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는 BC 318년부터 역사서에 등장 한다. BC 4세기 후반 몽골고원은 흉노족, 동북지역(만주)은 동호족이 각각 통일했다. 그래서 전국시대에 흉노를 호(胡), 그 동쪽 민족을 동호(東胡)라고 불렀다. 흉노 기마군단의 등장은 보병을 주력으로 하는 정주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말의 기동력, 활의 파괴력, 고도의 금속제 무기, 광활한 초원의 정보망 등으로 무장한 전투력은 공포 그 자체였다. 특히 기마군단의 기동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로마군은 하루 20~30km를 진군했지만, 몽골군은 60~100km 정도로 비교 자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군대의 힘을 역학 공식인 ‘크기×속도’(f=m×a)를 빌어 가늠해보면 기마군단의 전투력이 얼마나 위협적이었는지를 쉽게 상상해 볼 수 있다.
BC 221년 진시황의 중국통일 무렵 두만의 지휘 하에 부족을 통합한 흉노는 진을 위협하는 존재로 급부상했다. 이에 놀란 진시황은 몽염에게 10만 군사를 주어 흉노에 뺏긴 땅을 되찾고 만리장성을 쌓았다. 만리장성은 흉노와 접한 진, 조, 연나라 등이 쌓았던 기존의 성곽을 기반으로 하였는데, 이는 기마군단에 대한 그들의 공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후 장성을 사이에 두고 북방민족과의 대결이 지속되는 것이 중국역사다. 흉노는 BC 176년 월지를 정벌하고 북아시아를 완전 제패한 뒤 당시 최대강국 한나라를 침탈했다. 한무제(BC 141~BC 87)는 월지와 연합하여 흉노에 맞섰지만 기마군단의 위력 앞에서는 역부족이었다. 한과의 전쟁 중에 흉노는 ‘질지’의 서흉노(BC 56), ‘호한야’의 동흉노(BC 58)로 분열된다. 서흉노는 BC 36년 역사에서 사라지고, 동흉노는 다시 내몽골, 화북지역의 남흉노와 외몽골지역의 북흉노로 갈라졌다(AD 48). 그 후 남흉노는 중국으로 이주·동화하였고, 북흉노는 후한·선비의 공격으로 AD 151년 멸망하면서 잔존세력은 서쪽으로 이동했다.
이렇게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던 흉노는 3백~4백년 후인 4세기경 훈족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타나 이번에는 공포의 존재로 로마인들에게 각인된다. 훈족의 왕 아틸라는 동로마·서로마·갈리아·이탈리아를 차례로 침공하여 거대국가를 건설했다. 이것이 동고트·서고트 등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촉발, 결국 서로마제국 멸망을 초래하는 등 세계사를 뒤흔들었다. 오늘날 유럽의 민족과 국가의 이동 및 형성에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아틸라는 453년 게르만 여인 일디코와 결혼 첫날밤 사망했고, 이후 훈족은 급격히 등장했다가 갑자기 퇴장하는 ‘초원의 방식’으로 역사에서 사라졌다.
2.흉노를 보는 극과 극의 다양한 인식
중국은 사기·한서·전국책 등에서 흉노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북쪽 오랑캐로 잔인하고 두렵고 대적하기 어려운 공포의 집단으로 보았다. 진시황, 한무제 등 국력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도 흉노 침공을 제대로 막지 못했다. 그들은 기마군단의 전투력을 무서워했고 대응전술을 찾지 못했다. 흉노가 타는 말들을 얻는 것이 꿈이었던 한무제가 대군을 동원하여 ‘대원’을 공격하고 한혈마(붉은땀을 흘리는 말) 수십필을 얻고는 크게 만족했을 정도다. 또 만리장성이라는 대역사를 통해 이들을 막아보려 했으나 바람같은 기병의 진군을 약간 더디게 하는 효과밖에 없었다. 그래서일까? 지금의 중국은 고대의 흉노·선비·여진·몽골·거란 등 북방민족도 중화민족의 일부라고 하면서 과거의 ‘한족중심주의’를 포기하고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으로 바꿨다. 역사공정의 출발점이 바로 여기다.
터키는 초․중등 역사교과서에서 그들은 몽골고원에서 유래한 튀르크족이며, 튀르크의 최초 국가는 흉노이고, 그 영역은 오늘날 만주·몽골·남시베리아·북중국·위구르·티벳·중앙아시아 지역에까지 이른다고 밝히고 있다. 또 동쪽의 흉노는 대흉노제국, 서쪽의 훈족국가는 유럽훈제국이라 하고 있는데, 중국의 주서(周書) 돌궐열전에도 “돌궐은 대개 흉노의 별종이다”라고 하여 흉노와 튀르크의 친연관계를 부정하지 않는다.
- 터키 역사교과서의 흉노제국과 훈제국
유럽에서는 흉노의 후예 훈족의 습격을 받아서인지 흉노를 극도의 공포와 증오의 대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역사가 A․마르켈리누스가 “훈족은 비정상적일 정도로 야만적이다… 경장으로 말을 타고 민첩하게 산개하여 질주하면서 무시무시한 살육을 자행한다… 고정된 주거 없이 수레를 타고 피난민처럼 방랑한다… 그들은 누구도 자신이 어떤 출생인지 모른다”고 할 정도다. 유럽인들도 한(漢)대의 사가들이 흉노에게 느꼈던 공포와 경외심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훈족의 예기치 않은 유럽 침공이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과 이에 따른 유럽사의 대변혁을 초래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국의 경우 국사 교과서에 흉노 서술이 없다. ‘한국사신론(이기백)’에는 ‘이방족속 흉노’라는 표현이 단 한군데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는 ‘흉노는 옛 몽고 땅에서 목축을 하던 인종으로서 진한의 속주가 되었다가 진한(고조선)이 쇠하자 자립하여, 중국 전국시대 말에 이르러 강성해져서 자주 중국을 쳤다…흉노는 우리에게서 분리된 동족’이라고 한다. 위서 논쟁이 있지만, ‘단군세기’나 ‘민족정사’에는 3세 가륵단군 시대에 지방장관 ‘삭정’을 유배에서 풀어 약수지방에 봉한 것이 흉노의 시조라 한다. 그리고 흉노인들이 한반도에 진출하여 국가를 건설했다는 일부학계의 연구도 있다. 김씨의 가야가 그 예다.
- 왼쪽부터 흉노의 옥기, 토기, 일월 금박 장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