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 사기 권29 하거서(河渠書)

2015. 3. 29. 01:57우리 이웃의 역사

 

      

사기/권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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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서 제28
사기
권29 하거서(河渠書) 제29
저자: 사마천(司馬遷)

평준서 제30

하거서(河渠書)편집

  「하서(夏書)」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우(禹)는 13년 동안이나 홍수를 다스리기에 열중하느라고, 자기 집문 앞을 지나면서도 안으로 들어가지를 못했다. 육로에서는 수레를 타고 다녔고, 수로에서는 배를 타고 다녔으며, 진흙길에서는 취(毳)를 타고 다녔고, 산길에서는 교자를 타고 다녔다. 이리하여 9주(九州)의 구획을 정하고, 산세에 따라 하천을 파서 통하게 하고, 토질에 따라 공물의 다소를 정했다. 그리고 9주로 통하는 도로를 건설하고, 9주에 있는 모든 물길에 제방을 쌓고, 9주에 있는 산들을 측량했다.”

 

   그러나 황하는 범람해 수재를 몰고 왔고, 중국에 입힌 피해가 대단히 심했다. 그래서 우는 황하를 다스리는 일을 가장 큰 임무로 알고 황하의 물줄기를 이끌어 적석산(積石山)에서 용문산(龍門山)을 거쳐 남쪽으로 화음(華陰)에 이르게 하고, 거기서 동쪽으로 지주산(砥柱山)으로 내려와 맹진(孟津)과 낙예(雒汭)에 이르렀다가 대비산(大邳山)에까지 이르게 했다.

 

   이때에 우는 황하가 높은 지대에서 흘러와서 수세가 급하고 세기 때문에 평지로 흘러들기에는 쉽지 않아서 여러 차례 범람한 것이라고 여기고, 이에 대비산 일대에서 황하의 물줄기를 두 방향으로 나누어서 수세를 약화시켜 흐르게 했다. 그래서 북쪽으로는 다시 높은 지대로 흐르게 해 강수(降水)를 지나 대륙택(大陸澤)에 이르게 하고, 거기서 아홉 개의 강줄기로 나누어졌다가 다시 하나로 합쳐져 역하(逆河)가 되어 발해(勃海)로 흘러들어가게 했다. 이리하여 9주의 하천들이 모두 소통되고 9주의 수택(水澤)에 제방이 쌓여져 온 중국이 편안하게 되었고, 그의 공적은 하(夏), 은(殷), 주(周) 3대까지에 이어졌다.

 

   우가 황하의 물을 다스린 이후로 사람들은 형양(滎陽)에서 황하의 물을 동남쪽으로 이끌어 홍구(鴻溝)를 만들어서 송(宋), 정(鄭), 진(陳), 채(蔡), 조(曹), 위(衛) 등의 제후국과 통하게 하고, 제(齊), 여(汝), 회(淮), 사(泗) 등의 강물을 합류시켜 놓았다. 또 초(楚)에서는 서쪽으로 한수(漢水)와 운몽(雲夢)의 들판을 개천으로 연결시키고, 동쪽으로 장강(長江)과 회수(淮水) 사이를 운하로 관통시켰다.

   오(吳)에서는 3강(三江)과 5호(五湖)를 개천으로 연결했고, 제(齊)에서는 치수(淄水)와 제수(濟水)를 연결했으며, 촉(蜀)에서는 군수 이빙(李氷)이 이대(離碓)를 개착(開鑿)해 말수(沫水)의 수해로부터 벗어나게 했으며, 따로 두 강을 성도(成都)에다 뚫었다. 이렇게 뚫은 개천에는 모두 배들이 통행할 수 있었고, 여유가 있으면 관개(灌漑)로 쓰였기 때문에, 백성들은 그 이익을 만끽했다. 그리고 이 개천들이 지나가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도처에서 그 물을 끌어와 농토에 관개하는 도랑을 증가시키니, 그 수는 한없이 불어나 헤아리지도 못할 만큼 많아졌다.

 

   서문표(西門豹)는 장수(漳水)의 물을 끌어와서 업(鄴) 지방의 농토에 관개함으로써 위(魏)의 하내(河內) 지역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한(韓)나라는 진(秦)나라가 각종 사업을 일으키기를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진나라)로 하여금 일에 지쳐서 동쪽에 위치한 한나라를 침공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수리(水利) 전문가인 정국(鄭國)을 진나라에 간첩으로 보내어 유세하게 했다. 유세 내용은 ‘진나라가 경수(涇水)를 뚫어 중산(中山)의 서쪽으로부터 호구(瓠口)에 이르기까지 개천을 만들어, 북쪽의 여러 산들을 따라 동쪽으로 낙하(洛河)로 흘러가도록 3백여 리를 흐르게 하고 이로써 농토에 관개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그 유세가 수용되어 공사가 반쯤 진척되었을 무렵 정국의 간첩 행위가 발각되어, 진나라에서는 정국을 잡아서 죽이려고 했다. 이때 정국은 “처음에는 신이 간첩으로서 그런 공사를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개천이 만들어진다는 것은 역시 진나라에 이로운 일입니다.”라고 말해, 진나라도 이 말에 찬동해 결국은 그로 하여금 공사를 끝마치도록 했다. 개천이 완성되자 진흙이 섞여 있는 경수의 물을 끌어와서 염분이 섞인 관중(關中) 지방의 4만여 경(頃)에 달하는 농토에 관개해, 마침내 매 1무(畝)마다 1종(鍾)의 수확을 거뒀다. 이리하여 관중 평야가 비옥한 농토로 변해서 흉년을 모르고 지냈으며, 진나라는 이로 말미암아 부강해졌고, 마침내 여러 제후국들을 병탄(倂呑)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개천에 ‘정국거(鄭國渠)’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漢)나라가 건국된 지 39년이 되던 효문제(孝文帝) 때, 황하가 산조(酸棗)에서 터져 동쪽의 금제(金堤)가 무너졌다. 이때 동군(東郡)에서는 인부들을 대량으로 징발해서 금제를 틀어막았다.

그 후 40여 년이 지난 뒤 지금의 천자(天子) 원광(元光) 연간에 황하가 호자(瓠子)에서 터져 동남쪽으로 거야(鉅野)로 흘러들어서 회수(淮水)와 사수(泗水)로 통했다. 이때 천자는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로 하여금 인부들을 징집해서 그곳을 틀어막게 했지만 그러나 곧바로 다시 터지고 말았다.

 

   이때 무안후(武安侯) 전분(田蚡)이 승상 자리에 있었는데, 그의 봉읍(奉邑)은 유현(鄃縣)이었다. 유현은 황하 북쪽에 있었기 때문에 황하의 제방이 남쪽으로 터져서 범람했지만, 수재를 당하지 않고 언제나 풍년을 누렸다. 그래서 전분은 천자에게 아뢰기를 “강하(江河)의 제방이 터지는 것은 모두 하늘의 뜻으로 쉽사리 사람의 힘으로 강제로 틀어막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강제로 틀어막는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하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했고, 망기(望氣) 점술가도 역시 같은 의견이었다. 이리하여 천자는 오랫동안 제방을 다시 쌓는 공사를 하지 않았다.

 

   이때 정당시(鄭當時)는 대농(大農)으로서 천자에게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지난날 관동(關東)에서 위수(渭水)를 따라 수로로 양곡을 장안(長安)까지 운반하는 데에 6개월이나 걸렸고, 수로 9백여 리를 배로 운반하는 동안 때때로 난관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장안으로부터 하천을 뚫어 위수의 물을 끌어들여서 남산(南山)을 따라 동쪽으로 흘러가게 한다면, 황하까지 3백여 리밖에 되지 않고 물길이 곧아 운송하기에 쉬우므로, 양곡을 운반하는 일은 석 달이면 끝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천이 통과하는 곳에는 백성들의 농토가 1만여 경(頃)이나 있으니, 또한 여기에 농수를 공급할 수도 있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배로 운반하는 시간을 단축시킬 수도 있고, 인력을 감축시킬 수도 있으며, 관중(關中)의 농토를 더욱더 비옥하게 만들어서 곡식을 더 많이 수확하게 될 것입니다.”

   천자는 이 말에 일리가 있다고 여기고, 제나라의 수리 전문가인 서백(徐伯)으로 하여금 측량을 해 물길을 확정하고, 수만 명의 인부를 징발해 배가 다니게 될 하천을 뚫게 해 3년 만에 개통시켰다. 개통하자 그 수로를 이용해 배로 운반하니 참으로 편리했다. 그 후 배로 운반하는 분량은 점점 늘어났고, 개천 근방의 백성들은 농토에 관개하기가 아주 좋았다.

 

 

   그 후 하동(河東)의 태수 파계(番係)가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산동(山東) 지구로부터 서쪽으로 장안까지 수로로 운송되는 양곡은 매년 1백여 만 석인데, 지주산 일대의 험난한 흐름을 지나오려면 양곡의 손실이나 인명의 상망(傷亡)이 매우 많을 뿐만 아니라 낭비 또한 클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하천을 뚫어 분수(汾水)의 물을 끌어다가 피지(皮氏)와 분음(汾陰) 일대로 흘러가게 하고, 한편 또 황하의 물을 끌어다가 분음과 포판(蒲坂) 일대로 흐르게 한다면 대략 5천 경(頃)의 농토가 생긴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이 5천경의 농토는 원래 모두 하변(河邊)의 황무지로서 백성들이 거기에서 방목을 할 뿐이었습니다만, 이제 거기에 관개해 경작을 하게 되면 어림잡아 2백만 석 이상의 곡식을 수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곡식은 위수를 따라 장안으로 운송될 것이니, 그렇게 되면 관중으로부터 곡식이 오는 것과 차이가 없을 것이며, 지주산 동쪽으로부터 다시는 곡식을 배로 운송해올 필요가 없게 될 것입니다.”

 

천자는 이 말에 동의해 수만 명의 인부를 징발해 하천을 파고 농지를 개간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난 뒤 황하의 물길이 바뀌어 파놓은 하천이 제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자 그곳에 농지를 개간한 농민들은 종자마저 거두어들이지 못했다. 이리하여 오랫동안 하동의 하천과 농지는 버려져 있다가 그 뒤 마침 이곳으로 이주해온 월인(越人)들이 있어서 그들에게 주어서 경작하게 함으로써 소부(少府)로 하여금 그들로부터 약간의 조세 수입을 얻게 했다.

 

 

   그 후 어떤 사람이 천자에게 상소해 포야도(褒斜道)와 포수(褒水) 및 야수(斜水)를 잇는 조운(漕運)을 개통시켜야 한다고 했다. 이 사안은 어사대부(御史大夫) 장탕(張湯)에게 내려져 처리하게 했다. 장탕이 사안에 대해 물었더니, 그 사람은 이렇게 설명했다. “촉군(蜀郡)에 이르려면 고도(故道)로 가야 하는데, 고도는 산비탈이 많고 또 멀리 돌아가야 합니다. 지금 만약 포야도를 뚫게 되면 산비탈도 적고 4백리나 가까워집니다. 그리고 포수와 면수(沔水)를 연결하고 또 야수와 위수를 연결해 서로 통하게 하면, 여기에 모두 배를 띄워 수운(水運)이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면 남양(南陽)에서 곡식을 싣고 면수를 거슬러 올라와서 포수로 유입(流入)되고, 포수의 끝에서 야수까지 약 1백여 리는 수레로 바꾸어 운반하며, 그 다음은 야수를 거쳐 위수로 유입됩니다.

이렇게 하면 한중(漢中)의 곡식을 경사(京師)로 직접 운반해올 수도 있고, 산동 지구로부터 면수를 통한 수운도 막힘이 없이 소통되어 지주산 일대를 통과하는 수운에 비해 훨씬 편리하게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포야(褒斜) 유역의 목재나 죽전(竹箭) 따위의 풍부함도 파촉(巴蜀)지방에 비할 만큼 많습니다.”

 

   천자는 이 건의에 동의하고 장탕의 아들 장앙(張卬)을 한중태수(漢中太守)로 임명해 수만 명의 인부를 징발해 5백여 리에 달하는 포야도를 만들게 했다. 이 수로를 만드니 과연 편리하고도 가까웠지만, 물길은 격류인데다가 돌도 많아서 조운은 불가능했다.

그 후 장웅파(莊熊罷)가 진언하기를 “임진(臨晉) 지방의 백성들은 낙수(洛水)를 뚫어 그 물로 중천(重泉) 동쪽의, 예전부터 염분이 많이 포함된 땅 만여 경(頃)에 관개할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실로 그 물만 끌어서 댈 수 있다면 1무(畝)당 10석(石)은 수확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 했다.

이에 만여 명의 인부를 징발해 개천을 뚫어서 징현(徵縣)으로부터 상안산(商顔山) 아래까지 낙수의 물을 끌어들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 개천의 양안(兩岸)이 잘 무너져서 더 이상 파지 못하고 마침내 우물을 파게 되었는데, 그 깊은 것은 40여 장(丈)이나 되었다. 이렇게 하나하나 우물을 파서 그 우물이 땅 밑으로 연결되어 하나의 흐름을 이루게 되었다. 개천은 땅속으로 흘러 상안산을 지나가서 동쪽으로 산 고개로부터 10여 리쯤 되는 곳까지 이르렀다. 우물 개천은 바로 이때부터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개천을 뚫다가 용의 뼈를 발견했기 때문에 이름을 ‘용수거(龍首渠)’라고 붙였다.

 

 

   황하가 호자(瓠子)에서 터진 지 20여 년이 되었지만, 이로 말미암아 농사는 번번이 풍년이 들지 않았고, 양(梁) 및 초(楚) 지방은 더욱더 심했다. 이때 천자는 봉선(封禪)을 거행하고 각지를 순행하면서 명산대천에 제사를 지냈지만, 그 이듬해에는 한발이 들었다. 흙으로 쌓은 제단이 말라서 비가 내리지 않았다. 천자는 이에 급인(汲仁)과 곽창(郭昌)으로 하여금 인부 수만 명을 징발해 호자의 무너진 제방을 다시 쌓아서 물을 막게 했다.

   이때 천자는 이미 만리사(萬里沙) 신사(神祠)에서의 제사를 다 끝내고 곧 돌아와서 친히 황하의 터진 곳에 이르러 백마(白馬)와 옥벽(玉璧)을 황하수에 넣고 난 다음, 여러 신하들에게 명령해 장군 이하는 모두 나무를 운반해와서 터진 황하를 다시 틀어막게 했다. 이때 동군(東郡)에서는 나무를 연료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무가 부족해 이에 기원(淇園)의 대나무를 운반해 내려와서 죽건(竹楗)을 만들었다.

 

   천자가 황하의 터진 곳에 친히 왕림해 물을 막는 공사가 잘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비통하게 여겨, 이에 다음과 같은 시가를 지었다.

호자에서 황하 터지니, 어찌 할꼬 이 일을? 호호탕탕 물바다여, 대부분 다 하수(河水)로 변했구나! 온통 하수로 변했으니, 이 지방이 편안할 수 없구나. 공사는 끝날 날이 없고, 어산(吾山)이 평평해졌구나. 흙 파내어 어산마저 평평해지니, 거야택(鉅野澤) 범람하는구나. 황하의 바른 흐름이 무너져, 옛 흐름에서 이탈했구나. 교룡(蛟龍)은 날뛰며, 멀리 달아났구나. 황하가 옛 흐름으로 돌아오도록, 수신(水神)이여 큰 힘을 내소서! 내 봉선을 행하지 않았으면, 관외(關外) 황하의 범람을 어찌 알았으리? 내 대신 하백(河伯)에게 고해주시오, 어쩌면 그렇게도 어질지 못하느냐고. 한도 없이 범람하게 해,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구나. 설상정(齧桑亭)은 물 위에 뜨고, 회수, 사수는 넘치는구나. 오래도록 황하는 옛 흐름으로 돌아오지 않고, 제방은 무너진 채 그대로구나.

 

   또 한 수는 다음과 같다.

황하수는 상상(湯湯), 급하게도 흐르네. 북쪽으로 가는 물길은 멀어서, 준설해 옛 흐름으로 돌이키기는 어렵도다. 긴 대밧줄을 취해 흙과 돌 나르고, 아름다운 옥을 바쳐 제사를 지내도다. 하백(河伯)은 도와주기로 허락하셨는데, 나무의 공급이 이어지질 않는구나. 나무의 공급이 이어지지 않는 것은, 위인(衛人)들의 죄로다. 베어서 때어버려 산야마저 쓸쓸하니, 아! 터진 하수(河水)는 무엇으로 막을꼬? 대나무를 기원(淇園)에서 내려와, 석주(石柱)를 세우고 죽건을 만들어 채우도다. 선방(宣房)이 막히면, 장차 만복이 찾아오리라.

 

 

   이리하여 마침내 호자에서 황하의 터진 곳에 제방을 쌓아 막고, 그 위에 궁을 지어 이름을 ‘선방궁(宣房宮)’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황하는 북쪽으로 두 강으로 흐르도록 방향이 바뀌어 하우(夏禹)가 다스렸던 황하의 옛 자취로 회복되었고, 양(梁)과 초(楚) 지방도 안녕을 회복해 수재가 없었다.

   이로부터 관리들은 수리에 관한 일을 다투어 진언했다. 그리고 삭방(朔方), 서하(西河), 하서(河西), 주천(酒泉) 지방에서는 다 황하나 계곡에 흐르는 물을 끌어와서 농지에 관개했다. 관중에서는 보거(輔渠)와 영지거(靈軹渠)를 만들어 여러 하천의 물을 끌어왔고, 여남(汝南)과 구강(九江)에서는 회수의 물을 끌어왔으며, 동해(東海)에서는 거정(鉅定)의 물을 끌어왔고, 태산(泰山) 아래에서는 문수(汶水)의 물을 끌어왔는데, 이 모두가 다 하천을 파서 농토에 관개한 것으로 그 범위는 각각 1만여 경(頃)에 달했다. 그밖에 작은 하천이나 또는 산세에 따라 연못을 만들어 물을 끌어온 수효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러나 이상의 모든 하천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곳은 선방(宣房)이었다.

평론편집

   태사공이 말했다.

“나는 남쪽으로는 여산(廬山)에 올라 우(禹)가 소통시킨 구강(九江)을 보았고, 또 회계(會稽)의 태황(太湟)에 이르러 고소산(姑蘇山)에 올라 오호(五胡)를 바라보았다. 동쪽으로는 낙예(洛汭), 대비, 영하(迎河)를 살폈고, 또 회수(淮水), 사수(泗水), 제수(濟水), 탑수(漯水), 낙수(洛水)를 순시했다. 서쪽으로는 촉(蜀)의 민산(岷山)과 이대(離碓)를 보았고, 북쪽으로는 용문(龍門)으로부터 삭방(朔方)에까지 가보았다. 그러고 나서는 물로부터 오는 이익과 피해란 참으로 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천자를 따라 호자(瓠子)로 가서 나무를 나르며 선방(宣房)을 막고, 천자의 “호자시(瓠子詩)”에 감동해 이에 「하거서(河渠書)」를 지었다.”

 

 

    ㅡ 위키백과 자료 중에서 전재 ......