장보살상과 붉은 바탕에 팔대보살(八大菩薩)을 수위로 1만의 지장보살상을 그려 모시고, 다섯 명의 복전을 두어 낮에는 ≪지장경≫과 ≪금강반야경≫을 읽게 하고 밤에는 점찰예참(占察禮懺)을 행하게 하고, 금강사(金剛社)라고 이름하게 하였다.

   서대(西臺)에는 미타방(彌陀房)을 두어, 무량수불상(無量壽佛像)과 흰 바탕에 무량수불을 수위로 1만의 대세지보살을 그려 모시고, 다섯 명의 복전을 두어 낮에는 ≪법화경≫을 읽고 밤에는 미타예참(彌陀禮懺)을 행하게 하고, 수정사(水精社)라고 이름하게 하였다.

   북대(北臺)에는 나한당(羅漢堂)을 두어 석가상을 모시고, 검은 바탕에 500나한상을 그려 모시고, 다섯 명의 복전을 두어 낮에는 ≪불보은경 佛報恩經≫과 ≪열반경≫을 읽고, 밤에는 열반예참(涅槃禮懺)을 행하게 하고, 백련사(白蓮社)라 이름하게 하였다.

   중앙진여원(眞如院)으로 문수상을 진흙으로 만들어 모시고 그 뒷벽에는 황색 바탕에 비로자나를 수위로 하여 36화형을 그려 모시고, 다섯 명의 복전을 두어 낮에는 ≪화엄경≫과 600권 ≪반야경≫을 읽게 하고 밤에는 문수예참(文殊禮懺)을 행하게 하여, 화엄사(華嚴社)라 이름하게 하였다.

 

   이러한 오대산이라는 지역을 상징하여 5색·5방·5불로 체계화한 구조와 사상의 내용은 밀교의 본지수적(本地垂適)과 만다라(曼茶羅)에 근원을 두고 있다. 신라의 오대산신앙은 자장에 의하여 당나라 신앙 형태에 영향을 입어 시작된 것이다.

 

   중국의 오대산신앙이 시작된 교리적 근거는 60권 ≪화엄경≫의 보살주처품(菩薩住處品) 제27과 ≪문수사리법보장다라니경 文殊舍利法寶藏陀羅尼經≫의 교설에서부터 출발되었다.

 

   그러므로 신라 오대산신앙 중앙에는 비로자나불과 문수보살 위치하게 되는데 이것은 중국이나 신라의 오대산신앙이 그 출발부터가 현교(顯敎)와 밀교의 융합에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8세기 초 중국에서는 선무외·금강지(金剛智) 등이 중심이 되어 천수관음조상법(千手觀音造像法)·지장화상법 등을 정립하여 밀교적인 관음과 지장신앙을 전개하였고, 또한 불공(不空)은 함광(含光)과 더불어 오대산을 중심으로 한 밀교적 문수신앙을 전국적으로 확대시켜 나갔다.

 

   이러한 시기에 신라에서는 명효와 의림 등의 훌륭한 밀교승들이 있어서 당나라의 그러한 교법을 곧바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때이다.  보천이 신라 오대산신앙을 체계화한 것도 8세기 중엽이었다. 그는 철저한 밀교의 진언승(眞言僧)이어서 수구다라니를 매일 염송하였고, 토속신(土俗神)이 와서 보천에게 수계까지 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물론 민속신앙이 밀교에 포섭되는 한 실례이기도 하지만, 보천은 문수보살로부터 관수까지 받을 정도로 밀교신앙에 철저하였다.

따라서, 보천에 의해서 체계화된 신라 오대산신앙이 밀교적으로 전개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십일면관음이나 천수천비(千手千臂)의 관음은 모두가 밀교적인 것이다.

 

   이러한 관음을 염송하는 천수주가 ≪인왕경≫과 함께 관음방에서 독송된 것이나, 5방에 5불을 배치하고 다섯가지 색을 배대하여 5원(員)의 복전을 둔 것은 모두가 순연한 밀교적 수행법의 하나요, 신라 특유의 만다라적 체계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방불(五方佛)의 배치법은 현교나 밀교의 전통적 만다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신라 특유의 것이다. 따라서 오대산을 중심으로 전개된 신앙운동은 신라밀교만이 발전시킬 수 있었던 새로운 만다라라고 할 수 있다.

 

 

(3) 사리탑신앙(舍利塔信仰)

 

   신라시대 사리탑에 대한 신앙이 처음으로 밀교사상과 만나게 되는 것은 706년(성덕왕 5)이다. 이 해 신문왕과 효소왕의 명복을 빌고 나라의 안녕을 기원할 목적으로 경주 황복사(皇福寺)에 삼층석탑을 세웠는데, 탑의 이층에다 부처의 사리와 함께 ≪무구정광다라니경≫을 봉안하였다.

   ≪무구정광다라니경≫은 작은 탑 99개 또는 77개를 조성할 것과 이 다라니의 공덕을 교설한 잡밀계통의 경이다. 이 경은 중국에서 695∼704년 사이에 미타산(彌陀山)이 번역하였고, 이 시기에 당나라에서 총지법(摠持法)을 공부하고 귀국한 명효가 ≪불공견색다라니경≫과 함께 신라로 가지고 왔다.

   그 뒤부터 신라에서는 ≪무구정광다라니경≫을 조탑경(造塔經)으로 널리 받들어서 중요한 탑 속에는 반드시 이 경이 봉안되었다. 751년(경덕왕 10) 불국사의 석가탑을 보수하면서 이 경을 넣었고, 855년(문성왕 17) 경주 창림사(昌林寺) 삼층석탑에도 이 경이 봉안되었다.

 

   828년(흥덕왕 3)에 세워진 경상북도 영일군 법광사(法光寺)의 삼층석탑에서 불정존승다라니(佛頂尊勝陀羅尼)가 새겨진 사리병이 봉안되었는데, 이는 신라 사리탑신앙이 다른 밀교경전과도 연결을 맺은 좋은 예이며, 9세기로 접어들면서 그러한 현상은 더욱 구체화되었다.

   863년(경문왕 3)에 건립된 동화사 비로암(毘盧庵)의 석탑에는 사리장치와 함께 금동사방불함(金銅四方佛函)이 봉안되었는데, 이것은 태장계와 금강계, 잡밀과 순밀, 현교와 밀교가 융합삼종실지(三種悉地)의 만다라사상사리탑신앙으로 응용, 발전시킨 것이다.

   이와 같은 비로암의 석탑을 계기로 신라 사리탑신앙은 점차 풍부한 밀교적 사상을 띠게 되었다. 그리하여 동화사 금당암(金堂庵) 삼층석탑과 봉화군 서동리 동쪽의 삼층석탑, 봉화군 취서사(鷲棲寺)의 석탑 등은 모두가 무구정광다라니경≫과 삼종실지의 만다라사상근거하여 건립하였다.

 

  특히, 취서사 석탑의 경우 무구정광단(無垢淨光壇)을 건립하고 밀교적 의식까지 거행하였으며, 871년에 중수한 황룡사구층탑에는 99기의 작은 탑과 함께 사리·다라니경 등을 봉안하였다.

   또한, 895년(진성여왕 9) 백성산사(百城山寺)에서는 길상탑(吉祥塔)을 세우면서, ≪법화경≫·≪금강반야경≫·≪금광명경≫·≪진언집 眞言集≫·≪무구정광다라니경≫과 함께 77기, 99기의 작은 탑도 봉안하였다. 이 때 특히 77기, 99기의 작은 탑을 봉안하면서 그 각각의 탑 속에 진언을 또 봉안하였다.

   이러한 백성산사의 길상탑을 통하여 신라의 현교와 밀교자연스럽게 융합됨 물론, 그 사상면에 있어서도 더욱 깊고 넓은 관계성을 유지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ㅡ  <밀교의 전법사상>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한국학중앙연구원

 

***** 현교(顯敎) : 배화교(拜火敎)의 중국식 표현 ㅡ 태양신과 불을 숭배하는 조로아스트교

                       그러나 윗글에서는 밀교에 대한 대비되는 말로 현교(顯敎)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현교와 밀교의 자연스러운 융합과 그 사상면에서의 깊고 넓은 관계성은

  우리 배달민족의 원시 기저신앙이 밝음("밝다"의 朴達, 倍達. 박달나무 단檀, "환하다" 환 桓)과
  불("불"을 뜻하는 扶餘, 沸流)을 숭배하는 태양신 사상과도
밀접한 연관을 맺으며,

  불교가 왕족과 귀족중심에서 민중 속으로 깊숙이 전파되는 데에도 큰 역활을 하고 있다.

 

       민중신앙과 불교의 습합의 예는 산신각, 칠성각,독성각이나

이 셋을 통합한 삼성각을 통하여서도

현재에 이르기까지  잘 나타나고 있다.

 

태양신 숭배사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리스의 아테네 신전,

기독교의 성탄절을 동짓날로 정한  콘스탄틴대제의 제1차 니케아 종교회의,

기독교의 구약성서를 빼닮은 이슬람교,

중동 조로아스교의 주신 아후라 마즈다,동양의 중국 도교 원시천존(原始天尊)인 옥황상제,

 불교의  법신불인 비로자나불과 대일여래 사상 ,

우리 한민족의 원시 태양숭배사상 등 농경민족이나 수렵민족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신앙사상의 근원을 이루고 있다.

 

이미 인류는 그 근원에서부터 태양신앙으로 서로 일통(一統)되어 있어,

 세계가 한 가족이라는 세계일화(世界一華 또는 一花)가

헛된 구호가 아니라는 것이 여기에서 여실히 증명된다.

 

 

 

 

정면으로 남면 보생불(寶生佛), 동면 약사여래상

 

보생불(寶生佛)  ㅡ 밀교 금강계 오불() 하나.

보살 거느리고 일체 재물 보배 맡아본다.

 

ㅡ 다음사전 자료

 

 

 

寶生佛(보생불)


 【범】Ratna-sabhava 라달낭삼바박(囉怛囊三婆縛)이라 음역.

금강계 만다라 8엽련대(葉蓮臺)의 남방월륜(南方月輪) 중앙 위치에 있는 부처님.

 대일여래의 평등성지(平等性智)에서 유출(流出)하여

금강보ㆍ금강광ㆍ금강당ㆍ금강소의 4보살을 거느리고

일체 재물과 보배를 맡는 부처님이라 함.

 

ㅡ 동국역경원 - 불교용어사전

 

 

 

진언(進言)

마니- 마니보주. 보배구슬입니다. 비로자나여래가 지닌 중생구제의 방편을 상징.

내 마음의 남방에 항상 계신 보생불의 명호이다.

대원력성취인 서방극락정토의 아미타불은 묘관찰지의 덕에 머무르며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여 의심을 끊게 하고,

대자비로 일체 중생을 섭수하여 극락정토로 이끄시는 부처님이다.

 

ㅡ 다음 Tip 자료......

 

 

 

"또한 탑신부는 부처님의 세계를 표현한 것으로

탑신 4면에 4방불인 동방 아촉불, 남방 보생불,

서방 아미타불, 북방 불공성취여래를 조각하였으며,

탑신 내부 사리는 빛으로 화현하신 석가모니불로

중방 비로자나불을 상징하여 부처님이 우주 법계에

아니 계신 곳 없으심을 나타내고 있다.

 

-권중서/조계종 포교사단 전문포교사

네이버 블로그 < 임기영>

http://blog.naver.com/dlpul1010/80166567879

[출처] 석탑|작성자 임기영

 

 

 

경주 남산 칠불마애석불 보물 표지석

 

ㅡ 칠불암 불상군은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 200호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석불'로 지정되었다가

2009년 9월 2일 '국보 제312호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으로 명칭을 바꾸어 승격,변경되었다

 

 

 

 

 

마애칠불 위 절벽 꼭대기 소나무가 서 있는 바위 남면

신선암 마애보살 반가상새겨져 있음.

 

ㅡ 마애삼존불 중 우협시 관세음보살, 본존불 석가여래상.

사방불 중 측면으로 보이는 남면 보생불, 정면인 동면 약사여래불상(왼손에 약함 藥函)

 

 

 

 

 

마애삼존불 중  좌협시 다라보살상

 

ㅡ 관세음보살 에서 나왔다는 보살.

청백색 아름다운 여자 모양 하고 있으며,

() 양손 합장하고,

머리에는 보관() 썼다.

넓은 으로 중생 돌아본다고 한다.

 

ㅡ 다음사전 자료 ......

타라

다른 표기 언어 Tara , 多羅

 

다양한 형상으로 묘사되며 네팔·티베트·몽골에서 널리 숭배하는 여성 보살.
(티) Sgrol-ma. 다라보살이라고도 함.

 

관세음보살의 여성 배우자이다.

민간 전설에 따르면 이 보살은 관세음보살의 눈물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관세음보살의 눈물이 땅에 떨어져 연못을 이루고,

그 연못에서 연꽃이 한 송이 피어났는데

그 연꽃 속에서 태어난 것이 타라였다고 한다.

 

관세음보살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피안(彼岸)의 세계로 건너가도록"

도와주는 자비와 구원의 보살이다.

이 보살은 깨달음을 향한 정신적 여행의 수호자인 동시에 해로와 육로 여행의 수호자이다.

 

ㅡ 브리태니카 백과사전 자료 ....

 

 

 

 

사방불 중 동면 약사여래불상(왼손에 약함 藥函)

 

 

 

칠불암 마애삼존불

ㅡ 좌로부터 관세음보살, 본존불 석가여래, 다라보살상

다라보살상은 다른 자료에서는 대세지보살상이라 설명하기도 한다.

 

관세음보살이 오른손에 드신 정병(淨甁)은

뜨거운 물을 담아 차를 우리는 다병(茶甁)으로도 쓰였다.

 

 

정병(淨甁)
 【범】 kukā 군지(軍遲)ㆍ군치가(捃稚迦)라 음역. 손씻는 물이 담긴 병.

여기에는 정병과 촉병(觸甁)이 있는데 정병의 물로는 깨끗한 손을 씻고,

촉병의 물로는 더러운 손을 씻음.

또 옹기로 만든 것은 정병, 쇠로 만든 것은 촉병으로 쓴다고도 함.

 

ㅡ 동국역경원 - 불교용어사전

 

 

 

***** 참고 자료 ***** 

 

정병(淨甁)부처님을 모시는 불단 위에 놓인 공양구 중의 하나입니다.

공양구들은 일반적으로 촛대와 향을 피우는 '향로',

 음식을 담는 '발우'와 차를 담는 '다기',  

그리고 맑은 물을 담는 '정병'과 꽃을 장식한 '화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대체로 아래사진 처럼 불단 위에 놓이게 되며 각 부위의 명칭은 우리말과 한자어가 함께 사용되고 있습니다.

  

 

 

 

  

 

왼쪽부터 잔과 잔받침(盞托), 정병, 향완 (입이 크게 벌어지고 나팔모양의 받침대를 갖춘 향로),

향로 , 촛대 입니다.  

모두 고려시대의 유물이고 촛대는 보은 용곡리에서 나머지는 청주 사직동(사뇌사)에서 출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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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 영원을 담다 展 & 거장의 귀환 展"  新 나라 님의 글 중에서 인용 ......

 

 

 

 ***** 칠불암의 사방불 존명에 대하여 잘 설명한 다른 글이 있어서 참고로 싣는다.

 

    AD 1세기경 대승불교가 발생하면서 한 시대에 한 명의 부처만 존재한다는

기존 개념이 동서남북 사방은 물론 6방, 8방에도 존재하고

과거는 물론 현재와 미래에도 부처가 존재한다는 개념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시간과 공간을 망라하여 모든 세계에 존재하는 부처들을

시방삼세제불(十方三世諸佛)이라고 하며 특히 밀교(密敎) 계통에서 발전하였다.

사방불은 소의(所依)경전이나 종파에 따라 그 명칭이 달라지기 때문에 매우 복잡하다.

금광명경(金光明經) 의하면 동방 아촉불(阿閦佛), 서방 무량수불(無量壽佛),

남방 보상불(寶相佛), 북방 미묘성불(微妙聲佛)이 각각 배치되나,

공작왕주경(孔雀王呪經)이 약사신앙과 함께 유행하면서 동방에 약사불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사방불 사상이 더욱 발전한 밀교의 경전인 금강계의 금강정경(金剛頂經)에는

동방 아촉불, 서방 아미타불, 남방 보생불(寶生佛), 북방 불공성취불(不空成就佛)로 구성되어 있다.

 

반면에 대일경(大日經)을 근거로 한 태장계에는

동방에 보당불(寶幢佛), 서방 무량수불, 남방 개부화왕불(開敷華王佛), 북방 천고음불(天鼓音佛)로 되어 있다.

사방불의 존명이 이와 같이 모두 다르나 서방의 아미타불만 항상 일정했음알 수 있다.

 

8세기 이후에는 약사신앙의 발달로 사방불이 약사불(동)· 미륵불(남)·

아미타불(서)· 석가모니불(북)로 재편되었고 중앙에는 비로자나불이 자리 잡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우리나라의 사방불은 중앙의 비로자나불까지 합하여 오방불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단, 방위개념에서 중앙은 상징적 의미만 지니고

비로자나불은 진리 그 자체를 상징하는 부처로 형상이 없으므로 사방불로 보아도 무리는 없다.

 

실제 조형에서 나타나고 있는 사방불은 반드시 경전과 일치하지 않는 예가 많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사방불은 이곳 남산 칠불암 마애석불 이외에도 굴불사지 석불상,

문경 사불산의 사방불, 영주 사면석불, 충남 예산군 사면석불 등이 있다.

  

 

[출처] 3 사방불(四方佛)|작성자 정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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