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역사 바꾼 게르만족 대이동은 한민족과 뿌리가 같은 흉노족 작품

2015. 5. 4. 16:04우리 이웃의 역사

 

 

 

 

 

김석동의 한민족 성장DNA 추적 ⑦⑧... 유럽역사 바꾼 게르만족 대이동은 한민족과 뿌리가 같은 흉노족 작품..

 

독일 ZDF 방송 "게르만족 대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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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우 2014.07.26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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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럽역사 바꾼 게르만족 대이동은 한민족과 뿌리가 같은 흉노족 작품

     

  •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
    E-mail : seyfert213@naver.com
    경제 정책을 군사 작전에 비유할 정도로 강력한 추진력과 리더십으..
입력 : 2014.01.27 13:50 | 수정 : 2014.02.26 15:29

 

 

1.최초의 스텝제국 흉노, 세계사의 전면에 등장

   흉노는 BC 318년부터 역사서에 등장 한다. BC 4세기 후반 몽골고원은 흉노족, 동북지역(만주)은 동호족이 각각 통일했다. 그래서 전국시대에 흉노를 호(胡), 그 동쪽 민족을 동호(東胡)라고 불렀다. 흉노 기마군단의 등장은 보병을 주력으로 하는 정주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말의 기동력, 활의 파괴력, 고도의 금속제 무기, 광활한 초원의 정보망 등으로 무장한 전투력은 공포 그 자체였다. 특히 기마군단의 기동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로마군은 하루 20~30km를 진군했지만, 몽골군은 60~100km 정도로 비교 자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군대의 힘을 역학 공식인 ‘크기×속도’(f=m×a)를 빌어 가늠해보면 기마군단의 전투력이 얼마나 위협적이었는지를 쉽게 상상해 볼 수 있다.

   BC 221년 진시황의 중국통일 무렵 두만의 지휘 하에 부족을 통합한 흉노는 진을 위협하는 존재로 급부상했다. 이에 놀란 진시황은 몽염에게 10만 군사를 주어 흉노에 뺏긴 땅을 되찾고 만리장성을 쌓았다. 만리장성은 흉노와 접한 진, 조, 연나라 등이 쌓았던 기존의 성곽을 기반으로 하였는데, 이는 기마군단에 대한 그들의 공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후 장성을 사이에 두고 북방민족과의 대결이 지속되는 것이 중국역사다. 흉노는 BC 176년 월지를 정벌하고 북아시아를 완전 제패한 뒤 당시 최대강국 한나라를 침탈했다. 한무제(BC 141~BC 87)는 월지와 연합하여 흉노에 맞섰지만 기마군단의 위력 앞에서는 역부족이었다. 한과의 전쟁 중에 흉노는 ‘질지’의 서흉노(BC 56), ‘호한야’의 동흉노(BC 58)로 분열된다. 서흉노는 BC 36년 역사에서 사라지고, 동흉노는 다시 내몽골, 화북지역의 남흉노와 외몽골지역의 북흉노로 갈라졌다(AD 48). 그 후 남흉노는 중국으로 이주·동화하였고, 북흉노는 후한·선비의 공격으로 AD 151년 멸망하면서 잔존세력은 서쪽으로 이동했다.

   이렇게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던 흉노는 3백~4백년 후인 4세기경 훈족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타나 이번에는 공포의 존재로 로마인들에게 각인된다. 훈족의 왕 아틸라는 동로마·서로마·갈리아·이탈리아를 차례로 침공하여 거대국가를 건설했다. 이것이 동고트·서고트 등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촉발, 결국 서로마제국 멸망을 초래하는 등 세계사를 뒤흔들었다. 오늘날 유럽의 민족과 국가의 이동 및 형성에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아틸라는 453년 게르만 여인 일디코와 결혼 첫날밤 사망했고, 이후 훈족은 급격히 등장했다가 갑자기 퇴장하는 ‘초원의 방식’으로 역사에서 사라졌다.

 


2.흉노를 보는 극과 극의 다양한 인식

   중국은 사기·한서·전국책 등에서 흉노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북쪽 오랑캐로 잔인하고 두렵고 대적하기 어려운 공포의 집단으로 보았다. 진시황, 한무제 등 국력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도 흉노 침공을 제대로 막지 못했다. 그들은 기마군단의 전투력을 무서워했고 대응전술을 찾지 못했다. 흉노가 타는 말들을 얻는 것이 꿈이었던 한무제가 대군을 동원하여 ‘대원’을 공격하고 한혈마(붉은땀을 흘리는 말) 수십필을 얻고는 크게 만족했을 정도다. 또 만리장성이라는 대역사를 통해 이들을 막아보려 했으나 바람같은 기병의 진군을 약간 더디게 하는 효과밖에 없었다. 그래서일까? 지금의 중국은 고대의 흉노·선비·여진·몽골·거란 등 북방민족도 중화민족의 일부라고 하면서 과거의 ‘한족중심주의’를 포기하고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으로 바꿨다. 역사공정의 출발점이 바로 여기다.

   터키는 초․중등 역사교과서에서 그들은 몽골고원에서 유래한 튀르크족이며, 튀르크의 최초 국가는 흉노이고, 그 영역은 오늘날 만주·몽골·남시베리아·북중국·위구르·티벳·중앙아시아 지역에까지 이른다고 밝히고 있다. 또 동쪽의 흉노는 대흉노제국, 서쪽의 훈족국가는 유럽훈제국이라 하고 있는데, 중국의 주서(周書) 돌궐열전에도 “돌궐은 대개 흉노의 별종이다”라고 하여 흉노와 튀르크의 친연관계를 부정하지 않는다.
터키 역사교과서의 흉노제국과 훈제국
                                    터키 역사교과서의 흉노제국과 훈제국
   몽골에서는 중등 교과서에서 흉노·선비·유연 뿐만 아니라 튀르크·위구르·키르키스·거란까지도 몽골 영토상의 고대국가로 규정하고 있다. 특히 흉노는 유목민이 몽골에 세운 최초의 국가로 정치규범, 경제생활, 문화면에서 기마유목국가의 전형이 되는 강력한 대제국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흉노는 중앙아시아, 서북인도, 동유럽까지 진출했는데, 이중 유럽에 세운 나라가 훈제국이라고 한다.

   유럽에서는 흉노의 후예 훈족의 습격을 받아서인지 흉노를 극도의 공포와 증오의 대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역사가 A․마르켈리누스가 “훈족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야만적이다… 경장으로 말을 타고 민첩하게 산개하여 질주하면서 무시무시한 살육을 자행한다… 고정된 주거 없이 수레를 타고 피난민처럼 방랑한다… 그들은 누구도 자신이 어떤 출생인지 모른다”고 할 정도다. 유럽인들도 한(漢)대의 사가들이 흉노에게 느꼈던 공포와 경외심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훈족의 예기치 않은 유럽 침공이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과 이에 따른 유럽사의 대변혁을 초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의 경우 국사 교과서에 흉노 서술이 없다. ‘한국사신론(이기백)’에는 ‘이방족속 흉노’라는 표현이 단 한군데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는 ‘흉노는 옛 몽고 땅에서 목축을 하던 인종으로서 진한의 속주가 되었다가 진한(고조선)이 쇠하자 자립하여, 중국 전국시대 말에 이르러 강성해져서 자주 중국을 쳤다…흉노는 우리에게서 분리된 동족’이라고 한다. 위서 논쟁이 있지만, ‘단군세기’나 ‘민족정사’에는 3세 가륵단군 시대에 지방장관 ‘삭정’을 유배에서 풀어 약수지방에 봉한 것이 흉노의 시조라 한다. 그리고 흉노인들이 한반도에 진출하여 국가를 건설했다는 일부학계의 연구도 있다. 김씨의 가야가 그 예다.
왼쪽부터 흉노의 옥기, 토기, 일월 금박 장식.
                         왼쪽부터 흉노의 옥기, 토기, 일월 금박 장식.
   흉노는 유목민의 특성상 역사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따라서 기록문화에 친숙한 정주민의 기록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중국의 흉노 기록은 기본적으로 적대관계에서 남긴 것이므로 서술이 부정적이고 편견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다. 흉노의 문자 기록은 없으나 수많은 고고학 유물과 유적이 남아있고 또 발굴됨에 따라 흉노가 세계사에 미친 영향은 점차 더 많이 밝혀질 것이다. 이와 함께 유목민에 대한 기록도 튀르크어·위구르어·몽골어·만주어·티베트어 등으로 다수 발견되고 있어서, 앞으로 한민족을 포함한 기마민족의 활약상과 친연관계가 더욱더 밝혀질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면 우리 민족의 형성에 흉노·선비 등 북방계 민족의 비중이 크다는 논의도 검증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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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ZDF 방송 "게르만족 대이동 시킨 훈족의 원류는 한국인일 가능성"

입력 : 2014.02.12 05:30 | 수정 : 2014.02.12 05:53

 

1. 사라진 흉노, 훈제국으로 부활해 유럽 중심부 강타

   파미르 고원을 중심으로 한 중앙아시아지역을 투르키스탄이라 한다. 이는 튀르크인의 땅이란 뜻이며 동·서로 나누어진다. 몽골고원에서 최초의 스텝제국을 건설한 기마군단 흉노는 동투르키스탄을 정복하고 기원전 1세기부터 실크로드를 장악해 강대국이 되었다. 한나라와 쟁패하던 흉노는 그러나 몇차례 내분으로 약화되면서 실크로드의 지배권을 중국에 빼앗기고 동·서 흉노로 분열된다. 그 후 ‘질지’가 이끄는 서흉노는 몽골 지역으로부터 서투르키스탄 지역으로 이동했다. 아랄해와 발하쉬 북부초원까지 진군했던 서흉노는 그러나 BC 36년 질지가 한나라의 진탕에 잡혀죽자 갑자기 역사기록에서 사라졌다. 그로부터 약 4백년이 지난 4세기말(370~375경) 흉노의 후예들이 이번에는 로마인들 앞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아랄해 북부 초원에 거주하던 흉노 후예들은 374년경 발라미르의 지휘 하에 유럽을 향하여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세대인 그 옛날 조상들과 매우 흡사한 방식, 즉 말·나무안장·등자·복합곡궁·삼각철화살 등으로 중무장한 기마군단의 모습으로 유럽인들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들의 놀라운 기동성과 뛰어난 기마전술은 당시 유럽인들에게는 ‘신의 징벌’이라 할 정도로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볼가강과 돈강을 건너 알란인을 격파하고, 동고트를 붕괴시켰으며, 드네프르를 건너 서고트를 패퇴시켰다. 쫓긴 고트족은 훈족을 피해 다뉴브를 건너 로마영토로 들어가 마침내 서로마를 파멸에 이르게 하는데, 이것이 ‘게르만민족 대이동’ 시작이다. 그래서인지 당시 역사가들은 훈족에 대한 기록을 무엇보다 극도의 공포와 증오로 생생하게 가득 채웠다. 6세기에 건설된 베니스는 훈족의 침입에 놀란 피난민들이 말을 막기 위해 물위에 건설한 수상 도시다.

   이후 400년경 다시 발라미르의 아들 울딘이 동유럽 평원으로 공격해 들어가자 놀란 고트족이 헝가리, 이탈리아 반도로 이동하면서 거대한 민족이동을 촉발시켰다. 434년 아틸라가 훈족의 지배권을 확립한 후 그 세력은 더욱 막강해져 동로마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훈족과 굴욕적인 평화조약을 체결하지 않을 수 없었고, 서로마제국도 아틸라의 영향권 안에 들게 되었다. 436년 2만의 부르군드군이 아틸라군에 전멸당한 전쟁이 영웅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의 주제다. 그만큼 훈족은 유럽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아틸라는 441년 동로마제국에 전쟁을 선포하고 다뉴브강을 건너 주요 도시를 초토화하고 448년 동로마제국을 복속시켰다. 451년에는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를 공격하여 메츠를 점령하고 오를레앙을 포위하는 등 공포의 진군을 계속했다. 452년 이탈리아로 쳐들어가자 서로마황제는 도주하고 로마대주교 레오는 화해를 간곡히 요청해 서로마의 복속으로 보고 본거지 판노니아(헝가리)로 돌아왔다. 이듬해 453년 유럽사를 바꾸는 사건이 일어났다. 아틸라가 게르만 제후의 딸 일디코와 결혼한 첫날밤 죽었다. 의문의 사망이었다. 아틸라가 죽자 훈제국은 분열을 일으켜 454년 판노니아 전투에서 패배하고 러시아 초원으로 후퇴했다. 468년 훈은 전력을 가다듬어 동로마를 공격하지만 실패하고 잔존세력은 흑해 북부로 밀려나 세력을 잃게 된다.
아틸라의 최대판도(434~453년)
                                    아틸라의 최대판도(434~453년)

 

 

2. 훈제국 흥망성쇠의 열쇠는?


   훈제국은 면적이 370만㎢를 넘는 유럽최강 국가였으나 아틸라 사후 급격히 혼란에 빠지고 분열하면서 불과 십수년만에 붕괴하면서 역사에서 사라졌다.

① 먼저 훈제국의 세계사적 위치를 살펴보자.

   유럽인들에게 훈족은 혜성과 같이 세계사에 등장하여 질풍노도를 일으키다 바람같이 사라져버린 흉폭한 야만세력으로 여겨지고 있다. 훈족은 기록을 남기지 않았고 침략 당한 쪽에서만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훈제국은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배경 없이 역사무대에 등장한 신기루와 같은 국가는 결코 아니다. 그들은 흉노의 후예(다른 학설도 있음)로 무장·편제·전술 등에서 몽골초원 기마군단의 형태를 그대로 이어 받았다. 놀라운 기동력과 가공할 전투력은 과거 스키타이, 흉노에 비해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유럽 중심부에서 전쟁을 벌인 최초의 아시아 기마유목군단으로, 그들의 유럽 침입은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과 이에 따른 유럽사의 대변혁을 초래하는 등 세계사에 엄청난 큰 영향을 미쳤다.

   몽골 교과서는 흉노제국을 세운 흉노인들이 유럽에서 아틸라의 훈제국(AD 434~453)을 세워 드네프르강에서 다뉴브강까지의 광활한 영토를 차지하였으며,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공납을 받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아틸라는 나아가 서로마제국이 멸망하는데 영향을 끼쳐 수많은 국가가 로마제국에서 해방되어 독립국으로 발전하는데 기여했다고 한다.

 


② 그러면 훈제국의 급격한 성장배경은 무엇인가.

   아랄초원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흉노 잔존세력은 발라미르·아틸라로 이어지는 걸출한 지도자를 만난다. 초원제국의 역사를 보면 흉노(두만·묵특), 돌궐(부민카간), 선비(단석괴), 유연(사륜카간), 거란(야율아보기), 몽골(징기스칸), 티무르제국(티무르), 청(누르하치) 등에서 보듯이 뛰어난 지도자가 나타날 때 거대제국을 건설했다. 아틸라는 검소하면서 공정한데다 담대함과 지략에서도 뛰어나 기마군단 최고 지도자의 하나로 꼽힌다. 다음, 훈제국은 스스로의 강점을 최대한 발휘․활용했다. 유목민 기마군단으로부터 이어받은 기동성과 전투력·전술을 통해 단시간 내에 최강의 군사력을 갖추었다. 여기에 포용력도 한 몫을 했다. 훈제국은 훈족이 중심이었으나 우랄·라인강 사이의 사르마트·알란·오스트로고트·게피대 등 여러 민족도 유연하게 통합하여 세력을 급속히 키울 수 있었다.
기마인물형토기, 국보 제91호
                                       기마인물형토기, 국보 제91호

 ③그런데 훈제국은 왜 역사에서 그렇게 갑자기 사라졌을까.

   먼저 아틸라의 영도 아래 통합되었던 민족들이 아틸라 사후 반란을 일으켜 제국의 기초가 뿌리째 흔들린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한마디로 훈제국은 전성기와 달리 이민족과의 협력·교류·연대를 유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훈 내부적으로도 형제들 간의 세력분열과 다툼이 겹쳐 국력이 급속히 약화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 결과 훈제국은 초원제국의 방식으로 급속하게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된 것이다.

   흉노와 우리와의 관계는 흉노-훈과 연결고리를 두면 추정해 볼 수 있다. 훈족의 몽골반점, 복합곡궁, 편두·순장 등 관습, 이동경로의 많은 유물 등에 대한 해석을 바탕으로 한민족과 친연관계를 밝히는 연구들이 있다. 훈족이 파괴한 이탈리아 북부 아퀼레이아시의 성당에 그려진 프레스코 벽화의 훈족 기병이 활 쏘는 모습은 고구려 무용총벽화와 그야말로 흡사하다. 독일 ZDF TV는 다큐멘터리(1994)에서 ‘훈족의 원류가 아시아 최동단의 한국인일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좀 더 시야를 넓게 열고 우리를 돌아보았으면 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현대경제사에서 불과 50년 남짓 만에 세계무대의 중심에 서게 된 대한민국. 세계 GDP가 7배 증가하는 사이 35배의 GDP 성장을 이룬 괴력의 국가 대한민국.

 

   그런 대한민국이 대제국을 건설했다 갑자기 사라져버린 과거 초원제국의 역사와 다른 역사를 써가려면 과연 어떤 에너지가 필요한 것일까?

 

 


 

독일 ZDF 방송 "게르만족 대이동 시킨 훈족의 원류는 한국인일 가능성"

 

   ㅡ 다음 블로그 <치우천황> 찌우 님의 글 중에서 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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